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프라민 [imipramine]
[명사]<약학> 정신과 질환의 여러 가지 우울증 치료에 쓰는 약제.
중추 신경 흥분 작용, 항히스타민 작용이 있다. ≒항우울제·항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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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클로르프로마진 chlorpromazine 명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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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이탈리아의 시인. 예언자, 신앙인으로서, 이탈리아뿐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을 남겼다.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의 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주요작품은《신생》,《농경시》,《향연》등이다.
              국적 이탈리아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이탈리아 피렌체
              주요작품 《신생》(1293?) 《신곡》 《농경시》 《향연》(1306~1308)
              단테 알리기에리 /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피렌체 출생. 예언자 또는 신앙인으로서, 박해를 가한 조국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인류에게 영원불멸의 거작 《신곡 Divina Commedia》(1307?∼1321)을 남겼고,

              이것으로 중세의 정신을 종합하여 문예부흥선구자가 되어 인류문화가 지향할 목표를 제시하였다.

              단테는 피렌체의 겔프당(:)의 귀족 가문의 출신으로,

              부친은 알리기에로 디 베를린 치오네, 모친은 벨라라고 하였으나 그들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조부는 신성로마 황제를 섬겨 십자군에 참가하여 전몰한 피렌체의 기사 카치아귀다라고

              《신곡》의 <천국편> 제15가()에서 밝혀 두고 있다.

              그가 9세 때에 마치 천사처럼 청순한 베아트리체를 연모하였음이

              시집 《신생 Vita Nuova》(1293?)에 나타나 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그의 시의 형성과정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단테는 수도원이 경영하는 라틴어학교를 다녔고,

              이어서 피렌체의 석학 B.라티니에게 사사하여 문법 ·논리학 ·수사학을 배웠으며

              볼로냐대학에서 수사학 ·철학 ·법률학 ·천문학 등을 연구하면서 특히 이탈리아어로 시를 지었다.

              그 동안에 동급생인 G.카발칸티와 돈독한 우의를 맺어

              고전작가로서는 V.베르길리우스를 탐독하는 한편, 그와 시작()을 경쟁하여 서로 격려하였다.

              그는 시칠리아파()와 토스카나의 귀토네파의 서정시에서 받은 영향 아래

              베아트리체를 향하여 싹튼 사랑을 읊기 시작하였고,

              그 후에 청신체파() 시인으로서의 시작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한 남성의 연정을 카발칸티가 주장하는 청신체(dolce stil nuovo)로써는

              표현하기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 점차 독자적인 청신체의 시를 쓰게 되었다.

              1290년 젊음과 아름다움의 절정기에 있던 베아트리체가 요절하자,

              단테가 찬미하는 여성의 이상화가 급속도로 진전되었고,

              《신생》의 권말에서 성녀 베아트리체를 위해 대작을 준비하겠다는 결의를 피력하였다.

              《신생》은 운문과 산문을 섞은 소품이지만,

               그의 거작 《신곡》의 중추가 되는 종교적 ·시적 사상의 싹틈을 엿볼 수 있고,

              현실의 여성을 ‘영원한 여성’으로 승화시킨 수법은 당시 유행하던 청신체였다.

               이 《신생》 직후 단테의 문학 및 철학에 대한 연구는 넓이와 깊이를 더해갔다.

              즉, 문체의 탐구과정에서는 고대 로마의 베르길리우스, F.호라티우스, N.오비디우스에게서

              많은 것을 배웠고, M.T.키케로와 L.세네카에게서는 윤리학을 배웠다.

              또한 산타크로체와 산타 마리아 노벨라 등의 두 수도원에 자주 드나들면서

              성직자들과 의견을 나누며 베르투스 마그누스와 T.아퀴나스의 철학 및 신학사상을 배웠다.

              그는 당시의 풍습에 따라 12세에 피렌체의 도나티가()의 딸 젬마와 약혼하여

              1290년 이전에 결혼하였고, 세 아들을 두었다.

              1287년 볼로냐로 가서 1289년에 기병대의 일원으로 칸바르디노에서

              아레초기벨린당(:)의 군대와 전투를 하기도 하여 청년시절에는 갖가지 경험을 쌓았다.

              1293년의 사회개혁법에 의하여 귀족의 공직금지가 선포되어

              조합()의 가입자만이 특례를 인정받게 되자 단테도 ‘의사 및 약종업조합’에 등록하여

              1295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 말까지 피렌체 도시국가에 특별참여,

              1295년 12월 14일에는 통령()선거를 위한 자문기관의 위원,

              1296년 5∼9월까지는 재정을 결정하는 100인위원회 위원,

              1300년 5월에는 이웃나라 생 제미냐노의 특파대사를 거쳐,

              마침내 통령의 한 사람으로 선출되어 6월 15일부터 8월 15일까지 재임하였다.

              당시 피렌체는 흑 ·백() 양당으로 갈라져, 단테는 백당에 소속하여 흑당의 힘을 누르고 있었다.

              그러나 흑당은 로마 교황 보니파티우스 8세의 야심을 이용하였다.

