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생각하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496
천양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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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6



일흔 살 시인은 독백 아닌 고백을 한다

― 새벽에 생각하다

 천양희 글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7.3.28. 8000원



  천양희 님 새로운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사,2017)는 일흔 줄이라는 나이를 맞아들이면서 새삼스레 받아들인 삶을 이야기합니다. 이 시집에 흐르는 이야기는 얼핏 읽자면 말장난 같을 수 있네 싶어요. 그러나 가만히 되읽으면 이 말장난은 어느새 말놀이가 되고, 새삼스레 거듭 읽으면 삶놀이 같은 이야기이지 싶어요. 다시금 찬찬히 읽어보면 하루하루 살림짓기를 하면서 이웃하고 나누고픈 노랫가락이로구나 싶기도 합니다.



전주에 간다는 것이

진주에 내렸다

독백을 한다는 것이

고백을 했다

너를 배반하는 건

바로 너다 (저녁의 정거장)


남편의 실직으로 고개 숙인 그녀에게

엄마, 고뇌하는 거야?

다섯 살짜리 딸 아이가 느닷없이 묻는다

고뇌라는 말에 놀란 그녀가

고뇌가 뭔데? 되물었더니

마음이 깨어지는 거야, 한다 (마음이 깨어진다는 말)



  일흔 줄 시인은 전주 가려던 길에 진주를 갔다고 해요. 이런 일을 아무나 겪지는 않는다고 여깁니다만, 저도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어요.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나 인천 바깥을 거의 몰랐어요. 천양희 시인처럼 전주랑 진주를 헷갈리기도 했고, 고창이랑 순창을 가리지도 못했으며, 상주랑 성주를 가누지도 못했습니다. 아무래도 어릴 적에는 스스로 이러한 여러 고장을 다녀 보지 못했기에 모를 만하고, 작은 도시에서 맴돌며 자랐으니 ‘지도를 살핀 지식으로는 머리에 있’어도 몸으로는 모르기 마련이에요.


  거꾸로 본다면, 저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신흥동 1가’하고 ‘신흥동 2가’하고 ‘신흥동 3가’라는 마을이 어떻게 다른가를 알아요. 인천 바깥사람한테는 고작 길 하나 건널 뿐이라 하더라도 ‘송림1동’부터 ‘송림6동’에 이르기까지 마을마다 숫자만 달리 붙는 마을이 아닌,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르게 일구는 마을인 줄 몸으로 알지요.


  그나저나 저도 ‘전주’하고 ‘진주’ 사이를 헷갈려서 버스를 잘못 탄 적이 있습니다. 버스가 여러 시간 달리고 나서야 알았지요.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요? 뭐, 잘못 간 곳에서 잘못 간 곳대로 하루를 누리기로 했지요.



몇 해 전

무릎에 갑자기 나타난 퇴행성보다는

덜 적막했다


퇴생성이 어느 별자리인가

갑상선이 뉘 집 나룻배인가 (그 말을 들었다)



  시집 《새벽에 생각하다》를 읽으며 우리 집 곁님이 떠올라 빙그레 웃음이 나기도 합니다. 우리 집 곁님은 서른 줄 막바지에 이르도록 얼굴이 어려 보인다는 소리를 자주 들어서, 네 식구가 함께 마실할 적에 으레 ‘큰딸하고 두 아이는 보이는데 아이 어머니는 어디에 있느냐?’는 소리까지 듣곤 했습니다. 이런 곁님이지만 저한테는 아직 흰머리가 한 올도 안 나는데, 저보다 제법 어린 곁님은 흰머리가 머리를 꽤 덮어요. 아직 마흔 줄에 들어서지도 않는데 말이지요. 이러다가 곁님이 온통 흰바구니를 머리에 뒤집어쓴다면 우리 네 식구가 마실을 다닐 적에 둘레에서 무슨 말을 할까요?


  그러나 둘레에서 무슨 말을 하든 대수롭지 않아요. 우리는 우리 스스로 즐겁게 삶을 지을 뿐이에요. 《새벽에 생각하다》를 쓴 ‘할머니 시인’ 천양희 님 이야기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엿볼 만합니다. 남들, 아마 의사일 텐데, 남들이 퇴행성이니 갑상선이니 하고 말을 하더라도 이를 달리 받아들일 수 있어요. 병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닌 ‘별’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퇴행성을 받아들일 수 있지요. 갑상선도 이와 같아서 ‘나룻배’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요.



일흔 살의 인터뷰를 마치며

마흔 살의 그가 말했습니다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참 좋은 인터뷰였다고 (일흔 살의 인터뷰)


큰 나무에 붙은 매미는

작은 점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도 매미의 노래는

멀리 퍼지고 깊이 파고든다 시집처럼 (매미 노래와 시)



  우리 하루가 고단하다면 남들이 우리를 고단하게 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우리한테 집도 있고 은행계좌도 꽤 넉넉하지만, 우리 스스로 걱정이나 두려움을 떨치지 못해서 고단하지는 않을까요?


