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이름 짓기
[말사랑·글꽃·삶빛 39] 우리 집 둘째 ‘산들보라’

 


  이름은 어버이가 아이한테 지어서 선물합니다. 내 이름은 내 어버이한테서 받은 선물입니다. 내 어버이도 나처럼 갓 태어난 아기였을 적 당신 어버이한테서 이름을 선물받았습니다. 나도 무럭무럭 자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으면, 내 아이한테 이름을 선물합니다. 앞으로 내 아이도 씩씩하게 자라 어른이 되면, 저희끼리 고운 짝꿍을 만나 어여쁜 이름을 선물할 테지요.


  내 이름은 내 삶을 보여줍니다. 내 어버이가 나한테 선물한 이름은 내 어버이가 나를 사랑한 삶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즐겁고 씩씩하게 살아가며 나한테 새롭게 붙일 이름을 생각합니다. ‘내가 나한테 선물할 새 이름’을 가만히 곱씹습니다.


  내가 갓난쟁이로 태어나 어린이가 되고, 푸름이를 지나, 어른이라는 자리로 삶자리를 바꾸는 동안, 내 곁으로 찾아오는 어여쁜 동무들이 있습니다. 내 동무들은 나한테 새로운 이름을 선물처럼 붙여 줍니다. 나는 내 동무들한테 이녁 새 이름을 선물처럼 붙여 줍니다. 동무들은 서로서로 새 이름을 붙여 주며 저마다 사랑을 선물합니다.


  한자말로 적어 본다면, ‘본명·필명·별명’쯤 될 수 있을 텐데, 쉽게 한국말로 적어 본다면, ‘내 이름·글 이름·다른 이름’쯤 되기도 하지만, 그저 ‘이름’입니다. 어버이가 붙인 이름이고, 내가 붙인 이름이며, 동무가 붙인 이름이에요.

  나와 옆지기는 아이 둘을 낳아 함께 살아가면서 두 아이한테 저마다 다른 이름을 붙여 줍니다. 두 어버이가 사랑으로 낳은 아이라는 넋을 담는 한편, 아이 스스로 이 땅에서 사랑스레 살아갈 길을 곱게 밝히기를 바라는 꿈을 담습니다. 첫째 아이한테는 ‘사름벼리’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사름’과 ‘벼리’를 더한 이름입니다. 아버지 성은 ‘최’이고, 어머니 성은 ‘전’이지만, 우리 두 아이는 아버지 성이나 어머니 성을 받지 않습니다. 따지고 보면, 어머니 성이란 ‘어머니를 낳은 아버지 성’입니다. 홀가분하게 어머니 성이지 않아요. 아버지 성도 ‘아버지를 낳은 아버지 성’일 뿐, 홀가분한 아버지 성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나와 옆지기는 ‘아버지 핏줄로만 잇는 성’은 우리 자리에서 끝내기로 했어요. 비록 호적이나 주민등록에서는 이렇게 못하지만, 우리는 우리 삶을 누리는 만큼, 법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는 법 아닌 삶을 사랑합니다.


  첫째 아이 ‘사름벼리’는 ‘사름’이라는 낱말로 ‘흙과 풀을 사랑하는 넋’을 밝힙니다. ‘벼리’라는 낱말로 ‘물과 바다를 사랑하는 얼’을 밝힙니다. 이 땅 지구별에 환한 사랑 드리울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되리라 믿는 꿈을 ‘사름벼리’라는 이름에 담습니다.


  둘째 아이한테는 ‘산들보라’라는 이름을 주었습니다. ‘산들’과 ‘보라’를 더한 이름입니다. ‘산들’은 산들산들 부는 산들바람을 일컫기도 하지만, 산과 들을 일컫기도 합니다. 산뜻한 숨결을 들이켜는 너른 가슴을 일컫기도 합니다. ‘보라’는 무엇보다 ‘내 마음속에 깃든 하느님을 보라’를 일컫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입니다. 나도 너도 우리도 모두 하느님입니다. 풀과 나무와 꽃 또한 하느님입니다. 냇물과 해님과 무지개와 바람 또한 하느님입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일이란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이면서 이웃과 동무 모두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나 스스로 아끼며 섬길 수 있을 때에 나를 둘러싼 풀과 나무와 숲과 온누리를 아끼며 섬길 수 있어요. 곧, 참마음을 보라는 뜻입니다. 참삶을 보고 참사랑을 보라는 뜻입니다. 참길과 참꿈을 보라는 뜻이에요. 이러면서 맑은 보라빛을 일컫고, 눈보라 꽃보라처럼, 산들산들 맑은 바람이 따사롭게 ‘산들보라’를 이룬다는 이야기를 일컬어요.


