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투덜대는 책읽기
시골마을 조그마한 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는 분이 내놓은 교사일기가 책으로 나왔다. 적잖은 이들이 손꼽아 추켜세우는 책인데, 막상 이 교사일기를 읽는 나는 이 책을 조금도 추켜세울 수 없겠다고 느낀다. 말과 삶과 글과 넋이 너무 어지러이 흐트러지기 때문이다. 글로는 훌륭하며 꾸밈없으며 아름다이 보이려는 티가 나지만, 정작 이 글에서 드러나기로도 아이들한테 억지스레 가르침을 집어넣는 모습이 보일 뿐 아니라, 스스로 뉘우친다고 밝히지만 아이들한테 손찌검을 하는 모습이 너무 자주 나타난다. 차라리, ‘때렸다’ 하고 끝맺으면 한결 나을 텐데, ‘때리고 나서 미안하다고 느낀다’고까지 덧말을 붙인다. 이렇게 하자면 아예 글을 안 써야 맞지 않을까. 이렇게 쓰는 글을 왜 보여주어야 할까.
왜 사랑을 자꾸 만들려고 하는지 슬프다. 만들려고 한대서 만들 수 있는 사랑은 아닐 텐데. 스스로 사랑스레 살아가면 시나브로 사랑을 곱게 지을 수 있을 텐데.
흙을 사랑하면서 농사를 짓는다 하듯, 내 삶을 사랑하면서 아이들하고 서로 가르치고 배우는 삶을 짓는다. 농사는 곡식 만들기가 아니듯, 교육은 아이들 지식 만들기가 아니다.
짝을 짓는다고 하지, 짝을 만든다고 하지 않는다. 짝짓기란 참 거룩하고 예쁘게 지은 좋은 말이다. 짝을 짓는다, 짝을 맺는다, 짝을 이룬다, 이 한겨레 말마디는 사람들이 어떠한 삶으로 사랑을 빛내야 즐거운가 하는 이야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짝을 짓고, 사랑을 짓는다. 집을 짓고, 밥을 지으며, 옷을 짓는다. 가장 아름다운 나날은 짓는 삶이다. 짓는 꿈이요 짓는 말이며 짓는 이야기가 된다.
사랑짓기, 배움짓기, 꿈짓기, 밥짓기, 이야기짓기가 된다. 일짓기, 흙짓기, 책짓기, 글짓기가 된다. 사람들이 스스로 옳게 짓지 못하고 제도권과 학벌과 권력과 이름값과 돈값이라는 가시울타리에 자꾸자꾸 걸거치니까, ‘글짓기’ 아닌 ‘글쓰기’를 해야 한다고 예부터 이오덕 님이 말했는데, 글짓기가 나쁜 일이 아니라 ‘제도권 독후감 만들기 숙제’가 나쁘다. 제도권학교에서 한 일은 ‘글짓기’가 아니라 ‘글만들기’였다.
모든 ‘만들기’는 꾸미는 일이 되고 만다고 느낀다. 만드는 일이 마냥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으나, 사랑을 담으며 짓는 일이 아니라, 억지로 모양만 만들거나 시늉으로 만들거나 흉내내듯 만드니까 슬프며 못마땅하고 밉다.
시골마을 조그마한 학교에서 일하는 어른으로서 아이들하고 무슨 사랑짓기 삶짓기 배움짓기 일짓기 꿈짓기를 하는가 돌아보고 싶어 교사일기를 책으로 읽는데, 정작 사랑짓기이든 삶짓기이든 배움짓기이든 일짓기이든 꿈짓기이든, 이러한 이야기를 찾아 읽기 어렵다. 그렇다고 교사일기 쓴 분이 착하지 않다거나 참답지 않다고 여기지 않는다. 더 사랑하지 못하는 삶이고, 더 아끼지 못하는 삶이며, 더 좋아하지 못하는 삶이로구나 싶다.
교사는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내려다보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올려다보는 사람이 아니다.
곧, 교사는 보는 사람이 아니다.
교사는 스스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사는 아이들과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사는 어른들과 살아가는 사람이다.
바야흐로, 교사는 살아가는 사람이다.
교사일기란, ‘보는’ 이야기가 아닌 ‘살아가는’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꿈짓기요 사랑짓기요 배움짓기가 되어야 아름답다고 느낀다. 교사일기를 애써 만들지 않으면 좋겠다. 교사일기를 기쁘게 쓰고 예쁘게 지으며 사랑스레 빚으면 고맙겠다. 나는 아무래도 나 혼자 투덜대며 마지막 쪽까지 골을 부리는 책읽기를 할 듯하다. (4345.1.24.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