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를 물려타는 책읽기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가꾸지 않으며 살아가기에 ‘새로운 한국말’이 예쁘면서 슬기롭게 태어나지 못하곤 한다. 새로운 문화나 예술이 흐드러지게 꽃피운다면, 이러한 문화와 예술에 걸맞게 ‘새로운 한국말’이 흐드러지게 꽃피울 만큼 새로 태어나야 알맞다. 그렇지만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예쁘거나 슬기롭게 안 하느라, 언제나 서양말이나 일본말이나 중국말로 ‘새로운 문화나 예술’뿐 아니라 ‘새로운 문명이나 기계’에다가 ‘새로운 학문과 넋과 이야기’를 나타내려고만 한다.


  이를테면, ‘물려주다’에서 테두리를 넓혀 ‘물려읽기’라든지 ‘물려쓰다’라든지 ‘물려타기’라든지 ‘물려하다’ 같은 낱말을 새로 지을 줄 모른다.


  나는 자전거를 ‘물려탄다’고 생각한다. 내 어버이가 즐겁게 타면서 고이 건사하는 자전거를 내가 물려타고, 내가 물려타면서 즐기고 돌본 자전거를 내 아이가 물려탄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무 자전거나 물려줄 수 없다. 뼈대가 튼튼한 자전거일 때에 물려줄 수 있다. 부품은 열 해 스무 해 지나고 보면 닳거나 바스라져서 갈아야 하곤 한다. 그렇지만 뼈대는 서른 해 쉰 해를 흘러도 그대로 이어간다. 자전거를 손질한다 할 때에는 뼈대를 뺀 부품을 갈거나 손질하지, 뼈대를 손질하는 법이 없다. 튼튼하고 훌륭한 뼈대 하나만 있으면 자전거는 언제나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어느 삶에서라도 같은 흐름이 된다고 느낀다. 내가 두 아이를 태우는 자전거수레는 뼈대가 아주 튼튼한 자전거이다. 이 자전거는 그야말로 뼈대만 빼고 모든 부품을 다 갈았다. 다만, 아직 ‘바퀴’는 그대로라 할 텐데, 바퀴살이 부러져서 바퀴살을 갈아 넣은 적이 있다. 바퀴도 퍽 튼튼하기에, 뼈대와 바퀴 두 가지는 앞으로도 오래오래 이어가리라 보는데, 바퀴도 어느 때에는 새로 갈아야 할는지 모르는데, 뼈대만큼은 훨씬 오래 건사할 수 있다.


  밑앎과 밑삶이 튼튼하며 훌륭한 줄거리일 때에 책이 되리라 느낀다. 밑앎과 밑삶이 허전하거나 얕을 때에는 ‘가벼운 읽을거리’는 될는지 모르나, 두고두고 건사할 만한 책은 못 된다고 느낀다.


  나는 날이 갈수록 신문을 안 좋아한다. 신문이란 그야말로 ‘읽을거리 없는 종이뭉치’라고 느낀다. 날마다 뚝딱뚝딱 뒤집는 정치 이야기가 너무 많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도 부질없는 주식시세표나 방송편성표를 왜 실어야 할까. 누리신문(인터넷신문)이라고 다르지 않다. 누리신문에 실리는 이야기는 하루도 아닌 한나절도 아닌 반나절도 아닌 한 시간조차 값을 하는지 안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고작 하루치 목숨밖에 안 되는 글과 사진과 자료를 실어야 한다면, 신문이 할 몫은 무엇일까. 오려서 두고두고 읽을 만한 글을 얼마나 싣는 신문일까. 곧, 책 가운데에는 예쁘게 보살피는 넋으로 책시렁에 꽂고는, 두고두고 물려읽힐 만한 책은 얼마나 될까.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물려읽힐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나 스스로 열 차례 스무 차례 되읽을 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물려읽히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새 아이를 낳으면, 새 아이한테까지 기쁘게 물려읽힐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그저 바로 오늘 읽어야 한다고 여기는 책을 장만해서 갖추는가. (4345.9.17.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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