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지’와 ‘시골’
[말사랑·글꽃·삶빛 34] 살아가는 생각이 나타나는 말

 


  ‘도시(都市)’라는 곳은 언제 처음 생겼을까 헤아려 봅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일정한 지역의 정치·경제·문화의 중심이 되는, 사람이 많이 사는 지역”이 도시라고 일컫는데, 신라 때 서라벌이 도시라 할 만할까요. 고구려 때 개성이나 평양은 도시라 할 만한가요. 4300년 앞서 옛조선에서 서울로 삼은 데는 도시라고 할 만할까요.


  오늘날 한국에서 ‘서울’은 땅이름 한 가지로만 많이 쓰지만, ‘서울’은 땅이름이기 앞서 어느 한 나라에서 정치와 경제가 모이는 한복판인 데를 가리키는 낱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서울’하고 서울 아닌 ‘시골’ 두 가지로 삶터를 나누었어요. 한겨레 삶자락을 돌아본다면, ‘도시 = 서울’이라고 할 만합니다. 이를테면, 시골서 사는 분들은 도시에서 찾아온 손님을 바라보며 언제나 “서울에서 오셨어요?” 하고 묻습니다. 부산에서 오든 대구에서 오든, 인천이나 대전에서 오든 ‘도시 = 서울’이라 ‘서울사람’이라고 바라봅니다. ‘도시사람 = 서울사람’인 셈이니까요.


  정진국 님이 쓴 《사진가의 여행》(포토넷,2012)이라는 책을 읽다가 196쪽에서 “폴은 이렇게 프랑스 벽지 사람들을 보여준다.”와 같은 대목을 봅니다. 책을 읽다가 문득 멈춥니다. 국어사전을 펼칩니다. ‘벽지(僻地)’ 말풀이를 찾아보니, “외따로 뚝 떨어져 있는 궁벽한 땅. 도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문화의 혜택이 적은 곳을 이른다” 하고 나옵니다. ‘벽지’와 비슷하게 쓰는 ‘오지(奧地)’라는 낱말도 찾아봅니다. ‘오지’ 말풀이는 “해안이나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대륙 내부의 땅. ‘두메’로 순화” 하고 나오는군요.


  새삼스레 한국말 ‘시골’과 ‘두메’ 뜻풀이가 궁금합니다. 이 낱말도 국어사전에서 찾아봅니다. ‘시골’은 “도시에서 떨어져 있는 지역. 주로 도시보다 인구수가 적고 인공적인 개발이 덜 돼 자연을 접하기가 쉬운 곳을 이른다” 하고 나오네요. ‘두메’는 “도회에서 멀리 떨어져 사람이 많이 살지 않는 변두리나 깊은 곳”이라고 나와요.


  다시 책을 읽습니다. “프랑스 벽지 사람들”이란 “프랑스 시골 사람들”이겠구나 싶습니다. 한국말로 ‘시골’을 한자말로 ‘벽지’라 적은 셈이로구나 싶습니다. 한국말로 ‘두메’를 한자말로 ‘오지’라 적는 셈이고요.


  그런데, 시골서 살아가는 사람은 ‘교통이 불편’할까 알쏭달쏭합니다. ‘문화 혜택’을 못 누리는 시골사람일까 아리송합니다. 교통이란 무엇이고 문화란 무엇인가요. 자동차로 오가기 좋거나 기차와 비행기가 다녀야 교통이 좋다 할 만할까요. 자전거로 다니기에 넉넉하고 두 다리로 걸어다니며 한갓진 데는 교통이 어떻다고 말해야 할까요. 극장이 있거나 병원이 있어야 문화가 될까 헤아려 봅니다. 극장도 병원도 없지만 삶을 아름다이 누린다면, 또 나무와 꽃과 벌과 새와 나비를 실컷 누린다면, 어느 쪽이 문화를 즐긴다고 할 만할까 헤아려 봅니다.


