-
-
10대와 통하는 사찰 벽화 이야기 -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읽는 16가지 불교 철학 ㅣ 10대를 위한 책도둑 시리즈 14
강호진 지음, 스튜디오 돌 그림 / 철수와영희 / 2014년 5월
평점 :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73
그림을 읽는 눈
―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 이야기
강호진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4.5.6.
마음을 다스리는 까닭은 우리 마음이 아름다운 곳으로 흐르면서 삶을 빛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비우는 까닭은 우리 마음에 티끌이나 부스러기가 깃들지 않도록 하면서 따사로운 사랑이 깃들도록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아이한테 무엇을 가르치느냐를 놓고 먼먼 옛날부터 무척 꼼꼼히 살피거나 헤아렸습니다. 아이 마음에 그려 넣는 빛에 따라 아이들이 하루를 받아먹고 삶을 가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한테 한국말을 옳고 슬기롭게 가르치면, 어린이는 이른 나이부터 한국말을 옳고 슬기롭게 써요. 어린이를 일찍부터 학원에 넣어 무언가 가르치려 하면, 어린이는 이른 나이부터 학원에서 무언가를 일찌감치 배우겠지요.
예부터 어느 시골에서나 아이들은 낫질과 칼질을 일찍부터 합니다. 절구질과 방아질도 일찍부터 하고, 지게질이나 소먹이기를 일찍부터 해요. 늘 바라보던 일이요, 으레 곁에서 지켜보던 일이며, 어느새 어버이한테서 물려받던 일이기 때문입니다.
.. 불교에서 대승보살의 수행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는 인욕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이든 무작정 참는 미련한 견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역경에 처해서도 스스로를 설득시킬 수 있는 지혜와 부분이 아닌 전체를 꿰뚫어보는 통찰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시작도 끝도 없는 이 세계에서 제가 어떤 모습과 어떤 이름으로 나고 죽길 반복해서 이 자리에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렇다면 수없이 나고 죽길 반복하는 과정에서 너의 부모가 과연 한두 분이었겠느냐?” .. (22, 27쪽)
오늘날 어린이는 시험문제를 잘 풉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스마트폰을 잘 다룹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버스나 지하철을 잘 탑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연예인 이름이나 대중노래를 잘 외웁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운동경기 소식이나 인터넷게임 이야기를 잘 주고받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어린이는 무엇을 못 할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무엇을 모를까요.
아마 오늘날 어린이는 밥을 지을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빨래를 손수 하거나 걸레를 쥐어 방바닥을 훔칠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씨앗을 심거나 풀을 뜯거나 나무를 할 줄 모르겠지요. 오늘날 어린이는 지게를 지거나 칡넝쿨로 나뭇단을 묶을 줄 모를 테고, 오늘날 어린이는 노젓기나 그물엮기를 못 하리라 느낍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어린 동생이나 아기를 얼마나 돌볼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국을 끓이거나 김치를 담글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물레를 잣거나 베틀을 밟거나 바느질로 옷을 지을 줄 알까요.
오늘날 어린이는 나이를 먹으면 편의점에서 알바를 한다든지 크고작은 심부름을 할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그러나, 스스로 삶을 짓는 일은 못 하리라 느낍니다. 남이 시켜서 일을 한 뒤 돈을 벌 수는 있어도, 스스로 흙과 풀과 나무와 물을 만지면서 삶을 가꾸지는 못 하리라 느껴요.
.. 불교는 전생의 업이나 윤회를 영원불변한 절대적인 체계로 바라보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그러한 윤회와 업력의 틀을 어떻게 타파하고 벗어날 것인가를 고민하는 종교입니다 … 불자에게 관음보살의 성별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부분 여자라고 답할지도 모릅니다. 설화나 불교 영험담에서 관음보살은 여자의 몸으로 자주 나타날 뿐만 아니라 불화나 조각상에서도 통통한 살집, 흘러내리는 긴 머리카락, 치렁거리는 목걸이와 팔찌 등을 차고 있어 여자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대승보살 조각상의 원형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보살은 아름답고 수려한 남성을 표현한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대승에서 성별은 의미가 없습니다 .. (77, 82쪽)
강호진 님이 쓴 《10대와 통하는 사찰벽화 이야기》(철수와영희,2014)를 읽습니다. 강호진 님은 절집에 있는 그림마다 어떤 이야기가 서렸는가를 하나하나 돌아보면서 쉽고 알맞게 풀어냅니다. 그냥 그린 그림이란 없고, 아무 뜻이 없이 그린 그림이란 없다고 밝힙니다. 그림마다 깊고 너른 속뜻이 있고, 그림마다 온갖 숨결과 노래가 있다고 보여줍니다.