  우리 살림이 힘겹다면 사회가 우리를 힘겹게 하기 때문일까요? 어쩌면, 우리한테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고, 사랑스러운 어머니 아버지가 계신데에도, 우리 스스로 자꾸 무언가를 아쉬워하면서 시샘을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힘겹지는 않을까요?


  시인 천양희 님은 ‘일흔 살 인터뷰’를 하면서 마흔 살 기자 입에서 나온 “떨어진 꽃잎 앞에서도 배워야 할 일들이 남아 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해요. “떨어진 꽃잎”이라니, 누가 떨어진 꽃잎이려나요. 나이가 일흔 살이면 떨어진 꽃잎이려나요.



어느 시인이

산문시로 권위 있는 문학상을 탄 뒤

잡지들 속에는 잡다한 시들이 부쩍 늘어났다

산문인지 산문시인지 모를 산만한 시들

뜬구름 입은 문장들이 흘러내린다

손으로 씨를 뿌리고 눈으로 거두는 것이

글쓰기와 읽기라는데

길어도 너무 길고 난해해도 너무 난해하다

서늘한 그늘이 보이지 않는다 (산문시에 대한 최근의 생각)



  혼잣말(독백)을 하려다가 털어놓기(고백)를 하고 만 일흔 살 시인을 헤아려 봅니다. 우리는 일흔 살이 아니어도 혼잣말 아닌 털어놓기를 곧잘 해요. 다섯 살 아이만 ‘고뇌’를 말하지 않고 마흔 살이나 서른 살 우리도 고뇌를 말해요. 가만히 보면 스무 살이거나 예순 살일 적에도 우리는 ‘사랑’을 말하고, 대여섯 살 어린이도 넌지시 사랑을 말하지요.


  우리가 어른으로서 걷는 길을 아이가 곁에서 지켜보며 배워요. 우리가 아프게 걷는 길을 아이도 아프게 느끼면서 이 아픔을 나누려 해요. 우리가 기쁘게 노래하며 걷는 길을 아이도 함께 노래하면서 까르르 웃음꽃을 터뜨리면서 기쁨을 북돋아 주어요.


  《새벽에 생각하다》라는 시집을 길어올린 일흔 살 시인 천양희 님은 일흔이라는 나이가 무게나 짐이 아니라 즐거움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어처구니없다 싶은 잘못을 저지르면서도 허허 웃다가 가볍게 말놀이를 해 봅니다. 홀가분하게 ‘새로운 별(퇴행성)’을 지켜보며, 사뿐사뿐 새삼스러운 걸음걸이로 이녁 삶길을 걸어가려 해요. 걷다가 다리가 아프면 ‘즐거운 배(갑상선)’를 타고 물놀이를 갈 수 있어요. 느긋하게 삶을 노래하면서 시가 흘러요. 넉넉하게 살림을 지피면서 시가 샘솟아요. 고요히 내려놓고 슬그머니 쓰다듬으면서 하루를 지어요. 2017.6.1.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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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하학적 고독 문학의전당 시인선 253
김익진 지음 / 문학의전당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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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3


공대 교수가 우주를 노래하는 시를 쓰면
― 기하학적 고독
 김익진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7.4.20. 9000원


  ‘RWTT Aachen 공대’를 마친 뒤에, 대학교에서 ‘신소재공학과 교수’로 일하는 김익진 님이 선보인 시집 《기하학적 고독》(문학의전당,2017)을 만나면서 새삼스럽다고 생각합니다. 한국 사회에서 이른바 ‘공대생’을 지나 ‘공대 교수’가 된 분이 시를 쓰고, 더구나 시집을 내다니 말이지요.

  그러나 공대생이라고 해서 시를 못 쓸 까닭이 없습니다. 공대 교수라고 해서 기계만 만지고 기계 이야기만 하란 법이 없습니다. 인문대생만 글을 쓰란 법이 없고, 문학을 가르치는 사람만 시를 이야기할 까닭이 없어요.


우주의 한복판에서 물어본다
우린 지금 어디쯤 가고 있는가?
누가 은하계의 시스템을 운전하는가?
어둠의 빈 공간에서 감마선을 따라,
별처럼 빛나던 당신의 눈을 기억하며
부드럽게 코스모스의 중심으로 날아간다. (태양이 설정한 대로)


  문학을 배워서 문학을 펴는 이가 이야기하는 ‘우주’하고, 공대 교수가 시로 담는 ‘우주’는 서로 같으면서도 다르구나 싶은 대목을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마음으로만 우주를 생각하는 이야기하고, 몸으로 늘 우주를 살피면서 이를 시로 담아낼 적에는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구나 하는 느낌이 흐릅니다.

