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복을 입는 책읽기

 


  이른아침에 어머니가 동생하고 마을걷기를 하러 나가니, 큰아이가 저도 데리고 가라며 달려 나가는데, 굳이 한복을 입고 나가려 한다. 걷고 들어와서 입어도 될 테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스스로 느끼기에 더 고운 옷을 입고 싶다.


  할머니가 한 벌 사 주고, 마을 이웃 할머니한테서 손주 한복 작아진 것을 한 벌 얻었다. 아이는 이 옷을 명절에만 입는 옷으로 묵히고 싶지 않다. 명절날 신나게 입어 땀으로 옴팡 젖은 옷을 빨아서 널면, 다 마르기 무섭게 큰아이 스스로 걷어서 입는다. 이렇게 달포 가까이 한복입기를 하는데, ‘이제 그 옷은 그만 입고 다른 옷도 좀 입지?’ 하는 마음으로 빨래가 다 마르고 아이가 눈치를 못 챌 적에 슬그머니 종이가방에 담아 옷장 한쪽에 모신다. 아버지는 모르는 척 아뭇소리를 않는다.


  이렇게 해서 아이가 한복을 잊고 한동안 지나가는데, 얼마쯤 지나면 새삼스레 “내 한벅(한복) 어디 있어? 내 예쁜 치마 어디 있어? 할머니가 사 준 내 예쁜 치마 어디 있어? 나 예쁜 치마 입고 싶어.” 하면서 조잘조잘 노래를 부른다. 이 노래를 듣고도 모르는 척할 수 없기에 옷장에서 종이가방을 꺼내어 아이한테 내민다. “네가 입고 싶다 했으니까, 이제는 스스로 입어 봐.”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 이야기를 다룬 다큐영화를 보다가 새삼스레 떠올린다. 그러고 보면, 일본에서든 중국에서든, 또 북녘에서든, 가시내는 으레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사내는 ‘서양 차린옷’을 으레 입지만, 가시내한테는 ‘고운 겨레옷’이라 일컬으며 치마저고리를 입도록 한다. 오직 남녘에서만 가시내도 사내도 겨레옷이든 한국옷이든 한복이든 입으려 하지 않는다. 워낙 내 나라 옷을 나 스스로 안 입으려 하는 남녘이기에, ‘생활한복’이라는 이름을 달고 새로운 옷이 나온다.


  그런데, ‘생활한복’이란 무엇일까? 언제부터 한복이 ‘살아가며(생활)’ 입는 옷이 아니라 명절에만 예쁘게 보이라 입는 옷이 되었고, 이 때문에 굳이 ‘살아가며’ 입는다는 한복이 따로 나왔을까?


  그리 멀잖은 옛날, 이 땅 사람들 누구나 아주 마땅하면서 어여쁘게 한복을 입었다. 한겨레 누구나 한복을 입던 지난날, 한겨레가 입던 옷을 가리키는 이름은 ‘한복’이 아니었으리라 느낀다. 한겨레 바깥에서 살아가는 중국이나 일본에서 바라보기에 ‘한복’이지, 이 땅 사람들로는 그저 ‘옷’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2000년대 오늘날 이 땅 사람들이 입는 ‘여느 옷’이 바로 ‘한복’이다. 한겨레가 오늘 입는 옷이 바로 한복이지, 다른 옷이 한복이 아니다. 이리하여, ‘한옥’도 없다. 한겨레가 살아가는 집은 그저 ‘집’일 뿐 한옥이 될 수 없다. 한겨레가 먹는 밥 또한 ‘한식’이 아니라 ‘밥’일 뿐이다.


  생각해 보라. 앞으로 천 해가 지나 3000년대가 되면, 3000년대를 살아갈 이 땅 뒷사람은 2000년대 ‘한겨레 옷 문화’를 어떻게 말하겠는가. 바로 오늘 우리가 입는 여느 옷이 곧바로 ‘한복’인 셈이다.


  생활한복이란 없다. 한복도 없다. 그저 옷이다.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겨레는 ‘한복’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치마저고리’라고 말한다. 옳다. 치마저고리를 입으니 ‘치마저고리’라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 아이도 ‘한복’을 입는다 말할 수 없다. 우리 큰아이도 ‘치마저고리’를 입는 셈이다. 그러면 우리 작은아이가 제 옷을 입는다 할 때에는 ‘색동옷’이 될까, 아니면 ‘바지저고리’가 될까. (4345.9.1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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