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말은 어디에 있을까 생각하기
[말사랑·글꽃·삶빛 16] ‘찬물’과 ‘더운물’

 


  차갑다고 느껴서 ‘찬물’입니다. 덥다고 느껴서 ‘더운물’입니다. 느끼는 그대로 쓰는 말입니다. 차갑게 해서 먹는 국수이기에 ‘찬국수’입니다. 따뜻하게 해서 먹는 국수이기에 ‘더운국수’예요. 먹는 결 그대로 붙이는 이름입니다. 차갑게 부는구나 싶어 ‘찬바람’입니다. 덥게 부는구나 싶어 ‘더운바람’이에요. 여름날 후덥지근하게 부는 바람은 더운바람이로구나 싶고, 겨울날 매섭게 부는 바람은 찬바람이로구나 싶어요.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찬-’ 것과 ‘더운-’ 것을 가리키는 낱말이 모두 실리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찬바람’은 실리나 ‘더운바람’은 안 실려요. ‘찬국수’와 ‘더운국수’라는 낱말은 실리기는 하지만, 두 낱말은 북녘말이라고 토를 붙입니다. 남녘에서는 ‘찬국수’나 ‘더운국수’라고는 안 쓰고 ‘냉면(冷麵)’이랑 ‘온면(溫麵)’으로 쓴다고 해요. 꼭 국어사전을 뒤적이지 않더라도 알 만합니다. 길거리에 가득한 밥집마다 ‘냉면’이라고 적지, ‘찬국수’라 적지 않아요. 북녘에서는 ‘찬국수’라는 말을 쓴다 하지만 ‘랭면’이라고 곧잘 써요. 남녘이나 북녘이나 ‘국수를 먹으’면서 국수를 먹는 줄 못 느낀다 할까요, 생각을 못 한다고 할까요.


  가만히 살피면, ‘찬물’과 ‘더운물’이라 해야 옳으나, ‘냉수(冷水)’와 ‘온수(溫水)’로 적는 사람이 많습니다. 쉽게 쓰지 못하고, 꾸밈없이 쓰지 못합니다. 찬찬히 살펴 쓰지 못하고, 가만히 사랑하며 쓰지 못해요.


  시인 이선관 님이 1983년에 펴낸 퍽 묵은 시집 《보통市民》(청운사)에 실린 〈거지論〉이라는 시를 읽다가 “일그러진 얼굴에 냉소를 띄우면서”라 적힌 글월을 봅니다. 좋은 시를 좋은 마음으로 읽으며 생각에 잠깁니다. 1983년 아닌 2013년에도, 또는 서른 해가 더 지나는 2043년에도 한국사람은 ‘냉소(冷笑)’와 같은 한자말을 쓸는지, 앞으로는 이 낱말을 살가이 걸러낼 만한지 궁금합니다. 국어사전에서 말풀이를 살피면, “쌀쌀한 태도로 비웃음”이라 나옵니다. 곧, 한자말로는 ‘냉소’요, 한국말로는 ‘비웃음’인 셈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에는 “≒ 찬웃음”이라고도 나옵니다. 그래서 ‘찬웃음’이라는 낱말을 다시 찾으면, “= 냉소”라고 나와요. 그러니까, ‘찬웃음’과 ‘냉소’는 같은 낱말이라는 뜻이요, 한국사람이 쓸 한국말은 ‘찬웃음’이라는 얘기입니다.


  한국말은 있습니다. 한국말은 틀림없이 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이 어디에 있는지 제대로 생각하지 못하니까 모르거나 못 찾을 뿐입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가꾸거나 아끼거나 사랑하지 않기에 한국말이 제자리를 못 잡을 뿐입니다.


  참말 ‘찬웃음’이라 말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습니다. ‘더운웃음’이라 말하는 사람도 만날 수 없습니다. 마땅한 얘기인데, ‘더운웃음’이라는 낱말은 없어요. 이런 낱말로 생각을 나타내는 사람도 없어요. 다만, 조금 더 생각을 기울인다면, ‘더운웃음’이라는 낱말을 쓸 일은 없을 수 있으나, ‘따순웃음’처럼 적을 때에는 여러모로 쓸 일이 많습니다. “따순 웃음”이나 “따순 이웃”처럼 띄어서 적어야 옳다 하지만, ‘따순-’을 앞에 붙이면서 여러모로 생각을 넓힐 수 있어요. ‘따순마음’이라든지 ‘따순말’이라든지 ‘따순생각’이라든지 ‘따순글’이라든지 ‘따순밥’처럼 쓸 만해요. 이와 맞서는 낱말로 ‘찬마음’과 ‘찬말’과 ‘찬생각’과 ‘찬글’와 ‘찬밥’처럼 쓸 수 있겠지요.


  생각하기에 한국말이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기에 한국말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한국말을 예쁘게 빚습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한국말을 얼결에 망가뜨립니다.