  우리가 선 곳은 어디일까요? 우리는 우주 가장자리에 있을까요, 아니면 우주 한복판에 있을까요? 우리가 사는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구에서 가장자리일까요, 아니면 지구 한복판일까요?


중심은 모든 곳에 있으나
경계는 어느 곳에도 없다
신은 어디에나 있으나,
알아볼 수가 없다 (좌표의 소멸)

바람은 우주의 교향곡
창가를 스치는 한순간의 삶은
딱 한번 반짝이는 울림 (객실 열병)


  얼핏 보기로는, 또 다른 나라 눈길로 보기로는, 한국은 ‘극동’이라고도 합니다. 이 ‘극동’은 서양 제국주의 눈길로 바라본 말씨라고도 해요. 서양에서 보기에 유라시아 대륙 ‘끝’에 한국이 있거든요.

  이와 달리 ‘지구본’으로 본다면 한국은 ‘동쪽 끝’일 수 없어요. 지구본으로 본다면, 아니 지구 테두리에서 본다면, 한국은 동쪽이 아니요 유럽은 서쪽이 아니에요. 한국이든 유럽이든 저마다 다른 ‘한복판’입니다. 남쪽도 북쪽도 없고 위도 아래도 없어요. 모두 한복판이면서 서로 이웃입니다.

  시집 《기하학적 고독》에 흐르는 이야기마따나 “중심은 모든 곳에 있(좌표의 소멸)”다고 할 만합니다. “경계는 어느 곳에도 없”다고 할 만하고요. 다만 “신은 어디에나 있으나, / 알아볼 수가 없다”는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너와 나’라는 금이라든지 ‘동녘과 서녘’이라는 울타리를 세운다고 할 만해요.


눈부신 광선은 잠시 빛나겠지만
점자의 곡면과 요철을 배우듯
부서진 조각을 더듬어보면
시간은 매초마다 무한대다 (부서진 퍼즐)

별은 생을 조용히 마감하지 않는다.
온힘을 다한 후, 초신성으로
잠시 은하 속 별지에 머물지만,
결국 수백억 개의 별보다 장열하게 산화한다 (그때가 오면)


  “바람은 우주의 교향곡(객실 열병)”이라는 말을 곱씹습니다. “시간은 매초마다 무한대다(부서진 퍼즐)”라는 말을 되씹습니다. 날마다 부는 바람은 얼핏 지나치자면 아무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날마다 우리한테 찾아오는 바람을 나무 곁에 가만히 서서 맞이해 보면, 늘 다르게 울려퍼지는 노랫소리라고 느낄 수 있어요. 때로는 교향곡이 되고, 때로는 트로트가 되다가, 때로는 동요가 되어요.

  우리는 흔히 ‘시간이 없다’나 ‘시간이 모자라다’고 말하지만, 정작 시간은 늘 ‘끝없이(무한대)’ 있다고 할 만해요. ‘끝없이’ 있는 시간이지만 ‘끝’을 잊은 채 ‘없는 시간’이라고만 여기는구나 싶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느긋하지 못한 나날이면서, 넉넉하지 못한 살림인 탓이라고 할까요. 하루를 더 느긋하게 마주하지 못하면서, 아침저녁을 한결 넉넉하게 맞아들이지 못한 탓일 수 있어요.


삶이란 무대 위엔 시나리오가 있었고, 치밀한 논리가 있었다 태양은 죽어가고 지구는 식어가며, 대가기 만들어졌다 그 후에 물이 생겼다 그리고 인간이 왔다 우주 역사에 비해 인류는 이슬처럼 보잘것없다 하지만 사유의 힘이 있다 이 모든 기적들! 신은 뛰어난 수학자였다 (신은 수학자다)

우리는 단순한 방랑자가 아니라
분명 우주의 공간을 갖는 점령자다
시간에 따라 존재의 형태만 다를 뿐
우리는 그 안과 밖에 존재한다 (중력의 법칙)


  하느님(신)은 ‘생각하는 힘(사유의 힘)’으로 온누리를 지었다고 바라보는 시집 《기하학적 고독》입니다. 빈틈없는 생각으로 하나하나 아름답게 이 삶을 지어낸다고 여기는 시집 《기하학적 고독》입니다. 이리하여 공대 교수이자 시인은 “신은 수학자다” 하고 외칩니다. 온누리를 새로 지은 손길은 바로 ‘수학’이라고 말해요.