  누군가한테는 극장이나 편의점이나 옷가게나 찻집이 문화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한테는 숲과 골짜기와 들판과 바다가 문화 혜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파트도 문화요 흙집도 문화예요. 한쪽은 도시 문화이고 한쪽은 시골 문화입니다. 한쪽은 서울살이요 한쪽은 시골살이예요.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기를 좋아합니다. 나도 어릴 적에 맨발로 뛰놀기를 즐겼습니다. 온통 시멘트와 아스팔트뿐이라 하더라도 맨발이 훨씬 즐거워요. 시골 아이들은 맨발로 뛰놀 흙이 곳곳에 널립니다. 오늘날은 풀약을 잔뜩 치기는 하지만, 풀밭이 있고 흙땅이 있어요. 논밭을 거닐 수 있고, 바닷가와 갯벌을 오갈 수 있어요. 참으로 문화란 무엇이고, 문화를 누리는 삶이란 무엇이며, 문화가 아름다운 터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이 주고받는 말은 삶자리에 따라 다릅니다. 도시사람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결대로 말을 하고,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살아가는 무늬대로 말을 해요. 서울사람은 서울말이요, 시골사람은 시골말입니다. 어느 쪽이 다른 쪽보다 낫거나 뛰어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삶을 어여삐 일굴 때에는 어여쁘다 여길 말이 태어납니다. 스스로 삶을 알차게 돌볼 때에는 알차게 샘솟는 말이 흐드러집니다. 스스로 삶을 기쁘게 누릴 때에는 서로 기쁘게 나눌 말을 새롭게 짓습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제대로 안 씁니다. 예전에는 대학교수나 지식인이 되려고 사자성어를 비롯한 온갖 한자말을 일본이나 중국에서 빌어 학문을 했습니다. 이제는 대학교수나 지식인, 또 기자와 학자와 작가가 되려고 미국에서 영어를 빌어 학문을 하고 글을 쓰며 문학과 책을 빚습니다. 초등학교에서도 영어를 가르치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도 영어를 가르쳐요. 어떤 삶이요 어떤 문화인가를 살피지 않아요. 무턱대고 영어를 가르칩니다. 지식인이나 작가로 살아가는 어른은 스스로 어떤 말이며 어떤 넋인가를 돌아볼 겨를 없이 갖가지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생각을 적바림합니다. 삶을 살피지 않고 말을 앞세워요. 삶을 돌아보지 않고 글을 써요.


  살아가는 생각이 나타나는 말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이 드러나는 말입니다. 흙을 밟고 풀을 만지는 시골 할머니는 풀내음과 흙내음 물씬 풍기는 말을 합니다. 자가용을 몰고 아파트에서 지내는 도시 젊은이는 쇳덩이와 시멘트로 둘러싸인 내음이 풍기는 말을 합니다. 더 낫거나 덜 떨어지는 말이란 없습니다. 삶자리 따라 말자리가 다를 뿐입니다. 삶을 짓는 꿈에 따라 말을 빚는 넋이 다를 뿐입니다.


  어린이는 어떤 삶을 누리며 어떤 말을 나눌 때에 아름답게 꿈을 키울까 생각해 봅니다. 푸름이는 어떤 삶을 즐기며 어떤 말을 주고받을 때에 아리땁게 사랑을 빛낼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떤 삶을 꽃피우며 어떤 말을 북돋울 때에 어여쁘게 마음을 밝힐까 가만히 그려 봅니다. (4345.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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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인드’와 ‘마음’
[말사랑·글꽃·삶빛 33] 삶과 넋과 말에 쏟는 사랑

 


  마음을 기울입니다. 마음을 씁니다. 마음을 바칩니다. 마음을 쏟습니다. 마음을 들입니다. 마음을 보내고, 마음을 움직이며, 마음을 살찌웁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갈고닦으며, 마음을 북돋아요.


  마음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이 달라집니다. ‘마음 움직임’을 스스로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말이 바뀝니다. 나는 한국사람이기에 한국말로 내 마음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이런 말을 떠올리고 저런 말을 그립니다. 나와 이야기를 주고받는 이웃이나 동무는 내 말을 스스럼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이런 말 저런 글을 영어나 중국말이나 일본말로 옮긴다 한다면, 어떻게 나타내야 할까 궁금합니다. 어떤 이는 ‘마인드’라는 영어를 써야 당신 뜻을 제대로 가리킨다 싶어 여느 한국말로는 나타내지 않는다는데, “마음을 기울이다”를 비롯해 “마음을 북돋우다” 같은 온갖 말마디를 영어로 옮기자면 어떻게 될까요. 지난날 지식인은 ‘마음’이라는 한국말보다 ‘정신(精神)’이라는 한자말을 즐겨썼는데, 숱한 ‘마음말’을 한자말로 옮겨적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생각하다·살피다·살펴보다·가누다·헤아리다·어림하다·따지다·돌아보다·되돌아보다·뒤돌아보다’ 같은 한국말은 어떠한 한자말이나 영어로도 나타낼 수 없습니다. 거꾸로 다른 한자말이나 영어 또한 한국말로는 가리킬 수 없어요. 얼추 비슷하게 들어맞는다 싶은 말로 옮겨적을 뿐입니다.


