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비꽃 여인숙 민음의 시 105
이정록 지음 / 민음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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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5



시와 제비꽃

― 제비꽃 여인숙

 이정록 글

 민음사 펴냄, 2001.9.28. 8000원



  겨울이 저물고 봄이 찾아올 무렵, 우리 집 둘레로 온갖 봄꽃이 핍니다. 봄까지꽃이 피고, 코딱지나물꽃이 피며, 냉이꽃에 꽃다지꽃에 갓꽃이랑 유채꽃이랑 곰밤부리꽃이랑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집니다. 그런데, 이들 봄꽃은 한겨울에도 피어나기 일쑤이고, 겨울을 앞둔 늦가을에도 피어납니다.


  우리 집 마당하고 뒤꼍 곳곳에서 피는 제비꽃을 살피니, 이월에도 삼월에도 사월에도 피지만, 여름에도 한 차례 피고 지기도 하고, 구월과 시월과 십일월에도 피고 집니다. 그리고, 십이월과 일월에도 피고 집니다. 다만, 한 포기 사이에서 다달이 피고 지지는 않고, 한 포기 사이에서 해마다 두 차례씩 꽃하고 씨앗을 봅니다. 이 씩씩하면서 앙증맞도록 작은 꽃송이를 바라보는 동안 ‘보랏빛’이라는 빛깔을 ‘제비꽃빛’으로도 가리키면 더없이 곱겠네 하고 느껴요.



주걱은 / 생을 마친 나무의 혀다 / 나무라면, 나도 / 주걱으로 마무리되고 싶다 / 나를 패서 나로 지은 / 그 뼈저린 밥솥에 온몸을 묻고 / 눈물 흘려보는 것 (주걱)


고목이 쓰러진 뒤에 / 보았다, 까치집 속에 / 옷걸이가 박혀 있었다 / 빨래집게 같은 까치의 부리가 / 바람을 가르며 끌어올렸으리라 (아름다운 녹)



  이정록 님이 빚은 시집 《제비꽃 여인숙》(민음사,2001)을 읽습니다. 어른이 읽는 시도, 어린이가 읽는 시도, 또 어린이가 읽을 동화도 쓰는 이정록 님이 서른 한복판 나이를 가로지를 무렵 내놓은 시집입니다. 이제 쉰 살 나이를 지나가는 이정록 님인데, 서른다섯 살 무렵 바라보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하고, 쉰 살 무렵 바라보는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서로 어떻게 다를까요. 앞으로 예순 살이나 일흔 살에 이르면, 서른다섯이라는 나이는 어떻게 돌아볼 만할까요.



요구르트 빈 병에 작은 풀꽃을 심으려고) 밭두둑에 나가 제비꽃 옆에 앉았다) 나잇살이나 먹었는지 꽃대도 제법이고, 뿌리도 여러 가닥이다) 그런데 아니, 뿌리 사이에 굼벵이 한 마리 모로 누워 있다) 아기부처님처럼 주무시고 있다 (제비꽃 아래)



  우리한테는 모든 나이가 꼭 한 번씩입니다. 서른다섯 살도 한 번이고, 마흔다섯 살이나 쉰다섯 살도 한 번입니다. 스물다섯 살하고 열다섯 살도 오직 한 번뿐이지요. 그래서 이러한 나이를 거치는 동안 느끼거나 겪을 수 있는 삶도 오직 한 번뿐입니다.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이 가득한 한때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슬픔과 괴로움이 얼룩지는 한때일 수 있습니다. 때로는 바보스러울 수 있고, 때로는 훌륭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웃음꽃이요, 때로는 눈물꽃일 수 있어요. 어떤 모습이든 우리는 저마다 꼭 한 번 누리는 ‘나이’를 거치면서 차근차근 자랍니다.


  아이도 자라고 어른도 자라지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몸이랑 마음이 함께 자라지요. 아이는 키가 크고 몸이 불어납니다. 어른은 키나 몸이 더 불지 않는다고 여길 만한데, 힘살이나 아귀힘이나 굳은살이나 여러 가지 모습이 새롭게 바뀌거나 거듭나요.



올해 나는 서른일곱이 되었다 이제 나는 무엇과 무엇으로 딱히 가르지 않는다 덤덤해졌다 내 아랫배처럼 두루뭉실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두 아이의 이름이 섞이고 어머니와 아내가 섞이고 새끼토끼들의 고모와 이모가 섞이고 풀과 나무와 땔감이 섞이고 귀여운 토끼와 토끼탕이 섞이고 (토끼)



  시집 《제비꽃 여인숙》을 쓴 이정록 님이 읊은 서른일곱이 된 나이를 돌아봅니다. 아이들이 토끼처럼 자라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눈빛을 헤아립니다. 이제 이 토끼 같은 아이들은 어떤 숨결로 이곳에 설까요. 토끼 같은 아이들은 어느덧 어른이 되어 ‘새로운 토끼’를 찾는 사랑을 꿈꿀까요.


  아침에 감알을 썰어 아이들한테 건네면, 아이들은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 사랑해.” 하고 감알을 보며 외칩니다. 나도 감 한 알을 집어서 함께 먹습니다. 나는 한 알을 먹고 아이들은 두 알씩 먹습니다. 나는 한 알로도 넉넉한데, 아이들은 두 알로도 모자랍니다. 다 먹고 더 달라 하면 더 줍니다. 몸뚱이로 보자면 어른인 내가 훨씬 크고 힘도 세지만, 먹고 싶은 밥그릇으로 대자면 아이들도 어른 못지않습니다.


  아마 이러한 삶은 스스로 누리지 않는다면 모를 만합니다. 스스로 아이를 낳고, 스스로 아이를 사랑하면서, 스스로 꿈을 새로 낳으면서, 스스로 내가 나를 사랑하는 길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누나하고 부르면 / 내 가슴속에 / 붉은풍금새 한 마리 /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린다 (붉은풍금새)


새벽 이슬에 / 손마디가 /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새벽 이슬)



  아침 낮 저녁으로 뒤꼍으로 오르면 십일월이 무르익는 요즈음은 유자 익는 냄새가 물씬 퍼집니다. 고닥 뒤꼍에 설 뿐이지만 내 코는 유자 냄새를 큼큼 맡으면서 즐겁습니다.


