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휘 늘리는 법 -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다 땅콩문고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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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을 짓는 삶터에서 말꽃이 핍니다

― 어휘 늘리는 법

 박일환

 유유, 2018.3.24.



말을 안다고 할 때는 말에 담긴 문화나 정신의 뿌리까지 알아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 보니 잘못 쓰거나 쓰지 말아야 할 말까지 마구잡이로 쓰는 일이 발생한다. (138쪽)


성희롱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까지는 여성 앞에서 외모에 관해 성적인 표현을 하거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 술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 정도는 짓궂은 장난일이언정 범죄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26쪽)



  일본 지식인은 1800년대에 서양을 배우려고 무엇보다 말을 곰곰이 살폈다고 합니다. 일본사람한테 영어나 프랑스말이나 독일말을 그대로 책에 찍어서 읽힐 수 없을 테니, 이런 바깥말을 제 나라 사람들이 손쉽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낱말 하나에 온힘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이러면서 태어난 ‘일본 한자말’ 가운데 하나로 ‘문화’가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화’를 어느 자리에서나 흔히 쓰지만, 이 낱말을 얼마나 오랫동안 생각하고 살핀 끝에 일본 지식인이 지었는지를 가늠하지는 못합니다.


  《어휘 늘리는 법》(박일환, 유유, 2018)을 읽으면 “말을 안다”고 하려면 “말에 담긴 문화나 정신”이 어떤 뿌리인가를 함께 알아야 한다고 밝힙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문화나 정신, 그러니까 살림하고 넋을 모르고서야 말을 안다고 할 수 없어요. 한 나라나 겨레뿐 아니라, 한 고장이나 마을이 살아온 결이나 넋을 모른다면 껍데기로만 말을 안다고 하겠지요.



방과 후에 모든 학생이 학교에 남아서 학습을 하도록 시키는 일이 자율이라는 말에 합당하지 않다는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그런데도 ‘타율 학습’이 아닌 ‘자율 학습’이라는 말을 사용한 까닭은 그렇게 해야 자신의 부당한 처사를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40쪽)


학생 보호자로 아버지와 형을 올려놓은 ‘학부형’이라는 말은 가부장제 사회에서나 쓸 수 있는 말이다. 학부형을 버리고 ‘학부모’를 쓰는 것은 단순히 낱말을 바꾸는 게 아니라 낡은 인식과 결별하는 행위이다. (52쪽)



  ‘성희롱’이라는 말이 태어나고, ‘성추행’이라는 말이 태어나며, ‘성폭력’이라는 말이 태어납니다. 이런 말이 태어나기 앞서 가부장제가 휘두르는 폭력이나 권력을 제대로 다스리기란 어려웠습니다. 말을 새롭게 지어서 쓰면서 우리 마음이 자라고, 우리 삶이 거듭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 갇히거나 묶인 사슬이 단단합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 찬찬히 짚듯, ‘자율 학습’은 자율이 아닌 타율로 하는 일입니다. 학교에서는 ‘학부모’라 해야 옳지, ‘학부형’은 옳지 않습니다. 교사는 ‘교사’일 뿐, 스스로 ‘선생님’이라는 ‘-님’붙이 말을 쓸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처럼 얄궂다 싶은 말이 안 사라질까요? 외려 얄궂다 싶은 말은 왜 더 불거지기도 할까요? 지난날 ‘민주정의당’이 민주나 정의를 지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 이명박·박근혜를 내세운 ‘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은 참말로 이 나라가 한나라 되도록 하거나, 새로운 누리가 되도록 하거나, 자유로운 한국이 되는 길을 걸었을까요? 정당이 한 일을 섣불리 판가름할 수 없습니다만, 이름하고는 동떨어진 길을 걸은 발자국이 짙다고 말할 수 있어요. 스스로 잘못하는 일을 가리거나 숨기려고 ‘보거나 듣기 좋은 말’이라는 껍데기를 쓴다고 할 만합니다.