  연예인 조혜련 님이 쓴 《조혜련의 미래일기》(위즈덤하우스,2009)라는 책을 읽다가 36∼37쪽에서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위해서 마인드를 바꿔 보자.”와 같은 글월이랑 “이제는 ‘척’이 ‘진정한 마음’으로 바뀌어 가는 단계가 되었다.”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조혜련 님은 ‘마인드(mind)’라는 영어로 당신 생각을 나타냈다가 ‘마음’이라는 한국말로 당신 생각을 다시 나타냅니다. 두 낱말을 쓴 자리는 다르지만, 두 낱말은 같은 이야기를 나타냅니다. 조혜련 님은 ‘같은 마음’으로 두 낱말을 써요.


  스스로 삶을 어떻게 일구려 애쓰는가에 따라 넋을 어떻게 북돋우는가 하는 매무새가 달라집니다. 삶을 일구고 넋을 북돋우는 매무새에 따라 말을 살찌우는 몸가짐이 달라집니다.


  마음은 ‘마음결’이 되고 ‘마음씨’가 됩니다. ‘마음무늬’가 되고 ‘마음밭’이 됩니다. ‘참마음’이 되고 ‘큰마음’이 되며 ‘첫마음’이 돼요. 마음자리를 살핍니다. 마음닦기를 생각합니다. 마음보기를 떠올립니다. 마음사랑을 하면서 마음길을 걷습니다. 마음날개를 펼치면 어떤 꿈으로 이어질까요. 마음다리를 놓아 서로 만날 수 있고, 마음집을 지어 가슴을 활짝 열 수 있어요. 하늘마음이나 바다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멧마음이나 들마음이 될 수 있어요. 새마음이나 풀마음이나 꽃마음이 되어도 즐거워요.


  스스로 사랑을 쏟기에 여러 가지 마음말을 빚습니다. 스스로 사랑을 바치기에 이런 말 저런 글 하나둘 빛내요.


  고운마음·착한마음·맑은마음은 어떤 빛깔이 될까 헤아려 봅니다. 기쁜마음·너른마음·깊은마음은 어떤 무늬가 될까 어림해 봅니다. 마음에 씨앗 하나 두며 마음씨앗이 됩니다. 마음이 소담스레 무르익어 마음열매가 됩니다. 마음이 푸르디푸르게 빛날 적에 마음잎이 자라고 마음싹이 돋겠지요. 마음이 꽃과 같아 꽃마음이라 하고, 마음이 활짝 피어나 마음꽃이라 합니다. 마음이 씩씩하게 샘솟거나 터져오를 적에는 마음샘이 솟거나 마음줄기가 오른다고 할 수 있어요. 마음이 튼튼히 뿌리내릴 때에는 마음뿌리를 다스리고, 마음이 넓게 그늘을 드리우며 더위를 식힌다면 마음가지를 거느리겠지요.


  내 마음은 어디쯤 있을까요. 내 마음은 어디에 둘 때에 어여쁠까요. 이 땅에 태어나 자라는 사람들은 이녁 마음을 어떻게 건사하면서 마음빛을 밝힐 때에 저마다 즐거울까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어떤 마음밥을 받아먹으며 클까요. 어버이는 아이들 앞에서 어떤 마음그릇이 되어 하루를 누릴까요.


  놀이를 누리는 놀이마음이고, 일을 누리는 일마음입니다. 고향을 그려 고향마음이요, 마을을 아끼면서 마을마음입니다. 누군가는 해마음·달마음·별마음이 됩니다. 마음에 햇살이 떠올라 마음햇살이 되고, 마음이 몽실몽실 구름처럼 흐르며 마음구름이 돼요.


  마음옷을 입습니다. 곱고 정갈하게 마음옷을 추스릅니다. 마음빨래를 합니다. 맑고 산뜻하게 마음빨래를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삶을 짓습니다. 마음쓰는 사람이라며 삶을 빛냅니다. (4345.11.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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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2-11-05 10:30   좋아요 0 | URL
영어의 '마인드'는 우리말로 '마음'과 조금 다른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해요. 된장님 즐겨 쓰시는 '얼'의 의미랄까요, 정신, 마음가짐?
저도 뭐라고 표현해야할지 정확히 집어낼 수는 없지만요.

