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 BC 480~BC 390]

 

요약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의 설을 모은 《묵자()》가 현존한다.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다.
본명 적()
국적 중국
활동분야 철학

 

본문

이름은 적(). 그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묵자 및 그의 후학인 묵가()의 설을 모은 《묵자()》가 현존한다. 《묵자》는 53편이라고 하나, 《한서()》지()에는 71편으로 되었다. 최종적으로 성립된 것은 한()의 초기까지 내려간다고 추정된다. 그 내용은 다방면에 걸쳤으나, 중심이 되는 것은 상현() ·상동() ·겸애() ·비공() ·절용() ·절장() ·천지() ·명귀() ·비악() ·비명()의 10론()을 풀이한 23편이다.

겸애란 사람은 ‘자신()’ ‘자가()’ ‘자국()’을 사랑하듯이 ‘타인()’ ‘타가()’ ‘타국()’도 사랑하라는 것이다. 비공론()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유가()의 인()이 똑같이 사랑[]을 주의()로 삼으면서도 존비친소()의 구별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데 반하여, 겸애는 무차별의 사랑인 점이 다르고, 또한 사랑은 남을 이롭게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윽고 자신도 이롭게 한다는 ‘겸애교리()’를 풀이한 것이었다. 절용은 사치를 삼가고 생산에 힘쓰며 소비를 줄이라고 설파하는데, 구체적으로는 장례를 간소하게 치르라는 절장론()과 음악()을 허식이라 하여 물리치는 비악론()으로 전개된다.

한편, 정치에 대해서는 상동론()이 있으며, 그 기초로서 천지론()이 있다. 천지론은 절대적 ·종교적이라고 할 수 있는 천의()의 존재와 거기에 따르거나 거역했을 때의 상벌을 강조한다. 상동이란 아랫사람[]은 윗사람[]에게 순종하라는 것이다. “사람이란 일인일의() 십인십의()이므로 방치하면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부락민은 이장에게, 이장은 면장에게, 점차 아래에서 위로 상동()하여 그 정점에는 최고의 현자()로서 하늘의 뜻을 받드는 천자()가 있다”는 것이다. 명귀론()은 하늘의 대행자로서 상벌을 내리는 귀신의 존재를 주장하였고, 비명론()은 이른바 운명을 부정하지만, 그 참뜻은 명(:운명론)에 현혹되어 일상의 일을 게을리하지 말도록 타이르는 것이었다.

요컨대 《묵자》는 유가가 봉건제도를 이상으로 하고 예악()을 기조로 하는 혈연사회의 윤리임에 대하여, 오히려 중앙집권적인 체제를 지향하여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한 것이다. 더욱이 10론 이외에 일종의 논리학을 풀이하는 편()과 비공론()에서 출발한 방어술() ·축성술()에 관한 편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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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중국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 묵자()를 계승하는 학파.
  
본문

그 사상과 학설은 《묵자》 53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현() ·상동() ·겸애() ·비공() ·절용() ·절장() ·천지() ·비락() ·명귀() ·비명()등 10론()의 주장은 그 하나하나가 매우 이색적이고, 전국시대의 세상에서 중앙집권적 체제지향과 실리적인 지역사회의 단결을 주장하여 유가()와 대립한 유력 학파였다.

이 집단은 거자()를 지도자로 하여 강력한 단결을 자랑하였으며, 그 기반은 지연공동체적인 농촌에 있었다. 묵가의 사적()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대의 거자로서 금활리() ·맹승() ·전양자() 등의 이름이 전한다. 《한비자()》의 현학편()에 의하면 묵가는 전국 말기에 3파로 분립되었다고 하는데, 《묵자》 10론 하나하나에 내용이 대동소이한 상 ·중 ·하편()이 있는 것은 그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진() 시황제()의 탄압을 받은 이후 쇠미해지다가 전한() 무제()에 의한 유교일존() 정책으로 완전히 소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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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키르케고르 [1813.5.5~1855.11.11]

 

