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송웅 글씨

 


  헌책방 책시렁에서 추송웅 님이 이녁 삶을 글로 담아 내놓은 책 《빠알간 피터의 고백》(기린원)을 만난다. 추송웅 님이 누군가한테 선물한 책이 헌책방으로 흘러들었다. 나온 지 서른 해 넘은 책인 만큼, 추송웅 님한테서 ‘손글씨 선물’ 받은 그분은 이승사람 아닐 수 있다. 또는 나라밖으로 떠났을 수 있다. 살림집 옮기며 그만 버려졌을 수 있다.


  어찌 되든, 헌책방이 있기에 이 책 하나 새로운 책손을 만나 다시 읽힐 수 있다. 헌책방이 있기 때문에 이 책 하나에 깃든 추송웅 님 손글씨를 서른 해 지난 오늘 새롭게 마주할 수 있다.


  손글씨를 살며시 쓰다듬는다. 손글씨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이름 석 자 흘려서 적은 손글씨에는 어떤 넋이 깃들었을까. 1981년 11월 14일, 추송웅 님은 어디에 있었을까. 무대에서 연극을 하고 나서 팬한테 적어 준 손글씨일까. 전라도 순천 언저리 어느 곳에서 책잔치를 했을까. 아마, 전국 곳곳 도는 연극공연을 하다가 이렇게 손글씨 하나 남겼을 테지.


  추송웅 님 손글씨는 얼마나 많이 남았을까. 1970∼80년대에 추송웅 님한테서 손글씨 선물을 받은 이는 얼마나 될까. 앞으로 이 책이 다시 서른 해를 더 묵고, 또 서른 해를 더 묵으면서, 연극 한길 걸어온 한 사람 꿈과 사랑을 살가이 느끼도록 돕는 이야기밭 될 수 있기를 비는 마음으로, 추송웅 님이 글씨를 적은 종이 뒤쪽에 내 글씨를 남긴다. 이 책을 만난 헌책방 이름을 적고, 이 책을 만난 날짜를 적는다. 우리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이 책을 읽을 적에 저희 이름과 ‘책 읽은 날짜’ 더 적어 넣을 수 있겠지. 우리 아이들이 더 커서 저희 아이를 낳고, 그 아이들이 또 무럭무럭 자라 이 책을 새롭게 물려받아 읽는다면, 그때에 그 아이들도 저희 이름과 ‘책 읽은 날짜’ 한쪽 귀퉁이에 조그맣게 적을 수 있겠지. 책과 이야기와 삶은 돌고 돈다. 글과 사랑과 꿈은 흐르고 흐른다. 4346.5.2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빠알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책이 궁금한 분들은

다음 느낌글을 => http://blog.aladin.co.kr/hbooks/2902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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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21 13:31   좋아요 0 | URL
추송웅님에 대한 추억이 새로워지네요...
명동에 있었던 삼일로 창고극장도, 떼아뜨르 추,도요..
함께살기님의 <빠알간 피터의 고백>, 느낌글도 너무나 좋습니다...

숲노래 2013-05-21 16:20   좋아요 0 | URL
아, 연극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누리셨나 보군요 @.@
그 좋은 기억과 체험
아이들한테도 살뜰히 이어지겠지요
 

서는 책 눕는 책

 


  책꽂이 가득 차면, 책은 책꽂이에 반듯하게 선다. 책꽂이 살짝 헐렁하면 책은 기우뚱하게 선다. 책은 책꽂이에 누운 채 있을 수 있고, 책은 바닥에 찬찬히 놓여 어느덧 책탑 이룰 수 있다. 책은 다 다른 크기로 태어나 다 다른 모양새로 책꽂이에 꽂히는데, 옆에 어떤 책이 나란히 꽂힐는지 책 스스로도 모른다. 오직 책임자 마음에 달린 일이라 할 텐데, 책 하나 장만한 이가 어떤 삶 일구면서 어떤 길 걸어가는가에 따라 책꼴 달라지고 책꽂이 모양 바뀐다.


  철학책 곁에 만화책 놓여도 예쁘다. 그림책 곁에 화집이나 사진책 놓여도 아름답다. 동화책과 시집 나란히 놓여도 곱다. 국어사전과 소설책 하나 놓여도 아리땁다. 자전거로 온누리 다닌 이야기 깃든 책하고 할머니 옛이야기 풀어놓은 책이 나란히 놓여도 어여쁘다.