숲노래 2012-11-05 11:20   좋아요 0 | URL
이 글에서도 말하지만, 영어와 한국말과 한자말(중국말,일본말)은 다 달라서, 1:1로 번역할 수 없어요.

거꾸로 생각해 보셔요. '마음'은 '마인드'로 옮길 수 없고 '정신'으로도 옮길 수 없어요. 비슷하게 따지자면, '얼'은 '스피릿'하고 비슷하다 하겠지요.

그러나, '마인드'라는 영어를 한국 사회에서 쓰는 사람은 '생각이 없이' 쓰기 때문에, 이 영어를 쓰는 사람 스스로 무슨 뜻이나 느낌인지 모르기 때문에, '마음'으로든 다른 낱말로든 걸러내거나 고쳐쓸 수 없기도 하답니다.
 

‘핑크’와 ‘분홍’과 ‘진달래’
[말사랑·글꽃·삶빛 32] 마음으로 그리는 빛깔

 


  초등학교 다니는 이웃 어린이를 만납니다. 이 아이가 입은 옷이 예쁘기에 슬쩍 묻습니다. “네 옷 참 예쁘구나. 이 옷은 무슨 빛깔이니?” “핑크요.” 이 아이한테 물어도 ‘핑크(pink)’라 하고, 저 아이한테 물어도 ‘핑크’라 합니다. 마침 이 아이들을 가르치는 초등학교 교사 한 분 옆에 있어 이분한테도 나란히 여쭈는데, 누구한테서나 똑같은 말이 들려옵니다. 아이도 어른도 모두 ‘핑크’입니다.


  신문을 펼친다면 어떠할까요. 아마, 신문에 글을 쓰는 이들도 으레 ‘핑크’라 할 테지요. 더러 ‘분홍(粉紅)’을 말하기도 할 테지만, 학교에서도 신문에서도, 또 텔레비전에서도, 나아가 인터넷에서도 한결같이 한 가지 빛깔 ‘핑크’만 말하리라 느껴요. 한국사람은 언제부터 어여쁜 빛깔 한 가지를 ‘핑크’라 일컬었을까요.


  내 어머니는 어여쁜 빛깔을 ‘분홍’이라고 말합니다. 살짝 궁금하지만 여쭐 길은 없는데,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는 무어라 말했을까 헤아려 봅니다.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는, 또 이분을 낳은 어머니는, 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는 …… 이렇게 차근차근 거슬러 옛날 옛적으로 돌이켜보면, 지난날에는 어떤 낱말로 아리따운 빛깔을 가리켰을까요.


  내 어머니도 요즈음에는 ‘핑크’라는 낱말을 들으시고 아실 테지만, 입에서는 ‘분홍’이라는 낱말이 흘러나옵니다. 그러면, 1500년대에는, 500년대에는, 또 단군이 살았다는 얼추 5000해 앞서는, 아름답다고 여기는 빛깔을 어떤 낱말로 나타냈을까요.


  봄이 되면 봄꽃이 핍니다. 봄이라서 봄꽃입니다. 도시에서는 개나리가 맨 먼저 꽃송이를 내밀 텐데, 시골에서는 그 어느 꽃보다 ‘봄까지꽃’이 맨 먼저 고개를 내밉니다. 아이들 새끼손톱보다 훨씬 자그마한 꽃송이를 빛내는 봄까지꽃은 좀처럼 알아보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자가용을 타고 달려도, 버스를 타고 움직여도, 이 봄꽃을 못 알아봅니다. 아주 작거든요. 자전거를 타고 달릴 적에도 봄까지꽃을 알아채기는 힘들어요. 밭둑을 걷거나 논둑을 걸을 때에야 비로소, 아하 너 여기에 피었네, 하고 알아채요.


  봄까지꽃이 피고 나서 별꽃이 핍니다. 산수유도 꽃송이를 벌리고 할미꽃도 자그맣게 꽃송이를 내놓습니다. 유채도 갓도 노란 꽃송이를 마음껏 뽐내요. 그나저나 시골사람 아닌 도시사람 가운데 유채풀을 맛나게 먹고 갓풀 또한 맛있게 먹는 줄 얼마나 알려나요. 우리 집 식구들은 봄이 되면 들판마다 흐드러지는 유채랑 갓 뜯어서 먹느라 바지런을 떨어요. 매화가 보얗게 꽃잎을 날리고, 천천히 진달래가 온 멧골을 밝힙니다. 아, 그렇지요. 진달래가 피지요. 그래요, 옛날 옛적 사람들은 풀을 뜯어 지붕에 얹기도 했지만, 풀줄기를 갈무리해 실을 얻고 자아 옷 한 벌을 지었어요. 풀잎에서 푸름을 읽고 하늘에서 파랑을 읽었어요. 옛날 옛적 사람들은 흙을 읽으며 흙빛을 느꼈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나무빛을 살폈어요.