  봄에 뒤꼍에 서면 매화꽃 내음이 가득 퍼집니다. 매화꽃이 질 무렵에는 모과꽃 내음이 고루 퍼지고,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에는 찔레꽃이랑 감꽃이 온몸을 따사로이 어루만져 줍니다.


  철마다 다른 꽃과 열매가 철마다 다른 숨결로 스며듭니다. 철마다 다른 풀과 꽃이 돋으면서 철마다 새로운 노래와 이야기가 퍼집니다. 그러니까, 아이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면 이 아이들은 꼭 한 번 지나가는 한 살 두 살 다섯 살 여섯 살 모두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홉 살 열 살도, 열네 살 열다섯 살도 새로운 몸짓이에요. 어른한테도 서른일곱 살이랑 마흔일곱 살이란 그야말로 새로우면서 재미난 삶자락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머니는 목이 부러진 / 내 알루미늄 숟가락을 버리지 않으셨다 / 부뚜막 작은 간장종지 아래에다 놔두셨는데 / 따뜻해서 갖고 놀기도 좋았다 눈두덩에도 대보고 / 배꼽 뚜껑을 만들기도 했다 / 둥근 조각칼처럼 생겼던 손잡이는 / 아끼기까지 하셨다 고구마나 감자를 삶을 때 / 외길로 둟고 간 벌레의 길을 파내시는 데 / 제격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이 부러진 숟가락)



  시 한 줄을 읽으면서 노래 한 가락을 읊습니다. 시 두 줄을 읽으면서 노래 두 가락을 읊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 나름대로 사랑을 짓고, 아이에서 어른으로 자라는 사람들은 이러한 삶결대로 새로운 사랑을 짓습니다.


  이정록 님을 낳은 어머님이 건사한 ‘목이 부러진 숟가락’은 어떠한 사랑이었을까요. 언뜻 보자면 그냥 ‘목이 부러진 숟가락’이지만, 이 숟가락으로 밥을 먹고 노래를 부르고 무럭무럭 자란 오랜 이야기가 깃든 노래주머니일 수 있습니다. 쓰레기통에 던지면 쓰레기이지만, 살강에 가만히 얹으면 알뜰살뜰 누리는 살림살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 먼 길, 내 책가방 속에는 / 돌멩이 가득했다 (돌의 이마를 짚다)



  삶을 노래하기에 시 한 줄입니다. 삶을 꿈꾸기에 시 두 줄입니다. 삶을 사랑하기에 시 석 줄입니다. 삶을 노래하지 못하면 시가 태어나지 못하고, 삶을 꿈꾸지 않으면 시가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 시를 씁니다. 아픔도 시로 쓰고 슬픔도 시로 쓸 뿐 아니라, 기쁨과 보람과 자랑과 꿈과 이야기와 웃음 모두 시로 씁니다.


  오늘도 아침에 마당 한쪽에 쪼그려앉아서 제비꽃을 들여다봅니다. 어제그제 찬비가 내려서 마당 한쪽 제비꽃은 꽃송이를 야무지게 닫습니다. 꽃송이를 벌린 제비꽃도 곱고, 꽃송이를 꼭 닫은 제비꽃도 곱습니다. 우리는 모두 고운 숨결로 어깨동무를 하는 사람입니다. 4348.11.9.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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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 꽃게 문학동네 동시집 4
박성우 지음, 신철 그림 / 문학동네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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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68



꿈을 키울 수 있는 이야기로 들려주기

― 불량 꽃게

 박성우 글

 신철 그림

 문학동네 펴냄, 2008.11.24. 8500원



  키가 1미터하고 30센티미터 가까이 큰 여덟 살 큰아이를 다독다독 하면서 재운 뒤 예전 사진을 돌아봅니다. 작은아이는 일찌감치 잠들었습니다. 큰아이가 갓 태어나던 날 찍은 사진을 보니 그야말로 조그맣습니다. 키가 1미터하고 30센티미터라 하더라도 어른 몸집에 대면 그리 크다 할 수 없으나, 한손에도 안을 수 있을 만큼 조그맣고 가볍던 숨결이 이만큼 컸으니 그야말로 크다고 느낍니다. 큰아이가 대여섯 살 무렵에는 두 아이를 한팔씩 감싸서 안고 걸을 수 있었으나, 이제는 두 아이를 한팔씩 안고서 걷지 못합니다.


  아이들이 갓 태어나던 무렵, 또 어머니젖을 물면서 자라던 무렵, 막 걸음마를 떼려고 하던 무렵 사진을 찬찬히 돌아보면서 새삼스레 느낍니다. 나는 이제껏 이 아이들이 앞으로 ‘어떤 대학교 졸업장’을 거머쥐어야 한다거나 ‘연봉 많이 받는 일자리’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생각은 할 일이 없으리라 느낍니다. 아이들한테 바라는 한 가지라면, 부디 어버이 사랑을 듬뿍 물려받으면서 너희 나름대로 새로운 꿈을 키우렴, 하는 마음입니다.



도대체 고추잠자리는 무얼 그릴까 // 고추잠자리가 그리는 그림은 / 동생이 그린 그림처럼 / 무엇을 그리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고추잠자리)



  박성우 님이 빚은 동시집 《불량 꽃게》(문학동네,2008)를 읽습니다. 책이름으로도 붙은 〈불량 꽃게〉는 “수평선을 찰카닥찰카닥 / 지 맘대로 자르며 노는 불량 꽃게”라고 합니다. “어깨를 으쓱 들고 / 건들건들 건들대다 / 잽싸게 도망치는 불량 꽃게”라고 해요.


  동시를 쓴 박성우 님 눈에는 꽃게가 ‘불량스럽게’ 보였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불량하지 않은’ 꽃게도 있을까요? 불량하지 않다면 ‘우량 꽃게’일까요, 아니면 ‘범생이 꽃게’일까요, 아니면 ‘얌전이 꽃게’일까요?