  이렇게만 꽂으란 법이 없다. 십진분류법대로 책을 꽂아야 하지 않아. 도서관에서 책을 꽂듯 여느 살림 책을 꽂을 까닭이 없어. 마음 가는 대로 꽂을 뿐이다. 마음 보드랍게 보듬는 결을 살려 꽂으면 즐겁다. 날마다 조금씩 마음밥 살찌우는 흐름을 돌아보면서 한 권 두 권 마주하면서 책꽂이 한 칸 열두 달에 걸쳐 채워도 기뻐.


  손바닥으로 살포시 안을 만한 책이랑 두툼하고 무거워 두 팔로 겨우 안을 만한 책을 나란히 놓을 수 있다. 그만 뒤틀리거나 다치고 만 책하고 갓 태어난 책을 나란히 놓을 수 있다. 어느 책이든 알맹이를 읽는다. 어느 책이든 속살을 읽는다. 어느 책이든 껍데기를 읽지 않는다. 어느 책이든 겉모습을 읽지 않는다.


  겉장 떨어진 책이라 하더라도 알맹이는 즐겁게 읽는다. 누군가 김치국물이나 라면국물 튀긴 자국 있더라도 속살은 기쁘게 읽는다. 아이들이 놀다가 책 한 귀퉁이 복 찢거나 뜯었어도 책에 깃든 이야기는 사랑스레 읽는다.


  얼굴 잘생긴 사람이 마음도 예쁠 수 있지만, 옷차림 눈부신 사람이 생각도 빛날 수 있지만, 책도 사람도 모두모두 겉차림으로만 헤아리지 않는다. 오직 마음으로 헤아린다. 오직 속내, 속마음, 속사랑, 속생각으로 사귀고 만나며 어깨동무한다. 마음 따스한 사람하고 있을 때에 따스하다. 생각 사랑스러운 사람하고 있을 적에 사랑스럽다. 꿈 넓고 깊은 사람과 이야기꽃 피울 때에 꿈꽃 길어올린다. 삶을 읽듯이 책을 읽는다. 책을 읽듯이 삶을 읽는다. 4346.5.18.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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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18 08:57   좋아요 0 | URL
저도 어제 바닥에 누워 쌓여있는 책들을 정리하기 위해
이케아의 예쁜 검정 책장을 조립해, 그 아이들을 정리했는데
정말 제 마음가는대로 이 책 옆에는 이 책, 그 책 옆에는 또 저 책
마치 작은 방 하나, 새로 꾸미듯 요모조모 예쁘게 정리하고나니 기분이 좋았어요,
철학책 옆에 만화책, 그림책 옆에 화집이나 사진책, 동화책과 시집, 국어사전과 소설책-들 처럼요.^^
따로 벽 한면에 세워 둔 그 새로운 책장을, 아침에 다시 보니 여전히 예쁘고 좋아요.^^

숲노래 2013-05-18 09:45   좋아요 0 | URL
오, 시간 가는 줄 모르면서 책을
차곡차곡 돌보셨겠네요!
 

끈으로 책 묶기

 


  지난날에는 책방마실 하는 사람들이 집으로 택배를 부치는 일이 드물었다. 아무리 책을 많이 장만하더라도, 누구나 으레 가방에 집어넣거나 끈으로 묶은 책덩이를 손수 들고 집까지 날랐다. 한 번에 나르기 힘들 만큼 많이 골랐으면 이듬날이나 다음에 다시 찾아와서 마저 가져가기로 하고 책방에 묶어 두곤 했다. 책방 일꾼이라면 책을 단단히 묶을 줄 알았고, 책손 또한 책을 단단히 여미는 손품을 ‘책방 일꾼한테서’ 배웠다. 살림집 넉넉히 마련해서 오래도록 안 옮기는 책사랑꾼도 있지만, 살림집을 자주 옮겨야 하는 책사랑꾼도 있다. 살림집 옮겨야 하는 책사랑꾼은 헌책방 일꾼한테서 ‘십자 매듭’과 ‘옥매듭’을 배운다. 찬찬히 배운 ‘책 매듭짓기’를 이녁 살림집 옮길 때에 몸소 즐긴다. 책을 잘 묶을 줄 알면, 다른 짐도 잘 묶을 줄 알기 마련이요, 책덩이뿐 아니라 다른 짐도 잘 옮길 줄 안다.