  따숩게 생각하면서 따숩게 사랑을 나누는 말이 태어납니다. 차갑게 생각하기에 차갑게 미움을 키우는 말이 생겨납니다. 따숩게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따숩게 북돋우는 넋입니다. 차갑게 톡톡 쏠 적에 차갑게 깎아내리는 얼입니다. (4345.7.12.나무.ㅎㄲㅅㄱ)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hnine 2012-07-12 22:12   좋아요 0 | URL
찬웃음이라고 하면 비웃음의 뜻이 연상되는데 만약 시원한 웃음이라고 하면 반대의 뜻으로 전달되네요. 찬것과 시원한 것의 차이는 뭘까. 차다고 하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고 시원하다고 하는 것엔 차다고 느끼는 사람의 기분과 감정이 들어가있는 것인가...낱말 하나 가지고도 생각거리가 됩니다. 위의 글을 읽다가 문득 '글월'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 말은 우리 말일까 한자일까 궁금해져서 찾아보니 우리 말이네요. 글월이란 말의 '월'은 여기서 무슨 역할을 할까요? 궁금한게 생기면 재미있습니다 ^^

숲노래 2012-07-13 09:21   좋아요 0 | URL
차다, 시원하다,
는 객관과 주관으로 나누지 않아요.

곰곰이 따지면,
한국말뿐 아니라 세계 어느 말도
객관이나 주관이란 없어요.

어느 말이든 생각과 느낌을 담을 뿐이고,
어떤 생각과 느낌이든
주관이나 객관이라는 '이중 잣대' 또는 '이분법'으로
가를 수 없답니다.

차다와 시원하다는,
둘 모두 '같은 온도'일 수 있지만,
한쪽은 그저 온도만 느끼는 낱말이고,
다른 한쪽은 '같은 온도'라 하더라도 내 몸을 좋게 해 준다는 느낌이
더한 낱말이에요.

hnine 2012-07-13 09:41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느낌을 더한 낱말', 이게 곧 주관적이라는 것과 같은 뜻 아닐까요? 느낌이란 사람마다 다를 수 있으니까요.

숲노래 2012-07-13 10:02   좋아요 0 | URL
에구구... ㅠ.ㅜ
hnine 님,
객관이든 주관이든
'사람이 따지거나 재거나 살피는' 일이에요.
그래서, 어떠한 '객관'도 있을 수 없어요.
곧, 어떠한 '주관'도 없다는 소리예요.

모두,
사람들 스스로 느끼는 마음과
사람들 스스로 빚는 생각이에요.

이런 마음과 생각을
주관이나 객관이라는 틀에 가둘 수 없어요.

마음과 생각은 '좁은 울타리'가 아니라,
저마다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날을 담는 빛이니까요...


책읽는나무 2012-07-14 21:23   좋아요 0 | URL
갑자기 찬물이라고 하니깐 생각나는데요.
예전에 젊은시절 서울 올라갔을때 커피숖을 갔었는데요.
제가 "찬물 주세요"라고 하니까 종업원이 말을 못알아듣더라구요.
곁에 있던 선배가 핀잔 주면서 촌말을 쓰니 못알아듣는다고 정정하던데
"시원한물 주세요"라고 하니까 정말 바로 알아듣더라구요.ㅡ.ㅡ;;
그때부터 찬물과 시원한물의 차이는 뭘까? 혼자서 심각하게 고민했었어요.
왜 차다라는 표현보다 시원하다라는 표현을 세련되게 느끼는 것일까? 뭐 그런~~
그러고보니 예전엔 이곳에선 찬물이란 말을 더 많이 쓰고 있었는데,
요즘은 이곳에도 주로 냉수,냉국수,냉칼국수란 단어를 더 많이 쓰고 있네요.
시대가 변함에 따라 사람들의 말도 자꾸 바뀌어 가네요.

숲노래 2012-07-16 09:43   좋아요 0 | URL
시대가 바뀌어서 말이 바뀌지는 않으리라 느껴요.
사람들 생각이 '사라져' 버리면서 말도 '사라져' 버리는구나 싶어요..
 

시는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17] ‘이식(移植)’과 ‘착근’

 


  시를 읽습니다. 나는 내가 쓴 시를 나 스스로 좋아하며 읽기도 하고, 다른 이들이 쓴 시를 나 스스로 찾거나 살피며 읽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스미는 시가 좋습니다. 마음을 달래거나 북돋우거나 쓰다듬는 시가 좋습니다. 사랑을 노래하거나 기쁨으로 춤춘대서 반갑다고 느끼는 시는 아닙니다. 슬픔이나 울음이나 눈물이 가득하다 하더라도, 아픔과 고단함과 생채기가 가득하다 하더라도, 삶을 따사로이 보듬는 맑은 손길을 만날 적에 참 반갑구나 하고 느끼는 시입니다.


  목사이면서 어린이책 번역도 하는 고진하 님이 쓴 시를 그러모은 《얼음수도원》(민음사,2001)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토지문학공원 2〉이라는 시에서 “이식(移植)된 지 얼마 안 된 듯 / 착근을 위한 안간힘이 보이는 듯했다”와 같은 싯말을 읽다가 오래도록 생각에 잠깁니다. 시인 고진하 님은 왜 ‘이식’이라는 한자말은 묶음표까지 붙이다가는, 왜 ‘착근’이라는 한자말에는 묶음표를 안 붙였을까 궁금합니다. ‘이식’이라는 낱말이 도드라져 보이도록 이렇게 시를 썼을까요. 〈토지문학공원 2〉이라는 시는 이처럼 한자말을 밝혀서 적어야 빛나겠다고 느끼기에 이와 같이 시를 썼을까요.


  싯말은 시를 쓰는 사람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곧, 시인 ‘마음대로’ 싯말을 노래한다고 했습니다. 시인이 쓰고픈 대로 쓰는 싯말일 테고, 시인이 살아가는 마음이 그대로 담기는 싯말일 테지요. 한 마디로 하자면 ‘자유’를 누리며 쓰는 시요, ‘삶’이 고스란히 드러나도록 쓰는 시입니다.


