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많으면 책 실컷 읽을까
사고 싶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살림돈 얼마 없어 히유 한숨을 쉬고 내려놓는 책이 매우 많다. 마흔 해 살아오며 손수 장만한 책이 오만 권쯤 된다면, 장만하고 싶으나 눈물을 삼키며 내려놓은 책이 오십만 권쯤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책방에서 책을 사면서 주머니를 들여다볼밖에 없으니, 주머니에 있는 돈을 어림해 책을 고른다. 책을 고른 뒤 책값을 치른다. 꼭 사서 되읽을 만한 책을 고르고는, 오늘 살 수 없다 여긴 책을 찬찬히 읽는다. 책방마실을 할 적마다 여러 시간 들이는 까닭이라면, 사서 읽을 책만 고르자면 삼십 분만에라도, 아니 십 분이나 오 분만에라도 책을 골라서 나올 수 있다. 그렇지만, 차마 돈이 없어 못 사는 책들이 있기에, 이 책들을 책방에서 선 채로 읽어내려고 오랫동안 머물곤 한다.
나한테 돈이 아주 많아, 또는 책을 다 사들일 만큼 제법 많아, 눈에 뜨이는 대로 모든 책을 다 장만해서 내 서재에 내 책이 백만 권쯤 있다고 한다면 어떨까 그려 본다. 나는 즐겁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답게 삶을 꾸린다고 할 만할까. 백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고 살피는 데에 모든 겨를과 품과 기운을 빼앗겨, 정작 종이책 바깥에서 날마다 예쁘고 신나게 흐르는 삶은 하나도 못 보지는 않을까. 내가 몸으로 부대끼며 이룰 사랑은 안 하고, 책에만 나오는 사랑을 읽지는 않을까. 내가 손수 지어서 맛나게 차려먹을 밥은 안 먹고, 책에만 나오는 그럴듯한 사진에만 군침을 흘리지는 않을까. 내가 스스로 두 다리로 땅을 디디며 골골샅샅 찾아다니기보다는 책에 나오는 여행 이야기 꽁무니만 좇으며 머릿속으로만 여행을 다니지는 않을까.
아이를 낳아 돌보는 어버이라 해서 모든 동화책과 그림책을 다 사서 읽혀야 하지는 않는다. 책을 사 줄 돈이 없다 하더라도 모든 동화책과 그림책을 도서관으로 찾아가서 빌려 읽혀야 하지는 않는다. 아이들은 동화책 하나와 그림책 하나로도 즐겁다. 어른도 이와 같아, 시집 하나와 사진책 하나로도 넉넉하다. 한 사람이 굳이 백만 권에 이르는 책을 읽는다거나 천만 권에 이르는 책을 건사해야 하지는 않아. 열 권만 건사해도 되지. 서른 권만 읽어도 되지. 사람들이 한 해에 책을 한 권도 안 읽는다 한들 대수로울 일이 있겠나. 삶을 읽고 사랑을 읽으며 사람을 읽을 줄 알면 되니까. 숲을 읽고 풀을 읽으며 나무와 꽃과 바람과 햇볕과 지구별을 읽을 줄 알면 넉넉하니까.
돈이 많대서 아이들을 잘 보살피거나 가르치지는 않는다. 돈이 많대서 좋은 집을 장만하지는 않는다. 돈이 많대서 다니고픈 여행을 신나게 다니지는 않는다. 돈이 많대서 사진을 더 잘 찍지 않고, 돈이 많대서 글을 더 잘 쓰지 않는다. 돈이 많대서 무엇을 더 잘 할까? 아무것도 없다. 돈이 없대서 글을 못 쓰나? 돈이 없대서 사진을 못 찍나?
돈이 없어서 책을 못 읽지 않는다. 마음이 없으니 책을 못 읽는다. 마음이 없기에 아름답게 못 살고 즐겁게 못 산다. 사랑이 없기에 착하게 못 살고 참답게 못 산다. 책을 읽든 아이를 낳아 돌보든 무엇을 하든, 우리 마음이 따사로울 수 있어야 하고, 우리 사랑이 환하고 밝을 수 있어야 한다. 4346.12.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