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지 않게 알고리즘으로 인해서 계속 미국 뉴스를 좀 듣다가, 연애를 하고 싶어도 연애를 하지 못하고 결혼을 하고 싶어도 결혼을 하지 못하는 미국 남성들이 어마무시하게 늘어날 거라는데 그로 인해서 사회적 혼란이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야기될 수 있다는 어느 미국 사회학자의 발언을 듣고. 아 그러한가, 상상도 하지 못할 그런 사회적 현상이 일어난다는 건가. 수요와 공급(이라고 표현하니 이상하긴 하지만)의 불균형.
다시 이 단락을 읽고 싶어서 아침에 쌀을 솥에 안치고 책장 안에 꽂혀져 있던 루시 바턴을 꺼내들었다.
This is me, and I will not go where I can't bear to go - to Amagash, Illinois - and I will not stay in a marriage when I don't want to, and I will grab myself and hurl onward through life, blind as a bat, but on I go! This is the ruthlessness, I think. (177-178)




아미아 스리니바산의 책을 읽으면 루시가 한 말과 비슷한 문장이 나온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인생이라고 본다. 각자의 영역에서 무모함을 발휘할 수 있을 때, 진실로 박쥐처럼, 재고 따지는 뇌의 활동이 가속화될 때 역시 삶의 순간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그것이 어떤 생의 조감도가 될 수 있겠지만 삶은 그 조감도처럼 흘러가지 않는다. 만일 삶이 내 조감도처럼 흘러갔더라면 지금쯤 나는 이곳이 아니라 딸아이와 함께 프랑스 파리 근교의 어느 도시에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어야 옳다. 아 아니지, 시차가 있으니 자고 있겠군.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을 찾기로. 날린 돈 수백은 아깝지만 그걸 아깝다고 계속 그것만 바라볼 수는 없으니까. 내가 있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 마음이 다른 길을 만든다면 그 다른 길로 가면 될 일이다. 내가 루시였어도 그러했을듯. 이 반지하에서는 언제 나갈 수 있을까. 빛과 어둠의 절반이 공존하는 곳에서 나중에 시간이 흐르고난 후 이때를 떠올리면 분명 내 뇌는 이 시간을 좋게 기억하게 되겠지만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게 될 것이다. 루시가 윌리엄과 함께 야구 경기를 보던 한때를 떠올리는 것처럼. 유재석 짤을 보는데 거기에서 뇌과학자가 한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일단 내 생존이 가장 먼저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뇌가 인간에게 알려주는 것들. 그러니 각자 내 생존과 내 실존을 위해서 헤아리게 되는 것들. 그런 빠른 셈법을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생존이 먼저이고 실존이 먼저인데 타인을 배려할 일은 아니다. 이게 거시적으로 봤을 때 가장 먼저 스스로의 생존과 실존을 갉아먹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건 셈법이 완벽하다 여길 때이고. 친구가 쓴 글을 오늘 아침 다시 읽으면서 '존재의 쓸모'에 대해서. 태도와 예의, 거기도 무시하기는 힘들겠다 싶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제일 빡치는 포인트가 커다랗게 동심원을 그리는 건 특유의 지랄맞음이지만. 다시 프랑스를 택하게 될 거 같지는 않다. 현재로서는. 하지만 또 모르는 일이고. 재빠른 포기의 미덕. 이게 또 장점인지라. 아이가 너무 갑갑해해서 잠깐 걷기로 했다. 병아리콩을 너무 많이 넣어서 이게 쌀밥인지 병아리콩밥인지를 모르겠군. 단백질에 미친 중년 여자처럼 보이는군. 청소기 돌리고 휘리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