  가만히 보면 이 동시집에 나오는 이야기는 거의 다 학교와 집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룹니다.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불량·우량(모범)’으로 가릅니다. 시험성적으로 이를 가르고, 말씨와 몸짓을 놓고 이렇게 갈라요.



마당에서 노는데 / 할머니가 부른다 // 우리 똥강아지 어디 갔냐? // 강아지도 뛰어가고 나도 뛰어간다 (누굴 부른 걸까)



  동시는 아이들한테 재미난 말놀이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동시는 낱말 하나와 글월 하나를 알뜰히 엮어서 말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동시는 어른들이 지은 이 마을에서 아이들이 어른한테서 무엇을 물려받으면서 자랄 때에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박성우 님은 《불량 꽃게》라는 동시집에서 여러모로 말놀이를 잘 보여줍니다. 집하고 얽힌 이야기는 으레 할머니를 불러서 아이가 할머니한테서 새로운 모습을 느끼는 실타래를 풀어요.



토끼풀은 토끼풀 / 염소가 먹어도 토끼풀 / 토끼풀은 토끼풀 / 암소가 먹어도 토끼풀 / 토끼풀은 토끼풀 / 할머니가 먹일 때만 퇴깽이풀 (토끼풀)



  아이는 아이 나름대로 지켜보면서 배웁니다. 어른도 어른 나름대로 지켜보면서 가르칩니다. 아이는 좋고 싫거나 밉거나 나쁜 것을 가리지 않고 모두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배웁니다. 어른은 좋고 싫거나 밉거나 나쁜 것을 가리려 하면서 알맞게 가르치려고 합니다.


  동시를 쓸 적에는 어떤 마음이 될 때에 즐거울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은 어떤 동시를 읽으면서 꿈을 키울 만할까요? 아이들은 말놀이가 가득한 동시를 읽으며 말놀이는 배울 텐데, 말놀이 다음에는 무엇을 보거나 느껴서 무엇을 배울 만할까요? 말놀이 동시를 읽는 아이들은 어떤 꿈을 스스로 키우는 힘을 얻을 만할까요?



엄마가 마른 미역을 / 그릇에 담는 모습 / 지켜본 뒤에야 알았어 (미역)


아침에 보니 새끼 강아지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원래 눈을 감고 있어서 잠자는 줄 알았는데 만져 보니 땅땅하게 굳은 찰흙 뭉치 같았다 (새끼 강아지)



  어떤 사물을 좀 다르게 바라보는 눈길로 동시를 쓰기에 말놀이 동시가 됩니다. 그런데, 말놀이 동시는 어떤 사물을 좀 다르게 바라보는 눈길은 되지만, 한결 깊거나 넓게 들여다보거나 어루만지는 손길이나 품까지 이르지는 못하는구나 싶어요. 아이들한테는 ‘사실 알려주기’나 ‘사실 보여주기’에서 그치는 동시가 아니라, ‘삶을 사랑으로 가꾸는 꿈’을 함께 나누면서 어깨동무하는 길을 밝히는 동시로 나아갈 일이리라 느낍니다.


  왜냐하면, 동시는 어른시하고 다르게 ‘문학’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른시는 여러 실험시도 나오고 아주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을 담는 작품도 나올 만하지만, 동시에서는 실험시도 어려운 철학이나 사상도 섣불리 담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동시에 철학이나 사상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동시는 철학이나 사상을 어린이 눈높이와 삶자락에 맞추어서 부드럽고 쉬우면서 아름답게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어, 밴드가 다 어디 갔지?” 망치질하다 손가락을 다친 아빠가 / 약통에서 일회용 밴드를 찾았다 / 나는 그만 얼굴이 빨개졌다 // 아침에 일어나니까 / 책상 위에 예쁜 브래지어가 놓여 있었다 // 쪽지를 펴 보니까 아빠였다 (일회용 밴드)



  우리 어른들이 밥을 차려서 아이들한테 아침저녁을 먹일 적에는 영양소만 먹이지 않습니다. 영양소만 입에 집어넣는 몸짓은 밥먹기라고 하지 않습니다. 밥상맡에 들러앉은 어른하고 아이는 사랑을 나누지요. 밥 한 그릇으로도 사랑을 나누고, 반찬 한 점으로도 사랑을 나누어요.


  아이들은 밥 한 숟갈을 입에 넣고도 신나게 떠듭니다. 아이들은 배가 고프지만 이야기를 더 터뜨리고 싶어서 밥풀을 튀기면서 밥상맡에서 노래합니다.


  나들이를 다닐 적에도 아이들은 더 먼 좋은 곳에 가기를 바라지 않아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하고 신나게 뛰놀 수 있으면 어디이든 기쁘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여겨요. 아무리 대단한 놀이기구가 있다 한들, 아무리 멋진 자연 풍경이 흐르는 곳이라 한들, 제 어버이가 저하고 신나게 놀아 주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재미없거나 따분하거나 지겨워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동시에서도 말놀이로 재미나게 이야기를 빚으려고 하는 글쓰기가 나쁘지는 않습니다만, 말놀이 동시로만 그치면 아이들이 받아먹을 ‘마음밥’이 너무 적거나 없다는 뜻입니다.



메미와 귀뚜라미는 / 이어달리기 선수다 (매미와 귀뚜라미)


올챙이들은 / 쉼표를 마구마구 찍어 / 봄더러 천천히 가라 하지요 (올챙이)


새싹들이 / 햇살의 엉덩이에 / 봄 똥침을 놓는다 (봄 똥침)


내가 찍은 발자국은 / 과학자가 될까 선생님이 될까 (발자국)



  매미와 귀뚜라미가 “이어달리기 선수”라면, 그 다음에는 무엇일까요. “이어달리기 선수”라고 하는 어른들 눈높이로 바라보는 운동경기(스포츠) 이야기를 굳이 엮어야 했을까 궁금합니다. 어른시라면 “올챙이들은 쉼표를 마구마구 찍어” 같은 말놀이가 재미있을 만하지만, 동시에서 이러한 말놀이는 얼마나 재미있을까 궁금합니다. 새싹은 참말 “엉덩이 똥침”을 놓을까요? 아이들이 앞으로 나아갈 발자국은 “과학자나 선생님” 사이에서 더 나아가기 어려울까요? 아이들은 청소부가 되어도 아름답고, 농사꾼이 되어도 아름다우며, 가정주부가 되어도 아름답습니다. 어떤 일을 앞으로 찾아서 누리든, 아이들은 꿈을 키울 수 있을 때에 아름답습니다.


