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빛

 


  다 다른 해에 태어난 다 다른 책이 다 다른 빛깔을 보여준다. 다 다른 크기와 다 다른 모양새로 나온 책들이 알록달록 빛나는 책탑을 이루며 차곡차곡 쌓인다. 높다라니 쌓인 책탑 뒤에는 어떤 책들이 어떤 무늬와 빛깔로 있을까. 책탑 뒤에는 어떤 책들이 오래도록 숨죽인 채 책손 손길을 기다릴까.


  책은 책으로 있는 동안에도 빛난다. 책은 책손 손길을 타면서 새롭게 빛난다. 책은 책 하나 사랑하는 사람들 손에 이끌려 새로운 책시렁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새삼스럽게 빛난다.

  읽힐 때에 비로소 책이라 하는데, 읽히지 않을 때에도 모두 책이다. 왜냐하면, 읽히지 않은 책은 없으니까.


  읽혔다 하는 책 가운데 속내와 사랑과 마음까지 샅샅이 읽힌 책은 얼마나 될까. 첫 줄부터 끝 줄까지 훑는 일이 책읽기가 아니다. 줄거리 줄줄 꿰는 일이 책읽기가 아니다. 책에 서린 삶을 읽을 때에 책읽기가 된다. 책에 깃든 숨결을 읽을 때에 책읽기가 된다. 책에 감도는 사랑을 읽을 때에 책읽기가 된다.


  몇 줄을 읽든 대수롭지 않다. 여러 차례 읽거나 스물 서른 마흔 차례 읽든 대단하지 않다. 가슴으로 읽고, 마음으로 새기며, 사랑으로 헤아릴 때에, 비로소 책읽기가 이루어진다. 책빛은 책읽기를 누리는 사람들 눈망울에서 곱게 드러난다. 4346.5.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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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지점과 동네책방과 헌책방

 


  전남 순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 자랑하던 새책방 〈일광서점〉이 문을 닫는다. 그러면, 순천사람은 어디에서 새책을 장만할까. 아직 모든 새책방이 문을 닫지는 않았으니, 다른 책방으로 나들이 가면 될 테지만, 순천에서 〈일광서점〉이라는 데가 문을 닫았다는 얘기는, 그만큼 사람들 발걸음이 책방하고 멀다는 뜻이다.


  책장사 하는 이들이 제대로 ‘책방에 투자를 안 해’서 책방이 문을 닫을까. 책장사 하는 이들은 책방에 어떤 투자를 해야 하고, 책방에 투자를 한다면 이 돈은 어디에서 얻을 수 있을까.


  지역에서 오래도록 사람들한테 책숨 불어넣던 책방들이 수없이 문을 닫았다. 이런 자리마다 교보문고 지점이나 영풍문고 지점이 들어서곤 했다. 요즈음에는 알라딘 지점이 곳곳에 생긴다. 참 빠르게 곳곳에 퍼진다. 큰도시인 부산 대구 울산 광주 같은 데뿐 아니라, 작은도시인 부천 전주 같은 데까지 알라딘 지점 여는 모습을 보노라니, 전라남도 순천에까지 알라딘 지점 열 수 있겠다고 느낀다.


  순천에 알라딘 지점이 들어선다면, 순천사람한테 좋거나 반갑거나 즐거운 일 될까? 순천에 교보문고 지점이 들어서면, 이런 지점이 순천사람 책삶 북돋우는 구실을 맡을까?

  순천에는 헌책방이 꼭 한 군데 있다. 〈형설서점〉이다. 시외버스역 가까이에 큰 매장 하나 있고, 순천 기적의도서관 옆에 예쁘장한 매장 하나 더 있다. 순천사람한테 가장 순천스럽게 책내음 나누어 주는 데라면, 5월 10일에 문을 닫는 새책방 〈일광서점〉하고, 씩씩하게 책살림 잇는 헌책방 〈형설서점〉이라고 느낀다. 그러나, 새책방은 자꾸자꾸 문을 닫는다. 시골사람이건 작은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건, 책방마실을 하며 책을 사기보다는 인터넷 켜고 책을 산다. 몸으로 느끼는 책이 아니라, 손에 쥐기만 하는 책이 된다.