              흑당에 동의해서 카를로 바르와의 군대가 피렌체로 입성하여, 단테는 흑당에 의하여 추방되었다.

              1302년 1월에는 독직죄로 고소당하여 무거운 벌금과 2년간의 유형()을 선고받았으며,

              다시 2개월 후에는 영구유형을 선고받고,

              시정부()에 체포될 경우 화형에 처한다는 통고를 받았다.

              《신곡》의 첫머리에 있는 “어두운 숲을 헤맨다”는 표현은

              단테가 35세 때인 1300년 유랑의 길을 떠나기 직전

              그의 양심 ·예지 ·신앙이 심각하게 흔들리는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그로서는 이 부당한 단죄에 대한 반항은 백당의 잔당에 가담하여 피렌체를 다시 탈환하는 일뿐이었다.

              그러나 백당은 1303년과 그 이듬해에도 패배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단테만이 일인일당()으로 남았으며,

              유랑의 나그네길은 더욱 고난과 실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낙담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았고, 인류 구제의 길을 가르치려는 사람은 먼저 지옥에 가서

              인간이 범한 죄의 실체와 이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보아야 한다고 스스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고난과 시련을 당하면서 인간사회의 모습을 샅샅이 관찰하여

              그 가운데서 멸망하는 것과 영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백당의 최후의 일인으로 남은 단테는 1303년 유랑의 길에서

              베로나스칼라가()의 외교사절이 되기도 하고, 1306년 마라스피나의 식객이 되기도 하면서

              여러 곳을 떠돌아다녔다. 1306∼1308년 사이에 단테는 《향연 Convivio》을 썼다.

              이것은 서장과 14장으로 되어 14개의 칸초네를 넣을 예정이었으나

              실제는 3개의 칸초네만을 주석()하여 미완으로 그친 것은

              그 무렵에 이미 《신곡》의 구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향연》의 내용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 및 스콜라 철학이고, 주로 윤리문제를 다루고 있다.

              시집 《리메》 또는 《칸초니에레》는 앞에서 든 두 작품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단테의 시를 모은 것으로 그 대부분이 청신체로써 베아트리체를 읊었다.

              1304∼1307년에 단테는 《속어론():De Vuigari eloquentia》을 썼는데

              이것은 라틴어의 논문으로 언어문제와 시작을 다루었으나,

               이 작품도 제2권 제14장으로 중단하여 미완으로 끝났다.

              1310년 신성로마 황제가 되기 위하여 하인리히 7세가 이탈리아로 내려왔을 때

              이 고행의 시인은 모든 악에서 이탈리아가 풀려날 것으로 믿고 열렬한 서한을 보냈다.

              그러나 피렌체를 비롯한 이탈리아의 모든 겔프당()의 도시는 맹렬히 하인리히 7세에게 반항하였고,

               1313년 그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단테의 피렌체 귀환의 꿈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그 동안에 그는 라틴어로 《제왕론()》(전 3권)을 썼다.

              그는 제1권에서 정의와 평화의 확립을 주장하였고,

              제2권에서 제국은 각 시민이 선출한 정부에 의하여 통치되어야 하고,

              이는 신의 가호로써만 가능하다고 주장하였으며,

              제3권에서는 교황과 제왕을 분리하여 교황은 정신계를, 제왕은 물질계를 다스려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1315년 《피렌체의 친구에게 보내는 서간》에서는 모욕적 대특사()를 거부하였다.

              이 해에 피렌체 정부는 단테 및 그의 아들에게 사형을 선고하였다.

              그러나 1318년 이후 라벤나의 영주 G.N.폴렌타는 유랑시인 단테에게 안식할 땅을 제공하여

              세 아들은 성직자가 되고, 단테는 《신곡》을 완성하였다.

              최대의 걸작 《신곡》은 단테의 문학적 ·종교적 사상의 결정()으로,

               <지옥편>은 1304∼1308년에, <연옥편>은 1308∼1313년에,

              <천국편>은 그의 생애의 마지막 7년 동안에 완성하였다.

              또한 그의 《농경시()》는 친구인 볼로냐대학 교수 G.데르 비르지리오에게 보낸 목가()이다.

              1302년 초에는 베로나에 가서 《수륙론()》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신곡》 <천국편>의 제25장 첫머리에서 그는 피렌체 시민이 자신을 계관시인()으로

              맞이해 줄 것을 희망하였으나, 1321년 9월 라벤나 영주 폴렌타의 외교사절로 베네치아에 다녀오는 길에

              죽음으로써 그의 그러한 꿈마저 덧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폴렌타는 이 시인의 죽음에 대하여 최대의 애도를 표하고, 라벤나의 땅에 묻었다.

              그 묘소의 건조는 내란으로 인하여 천연()되다가,

              1482년 B.벰보가 조각가 P.롬바르도에게 명하여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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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규슈 원산이다. 중국산 종려에 대하여 일본산 종려라는 뜻으로 왜종려()라고도 하고,

              중국산은 당()종려라고 한다. 당종려는 키가 작고 잎이 딱딱하여 밑으로 처지지 않는다.

              가지가 없고 높이 3∼7m 자라며 흑갈색 섬유상의 잎집으로 싸여 있다.