  시인 고진하 님으로서는 한자말 ‘이식’이랑 ‘착근’이 손과 입과 눈과 귀에 밴 낱말이리라 느낍니다. 딱히 한자말이라 느끼지 않으면서 여느 때에 흔하게 쓰는 낱말이리라 느낍니다. 한자말이건 아니건 그리 대수롭지 않은 낱말이기도 하리라 느낍니다.


  시집을 살짝 덮습니다.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한자말 ‘이식(移植)’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 옮겨심기. ‘옮겨심기’로 순화.”라 적힙니다. 곧이어 한자말 ‘착근(着根)’을 찾아봅니다. 뜻풀이에 “(1) 옮겨 심은 식물이 뿌리를 내림. (2) 다른 곳으로 옮겨 가서 자리를 잡고 삶. (3) 어떠한 것이 기반을 잡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 적힙니다.


  낱말풀이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식’이나 ‘착근’은 한자말인데, 한자말이기 앞서 한국말이 아니로구나 하고 느낍니다. 고쳐서 써야 한다는 낱말이라면, 또 뜻풀이에서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말투가 나타난다’면, 이때에는 이러한 한자말은 그냥 한자말이 아닌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 삶말로 으레 쓰는 낱말일 뿐, 한국사람이 삶말로 여길 만한 낱말이 아니라는 소리라고 느껴요.


  곧, 한국말은 ‘옮겨심기’요 ‘뿌리내리기’ 또는 ‘자리잡기’입니다. 한국사람은 예부터 옮겨서 심었기에 ‘옮겨심기’라 말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옛날부터 뿌리를 내리거나 자리를 잡는다고 했기에 ‘뿌리내리기’나 ‘자리잡기’라 말했습니다.


  다시 시집을 집습니다. 다른 시를 천천히 읽습니다. 시를 고즈넉히 읽으며 싯말이 내 혀나 눈이나 입이나 귀에 감기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내 혀나 눈이나 입이나 귀에 감기는 싯말은 무엇이고 도무지 안 감기고 스쳐 지나가기만 하는 싯말은 무엇인지 헤아려 봅니다.


  시는 누구나 씁니다. 지식인도 시를 쓰고, 흙일꾼도 시를 씁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마친 이도 시를 쓰지만, 공장에서 기계를 붙잡고 기름밥을 먹는 이도 시를 씁니다. 문학을 꽃피우는 이도 시를 쓰지만, 집에서 아이를 낳아 보살피고 밥과 빨래와 청소로 하루를 보내는 이도 시를 씁니다.


  저마다 살아가는 다 다른 자리에 걸맞게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책으로 많이 배워서 지식이 한껏 도드라지는 시를 씁니다. 누군가는 책으로 배운 적 없이 늘 온몸으로 부대끼는 삶으로 받아들인 이야기를 가장 수수하거나 투박한 말투로 시를 씁니다. 어느 쪽 시가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쪽 시가 더 훌륭하거나 좋거나 빛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다른 모습으로 아름답거든요. 나는 나대로 예쁘고 당신은 당신대로 예뻐요. 나는 내 삶을 사랑하고 당신은 당신 삶을 사랑해요. 금을 긋거나 가를 수 없어요. 이 말은 좋고 저 말은 나쁘다고 못박을 수 없어요.


  다만 한 가지뿐이에요. 나는 내가 어떤 말을 사랑하면서 내 넋을 아끼고, 나는 어떤 삶을 꿈꾸면서 내 노래를 시로 담는가 하고 생각하면 될 뿐이에요. 누군가는 ‘환희(歡喜)’를 시로 노래하겠으나, 누군가는 ‘원더풀(wonderful)’을 시로 노래할 테고, 누군가는 ‘놀랍도록 기쁨’을 시로 노래할 만합니다.


  시는 삶으로 씁니다. 누구라도 시는 삶으로 씁니다. 삶에 지식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지식으로 쓰는 시’가 이녁한테 ‘삶으로 쓰는 시’입니다. 삶에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사랑으로 쓰는 시’가 이녁한테 ‘삶으로 쓰는 시’예요.


  나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우리 아이들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는 꿈을 꿉니다. 나는 시를 읽거나 쓰면서 시골마을 이웃집 할매 할배하고 함께 즐길 꿈을 꿉니다. 내 삶과 내 이웃 삶을 생각하면서 내 싯말을 아낍니다. 내 하루와 내 이웃 하루를 돌아보면서 내 싯말을 짓습니다. 내가 가장 좋아할 뿐 아니라, 나 스스로 살아가는 꿈이 고이 깃든 말마디가 내 싯말입니다. (4345.7.4.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민족주의’와 ‘보수주의’
[말사랑·글꽃·삶빛 19] 한국사람이 한국말 아끼는 길

 


  어떤 이는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나누는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알맞게 추스르도록 힘쓰자고 하는 일을 바라보며 ‘민족주의’라고 비아냥거립니다. 어떤 이는 ‘한겨레 말글을 바르게 쓰자’고 말하는 사람을 ‘보수주의’라고 깎아내립니다.


  민족주의나 보수주의가 ‘나쁜 생각’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어떤 일이든 민족주의가 될 수 있으며 보수주의가 될 수 있어요. 그런데, 한국말과 얽힌 자리에서 민족주의나 보수주의 이름표를 붙이는 이들은 티없는 넋이나 얼로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습니다. 자꾸 비아냥과 깎아내리기를 일삼습니다.