요약
덴마크의 철학자. 그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로서의 신()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등의 저작을 통해 추구하였다.
원어명 Søren Aabye Kierkegaard
국적 덴마크
활동분야 철학
출생지 덴마크 코펜하겐
주요저서 《죽음에 이르는 병》(1849)

본문

코펜하겐 출생. 아버지는 비천한 신분에서 입신한 모직물 상인으로 경건한 그리스도교인이었고, 어머니는 그의 하녀에서 후처가 된 여인이었다. 7형제의 막내로,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체질이었으나, 비범한 정신적 재능은 특출하였으며 이것이 특이한 교육으로 배양되어 풍부한 상상력과 날카로운 변증()의 재능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아버지에게 그리스도교의 엄한 수련을 받았고, 청년시절에는 코펜하겐대학에서 신학과 철학을 연구하여 1841년에 논문 《이로니의 개념에 대하여》로 학위를 받았다.

그 동안에, 1837년경 그가 스스로 ‘대지진()’이라고 부른 심각한 체험을 하였다. 그 내용은 아버지가 소년시절에 유틀란트의 광야에서 너무나 허기지고 추운 나머지 하느님을 저주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과, 바로 자기자신이 결혼 전에 아이를 밴 어머니의 아들이라는 것 등을 안 사실로 죄의식이 심화되었고, 인생을 보는 눈과 그리스도교를 보는 눈에 근본적인 변혁이 생겼다.

한편, 1837년 당시 14세의 소녀 레기네 올센을 알게 되자 곧 사랑의 포로가 되어 약혼까지 하였으나, 애정의 상극과 내면의 죄의식 때문에 1841년 가을에 약혼을 파기하였다. 이른바 레기네 사건이며, 이 때에 체험한 정신적인 갈등이 훗날 미적 저작의 주제가 되었다. 그 후 한때 베를린에 나가 당시 명성을 떨치던 철학자 F.W.셸링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돈 죠반니》 《파우스트》 등 많은 오페라를 관람하기도 하다가 이듬해인 1842년에 귀국하여 저술을 시작하였다.

그의 활동은 활발하여 1843~1846년의 짧은 기간에 《이것이냐 저것이냐 Enten-Eller》(1843), 《반복 Gjentagelsen》(1843), 《공포와 전율 Frygt og Baeven》(1843), 《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1844), 《인생행로의 여러 단계 Stadier paa Livets vei》(1845) 등과 같은 이른바 미적 저작과 《철학적 단편 Philosophiske Smuler》(1844), 《철학적 단편을 위한 결말의 비학문적 후서() Afsulttende uvidenskabelig Efterskrift til de Philosophiske Smuler》(1846) 등의 철학적 저작을 모두 익명으로 출판하였고, 이 밖에도 그리스도교에 관한 많은 교화적인 강화()를 발표하였다.

그 후 저술에 싫증이 난 그는 시골의 목사가 되어 조용한 생활을 보내고 싶어하였다. 그러나 이 때에 풍자신문 《코르사르》에 그의 작품과 인물에 대하여 오해에 찬 비평이 실려, 그것을 둘러싸고 격렬하게 논쟁하는 사이에, 또 다시 그리스도교도로서의 새로운 정신활동과 저술을 향한 의욕이 용솟음쳤다. 그는 신문의 무책임한 비평과 세간의 비웃음에도 굴복하지 않고, 한편에서는 대중의 비자주성과 위선적 신앙을 엄하게 비판하였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단독자()로서의 신()을 탐구하는 종교적 실존의 존재방식을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1 Dø den》(1849), 《그리스도교의 수련 Indoevelse i Christendom》(1850) 가운데에서 추구하였다.