  아이들 이름을 지으며 무척 즐겁습니다. 두 아이가 하루하루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볼 뿐 아니라, 두 아이한테 날마다 이름을 수십 수백 차례 불러 주면서 즐겁습니다. 큰아이가 작은아이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즐겁고, 앞으로 작은아이가 더 커서 누나 이름을 이쁘장하게 부를 적에는 이 소리를 들으며 더욱 즐거우리라 생각해요.


  이름은 처음 붙이면서 즐겁습니다. 삶을 누리는 동안 언제라도 부르면서 즐겁습니다. 내가 내 이름을 종이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쓰면서 즐겁습니다. 내 동무가 나한테 글월 한 장 띄운다면서 내 이름을 봉투에 곱다시 적바림할 적에 즐겁습니다.


  이 땅 누구나 어버이한테서 가장 빛나고 가장 맑으며 가장 슬기로운 이름을 선물로 받았으리라 느껴요. 이 땅 어린이와 푸름이 누구나 맑고 슬기롭게 빛나는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먼 뒷날 새삼스러운 즐거움을 가슴에 듬뿍 안고 새 이름을 새 아이들한테 예쁘게 붙일 수 있으리라 느껴요. 4345.1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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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은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6] 한국말·이중언어·세 갈래 말

 


  한국사람은 한국글, 곧 ‘한글’로 글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글은 모두 한글이라 할 만한데, 요즈음은 한글 아닌 알파벳으로 글을 쓰는 분이 퍽 많습니다. 이를테면 ‘아름다움’이라 말하지 않고 ‘뷰티’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beauty’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어요. ‘빨강’이나 ‘붉음’이라 말하지 않고 ‘레드’라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아예 ‘red’처럼 글을 쓰는 사람이 있고요.


  한국말이 없기에 영어를 쓰지 않습니다. 한국말보다 영어가 익숙하다고 느끼기에 영어를 씁니다. 한국말보다 영어를 쓸 때에 돋보인다고 여겨 영어를 씁니다. 그래서, 영어가 오늘날처럼 널리 쓰이기 앞서 예전 사람들은 한자를 즐겨쓰곤 했어요. 왜냐하면, 예전에는 한자를 드러내어 적고, 한자말을 더 많이 쓰면 남보다 돋보인다고 여겼으며, 남보다 잘나거나 똑똑해 보인다고 여겼거든요. 그러니까, 예전 사람들은 ‘아름다움’이라는 한국말이 있어도 ‘우아’라 말하곤 했으며, 글을 쓸 적에는 ‘優雅’처럼 적기도 했어요. ‘빨강’이나 ‘붉음’ 아닌 ‘적색’을 말하면서 ‘赤色’처럼 적기도 하고요.


  이 같은 말흐름을 살핀다면, 한국사람은 여느 자리에서조차 세 갈래 말을 쓴다고 할 만합니다. 첫째, 한국말. 둘째, 한자말(또는 중국말이나 일본말). 셋째, 영어(또는 미국말).


  그런데 세 갈래 말을 쓰는 한국사람 모습을 살피면, 한자말을 즐겨쓰는 사람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더러 영어를 섞기는 하지만, 한국말보다 한자말을 높이 사서 이야기합니다. 영어를 즐겨쓰는 사람은 영어를 도드라지게 쓰지, 한자말을 도드라지게 쓰지는 않아요. 곧잘 한자말을 섞기는 하더라도, 한국말보다 영어를 높이 사며 이야기해요.


  간추려 말하자면, 한국사람은 세 갈래 말을 쓰는 슬픈 겨레인데, 한 사람씩 따로 놓고 보자면 ‘두 갈래 말(이중언어)’로 살아가며 생각과 마음과 앎조각을 밝힌다고 하겠어요.