  왜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비아냥거리거나 깎아내리려 할까요. 왜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을 사랑하거나 북돋우려 하지 못할까요.


  더 많은 사람들이 ‘한자말을 으레 쓰니’까 한자말을 으레 쓸 만하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쓸 만하지 않은 말이라 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쓰든 말든 알맞지 않고 올바르지 않을 뿐더러 사랑스럽지 않습니다. ‘올바르지 않은 생각’, 곧 ‘잘못된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이 품을 때에는 부드럽게 타이르고 알맞게 깨우쳐 슬기롭게 이끌어야 한다고 느껴요. 이를테면, 정치나 사회나 문화가 한결 ‘올바르고 좋은 길’로 나아가기를 바라며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이나 문화운동을 해요. 교육운동이나 노동운동 모두 ‘두껍고 커다란 울타리’를 허물거나 바로잡으려고 힘써요.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이라고 해서 이와 다를 수 없어요. 사람들이 ‘으레 그러려니’ 하고 쓴다지만, ‘스스로 못 느낄 만큼 길들거나 찌들거나 물든’ 채 ‘스스로 생각을 못 빛내’며 쓰는 말이라 한다면, 저마다 소매를 걷어붙이면서 말글운동도 할 노릇입니다.


  교과서에 적힌 역사 지식 가운데 올바르지 않게 적힌 지식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면, 교과서에 적힌 숱한 말 가운데 올바르지 않게 적힌 말 또한 바로잡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느 학자나 교수나 기자가 쓴 책이나 신문에 쓴 글에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큰소리로 외친다’ 싶은 대목은 낱낱이 따지며 바로잡거나 고치려 애쓴다면, 이들이 쓴 책이나 글에서 ‘올바르지 않은 말과 사랑스럽지 못한 글’ 또한 낱낱이 따지며 바로잡거나 고치려 애쓸 수 있어야 해요.


  다만, 이곳에서 이렇게 하니 저곳에서도 저렇게 해야 마땅하다는 틀은 그닥 반갑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삶이 생각하는 말이 될 때에 반갑습니다. 생각으로 삶을 짓듯, 생각으로 말을 지을 때에 달갑습니다.


  지식을 쌓는대서 역사를 더 잘 알지 않습니다. 지식을 쌓기에 말을 더 잘 알거나 더 잘 하지 않습니다. 책을 더 많이 읽었기에 사회를 잘 읽지 않습니다. 책을 더 많이 읽거나 국어사전을 자주 들추었기에 말을 더 잘 헤아리거나 살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동의(同意)를 구(求)한다”라 말하고, 어떤 이는 “동의를 받는다”라 말하며, 어떤 이는 “허락(許諾)을 받는다”라 말하며, 어떤 이는 “너그러이 받아들인다”라 말하며, 어떤 이는 “받아들인다”라 말합니다. 모두 같은 뜻 같은 쓰임 같은 이야기를 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말투가 저마다 다릅니다.


  어떤 이는 “잘 가.” 하고 말하지만, 어떤 이는 “안녕(安寧).” 하고 말하며, 어떤 이는 “바이바이(byebye).” 하고 말합니다. 어떤 이는 “살펴 가.” 하고 말하는데, 어떤 이는 “조심(操心)히 가.” 하고 말해요.


  집에 텔레비전이 없어 연속극을 본 일이 없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으레 “빙긋 웃”고 “활짝 웃”으며 “빙그레 웃”다가는 “싱긋 웃”곤 했으나, 이제는 누구나 “미소(微笑)를 짓”는다고 말할 뿐 아니라, 어린이책에까지 이런 말투가 나타납니다. 이와 함께, 신문이나 방송이나 책에서 곧잘 ‘미소’는 일본 한자말이니 바로잡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은(지식인이든 지식인이 아니든) ‘미소’라는 낱말을 스스럼없이 씁니다.


  퍽 여러 해가 걸렸으나, ‘국민(國民)학교’라는 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국민학교’ 이름이던 때에 학교를 다닌 이들은 아직 ‘국민학교’라는 말투가 입에 남으나, 이제 어느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초등학교’라고만 말합니다. 왜냐하면, ‘국민’이라는 낱말은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천황 폐하를 섬기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썼거든요. ‘국민·국어·국가(國歌)·국화(國花)’ 모두 이와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사람은 숱한 “천황 폐하 식민지 적 말찌꺼기” 가운데 ‘국민학교’에 붙던 ‘국민’ 한 가지만 겨우 씻었습니다. “국민투표”라든지 “국민 여러분”이라든지 “국어 수업”이라든지 다른 자리에서도 마땅히 씻어야 할 말투는 씻지 않아요. 아니, 씻지 못한다기보다, 씻어야 하는 줄 느끼지 않아요. 느끼지 않는데다가 생각하지 않아요. ‘많은 사람들이 그냥 이럭저럭 쓰니’까 그대로 쓸 뿐이에요.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바르게 쓰자고 외치는 일은 ‘민족주의’나 ‘보수주의’가 될 수 없습니다. 영국사람이 영국사람으로서 영국말(영어)을 바르게 쓰자고 외치는 일은 민족주의도 보수주의도 아니에요. 독일사람도 덴마크사람도 일본사람도 이와 같아요. 어느 한 나라나 겨레에 얽매이는 일이 아니에요. 한국사람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바르게 쓰자고 외치는 일이란, 스스로 생각을 살찌우고 마음을 북돋우면서 삶을 사랑하자는 뜻입니다. “한겨레를 지키자”라느니 “오랜 전통을 지키자”하고는 아주 동떨어집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내 모습을 가꾸고 내 넋을 북돋우며 내 꿈을 보살피자는 뜻입니다. “고유어를 살리자”라느니 “토박이말을 쓰자”하고는 사뭇 동떨어져요.


