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지 않는 탑 문학의전당 시인선 219
이성의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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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292



허방을 딛다가 떠올리는 어제

― 저물지 않는 탑

 이성의 글

 문학의전당 펴냄, 2015.11.30. 9000원



  나뭇가지에 새가 내려앉습니다. 담벼락에도 지붕에도 내려앉습니다. 새는 높은 자리에 앉아서 멀리 내다봅니다. 겨우내 텃새 노랫소리를 들었다면 봄으로 접어들고는 수많은 철새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따스한 철에 이 땅을 찾아오는 수많은 새는 온갖 노랫소리로 아침을 함께 열고 낮을 함께 누리며 저녁을 함께 마무리해요.


  고즈넉한 소리를 듣고, 맑은 소리를 듣습니다. 싱그러운 소리를 듣고, 재미난 소리를 듣습니다. 다 다른 결로 울려퍼지는 이 수많은 노랫소리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렸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슈퍼 가는 길에 허방을 딛고 말았다

아차, 정신을 잃었구나

둥근 통 화분에 몸을 풀고 있는 저 황홀한 꽃들에게

나를 잃어버리고 말았구나

나도 저리 황홀해지고 싶은 때가 있었지

말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킬킬거리며

빨갛게 유혹하고 싶은 때가 있었지 (허방을 건너다)



  이성의 님 시집 《저물지 않는 탑》(문학의전당,2015)을 읽습니다. 허방을 딛기도 하고,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이웃을 마주하기도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어디에서나 늘 내 모습을 되돌아본다고 하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참말 그래요. 우리는 대통령을 바라보면서도 그 대통령한테서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시골 흙지기를 바라보며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고, 도시 관광객을 바라보며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어요. 아이한테서도 할머니한테서도 언제나 우리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하루 종일 놀이터에서

해를 만지던 아이

어디론가 그림자를 지고 달려간다


막 해를 넘기고 퇴근을 하던

젊은 엄마

품속 깊이 아이를 넣는다


크고 작은 품속에

새파란 그늘이 쏟아진다 (자라나는 나무들)



  아이를 품는 어머니는 따스합니다. 아이를 안아 줄 품으로 따스하기도 하지만, 아이가 품에 안겨서 따스하기도 합니다. 어머니 품에 안기는 아이는 포근합니다. 아이를 어머니가 품어 주기에 포근하기도 하지만, 아이 나름대로 어머니를 품을 수 있어 포근하기도 해요.


  마주보는 두 사람 사이에 따스함도 이야기도 흐릅니다. 마주하는 두 사람 사이에 웃음도 기쁨도 흐릅니다. 나한테서 비롯하는 이야기가 너한테 가고, 너한테서 샘솟는 노래가 나한테 와요.



저기

저 다리 위를

걸어가는 키 작은 사람아


어디서

한번 보긴 하였는데

통 생각이 나질 않네


이곳저곳

매달고 다닌

내 과거의 일들도

이와 같아서 (이치)



  즐거운 한때를 떠올립니다. 고달프던 한때를 떠올립니다. 오늘 하루가 즐겁다면 지난날 고달프던 발걸음은 아련하다 싶은 옛이야기입니다. 오늘 하루가 벅차다면 지난날 기쁘던 걸음걸이는 까마득하다 싶은 옛이야기예요.


  즐거운 이야기가 내내 흐르다가 때때로 벅찬 이야기가 끼어듭니다. 벅찬 이야기로 가득하다 싶더니 어느새 즐거운 이야기로 바뀝니다. 넘나들고 뒤바뀝니다. 옆에서 하는 말 때문에 쓸까스르구나 싶기도 하지만, 누가 옆에서 툭툭 내뱉는 말 때문이라기보다 스스로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어땠었나요

당신이 타고 오르던 무지개

여린 빛깔들을 가득 채우고 완곡하게 산을 넘던

당신이 끌고 가던 손수레는

어땠었나요

하얀 면포 속에 속삭이듯 드리우던

당신의 다정한 그늘은 (저물지 않는 탑)



  피어난 꽃이 천천히 집니다. 하루 해가 저뭅니다. 싱그럽던 잎이 스러집니다. 겨우내 시든 풀줄기는 흙으로 돌아가서 봄에 새롭게 태어납니다. 시집 《저물지 않는 탑》은 예나 이제나 늘 그대로 살아가는 숨결을 이야기합니다. 허방을 디딜 적이든 허방에서 빠져나올 적이든 늘 그대로인 내 숨결을 이야기합니다.


  피고 지는 결이 다르게 보이더라도 꽃은 늘 꽃입니다. 저물고 뜨는 해요 달이요 벌이지만, 해나 달이나 별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스러지는 잎도 싱그러운 잎도 언제나 잎 그대로입니다. 한결같이 이곳에 있으면서 이야기로 흐르는 넋을 바라보면서 시 한 줄을 그립니다. 2017.5.8.달.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우리 말 살려쓰기/말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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