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로키족 [Cherokee]

 

요약
북아메리카 남동부, 애팔래치아산맥 남부에 거주하는 인디언족.
본문

언어는 이로쿼이어계()에 속한다. 인구가 1650년에는 2만 2000명이었으나,

그 후 천연두의 유행 때문에 반감되었다.

백인과의 접촉 이래 백인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영국 이주민()에 이어, 미국 정부는 인디언 교육의 시범 케이스

다트머스대학교를 설립하였다(1799).

세쿼이아라는 혼혈 추장이 음절문자를 만들어,

북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문자를 가진 인디언이었다.

19세기 후반에 오클라호마의 보호지로 강제 이주당하였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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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벨탑 [Tower of Babel]

 

요약
구약성서 《창세기》 제11장에 나오는 벽돌로 하늘 높이 피라미드형으로 쌓아올렸다는 탑.

본문

인류역사의 초기, 즉 대홍수가 휩쓸고 지나간 후 노아의 후손들은 다시 시날(바빌로니아) 땅에 정착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곳에서 사람들은 도시를 건설하고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탑을 세우기로 하였다. 성경에 기록된 그들의 탑 건축 목적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탑을 쌓아올려 자기들의 이름을 떨치고 홍수와 같은 야훼의 심판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의 민족신 야훼는 노아의 홍수 이후에는 물로써 대심판을 하지는 않겠다고 약속하였는데, 그 약속의 표징이 무지개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야훼를 불신하는 상징으로 바벨탑을 세운 것이다. 이를 괘씸하게 여긴 야훼는 탑을 건축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언어를 혼동시켜 멀리 흩어지게 함으로써 탑 건축이 중단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 지명을 바벨(Babel), 또는 바빌론(Babylon)이라고 불렀다. 그 뜻은 ‘그가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창세 11:9)는 내용이다.

이 탑의 크기를 헤로도토스의 《역사》 등 여러 고증을 통해서 보면, 1층이 길이 90m ·너비 90m ·높이 33m, 2층은 길이 78m ·너비 78m ·높이 18m, 3층은 길이 60m ·너비 60m ·높이 6m, 4층은 길이 51m ·너비 51m ·높이 6m, 5층은 길이 42m ·너비 42m ·높이 6m, 6층은 길이 33m ·너비 33m ·높이 6m이고, 7층이 길이 24m ·너비 24m ·높이 15m로 알려져 있다. 이 이야기는 각 민족에 따라 달라지는 언어현상의 유래담()이 근간이 되어 합성된 것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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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종 [, 1852~1919.1.21]

 

요약
조선 제26대 왕(재위 1863∼1907).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내정 간섭을 겪었다. 개화, 수구의 양파가 대립하였고, 병자수호조약, 한·미, 한·영수호조약 등이 이루어졌다.
본관 전주
주연
본명 재황
별칭 아명 명복. 초자 명부. 자 성림
활동분야 정치
주요저서

《주연집》

본문

초휘() 재황(). 아명() 명복(). 초자() 명부(). 자 성림(). 호 주연().

영조의 현손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둘째 아들이다. 비()는 명성황후로,

여성부원군() 치록(祿)의 딸이다. 1863년(철종 14) 12월 철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조대비()의 전교()로 12세에 즉위하였다. 새 왕의 나이가 어리므로 예에 따라

조대비가 수렴청정하였으나, 대정()을 협찬하게 한다는 명분으로 정권은 대원군에게 넘어가

이로부터 대원군의 10년 집정시대가 열렸다.

척신() 세도정치의 배제, 붕당문벌()의 폐해 타파, 당파를 초월한 인재의 등용,

의정부의 권한 부활에 따른 비변사()의 폐지 및 삼군부()의 설치,

한강 양화진()의 포대() 구축에 따른 경도수비() 강화,

양반으로부터의 신포징수(), 양반 유생의 발호 엄단 등은

고종 초기 10년 동안 대원군이 이룩한 치적이다.