  체코사람 카렐 차페크 님이 쓰고 한국사람 홍유선 님이 옮긴 《원예가의 열두 달》(맑은소리,2002)이라는 책을 읽다가 102쪽에서 “그러나 그 시간에도 태양열은 점점 더 뜨거워진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이 글월에서 ‘그 시간’과 ‘태양열’과 ‘점점 더’를 헤아려 보겠습니다.


  먼저, ‘시간(時間)’은 “(1) 어떤 시각에서 어떤 시각까지의 사이”를 뜻한다는 한자말입니다. 뜻풀이를 더 살피면 “(2) = 시각 (3) 어떤 행동을 할 틈 (4) 어떤 일을 하기로 정하여진 동안 (5) 때의 흐름”처럼 나와요. 곧, ‘시간’은 ‘시각’이라는 한자말하고 이어지면서, ‘틈’과 ‘동안’과 ‘때’라는 한국말하고 이어집니다.


  이 대목에서 곰곰이 짚어 보고 싶습니다. 한자말 ‘시간’이 한겨레 말삶에 언제부터 스며들었을까요. 1800년대에 시골에서 흙을 일구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1400년대에 바닷가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옛사람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200년대에 들판을 달리며 뛰놀던 옛 아이들도 이 한자말을 썼을까요.


  ‘시간표’라느니 “시간이 몇 시쯤 되었나요” 하는 자리에서는 ‘시간’이라는 한자말을 어찌할 수 없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내가 1800년대나 1400년대나 200년대를 살아가는 한겨레였다고 생각하면, 그무렵 나는 ‘때’나 ‘틈’이나 ‘겨를’이나 ‘사이’나 ‘동안’이나 ‘참’ 같은 한국말로 이야기를 나누었겠구나 싶어요.


  다음으로, ‘태양열(太陽熱)’은 “태양에서 나와 지구에 도달하는 열”이라고 합니다. 문득 궁금해서 ‘햇볕’ 말풀이를 찾아보니 “해가 내리쬐는 뜨거운 기운”이라고 합니다. 한자말 ‘태양열’을 풀이할 적에는 ‘도달(到達)’과 ‘열(熱)’이라는 한자말을 빌어서 쓰고, 한국말 ‘햇볕’을 풀이할 적에는 ‘내리쬐는’과 ‘뜨거운 기운’이라는 한국말을 빌어서 쓰는군요.


  나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하기에 언제나 ‘햇볕’과 ‘햇살’과 ‘햇빛’과 같은 낱말을 씁니다. ‘해’와 ‘해님’과 ‘햇무늬’와 ‘햇결’과 ‘해구름’ 같은 낱말을 곰곰이 돌아봅니다.


  마지막으로, ‘점점(漸漸)’은 “조금씩 더하거나 덜하여지는 모양”을 가리키는 일본 한자말입니다. 말풀이에 나오듯 ‘조금씩’으로 바로잡을 낱말인데, 다른 한국말로는 ‘차츰’과 ‘자꾸’와 ‘꾸준히’와 ‘지며리’ 들이 있어요. 그러나, 한국사람이면서 한국말을 옳고 바르며 알맞고 아름다이 쓰는 매무새를 스스로 잃는 한국사람은 자꾸 ‘점점’이나 ‘점차(漸次)’나 ‘차차(次次)’ 같은 한자말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다른 사람이 ‘차츰·자꾸·꾸준히’ 같은 낱말로 이야기를 하면 잘 알아듣기는 하되, 스스로 이러한 한국말을 쓸 줄 몰라요. ‘햇볕·햇살·햇빛’이라는 말을 누군가 쓸 때에 못 알아듣는 사람은 없을 테지만, 막상 스스로 이러한 낱말로 이야기를 엮지 못해요.


  두 말을 쓰는 한국사람이지만, ‘알아듣기만 두 말’일 뿐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셈입니다. ‘알아듣기로는 세 말’인데 ‘쓸 때에는 한 말을 쓰는’ 한국사람인 꼴입니다.