  처음부터 어떤 주어진 틀로 이야기를 빚는 동시에서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다면, 아이들이 스스로 꿈을 키우는 힘을 북돋우는 슬기를 글 한 줄에 실을 수 있다면, 오늘날 한국 동시는 사랑꽃을 활짝 피우리라 봅니다. 재미있는 동시를 쓰려면 쓰되, 재미와 함께 있을 꿈이랑 사랑이 삶으로 녹아드는 이야기를 가만가만 헤아린다면 더욱 즐거우리라 봅니다. 4348.1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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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창 세계사 시인선 143
김영승 지음 / 세계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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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시 101



맑은 마음이 되어 살림을 꾸리는 밑힘

― 화창

 김영승 글

 세계사 펴냄, 2008.6.30. 6000원



  어제는 낮부터 집안을 신나게 치웠습니다. 겨울을 앞두고 집안을 새로 꾸미려고 합니다. 그제는 겨울옷을 꺼내어 마당에 말렸고, 오늘은 깔개 하나만 마당에 말리고는 뚝딱뚝딱 책꽂이하고 피아노 자리를 바꾸었습니다. 이동안 두 아이는 어딘가에서 흙을 퍼 와서 마당에 쏟아부으면서 놉니다. 어쩌다가 누구한테 잡혀서 죽고 만 범나비 애벌레 곁에서 무덤도 살짝 덮어 주면서 흙놀이를 합니다.


  끝방에서 피아노를 빼내어 컴퓨터 있는 방으로 나를 즈음 큰아이가 묻습니다. “도와줄까?” 그렇지만 너는 이 피아노를 밀지도 못하는걸. 큰아이는 몸을 피아노에 붙이고 영차영차 용을 씁니다. “이 무거운 걸 어떻게 옮겨?” 그러게 말야. 피아노는 두 사람이서 날라야 하는데 혼자서 하자니 아주 죽겠는걸.


  온통 나무조각으로 이루어진 피아노이니 무거울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끝끝내 옮기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면서, 피아노를 톡톡 쓰다듬으면서, 새롭게 기운을 내 봅니다. 얘 피아노야, 마루를 살살 굴러서 옆방으로 가 보자. 우리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서 곧바로 피아노를 보며 ‘아침에 즐겁게 노래 한 가락 치면서 열까?’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해 주렴, 하고 속삭입니다.


  저녁에 잠자리에 들 무렵 큰아이한테 말합니다. “오늘은 이만큼만 하고 이튿날 마저 해야겠네.” “그럼요. 오늘 아버지 피아노 나르느라 힘들었잖아요. 다 알아요.”



사진은 / 오래된 사진첩 속에서 영정이고 / 權威를 획득하게 된다 (사진)


미친 개나리인 줄 알았더니 / 개나리 비슷한 안 미친 식물이었다 / 그 식물께 미안했다 // 남녘 어딘가에 개나리가 피었다는데 // 내 나이가 47인지 48인지 몰라 / 물어보았다 (미친 개나리)



  맑은 마음이 되어 살림을 꾸리는 밑힘이라면 언제나 ‘우리 아이들’이지 싶습니다. 예부터 집집마다 아이들이 참으로 많았어요. 예부터 집집마다 손수 옷을 짓고 밥을 짓고 집을 지었어요. 그 많은 아이들을 건사하면서 어떻게 옷이며 밥이며 집이며 손수 지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잘 알 수 없습니다. 이제 문화와 삶터가 모두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스스로 건사하면서 살림을 꾸리는 동안 어렴풋하게 깨닫습니다. 아이들은 ‘몸을 쓰는 힘’으로 살림을 거들지 않아도 언제나 반가우면서 고맙습니다. 아이들이 쓰는 마음이야말로 어버이나 어른이 새롭게 기운을 내도록 북돋우는 밑바탕이 됩니다.


  김영승 님 시집 《화창》(세계사,2008)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하늘이 맑게 개고, 사람들 마음속이 맑게 갭니다. 하늘이 맑게 갠다는 말은, 구름이 가득 끼어 찌푸리던 하늘이 새롭게 열린다는 뜻입니다. 사람들 마음속이 맑게 갠다는 말은, 온갖 근심에 걱정에 시름에 짜증에 골부림이 가득하던 마음속이 새롭게 트인다는 뜻입니다.



어디로 없어질까 // 천국이니 지옥이니 / 무인도니 // 관념의 공간들은 이미 / 가득 차 // 갈 곳도 없구나 (병술 대보름)


大地는 地雷를 大洋은 / 魚雷를 // 수용한 적도 / 생산한 적도 / 없다 地雷는 (지뢰밭의 괴뢰)



  시를 쓰는 김영승 님은 시를 쓰면서 이녁 마음속에 깃들던 구름(근심이든 걱정이든 짜증이든 골부림이든)을 하나씩 걷어냅니다. 구름 하나를 걷어내도 다른 구름이 아직 남고, 이 구름을 걷어내니 저 구름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름 걷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다른 구름이 자꾸 찾아들면 그때그때 다시 구름을 걷어내면 되어요. 맑은 하늘을 바라면서 구름을 걷어냅니다. 맑은 마음이 되기를 꿈꾸면서 시름이며 아픔을 걷어냅니다.


  언제나 스스로 거듭나려고 애씁니다. 언제나 스스로 노래하려고 목청을 틔웁니다. 남이 해 줄 수 없는 일입니다. 스스로 할 일입니다. 남이 불러 줄 수 없는 삶노래입니다. 스스로 부르면서 살림을 짓고 삶을 가꾸는 노래입니다.