  나는 민족주의나 보수주의가 나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어떠한 생각이든 ‘주의·주장’이 될 적에는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저 ‘생각’을 좋아하고 ‘마음’을 사랑합니다. 내 삶을 돌아보고 이웃을 헤아리는 생각이 좋습니다. 내 꿈을 아끼고 동무와 어깨동무하는 마음이 사랑스러워요.

  부디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누구나 한국말을 곱게 생각할 수 있기를 빌어요. 이주노동자이든 대학교수이든 누구이든, 부디 한국땅에서 뿌리내리며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한국글을 어여삐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생각할 때에 싱그러이 빛나는 삶이에요. 마음을 기울일 때에 상큼하게 나누는 사랑내음이에요. (4345.6.27.물.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로쓰기’와 ‘국어순화’
[말사랑·글꽃·삶빛 18] 삶과 말을 살리는 길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말’이 있고, ‘한국글’이 있습니다. 지구별에서 제 나라만 남달리 쓰는 말과 글이 따로따로 있는 나라는 퍽 드문데, 한국사람은 ‘나라말’과 ‘나라글’이 남달리 있는 몇 안 되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땅 한국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지구별에서 그리 안 많다 할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군대힘이나 경제힘이나 문화힘 또한 작다 할 만합니다. 한국말이나 한국글을 가르치는 대학교가 있는 나라는 매우 드뭅니다. 지구별 숱한 나라들 가운데 ‘두 번째 외국말’로 한국말을 가르치려 하는 나라는 딱히 없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에 한국말이 따로 있을 뿐 아니라, 한국글까지 따로 있는 줄 모르는 지구별 사람 또한 무척 많다 할 만합니다. 한국이라는 나라는 지구별에서 차지하는 땅뙈기 넓이나 사람 숫자가 참 작지만, 스스로 남달리 살림을 꾸리고 삶터를 가꿉니다. 한국땅 사람들은 스스로 문화를 빚고 사회를 이룹니다.


  한국과 이웃한 여러 나라에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려 했습니다. 한국을 다스렸다 하던 임금님이나 나라님은 이웃나라 군대힘과 무역힘에 주눅이 들어 이웃나라 말글을 받아들이곤 했습니다. 임금님이나 나라님, 또 임금님이나 나라님을 모시는 심부름꾼은 으레 이웃나라 말글로 정치와 사회와 경제와 문화와 무역을 펼쳤습니다. 더구나, 한국땅에서 지식인이라 할 사람들마저 한국땅에서 여느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말글이 아니라 ‘한국과 이웃한 힘이 세고 커다란 나라’에서 쓰는 말글을 썼어요.


  재미있다고 해야 할는지 슬프다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이 이웃 커다란 나라 군대에 짓밟히면서 임금님이 머리를 숙이고 나라님이 무릎을 꿇었다 하지만, 그래서 한국말을 잃고 일본말을 써야 하던 때가 서른여섯 해라고 하지만, 정치권력하고 동떨어진 한국땅 여느 사람들은 먼먼 옛날부터 쓰던 ‘여느 한국말’을 그대로 썼습니다.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말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은 말을 즐겁게 썼습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아도 한국말을 합니다. 학교에서 일본말을 가르쳐도 집에서 한국말을 씁니다. 임금님이나 권력 언저리 사람들이나 지식인들 모두 중국말과 일본말과 미국말(또는 영국말)을 쓰더라도, 땅을 일구던 여느 사람들은 먼먼 옛날부터 고이 흐르던 한국말을 알뜰살뜰 살찌우고 꽃피웠어요. 조선 오백 해와 일제강점기 서른여섯 해가 있었어도 한국말이 살아남을 수 있던 까닭은 바로, 시골에서 흙을 일구며 고기를 낚고 나물을 캐던 여느 사람들이 입에서 입으로 이녁 삶말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기 때문이에요.


  일본제국주의가 한국을 짓밟던 무렵, 뜻있고 생각있는 지식인이 밤배움터를 열어 ‘한글 가르치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식인은 ‘한글 가르치기’는 할 수 있었는지 모르나 ‘(한국)말 가르치기’는 하지 못합니다. 외려, 지식인들은 당신이 글을 가르치던 여느 흙일꾼한테서 ‘말을 배우’곤 합니다. 흙을 일구면서 쓰는 말, 일을 하면서 쓰는 말, 베틀을 밟고 실을 자으면서 쓰는 말, 고기를 낚고 그물을 손질하며 쓰는 말, 나무를 베고, 들풀과 멧나물을 뜯거나 꺾거나 캐거나 따면서 쓰는 말, 밥을 하고 빨래를 하며 쓰는 말, …… 이 땅 여느 사람들이 ‘몸으로 살아내며 오래오래 사랑스레 쓰던 말’은 어느 누구도, 곧 어떠한 지식인도 가르치지 못했어요. 이러한 말, 이를테면 ‘삶말’은 ‘글을 모르던 흙일꾼(여느 사람)’이 ‘글을 아는 지식인’한테 가르쳐 줍니다. 이러한 얼거리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참말, 시골 흙일꾼은 글을 모르기 일쑤입니다. 요즈막에도 공장 노동자 가운데 글을 잘 모르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라도 말을 합니다. 누구라도 ‘한국말’을 합니다.