  가을날 감알을 바라보며 싱그러운 ‘감빛’을 생각합니다. 감은 감빛 아니고는 달리 나타낼 빛깔이 없습니다. 그 옛날 ‘주홍’이니 ‘주황’이니 하는 말이 있을 턱 없어요. 감빛이고 대추빛이며 능금빛이요 배빛이에요. 머루빛이고 다래빛이며 박빛이에요. 수세미빛 으아리빛 배추빛 무빛을 누렸어요. 보리를 거두며 보리빛을 말하고, 벼를 낫으로 베며 벼빛을 읊었어요. 하얀 구름 올려다보며 땀을 식힐 적에 구름빛을 헤아리고, 밤늦도록 일손을 놀리며 달빛과 별빛을 받았어요.


  국어사전을 들춘다 하더라도 우리 빛깔을 찾지 못합니다. 국어학자한테 여쭈어도 이 겨레 빛깔을 알아내지 못합니다. 다만, 내 어머니를 떠올리고, 내 어머니를 낳은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와 어머니와 …… 흙을 만지고 사랑하고 보살핀 숱한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시나브로 빛깔을 떠올립니다.


  진달래 참 곱구나, 어머나 너 진달래빛 옷을 입었네, 진달래로 물을 들였니, 잇꽃으로 물을 들였니,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곤조곤 속삭이며 봄날 멧골에서 멧나물을 뜯으셨겠지요. 진달래 꽃잎 몇 뜯어서 입안에 넣고는 살근살근 씹으며 봄맛을 누리셨겠지요. 진달래 꽃송이 하나 귓등에 꽂고는 꽃순이가 되고 꽃돌이가 되어 봄아이가 되며 한껏 흐드러지셨겠지요. (4345.11.2.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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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와 함께 생각을 북돋울 말
[말사랑·글꽃·삶빛 31] 그림책은 어떻게 쓰는가

 


  그림책을 읽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즐길 그림책을 읽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안 읽으며 아이들한테만 읽히는 그림책은 없습니다. 어버이인 내가 먼저 찬찬히 안 살피고 나서 아이들한테 쥐어 주는 그림책은 없습니다. 어느 그림책을 아이한테 내밀며 읽으라고 하더라도 어버이인 내가 먼저 그림책을 가만가만 읽습니다.


  그림책은 아이들만 읽는 책이 아닙니다. 그림책은 아이들부터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그림책은 아이들 눈높이에서도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책입니다. 그림책은 지식인이나 지성인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림책은 울타리를 세우지 않습니다. 한글을 깨친 이라면 누구라도 쉽게 읽고 쉽게 생각하며 쉽게 삶으로 받아들일 만한 이야기를 담아서 그림책 하나 태어납니다.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다가, 책에 적힌 글월을 죽죽 긋고는 아래나 위에 다른 말을 적어 넣습니다. 아이들이 나중에 한글을 깨쳐 스스로 읽을 적에 썩 안 좋다 싶은 글월이라면 죽죽 긋고 새 말을 적어 넣습니다. 우리 집에 놀러온 다른 어른들이 이 그림책을 펼쳐 읽어 준다 할 적에 ‘책에 적힌 대로만 읽지 않기’를 바라며 죽죽 긋습니다.


  그림책은 그림으로만 이루어지기도 하고, 그림과 글이 어울리기도 하며, 글이 퍽 많이 실리기도 합니다. 그림책이 어떤 모양새로 태어나더라도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넣는 이들은 ‘말’을 나누려고 합니다. 생각을 말에 담아 나누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을 그리거나 쓰기 앞서, 이 그림책을 그리거나 쓰는 어른들은 여느 때에 스스로 생각하던 삶을 여느 때에 즐겁게 쓰던 말에 담아서 이야기를 빚습니다.


