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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의 반격 - 2017년 제5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손원평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10월
평점 :
머물러 있는 청춘인줄 알았는데....
내가 떠나 보낸 것도 아닌데
내가 떠나 온 것도 아닌데....
김광석의 노래를 들으며 이 글을 쓴다.
서른 즈음에 나는 무엇을 했을까?
이른 결혼과 육아에 좀 지쳐있지 않았을까? 20대는 찬란한 연애로 시간 가는 줄 몰랐고, 연애가 지루해질 무렵 돌파구로 찾은 결혼은 육아로 인해 잿빛이었다. 갓 태어난 아이는 그냥 생명체일 뿐...두발로 걷고, 말을 시작하고, 스스로 손을 움직여 음식을 섭취할 수 있을 정도로 키우기 위해서 엄마는 온 힘을 써야 한다. 그 후는 어린이집부터 시작해서 고등학교까지 교육시키는 일에 매진해야 한다. 한국에 사는 보편적인 엄마는 그렇다.
나는 그 당시 학기당 2백만원 정도 하는 사립 대학 등록금을 4년동안 따박따박 내면서 장학금 한번 받지 못했다. 물론 원인은 1학년때부터 시작된 연애 때문이었고, 눈에 보이는게 없었던 나는 오직 졸업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최소 학점을 겨우 채워 졸업장만 받았다.
아이가 유치원에 갈 무렵 신의 계시를 받은 것처럼 어느 날 홀연히 앞치마 벗어던지고 사교육의 꽃이라는 학원를 시작했다. 그 후 30대를 슈퍼우먼 코스프레로 보냈다. 작은 규모의 학원이었지만 학부모를 상대하는 일은 가장 곤혹스러웠다. 기본적인 상식과 인간에 대한 예의를 알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 때문에 분노했다.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해,,,화가 나고 억울해서 마음에 병이 생길 지경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엿 먹이고 싶었던 사람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한 기분에 속이 시원했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고,,또 재미진 소설을 만나다니~이번 가을 로또 맞은 기분이다.
줄거리는 단순하다.
88년생 어쩌면 추봉이 불리게 될 뻔한 지혜라는 평범한 이름의 여주인공이 등장한다. 자기가 맡은 일도 잘하고 눈치도 있어서 상황 판단도 빠르다. 비록 대기업에서 구색용으로 운영하는 아카데미 인턴 사원이지만 미래를 위해 영어 공부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주 업무는 복사요, 강의실 의자 정리요 거기에 다소 신경질적인 유팀장과 아카데미의 실질 운영자 김부장은 감정 노동까지 강요한다. 언제 정규직이 될지 알 수 없는 답답한 현실 속에서 지혜의 유일한 탈출구는 착한 사람 눈에만 보이는 남자 친구 정진이다... 82년생 지영이도 힘들지만 88년생 지혜의 삶도 만만찮다. 부족한 인력을 충당하기 위해 정식 직원 채용이 아니라 또 다른 인턴을 채용하는 현실 앞에 실망하지만 그런 세상에 소리칠 용기가 없다. 아니 세상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전복입니다. 눈에 보이는 전복 말고 가치의 전복요.˝
˝그렇게 생각하는 한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질걸요? 억울함에 대해 뒷얘기만 하지 말고 뭐라도 해야죠. 내가 말하는 전복은 그런 겁니다. 내가 세상 전체는 못 바꾸더라도 작은 부당함 하나에 일침을 놓을 수 있다고 믿는 것. 그런 가치의 전복이요.˝
- 책 68쪽에서 -
˝한번 실험해 보는 거예요. 부끄러움을 모를 것 같은 사람이 과연 부끄러움을 알게 될지˝
우리가 당하는 부당함에 등짝 스매씽을 함께 날려줄 규옥이 등장한다. 혼자 밥 먹는게 외로워서 먹방 유튜브를 운영하는 남은아저씨는 떡볶이 소스 비법을 믿었던 동업자에게 사기 당하고 막대한 자본을 소유한 동업자는 골목 상권을 무너뜨리고 현직 국회의원이 되었다.
시나리어 작가 무인은 자신이 공모전에 낸 작품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영화로 만들어져 상영되고 있다.
유명 교수의 집필을 돕는 아르바이트를 하던 규옥은 자신이 쓴 글이 교수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최종 면접에서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는 낙하산에게 밀려 번번이 탈락하는 지혜...그리고 또 다른 88년생 지혜였던 공윤의 등장!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리는 법, 의기투합한 네 사람이 모여서 부당한 세상에 소심하지만 유쾌한 복수를 시작한다.
상당히 공격적인 질문이었다.
무례하다고 느껴질 만큼. 진짜로 하고 싶은 것. 그 질문을 받았을 때 고통스럽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실은 나도 모른다,라고 말하는 게 두려워 억지로 그 질문을 피하고 피하다가 여기까지 와버린건데. 혹은 한때 품었던 꿈이 멀어져간 걸 인정하지 않으려고 더 달려버린 것을...... 그런데 이제 와서 어쩌라고.
- 책 84쪽에서 -
내가 원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세상이 공평하게 돌아가줘야 한다. 열심히 노력해보라고, 그 말이 얼마나 허무한 말인지 우리는 안다.
그 쪽이 나에게 하는 행동들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하지만 다수의 약자들이 힘을 모아 한 목소리를 낼 때 세상은 변했다. 세상을 향한 네 사람의 소심하지만 뜨거운 저항을 재미있게 읽었다.
귀찮아서, 손해보기 싫어서, 부딪치기 싫어서 적당히 넘어가며 살았다. 그런데 아이가 어느 새 스무 살이 되어간다.
대학에 가면 유토피아가 펼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열 아홉살 아들이 얼마후면 부모와 선생님을 원망하겠지...내가 적당히 넘어가며 살았던 부당함을 고스란히 우리 아이들이 떠 안고 살게 될 것이다.
세상이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가면서 실망하고 적당히 타협하면서 40대가 됐다. 마흔의 자리에 서 보니 서른은 젊다. 내가 오십대가 되면 마흔을 그리워할지도....
서른에는 비록하지 못했지만 마흔에는 세상 눈치보지 않고 당당하게 살고 싶다. 해외여행 안 가도, 버스타고 다녀도, 아파트 평수를 더 이상 늘리지 않아도 난 행복하게 살겠다.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편견없이 바라보며 그들의 편에 서겠다고 다짐해본다.
내가 우주 속의 먼지일지언정 그 먼지도 어딘가에 착지하는 순간 빛을 발하는 무지개가 될 수도 있다고 가끔씩 생각해본다.
그렇게 하면 굳이 내가 특별하다고, 다르다고 힘주어 소리치지 않아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생각을 얻기까지 꽤나 긴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지만 조금 시시한 반전이 있다.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애초에 그건 언제나 사실이었다는 거다.
- 책 232쪽에서
마흔의 반격을 꿈꾸며...내 삶에 무지개를 다시 떠올렸다.
그리고 오랜 소망이었던 피아노를 배우기 위해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