  어느 모로 본다면 어버이가 아이를 낳아 사랑으로 돌보는 살림도 ‘수학’일 수 있어요. 밥 한 그릇을 지으려고 밥물을 맞춘다든지, 간을 살펴 국을 끓여내는 손길도 ‘수학’이라 할 만합니다. 된장이나 김치도 ‘수학’이 될 만하고, 반죽으로 빵을 굽거나 떡을 찧는 모든 살림살이도 ‘수학’이 될 만해요.

  빨래한 옷을 정갈하게 개는 손놀림도 수학이 될 테지요. 어떻게 개야 가장 이쁘면서 구김살이 안 지도록 하는가 하고 살피기에 수학입니다. 양말을 개어 서랍장에 넣을 적에 어떻게 개야 더 많이 알뜰히 넣느냐를 헤아리는 마음도 수학이 될 만해요.


여태껏 한 번도 안아주지 못한
너를 안아주고 싶다
꺾이고, 밟히고, 상처 난 얼굴로
쫓아오는 그림자 (그림자를 안아주다)


  삶마다 흐르는 이야기는 모두 문학이 될 만하다고 느낍니다. 누구나 이녁 삶을 시로 담아내어 펼칠 만하다고 느낍니다. 아이를 돌보는 살림도, 공대 교수로 일하는 삶도, 오로지 시를 쓰는 하루도 얼마든지 시로 피어날 만하다고 느껴요. 시골에서 낫질을 하거나 호미질을 하는 살림도 시로 쓸 만해요. 도시에서 전철이나 버스로 출퇴근을 하는 하루도 시로 쓸 만합니다.

  시로 못 쓸 만한 이야기란 없어요. 이 지구가 태어난 발자취를 더듬어 보면서 수학을 찾아낼 수 있고, 철학이나 믿음이나 문학을 헤아릴 수 있어요. 늘 우리 곁에 있지만 으레 못 느끼는 그림자를 안아 보려는 마음을 시로 그리고 노래로 부를 수 있어요.

  시 한 줄이란, 문학으로 빚은 책이란, 시에 담는 삶이란, 문학으로 펼치는 살림이란, 늘 우리 곁에 있지 싶어요. 우리가 스스로 바라보려는 눈이 있으면 비로소 느끼면서 시 한 줄을 쓰고 시집 한 권을 엮을 만하지 싶어요. 어버이는 어버이대로, 시골지기는 시골지기대로, 회사원은 회사원대로, 또 공대 교수는 공대 교수대로 저마다 삶과 살림을 새로운 눈길로 마주하면서 시를 씁니다. 이러면서 ‘수수께끼 지구와 우주’를 찬찬히 밝혀 봅니다.

  그나저나 공대 교수는 공대생한테 이공계 학문만 가르칠까요? 공대생한테 공대 교수로서 시를 가르친다면 어떤 이야기가 샘솟을 만할까요? 무척 재미나리라 생각해요. 2017.5.2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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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지 않는 탑 문학의전당 시인선 219
이성의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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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2



허방을 딛다가 떠올리는 어제

― 저물지 않는 탑

 이성의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11.30. 9000원



  나뭇가지에 새가 내려앉습니다. 담벼락에도 지붕에도 내려앉습니다. 새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멀리 내다봅니다. 겨우내 텃새 노랫소리를 들었다면 봄으로 접어들고는 수많은 철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따스한 철에 이 땅을 찾아오는 수많은 새는 온갖 노랫소리로 아침을 함께 열고 낮을 함께 누리며 저녁을 함께 마무리해요.


  고즈넉한 소리를 듣고, 맑은 소리를 듣습니다. 싱그러운 소리를 듣고, 재미난 소리를 듣습니다. 다 다른 결로 울려퍼지는 이 수많은 노랫소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렸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슈퍼 가는 길에 허방을 딛고 말았다

아차, 정신을 잃었구나

둥근 통 화분에 몸을 풀고 있는 저 황홀한 꽃들에게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나도 저리 황홀해지고 싶은 때가 있었지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킬킬거리며

빨갛게 유혹하고 싶은 때가 있었지 (허방을 건너다)



  이성의 님 시집 《저물지 않는 탑》(문학의전당,2015)을 읽습니다. 허방을 딛기도 하고,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이웃을 마주하기도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디에서나 늘 내 모습을 되돌아본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참말 그래요. 우리는 대통령을 바라보면서도 그 대통령한테서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골 흙지기를 바라보며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도시 관광객을 바라보며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아이한테서도 할머니한테서도 언제나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놀이터에서

해를 만지던 아이

어디론가 그림자를 지고 달려간다


막 해를 넘기고 퇴근을 하던

젊은 엄마

품속 깊이 아이를 넣는다


크고 작은 품속에

새파란 그늘이 쏟아진다 (자라나는 나무들)



  아이를 품는 어머니는 따스합니다. 아이를 안아 줄 품으로 따스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품에 안겨서 따스하기도 합니다. 어머니 품에 안기는 아이는 포근합니다. 아이를 어머니가 품어 주기에 포근하기도 하지만, 아이 나름대로 어머니를 품을 수 있어 포근하기도 해요.