그러나 경복궁 중수()에 따른 국가재정의 파탄, 악화()인 당백전()의 주조()와

민생의 피폐, 과중한 노역()으로 인한 민심의 이반과 소요, 가톨릭교 탄압에 따른

8,000여 명의 교도 학살, 쇄국정책, 병인양요(), 신미양요() 등

어두운 정치적 자취를 남기고 1873년(고종 10) 11월, 명성황후의 공작에 따라

대원군이 섭정에서 물러나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게 되었다.

이로부터 정권은 명성황후와 그 일족인 민승호(민겸호(민태호()로 대표되는

민씨 일문의 세도정치가 다시 시작되었다.

이 때부터 고종은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세력다툼 속에서 국난을 헤쳐나가야 했다.

1875년 운요호사건[]을 계기로 쇄국정책을 버리고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

근대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개국과 함께 새로운 문물에 접하게 되자,

개화당이 대두, 조정은 개화·사대당()의 격심한 알력 속에 빠졌다.

1881년 신사유람단()을 일본에 파견하여 새로운 문물을 시찰하게 하고,

군사제도를 개혁, 신식 훈련을 받은 별기군()을 창설하였으나

신제도에 대한 반동으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개화·수구() 양파는

피비린내나는 싸움을 벌이게 되어 1884년 갑신정변()을 겪고

고종은 개화당에 의해 경우궁(계동궁() 등으로 이어()하였다.

이런 중에도 한·미, 한·영수호조약을 체결하여 서방국가와 외교의 길을 텄지만,

1885년에는 조선에서 청나라의 우월권을 배제하고, 일본도 동등한 세력을 가질 수 있게 하는

청·일 간의 톈진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반도에 발판을 굳히는 계기가 되었다.

1894년에 일어난 동학농민운동이 청·일 전쟁을 유발하고,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는 대원군을 영입,

김홍집() 등의 개화파가 혁신내각을 조직하여 개국 이래의 제도를 바꾸는

갑오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로부터 한국 지배기반을 굳힌 일본은 본격적으로 내정을 간섭하여

한국 최초의 헌법이라고도 할 〈홍범 14조()〉가 선포되고

청나라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독립국으로 행세하는 듯하였으나,

일본의 내정간섭은 더욱 심하여져 관제를 일본에 준하여 개혁하고, 8도를 13도로 개편하였다.

그러나 3국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 영유[]를 포기, 국제적 위신이 떨어지자

민씨 일파는 친러로 기울어 친일내각을 무너뜨리고 이범진(이완용() 등을 등용하여

제3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에 맞서 일본공사 미우라고로[]는

1895년 8월 대원군을 받들고 일본인 자객()들을 앞세워 경복궁으로 들어가 명성황후를 시해,

고종에게 강압하여 친러파 내각을 물러나게 하고 유길준() 등을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였다. 종두()·우체사무·단발령·양력사용·도형폐지() 등은

이 해의 제4차 김홍집 내각에 의해 이루어졌다.

1896년 2월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계략으로 고종과 세자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이 있자 김홍집·정병하(어윤중() 등 개화파 인사가 살해되고

다시 친러내각이 성립되었다. 이로부터 한동안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를 받았지만,

고종은 1897년 2월 25일 러시아와 일본의 협상에 따라 경운궁(: 후의 덕수궁)으로 환궁,

8월에는 연호를 광무()라 고치고, 10월에는 국호를 대한, 왕을 황제라 하여

고종은 황제즉위식을 가졌다. 1904년(광무 8)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요구로

고문정치()를 위한 제1차 한 ·일 협약을 체결,

이듬해 한성의 경찰치안권을 일본헌병대가 장악하였으며,

이해 11월에는 제2차 한·일 협약인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본에 빼앗김으로써

병자호란 이래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았다.

이에 우국지사 민영환(조병세(홍만식()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지만

일본은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대행정치() 체체를 갖추었다.

