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주를 사러 잠깐 나갔는데 반달이 예뻤다. 가서 부처님 얼굴 보고 와야 하는데 하면서도 아 갈까 말까 갈등을 하다가 조깅복으로 입고 나올 것을, 아 생각보다 좀 더워서 달려서 갈 차림새도 아니니 그냥 맥주만 사갖고 얍삽하게 후다닥 들어왔다. 계란과 과자와 맥주로 저녁을 때우려고 했건만 아이가 계란을 거부하면서 난 떡볶이_ 해서 즉석떡볶이를 후다닥 해서 먹고 이 모든 걸 다 먹어서 아주 배가 터져 죽을 거 같지만 오늘은 그런 날, 하고 패스. 앨리슨 에스파흐와 존 보인의 소설을 연달아 읽고 눈이 뻑뻑해서 오랜만에 알콜이 땡겼다. 브루노와 슈무엘 관계를 따져보자면 이게 카르마적으로는 아주 최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더구나 브루노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더 그러할 테고. 근데 이 관계를 악연이라고 볼 수 없는 게 슈무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브루노 삶이 어떻게 달라졌을지 알 수 없는 일. 브루노를 만나지 않았다면 슈무엘은 어땠을까? 그들은 서로를 위해 태어난 존재들. 짧은 인생이었지만 그들이 가스실에서 함께 죽어가는 동안 꽉 잡은 손을 놓지 않았으니 우정과 사랑의 경계가 명확하다고 볼 수 없으리라. 같이 옷을 벗고 샤워를 하는 줄 알고 들어간 곳에서 낯설고 기이한 느낌에 두 소년이 손을 꼭 잡았을 때 눈물이 울컥 쏟아졌다. 앨리슨 소설에서 만난 이들도 모두 작정하고 만난 게 아니라 우연히 만난 관계. 슈무엘과 브루노 또한 마찬가지고. 결국 다시 관계성으로 다다르고 말았다. 이제는 이곳에 안착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들었다. 다른 이들보다 더 이쪽 방향으로 관심이 지대한 것도 사실이지만 기질을 제외하고서도 뭔가 운명적이라고 느껴지긴 한다. 낮잠을 20분만 자겠다 하고 아이가 깨워달라 했는데 나도 누워서 쌔근쌔근 자는 아이 얼굴을 곁에서 바라보다가 태어나 몇달 지났을 때 얼굴과 여전히 똑같구나 사실을 알았다. 결국 나도 잠들어버렸다. 알람을 맞춰놓지 않아 1시간 넘게 자버렸다. 덕분에 예약해놓은 광화문 달빛요가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땀범벅으로 일어났다. 한바퀴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면서 산책을 하고 돌아와 샤워하고 매트를 좀 펴려고 했는데 너무 많이 먹어서 오늘은 도저히 불가다. 영어소설을 많이 읽는 알라디너에게 추천받은 소설이 있어서 그 책을 구입하고 책이 오는 동안 좀 쉬어야겠다.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후달리는군. 페이지 펼치는 일도 이제는. 그래도 며칠 동안 읽으면서 휴대폰 거의 안 보고 살았다. 사진 찍을 때 빼고 통화할 때 제외하고는. 역시 집중력에는 독서가 최고인가. 이번 경험으로 느꼈다 또다시. 들뢰즈는 어떻게 눈에 들어올지 모르겠군. 2003년에 전남친과 열심히 읽었을 때 아 모르겠어 하니까 모르니까 읽는 거지, 모르면 알 때까지 읽으면 돼, 라는 남친 발언에 혀를 내둘렀던. 젊었을 때의 그는 들뢰즈를 하도 좋아해서 닉네임을 들뢰즈 이름으로 지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지영이랑 재형이랑 같이 대학로에서 만날 때 그 즈음이었던 거 같다. 완전 고려 시대 이야기구만. 선배가 목에 있는 암덩어리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기 위해 오늘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두려우면 두려운대로 자신의 감정을 스스럼없이 표현하는 게 선배와 나의 공통점인 것도 같다. 아, 갈비탕집에서 사장님이 몇 살에 애를 낳은 거야? 엄마야? 언니야? 해서 기분이 좋아 밥 한 공기를 퍼먹었다. 둘이 배 터지게 먹고 셀피를 찍었다. 엄마, 귀에 입이 걸렸어 해서 역시 너무 유치하군 나란 인간은_ 했다. 진희가 때마침 연락을 했다. 약속을 취소하면서 당분간 요가원에는 가지 않겠다 알렸다. 함께 수련을 하고 시간을 보내면 좋기도 하지만 마음이 시끄러워질 일이 더 잦아진다면 그러니까 번잡스러워진다면 그 관계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 사람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게는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니 어쩔 수 없다. 갈등을 하고 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그러니 악연이건 인연이건 그 관계성의 성질을 논하는 건 언제나 그 마음 속에 있는 건 아닐까 싶은. 그게 진실이 아닐런지. 알지 못하는 것들에 마음을 쓰며 연연해하지 않기로 했다. 사람은 생긴대로 사는 법이니까. 성정대로 살기로 했다. 억지로 애쓰면서 스스로에게 상처를 주는 어리석은 일은 젊은 시절에 그토록 했던 걸로 족하니까. 헌법재판소 안 백송 오늘 드디어 보았다. 언제나 생각한 그 타이밍에 오지 않고 한 발짝씩 늦는다면 아마도 그 늦은 타이밍이 적확한 타이밍일 수 있다. 만나지 않아야 할 사람들은 영영 만나지 못하고 기어코 만나야 할 이들은 어떤 식으로든지 만나게 되니까. 내게로 온 이들은 모두 내게 귀한 객들. 어떤 명칭으로 불리우든 무관하게. 오늘 백송을 마주하면서 그 생각을 오래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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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oy in the Striped Pajamas (Movie Tie-In Edition) (Paperback) -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소년』원서
존 보인 지음 / David Fickling Books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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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관계들, 그러니까 사랑이든 우정이든. 독일 소년 브루노와 폴란드 소년 슈무엘은 같은 날 다른 곳에서 태어나 운명처럼 함께 마주한다. 가스실로 샤워를 하러 들어가면서 두 소년은 꼬옥 잡은 두 손을 결코 놓지 않았다. 그들이 언제 어디에서든지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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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이 책을 들고 있었다고 했으니 분명히 읽었다는 이야기일 텐데_ 며칠 내내 이 책 이야기만 했다고_ 갱년기 중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랬는가 그러했는가 근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수 있지? 괴로워하다가 뭐 까먹었을 수도 있지, 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중간중간 살포시 기억이 나는 걸 보고 아 그랬군 읽었던 것 같군 혼잣말을 했더니 아이가 읽었다니까 엄마! 엄마 막 울었어! 그래서 아 그렇군, 울었으면서도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다니 이런......