아들이 갖고 놀던 / 노란색 반투명 플라스틱 물총 // 기관단총 같은 물총도 있었고 / 물총은 수십 개였으나 // 다 버리고 하나 남은 물총 // 이제 이 물총은 / 나의 취미 (물총)


할머니들은 / 여기가 어디예요? / 잘 묻는다 // 그 불안한 표정은 / 어머니다 (지게)



  작은아이가 자다가 발로 아버지를 걷어찹니다. 끄응 하고 잠을 깨며 손을 뻗습니다. 틀림없이 이불도 걷어찼을 테지. 맞습니다. 작은아이는 잠꼬대를 하며 까르르 웃습니다. 뭔 놀이를 하는데 잠자리에서도 이렇게 날아다닐꼬. 제 이불을 걷어찬 작은아이는 아버지 이불을 빼앗으려 합니다. 아니, 이러면 안 되지. 너 말이야, 말로 차고 이불도 뺏으면 어떡하니.


  부시시 일어나서 작은아이 이불을 찾아서 덮어 줍니다. 작은아이는 제 이불이 몸에 덮이자 이 이불을 꼭 끌어당깁니다. 네 이불 찾았지?


  얼마쯤 지나니 큰아이가 두 발을 내 몸에 올립니다. 너는 또 무슨 잠꼬대를 하느냐. 너는 네 꿈나라에서 어떤 신나는 놀이를 하느냐. 아이들이 발로 차든, 아니면 저희 발을 내 몸에 올리든 대수로울 일이 없습니다. 나는 가만히 있습니다. 가만히 있다가 손을 뻗어서 이 아이들이 이불을 잘 덮는지 살핍니다. 누운 채 팔만 뻗어서 이불깃을 여밀 수 있으면 이렇게 하고, 누운 채 할 수 없으면 부시시 일어나서 깜깜한 방을 밤눈을 밝혀서 이불을 찾아냅니다.



옛날 술 한창 마실 때 / 하도 잘 부러뜨리고 깨뜨리어 / 제일 싼 걸로 고른 것인데 // 아들은 그 안경을 멋있어 한다 자기도 / 똑같은 것을 썼다 (안경)


총이 있으면 쏘고 싶어진다 / 자지가 있으면 // 그러니까 없애야 한다. // 자지를 가지고 장난한 세월이 / 벌써 몇 년이냐 / 질리지도 않냐 (‘동전’으로 가지 말자)



  김영승 님이 노래하는 이야기에는 김영승 님이 나고 자란 삶이 또렷하게 드러납니다. 젊은 날 모습이 드러나고, 아이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드러나며, 곁님하고 어깨동무하는 나날이 드러납니다. 숨길 것도 가릴 것도 없어요. 은유나 비유를 쓰지 않아도 돼요. 한자말을 쓰든 영어를 쓰든 대단하지 않아요. 어떻게 하더라도 모두 ‘노래하는 사람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말마디입니다.


  아마, 말만 번드레레하게 시를 쓰려고 한다면, 이러한 시는 시조차 못 되리라 느낍니다. 겉보기로 번드레레하게 꾸미려고 한다면, 이러한 글은 글조차 못 되리라 느껴요.


  꾸며서 부르는 노래는 귀가 따갑습니다. 억지로 꾸며서 추는 춤은 눈이 아픕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라면 가락이 틀리거나 셈여림이 어긋나더라도 마음을 찡하게 울릴 만합니다. 가슴속에서 솟구치는 눈물이나 웃음을 부르는 노래라면 엇박자가 되더라도 가슴을 쩌렁쩌렁 울릴 만해요.



여고생들은 참 너무 예쁘다 / 가장 예쁜 나이이다 / 내가 예수라면 / 저 전철에 앉아 있는 / 여고생들을 보라 / 그렇게 말하겠다 (三美神)



  문득 생각해 보니, 1982년에 인천에서 첫발을 뗀 야구단 이름인 ‘삼미 슈퍼스타즈’에서 ‘삼미’는 한자로 ‘三美’로 적었습니다. 이 야구단이 경기를 벌인 곳은 도원야구장(또는 숭의야구장)이었고, 이 야구장 옆에는 중앙여상이라는 여고가 있고, 이 여고 옆에는 광성고라는 남고가 있습니다. 나는 이 학교들하고 야구장하고 퍽 가까운 신광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거의 날마다 야구장에 걸어가서 놀았습니다.


  어릴 적을 떠올리니, 남고생이 무리지어 지나갈 때면 무서워서 다른 골목을 찾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무렵 국민학생한테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은 거의 다 깡패처럼 보였고, 국민학생 주머니를 터는 중·고등학생이 몹시 많았어요. 어떤 동무는 야구장으로 놀러가다가 야구장갑이나 야구공을 빼앗기기도 했습니다. 국민학생인 동무들은 남자 중학생이나 고등학생하고는 눈조차 안 마주치려고 했습니다. 이와 달리 여중생이나 여고생이 지나가면 마음을 놓고 그 골목을 걸어갔습니다. 여중생이나 여고생 가운데에도 국민학생 주머니를 털던 깡패가 있었을 테지만, 나는 여중생이나 여고생 깡패를 마주친 적이 없고, 내 동무들도 이런 깡패는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고등학생이나 중학생이 된 남학생도 국민학생이던 무렵 똑같이 주머니가 털렸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되어 예전에 받은 아픔을 똑같이 되풀이할는지 모르지요. 예쁜 나이를 살면서 스스로 예쁜 줄 모르는 셈이라 할 테고, 아름다운 나이를 누리면서 스스로 아름다운 줄 모르는 셈이라 할 만합니다.



밤 버스는 // 내려줄 데를 내려주고 // 별로 진다. (밤 버스)



  날마다 별이 돋고 집니다. 날마다 해가 뜨고 집니다. 어제도 오늘도 밤별이 잘 보입니다. 구름이 거의 없습니다. 낮에는 시골자락 가을들이 가을볕에 잘 익고 잘 마릅니다.