  한국말은 ‘마음’이지만, 한자말을 쓰는 분들이 ‘정신(精神)’이라는 낱말을 널리 쓰면서, 한국말 ‘마음’은 쓰임새가 줄거나 뜻 테두리가 오므라듭니다. 이런 말흐름에서 ‘마인드(mind)’라는 영어가 스며들고, 요즈음에는 ‘멘탈(mental)’이라는 영어가 새롭게 스며듭니다. 이리하여, 요즈음 태어나 자라는 아이들은 ‘마음’이라는 낱말조차 들을 일이 매우 드물어, 누군가 ‘마음’이라는 낱말을 쓰면 그럭저럭 알아듣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스스로 어느 자리에 어떻게 ‘마음’이라는 낱말을 넣어 제 이야기를 펼쳐야 할는지를 몰라요. “심적(心的)으로 괴롭다”고 말하면서 “마음이 괴롭다”고 말하지 못하며, 두 말이 사뭇 다르다고 여기기까지 합니다. “멘탈 붕괴”라고 말하기는 하되, “마음 붕괴”나 “마음이 무너짐”이나 “마음이 뒤죽박죽”처럼 말할 줄 모르며, 이들 말이 서로 다르다고 여기고 맙니다. “마음을 하나로 다스리”려고 애쓰면서 입으로는 “정신통일(精神統一)”이라고 읊어요.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글을 어떻게 쓸 때에 아름다울까요. 내가 쓰는 내 글은 내 넋과 내 삶을 어떤 ‘내 말’로 담을 수 있을까요. 내 말이 곱게 빛나도록 나 스스로 얼마나 마음을 기울이거나 생각을 쏟는가요.


  한쪽에서는 ‘잔치(생일잔치,마을잔치)’를 하고, 한쪽에서는 ‘연회宴會(피로연披露宴,회갑엽回甲宴)’를 하며, 다른 한쪽에서는 ‘파티party(생일파티,커플파티)’를 합니다. 한겨레라 하지만 말은 두 말 세 말, 어쩌면 네 말 다섯 말 자꾸 쪼개집니다. 같은 일을 하면서 다른 갈래 말을 합니다. 이쪽은 ‘모둠’이나 ‘모임’이지만, 저쪽은 ‘조(組)’나 ‘부서(部署)’이고, 그쪽은 ‘파트(part)’나 ‘팀(team)’입니다. 한국에서 한국사람으로 살아가자면 몇 가지 말을 할 줄 알아야 할까요. 한국에서 한국말을 주고받으려면 우리는 ‘똑같은 한 가지’를 놓고 얼마나 다른 여러 나라 말을 익히거나 머릿속에 지식으로 집어넣어야 할까요.


  껍데기는 ‘한글’이라지만, ‘한국글’이라 할 만한 글은 차츰 사라집니다. 귀로 듣기로는 ‘한말(한겨레 말)’이라지만, ‘한국말’이라 할 만한 말은 꾸준히 잊혀집니다. 말은 어떻게 해야 하고, 글은 어떻게 써야 할까요. 4345.11.28.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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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헌장’과 ‘푸른다짐’
[말사랑·글꽃·삶빛 38]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한다면

 


  토박이말이란 따로 없습니다. 한 나라에서 살아가며 쓰는 말만 있습니다. 그러나 ‘한 나라’라는 울타리도 덧없습니다. 전라도에서 나고 자란 이는 전라도말을 하고, 충청도에서 나고 자란 이는 충청도말을 하는걸요. 그런데, 전라도나 충청도라는 울타리도 덧없어요. 전주에서 나고 자라면 전주말을 하고, 고흥에서 나고 자라면 고흥말을 해요. 강릉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강원말 아닌 강릉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더 헤아리면, 고흥말도 옳지 않습니다. 고흥군에서 도화면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포두면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봉래면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말이 또 다릅니다. 더 살피면, 고흥군 도화면이라 하더라도, 동백마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호덕마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지죽마을에서 태어났느냐에 따라 말이 다시 달라요. 마지막으로, 이 마을 저 마을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어버이에 따라 말이 새삼스레 다릅니다. 곧, 내가 하는 말이란 나를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늘 들려주는 말이에요.


  하루가 지나고 한 해가 흐르며 무럭무럭 자랍니다.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새롭게 일굽니다. 그래서 내 말은 어느새 어머니말이나 아버지말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내 말’로 거듭납니다.


  사람마다 얼굴이 다 다르고 목소리가 다 다르듯이, 사람마다 ‘스스로 쓰는 말’이 모두 다릅니다. 백만 사람이 글을 쓰면 백만 가지 글이 태어납니다. 억만 사람이 글을 쓰면 억만 가지 글이 태어나요.