브루노가 가정교사에게 소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그리고 가정교사가 그런 지어낸 이야기는 네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어,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아빠 생각도 살짝 났고 몇몇 이들 생각도 살짝 났다. 이상한 책_이란 표현이 마치 쇠망치처럼 느껴져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니 남편은 언니보다 좀 수준이 낮은 거 같아요, 이상한 책들이 꽤 보이네요, 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책이 수준이 있고 어떤 책이 수준이 낮은 건데? 라고 물었더니 에이, 언니도 알면서, 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서 괜히 집에 초대를 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 너는 대체 어떤 책을 읽고 살아왔는지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그게 구리 살던 시절 이야기니까 꽤 됐다. 그리고 또 이상한 책_이란 표현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또 들으면서 왜 사람들은 입에 담지 않아도 될 소리를 굳이 하는걸까? 궁금했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인데 왜 자신이 그토록 편견이 그득한 존재라는 걸 알리려고 애쓰는 걸까? 궁금해서 이번에는 굳이 반응하지 않고 말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너는 선생이면서 선생으로서 갖춰야 할 자격을 모두 갖추지는 않았구나, 그걸 눈치채지 못한 바 아니지만_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계속 바라보았던 기억이. 책을 꽤나 읽었다는 이들이 머릿속에 똥이 그득하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머리에 똥이 들어있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_ 가정교사가 브루노에게 쓸데없는 책은 이제 그만, 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옛날 기억들이 몽글몽글거리며 떠올랐다.

폴란드 소년 슈무엘과 독일 소년 브루노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그들은 이렇게 가운데 철조망을 두고 서로와 첫 인사를 나눈다. 어떻게 이런 장면들이 그득한데 새까맣게 잊을 수 있었을까 싶어 잠깐이나마 참담했다. 폴란드 청년 그렉과 그렉의 친구 아 이름 까먹었다, 엄청 잘 생겼는데 그 녀석도 떠올랐다. 셋 다 1977년생이고 셋 다 지독한 애연가들인지라 같이 담배를 자주 태웠다. 생애 처음 만난 폴란드인들과 젊은 시절의 한 부분을 보냈군. 폴란드인을 만나고 폴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던. 그렉과 그 잘생긴 청년도 지금 중년이겠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그 핸섬가이 때문에 몇날 밤을 지새우며 울던 멕시코 아가씨도, 중국인 소녀와 한국인 소녀도 떠오르는군. 멕시코 아가씨도 중국인 아가씨도 한국인 아가씨도 모두 다 뻥뻥 잘만 걷어차였다. 어느 날인가 왜 그렇게 여자들을 울리냐, 좀 받아주지, 라고 했더니 프랑스 비자 받기 전에는 절대로 여자 안 사귈 거야, 라는 대꾸가 기억나는군. 사랑은 그 후야. 라고 했던 단답형 대답에 음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렸던. 사랑이 그 후일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라고 말하니까 네 말이 맞아, 하면서 초록색 눈동자가 웃었다.

소설 다 읽고 영화도 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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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Wedding People (Paperback)
Alison Espach / Holt Paperbacks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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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회의 문을 더 많이 여는 자가 더 실패할 확률이 높은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통계적으로 따지자면. 그렇다면 그 기회의 문을 꽉 닫고 영영 나가기를 거부한다면? 실패할 확률은 제로가 되고 따라서 내내 안전해질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을 지키고 보호하는 선에서 기회의 문을 여는 방법은? 소설 속에서도 계속 이야기되는 거지만.