  맑으면서 밝게 갠 가을 하늘처럼 내 마음도 맑으면서 밝은 숨결로 흐르도록 건사하자고 생각합니다. 즐겁게 노래하는 몸짓으로 밥을 짓고, 기쁘게 춤추는 손짓으로 우리 아이들하고 신나게 어우러져서 놀자고 생각합니다. 이제 시집을 살며시 덮습니다. 시집을 덮고 두 손에 그림책을 쥡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즐길 예쁜 그림책을 펼칩니다. 고운 그림에 고운 이야기가 어우러져서 새롭게 흐르는 사랑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4348.10.21.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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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창비시선 393
안희연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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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말하는 시 106



시와 버스

―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안희연 글

 창비 펴냄, 2015.9.30. 8000원



  아침에 군내버스를 타러 집을 나섭니다. 집을 나서기 앞서 감을 여덟 알 씻어서 조각조각 썹니다. 다섯 알은 큰 접시에 얹고, 석 알은 작은 접시에 담습니다. 아이들이 아침에 배고프다고 느끼면 스스로 찾아서 먹을 수 있도록 부엌에 있는 책상에 올려놓습니다.


  혼자 바깥일을 보려고 마실을 나와야 하면 무엇보다도 아이들하고 곁님이 집에서 무엇을 먹으면서 즐거이 지낼까 하고 헤아립니다. 곁님이 슬기롭게 잘 할 테고, 아이들도 씩씩하게 잘 지낼 테니, 나는 살짝 거든다는 생각으로 이것저것 가볍게 챙겨 놓습니다.


  두 아이가 배웅하는 웃음소리하고 노랫소리를 듣습니다. 어느덧 여덟 살하고 다섯 살인 두 아이는 아버지가 저희를 안 데리고 나가더라도 씩씩하게 웃고 노래를 해 줍니다. 나는 이 웃음이랑 노래를 가슴에 고이 담고서 군내버스를 타고 읍내로 갑니다. 읍내에서는 서울로 달리는 시외버스로 갈아탑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고 쓰면 / 눈앞에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며 일어나는 사람이 있다 (백색 공간)


그가 나에게 악수를 청해왔다 // 손목에서 손을 꺼내는 일이 / 목에서 얼굴을 꺼내는 일이 / 생각만큼 순조롭지 않았다 (액자의 주인)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를 달리면서 시를 읽습니다. 시집 한 권쯤 시외버스에서 가볍게 읽습니다. 도톰한 책을 한 권 꺼내어 또 읽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서울로 시외버스는 으레 다섯 시간 가까이 달립니다. 시집 한 권에 도톰한 책 두어 권쯤 넉넉히 읽을 만합니다. 책을 손에 쥐는 동안에는 바퀴 구르는 소리라든지 창문이 덜덜 떨리는 소리를 하나도 못 듣습니다. 오직 책에 깃든 이야기만 내 마음으로 스며듭니다.


  안희연 님이 빚은 시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창비,2015)를 읽습니다. 나이가 퍽 젊다고 할 안희연 님은 “네 슬픔”이 아닌 “너의 슬픔”이라고 글을 씁니다. 그러고 보면, 한국말은 “내 슬픔”이지만, “나의 슬픔”이라고 하는 일본 말투를 써야 말맛이 산다고 하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막일’ 같은 한국말은 말맛이 안 나서 ‘노가다’라고 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퍽 많습니다. ‘농땡이’나 ‘땡땡이’ 같은 일본말을 써야 비로소 ‘노닥거린다’거나 ‘빼먹는다’거나 하는 몸짓을 더 살갗 깊이 느낄 만하다고 여기는 사람도 꽤 많아요.



나는 땅에 작은 집을 그리고 / 그 안에 말없이 누워본다 // 이마를 짚으면 이마가 거기 있듯이 / 이마를 짚지 않아도 이마가 거기 있듯이 (물속 수도원)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입체 안경)



  요즈음 시외버스에는 창문이 있되 창문을 못 엽니다. 언제부터였을까요, 시외버스도 고속버스도 공항버스도 온통 통유리 버스입니다. 1980년대가 저물고 1990년대로 접어들 무렵부터일까요. 예전에는 시외버스도 통유리가 아니었습니다. 창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시외버스였어요. 버스에서 멀미를 하는 사람이 많아 버스마다 비닐봉지가 대롱거렸어요. 우리 어머니는 나랑 형을 시외버스에 태울 때면 언제나 비닐봉지를 여럿 챙기셨고, 어머니도 멀미를 하고 나도 멀미를 했습니다. 버스가 구불구불한 길을 여러 시간 달릴 때면 멀미를 여러 차례 하고는 해쓱해진 채 버스에서 내리기 일쑤였습니다.


  요새는 거의 모든 시외버스가 통유리일 뿐 아니라, 멀미를 하는 사람도 부쩍 줄었지 싶어요. 애써 비닐봉지를 챙겨서 속을 게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많이 어린 아이들이 버스에서 과자나 빵을 지나치게 먹다가 우웩하고 게우는 일만 더러 있을 뿐입니다.


  참말 사회도 문화도 문명도 시설도 아주 빠르게 바뀝니다. 이처럼 빠르게 바뀌는 흐름에 맞추어 사람들 몸하고 마음도 빠르게 바뀔 뿐 아니라, 말도 생각도 빠르게 바뀌는구나 싶어요.



건반을 누르지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습니다 // 아직 눌리지 않은 건반과 / 손이 지닌 모든 가능성 사이에서 / 그는 내게 끊임없이 지시를 내렸습니다 (피아노의 병)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빚은 안희연 님한테는 어떤 슬픔이 끼어들었을까요. 시를 쓰는 안희연 님은 이녁 이웃이 느끼는 슬픔 가운데 어떤 슬픔을 맞아들일까요.


  슬픔이 끼어든다고 할 적에는, 또 네 슬픔이 끼어든다고 할 적에는, 내가 여러모로 슬프고 괴로운데 네 것까지 나한테 얹혀진다는 뜻입니다. 내 슬픔으로도 벅차거나 힘든 마당에, 네 슬픔이 끼어들어 곱절로 벅차거나 힘들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들리지 않는 음악에 맞춰 / 다정히 춤을 추고 있다 // 물처럼 흔들리는 무릎과 / 호주머니 속의 못들 (포르말린)


날려 보내도 기어이 되돌아오고 / 더듬더듬 그 새를 살피고 / 이름이 필요해졌다는 이야기 (호우)



  전라남도 바닷가를 낀 시골자락에서 시외버스를 타면 서울까지 가는 길에 쉼터를 두 차례 들릅니다. 그나마 요새는 고속도로가 곳곳에 많이 뚫려서 두 차례를 쉰다고 할 만합니다. 예전에는 세 차례도 쉬고 네 차례도 쉬었을 테지요.