  마주보는 두 사람 사이에 따스함도 이야기도 흐릅니다. 마주하는 두 사람 사이에 웃음도 기쁨도 흐릅니다. 나한테서 비롯하는 이야기가 너한테 가고, 너한테서 샘솟는 노래가 나한테 와요.



저기

저 다리 위를

걸어가는 키 작은 사람아


어디서

한번 보긴 하였는데

통 생각이 나질 않네


이곳저곳

매달고 다닌

내 과거의 일들도

이와 같아서 (이치)



  즐거운 한때를 떠올립니다. 고달프던 한때를 떠올립니다. 오늘 하루가 즐겁다면 지난날 고달프던 발걸음은 아련하다 싶은 옛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루가 벅차다면 지난날 기쁘던 걸음걸이는 까마득하다 싶은 옛이야기예요.


  즐거운 이야기가 내내 흐르다가 때때로 벅찬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벅찬 이야기로 가득하다 싶더니 어느새 즐거운 이야기로 바뀝니다. 넘나들고 뒤바뀝니다. 옆에서 하는 말 때문에 쓸까스르구나 싶기도 하지만, 누가 옆에서 툭툭 내뱉는 말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어땠었나요

당신이 타고 오르던 무지개

여린 빛깔들을 가득 채우고 완곡하게 산을 넘던

당신이 끌고 가던 손수레는

어땠었나요

하얀 면포 속에 속삭이듯 드리우던

당신의 다정한 그늘은 (저물지 않는 탑)



  피어난 꽃이 천천히 집니다. 하루 해가 저뭅니다. 싱그럽던 잎이 스러집니다. 겨우내 시든 풀줄기는 흙으로 돌아가서 봄에 새롭게 태어납니다. 시집 《저물지 않는 탑》은 예나 이제나 늘 그대로 살아가는 숨결을 이야기합니다. 허방을 디딜 적이든 허방에서 빠져나올 적이든 늘 그대로인 내 숨결을 이야기합니다.


  피고 지는 결이 다르게 보이더라도 꽃은 늘 꽃입니다. 저물고 뜨는 해요 달이요 벌이지만, 해나 달이나 별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스러지는 잎도 싱그러운 잎도 언제나 잎 그대로입니다. 한결같이 이곳에 있으면서 이야기로 흐르는 넋을 바라보면서 시 한 줄을 그립니다. 2017.5.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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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절반은 나 - 곽해룡 동시집 쑥쑥문고 71
곽해룡 지음 / 우리교육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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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88


바다로 돌아가겠노라는 할머니 곁에서
― 이 세상 절반은 나
 곽해룡 글
 황수민 그림
 우리교육 펴냄, 2011.3.25. 8000원


  일곱 살 아이는 설거지를 얼마나 할 수 있을까요. 일곱 살 아이만큼 하겠지요. 열 살 아이는 씨앗을 얼마나 심을 수 있을까요. 열 살 아이만큼 심겠지요. 열세 살 아이는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요. 열세 살 아이만큼 걷겠지요.

  아이 곁에 어른이 있습니다. 아이가 힘들다고 할 적에 어른이 손을 내밀어 거들거나 돕습니다. 아이가 졸립다고 할 적에 어른이 품을 내주어 고이 안습니다. 아이가 배고프다고 할 적에 어른이 사랑을 쏟아 밥을 짓습니다.


채석강에 와서 알았다.
물고기도 하루 두 번
책을 읽는다는 것을

바닷물은 
물고기들에게 책 읽히려고
하루 두 번
밀려왔다 밀려 간다 (물고기 도서관)


  곽해룡 님이 빚은 동시집 《이 세상 절반은 나》(우리교육,2011)를 읽습니다. 아이들 곁에 서면서 아이들 마음을 읽은 뒤에 아이들하고 나눌 이야기를 동시집으로 갈무리했구나 하고 느끼면서 동시를 읽습니다.

  물고기는 냇물에서 물결이라고 하는 책을 읽는다고 합니다. 물에서 살기에 물결을 읽어요. 물결을 살피고 물결을 헤아리며 물결을 느끼지요.

  어른 곁에 있는 아이는 무엇을 읽을까요? 책이나 교과서만 읽을까요, 아니면 아이를 둘러싼 어른이 짓는 살림을 읽을까요, 아니면 어른이 이룬 사회를 읽을까요? 아이들은 학교도 읽고 사회도 읽으며 문학도 읽고 정치도 읽지는 않을까요? 어른처럼 읽지는 않더라도, 아니 어른처럼 읽지는 않으나, 아이 나름대로 우리 삶자리를 읽을 테지요.


