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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열아홉 시인의 아름다운 생태시 선집
정현종 외 지음 / 호미 / 2010년 9월
평점 :
시를 쓰는 삶자리
[시를 노래하는 시 14] 정현종과 열여덟 시인,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책이름 :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
- 글 : 정현종과 열여덟 시인
- 펴낸곳 : 호미 (2010.9.3.)
- 책값 : 9000원
옛사람은 나무로 불을 때며 살았습니다. 옛사람은 오리털이나 닭털을 가득 채운 옷이 없었다지만, 오늘날보다 훨씬 추운 겨을날 고작 창호종이 한 장 바르거나 이마저 없는 흙집에서 살았습니다. 추운 겨울은 추위가 얼마나 모진가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더운 여름은 더위가 어느 만큼 매서운가를 느끼며 살았습니다.
옛사람은 여름에도 나무를 해서 불을 땝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밥을 지어야 하니까요. 밥지을 쌀이 떨어지면 풀죽을 쑤었다고 하는데, 어느 집은 풀죽을 쑤자며 땔 나무마저 모자랐겠지요. 왜냐하면 나라에서는 가난한 집 사내를 군인으로 끌고 가거나 성곽 또는 궁궐 짓는 일꾼으로 끌고 갔으니까요. 옛날 옛적 조선이나 고려 적 군대는 한창 일할 만한 사내를 열 몇 살 적부터 끌고 가서 마흔이나 쉰까지 붙잡고는 안 돌려보내기 일쑤였다고 해요. 돈이 있는 집안은 돈을 내놓고 군인으로 끌려가지 않았다지만, 돈이 없고 가난하며 ‘권력과 돈 있는 집이 거느린 땅’을 일구며 곡식을 어마어마하게 세금으로 치러야 한 흙일꾼 사내들은 좀처럼 고향마을 고향집에 붙어서 흙을 일구기 힘들었다고 해요.
그런데 참 용하게 모두들 살아갔습니다. 어떻게 살아갈 수 있었나 싶기도 하지만, 들판과 멧자락 풀을 뜯어 날로 씹어먹거나 멧돌로 갈아서 물을 마시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여느 흙일꾼 살림집에서는 할머니와 어머니와 딸아이만 남아 늘 풀만 먹으며 살아남지 않았을까 싶어요. 식구들 먹여살릴 만한 밭뙈기는 그리 넓지 않아도 풀은 넉넉히 나오고, 이 풀을 봄부터 가을까지 먹는 틈틈이 ‘마른나물’을 마련해, 겨울에는 마른나물로 풀죽을 쑤며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 집안을 따스히 지키지 않았을까 싶어요.
.. 나무들은 /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 (정현종-나무에 깃들어)
고작 백 해쯤 앞서라 할 1910년대 시골 흙일꾼 살림살이 이야기를 책으로나 글로나 읽을 수 없는 한국입니다. 어느 지식인이나 학자나 글쟁이도 여느 시골 여느 흙일꾼 살림살이를 살피지 않습니다. 2010년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나 학자나 글쟁이라 하더라도, 2010년대 여느 시골 여느 흙일꾼 살림살이를 찬찬히 돌아보며 적바림하지는 않아요. 역사로도, 문화로도, 인류학으로도, 사회학이나 복지학으로도, 또 ‘농업학’이나 ‘농사학’으로도 둘러보지 않아요.
