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아이가 중학교 1학년일 때 이 책을 들고 있었다고 했으니 분명히 읽었다는 이야기일 텐데_ 며칠 내내 이 책 이야기만 했다고_ 갱년기 중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랬는가 그러했는가 근데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기억이 하나도 안 날 수 있지? 괴로워하다가 뭐 까먹었을 수도 있지, 하고 다시 책을 펼쳤다. 중간중간 살포시 기억이 나는 걸 보고 아 그랬군 읽었던 것 같군 혼잣말을 했더니 아이가 읽었다니까 엄마! 엄마 막 울었어! 그래서 아 그렇군, 울었으면서도 기억을 전혀 하지 못하다니 이런......
브루노가 가정교사에게 소설과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 그리고 가정교사가 그런 지어낸 이야기는 네 인생에 하등 쓸모가 없어, 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서 아빠 생각도 살짝 났고 몇몇 이들 생각도 살짝 났다. 이상한 책_이란 표현이 마치 쇠망치처럼 느껴져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사람의 입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니 남편은 언니보다 좀 수준이 낮은 거 같아요, 이상한 책들이 꽤 보이네요, 라는 말을 들으면서 어떤 책이 수준이 있고 어떤 책이 수준이 낮은 건데? 라고 물었더니 에이, 언니도 알면서, 라고 웃으면서 이야기를 해서 괜히 집에 초대를 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던 기억. 너는 대체 어떤 책을 읽고 살아왔는지 묻고 싶었으나 묻지 않았다. 그게 구리 살던 시절 이야기니까 꽤 됐다. 그리고 또 이상한 책_이란 표현을 나중에 다른 사람에게 또 들으면서 왜 사람들은 입에 담지 않아도 될 소리를 굳이 하는걸까? 궁금했다. 내가 하는 말이 곧 나인데 왜 자신이 그토록 편견이 그득한 존재라는 걸 알리려고 애쓰는 걸까? 궁금해서 이번에는 굳이 반응하지 않고 말없이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너는 선생이면서 선생으로서 갖춰야 할 자격을 모두 갖추지는 않았구나, 그걸 눈치채지 못한 바 아니지만_이라고 속으로 생각하며 계속 바라보았던 기억이. 책을 꽤나 읽었다는 이들이 머릿속에 똥이 그득하군, 이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 머리에 똥이 들어있지 않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_ 가정교사가 브루노에게 쓸데없는 책은 이제 그만, 이라고 하는 장면에서 옛날 기억들이 몽글몽글거리며 떠올랐다.
폴란드 소년 슈무엘과 독일 소년 브루노가 처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장면, 같은 해 같은 날 태어난 그들은 이렇게 가운데 철조망을 두고 서로와 첫 인사를 나눈다. 어떻게 이런 장면들이 그득한데 새까맣게 잊을 수 있었을까 싶어 잠깐이나마 참담했다. 폴란드 청년 그렉과 그렉의 친구 아 이름 까먹었다, 엄청 잘 생겼는데 그 녀석도 떠올랐다. 셋 다 1977년생이고 셋 다 지독한 애연가들인지라 같이 담배를 자주 태웠다. 생애 처음 만난 폴란드인들과 젊은 시절의 한 부분을 보냈군. 폴란드인을 만나고 폴란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던. 그렉과 그 잘생긴 청년도 지금 중년이겠군.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그 핸섬가이 때문에 몇날 밤을 지새우며 울던 멕시코 아가씨도, 중국인 소녀와 한국인 소녀도 떠오르는군. 멕시코 아가씨도 중국인 아가씨도 한국인 아가씨도 모두 다 뻥뻥 잘만 걷어차였다. 어느 날인가 왜 그렇게 여자들을 울리냐, 좀 받아주지, 라고 했더니 프랑스 비자 받기 전에는 절대로 여자 안 사귈 거야, 라는 대꾸가 기억나는군. 사랑은 그 후야. 라고 했던 단답형 대답에 음 그렇군, 고개를 주억거렸던. 사랑이 그 후일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잖아, 라고 말하니까 네 말이 맞아, 하면서 초록색 눈동자가 웃었다.
소설 다 읽고 영화도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