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아버지하고만 열엿새

 


  아이 어머니가 람타 공부를 하러 미국으로 간 지 열엿새 지나고 열이레째 된다. 앞으로 나흘 뒤면 집으로 돌아온다. 아이들은 밥 잘 먹고, 잘 뛰어놀고, 잘 노래하며, 둘이 서로 다투다가도 사이좋게 어울리면서 하루를 누린다. 아이들과 들마실이나 숲마실 틈틈이 다니는데, 아이들한테 따순 밥 먹이려고 미리 밥을 지어 놓지는 않고, 끼니에 맞추어 밥을 지으니, 여러모로 손 쓸 일 많으며, 큰아이와 작은아이가 배고프다 낑낑대는 고비를 살짝 맞이하곤 한다. 배고프다 낑낑거릴 즈음 밥을 다 차리고, 아이들은 밥상 다 차릴 때까지 예쁘게 기다리다가는 참말 맛나게 밥그릇 싹싹 비운다.


  아이 아버지 혼자 열엿새째 아이들 돌보며 먹이고 지낸 엊저녁, 두 아이 재우느라 한 시간 반 남짓 자장노래 부르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큰아이가 드디어 도란도란 읊던 말 멈추고 꼬물락꼬물락 하던 몸짓 그칠 즈음, 슬슬 일어나서 내 일을 할까 싶었으나, 등허리가 안 펴져 나도 아이들 곁에서 곯아떨어진다. 얼추 네 시간 이런저런 꿈을 꾸며 잠에 빠진다.


  작은아이 안던 팔을 뺀다. 조금 저리지만, 이렇게 안아야 작은아이가 잘 잔다. 큰아이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려 제 발을 내 몸에 척 얹으며 잔다. 큰아이 발을 살살 들어 옆으로 내려놓는다. 두 아이 이불깃 여미고 옆방으로 나온다. 아이들 오줌그릇 들고 마당으로 내려온다. 밤별 올려다본다. 묵히는 밭에 오줌을 뿌린다. 기지개를 켜니 등허리 뼈에서 우두두둑 소리 난다. 물 한 모금 마신다. 새벽 두 시 오십오 분. 달게 잤는가. 좀 쉬었는가.


  지난밤 큰아이하고 백쉰까지 숫자를 셌다. 쉰 즈음 숫자를 셀 무렵, 아하 내 어머니도 나하고 형한테 잠자리에서 이렇게 숫자를 세며 잠을 재우기도 하고, 숫자를 익히도록 이끌기도 했다고 떠오른다. 꽤 오래된 일 아련하게 떠오른다. 꽤 많이 어리던 날에는 숫자 이백을 가까스로 셌고, 좀 자라고 나서는 천이나 이천까지 셌다고 떠오른다. 그러고 보니, 큰아이가 여섯 살로 접어든 올 일월이나 이월만 하더라도 숫자를 똑바로 못 셌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며 으레 일곱이나 여덟이나 아홉을 거꾸로 센다든지, 숫자를 적을 때에도 앞뒤가 바뀌거나 뒤집어 그린다든지 했다. 삼월에 접어들고 사월이 되니, 큰아이는 숫자를 스물까지 똑바로 셀 수 있고, 숫자쓰기도 알맞게 잘 한다. 숫자를 백마흔다섯 셀 무렵 큰아이가 갑자기 많이 힘들어 해서, 꼭 백쉰까지 맞추고 그만 셌다. 자장노래를 부를 적에도 스무 가락쯤 부르니 잘 듯 말 듯하더니 더 불러 달라 하고, 또 열 가락쯤 부르니 기어드는 목소리로 더 불러 달라 하고,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한 끝에, 아버지도 침이 말라 더는 못 부르고, 큰아이도 더 불러 달란 말 없이 다 함께 까무룩 곯아떨어진다.


  하루가 흐른다. 하루가 저물고, 하루가 열린다. 하루하루 새롭게 자라고, 하루하루 새롭게 살아간다. 오늘 밤에는 휘파람새 노랫소리 안 들린다. 4346.4.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아빠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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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잘 논 아이들 쉬를 누이고 물을 마시도록 한 다음, 하나씩 안아 잠자리에 누인다. 이불깃 여미고 한손으로 한 아이씩 머리카락 쓰다듬으면서 조곤조곤 자장노래 부른다. 내가 뽑을 수 있는 가장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 문득 느낀다. 이렇게 내 목소리가 좋을 수 있구나, 이 좋은 목소리로 여느 때에 아이들과 얘기하고 그림책 읽으면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가장 좋은 사랑을 받아먹을 수 있구나.


  잠자리 30분 자장노래 부르면서 생각한다. 잠자리 30분만이 아니라 하루 내내 스스로 가장 맑은 눈빛과 목청과 손길 되어 살아가면, 내 마음은 어떤 모습이 될까. 4346.4.10.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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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헌책방 마실

 


  비가 뿌리는 토요일 아침, 아이들과 길을 나선다. 날이 맑다면 마당에서 아이들 놀게 하다가 밥을 먹이고, 밥을 먹은 뒤에는 들마실 나가면 된다. 비가 뿌리면서 바람도 드세게 부니, 오늘은 하루 내내 집에만 있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고흥읍에서 시외버스 타고 순천까지 마실을 가 보기로 한다. 아이들은 처음에는 읍내로 군내버스 타고 나가니 좋아라 하다가, 시외버스를 타니 멀미를 하는지 고단한 얼굴이 된다. 그래, 군내버스까지는 좋지만, 한 시간 달리는 시외버스는 좀 힘들지. 게다가 너희들은 순천 헌책방 마실을 마친 뒤에 다시 이 시외버스를 타고 고흥으로 돌아와야 한다구.