  글이란 말을 담는 그릇입니다. 말이 없을 때에는 글이 없습니다. 말이 있기에 글이 있습니다. 지난날 조선 때, 여러 지식인이 ‘언문일치’라 하는 이야기를 읊곤 했습니다. 다만, 조선 때 지식인이라 해 보았자 ‘한국글’을 쓰던 사람이 아니라 ‘중국글’을 쓰던 사람인 탓에 ‘말글 하나되기’ 또는 ‘말글하나’처럼 이야기를 읊지 못했어요. 한자로 ‘言文一致’라 적었고, 이제 이 한자를 소리만 따서 ‘언문일치’라 이야기할 뿐입니다. 돌이키면, 지난날 지식인이나 권력자 또한 중국글을 쓰면서도 ‘중국사람 여느 말’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다든지, ‘중국 옛 문학쟁이 아무개나 철학쟁이 아무개 말’하고 하나가 되지 못했다는 셈이에요. 중국글을 쓰고 중국말을 하던 지식인과 권력자 모두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게 글을 쓰지 못하던 나날’이었다는 뜻입니다.


  뜻은 같다 하더라도 말을 어렵게 하거나 글을 어렵게 쓰면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습니다. 뜻은 어렴풋이 짚을 수 있다지만 환하게 헤아리기 어렵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면, 듣거나 읽는 사람은 고달픕니다. 때로는 잘못 알아듣거나 아예 못 알아듣곤 합니다. 이리하여, 말과 글이 하나가 되게끔 힘을 쓰고, 될 수 있는 대로 쉽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에 좋거나 아름답거나 알맞다고 이야기합니다. 같은 이야기를 굳이 어려운 말이나 까다로운 글로 밝혀야 하지 않아요.


  어린이 앞에서 어려운 말로 겉멋 잡을 까닭이 없어요. 할머니와 할아버지 앞에서 ‘글 자랑’을 하거나 동무 앞에서 잘난 척할 까닭이 없어요. 학문을 하거나 철학을 하거나 경제를 하거나 정치를 하거나 늘 같아요. 우리는 누구한테나 가장 쉽고 빠르며 알맞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만한 말이랑 글을 찾아야 즐겁습니다.


  ‘바로쓰기’란, 틀리게 쓴 말을 바로잡는 일이 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 서로서로 가장 쉽고 빠르며 알맞게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자는 일입니다. 이러면서 어린이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누구하고나 허물없이 사랑을 담아 말과 글로 이야기꽃 피우자는 일입니다. 한자로 적으면 ‘國語醇化’가 되고, 소리를 적으면 ‘국어순화’인데, 이 같은 이름은 그리 걸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국어’라는 낱말부터, 지난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주의자가 ‘일본말’을 ‘국어’라고 해서 억지로 가르칠 때에 붙인 이름이에요. 예부터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말이나 글을 ‘국어’라 가리키지 않았어요. ‘언문(諺文)’이라고도 했다지만, 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이름도 있었다지만, 이 땅 사람들 모두 즐거우며 사랑스럽게 나눌 만한 이름은 따로 없었어요. 아니, 이 땅 여느 사람들은 그저 ‘말’이라고만 했겠지요. 권력이나 지식을 쥔 이들이 쓰는 글은 그저 ‘글’이라고만 했을 테고요. 나중에 주시경이라는 분이 생각을 열어 ‘한글’이라는 이름을 비로소 빚었어요.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더욱 사랑하고 아끼면서 빛내기를 바라면서, ‘말’을 ‘글’로 담을 때에 ‘한글’에 담자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글은 ‘한글’이라면 말은 ‘한말’이에요. 이와 같은 흐름이기에, 겨레는 ‘한겨레’이고, 나라는 ‘한나라’입니다. ‘한’은 바로 이 땅에서 살아온 겨레나 나라를 일컫는 이름이에요. 한자로 적는 ‘韓’은 소리만 같을 뿐, 한글이나 한겨레에서 가리키는 ‘한’을 뜻하지 못해요. 오직 한글로만 적는 ‘한’은 “하늘, 하나, 크다, 넓다, 어깨동무, 함께” 들을 뜻해요. ‘한’은 ‘하느님’으로도 이어져요. 먼먼 옛조선 때에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 했다는데, 이 이름은 뒷날 지식인이 한자로 옮겨적은 이름일 뿐, 깊은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겨레’는 스스로 ‘한사람’이었어요. “하늘사람”이기에 ‘한사람’이고, “큰사람”이기에 ‘한사람’이며, “서로 함께 아끼며 어깨동무하는 사람”이기에 ‘한사람’입니다.


  ‘한겨레’나 ‘한나라’는 이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일컫는 이름이나, 이 이름은 어떤 좁은 울타리를 쌓는 ‘민족주의’하고 동떨어집니다. 필리핀에서 왔든 연길에서 왔든 베트남에서 왔든, 이 땅에서 스스로 즐겁게 살아가며 뿌리를 내리면 모두 ‘한겨레’이고 ‘한나라’이며 ‘한사람’이에요. 아주 스스럼없이 ‘한글’로 글을 쓰고 ‘한말’로 말을 합니다.