1907년 제2회 만국평화회의네덜란드헤이그에서 열리자 고종은 밀사 이준() 등을

파견하여 국권회복을 기도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

오히려 이 밀사사건 때문에 일본의 협박으로 황태자(순종)에게 양위()한 후 퇴위,

순종황제로부터 태황제()의 칭호를 받고 덕수궁에서 만년을 보내다가

1919년 1월 21일 일본인에게 독살된 것으로 전해진다.

고종의 재위 44년은 민족의 격동기로서 실질적으로 국운()과 명운을 함께 하여,

양위 3년 후에는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능은 금곡()의 홍릉()이고, 저서에 《주연집()》이 있다.

출처-네이버

고종 독살설은 '조선왕 독살사건'에서도 신빙성 있게 주장되는데

이 영화 속에서는 일제의 강압과 만행을 강조하려다 보니

고종의 독살이 한일합방 전인 것처럼 잘못 묘사하는 실수를 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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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황후 [, 1851~1895]

 

요약

조선 고종의 황후.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반대하여 정권을 다지고 일본과 수교하였으나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위기로 청나라의 도움을 받았다.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하자 일본 낭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본관 여흥
출생지 여주

 

본문

본관은 여흥(), 성은 민씨()로, 1851년(철종 2) 경기도 여주()에서 태어났다.

증() 영의정 치록(祿)의 딸이다. 9세 때 고아가 되어 본가에서 가난하게 자라다가,

흥선대원군()의 부인 부대부인() 민씨의 추천으로 왕비에 간택·책봉되었다.

그러나 궁인 이씨에게서 완화군()이 태어나자 이를 기뻐하는 흥선대원군과 대립,

흥선대원군의 반대파를 규합하면서 민씨 척족을 정부 요직에 앉히고 세력 기반을 착실히 다졌다.

1873년 일본에서 정한론()이 대두되면서 내외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민생고()가 가중되는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그를 탄핵하기 위해 유림()의 거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발탁하였다.

이어 흥선대원군파의 반대 상소와 주장을 배척하고, 고종에게 친정()을 선포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진 뒤, 대원군파를 숙청하고 쇄국정책을 폐하여 일본과 수교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신변이 위태롭게 되자 궁궐을 탈출, 화개동()

윤태준(駿)의 집을 거쳐 충주()·장호원()으로 옮겨 다니며 피신 생활을 하였다.

이 와중에 흥선대원군이 중전의 국상()을 선포하자, 윤태준을 고종에게 밀파하여

자신의 건재를 알리고 청나라에 지원을 요청하게 하였다.

청나라 군대의 출동으로 군란이 진압된 뒤 다시 흥선대원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다시 잡았다.

1884년 김옥균(박영효() 등 개화파가 갑신정변()을 일으켜 실각하자,

심상훈() 등으로 하여금 청나라가 개입하도록 함으로써

3일 만에 개화당()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후 일본 세력의 침투가 강화되면서

김홍집() 등 친일() 내각이 득세하고, 1894년 7월 일본 세력을 등에 업은 흥선대원군이

재등장하면서 갑오개혁이 시작되자, 이번에는 러시아에 접근하여 일본 세력을 추방하려고 하였다.

이에 일본 정부의 사주를 받은 주한 일본공사(使) 미우라 고로[]가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을 궁중에 잠입시켜 경복궁 옥호루()에서

그녀를 난자시해()하고, 시신은 궁궐 밖으로 운반 소각하였다.

이 사건이 바로 을미사변()이다. 하지만 최근 시해장소가 옥호루가 아니라

경복궁 장안당()과 곤령합() 사이에 있는 마당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그뒤 폐위되어 서인()으로 강등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복호()되었고,

1897년(광무 1) 명성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그해 11월 국장()으로 청량리() 밖 홍릉()에 묻혔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명성황후에 대해 재평가작업이 일어나면서,

을미사변이 미우라 고로의 단독범행, 또는 그의 후원을 받은 민간인들이나 일본 낭인들의 범행,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라는 설이 지배적이었는데,

차츰 이러한 통설이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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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895년(고종 32) 일본공사 미우라 고로[]가 주동이 되어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일본세력 강화를 획책한 정변.

