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평 4공단 여공 푸른사상 시선 24
정세훈 지음 / 푸른사상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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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나누어 주셔요
[시를 노래하는 시 40] 정세훈, 《부평 4공단 여공》

 


- 책이름 : 부평 4공단 여공
- 글 : 정세훈
- 펴낸곳 : 푸른사상 (2012.11.24.)
- 책값 : 8000원

 


  별빛이 흐릅니다. 시골에도 도시에도 별빛이 흐릅니다. 시골에만 흐드러지는 별무리가 아닙니다. 별무리는 지구 바깥에 아리땁게 드리웁니다. 그저, 도시에는 먼지띠와 먼지구름이 너무 짙고 두껍다 보니, 지구 둘레에서 아리땁게 흐드러지는 별무리를 바라보지 못할 뿐이에요. 도시에서는 아리따운 별무리 아닌, 아파트와 건물과 자동차와 공장 굴뚝만 바라보아야 할 뿐입니다.


  햇빛이 흐릅니다. 시골에도 도시에도 햇빛이 흐릅니다. 시골에만 쏟아지는 햇빛이 아닙니다. 햇빛은 풀도 꽃도 나무도 살리지만, 짐승도 벌레도 사람도 살립니다. 햇빛이 있기에 냇물과 바다가 삽니다. 햇빛이 있어 집도 들도 숲도 삽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햇빛을 꽁꽁 가립니다. 땅을 파거나 건물을 커다랗게 짓고는, 모두들 햇빛 아닌 전기불빛을 먹으며 삽니다.


.. 1972년 중졸 소년이 노동자가 되었다 / 아버지는 탄광에서 탄을 캐내는 광부였다 /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다 /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대학교도 가고 싶었다 / 아버지는 늘 자기처럼 되지 마라 했다 / 아버지 같은 노동자가 되기 싫었다 / 그러나 소년 노동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 노동법은 언제나 존재했지만 / 노동판과는 언제나 멀리 떨어져 있었다 …… 후진국으로 더 싼 피땀 값을 착취하러 갔다 / 이 땅의 피땀 값이 너무 비싸다며 갔다 ..  (2012년 노동판)


  바람이 붑니다. 아이들 머리카락을 건드리고, 내 살결을 건드리는 바람이 붑니다. 바람은 후박나무 잎사귀를 살짝 건드리고, 가을 거쳐 겨우내 말라죽어 누렇게 바뀐 풀포기를 건드립니다. 바람은 겨울들과 겨울숲을 살포시 껴안으면서 조용히 붑니다.


  바람은 이야기 한 자락 실어, 이곳에서 저곳으로 붑니다. 이 마을 사람들 삶자락이 바람 한 자락에 실려 저 마을 사람들한테 찾아갑니다. 저 마을 사람들 삶자락은 다시금 바람 한 자락에 실려 이 마을 사람들한테 찾아옵니다.


  바람이 불며 가랑잎이 구릅니다. 바람이 불며 비닐봉지가 날아오릅니다. 바람이 불며 자전거가 휘청거립니다. 바람이 불며 창문이 덜덜 떨립니다.


  사람들이 쉬는 숨은 곧 바람입니다. 바람이 불기에 숨을 마십니다. 바람이 불어 숲과 바다에서 푸른 넋 실어 나르기에, 우리들 누구나 푸른 숨을 쉽니다.


  그러나, 바람이 부는 탓에 공장 굴뚝에서 쏟아지는 매연과 먼지가 이웃마을로 번집니다. 바람이 불고 말아 발전소 굴뚝에서 넘치는 매연과 먼지가 옆마을로 퍼집니다. 바람이 부는 나머지 자동차 배기가스가 온 고을에 가득합니다. 바람이 불면서 쓰레기가 나뒹굴고, 바람이 불면서 온갖 지저분한 냄새가 춤춥니다.