  사람들이 책을 좋아하기에 알라딘 지점이 자꾸자꾸 전국 곳곳에 문을 열 수 있는가? 사람들이 책을 덜 좋아하기에 전국 곳곳 크고작은 책방들 자꾸자꾸 문을 닫고 마는가? 교보문고 지점은, 알라딘 지점은, 어떤 책을 다루어 어떤 사람들한테 어떤 책을 읽히려 하는가? 4346.5.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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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어떻게 꽂는가

 


  도서관에서는 도서관분류법에 따라서 책을 꽂는다. 새책방에서도 도서관분류법을 얼추 따르면서 책을 꽂는다. 그러나, 헌책방에서는 도서관분류법을 쓰지 않는다. 헌책방마다 책을 꽂는 매무새 모두 다르다.


  도서관이나 새책방을 다니면서 ‘책 꽂는 매무새’나 ‘책 갖춘 모양새’ 다른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모두들 거의 똑같은 나눔법에 따라 책을 나누어 꽂기 때문이다. 도서관에서는 만화책이나 사진책이나 그림책을 잘 안 갖추기 마련이고, 새책방에서는 비매품이나 공공기관 자료를 못 갖추기 마련이다. 도서관에서는 사람들이 자주 빌려서 보는 책을 으레 갖추고, 새책방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사들이는 책을 으레 갖춘다.


  헌책방에서는 비매품이나 공공기관 자료도 갖춘다. 헌책방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책도 갖추고, 사람들이 거의 안 찾지만 누군가 꼭 찾을 법한 책이면 으레 갖춘다.


  헌책방 책꽂이는 헌책방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서울과 인천과 부산과 광주와 대구와 순천과 춘천과 강릉과 통영과 청주와 전주와 수원과 의정부와 여수에 있는 헌책방은 저마다 다른 삶자락에 맞추어 서로서로 다른 책꼴을 갖춘다. 고을마다 공공기관이 다르다. 고을마다 사람들 삶이 다르다. 고을마다 지역 문인이 다르고, 고을마다 학교와 시설과 모임이 다르다. 그러니, 고을마다 드나드는 책이 다르고, 어느 헌책방이건 저마다 뿌리를 내린 곳 빛깔과 무늬를 살피며 책꽂이를 보듬는다.


  개인 서재를 도서관분류법에 따라 갈무리하는 사람도 있으리라. 그러나 개인 서재를 도서관분류법에 따라 갈무리하면 좀 재미없으리라 느낀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책멋에 맞추어 이녁 깜냥껏 책꽂이를 돌볼 때에 한결 재미있고 아름다우리라 느낀다.


  이 헌책방을 다니고 저 헌책방을 다니면서, 이곳에서는 이런 멋을 만나고 저곳에서는 저런 맛을 누린다. 다 다른 헌책방에서 다 다른 책내음을 맡는다. 4346.5.4.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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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 사다리를 보는 일은 드물다. 헌책방을 찾아가면 아무리 조그마한 곳이라 하더라도 으레 사다리를 본다. 왜 새책방이나 도서관에는 사다리가 없기 일쑤이고, 헌책방에는 사다리가 어김없이 있을까. 새책방이나 도서관도 책꽂이 꾸준히 늘리면서 ‘새로 나오는 책’을 더 차곡차곡 갖출밖에 없고, 이러다 보면 저절로 사다리 놓으면서 위쪽까지 살피도록 할 노릇 아닐까.


  사다리 없는 새책방과 도서관을 헤아려 보면, 새책방이나 도서관에서는 ‘새로 나오는 책이 늘어날’ 때에 ‘예전에 있던 책’을 줄이곤 한다.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 있으니, 새책방도 도서관도 책시렁 늘어나야 하지만, 한국에서 새책방이나 도서관은 책시렁을 좀처럼 늘리지 않는다. ‘오래도록 제자리 지키던 책’을 빼낼 뿐이다.


  헌책방도 ‘오래 묵은 책’을 치우곤 한다. 헌책방이라고 책을 자꾸자꾸 끝없이 쌓을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책을 비워 새로 들이는 책 꽂아야 한다. 그런데, 헌책방은 되도록 책을 덜 버리려 하고, 헛간을 늘려 ‘책방 책시렁에서 치워야 하는 책’이라든지 ‘새로 들이는 책’을 두려 한다. 책방에 빈틈 하나 없도록 빼곡빼곡 책시렁을 마련하고, 천장에 닿도록 책이 올라간다. 이러다 보니 헌책방에는 사다리가 있어야 한다. 헌책방 일꾼은 천장 높은 가게를 좋아한다. 헌책방 책시렁은 한 해 두 해 흐르면서 천장까지 닿는다.