기껏 이백 해쯤 앞서라 할 1810년대 시골 흙일꾼 살림살이는 어떠했을까요. 풀약이건 비료이건 하나도 없었을 그무렵, 능금이든 멋이든, 살구이든 배이든, 포도이든 복숭아이든, 어떻게 열매나무를 돌보며 열매 한 알 얻었을까요. 한국사람이라면 마땅히 ‘보리밥’이든 ‘쌀밥’이든 ‘조밥’이든 먹어야 살 수 있다고 여기지만, 참말 지난날 한국사람 누구나 ‘밥’을 먹으며 살림을 이었을까 궁금합니다. 지난날 한겨레 옛님 가운데 거의 모든 이들은 ‘밥’ 아닌 ‘풀’과 ‘열매’만 먹으면서 살림을 잇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런 이야기를 어떠한 책으로든 글로든 읽지 못하니, 사람들 앞에서 또렷하게 밝혀 말하지 못합니다. 그저,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내가 1800년대 여느 시골 여느 흙일꾼 살림집에서 딸아이로 태어나 자랐다 한다면, 그무렵 나는 무엇을 보고 겪고 치르고 배우고 살았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마음속으로 그리고, 생각으로 더듬습니다. 내 몸에 흐르는 피는 1800년대 사람들 이야기도 담습니다. 내 몸을 이룬 뼈마디는 1700년대 사람들이나 1600년대 사람들 이야기도 깃듭니다. 내 머리카락이나 내 손발톱은 1500년대나 1400년대 사람들 이야기도 싣습니다.
살갗 한 조각, 세포 하나, 머리카락 한 올, 눈썹 한 가닥 낱낱이 되새깁니다. 내 오늘과 내 어제와 내 글피를 헤아립니다. 내 몸을 이루는 밥을 떠올리고, 내 마음을 빛내는 넋을 곱씹습니다.
.. 가장 더운 여름날 저녁 / 시간에 쫓기는 사람들과 / 사람에 쫓기는 자동차들이 / 노랗게 달궈놓은 길옆에 앉아 / 꽃 피는 모습을 들여다보면 .. (고두현-20분)
새벽부터 밤까지 봄비가 퍽 많이 내렸습니다. 하루 내내 빗소리를 들으며 집에서만 지냈습니다. 사람은 집에만 깃들어도 집에서 먹을거리를 뚝딱뚝딱 짓는데, 들새나 멧짐승은 이런 빗날 어떻게 먹이를 얻을까요. 그저 굶기만 할까요. 비가 얼른 그쳐 먹이를 찾을 수 있기를 빌까요.
풀 먹는 짐승은 이슬이나 비에 젖은 풀잎을 뜯어먹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기나긴 장마철에도 풀짐승은 풀잎 하나 안 뜯고 배를 곯으며 기다리기만 할까요. 내가 풀짐승이라 하더라도 빗물에 젖은 풀잎은 안 뜯고 축축한 보금자리에서 바들바들 떨면서 하늘바라기만 할까요.
내가 풀짐승 잡아먹는 고기짐승이라 한다면 기나긴 장마철에 사냥을 않고 얌전히 때를 노릴는지, 장마철에는 풀짐승이 어디에 숨는가를 찾아나설는지 궁금합니다. 퍼붓는 빗줄기는 모든 냄새를 씻을 테니, 제아무리 코 밝고 눈 밝은 고기짐승이라 하더라도 풀짐승이 깃든 보금자리를 찾아내지 못하려나요. 괜히 돌아다니다가 털만 축축히 적시며 힘들일 까닭이 없을까요. 내가 여우라면, 여우굴이 장마비에 잠기지 않을까 걱정할 노릇일까요. 내가 두더쥐라면 땅속으로 끝없이 스미는 빗물을 어찌저찌 못하며 이리 옮기고 저리 옮기며 안절부절 못하려나요.
.. 포도송이를 만지면 / 살짝 안은 / 들바람 .. (문태준-포도송이를 만지면)
사람이기에 생각을 한다고 느끼지만, 사람이 아닌 다른 목숨이어도 생각을 한다고 느낍니다. 사람은 사람답게 생각한다고 보아야 알맞겠지요. 늑대는 늑대라는 목숨붙이로서 생각을 하리라 봅니다. 동박새는 동박새대로 생각을 할 테고, 지렁이는 지렁이대로 생각을 할 테지요. 매화나무는 매화나무대로 생각을 합니다. 광대나물은 광대나물대로 생각을 하고, 제비꽃은 제비꽃대로 생각을 해요.