  그림책 《꽃섬》(웅진주니어,2012)을 읽다가 “도시는 빠르게 커지고 복잡해졌어.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같은 글월을 봅니다. 어른들이 흔히 쓰는 말투이니 어린이와 함께 읽는 그림책에도 이 같은 글월이 실릴 수 있겠지요. 그러면 ‘복잡(複雜)하다’란 무엇일까요. 국어사전 말풀이를 살피면, “일이나 감정 따위가 갈피를 잡기 어려울 만큼 여러 가지가 얽혀 있다”로 풀이합니다. 한국말 ‘얽히다’를 가리키는 한자말 ‘복잡하다’요, 다른 한국말로 나타내자면 ‘어수선하다’나 ‘어지럽다’입니다. ‘점점(漸漸)’이란 또 무엇일까 궁금합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보면, “조금씩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모양”을 가리킨다 하는데, 국어사전 말풀이에 나오듯, 한국말은 ‘조금씩’입니다. 다른 한국말로 나타내자면 ‘차츰’이나 ‘자꾸’나 ‘꾸준히’라 할 수 있습니다.


  어른들은 ‘복잡하다’와 ‘점점’이라는 한자말도 쓰고, ‘어지럽다’와 ‘차츰’이라는 한국말도 씁니다. 아이들은 어떤 말을 들을 때에 즐거울까 헤아려 봅니다.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어떤 말을 쓸 때에 아름다울까 헤아려 봅니다.


  그림책 《일 년은 열두 달》(시공주니어,2006)을 읽다가 “동장군은 아직 물러가지 않았지만 머지않아 자작나무 가지에 움튼 새싹이 봄소식을 전해 줄 거야” 같은 글월을 봅니다. 아이들 앞에서 ‘춘하추동(春夏秋冬)’이라 말하는 어른도 있지만, 오늘날에는 으레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 말합니다. ‘동장군(冬將軍)’도 이와 같은 흐름이에요. 아이들하고 나눌 그림책에 적어 넣을 낱말이라 한다면 ‘겨울장군’처럼 적을 수 있어요. “전(傳)해 줄거야” 같은 글월이라면 “알려주겠지”라든지 “들려줄 테지”처럼 손볼 수 있어요.


  한 가지를 더 살핍니다. ‘봄소식(-消息)’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요. 한자말 ‘소식’ 뜻풀이를 찾아보면,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의 사정을 알리는 말이나 글. ‘알림’으로 순화”처럼 나옵니다. 그러니까, 한자말 ‘소식’은 한국사람이 안 써야 알맞다 여기는 낱말입니다. 다만, 국어사전에서 ‘소식’ 같은 한자말을 찾아보는 어른은 거의 없어요. 국어사전을 찾아본다 한들 이러한 한자말을 씻거나 털려고 애쓰는 어른 또한 거의 없어요.


  곰곰이 생각할 일입니다. 한자말 ‘소식’을 씻거나 털려 한다면, 어떤 한국말을 쓸 때에 알맞으면서 즐거울까요.


  나는 아이들한테 ‘봄소식’ 같은 말을 들려주지 않습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한테 ‘봄노래’라든지 ‘봄얘기’라든지 ‘봄바람’ 같은 말을 들려줍니다. 겨울장군이 차츰 물러나면 자작나무 가지에 움튼 새싹이 봄노래를 부르겠지요. 봄얘기를 속삭이겠지요. 봄바람에 살랑살랑 흔들리며 봄꿈을 꾸겠지요.


  그림책 《엄마가 좋아》(한림출판사,1988)를 읽다가 “준비, 시작”이라는 글월을 보고 살며시 책을 덮습니다. 서너 살 어린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 《엄마가 좋아》인데, 일본사람이 쓴 이 그림책을 한국말로 옮기면서 일본말 “요이, 땅(ようい, どん)”을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준비, 시작”으로 옮긴 셈이에요. 자, 생각해 봅니다. ‘준비(準備)’와 ‘시작(始作)’은 한국사람이 얼마나 쓸 만한 한자말일까요. 일본사람이 한자로 적은 낱말을 한국사람이 한글로 옮기면 그림책에든 소설책에든 쓸 만하다 여겨도 될는지요.


  우리 집 아이들과 어떤 말을 주고받을 때에 즐거운가 하고 헤아리기 앞서, 나 스스로 퍽 어린 나날 어떤 말을 썼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1970∼80년대에 어린 나날을 보내면서, 나와 동무들은 “요이, 땅”을 비롯해서 “준비, 시작”과 “준비, 출발”과 “준비, 탕”까지 갖가지 말을 썼어요. 이런 말을 써야 한다거나 저런 말은 안 써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우리 둘레 어른 가운데 우리들이 즐겁게 쓸 만한 말투와 낱말을 알려주는 어른도 없었어요. 이때에 이런 여러 가지 ‘일본말’과 ‘일본 말투’와 ‘일본 말투를 껍데기만 한글로 옮겨 적은 말투’ 말고, 먼먼 옛날부터 한겨레가 쓰던 말투도 몇 가지 썼습니다. 이를테면, “자, 가자”라든지 “하나, 둘, 셋”이라든지 “자, 하자” 같은 말을 아울러 썼어요.