  헌책방마실이 즐거운 까닭 곰곰이 돌아본다. 헌책방은 ‘처음 갖춘 책’부터 ‘새로 들이는 책’까지 알뜰살뜰 있다. 새책방과 도서관이 책을 안 아끼는 곳은 아니지만, 헌책방이 책을 아끼는 품이나 손길이란 매우 정갈하며 알뜰하다. 나는 헌책방마실 할 적마다 늘 이러한 품이나 손길을 느끼며 고맙다. 책 하나 만날 적에도 즐겁고, 책을 아끼는 품과 손길을 느끼면서 ‘책을 읽는 새로운 빛’을 받아먹는다.


  종이꾸러미도 책이고, 종이꾸러미 다루는 손빛도 책이다. 글월마다 글빛이 피어나고, 손길에서 손빛 새록새록 돋는다. 헌책방과 함께 오랜 나날 씩씩하게 살아온 사다리 나뭇결 쓰다듬으면서 책시렁과 책 모두 새삼스레 어루만진다. 4346.5.1.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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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도 미술관도 도서관도

 


  유럽 어느 나라에 있다는 널따란 박물관은 몇 날 며칠 들여 돌아보아도 다 돌아보지 못할 만큼 볼거리 많다고 한다. 이 박물관 찾아가서 이 박물관에 깃든 유물을 후다닥 훑는다 하면, 박물관마실 자알자알 했다 할 만할까. 어느 미술관에 깃든 그림은 몇 날 아닌 몇 달 동안 들여다보아도 다 볼 수 없도록 많으리라. 이 미술관에 깃든 그림을 자가용 싱싱 몰아서 휘리릭 훑고 지나가면 그림마실 잘잘잘 했다 할 만할까. 도서관에 책이 100만 권이 있다 하든 10만 권이나 1만 권 있다 하든, 이 책들 꽂힌 책시렁 휘 둘러보면 도서관마실 실컷 했다 할 만할까.


  자가용을 타고 지나가면 박물관에도 미술관에도 도서관에도 스며들지 못한다. 자가용을 몰고 제주섬 한 바퀴 돈다 한들, 또 자가용을 몰아 서쪽 바닷가와 남쪽 바닷가와 동쪽 바닷가를 한 바퀴 돈다 한들, ‘돌았다’라든지 ‘보았다’라 말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어디를 어떻게 돌았다 할 만하고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다 할 만할까. 어딘가를 마실한다고 할 적에는 자가용도 자전거도 아닌 두 다리로 땅을 밟았다는 뜻이다. 두 다리로 땅을 밟으며, 오래도록 풀밭에 앉거나 드러누워 하늘바라기를 했다는 뜻이다. 어디에서 무엇을 보았다 할 때에는 하루 이틀 한 달 한 해 찬찬히 지켜보며 봄 여름 가을 겨울 물씬 느꼈다는 뜻이다.


  책을 한 차례 주욱 첫 줄부터 끝 줄까지 살폈기에 책읽기 마쳤다 할 만한가. 책읽기란 글자읽기인가 속살읽기인가 줄거리읽기인가 알맹이읽기인가. 아니면, 책 하나 빚은 사람들 삶과 넋과 꿈과 사랑과 믿음과 마음을 읽을 때에 책읽기라 할 만한가. 헌책방거리나 헌책방골목 죽 한 번 돌아봤기에 헌책방 구경 잘 한 셈일까. 헌책방 한두 곳에서 책 한두 권 장만해 보았기에 헌책방 맛과 멋과 내음과 무늬 흐뭇하게 받아먹었다 할 만한가.


  밥은 한 끼니만 먹으면 그만이지 않아. 날마다 꾸준하게 먹어야 밥이다. 숨은 한 번만 들이켜면 되지 않지. 숨은 날마다, 아니 때마다 들이쉬고 내쉬고 잇달아 해야 비로소 숨이다. 물은 한 모금만 마시면 끝이지 않다고. 내 몸을 살피며 알맞게 틈틈이 마실 때에 참말 물이다.


  책이란 무엇인가. 책 한 권이란 무엇인가. 책읽기란 무엇인가. 책을 갖춘 책방이란 무엇인가. 책방마실은 어떻게 해야 책방마실인가. 책읽기는 어떻게 할 때에 책읽기인가. 삶과 사랑과 사람은 서로 어떻게 맺고 이으며 어깨동무하는가. 4346.4.23.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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