  말이란 ‘말하는 사람 넋’을 담습니다. 말하는 사람 넋이란 ‘말하는 사람 삶’을 드러냅니다. 곧, 나 스스로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달라지고,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어떻게 말하느냐가 달라져요.


  오늘날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헤아려 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모두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 살아갑니다. 시골에서 태어나든 도시에서 태어나든 한결같이 도시에서만 살아간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면 도시에서는 무엇을 할까요. 거의 모두 회사원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가게를 차려 장사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다 같은 일을 하거나 얼추 비슷한 일을 해요. 똑같은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쓰고, 똑같은 기계 앞에 앉아 공장을 움직이며, 똑같은 물건을 날마다 똑같이 사고파는 장사를 해요.


  어른이 되어서 도시에서 지내며 하는 일은 모두 똑같다 할 만합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어른이 주고받는 말은 내남없이 모두 똑같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부산 말씨와 진주 말씨가 살짝 남기는 하더라도 ‘말 얼거리’와 ‘말 속살’과 ‘낱말 갈래’와 ‘말 매무새’는 모두 판박이처럼 엇비슷해요.


  어린이와 푸름이는 어떠할까 헤아려 봅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대로 보육원부터 텔레비전에 길들고 유치원부터 일찌감치 영어노래에 젖어듭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아이들은 모두 똑같은 교과서로 똑같인 지식을 쌓습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는 초등학교 때보다 훨씬 깊고 넓게 ‘똑같은 시험공부’만 하도록 내몰립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이 나라에서 어른과 아이는 서로 똑같은 말만 한달 수 있어요. 다 다른 어른이고 다 다른 아이라 하지만, 다 같은 말이고 다 같은 넋이 되고 말아요. 다 같은 삶이거든요. 아니, 가만히 보면 ‘다 같은 삶’이 아니라 ‘다 틀에 박힌 굴레’나 ‘다 울타리에 갇힌 쳇바퀴’라 해야 올바를는지 모릅니다. 스스로 생각을 밝히는 배움이 아니거든요. 대학바라기 시험공부를 한다며 입시지옥에 허덕이거든요. 대학교를 마친 뒤에는 취업전쟁에 사로잡혀 스스로 ‘내 말’ 찾는 일하고는 아주 등을 져요. 이리하여, 이 나라 아이들은 어른이 되어 시집장가를 갈 무렵에는 ‘내 말’이란 없습니다. ‘제도권 사회 말’만 남아요. 제도권 사회 말만 남은 이 나라 어른이 되어 아이를 낳는다 하면, ‘어른이 된 아이’가 낳아서 돌볼 아이들은 ‘내 어머니라 남다른 말’이라든지 ‘내 아버지라 새로운 말’은 들을 수 없습니다. 텔레비전에서 흐르는 말이랑 똑같은 말이 집안에서 감돕니다. 교과서와 문제집에 적힌 말이랑 똑같은 말이 ‘둘레 어른 누구나 쓰는’ 말입니다.


  입시지옥에 시달려야 한다면, 오늘날 이 나라 푸름이가 품을 넋과 보듬을 말은 더없이 슬픈 모습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다 다른 푸름이가 다 다른 푸른 빛을 누리지 못할 테니까요.


  ‘청소년헌장’이 있다지요. ‘어린이헌장’도 있다지요. 나는 이런 어려운 ‘헌장’이라는 말은 안 씁니다. 적어도 ‘푸른다짐’이나 ‘맑은다짐’ 같은 말마디로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이름을 고쳐 ‘푸른다짐’ 같은 말을 쓰고 싶어도, 오늘날 한국에서 푸름이들이 이름 그대로 푸르게 살아가지 못한다면, 허울만 ‘푸른 옷’을 입힌대서 푸른 꿈을 펼치지 못해요. 푸른 삶일 때에 푸른 넋이요 푸른 말입니다. 맑은 삶일 적에 맑은 넋이며 맑은 말입니다.


  어린이는 맑은 눈망울 빛내며 맑은 말을 노래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푸름이는 푸른 눈망울 빛내며 푸른 말을 노래할 때에 어여쁩니다.