피비와 게리의 공통점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다가 책을 완독하고 순간 떠오른 문장. 여름보다 가을을 연상시키는 두 남녀가 어떤 식으로 함께 길을 걸어나갈지는 더 봐야겠지만 후속작이 나오면 좋겠군. 달달한 젊은이들의 사랑 이야기를 기대하게끔 만드는 제목이지만 실상 주인공들은 중년에 막 접어든 이들이다.


When it comes to love and realtionships, be all 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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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26-08-19 17: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 다 읽으셨군요. 사진 멋집니다! 완독 날짜인가요? 저도 이번 주 안에 다 읽을 것 같아요. 낭독은 주1회라 진도 좀 더 느려서 지난 주에 게리 정체 밝혀지면 톡방 폭발했어요. ㅎㅎ 기회의 문을 더 많이 여는 자가 더 성공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실패 관점에서도 볼 수 있군요.


수이 2026-08-19 17:29   좋아요 0 | URL
실패를 더 많이 해야 성공을 할 확률이 높아진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꼬아서 생각해봤죠. 중년의 러브 스토리라 좋았습니다. 라일라와 피비로 좁혀 보자면 여성 우정 서사일 수도 있고 성장 서사로도 다가오더군요. 중년이 되어서도 장년이 되어서도 계속 성장은 할 수 있으니까요. 다른 좋은 영서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하이드님도 완독 얼마 남지 않으셨으니 화이팅.

하이드 2026-08-19 21: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Correspondent는 노년의 러브 스토리입니다.(러브 스토리로 읽힐 책은 아니긴 하지만, 러브도 나오고 스토리도 나오니깐요 ㅎㅎ) 간만에 편지글에 대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는 책이었고, 책이야기와 작가 이야기들이 아주 많이 나오고요, 씨빌의 편지들은 때로는 무겁고, 많은 생각들을 끌어내고요. 비호감형인데, 미워할 수 없는 인물이에요.

수이 2026-08-19 21:30   좋아요 0 | URL
오 감사해요, 읽어볼게요!
 

인간이 인간에게 대하는 그 말과 태도가 그 인간됨을 뜻하는 거라면 결국 어떤 인간’성‘을 스스로 체득하며 알아가는 건 그 말과 태도일 테고 그 거울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비추기 마련이다. 자신이 자신에게 대하는 말과 태도 그대로 다른 이들에게. 이렇게 해서 정체성이 확립되어가고. 판단하지 말고, 라고 앨리슨 에스파흐 소설에서 한 인물이 이야기할 때 아 그렇구나 결국 분노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지점은 그 판단에 있는 거로군, 알았다.

왜 우정에 판단의 잣대가 필요한 겁니까? 궁금해서 물었다. 그러니까 누가 지구인이고 누가 외계인인 건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그저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 그만일 따름인데 마치 모럴의 경중을 따지는 듯한 태도에 정나미가 떨어졌다는 것. 누가 누구보다 나은 인간인지 전혀 가늠할 수 없어서, 스스로 마치 사제처럼 구는 말과 태도. 혹여나 사제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 건가? 실제 사제들에게는 그러한 감정이 없는 걸 보면 그건 아니네.

1980년 1월 가족과 함께 광주를 떠난 뒤 사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그곳에서 학살이 벌어졌을 때 나는 아홉 살이었다. 이후 몇 해가 흘러 서가에 거꾸로 꽂힌 『광주 사진첩』을 우연히 발견해 어른들 몰래 읽었을 때는 열두 살이었다.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에 저항하다 곤봉과 총검, 총격에 살해된 시민들과 학생들의 사진들이 실려 있는, 당시 정권의 철저한 언론 통제로 인해 왜곡된 진실을 증거하기 위해 유족들과 생존자들이 비밀리에 제작해 유통한 책이었다. 어렸던 나는 그 사진들의 정치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할 수 없었으므로, 그 훼손된 얼굴들은 오직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의문으로 내 안에 새겨졌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나는 생각했다. 동시에 다른 의문도 있었다. 같은 책에 실려 있는, 총상자들에게 피를 나눠 주기 위해 대학병원 앞에서 끝없이 줄을 서있는 사람들의 사진이었다. 인간은 인간에게 이런 행동을 하는가. 양립할 수 없어 보이는 두 질문이 충돌해 풀 수없는 수수께끼가 되었다. - P16

파르스름한 심장 같은 불꽃의 중심을 응시한다.
이 소설의 한국어 제목은 소년이 온다』이다. ‘온다‘는 ‘오다‘라는 동사의 현재형이다. 너라고, 혹은 당신이라고 2인칭으로 불리는 순간 희끄무레한 어둠 속에서 깨어난 소년이 혼의 걸음걸이로 현재를 향해 다가온다. 점점 더 가까이 걸어와 현재가 된다. 인간의 잔혹성과 존엄함이 극한의 형태로 동시에 존재했던 시공간을 광주라고 부를때, 광주는 더 이상 한 도시를 가리키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된다는 것을 나는 이 책을 쓰는 동안 알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건너 계속해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현재형이라는 것을.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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