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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는 마술사 ㅣ 문지아이들 111
정두리 지음, 노인경 그림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평점 :
시를 사랑하는 시 71
‘아이를 구경하는 동시’는 좀 재미없다
― 신나는 마술사
정두리 글
노인경 그림
문학과지성사 펴냄, 2011.8.16. 9000원
정두리 님이 빚은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문학과지성사,2011)를 가만히 읽어 봅니다. 정두리 님은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지켜본 눈길로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을 테고, 아이들을 아끼는 마음으로 오랫동안 동시를 쓰셨을 테지요.
동시는 어린이가 아닌 어른이 쓰는 시입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어른 눈길이 쉬 드러나기도 합니다. 〈고양이 잠〉이라든지 〈모란 장날〉 같은 동시는 ‘어른이기 때문에’ 쓰는 동시입니다. 어린이가 동시를 쓴다고 할 적에는 이처럼 안 쓰리라 느껴요. 바라보는 자리와 눈길이 사뭇 다르니까요. 어린이가 장날에 장마당에 갈 적에 ‘장 구경’을 하지, 장마당에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는 구경하지 않습니다. 시골 장마당에 사람이 적거나 없다는 얘기는 언제나 어른이 합니다.
기웃거리는 사람보다 / 파는 사람이 많은 / 비 오는 장날 (모란 장날)
턱 받치고 / 오그리며 자다가 움찔, / 그러다 다시 잔다 // ―얘, 제대로 누워 자라 (고양이 잠)
나비도 하늘을 날기에 날개가 있습니다. 다만 나비한테는 깃털은 없고 날개만 있어요. 통으로 된 날개이지요. 이와 달리 새한테는 깃털이 있습니다. 아니, 새는 깃털이 모여서 날개를 이루지요. 그래서 새는 ‘날개깃’이 있습니다만, 나비한테는 날개깃이 없어요. 〈빗방울〉이라는 동시에 나오는 ‘날개깃’이라는 낱말은 곰곰이 따져야 하리라 느낍니다.
나비한테 깃털이 없다 하더라도 “나비도 날개깃을 오므렸다”처럼 시를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른이 쓰고 읽는 시에서 말하는 ‘문학적 허용’을 어린이가 읽는 동시에까지 해야 할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어린이는 동시를 문학으로만 읽지 않습니다. 어린이는 동시를 ‘문학’에 앞서 ‘이야기’로 읽고 ‘말’로 읽어요. 어린이는 동시나 동화를 읽으면서 이야기뿐 아니라 말을 배웁니다.
살짝 스치고 지나가는 말마디라고 하더라도 어린이문학에서는 낱말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서 제대로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나 동화를 빚는 어른은 언제나 어린이한테 ‘말을 가꾸는 길’하고 ‘말을 살려서 이야기를 짓는 길’하고 ‘말을 사랑하여 삶을 함께 사랑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비 오는 날 / 호박꽃이 입을 꼬옥 다물었다 / 나비도 날개깃을 오므렸다 (빗방울)
비 오는 날 / 빨리 오는 어둠 / 자동차 불빛이 물에 젖어 / 찻길에 긴 줄로 떠다닌다 / 모두 젖어 눅눅하다 (장마 그친 날)
〈장마 그친 날〉 같은 동시도 그야말로 어른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동시는 도시 한복판에서 만나는 모습을 어른이 바라보는 눈길이자 생각입니다.
동시에도 어른 눈길과 생각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아니, 동시는 어른이 어린이한테 새로운 눈길과 생각을 드러내 보이면서 이야기를 베푸는 만큼, 언제나 어른 눈길과 생각이 나타날 테지요. 그런데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에 나오는 동시는 너무 어른스럽지 않나 싶습니다. 〈가을 햇살〉을 보면 “빨래를 걷어 / 옷으로 개키고” 같은 이야기가 나오는데, 요즘 어린이 가운데 이러한 집일을 하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투실한 햇사과 / 소쿠리에 담고 일어서면” 같은 시골일을 거드는 어린이는 얼마나 될까요. 아니면, 어른이 일하는 모습을 어린이가 옆에서 구경하거나 지켜본 이야기를 썼다고 여겨야 할까요.