할머니는
잘 여문 콩만 자루에 담고
찌부러진 콩들은
바가지에 따로 모았다

닭 모이나 될 콩들도
땅에 묻어 주면 싹이 틀까 싶어
나는
밭가에 묻어 주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낮달)


  할머니 곁에 선 아이는 찌부러진 콩을 슬그머니 훑어서 밭가에 묻어 준다고 합니다. 찌부러진 콩도 이 땅에 뿌리를 내려서 싹을 틔우고 씩씩하게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을 펼칩니다. 잘 여문 콩뿐 아니라 덜 여문 콩도 틀림없이 싹을 틔우리라는 마음을 품어요.

  아무렴 그렇지요. 콩이며 사람이며 똑같은걸요. 잘 여물거나 잘생겨야만 하지 않아요. 덜 여물든 못생기든 대수롭지 않아요. 마음에 고요히 사랑을 품어 따사로운 눈길로 서로 마주할 수 있으면 되어요. 따스한 손길로 서로 아끼면서 즐거이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아름다워요.


이 세상은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 (이 세상 절반은 나)


  나와 ‘내가 아닌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여길 수 있는 온누리입니다. 이 말은 온누리가 ‘너와 나’로 이루어졌다는 이야기로 살며시 옮아 갈 수 있습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으니 우리가 되어요. 우리는 너하고 나를 아우르는 이름이에요. 너랑 내가 있어 온누리가 있다면, 우리가 함께 있어 온누리가 있다는 뜻이에요.

  너는 너대로 아름답고 나는 나대로 아름다워요. 너는 너대로 상냥하고 나는 나대로 상냥하지요. 너는 너대로 반갑고 나는 나대로 기쁨이에요.


할머니 소원은
죽어서 천당에 가는 것도 아니고
볕 잘 드는 곳에 묻히는 것도 아니고
물고기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평생 개펄을 파먹고 사셨다는 할머니는
돌아가시면 한 줌 가루가 되어
낙지 고둥 꼬막에게도
밥이 되는 거라 하셨습니다 (할머니 소원)


  아이는 다시 할머니 곁에 섭니다. 할머니가 슬기로이 들려주는 말밥을 받아먹습니다. 꽃처럼 차린 꽃밥상도 받아먹는 아이요, 꽃처럼 들려주는 꽃말도 받아먹는 아이예요.

  바다로 개펄로 이 땅으로 하늘로 바람으로 구름으로 빗물로 돌아가려는 할머니 곁에 서는 아이들은 따사롭고 넉넉한 마음을 물려받을 만해요. 아이들은 차츰차츰 가슴을 북돋우면서 너른 꿈을 키울 만해요.


누군가를 미워하는 동안
내 몸 속에서는
조금씩
가시가 자라났다 (가시물고기)

자동차에 새똥이 떨어졌다고
성이 난 주민들이
화단 가지를
몽땅 잘라 버렸다 (자벌레)


  너르게 자라는 마음 한켠이 때때로 아픕니다. 나뭇가지가 잘리듯 아이들 마음에 생채기가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아픔을 미움으로 바꾸고 싶지 않습니다. 이 아픔을 고이 다스려서 가시가 아닌, 가시울타리나 가시 돋친 말이 아닌, 진주를 품는 조개처럼 곱게 피어나는 사랑으로 다스리고 싶습니다.

  성을 내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느긋하게 깃들 나무 한 그루를 얻기 힘든 새가 어떤 마음인가를 헤아려 보려고 합니다. 지난날에는 사람도 새도 한마을을 이루며 살았을 텐데, 이제 사람은 사람끼리만 도시를 키우면서 새는 보금자리를 자꾸 빼앗겨요.

  자동차에 떨어진 새똥쯤이야 얼마든지 닦아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보금자리를 빼앗긴 새는 어쩌지요. 새똥이 퐁 떨어져서 흙을 북돋우기 어려울 만큼 찻길이 드넓고 아스팔트가 빼곡한 도시예요. 찻길을 줄이고 숲을 늘릴 수 있을까요. 도시를 줄이고 숲을 키울 수 있을까요. 사람도 숨통을 트고 새도 숨길을 틀 수 있을까요.


애기똥풀
꺾지 마라

누런 물찌똥 싼다고
신기하다고
자꾸 꺾는 오빠야

그건
똥이 아니라
피일지도 모른다 (애기똥풀)


  동시집 《이 세상 절반은 나》는 아이 곁에 서면서 아이가 배우고 싶은 마음을 헤아리는 이야기가 조곤조곤 흐릅니다. 학교에는 없는 이야기가 동시집에 흐릅니다. 교과서에 안 담기는 이야기가 동시 한 줄에 흐릅니다.