  이제 그림책을 덮습니다. 어린이와 함께 생각을 북돋울 말이란 무엇일까 하고 하나하나 짚어 봅니다. 더 깨끗하다 싶은 말이라든지, 더 아름답다 싶은 말이라든지, 따로 있을까 되새겨 봅니다. 말은 정갈하게 하더라도 삶이 정갈하지 못하거나 넋이 정갈하지 못하다면, 나 스스로 어떤 삶과 넋을 어떤 말에 담아서 나타내는 셈일까 곱씹어 봅니다.


  그림책을 쓰는 어른들은 아주 마땅히 어린이 눈높이를 살펴야 알맞습니다. 어린이가 알아들을 만한 낱말을 고르고 어린이한테 걸맞을 말투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알아듣기만 한다면 어떤 낱말과 말투라도 다 쓸 만하지는 않겠지요. 아이들이 알아들을 만한 낱말과 말투이면서, 어른 스스로 삶을 아끼고 생각을 살찌우는 낱말과 말투가 되어야겠지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사람이 러시아말을 흉내낼 까닭이 없어요. 네덜란드사람이 벨기에말을 따라할 까닭이 없어요. 베트남사람은 베트남말을 하면 돼요. 라오스사람은 라오스말을 해야지요. 중국사람은 중국말을 하고, 일본사람은 일본말을 하면 됩니다. 곧,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할 때에 가장 즐겁고 아름답습니다. 그림책을 쓰는 어른들은 ‘무늬만 한글인 한국말’이 아니라 ‘알맹이가 알차고 어여쁘며 튼튼한 한국말’을 스스로 슬기롭게 찾으면서 갈고닦을 수 있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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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이’와 ‘놀라움’
[말사랑·글꽃·삶빛 30] 말이란 무엇일까

 


  국어사전은 국어학자가 엮습니다. 국어학자는 국어를 익힌 사람입니다. ‘국어(國語)’란 무엇일는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1) 한 나라의 국민이 쓰는 말 (2) 우리나라의 언어. ‘한국어’를 우리나라 사람이 이르는 말이다”라 나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에서 “한 나라의 국민”이라 나오는데, ‘국민(國民)’은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을 뜻한다고 해요. ‘국가(國家)’는 또 무엇인가 하면 “= 나라”입니다. 곧, 나라를 이루는 사람이 ‘국민’이기에 “한 나라의 국민”처럼 적는 뜻풀이는 알맞지 않습니다. “한 나라의 나라의 사람”처럼 뜻풀이한 셈이니까요. 그런데 ‘국민’이라는 낱말을 한국사람이 얼마나 쓸 만한가 알쏭달쏭합니다. 1990년대까지 쓰던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이제 ‘초등학교’로 바꾸었어요. ‘국민’이라는 낱말은 여느 한자말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가 한겨레를 식민지로 삼던 지난날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썼거든요. ‘국어’라는 낱말도 이와 같아요. ‘국어’라는 한자말은 일본제국주의가 군대를 앞세워 여러 나라를 식민지로 삼던 때에 ‘일본말’을 가리키려고 썼어요. 중국사람은 ‘중국어’라 했고 한국사람은 ‘조선어’라 했어요. 이때 한국은 나라이름이 ‘조선’이었기에 ‘조선어’였어요. 일본은 나라이름이 일본이니 ‘일본어’로 적을 만했지만, 일본은 아시아를 제국주의를 내세워 윽박지르며 ‘국어’라는 한자말을 새로 지었어요.


  말뿌리를 살핀다면, ‘국민학교’에 붙던 ‘국민’만 털어낸대서 식민지 찌꺼기를 털 수 있지 않습니다. ‘국민’과 함께 ‘국어’를 털어야 합니다. 이와 맞물려 ‘국(國)-’을 붙인 여러 낱말도 나란히 털 수 있어야 해요. 털어낼 찌꺼기라 한다면 말끔히 털어야 할 노릇이요, 가꾸며 북돋울 겨레얼이라 한다면 찬찬히 살피며 두루 가꾸며 북돋울 노릇이에요.