..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종일 / 노동은 오늘 당장 팔지만 / 품삯은 / 언제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는 / 새벽길을 나선다 ..  (외상 노동)


  삶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기에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교사란 학생한테 삶을 가르치는 일꾼이요, 학생이란 교사한테서 삶을 배우는 푸름이입니다. 사랑하며 살아갈 꿈을 가르치고 배우는 곳이기에 학교라 할 수 있습니다. 교사란 학생한테 사랑하며 살아갈 꿈을 가르치는 일꾼이며, 학생이란 교사한테서 사랑하며 살아갈 꿈을 배우는 어린이입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학교는 배움터 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요즈음 학교는 사랑터 구실하고 동떨어집니다. 학교 건물부터 감옥과 똑같이 짓습니다. 학교 틀거리란 감옥하고 똑같습니다. 교사들 몸가짐과 말투는 감옥을 지키는 일꾼하고 매한가지입니다.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는 삶하고 등지고 사랑하고 동떨어지며 꿈하고 멉니다.


  초등학교에 가야 하는 어린이집이 아닙니다. 중학교에 가야 하는 초등학교가 아닙니다.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중학교가 아닙니다. 대학교에 가야 하는 고등학교가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어느 학교를 다니든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을 깨우칠 노릇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 학교조차 안 다니더라도 사람답게 살아가는 사람을 익힐 노릇입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사랑으로 낳습니다. 어른은 아이와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고운 꿈으로 낳습니다. 어른은 아이와 고운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회사원으로 살아갈 어버이가 아니요, 회사원이 될 아이가 아닙니다. 공무원이든 노동자로 살아갈 어른이 아니요, 공무원이든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가 아닙니다. 모두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살아갈 사람입니다. 돈을 버는 어떤 일자리가 사람을 보여주지 않아요. 돈을 버는 어떤 일터가 사람살이를 밝히지 않아요. 삶을 일구고 사랑을 나누는 보금자리가 사람을 보여줍니다. 꿈을 꾸고 이야기를 나누는 보금자리가 사람살이를 밝혀요.


.. 소주를 물 마시듯 마셨듯이 / 억지로 몸을 움직인다 // 분진 날리는 밀폐된 공장에서 / 함부로 굴린 몸 / 크고 작은 직업병 후유증이 배어 / 몸 편히 가만히 있을라치면 / 온몸 속에 벌레들이 든 것처럼 / 스멀스멀 야릇하게 쑤셔와서 ..  (야릇한 통증)


  하루 내내 실컷 뛰고 놀고 구른 아이들이 새근새근 잡니다. 코코 자는 아이들이 깊은 밤이나 새벽에 문득문득 깹니다. 깨면서 쉬가 마려웁다느니 목이 마르다느니 하면서 보챕니다. 한 아이가 깨어 살살 달래며 밤오줌을 누이고는 다시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재웁니다. 이윽고 다른 아이가 깨어 살살 달래며 밤오줌을 누이고는 다시 토닥토닥 어루만지며 재웁니다.


  두 아이 밤오줌을 누여 다시 재우며 생각합니다. 우리 집에는 아이가 둘이니 밤에 두 번 깨면 되지만, 아이가 셋이나 넷이라면, 또는 다섯이나 여섯이라면, 또는 일곱이나 여덟이라면 어떠할까요. 지난날 사람들은 아이를 참 많이 낳아 함께 살았는데, 지난날 어버이는 밤마다 밤잠 한 번 제대로 이루기나 했을까요.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조그마한 흙집에서 옹기종기 다닥다닥 붙어 한잠을 이루었을 텐데, 밤마다 이리 칭얼 저리 구르는 아이들이랑 어떤 하루를 누렸을까요.


  큰아이는 오른팔로 다독이고 작은아이는 왼팔로 다독입니다. 나한테 팔이 둘 있으니 홀로 두 아이 건사할 만하다고 느낍니다. 나한테 아이가 셋이라면 어떡하지? 그때에는 또 그때대로 어떻게든 세 아이를 건사할 만하겠지요. 아이가 셋이라 할 적에는 서로 터울이 질 테니, 그때에는 참말 그때대로 세 아이를 거느릴 만하리라 싶습니다. 아이가 넷이라 하고 다섯이라 해도 그렇겠지요. 저마다 이 어여쁜 아이들 살살 구슬리고 아끼면서 밤을 누리고 새 아침을 맞이하리라 느껴요.


