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기
이수호 지음 / 삼인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책시렁 28


《겨울나기》

 이수호

 삼인

 2014.6.9.



  같은 곳을 바라보더라도 어떤 눈길인가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입니다. 다르게 받아들이니 다르게 배우고, 다르게 배우니 다르게 살아요. 나이가 같은 아이라 하더라도 같은 교실에 몰아넣고 같은 교과서로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도, 아이들 마음이며 삶이며 눈빛이며 생각은 다 다르기에 다 다르게 배우고 받아들여요. 우리는 이 다른 결을 얼마나 느낄까요? 다 다른 아이들이 다 똑같은 틀에 갇히도록 밀어붙이지는 않나요? 《겨울나기》를 쓴 분은 오랫동안 교사로 아이들을 마주했고, 학교를 떠난 뒤에도 ‘새로 자라나는 아이’들을 가만가만 바라보려고 합니다. 가르치는 자리에 서니 가르칠 테지만, 가르치는 자리에서 들려주는 모든 말은 ‘배우려는 아이들 눈빛에서 받아들이거나 느끼는’ 이야기가 되지 싶어요. 겨울을 나려고 가을을 맞이하고, 겨울을 나면서 봄을 맞이합니다. 모든 철은 저마다 다르게 즐거운 하루요, 모든 하루는 새로운 철로 나아가는 작은 디딤돌입니다. 눈높이를 맞춰 봅니다. 눈결을 나란히 놓아 봅니다. 손을 뻗어 풀잎을 만지고, 손에 호미를 쥐고 씨앗 한 톨을 심습니다. ㅅㄴㄹ



아침 출근길 지하철 / 조금은 거북하게 들리던 일본말 안내 방송이 / 쓰나미 휩쓸고 간 다음 날 / 그렇게 곱게 들릴 수가 없다 /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으나 / 안타깝고 애절했다 슬프고 안쓰러웠다 / 그냥 안고 싶었다 (쓰나미 아침/96쪽)


인천 앞바다도 얼음덩어리 떠다니는데 / 언덕길 어린 나무 / 잔가지가 샛바람에 바르르 해도 / 얼지 않네 / 죽지 않네 (겨울나무 앞에서/144쪽)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숙녀의 기분 문학동네 시인선 41
박상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책시렁 42


《숙녀의 기분》

 박상수

 문학동네

 2013.5.17.



  요즈음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가 영어를 바탕으로 말을 마구 흔든다는 얘기를 어른들이 합니다. 한글날 언저리에는 ‘청소년 언어파괴’ 같은 얘기가 심심찮게 불거집니다. 그런데 이런 얘기는 서른 해 앞서도 나돌았고 쉰 해 앞서마저도 떠돌았습니다. 해방 뒤에는 버젓이 일본말을 쓰는 사람들 얘기도 도마에 올랐고요. 왜 예전부터 어린이나 푸름이나 젊은이는 ‘말 흔들리기’를 했을까요? 어른들이 짜 놓은 삶터가 뒤죽박죽에 엉망이면서 쇠사슬 같기에, 이를 깨부수려는 뜻으로 말부터 깨부수고 싶지는 않을까요? 《숙녀의 기분》을 읽으면 한 줄이 멀다 하고 온갖 영어가 튀어나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시라서 매우 어지럽습니다. 시쓴이는 요즈음 젊은 가시내가 이런 말씨를 쓴다고 여겨서 시로 담아냈구나 싶지만, 얼마나 많은 ‘요즈음 젊은 가시내 말씨’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이는 이 비슷한 말씨를 쓸 테지만 어떤 아이는 이런 말씨를 하나도 안 쓸 테니까요. ‘삶결을 고스란히 담아낸다’는 말은 거짓이지 싶습니다. 시쓴이 스스로 그런 말씨랑 그런 삶결을 좋아하기에 이렇게 쓰며 “어른들 흉내를 내는 중”이겠지요. ㅅㄴㄹ



선배,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약속에 한 시간이나 늦었는데 너는 오늘 스타일이 좋구나 너와 그 토트백이 맘에 들어 머리 뒤에서 빛이 난다는 너희 교수님에게 물어보지 그러니 말해주고 싶지만 찻잔 받침대에 조금씩 밀크티를 따라 마시며, 어른들 흉내를 내는 중이니까 (좀 아는 사이/16쪽)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창비시선 239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책시렁 29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

 안도현

 창비

 2004.9.15.



  교과서에서 다룰 수 있는 문학은 몇 가지 안 됩니다. 학교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에서는 모든 책을 건사하지 않습니다. 저는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교과서로 문학을 배울 적에 처음에는 ‘교과서에 실리지 않은 문학’이 있는 줄 몰랐고, 나중에는 교과서에 안 실리거나 못 실린 문학이 엄청나게 많은 줄 느꼈으며, 이윽고 교과서에 어느 문학을 누가 넣느냐 하는 대목에서 퍽 얄궂구나 싶었어요. 교사가 안 가르치면 학생은 모르고, 사서가 안 갖추면 사람들은 책을 못 빌립니다. 교과서 엮는 이가 이녁 알음알이에 그치면 아이들은 문학을 보는 눈을 못 넓힙니다.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를 읽으며 한국 문학이 이렇게 따분하던가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시인이란 이름을 쓰는 사내는 왜 툭하면 ‘처녀’ 타령을 할까요? 한국에서 시를 쓰는 분은 왜 말장난을 즐길까요? 학교에서 이렇게 가르치고, 교과서에 이런 시를 담으며, 도서관도 이런 얼거리 문학만 갖추기 때문일까요? 창작에다가 비평이 모두 사내들 각시놀음과 말놀음에 매이는 탓일까요? 사회에 길들 적에는 글에서 힘이 사라집니다. 사회를 길들일 적에는 글에서 사랑이 스러집니다. ㅅㄴㄹ