  고속도로가 늘어나서 더 빠르게 달릴 수 있는 만큼 시외버스는 창문을 꼭꼭 여밉니다. 통유리로 된 버스가 고속도로를 아주 빠르게 달리니, 예전에 예닐곱 시간이나 일고여덟 시간쯤 걸리던 길을 너덧 시간이면 가뿐히 달립니다. 예전에는 기나긴 길을 달리며 창문바람으로 멀미를 식히거나 가라앉혔다면, 이제는 멀미를 할 만큼 머나먼 길이 아니라고 할 만합니다.


  바야흐로 새로운 사회와 문화와 삶이라고 할까요. 새로운 사회와 문화와 삶에 맞추어 시도 소설도 문학도 모두 새로운 흐름이 불거진다고 할까요. 이제는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떠나는 사람이 매우 적으니까, 처음부터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늙고, 서울에서 아이를 낳는 사람이 매우 많으니까, 오늘날 사회에서는 ‘고향은 그냥 서울’인 흐름으로 뿌리를 내리지 싶어요. 오늘날 사회에서는 어버이 고향도 서울이요 아이 고향도 서울인 흐름이 굳어지지 싶어요. 전라말이나 경상말은 한 번도 들을 수 없이, 그저 서울에서 살며 표준말만 듣고 교과서와 영화와 책과 연속극에 나오는 표준말로만 생각을 다스리는 흐름으로 뒤바뀌지 싶어요. 시골에서 태어나서 자라는 ‘몹시 드문’ 아이들도 시골말이나 고장말은 거의 듣지 못하면서 서울 표준말로만 배우고 방송이나 영화를 보면서 자라지 싶어요.



저런 건 우리 집 마당에서 얼마든지 있잖아 멀리 오면 바람의 방향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돌덩이들은 점점 빛을 잃어갔다 기차가 사라지고 있어 누군가 다급히 소리쳤고 (그럼 이건 누구의 이빨자국이지?)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 너무 오래 슬퍼하지는 않기를. 밤낮없이 바다만 들여다보는 사람들에게. / 아주 오래된 옛날에. 나는 이곳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아. 신이 떨군 커다란 눈물방울. 영원히 마르지 않는. (슬리핑백)



  고속도로를 새로 놓는 만큼 버스는 훨씬 빨리 달립니다. 얼마 앞서까지 시골하고 서울은 참으로 멀리 떨어졌다고 한다면, 이제 시골하고 서울은 무척 가깝다고 할 만합니다. 고속도로가 늘어나는 만큼 숲과 들은 깎이거나 무너졌고, 시골도 도시도 옛날보다는 덜 맑은 바람을 마십니다. 고속도로가 새로 생기는 만큼 하늘은 차츰 지저분해지고, 뭇별이나 미리내도 천천히 자취를 감춥니다.


  하늘에 뜬 별이 사라지면서 땅에 전깃불이 밝습니다. 지구를 둘러싼 너른 우주에 가득한 별을 늘 바라보던 삶이 저물면서, 지구 곳곳에 커다란 도시가 더욱 커지는 삶이 퍼집니다.


  도시 내음이 물씬 풍기는 현대 시문학 가운데 하나인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를 시골 시외버스를 타고 서울로 마실을 하면서 읽습니다. 도시하고 가까울수록 나무가 줄어들고 풀하고 꽃도 자취를 감추는 이 고속도로에서 시집 한 권을 천천히 읽은 뒤 가만히 눈을 감습니다. 오늘 시외버스로 달리는 이 길이 서른 해쯤 앞서는 어떤 숲이었는가 하고 헤아려 봅니다. 삼백 해쯤 앞서는 이 자리에서 범이나 이리나 여우나 곰이나 늑대가 어슬렁거렸을 테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삼천 해쯤 앞서 이 자리는 어떠한 이야기가 벌어지는 곳이었을는지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앞으로 서른 해 뒤에는, 삼백 해 뒤에는, 삼천 해 뒤에는, 이 자리가 어떻게 바뀔는지 어림해 봅니다. 한낮에는 아직 가을볕이 매우 뜨겁습니다. 4348.10.15.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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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마술사 문지아이들 111
정두리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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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사랑하는 시 71



‘아이를 구경하는 동시’는 좀 재미없다

― 신나는 마술사

 정두리 글

 노인경 그림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1.8.16. 9000원



  정두리 님이 빚은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문학과지성사,2011)를 가만히 읽어 봅니다. 정두리 님은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지켜본 눈길로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을 테고,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을 테지요.


  동시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쓰는 시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어른 눈길이 쉬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양이 잠〉이라든지 〈모란 장날〉 같은 동시는 ‘어른이기 때문에’ 쓰는 동시입니다. 어린이가 동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처럼 안 쓰리라 느껴요. 바라보는 자리와 눈길이 사뭇 다르니까요. 어린이가 장날에 장마당에 갈 적에 ‘장 구경’을 하지, 장마당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구경하지 않습니다. 시골 장마당에 사람이 적거나 없다는 얘기는 언제나 어른이 합니다.



기웃거리는 사람보다 / 파는 사람이 많은 / 비 오는 장날 (모란 장날)


턱 받치고 / 오그리며 자다가 움찔, / 그러다 다시 잔다 // ―얘, 제대로 누워 자라 (고양이 잠)



  나비도 하늘을 날기에 날개가 있습니다. 다만 나비한테는 깃털은 없고 날개만 있어요. 통으로 된 날개이지요. 이와 달리 새한테는 깃털이 있습니다. 아니, 새는 깃털이 모여서 날개를 이루지요. 그래서 새는 ‘날개깃’이 있습니다만, 나비한테는 날개깃이 없어요. 〈빗방울〉이라는 동시에 나오는 ‘날개깃’이라는 낱말은 곰곰이 따져야 하리라 느낍니다.