 

  아이들한테는 들판이고 숲이고 바다이고, 또 헌책방이고 놀이공원이고 할머니 할아버지 댁이고, 딱히 대수롭지 않다. 아이들한테는 어디이든 놀이터이다. 아이들로서는 어디이든 노래하고 춤추며 뒹굴고 싶은 놀이터이다. 아이들은 즐겁게 놀면 즐겁고, 맛있게 먹으면 맛있다. 아이들하고 굳이 어디를 찾아가야 하지 않다. 아이들한테 꼭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다. 아이들은 스스로 가고픈 데를 찾아서 놀고, 아이들은 스스로 보고픈 것을 찾아서 본다. 어른들은 아이들이 다치지 않거나 걱정할 것 없는 보금자리와 마을살이 일구면 된다. 다른 모든 것은 아이들 스스로 알아서 한다.


  헌책방은 아버지가 가고 싶으니 간다. 좀 먼 바깥마실 또한 아버지가 가고 싶으니 간다. 아버지 혼자 두 아이 당차게 데리고 다닐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다닌다. 내 어릴 적에 어머니가 나랑 형 둘을 데리고 씩씩하게 잘 다니셨다고 떠올리면서 마실을 한다. 그런데, 워낙 오래도록 시골집에서 지내고, 더러 읍내나 면소재지 살짝 들른 탓일까. 큰아이가 가게 화장실 쓰기를 꺼린다. 밖에서 쉬를 누고 싶다 한다. 문득 그럴 만하겠다고 느낀다. 시골집에서 아이들은 마당이나 마루를 바라보는 훤히 트인 자리에서 쉬나 똥을 눈다. 때로는 마당 한쪽이나 뒷밭에서 쉬나 똥을 눈다. 높은 벽으로 꽉 막힌 좁은 자리가 아이들한테는 안 달가울 수 있다.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밖이 훨씬 좋으니, 게다가 시골에서는 일부러 밭에 쉬를 누고 거름자리 만들기까지 하니, 도시에 마실을 가서 볼일 보기란 그리 즐겁지 않다.


  집으로 돌아오고 보니, 참말 집이 가장 좋다. 그냥 집에서 놀걸 그랬나. 여름에 찾아들 장마철에도 으레 집에서 놀 텐데, 비오는 시골집을 누릴 때가 한결 나았으려나. 그래도 아버지는 너희 둘 데리고 살짝 먼 나들이 다녀오고 싶었으니, 아버지를 귀엽게 봐주기를 바란다. 봄비 쏟아진 오늘 하루 살짝 다른 바깥마실 해 보고 싶었으니, 아버지를 예쁘게 헤아려 주기를 바란다. 4346.4.7.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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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4-07 08:58   좋아요 0 | URL
책방 놀이터 같네요. 아이들이 재밌겠어요.
가끔 나들이를 해야 집의 소중함과 편안함을 알게 되죠.
누군가가 쓴 글, 여행을 떠나는 건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다, 라는 글이 떠오릅니다. ^^

숲노래 2013-04-07 09:13   좋아요 0 | URL
집으로 돌아오려고 여행을 떠난다니... 음... 그러면 집에서 여행을 해도 되겠군요
^^;;;;;;
 

큰식구 사는 집

 


  우체국 일꾼이나 택배 일꾼, 또 마을 어르신 들이 우리 집에 들를 때면 으레 묻는다. “아니 이 집에 애가 몇이오?” 큰아이가 저지르는 짓 하나 때문에 모두들 무척 궁금해 한다. 큰아이가 뭔 짓을 저지르는가 하면, 이 신 꿰고 저 신 꿰겠다면서, 작아서 못 신는다든지, 안 신으니 치운 신까지 하나하나 다시 찾아서 섬돌 언저리에 잔뜩 늘어놓는다. 작은아이도 누나 따라서 신놀이 곧잘 즐긴다. 이 신 꿰다가 저 신 꿰고.


  한 시간만 다른 일 하느라 못 쳐다보면, 섬돌은 그야말로 어수선하고 어지럽다. 가지런히 놓아도 십 분 채 안 지나 다시 어수선하고 어지럽게 바뀐다. 여러 날, 또는 이레나 보름쯤 그대로 두다가, 안 되겠다 싶어 착착착 가지런히 놓는다. 어차피 또 어지른다 하더라도, 그때그때 다시 가지런히 놓자고 생각한다. 이렇게 하고 보면, 아이들도 뭔가 느끼지 않을까. 안 느끼려나.


  그런데, 신을 가지런히 놓고 보니, 그야말로 우리 집에는 큰식구 사는구나 싶다. 우리 집에는 ‘아’가 얼마나 될까? 4346.4.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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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가락 발가락

 


  아이들 발가락 조물조물 주무른다. 발가락이나 발바닥 차가운지 따스한지 느낀다. 차가우면 오래도록 조물조물 주무르고, 따스하면 조금만 주무른다. 너희는 이 작은 발로 콩콩콩 뛰어다니지. 너희는 이 조고마한 발로 날듯 날듯 걸어다니지. 너희 어머니도, 너희 아버지도, 너희 할머니와 할아버지 앞에서 이렇게 작디작은 발로 까르르 웃음짓고 노래하며 살았단다. 작은 발에 작은 몸에 작은 손, 그러나 몸뚱이는 작다 하지만, 마음은 넓고 깊으며 클 테지. 날마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몸처럼, 마음 또한 꾸준히 넓고 깊으며 큰 그릇 그대로 곱게 키울 수 있기를. 4346.4.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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