 

본문
경복궁 명성황후 조난비 /

갑오개혁을 통하여 깊숙이 조선 내정에 관여하게 된 일본은 청일전쟁에 승리한 뒤 박영효(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내각을 만들어 세력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이때 프랑스·러시아·독일 등 3국은 일본의 대륙침략 저지를 위해, 청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차지한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 이른바 '삼국간섭'으로 일본의 세력확장에 제동을 걸었다. 그동안 일본의 강압하에 내정개혁을 추진한 조선정부는, 러시아공사 K.베베르와 제휴하고 친일세력의 완전 제거를 위하여, 1895년 9월 6일 왕비시해 음모혐의로 전 내무대신 박영효에 대해 체포령을 내려 정계에서 축출하였다.

이미 8월에 민영환()을 주미전권공사(使)로 등용한 동시에, 친일계인 어윤중(김가진() 등을 면직시키고 이범진(이완용() 등의 친러파를 기용하여, 제3차 김홍집내각이 성립되어, 친미·친러세력이 우세하였다.

더구나 주한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가 조선정부에 약속한 증여금 300만 원을 일본정부가 제공하지 않자, 조선정계에서는 배일세력이 증가하였다. 이에 일본측은 이노우에 대신 무인 출신 미우라를

주한일본공사로 파견하였다. 조선정부는 일본의 강압에 따라 제정한 신제도를 구제도로 복구하려고, 일본인 교관이 훈련시킨 2개 대대의 훈련대도 해산하고자 하였다.

이에 대하여 미우라는 명성황후시해계획을 세우고, 1895년 10월 2일 하수인으로서 한성신보사()에 있는 낭인()을 이용하고자 사장 아다치[]를 공사관으로 불러

6,000원의 거사자금을 주고 왕비시해의 전위대로 삼아, 공덕리() 아소정()에 있는

흥선대원군을 궁중으로 호위하는 일을 담당시켰다. 그 외 일본군수비대와 일본인 거류지 담당경찰관 및 친일조선인까지 동원할 계획을 세우고, 훈련대의 우범선(이두황()·이진호() 등 3대대장과 전 군부협판() 이주회()를 포섭하였다.

한편 정부에서는 군부대신 안경수()를 일본공사관에 보내어 훈련대해산과무장해제,

민영준(駿)의 궁내부대신 임명을 통고하였다. 일본은 상황이 급변함을 직감하고

명성황후 시해계획을 10월 8일 새벽으로 결행하였다. 흥선대원군을 앞세운 일본인 자객들은,

서대문을 거쳐 우범선·이두황이 지휘한 조선 훈련대와 합류하여 광화문을 통과하였다.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과 군부대신 안경수가 1개 중대의 시위대 병력으로,

이들의 대궐 침범을 제지하려다 충돌이 일어났다.

흉도()들은 궁내부대신 이경직()과 홍계훈을 살해한 다음,

이어서 왕비의 침실인 옥호루()에 난입하여 왕비를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불사른 뒤 뒷산에 묻었다. 곧 새로 유길준(서광범(

정병하(김종한·권형진()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내각을 수립하였다.

명성황후시해 현장에는 고종·황태자 및 미국인 교관 다이, 러시아인 기사 사바틴,

그외 많은 조선인이 있어 진상을 낱낱이 목격하여,

사건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에 구미열강이 강경한 태도로 일본인의 사건 관여사실을 주장하고 나서자,

일본은 이의 처리방안으로서 미우라를 해임, 고무라[]를 판리공사(使)로 임명하였다.

한편 미우라 등 관계자 48명을 히로시마[] 감옥에 구치하고,

형식적으로 관련혐의자에 대한 취조를 하였으며, 결국 증거불충분을 이유로 전원석방시켰다.

결국 을미사변은 항일의병활동의 원인과 아관파천()의 계기가 되어,

한국은 러시아의 보호국과 같은 지위로 떨어졌고, 일본의 식민지화계획에 차질을 가져왔다.

출처-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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