              잎은 원줄기 끝에 달리고 둥글며 지름 50∼80cm로서 부채살 모양으로 갈라지고,

              갈래조각은 맥을 중심으로 접힌다.

              잎자루는 길이 1m 정도로 밑이 넓어져 삼각형으로 되며,

              가장자리에 섬유상의 잎집이 발달하여 잎이 떨어진 다음에도 남아 있는데

              이 부분의 섬유를 종려털이라고 한다.

              암수딴그루이며 꽃은 2가화로 5∼6월에 밑으로 처져서 피고 황백색이며 밑에 커다란 포가 있다.

              화피갈래조각 및 수술은 6개씩이고 암술은 1개이다.

              열매는 둥글고 지름 1cm 정도로서 검게 익는다.

              한국에서는 제주에서 관상용으로 심고 있으나 원산지에서는 섬유의 용도가 다양하고,

              잎은 1년에 8∼10장이 나오므로 이것을 채취하여 농가의 소득을 올린다.

              왜종려 / 야자나무과. 일본산 종려나무를 왜종려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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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케도니아의 왕(재위 BC 336∼BC 323).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하였다.

              별칭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
              국적 마케도니아
              활동분야 정치

               

              필립포스 2세와 올림피아스의 아들로서 알렉산더대왕, 알렉산드로스 3세라고도 한다.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대왕으로,

              탄생에 관해서는 그리스의 작가 플루타르코스(영웅전 작가)가

              “올림피아스가 벼락이 배에 떨어지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다”

              또는 “필립포스가 아내의 곁에 있는 뱀을 보았다” 등의 전설적인 이야기를 전한다.

              당시의 대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마케도니아 수도인 펠라의 궁정에 초빙되어

              3년 동안 그에게 윤리학 ·철학 ·문학 ·정치학 ·자연과학 ·의학 등을 가르쳤다.

              그는 호메로스의 시를 애독하여 원정() 때도 그 책을 지니고 다녔으며,

              학자를 대동하여 각지의 탐험() ·측량 등을 시킨 일,

              또는 변함없이 그리스 문화를 숭앙한 일 등은 스승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또한 부왕으로부터는 전술 ·행정 등의 실제적인 일을 배웠고,

              BC 338년의 카이로네이아전투에 직접 참가하였다.

              부왕이 암살되자 군대의 추대를 받아 20세의 젊은 나이로 왕이 되니,

              그리스 도시의 대표자 회의를 열고 아버지와 같이 헬라스 연맹의 맹주로 뽑혔다.

              때마침 마케도니아의 북방에 만족()이 침입하고 서방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친정()하였는데,

              이 싸움에서 그가 전사하였다는 소문이 퍼지자 온 그리스가 동요하고 테베가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즉시 테베를 토벌하고 테베시()의 전시민을 노예로 팔아버렸다.

              BC 334년에 그는 마케도니아군()과 헬라스 연맹군을 거느리고,

              페르시아 원정을 위해 소()아시아로 건너갔다.

              먼저 그라니코스 강변에서 페르시아군과 싸워 승리하고,

              페르시아의 지배하에 있던 그리스의 여러 도시를 해방하였으며,

              사르디스 그 밖의 땅을 점령한 뒤 북()시리아를 공략하였다.

              BC 333년 킬리키아의 이수스전투에서 다리우스 3세의 군대를 대파하였으며,

              이어 페르시아 함대의 근거지인 티루스(티로스) ·가자 등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시리아 ·페니키아를 정복한 다음 이집트를 공략하였다.

              이집트에서는 나일강 하구에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시()를 건설하고

              1,000 km가 넘는 사막을 거쳐 아몬 신전에 참배하였다.

              여기서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았는데,

              이후로 그는 만인동포관()을 지니게 되었다.

              BC 330년 다시 군대를 돌려서 메소포타미아로 가서,

              가우가멜라에서 세 번이나 페르시아군()과 싸워 대승하였다.

              이때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도주하였으나 신하인 베소스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알렉산드로스는 계속하여 바빌론 ·수사 ·페르세폴리스 ·엑바타나 등의 여러 도시를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여기서 마케도니아군()과 그리스군() 중의 지원자만을 거느리고 다시 동쪽으로 원정하여

              이란 고원을 정복한 뒤 인도의 인더스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군사 중에 열병이 퍼지고 장마가 계속되었으므로,

              군대를 돌려 BC 324년에 페르세폴리스에 되돌아왔다.

              BC 323년 바빌론에 돌아와 아라비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33세의 젊은 나이로 갑자기 죽었다.

              그는 자기가 정복한 땅에 알렉산드리아라고 이름지은 도시를 70개나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그리스 문화 동점()의 거점이 되었고, 헬레니즘 문화의 형성에 큰 구실을 하였다.

              그의 문화사적 업적은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에 걸친 대제국을 건설하여

              그리스 문화와 오리엔트 문화를 융합시킨 새로운 헬레니즘 문화를 이룩한 데 있다.

              그가 죽은 뒤 대제국 영토는 마케도니아 ·시리아 ·이집트의 세 나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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