  나비한테 깃털이 없다 하더라도 “나비도 날개깃을 오므렸다”처럼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른이 쓰고 읽는 시에서 말하는 ‘문학적 허용’을 어린이가 읽는 동시에까지 해야 할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린이는 동시를 문학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동시를 ‘문학’에 앞서 ‘이야기’로 읽고 ‘말’로 읽어요. 어린이는 동시나 동화를 읽으면서 이야기뿐 아니라 말을 배웁니다.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말마디라고 하더라도 어린이문학에서는 낱말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서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나 동화를 빚는 어른은 언제나 어린이한테 ‘말을 가꾸는 길’하고 ‘말을 살려서 이야기를 짓는 길’하고 ‘말을 사랑하여 삶을 함께 사랑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비 오는 날 / 호박꽃이 입을 꼬옥 다물었다 / 나비도 날개깃을 오므렸다 (빗방울)


비 오는 날 / 빨리 오는 어둠 / 자동차 불빛이 물에 젖어 / 찻길에 긴 줄로 떠다닌다 / 모두 젖어 눅눅하다 (장마 그친 날)



  〈장마 그친 날〉 같은 동시도 그야말로 어른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시는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모습을 어른이 바라보는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동시에도 어른 눈길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니,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한테 새로운 눈길과 생각을 드러내 보이면서 이야기를 베푸는 만큼, 언제나 어른 눈길과 생각이 나타날 테지요. 그런데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에 나오는 동시는 너무 어른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가을 햇살〉을 보면 “빨래를 걷어 / 옷으로 개키고”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즘 어린이 가운데 이러한 집일을 하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투실한 햇사과 / 소쿠리에 담고 일어서면” 같은 시골일을 거드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니면, 어른이 일하는 모습을 어린이가 옆에서 구경하거나 지켜본 이야기를 썼다고 여겨야 할까요.



빨래를 걷어 / 옷으로 개키고 / 투실한 햇사과 / 소쿠리에 담고 일어서면 // 어느새, / 해 그림자 접어지는 / 가을 저녁나절 (가을 햇살)



  문학에서는 흔히 ‘완상’이라는 어려운 말을 씁니다.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는 ‘어린이를 아끼는 어른으로서 풍경을 완상하는 작품’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면, 완상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에서 이 한자말을 찾아보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玩賞’이고, “즐겨 구경함”을 뜻합니다. 둘째, ‘傷’이며, “매우 슬퍼함. 또는 슬퍼서 마음이 상함”을 뜻합니다. 셋째, ‘頑喪’이고, “완고하고 거만한 상제”를 뜻합니다. 둘째와 셋째는 아닐 테고 첫째 ‘완상’이겠지요. 그리고 한국말사전에 둘째나 셋째 완상은 없어도 될 만하리라 봅니다. 더 생각해 보면, 첫째 완상도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즐겨 구경함”은 이 말대로 쓸 때에 뜻이 또렷하거든요. 그냥 “즐겨 구경함”이라 말하면 되지, 애써 한자를 빌어 ‘玩賞’ 같은 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는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즐겨 구경하는 눈길”이 짙게 나타납니다.



입안에 가득차는 / 삼키기 넉넉한 / 달큼한 수박 물 // 어느새 입술 위에 / 점으로 앉은 까아만 씨앗. (수박 이야기)


작아서 / 귀여운 건 / 꽃도 그렇지 // 작은 으아리꽃 (작은 으아리꽃)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쓰는 동시이기에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동시일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더 살펴본다면, 어린이는 ‘어린이를 어른이 지켜보면서 쓰는 글’을 재미있어 하거나 즐겁게 여길 만할까 같은 대목을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수박 이야기〉를 어른이 지켜본 모습으로만 쓰는 동시하고, 어린이가 수박을 먹는 기쁨이나 재미를 쓰는 동시가 있으면, 어린이는 어느 동시를 즐겁거나 재미있게 읽을까요? 〈작은 으아리꽃〉을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작아서 귀엽다고 노래하는 동시를 쓸 수도 있으나, 어린이 눈길로 으아리꽃을 본다면, 어린이는 이 꽃이 ‘작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크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작고 크다’가 아닌 ‘예쁜 꽃’이라고 느낄까요?



조용한 오후 / 설핏 들었던 낮잠 깨면 / 더위를 가르는 매미 소리 (혼자 있는 날)



  아이들하고 함께 놀면 어른도 즐겁거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꾸미거나 짓는 놀이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이 스스로 꾸미거나 짓는 놀이를 어른이 아이들 사이에 섞여 들면서 놀면 한결 즐겁거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보기에 말도 안 된다고 여길 만한 규칙으로 논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말이 되게 놀’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놀고 그냥 웃고 그냥 노래하면 돼요.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일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어린이가 노는 모습만으로도 그야말로 재미있지요. 어린이는 잠을 자든 밥을 먹든 놀이를 하든 모든 몸짓이 사랑스럽고 귀엽지요.


  이리하여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동시를 쓰는 어른은 으레 ‘완상’이라든지 ‘동심 천사주의’에 쉽게 빠지고 맙니다. 지켜보거나 구경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함께 지내는 어른으로서 스스럼없이 아이들하고 섞여서 논다면, 이때에는 ‘완상’이나 ‘동심 천사주의’ 같은 동시를 못 씁니다. 아이들하고 웃고 떠들면서 노는 재미와 즐거움을 온몸으로 누리기 때문에, 어린이 눈길과 눈높이에서 ‘놀고 웃고 노래하고 뛰고 달리는 기쁨’을 동시로 풀어낼 테지요.


  어린이도 마냥 놀기만 하지 않고 때때로 차분히 앉아서 구름바라기나 해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한테 ‘사물을 차분히 지켜보거나 구경한 뒤에 이 느낌을 글로 써 보도록 이끄는 일’도 뜻있습니다. 다만, 동시집 한 권이 너무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이야기’로만 가득하다면, 여러모로 기운이 빠집니다. 동시를 쓰는 어른이 할머니나 할아버지 나이라 하더라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이녁 손자 손녀하고 즐겁게 손을 잡고 놀듯이, 동시에서도 어린이 놀이와 웃음과 노래가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마술사나 마법사 이야기도 재미있을 테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이름 없는’ 마술사요 마법사입니다. 4348.10.1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비평/어린이문학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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