  나무가 우거지고 풀이 흐드러진 푸른숲을 떠올립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도시 한복판 자동차 시끄러이 오가는 매캐한 바람을 먹으며 살아야 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 어린이와 푸름이는 누구나 시골마을 들새와 풀벌레 노래하는 아름다운 푸른숲에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나라 어른도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딱딱한 틀이 선 도시 아닌, 흙과 햇살과 물과 바람 싱그러운 푸른숲에서 푸른 사랑을 꽃피울 때에 아름다운 삶을 누리면서 아름다운 넋을 일구고 아름다운 말을 돌볼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국어사전을 들춘대서 토박이말을 캐내지 못합니다. 국어사전을 들추어 토박이말을 캐낸들 ‘내 삶으로 받아들여 즐거이 쓸 말’이 되지 못합니다. 국어사전을 들추어 캐내는 토박이말은, 여느 지식인이 지식자랑을 하려고 끌어들이는 영어나 한자하고 똑같습니다. 죽어 가는 토박이말을 캐낸들 한겨레 말삶을 북돋우지 못합니다. 국어사전에 파묻힌 토박이말을 끄집어낸들 한겨레 글삶을 살찌우지 못합니다.


  나부터 스스로 삶을 북돋울 때에 말을 북돋웁니다. 나부터 스스로 생각을 살찌울 때에 글을 살찌웁니다. (4345.11.2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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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학교’와 ‘어린이집’
[말사랑·글꽃·삶빛 37] 학교에서 배우는 말

 


  얼추 이삼백 해쯤 앞서, 페스탈로치라는 분은 ‘어버이와 집 없이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들을 그대로 두거나 모르는 척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이 제법 있는 사람들만 ‘교육을 받아’ 걱정없이 살아가는 모습은 아름답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페스탈로치라는 분은 당신 모든 돈과 힘과 슬기를 그러모아서 ‘어버이와 집 없이 떠도는 가난하고 외로운 아이가 다닐 수 있는 배움집’을 마련했습니다. 이른바 ‘고아원’이라 할 수 있고 ‘초등학교’라 할 만한데, 페스탈로치라는 분이 연 ‘학교’는 ‘서로 삶을 나누고 배우는 조그마한 집’이었어요. 그래서 이곳은 ‘배움집’이라는 이름이 어울립니다.


  오늘날 지구별 곳곳에서 초등교육이 이루어집니다. 평등한 높낮이로 초등학교를 열어 누구나 기초교육을 받도록 꾀합니다. 다만, 아직 한국 사회에서는 장애 있는 아이가 느긋하게 다닐 학교는 드물어요. 장애 있는 아이가 장애 없는 아이하고 나란히 배울 수 있는 학교는 매우 드물기까지 해요. 초등교육 밑틀을 마련해서 퍼뜨린 페스탈로치 넋을 헤아린다면, 아직 한국 사회는 ‘페스탈로치 넋 발끝’에도 가 닿지 못한다고 할 만합니다. 학교 시설은 커지고 체육관이나 수영장까지 짓지만, 또 급식실이 있고 과학실과 전산실에다가 영어교실까지 있지만, 막상 ‘장애가 있거나 없거나’ 모든 아이들을 사랑으로 맞아들이는 품은 열지 못해요.