처녀들이 사과를 받아서 두 손으로 닦은 뒤에 / 차곡차곡 궤짝에 담는다 사과가 / 코를 막고 한알씩 눈을 감았기 때문에 (덜컹거리는 사과나무/26쪽)


바다의 입이 강이라는 거 모르나 / 강의 똥구멍이 바다 쪽으로 나 있다는 거 모르나 / 입에서 똥구멍까지 / 왜 막느냐고 왜가리가 운다 / 꼬들꼬들 말라가며 꼬막이 운다 (왜가리와 꼬막이 운다/106쪽)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새벽달처럼 - 1997 제7회 서라벌문학상 수상작 문학과지성 시인선 197
김형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4월
평점 :
품절


노래책시렁 27


《새벽달처럼》

 김형영

 문학과지성사

 1997.4.21.



  서울 같은 고장으로 마실을 가면 별을 보기 아득합니다. 높은 집에 하늘이 거의 가리기도 하고, 하늘을 아예 볼 수 없는 길이 많으며, 전깃줄이 잔뜩 뒤얽히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이런 서울 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면 아주 자그마한 빛으로 반짝이는 별을 만나요. 별을 느끼면 별한테 속삭여요. 반가워, 널 여기에서도 만나니 좋구나. 《새벽달처럼》을 읽습니다. 1992년에 시집을 낸 분은 풀밭에 누워 보기도 했다지만, 요새는 서울에서 누울 만한 풀밭을 찾기 어려울 뿐더러, 풀밭에 눕는 이는 드물겠지요. 서울 같은 고장에 살며 아이들한테 별을 무어라 이를 만할까요? 눈으로 보기도 힘든 별이 왜 태어나고 어떻게 빛나며 우리 삶에 어떤 숨결인가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오늘 우리는 새벽바람으로 집을 나서서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하루가 되면서, 어른도 아이도 별을 가까이하기 힘든 나머지, 저녁별 밤별 새벽별 모두 잊은 하루일 수 있습니다. 별뿐 아니라 아침해 낮해 저녁해 모두 못 느끼는 삶일 수 있어요. 새벽달처럼, 새벽해처럼, 새벽을 열며 노래가 흐르기를 빕니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 머리로 별빛 햇빛 고이 퍼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풀밭에 누우면 풀과 알고 / 눈을 감으면 / 눈에 보이지 않던 것과 알고 (우리는 다 아는 사이/19쪽)


아빠, 저게 뭐야? / 별 / 별이 뭐야? / 이름이란다 / 그럼 그냥 별이라고 부르면 돼? / 그렇단다 / 아름답다라고 하면 안 돼? / 친구라고 하면 안 돼? / 엄마라고 하면 안 돼? (이름/58쪽)


(숲노래/최종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 개정판 민음의 시 43
손진은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노래책시렁 26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

 손진은

 민음사

 1992.4.30.



  오늘 우리가 잃거나 잊은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는 손짓기입니다. 먼저 사랑을 손수 짓는 길을 잃고, 삶을 손수 짓는 길을 잃으며, 마을이며 집을 손수 짓는 길을 잃습니다. 이러다가 옷이나 밥을 손수 짓는 길을 잊고, 노래랑 말이랑 이야기를 손수 짓는 길을 잃더니, 꿈하고 생각을 손수 짓는 길을 잊습니다. 옛날이 더 좋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얼마 앞서까지 우리는 누구나 집이나 옷이나 밥뿐 아니라, 삶도 사랑도 꿈도 손수 짓는 나날이었습니다. 《두 힘이 숲을 설레게 한다》를 읽으며 숲을 얼마나 설레게 돌아볼 만할까 하고 헤아리는데, 막상 숲을 다루는 글은 드뭅니다. 책이름에 낚였나 하고 생각했습니다만, 오늘날 이 나라 터전이야말로 이 모습 그대로이지 싶어요. 숲을 밀어내어 시멘트를 때려붓는 아파트를 잔뜩 지으면서 ‘푸른 마을’이란 이름을 붙이잖아요? 마구 삽질을 해대면서 ‘그린’이란 영어까지 끌어들여요. 큰 핵발전소를 더 짓거나 송전탑을 자꾸 박거나 바다나 갯벌에 위해시설까지 끌어들이려 하면서 ‘청정’이란 한자말을 붙이더군요. 시가 좀 투박하면 좋겠습니다. 문학이 참말 수수하게 풀내음이며 숲내음이 흐르기를 바라요. ㅅㄴㄹ



바람이 불 때 / 우리는 다만 가지가 흔들린다고 말한다 / 실은 나무가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 (시/15쪽)


바다로 가려다가 산을 택했다 / 오랜만에 벗어났음인지 모두들 싱글벙글 / 두 손을 입에 대고 야 하고 소리치니 / 저쪽 산이 야아아 되받는다 (메아리/54쪽)


(숲노래/최종규)




댓글(1)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손결 2019-10-03 11:17   좋아요 0 | URL
서평 잘 읽었습니다! 구매해주시고 정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자(와 그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