  곧, 우리들이 늘 쓰는 말과 글을 ‘바로쓰기’ 한다 할 때에는, 맞춤법이나 띄어쓰기를 올바로 맞춘다는 좁은 뜻이 아닙니다. 애먼 중국 한자말이나 덧없는 일본 한자말이나 자랑질 같은 영어를 털면서 ‘더 깨끗한 토박이말’을 쓰자는 좁은 뜻 또한 아니에요. 스스로 내 삶을 밝히면서 아낄 말을 찾아서 ‘삶을 바르게 일군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내 넋을 북돋우면서 일으킬 글을 헤아리면서 ‘넋을 바르게 가꾼다’는 뜻입니다.


  한자로 적는 ‘국어순화’는 한국말로 옮기면 ‘글다듬기’입니다. 글을 다듬는 일이란, 누구나 읽기 어렵게 썼거나 어딘가 글흐름이 알맞지 않거나 조금 더 생각을 기울여 쓰지 못한 글이기에 ‘다듬는’ 일이에요. ‘부드럽게 다듬는다’기에 국어순화예요. 그런데 앞서 말했듯 ‘국어’는 한국말 아닌 일본말을 가리켜요. 우리 스스로 한국말을 알맞게 다듬으려 하는 자리라 한다면 ‘국어순화’라는 말마디부터 씻거나 털어야 올발라요. 한국말을 알맞게 다듬으려 할 때에는 ‘글다듬기’를 할 노릇이요, 내 넋을 스스로 사랑하며 북돋우려 할 때에는 ‘바로쓰기’를 할 노릇입니다. (4345.6.26.불.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절대’와 ‘꼭’
[말사랑·글꽃·삶빛 15] 익숙하게 굳어진 말투

 


  아이들과 살아가며 어버이인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아이들이 배우는 말이 됩니다. 아이들은 어버이인 내가 하는 말을 늘 들으면서 아이들 나름대로 생각을 나타내고 마음을 드러내는 말마디로 삼습니다. 아이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함께 지내는 어버이한테서 온갖 말을 듣습니다. 어느 말은 곧장 알아차리고, 어느 말은 하나도 못 알아차립니다. 어느 말투는 즐겁게 따라하고, 어느 말투는 조금도 따라하지 않습니다.


  어버이가 활짝 웃으며 말할 때에 아이 가슴에는 활짝 피어나는 웃음꽃이 스며듭니다. 어버이가 잔뜩 찡그리며 말할 적에 아이 가슴에는 잔뜩 그늘진 짜증스러움이 배어듭니다. 어버이는 아이한테 ‘말 지식’이 아니라 ‘말 삶’, 곧 말을 나누는 삶과 말에 담는 삶과 말로 일구는 삶을 물려주어요.


  텔레비전이나 영화를 볼 때에도 온갖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만화나 영화를 보면서 갖가지 말을 익힐 수 있어요. 그런데 텔레비전이나 영화는 ‘한 아이’를 바라보지 않습니다. 어떠한 마음도 사랑도 꿈도 없이 ‘어느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흐르기만 하는’ 말이 나올 뿐입니다. 이와 달리, 아이와 함께 살아가는 어버이는 노상 ‘한 아이’만 바라봅니다.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주는 말은 여러 사람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낯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한테 하는 말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 집 아이가 듣도록 들려주는 말입니다.


  오늘날 한국땅 어버이는 아이들이 태어나면 으레 유아원부터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맡겨 버릇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들기 앞서까지 집에서 삶을 보여주고 가르치며 물려주려 하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오늘날 한국땅 어버이는 아이들과 살가이 어울릴 겨를이 너무 적습니다. 꼭 아이한테 맞추어 일자리를 바꾸거나 일거리를 줄여야 하지는 않습니다만, 아이들이 즐겁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하자면 돈만 많이 벌어야 하는 줄 잘못 생각합니다. 아이들 누구나 돈 아닌 사랑을 먹으며 자라야 하는 줄 미처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이가 태어났을 때에 어느 회사에서든 ‘육아휴직’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돌볼 말미’를 마련합니다. 아이는 어머니만 낳지 않습니다. 아이는 어머니만 돌보지 않습니다. 아이는 두 어버이가 함께 낳고, 두 어버이가 나란히 돌봅니다. 곧, ‘아이를 돌볼 말미’란 두 어버이가 똑같이 받으면서 똑같이 마음을 기울여야 올바릅니다. 그나저나, 집에서든 조산소에서든 병원에서든 아이를 낳으면 ‘아이를 돌볼 말미’가 끝나지 않아요. 바로 이때부터 할 일과 맡을 몫과 나눌 사랑이 잔뜩 기다려요. 그래서 두 어버이는 아이를 낳기 앞서 둘이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나누어 맡으면서 살림을 꾸려야 좋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한테 들려줄 말을 살피고, 아이한테 보여줄 집과 마을을 헤아리며, 아이가 누릴 옷과 밥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갓난쟁이일 적에는 갓난쟁이 몸에 맞게 젖을 물리고, 이가 나고 차츰 크면서 젖떼기밥을 마련하며, 젖떼기밥을 지나 어른과 똑같이 밥상에 앉아 밥을 먹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아주 마땅히, 아이 나이에 걸맞게 아이한테 들려주어 아이가 받아들이며 아로새길 말을 가누어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노래를 부르고 시를 지으며 말문을 열어 줍니다. 이 같은 몫과 삶과 넋은 유아원이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 떠넘길 수 없어요. 어느 어버이나 흐뭇하며 홀가분하고 즐거이 맡으면서 누릴 노릇이에요. 저마다 다른 아이들이 저마다 다른 꿈과 사랑을 누리며 어여삐 자라도록 이끌어야 아름답습니다.