수입 언어를 우리말로 번역해서 사용하려는 노력을 얼마나 했을까? 일제 잔재를 청산한다는 차원에서 일본말 몰아내기 운동은 열심히 했지만 서양말을 우리말로 바꾸려는 노력은 그에 비해 한가한 편이었다. (117쪽)


어휘 누락은 국립국어원이 펴낸 《표준국어대사전》이 매우 심한 편인데, 전문가도 알기 힘들 것 같은 어려운 전문어는 시시콜콜 찾아 올린 반면 일상어나 생활어는 심하다 싶을 정도로 외면하고 있다. (120쪽)



  중국을 섬기던 봉건계급 조선에서 쓰던 중국 한문,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 군홧발로 퍼진 일본 한자말, 뒤이은 군사독재에서 억눌리면서 퍼진 영어, 이렇게 세 갈래 말이 한국말에 파고들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우리는 일제강점기 찌꺼기를 치우려는 데에는 조금 애썼지만, 중국 한문은 높임말로 여기는 버릇을 아직 걷어내지 못하며,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영어를 알맞고 쉬우며 즐거운 한국말로 옮기는 일’은 엄두조차 못 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휘 늘리는 법》이라는 책은 우리가 말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사전을 달달 외우는 길로 말을 알지 말고, 말이 어떻게 태어나고 자라면서 퍼지는가 하는 살림자리를 보아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제 생각해 보아야지요. 어린이가 중국 한문 말씨를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푸름이가 일본 말씨를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그리고 우리 어른이 갖은 영어를 한국말로 안 옮기고 그대로 쓰면 어떻게 보일까요? 우리한테 우리 삶이 제대로 뿌리를 박는다면,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이웃이 되는 말을 상냥하면서 쉽고 부드러울 뿐 아니라 즐겁고 사랑스레 쓰리라 생각합니다. 이러면서 말살림은 저절로 넉넉하게 펼 테고요.



청년이건 기성세대건 어휘를 늘릴 필요가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어휘를 늘린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가는 삶의 양과 질을 늘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양상은 대부분 언어 행위를 매개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2쪽)



  1800년대 일본 지식인이 서양말을 ‘문화’나 ‘사회’로 옮겼다면, 2000년대를 사는 한국사람으로서 이 일본 한자말을 곰곰이 살펴서 새롭게 한국말로 옮겨 보고 싶습니다. 영어 ‘culture’하고 ‘society’를 여러모로 살피면, 또 이를 한자에 담은 ‘文化’하고 ‘社會’를 곰곰이 따지면, 새 한국말로는 ‘살림’하고 ‘삶터’라고 할 만하지 싶습니다. 스스로 지어서 가꾸는 모든 것이니, 이때에는 ‘살림’입니다. 사람이 모여서 이룬 자리이니, 이때에는 ‘삶 + 터’인 삶터가 될 테고요.


  그래서 음식문화·의복문화·거주문화는 ‘밥살림·옷살림·집살림’처럼 쓸 수 있습니다. 언어문화는 ‘말살림·말글살림’이라 할 수 있어요. 책문화라면 ‘책살림’으로, 교육문화라면 ‘배움살림’이 됩니다.


  그나저나 《어휘 늘리는 법》을 읽으며 몇 군데는 좀 바로잡아야겠다고 느꼈습니다.



ㄱ. ‘봄까치꽃’이라는 말도 소개하고 싶다. 이 말은 아직 국어사전에 오르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날이 오리라 믿는다 … 누군가가 ‘봄까치꽃’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고, 꽃을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 이 새 이름이 알음알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67쪽)

ㄴ.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지은이(최종규)는 이오덕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여 20여 년 동안 우리말 지킴이로 일해 왔다. 그런 지은이가 우리말을 제대로 살려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사전을 펴냈다. (148쪽)



 ‘봄까치꽃’이라는 풀이름은 이해인 님이 쓴 시 때문에 퍼졌는데요 ‘봄까지꽃’이라는 이름을 잘못 받아들여서 퍼지고 말았습니다. 겨울이 저물 무렵 피어나서 봄이 저무는 철에 감쪽같이 사라진다고 해서 ‘봄까지꽃’입니다. 다른 봄풀이나 봄꽃은 여름으로 저물어도 한동안 꽃을 피우거나 살지만, 봄까지꽃만큼은 봄이 끝나며 함께 숨이 끊어져요. 이런 결을 살피며 붙은 ‘봄 + 까지 + 꽃’이란 이름인데, 이를 ‘지’ 아닌 ‘치’로 잘못 붙인 시가 퍼지면서 ‘봄하고 까치는 아무 얽힌 일’이 없는데 꽃이름도 얄궂게 퍼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오덕 선생의 제자를 자처하여” 살아온 적이 없습니다. 이 대목은 반드시 바로잡아야겠습니다. 저는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 이오덕 어른이 남긴 글을 갈무리해서 새로운 책이 나올 수 있도록 일을 맡았을 뿐입니다. 제가 한 일은 “이오덕 유고·원고 정리”이니, 제가 이오덕 어른 제자일 수 없어요. 그리고 저는 “우리말 지킴이”가 아닌 “사전 집필자”로 살았습니다. 2001년 1월부터 세 해 즈음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자료조사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는데요, 이 일에 앞서 한 일도 ‘앞으로 새 한국말사전을 쓰려는 길’이었습니다.