그는 기성 그리스도교와 교회까지도 비판하였으며 《순간》 등의 팸플릿을 통한 공격은 매우 격렬하였다. 그런 와중인 1855년 10월 갑자기 노상에서 졸도한 후 다음달 병원에서 죽었다. G.W.F.헤겔의 범논리주의를 배제하여 불안과 절망 속에 개인의 주체적 진리를 탐구한 그의 사상은 20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국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1909년부터 독일에서 C.슈램프가 키르케고르의 번역집을 내어 당시 신진이었던 P.바르트, J.H.하이데거, K.야스퍼스 등의 변증법 신학자와 실존주의자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그로부터 그의 명성은 현대 그리스도교 사상과 실존사상의 선구자로서 세계에 알려졌다. 1995년 기독교한국루터회가 뽑은 ‘세계를 빛낸 10인의 루터란’의 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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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빛을 파동으로 생각했을 때 이 파동을 전파하는 매질로 생각되었던 가상적인 물질이다. A.A.마이컬슨과 E.W.몰리에 의해 수행된 간섭계 실험을 통해 에테르의 존재는 완전히 부정되었다. 이를 밝혀내기 위한 많은 실험들을 통해 광학과 전자기학이 크게 발전하였으나 실재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 논의되지는 않는다.
본문

에테르에 대한 검토가 진전됨에 따라 이전의 광학 ·전자기학()의 모순이 점차 밝혀지고, 상대성원리의 탄생을 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빛의 전파 현상에 대해서 에테르의 존재를 상정()하는 입장을 흔히 ‘에테르설()’이라 한다. 에테르란 원래 맑고 깨끗한 대기()라는 뜻이며, 에테르에 대한 착상은 빛의 파동설과 함께 탄생하였다. 에테르라는 명칭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은 R.훅 또는 C.호이겐스라고 한다. 빛의 파동설을 처음으로 제창한 호이겐스는 단단하며 탄성()이 있는 미립자의 모임으로 에테르를 상정하였다. 그 후 D.베르누이, L.오일러 등이 에테르의 역학을 연구했으나, 에테르의 탄성파로서 생기는 종파()로는 편광()이나 복굴절 현상에 곤란이 따른다는 것을 알아냈다.

T.영에 이어서 파동설을 확립한 A.J.프레넬은 빛을 횡파()라고 하여 이 곤란을 해결했으나, 동시에 횡파를 전파하는 매질인 에테르는 고체적 성질을 가지는 것으로 되었다. 운동하고 있는 물체에 아무런 저항도 주지 않을 정도로 희박하고, 게다가 고체처럼 행동하는 에테르의 성질은 기묘한 것이었으나, 프레넬의 빛의 탄성파동설이 훌륭한 성공을 거두자 그 후에는 이 기묘한 에테르의 성질을 검토하는 일이 진행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문제는 에테르가 우주공간에 정지해 있는가, 또는 운동물체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프레넬 자신은 에테르가 절대정지해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또한 운동하는 투명물체 내에서는 일부의 에테르가 끌려서 움직인다(수반)고 하여 광행로차() 현상도 설명했는데, A.H.L.피조의 실험은 이 설을 뒷받침하였다.

얼마 후 J.C.맥스웰의 전자기설이 나타나서 H.R.헤르츠의 실험을 거쳐 빛이 전자기파임을 확증하자 에테르는 전자기파의 매질로서 상정되기에 이르렀으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절대정지 에테르의 기묘함을 비판하는 G.G.스토크스의 입장을 이어받아 헤르츠가 운동물체와 함께 움직이는 에테르라고 하는 설에 입각한 운동물체의 전기역학을 수립했으나 이것은 실험과 모순되고, 이어서 나타난 H.A.로렌츠의 입장은 완전히 정지하는 에테르를 생각하였으며, 프레넬의 수반계수()는 운동체 내의 전자에서 나오는 빛에 의해서 설명하는 것이었다.