땅바닥에 얕게 몸을 붙여 보라빛 꽃송이 올리는 제비꽃이 되어 생각을 합니다. 이제 막 싹을 틔워 땅위로 나온 제비꽃은 천천히 꽃잎을 벌립니다. 꽃잎을 벌려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제비꽃 둘레에는 겨우내 말라죽은 키큰 한해살이 풀이 노랗게 섭니다. 제비꽃은 노랗게 말라죽은 풀포기 사이에서 아주 조그마한 햇살조각 받아먹습니다. 제비꽃 둘레에는 제비꽃마냥 흙바닥에 납작하게 누운 봄까지꽃이며 별꽃이며 흐드러집니다. 냉이꽃은 봄꽃이면서 꽃대를 꽤 높이 올립니다. 제비꽃이 올려다보는 냉이꽃은 어떠할까요. 냉이꽃이 내려다보는 제비꽃은 어떠할까요. 이 꽃들한테 흙알갱이는 얼마나 크며 보드라운 이불과 같을까요. 꽃이나 풀은 모두 흙알갱이하고 사이좋게 인사를 나누지 않을까요. 가늘고 작은 뿌리로 흙알갱이를 붙잡으면서, 곁에서 새 풀포기가 올라와 다른 흙알갱이 붙잡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서로서로 이야기꽃 조잘조잘 나누지 않을까요.
.. 호주머니 속에서 동전 몇 개를 내내 만지작거렸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 중에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도 많았습니다 .. (김행숙-화분의 둘레)
정현종 님을 비롯해 열여덟 시인이 적바림한 싯말을 그러모은 작은 시집 《풀잎은 공중에 글을 쓴다》(호미,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열아홉 시인은 포도농사 짓는 포도밭 둘레에서 시를 썼다고 합니다. 예쁘게 자라고 소담스레 익는 포도알을 바라보며 시를 썼다고 해요.
고개를 끄덕입니다. 포도밭 포도나무 포도알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시인이 아니어도 시를 써요. 글을 모르는 흙일꾼 할머니 할아버지도 시를 써요. 입으로 시를 쓰고 마음으로 시를 써요. 포도나무 줄기를 어루만지는 손길에서 시가 태어납니다. 포도꽃 가만히 바라보는 눈길에서 시가 생겨납니다. 잘 영근 포도송이 톡 따서 아이들한테 먹으라 내미는 웃음꽃에서 시가 거듭납니다. 다 먹고 빈 송이를 거름더미에 던지면서 시가 하나 새롭게 옷을 입습니다.
언제나 붕붕 씽씽 내달리는 자동차로 물결을 이룬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주 마땅히 자동차가 시를 낳습니다. 높고낮은 건물이 끝없이 줄지은 도시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아스팔트길 높고낮은 건물이 시를 빚습니다. 지하철과 버스가 시를 엮습니다. 승강기와 지하상가와 백화점이 시를 일굽니다. 손전화와 텔레비전과 신문과 잡지가 시를 내놓습니다. 국회의원 선거와 까만양복 공무원이 시를 뱉습니다.
나는 옆지기랑 두 아이하고 얼크러지는 시골마을 시골집에서 시를 씁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곳은 내 시를 낳는 밭입니다. 내가 바라보는 하늘과 내가 늘 먹는 밥과 내가 언제나 듣는 들새 소리가 온통 시를 이룹니다. 봄비 그치며 파랗게 갠 하늘이 시를 뿌립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을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멧새가 시를 눕니다. 도랑을 흐르는 냇물이 시를 들려줍니다. 이웃집보다 늦게 꽃이 피는 우리 집 나무들이 시를 베풉니다. 아이들 웃음과 옆지기 눈빛이 시를 보여줍니다. 시나브로 나 또한 시를 씁니다. 이 모두 천천히 맞아들이며 내 눈과 손과 발가락이 꼼틀꿈틀 춤을 추면서 시 한 줄 즐겁게 씁니다.
시 한 줄에는 사랑도 담기고 꿈도 담기지만, 시 한 줄에는 슬픔도 담기고 겉치레도 담깁니다. 시 한 줄에는 이야기도 담고 웃음도 담지만, 시 한 줄에는 지식도 담고 겉멋도 담습니다. 나는 제비꽃이 야무지게 붙잡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흙알갱이가 좋아, 제비꽃 뿌리랑 어깨동무하는 흙알갱이 삶을 시로 쓰고 싶다고 꿈을 꿉니다. (4345.3.31.흙.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