  책을 끈으로 묶으면 비닐봉지를 안 쓴다. 책을 묶은 끈과 신문종이는 얼마든지 되쓴다. 돈이 많아 책을 잔뜩 장만하든, 돈이 적어 책을 조금 장만하든, 책을 장만해서 읽는 사람은 ‘스스로 가방으로 짊어지거나 손으로 들어서 나를 만한’ 무게와 부피를 건사한다. 자가용에 실어서 나른다거나 택배로 맡긴다거나 할 때에는 ‘스스로 다 읽어내지 못할 책’을 장만하는 셈이다.


  깊은 시골에서 살아간다면, 띄엄띄엄 책방마실을 하면서 한 달이나 두 달이나 석 달 즈음 읽을 책을 한꺼번에 장만할 수 있겠지. 그러지 않고 도시에서 지낸다든지 도시와 가까운 시골에서 지낸다면, 틈틈이 책방마실을 즐기면서 그때그때 읽을 만큼 알맞게 책을 장만하면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자주 찾는 만큼 책이 잘 보인다. 틈틈이 마실하는 만큼 책이 내 앞으로 나타난다. 4346.5.10.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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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시렁

 


  헌책방 책시렁 한쪽에 꽃병 있고, 꽃병에는 노란 꽃송이 빛난다. 아주 조그마한 틈을 내어 꽃병을 놓으니, 책시렁은 어느새 꽃시렁 된다.


  들풀 한 포기 뿌리를 내려 들꽃 한 송이 피워 올리는 자리는 아주 조그맣다. 한 평이나 반 평이나 0.1평조차 아닌, 손바닥만 한 땅뙈기나 손가락 하나만 한 땅조각마저 아닌, 아이들 새끼손톱보다 훨씬 작은 틈이 있으면 들풀이 자라서 들꽃을 피운다.


  책시렁 한쪽 꽃병 놓으며 노랗게 꽃빛 드리우는 자리는 아주 조그맣다. 아주 조그마한 자리 하나에서 꽃빛이 맑고, 꽃빛이 책마다 스며들어, 헌책방 나들이 누리는 사람들한테 새 빛살 베푼다. 4346.5.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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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08 14:59   좋아요 0 | URL
글도 좋고, 책시렁에 노란 꽃병이 놓여 있는 헌책방 사진도
참 좋습니다. ^^ 마음에 그득하게 담아갑니다.~

숲노래 2013-05-09 01:31   좋아요 0 | URL
사람들 마음 한켠에 늘 고운 꽃 피어나기를 빕니다
 

영수증 쓰는 손길

 


  영수증을 갖춘 헌책방이 있고, 영수증을 안 갖춘 헌책방이 있다. 영수증을 갖춘 헌책방에서는 영수증에 고무도장을 찍고는 손으로 글씨를 써서 내어준다. 영수중을 안 갖춘 헌책방에서는 흰종이에 손으로 정갈하게 글씨를 써서 내어준다.


  영수증을 받으면서 고맙고 즐겁다. 영수증 한 장에 깃든 헌책방 일꾼 손길을 느끼면서 반갑고 새롭다. 영수증 한 장이지만, 나로서는 사랑편지 받는듯 가슴이 뭉클뭉클 뛴다.


  영수증을 받으며 가만히 생각한다. 헌책방 일꾼은 나한테 영수증을 주고, 나는 흰종이에 싯노래 한 자락 적바림해서 내밀면 좋겠네. 그래, 요즈음 들어 자꾸자꾸 싯노래 읊을 수 있는 까닭은, 헌책방마실을 할 적마다 헌책방 일꾼 손품 깃든 영수증을 받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찾아가는 헌책방에 어떤 책빛 서리는가를 헤아리며 싯노래 한 자락 적는다. 흰종이에 차근차근 싯노래 적으며 꿈꾼다. 이 싯노래로 내 마음 따사롭게 보금고, 내 싯노래 받을 헌책방 일꾼한테 맑은 숨결 스며들 수 있기를. 4346.5.7.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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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5-07 10:58   좋아요 0 | URL
손글씨로 쓴 영수증 한 장,을 받으면서
사랑편지 받는 듯 가슴이 뭉클뭉클 뛰신다는 글에
제 마음도 뭉클뭉클 뜁니다. ^^

숲노래 2013-05-07 11:34   좋아요 0 | URL
좋은 마음을 주고받을 때에는
사랑이 피어나는구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