이 이론은 국소시()나 질량의 속도에 의한 변화라는 생각을 도입하여 갖가지 실험을 잘 설명했으나, 여기서 에테르라는 물질의 성질은 점점 더 기묘한 것이 되고, 지구에 대한 상대운동이라는 점만이 남은 속성()으로서 검토의 대상이 될 따름이었다. 그리하여 이 검증이 A.A.마이컬슨과 E.W.몰리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실험의 충분한 정밀도에도 불구하고 결과는 완전히 부정적이었다. 즉, 에테르의 물질성은 여기서 모두 부정되었는데, 역으로 말하면 에테르라는 물질을 생각할 필요성이 소멸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한편에서는 이 단계에서 A.아인슈타인상대성이론이 제출되었는데, 이 이론에서는 에테르에 대한 운동을 논의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게 된다. 이리하여 실험적으로나 이론적으로나 에테르에 대한 생각은 종말을 고했다. 따라서 현재는 이론에 에테르라는 개념은 포함되지 않으며, 에테르는 광학 ·전자기학의 진보와 더불어 변천하면서 그 사명을 다하고 사라진 역사적인 생각으로서 다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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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루스트 [Marcel Proust, 1871.7.10~1922.11.8]

 

요약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랑스의 소설가.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어 있는 《장 상퇴유》,《생트 뵈브에 거역해서》는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대성될 일관된 노력이 남긴 행적으로 보아야 할 작품들이다. 콩쿠르 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국적 프랑스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프랑스 파리 근처 오퇴유
주요수상 공쿠르상
주요저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8)
본문

파리 근처 오퇴유 출생. 20세기 전반의 소설 중 질·양에 있어서 모두 최고의 것으로 일컬어지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 la recherche du temps perdu》(1913∼1928)의 작자이다. 아버지 아드리언 프루스트 박사는 보스 지방 출신인 위생학의 대가로 파리대학교 교수였으며, 어머니 잔은 알자스 출신의 유대계 부르주아지 집안 규수였다. 섬세한 신경과 풍부한 교양을 갖추어 모자간의 마음의 교류는 프루스트의 정신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다. 철학자 베르그송은 외가 쪽으로 친척이 된다.

아버지의 고향 이리에, 할머니와 피서 갔던 노르망디의 해변, 파리의 샹젤리제가 유소년기의 작가가 경험을 쌓은 장소들로 모두가 후에 소설로 옮겨져서 중요한 무대가 된다. 풍족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9세 때부터 천식()에 걸렸는데, 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평생의 숙환이 되었다. 또 어떤 시기부터 자각하게 된 동성애의 습벽이 그의 인생에 어두운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파리의 콩도르세중학으로 진학하여 상류사회의 자제들이 모이는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몇 사람의 친구와 함께 동인지 《향연()》을 발행하였다. 또 사교계와 문학 살롱에 출입하면서 카이야베 부인, 스트로스 부인 등 여러 인물들과의 만남이 작가로서의 인간관찰의 안목을 길러 주었다. 《향연》 시대의 문장은 A.프랑스의 서문을 얻어 《즐거움과 그 나날》(1896)에 종합되었는데, 동료들간에서도 묵살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병약무위()하게만 보였던 프루스트가 일관하여 문학적 정진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이 1950년대에 접어들면서 발굴된 방대한 미발표 원고에 의해 밝혀졌다.

《장 상퇴유》는 1,000매를 넘는 대작으로 3인칭 수법으로 저술되었는데, 1896∼1900년에 걸친 작품으로 추정되며, 또 《생트 뵈브에 거역해서》는 1908∼1910년경의 습작인데, 모두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집대성될 일관된 노력이 남긴 행적으로 보아야 할 작품들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제1권 《스왕가() 쪽으로 Du Cô té de chez Swann》는 1911년경에 대체로 완성을 보았으나 출판사를 구하지 못하여 1913년이 되어 가까스로 자비출판되었다. 그리고 나서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하였는데,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도 있고 해서 제2권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 ?? l'Ombre des jeunes filles enfleurs》가 발간된 것은 1918년이었다.

이것은 이듬해에 공쿠르상을 수상하여 프루스트는 비로소 연래의 꿈이었던 문학적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그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코르크로 둘러싼 병실 안에서 죽음의 예감과 대결하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완성을 위한 수도사와 같은 생활이 계속되었다. 일생과 바꿀 대작을 남겼다는 점에서 프루스트는 작가로서의 영광과 비참을 모두 맛보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작품 외에 2권의 문집, 10여 권의 서간집과 미발표 원고가 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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