  다음 두 대목을 놓고는 박일환 님이 보태지 못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댓글’하고 ‘옆지기’라는 낱말을 다룬 꼭지가 있는데, 두 낱말이 퍼진 까닭을 글쓴이가 잘 모르시는 듯해서 살을 보태려고 합니다.



ㄷ. 언젠가부터 ‘댓글’이라는 말이 쓰이더니 이제는 ‘리플’을 완전히 밀어냈다.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쉽게 쓸 수 있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인터넷 공간에서 지금 이 순간도 댓글놀이를 하며 즐거워하는 이들이 처음 ‘댓글’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사람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66쪽)

ㄹ. 요즘에는 ‘배우자’라는 한자어를 풀어 쓴 옆지기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늘고 있다. (141쪽)



  1990년대 첫무렵에 처음 피시통신이 피어났어요. 그때에는 업체마다 하나같이 ‘re’라는 영어를 알파벳으로 썼습니다. 요즈음도 여러 포털은 누리글월에 답장을 쓸 적에 ‘re’가 뜨도록 하는데요, 하이텔·천리안은 좀 더디었지만 나우누리라는 곳은 그때에 사람들 뜻을 널리 받아들여서 ‘댓글·덧글·답글’ 가운데 어느 말을 써야 좋은가를 살폈고, 나우누리가 하이텔·천리안 못지않게 사랑받으면서 포털 이름도 ‘나우누리’처럼 한국말로 쉽고 재미있게 쓸 수 있을 뿐 아니라, 게시판에 붙이는 이름도 훨씬 쉽고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붙일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느껴요. 나우누리 운영관리자는 모임지기라든지 글지기를 퍽 자주 만나서 이름을 어떻게 고치거나 붙여야 좋은지 물었고, 이를 바로 받아들여 주었는데, 참 고맙고 반가웠습니다. 그무렵 다른 분들은 으레 ‘re’만 쓰셨지만 저는 ‘덧’이나 ‘덧글·댓글’이라고 붙여서 덧글·댓글을 적었습니다.


  나우누리 운영관리자는 ‘댓글’이 ‘對’라는 한자를 넣은 글이냐고 묻기도 했는데, 저는 그렇지 않다고 했습니다. 한국말에 ‘대꾸하다’가 있습니다. 대꾸하는 글이 댓글이고, “무엇에 대한 글”이 아니니, 한글이자 오롯한 한국말로 ‘댓글’이라 하면 되고, 다른 이가 덧붙이는 글이라는 뜻으로 ‘덧글’을 쓸 수 있다고도 보태어 말했어요.


  ‘옆지기’가 ‘배우자’라는 한자말을 풀어서 쓴 말이라고 《어휘 늘리는 법》이라 나오지만, 풀어서 쓴 말이 아닙니다. ‘배우자’는 부부가 그저 서로 가리키는 말일 뿐입니다. ‘옆지기’는 옆에서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니, 새로 지은 낱말이고, 이 낱말을 누가 처음 지었는지는 알기 어려우나, 그물코 출판사 대표님이 2004년에 이 말을 저한테 들려주었을 적에 참 어울리는구나 싶어서, 그때부터 제가 쓰는 글이나 책에 이 낱말을 잔뜩 써서 퍼뜨렸습니다.


  이러다가 ‘옆지기’도 좀 길구나 싶었고 새롭게 말을 지어야겠다고 여겨서 2013년에 ‘곁님’이란 말을 제 나름대로 처음으로 써 보았습니다. 곁에 있는 사람은 서로 지킨다기보다 서로 아름다운 님으로서 사랑한다는 뜻으로 곁님이라 지었어요. 옆지기라는 낱말을 널리 퍼뜨린 사람으로서 한결 낫구나 싶은 낱말을 새로 지었기에 이제는 옆지기는 안 쓰고 곁님만 씁니다. 2018.7.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말넋/말삶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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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18-10-05 2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지기도 나쁘지 않지만 저도 곁님이 더 좋은 것 같습니다. ^^

숲노래 2018-10-11 14:44   좋아요 0 | URL
말씀 고맙습니다.
‘곁님‘이란 말을 지은 보람이 있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