  문득 돌아봅니다. 교과서나 시험문제에는 할머니 이야기가 없어요. 바다로 돌아가겠노라 하는 할머니 이야기를 교과서나 시험문제에서는 안 다루어요. 잘린 나뭇가지가 어떤 마음인가를 묻는 교과서나 시험문제는 아직 없어요. 온누리는 너랑 내가 함께 있어서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도 교과서나 시험문제에서는 다루지 못해요.

  애기똥풀 한 포기를 들여다봅니다. 찔레꽃 한 송이를 들여다봅니다. 느티나무 한 그루를 들여다봅니다. 여름을 앞두고 하나둘 깨어나 울어대는 개구리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이 곁에 서는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들려줄 이야기밥을 어떻게 지을 적에 서로서로 아름다우면서 환하게 웃을 만한가 하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2017.5.7.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동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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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훔친 기적 민음의 시 233
강지혜 지음 / 민음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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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1



젊은 시인은 걸상을 들고 전철에 올랐다

― 내가 훔친 기적

 강지혜 글

 민음사 펴냄, 2017.3.24. 9000원



  저하고 띠동갑으로 나이가 젊은 분이 처음 낸 시집 《내가 훔친 기억》(민음사,2017)을 읽었습니다. 이 시집을 낸 분은 2013년에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시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고, 이 시집을 내면서 비로소 시인이라는 길을 걷는다고 합니다.


  시집 책날개를 보면 《내가 훔친 기억》을 낸 강지혜 님이 1987년에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 말고는 다른 이야기가 없습니다. 오직 시로 이녁 삶과 이야기를 들으라고 하는 뜻이네 싶으면서, 굳이 어느 해에 태어났다는 대목을 밝힌 뜻은 무엇일까 하고 어림해 보았어요. 이러면서 제가 태어난 1975년을 떠올렸고, 저보다 열두 삶 젊은 삶이란 무엇일까 하고 되새겨 보았어요.



입성하지 못한 자들이

일몰에 맞춰 벽을 핥으러 간다


“봄이 되면 담벼락에 수만 마리 무당벌레가 날아와. 걔들을 터트리느라 똑똑해질 시간이 부족했는지도 몰라”


그들은 매일 인도가 없는 아스팔트를 걸었다 (벽으로)



  어느 분은 저보다 열두 살 위일 테니, 제가 그분한테는 열두 삶 젊은 사람이 되겠지요. 이 젊음이란 언제나 서로 맞물립니다. 저보다 젊은 분이 있고, 또 저는 누구한테는 무척 젊은 사람이 됩니다. 저보다 젊은 분도 그이보다 젊은 분이 또 있고요.


  이렇게 본다면 ‘젊은 시인’이라는 말은 좀 안 맞을 수 있지 싶어요. ‘젊다’를 꼭 나이로만 따질 수 없거든요. 나이가 스물 언저리이기에 젊을까요? 나이가 서른 언저리라면 젊을까요? 서울 같은 커다란 도시에서는 스물이 풋풋하게 젊고 서른이 씩씩하게 젊다고 여길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서른 줄에만 접어들면 ‘이제 안 젊다’고 여길는지 몰라요.


  이와 달리 제가 사는 시골에서는 일흔 살 나이가 ‘젊은이’예요. 저희 마을에서 가장 ‘젊은’ 분이 일흔 줄이 넘습니다. 다들 여든 줄이나 아흔 언저리랍니다. 이러다 보니 마흔 줄쯤 되는 나이는 젊은이조차 아닌 ‘아기’로 여겨요. 재미나지요. 나이 하나를 놓고서 ‘자리마다 삶마다 다른 이야기’가 태어나요.



아름다운 의자를 들고 퇴근 시간 전철에 탔다 의자는 황홀한 노래를 읊조리고 내 몸은 달아올랐다


이것은 의자, 별처럼 빛나는 의자


의자를 들고 전철에 탔지만 자리가 없었다 나는 분명히 의자를 들고 있는데 앉을 수가 없으니 나와 의자는 슬펐다 그리고 의자는 분명히 외로웠다 (의자 들고 전철 타기)



  시집 《내가 훔친 기억》을 쓴 강지혜 님은 이 시집을 내놓기까지 어떤 삶을 겪거나 마주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이 시집을 읽는 우리는 저마다 어떤 삶을 치르거나 맞닥뜨리는 길을 걸어오다가 이 시집 이야기를 만날 만한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강지혜 님은 시집에서 ‘걸상을 들고 전철을 타던 일’을 들려줍니다. 저도 이렇게 걸상을 들고 전철을 탄 적이 있어요. 언젠가 책상을 둘이서 들고 전철을 탄 적도 있어요. 책걸상을 들고 전철을 타야 하던 그때, 참 눈치를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어요. 짐차를 부를 수 없던 때였고, 이래저래 전철밖에 없어서 전철로 서둘러 책걸상을 옮겨야 했지요.