빨래를 걷어 / 옷으로 개키고 / 투실한 햇사과 / 소쿠리에 담고 일어서면 // 어느새, / 해 그림자 접어지는 / 가을 저녁나절 (가을 햇살)
문학에서는 흔히 ‘완상’이라는 어려운 말을 씁니다.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는 ‘어린이를 아끼는 어른으로서 풍경을 완상하는 작품’이라고 여길 만합니다. 그러면, 완상이란 무엇일까요? 한국말사전에서 이 한자말을 찾아보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첫째, ‘玩賞’이고, “즐겨 구경함”을 뜻합니다. 둘째, ‘惋傷’이며, “매우 슬퍼함. 또는 슬퍼서 마음이 상함”을 뜻합니다. 셋째, ‘頑喪’이고, “완고하고 거만한 상제”를 뜻합니다. 둘째와 셋째는 아닐 테고 첫째 ‘완상’이겠지요. 그리고 한국말사전에 둘째나 셋째 완상은 없어도 될 만하리라 봅니다. 더 생각해 보면, 첫째 완상도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즐겨 구경함”은 이 말대로 쓸 때에 뜻이 또렷하거든요. 그냥 “즐겨 구경함”이라 말하면 되지, 애써 한자를 빌어 ‘玩賞’ 같은 말을 써야 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동시집 《신나는 마술사》는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즐겨 구경하는 눈길”이 짙게 나타납니다.
입안에 가득차는 / 삼키기 넉넉한 / 달큼한 수박 물 // 어느새 입술 위에 / 점으로 앉은 까아만 씨앗. (수박 이야기)
작아서 / 귀여운 건 / 꽃도 그렇지 // 작은 으아리꽃 (작은 으아리꽃)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쓰는 동시이기에 나쁘지도 않고 좋지도 않습니다. 그저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모습이 드러나는 동시일 뿐입니다. 이 대목에서 더 살펴본다면, 어린이는 ‘어린이를 어른이 지켜보면서 쓰는 글’을 재미있어 하거나 즐겁게 여길 만할까 같은 대목을 생각해야지 싶습니다.
〈수박 이야기〉를 어른이 지켜본 모습으로만 쓰는 동시하고, 어린이가 수박을 먹는 기쁨이나 재미를 쓰는 동시가 있으면, 어린이는 어느 동시를 즐겁거나 재미있게 읽을까요? 〈작은 으아리꽃〉을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작아서 귀엽다고 노래하는 동시를 쓸 수도 있으나, 어린이 눈길로 으아리꽃을 본다면, 어린이는 이 꽃이 ‘작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크다’고 느낄까요? 아니면 ‘작고 크다’가 아닌 ‘예쁜 꽃’이라고 느낄까요?
조용한 오후 / 설핏 들었던 낮잠 깨면 / 더위를 가르는 매미 소리 (혼자 있는 날)
아이들하고 함께 놀면 어른도 즐겁거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꾸미거나 짓는 놀이도 아이들이 재미있어 할 수 있으나, 아이들이 스스로 꾸미거나 짓는 놀이를 어른이 아이들 사이에 섞여 들면서 놀면 한결 즐겁거나 재미있습니다. 어른이 보기에 말도 안 된다고 여길 만한 규칙으로 논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은 ‘말도 안 되는 규칙을 말이 되게 놀’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그냥 놀고 그냥 웃고 그냥 노래하면 돼요.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일은 무척 재미있습니다. 어린이가 노는 모습만으로도 그야말로 재미있지요. 어린이는 잠을 자든 밥을 먹든 놀이를 하든 모든 몸짓이 사랑스럽고 귀엽지요.
이리하여 어린이를 지켜보거나 구경하면서 동시를 쓰는 어른은 으레 ‘완상’이라든지 ‘동심 천사주의’에 쉽게 빠지고 맙니다. 지켜보거나 구경하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을 돌보면서 함께 지내는 어른으로서 스스럼없이 아이들하고 섞여서 논다면, 이때에는 ‘완상’이나 ‘동심 천사주의’ 같은 동시를 못 씁니다. 아이들하고 웃고 떠들면서 노는 재미와 즐거움을 온몸으로 누리기 때문에, 어린이 눈길과 눈높이에서 ‘놀고 웃고 노래하고 뛰고 달리는 기쁨’을 동시로 풀어낼 테지요.
어린이도 마냥 놀기만 하지 않고 때때로 차분히 앉아서 구름바라기나 해바라기나 꽃바라기를 합니다. 그래서 어린이한테 ‘사물을 차분히 지켜보거나 구경한 뒤에 이 느낌을 글로 써 보도록 이끄는 일’도 뜻있습니다. 다만, 동시집 한 권이 너무 ‘지켜보거나 구경하는 이야기’로만 가득하다면, 여러모로 기운이 빠집니다. 동시를 쓰는 어른이 할머니나 할아버지 나이라 하더라도,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이녁 손자 손녀하고 즐겁게 손을 잡고 놀듯이, 동시에서도 어린이 놀이와 웃음과 노래가 더 드러날 수 있기를 빕니다. 신나게 뛰노는 아이들 이야기가 재미있습니다. 마술사나 마법사 이야기도 재미있을 테지만, 아이들이야말로 ‘이름 없는’ 마술사요 마법사입니다. 4348.10.11.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동시비평/어린이문학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