  아이들은 ‘말만 듣고 배우는’ 아이가 아니라, 스스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좋으면서 즐거울까를 생각하는 아이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노래만 배우지 않고 노래에 담는 삶결을 함께 배워요. 아이들은 한글만 익히지 않고 한글 닿소리와 홀소리에 싣는 삶넋을 함께 익혀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밥 한 그릇 차려서 내놓을 때에도 배만 채우는 밥을 내놓지 않습니다. 아이가 기쁘게 받아먹을 사랑을 함께 담아 내놓아요. 아이가 입는 옷을 빨래할 때에도 아이가 누릴 사랑을 생각합니다. 아이하고 손을 잡고 길을 거닐 때에도 아이가 맞아들일 사랑을 헤아립니다. 모든 삶은 사랑이고, 모든 이야기는 사랑이며, 모든 말은 사랑이에요.


  이제 초등학교에서는 영어를 의무교육으로 삼아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초등학교에 아직 들지 않았어도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 영어를 들을 뿐 아니라, 영어 노래와 영어 만화를 봅니다. 한국말이나 한국글(한글)이 익숙하지 않은 아이들이 영어와 알파벳에 더 익숙해지고 말아요.


  우리 아이들이나 우리 어른들은 영어를 반드시 잘 해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땅 사람들은 누구라도 영어를 배워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땅에서 시를 쓰고 노래를 부르며 흙을 일구고 버스를 몰며 고기를 낚고 나물을 캐며 빗자루를 들고 사무실 펜대를 굴릴 사람들 모두 영어를 배우는 데에 삶을 들여야 할까 궁금합니다.


  왜냐하면, 영어는 외국말이거든요. 꼭 배워야 할 외국말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스스로 바라면서 찾고, 스스로 느끼면서 익힐 외국말일 때에 누구라도 즐겁게 배우면서 살뜰히 맞아들이리라 생각해요. 영어가 되든 일본말이나 중국말이 되든, 러시아말이나 핀란드말이 되든, 프랑스말이나 포르투갈말이 되든, 스스로 좋아하면서 아끼는 매무새로 익힐 수 있어야지 싶어요. 한편, 외국말을 익히기 앞서, 정작 한국사람으로서 익힐 말이란 내 이웃을 아끼며 사랑하는 넋으로 어깨동무할 말이어야지 싶어요. 이를테면, ‘손말(수화)’과 ‘점글(점자)’이에요. 내 곁 좋은 동무와 이웃을 아낄 수 있게끔, 한국땅 어린이집부터 손말과 점글을 함께 이야기하며 익히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또한, 전국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표준말만 쓰도록 하는데, 고장마다 오랜 옛날부터 이어온 고장말을 서로서로 익힐 때에 아름다우리라 느껴요. 서울 아이도 제주말과 전라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광주 아이도 경상말과 강원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대구 아이도 충청말과 전라말을 익혀야지 싶어요. 외국에 갔을 때에 그 나라 말을 할 줄 알아야 그 나라와 살가이 사귄다고들 하는데, 정작 한국사람 스스로 전라도에 가든 경상도에 가든 제주도에 가든, 전라말이나 경상말이나 제주말을 슬기롭게 깨닫거나 기쁘게 주고받지 못해요. 배우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니까요.


  파비오 제다 님이 빚은 푸른문학 《바다에는 악어가 살지》(마시멜로,2012)를 읽다가 14쪽에서 “살아가면서, 어떤 경우를 만나도 절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 하는 대목을 읽고, 18쪽에서 “그런 호텔과는 다르다. 절대 비슷하지 않다.” 하는 대목을 읽습니다. ‘절대(絶對)’라는 낱말이 잇달아 나와 눈과 입에 걸리적거립니다. 이 글월에 나오는 ‘절대’는 ‘절대로’와 같은 낱말이요, 말뜻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드시”입니다. 그러니까, 한겨레가 예부터 쓰던 ‘반드시’라는 말마디를 한자말로는 ‘絶對’나 ‘絶對로’로 적바림한다는 소리입니다.


  곰곰이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영어를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잘 해야 할까 생각합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답게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살아갈 길을 슬기롭게 찾으면 맑게 빛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배울 영어일 수 없고, 학교에서 시키니까 대학입시만 바라보는 시험공부 굴레에 갇혀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하고 싶어 즐기는 공부여야지, 대학교에 가야 하니 외워야 하는 시험문제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스러운 살붙이와 이웃과 동무하고 사랑스레 나눌 말을 익힐 노릇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릴없이 받아들일 교과서 지식이나 시험공부 정보일 수는 없고, 티없이 깨우칠 삶이자 넋이자 말이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슬픈 굴레에 익숙해지면 슬픈 굴레에 갇히며 딱딱한 말이 됩니다. 아픈 생채기를 달래지 않으면 아픈 생채기가 곪으며 메마른 말이 됩니다. (4345.6.18.달.ㅎㄲㅅㄱ)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