불교에서 다루는 여러 이야기를 두루 헤아렸으면, ‘절집 그림’을 누구나 읽을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불교 경전이나 책을 두루 읽었다 하더라도, 절집 그림을 모두 슬기롭게 읽을 수 있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절집 그림이든 예배당 그림이든 골목집 그림이든, 그림을 읽으려면 그림을 읽는 눈이 있어야 해요. 삶을 읽고 사람을 읽으며 사랑을 읽는 눈이 있을 때에, 비로소 그림을 읽을 수 있습니다.
.. 꿈을 꾸면서 그것이 꿈인 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 이 이야기는 항시 문수보살을 곁에 두고도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우리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곁에 늘 있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문수보살이란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우리들 삶 속에서 하찮게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대하는 누군가가 바로 문수보살입니다 … “아무리 작은 악일 지라도 짓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다 행하라. 그렇게 스스로 마음을 깨끗이 하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 “세 살 아이도 아는 말이지만, 팔순 노인도 실천하기엔 어려운 말이라오.” .. (90, 129, 156쪽)
그림은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림으로 어떤 지식을 배우지 않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까닭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을 그려서 나누는 까닭은 이웃(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천주교도 개신교도 천도교도 지식이나 종교라는 틀에 갇힐 때에는 삶을 밝히지 못합니다. 어느 믿음이든 ‘종교’가 아닌 ‘삶’이라는 자리에서 이웃과 손을 맞잡고 함께 웃는 노래가 될 때에 이야기로 피어납니다.
잘 헤아려 보셔요. 어머니가 지어서 차리는 밥이란 ‘영양소’가 아닌 ‘사랑’입니다. 아버지가 마련해서 끓이는 국이란 ‘영양소’가 아닌 ‘사랑’이에요. 아이와 함께 노는 어버이는 아이와 ‘놀아 주지’ 않습니다. 어버이는 아이와 ‘함께 놀’ 뿐입니다.
빼어나거나 훌륭한 이슬떨이가 있어서 어리숙한 사람을 깨우치거나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면서 숨결입니다. 다 함께 흙을 가꿉니다. 다 같이 살림을 꾸립니다. 서로서로 돕고 아끼면서 보금자리를 이룹니다. 손에 손을 모아 두레와 품앗이를 해요. 마음에 마음을 보태어 마을을 이루어요.
.. “만일 그대가 누군가의 명령을 받아 불교를 비방했다면 주인의 명령에 잘 따르는 개와 다름이 없고, 그대 스스로의 의지로 비방을 하였다면 잘 알지도 못하고서 비방한 것이니 스스로를 크게 속인 것입니다.” … 불교의 수행자는 마치 연꽃처럼 꼭 세속의 환경을 벗어날 필요가 없다는 것, 즉 그 마음이 있는 곳이 어디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상징입니다 … 《유마경》은 또 정토 또한 별다른 곳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마음이 청정해지면 바로 이곳이 정토가 된다는 뜻입니다 .. (135, 149, 170쪽)
학교교육은 대학입시를 바랄 때에 ‘교육’이 아닙니다. 학교교육은 아이들이 스스로 삶을 바라보고 느끼면서 가꾸도록 이끌 때에 ‘교육’입니다. 대학입시를 이끄는 학교는 굴레이거나 쳇바퀴입니다. 회사원이 되도록 이끄는 학교는 감옥이거나 노예제입니다.
불교는 무엇이고, 종교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절집 그림은 무엇일까요. 왜 종교는 사람들 눈을 어둠으로 가릴까요. 왜 슬기는 사람들 눈을 빛으로 밝힐까요.
《유마경》 그림이 이야기하듯이 수행자는 어디에서나 수행을 합니다. 밥을 짓고 빨래를 하며 흙을 일구면서 언제나 수행입니다. 경전을 읊을 때에 수행이 아닙니다. 절집에 머물 적에 수행이 아닙니다. 경전을 읊거나 절집에 머물 적에는 훈련을 하겠지요. 훈련을 하는 까닭은 삶을 짓는 힘을 얻고 싶기 때문이겠지요.
절집 그림은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저마다 제 보금자리에서 삶을 짓는 힘을 스스로 얻도록 돕는 빛을 조곤조곤 이야기합니다. 우리들이 스스로 삶을 가꾸면서 빙그레 웃고 어깨동무하는 기쁨을 나누도록 돕는 빛을 살며시 이야기합니다. 4347.6.8.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인문책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