.. 이담에 내 주검 묻힌 무덤에 / 찾아와 노는 / 그 어느 어린아이 있어 / 내 무덤 봉분 반질반질 낮아졌으면 // 그 아이 그렇게 어른이 되었으면 ..  (무덤)


  고즈넉한 겨울밤이 흐릅니다. 겨울에는 밤에도 낮에도 고즈넉합니다. 따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거의 아무런 소리를 못 듣곤 합니다. 드문드문 지나가는 멧새나 들새가 지저귀는 노랫소리를 살짝살짝 듣지만, 겨울에는 멧새나 들새조차 노랫소리를 잘 안 들려줍니다. 그래, 겨울이란 숲도 들도 바다도 모두 조용히 쉬는 철이지요. 풀도 쉬고 나무도 쉬며 꽃도 쉽니다. 들짐승도 쉬고 풀벌레도 쉬며 달빛과 별빛도 쉽니다.


  그런데, 시골숲은 이렇게 쉬더라도, 도시는 쉬지 않습니다. 회사는 쉬지 않습니다. 공무원도 군인도 정치꾼도 기자도 모두 안 쉬어요.


  그러고 보면, 도시에는 철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봄도 여름도 가을도 겨울도 딱히 없습니다. 늘 같은 하루요 늘 같은 쳇바퀴입니다. 봄이라서 해사하게 감도는 빛이 없는 도시입니다. 여름이라서 푸르게 빛나는 싱그러움이 없는 도시입니다. 가을이라서 무르익는 구수한 밥내음이 없는 도시예요.


  철이 없다면 달도 없습니다. 일월 삼월 오월 같은 달이 없습니다. 달이 없으니 날도 없고 보름도 없겠지요. 참말, 도시에서는 날도 보름도 달도 철도 해도 느끼기 어려워요. 그저 시계바늘 따라 부산스레 움직여야 하는 ‘일’만 있습니다. 틀에 맞추어 해야 하는 일만 있는 도시입니다. 규칙이 있고 법이 있습니다. 규정이 있고 규범이 있습니다.


  시골자락 밭뙈기에는 틀이나 규정이 없습니다. 시골자락 논에는 규범이나 법이 없습니다. 숲에는 규칙이 없어요. 호미질을 하는데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란 법이 없습니다. 낫질이나 쟁기질을 하는데 이때에 하거나 저때에 하란 법이 없어요. 풀벌레가 깨어나 노래할 적에 이렇게 하거나 저렇게 하란 법이 없습니다. 새들은 새끼를 낳아 사랑스레 돌볼 뿐, 어떤 규정이나 규범에 따라 새끼를 낳지는 않습니다. 풀은 저마다 새 햇볕 쬐며 새 기운 차리면서 줄기를 올릴 뿐, 어떤 법에 따라 자라서 꽃을 피우지 않아요.


.. 우린 군사정권 시대로 돌아가 / 케케묵었으나 결코 케케묵지 않은 / 언쟁을 벌인다 // 희망버스에 대해 / 나는 공생을 위한 것이라 하고 / 그는 질서를 어지럽히는 짓이라 한다 / 고공 크레인에 오른 김진숙을 / 나는 이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투사라 하고 / 그는 선량한 이들을 선동하는 빨갱이라 한다 ..  (희망버스에 승차하지 못한 날)


  아이들은 꼭 학교에 다녀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삶을 즐겁게 배우면서 하루를 신나게 누리면 넉넉합니다. 아이들은 이런 졸업장 저런 자격증을 거머쥐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와 함께 하루를 기쁘게 맞이하고 고맙게 마무리하면 넉넉합니다.


  신문이나 방송마다 늘 주식시세표를 읽고 고속도로가 어떠한가를 말하며 연예인 뒷이야기에다가 사건과 사고 이야기를 끝없이 외칩니다. 날마다 새로운 주식시세표를 읽으며 날마다 새로운 고속도로 길흐름을 말하고 날마다 새로운 연예인 옆이야기에다가 사건이랑 사고 이야기를 자꾸자꾸 되풀이합니다.