  저는 두 아이를 낳아 돌보면서 ‘어쩔 수 없이 출퇴근 지옥철 시간’에 갓난쟁이를 안고서 전철을 타야 하던 일이 몇 차례 있습니다. 저처럼 갓난쟁이를 업거나 안은 채 ‘어쩔 수 없이 출퇴근 지옥철 시간’에 전철을 오르는 분을 더러 보기도 했고요. 이때에 서로서로 참 괴롭지요. 고달파요. 아기 어머니나 아버지도, 다른 손님도, 누구보다 아기가 참으로 힘겨워요.



먼지들은 내가 자주 쓰는 의성어를 엮어

노래를 만들었다

소리는 분명히

내 몸 안에서부터

공중으로 퍼져 나갔다 (화단을 가꾸려 했다)



  이 힘겨운 삶이란 무엇일까 하고 되새겨 봅니다. 걸상을 들고 전철에 올라야 했는데, 막상 전철에서 ‘내가 들고 간 걸상’에 앉지 못하는 삶이란 무엇일까 하고 그려 봅니다.


  우리는 우리 지친 다리를 쉴 걸상이 저마다 있는데, 막상 이 걸상에 느긋하게 앉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숨을 돌리지 못하고, 한갓지지 못하다면, 이러한 삶이란 무엇이라고 할 만할까요.



누나는 번번이 자신을 시인이라고 소개했다

누나는 단지 풍경을 기록하는 사람

진짜 이야기는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동어반복)



  ‘화단을 가꾸려 했다’라는 시를 가만히 읊습니다. 노래가 되는 소리는 언제나 우리 마음속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이야기를 저도 늘 느낍니다. 제 마음이 스스로 노래로 흐르지 않는다면 즐겁게 노래를 하지 못해요. 제 마음을 스스로 기쁨으로 일구지 않는다면 마음껏 노래를 하지 못해요.


  시인이란, 등단한 사람을 일컫는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인이란, 시집을 낸 사람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시를 쓰기에 시인이고, 시를 노래하기에 시인이며, 삶을 시라는 글로 가만히 갈무리해서 이웃한테 속삭이기에 시인이라고 느껴요. 비록 “진짜 이야기는 한 줄도 쓰지 못하는” 몸짓이거나 하루라 하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라고 느껴요. 우리는 우리 삶을 노랫가락처럼 잔잔하게 들려줄 수 있으니 누구나 시인이에요. 동생한테 언니한테 아버지한테 할머니한테 우리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다면 우리는 저마다 시인이지 싶습니다.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척 하면서

나는 내 머리를 토닥인다


모두의 바람처럼

거울이 나무를 비추면 좋겠지만

나는

숲 같은 건 안중에도 없는

의자에 앉아

무릎의 위치는 왜 언제나 여기인지

생각하는 (껍질)



  머리카락을 쓸어서 넘기면서 제 머리를 토닥여 봅니다. 머리카락도 쓸어서 넘기고, 머리도 토닥여 줍니다. 다른 사람 눈치를 볼 일이 없습니다. 곁에서 누가 제 머리를 토닥여 주기를 바라지 않고, 제가 스스로 제 머리를 토닥여 줍니다. 씩씩하게 서려 합니다. 기운을 내어 서고자 합니다.


  ‘바람’처럼 거울이 나무를 비추어 줄 수 있고, 숲을 마음에 담고서, 또 걸상에 가만히 앉아서, 이제 ‘껍질’에서 깨어날 수 있습니다. 한 걸음씩 뗍니다. 두 걸음으로 나아갑니다. 천 리라고 하는 길은 처음에 참 아득하구나 싶었으나, 아장아장 아기처럼 떼는 걸음을 꾸준히 잇고 보니 어느새 우리 꿈 앞에 다다릅니다.


  시집 《내가 훔친 기적》이 밝히는 ‘우리가 저마다 훔친 놀라움’이란 우리 스스로 미처 모르는 사이에 이룬 사랑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우리 마음속에서 고요히 피어난 사랑을 시나브로 알아채면서 홀가분하게 걸상에 앉아 다리를 쉴 수 있는 오늘 살림이지 싶어요. 마음이 젊고 생각이 젊으며 꿈이 젊은 시인이 걸어갈 길은 ‘꽃이 피어날 수 있는 흙이 있어 숲으로 짙푸른 길’이 되리라 봅니다. 2017.4.30.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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