  그림을 그리는 김원숙 님이 쓴 《그림 선물》(아트북스,2011)이라는 책을 읽다가 132쪽에서 “밤하늘에 달이 떠 있는 건 하나도 놀랄 일이 아닌데, 달은 볼 때마다 새롭고 경이롭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는 ‘놀랄’과 ‘경이롭다’라는 낱말이 나타납니다. 아마, ‘놀랄’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를 한국사람은 없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경이롭다’가 무엇을 뜻하는지 제대로 아는 한국사람은 얼마나 있을까요.


  ‘경이(驚異)롭다’는 “놀랍고 신기하게 여기다”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이 말풀이에 나오는 ‘신기(神奇)하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색다르고 놀랍다”를 뜻하는 한자말입니다. 곧, ‘경이롭다’란 “놀랍고 놀랍게 여기다”인 셈이면서, ‘경이 = 놀라움 = 신기’인 꼴입니다.


  우리 어른들은 말뜻과 말풀이와 말느낌을 얼마나 옳게 헤아리면서 말을 하며 살아간다고 할 만할까요. 말뜻을 제대로 짚으며 말하는 어른은 얼마나 될까요. 말풀이를 찬찬히 살피는 어른은 얼마나 있을까요. 말느낌을 살가이 살리며 말을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찾아볼 수 있을까요.


  국어사전에 실린 숱한 한자말은 돌림풀이로 뜻풀이를 합니다. 돌림풀이로 뜻풀이를 붙이는 한자말을 이모저모 살피면, 오랜 옛날부터 한겨레가 쉽고 수수하게 주고받던 낱말을 이래저래 밀어내며 자꾸 쓰이는구나 싶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지만 정작 한국에서 쓸 한국말을 올바로 깨닫지 못하는구나 싶습니다. 털며 아름답게 가꿀 말을 털지도 못하고 아름답게 가꾸지도 못합니다. 슬기롭고 올바로 쓸 말을 슬기롭게도 못 쓰고 올바르게도 못 씁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국어’가 아닌 ‘나라말’입니다. ‘국민’이 아닌 ‘나라사람’입니다. ‘국가’가 아닌 ‘나라’입니다. ‘國歌’처럼 적는 한자말 또한 ‘국가’가 아닌 ‘나라노래’입니다. 한 번 더 되돌아보면, ‘나라말’이기 앞서 ‘말’입니다. ‘나라사람’이기 앞서 ‘사람’입니다. ‘나라노래’이기 앞서 ‘노래’예요.


  오늘날 들어서 우리 겨레 이야기를 ‘옛이야기’라 하면서 ‘옛-’을 앞에 붙이지만, 예부터 오래오래 내려온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시골에서 흙일을 하며 부르던 노래는 ‘민요’나 ‘전래민요’가 아닌 ‘노래’일 뿐입니다. 시골이 도시로 바뀌거나 시골에 할머니 할아버지만 남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민요’나 ‘전래민요’ 같은 이름을 붙일까요. 어쩌면, 이런 이름을 일부러 붙이면서 오늘날에도 시골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먼먼 옛날 구닥다리’라도 되는 듯 몰아붙이는 셈 아니랴 싶어요. 오늘도 시골에서 논일을 하고 밭일을 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저절로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불러요. 할머니 노래는 민요 아닌 노래이고, 할아버지 노래는 전래민요나 전통민요가 아닌 노래예요.


  우리들이 쓰는 말은 ‘한국말’이라 이름을 붙일 만하지만, 이에 앞서 ‘말’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터가 한국이니 ‘한국말’이라 하지만, ‘말’을 나눌 뿐입니다. 나는 내 삶을 담고 내 넋을 싣는 말을 합니다. 내 둘레에서는 내 동무나 이웃이 ‘동무 삶’과 ‘이웃 넋’을 들려주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써야 바른 말이 된다거나 저렇게 써야 고운 말이 된다고 하는 틀은 없습니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며 나누는 말입니다. 삶에 따라 스스로 빚는 말인 만큼, 삶을 곱게 일구는 사람은 넋이 곱고 말이 곱습니다. 삶을 참답게 가꾸는 사람은 넋이 참다우며 말이 참답습니다. 삶을 즐겁게 누리는 사람은 넋이 즐겁고 말이 즐겁습니다.


  국어사전은 국어학자가 국어학을 익히며 엮습니다. ‘말’은 우리들이 바로 이곳에서 내 보금자리를 알뜰히 사랑하면서 저마다 즐겁게 주고받습니다. (4345.10.26.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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