  좀 따분할 텐데요. 퍽 지겨울 텐데요. 왜 숫자에 안달해야 할까요. 왜 교통방송을 들어야 할까요. 왜 남들 뒷이야기나 옆이야기를 구시렁대야 하나요. 왜 사건과 사고를 실어야 신문이나 방송소식이라고 여길까요.


  졸업장 때문에 다니는 학교는 얼마나 심심하랴 싶습니다. 자격증 때문에 다니는 학원은 얼마나 멋없으랴 싶습니다. 숫자놀음에 안달해야 하는 삶은 얼마나 딱할까요. 남들 호박씨 까느라 내 삶을 돌아보지 못한다면 얼마나 슬픈 노릇일까요. 죽거나 다치거나 괴롭히는 이야기를 자꾸자꾸 들으면서 어떤 꿈이나 사랑을 길어올릴 수 있는가요.


.. 함께 간 며느리를 보고 / 아줌마는 누구냐고 묻는 어머니 / 함께 간 손자를 보고 / 총각은 누구냐고 묻는 어머니 / 내가 누구냐고 묻는 나에게 / 제 자식도 몰라보는 어미가 / 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는 듯 / “둘째 아들 세훈이지” 또렷이 대답하신다 / 덧붙여서 간병인에게 / “우리 아들 시인이유”라고 소개까지 한다 / 시인! / 뇌경색과 극심한 치매를 / 앓고 있는 어머니가 / 나를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다니 ..  (오래된 생각)


  시집을 읽습니다. 노동자가 되고 싶지 않았으나 노동자가 되었고, 노동자가 되었어도 품을 즐거이 팔지 못한 채 아픈 몸뚱이 부여잡고 살아야 하는 정세훈 님이 적어내린 이야기 깃든 《부평 4공단 여공》(푸른사상,2012)을 읽습니다.


  아프게 살아온 하루인 만큼, 아픈 이야기가 마디마디 흐릅니다. 슬프게 지낸 하루인 터라, 슬픈 이야기가 골골샅샅 흐릅니다.


  웃으며 살았으면 웃음을 이야기하겠지요. 노래하며 살았으면 노래를 부르겠지요. 그러나, 아픔도 이야기요, 슬픔도 노래입니다. 눈물도 삶이며 주름살도 사랑이에요.


.. 평생을 / 땀방울로 지새운 / 어머니가 / 나를 꽃봉오리로 남겨놓고 / 저 하늘로 떠나셨다 ..  (봄비가 떠난 아침)


  어머니는 땀방울이면서 눈물방울이었을 테고, 이슬방울이면서 빗방울이었겠지요. 어머니 사랑을 받아먹고 살아온 나 또한 땀방울이면서 눈물방울이에요. 나 또한 이슬방울이면서 빗방울입니다. 우리 아이들 또한 땀방울이면서 눈물방울일 테고, 이슬방울이면서 빗방울이겠지요.


  사랑이 고이 이어지면서 천천히 흐릅니다. 꿈이 살포시 잇닿으면서 가만히 흐릅니다.

  달빛이 내려와 우리 작은 집 지붕에 퍼집니다. 햇빛이 드리우며 우리 작은 마당 후박나무 잎사귀로 번집니다. 아이들 눈빛이 온 마을에 퍼집니다. 내 말빛과 숨빛이 내가 딛는 땅마다 차곡차곡 내려앉듯 번집니다.


.. 도시는 너무 춥다고 / 고향 산천으로 돌아가잔다 ..  (바람)


  사랑을 나누어 주셔요. 내 마음 즐거이 북돋울 사랑을 나누어 주셔요. 꿈을 나누어 주셔요. 내 가슴 촉촉히 적시는 꿈을 나누어 주셔요. 내 따사로운 사랑으로 이 겨울을 포근히 안아 주셔요. 내 너그러운 꿈으로 이 나라 아프고 슬픈 이웃들 살그마니 안아 주셔요. 4346.1.8.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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