  ‘초등 기초 교육’이라는 이름을 퍼뜨린 페스탈로치는 초등교육 다음으로 중등교육이나 고등교육을 헤아리지 않았습니다. 중등교육으로 넘어가는 징검돌로 초등교육을 다루지 않았어요. 어버이가 없어 사랑을 못 받는 아이들이 어버이 사랑을 초등교육을 받으며 누려야 한다고 여겼어요. 지식이나 학식이나 시험공부를 초등교육에서 해서는 안 된다고 여겼고, ‘한 사람이 꿈을 꾸며 사랑을 나누는 넋’을 배움집에서 익혀야 한다고 여겼어요.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에서는 1995년까지 ‘국민학교(國民學校)’라는 이름을 썼습니다. 1996년부터 ‘초등학교(初等學校)’라는 이름으로 고쳤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이기 때문에 이름을 바꾸었는데, 교육부나 정부에서 스스로 이름을 고치지 않았습니다. 뜻있는 분들이 오래도록 꾸준히 ‘국민(國民)’이라는 이름이 어떤 뜻이요 어떻게 생긴 낱말인가를 따지면서 시민운동을 한 끝에, 교육부와 정부에서 이 목소리를 받아들여서 고쳤어요. 그러면, ‘국민’이 무슨 낱말이기에 이 낱말이 들어간 학교이름을 바꾸려 했을까요. 국어사전을 들춥니다. ‘국민’ 말풀이를 살피면, “국가를 구성하는 사람. 또는 그 나라의 국적을 가진 사람”이라 나옵니다. ‘국민학교’ 말풀이도 살펴봅니다. “‘초등학교’의 전 용어”라 나옵니다. 국어사전 말풀이를 보아서는 ‘국민’이나 ‘국민학교’라는 낱말이 왜 말썽이 되는가를 알 수 없습니다. 국어사전은 백과사전이 아니니까 더 깊은 이야기를 다룰 수 없을는지 모르나, 막상 다뤄야 할 알맹이는 안 다루는구나 싶어요. 왜냐하면, ‘국민’이란, 일제강점기에 일본 천황이라는 사람이 ‘황국신민(皇國臣民)’을 간추려서 ‘국민’이라고 썼거든요. 국어사전에도 ‘황국신민’이라는 낱말이 실리기에 뜻풀이를 살피면, “일제 강점기에,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 된 백성이라 하여 일본이 자국민을 이르던 말”이라고 나옵니다. 곧, ‘국민’이라는 한자말은 일본 한자말이면서 ‘천황을 섬기는 제국주의 일본 사람’을 일컫는 낱말이에요.


  우리들 누구나 일제강점기를 살지 않아요. 우리들 누구나 한국사람이지 일본사람이 아니에요. 그래서 학교이름에 ‘국민학교’처럼 붙는 ‘국민’이란 몹시 끔찍하면서 어리석고 어처구니없어요. 교육부와 정부는 이런 이름을 해방 뒤 1995년까지 그대로 내버렸다가 사람들 커다란 목소리에 마지못해 다른 이름으로 바꾸었어요.


  그러면, 이제 더 넓게 생각해 봐요. 대통령으로 뽑힌 분들은 ‘국민과의 대화’를 해요. 언제나 ‘국민 여러분’이라고 말해요. ‘국민투표’라는 말은 아직 그대로 남았어요. 학교에서 ‘국민’이라는 이름을 털어야 한다면, 다른 자리에서도 똑같이 털어야 할 텐데, 다른 자리에서는 하나도 안 털어요. 게다가 이런 말뿌리를 깨닫거나 살피거나 알아차리는 어른이 거의 없어요. 아이들은 어른들한테서 말과 넋과 삶을 배우겠지요. 그러니까, 오늘날 아이들은 오늘날 어른들처럼 ‘국민’이 무엇이요, 이런 낱말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슬기로운가를 느끼지 못해요.

  ‘국(國)’이라는 한자가 붙은 다른 낱말 또한 일제강점기에서 비롯했습니다. 꽤 많은 ‘國 무엇’은 한겨레뿐 아니라 아시아 여러 겨레를 짓밟거나 깔본 제국주의 넋을 드러냅니다. 이런 말은 안 써야 하고, 저런 말을 써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말 하나에 담기는 넋을 살필 노릇이요, 글 한 줄에 서리는 얼을 보아야 합니다.


  1996년에 학교이름이 ‘초등학교’로 바뀌었지만, 정작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얼른 바로잡아야 한다고 외친 이들은 ‘초등’으로 바뀌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여덟 살 어린이부터 열세 살 어린이까지 다니는 첫 배움집 이름이기에 ‘어린이학교’나 ‘어린이배움터’처럼 ‘어린이’를 생각하는 이름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어요. 중등 과정으로 넘어가는 초등 과정이 아니기에 ‘초등’이라는 이름을 붙일 때에는 가르침도 배움도 될 수 없다고, 곧 교육이 될 수 없다고 여겼어요. 그러면 ‘중학교’와 ‘고등학교’도 걸맞다 싶은 이름은 아니겠지요. ‘대학교’로 나아가는 ‘밑학교(아래에 있는 학교)’가 아니거든요. 푸름이들이 다니며 푸른 넋과 사랑과 꿈을 키우는 마당이 중학교와 고등학교이니, ‘국민학교’를 ‘어린이학교’로 바로잡을 때에는, ‘중·고등학교’는 ‘푸름이학교’라든지 ‘푸른학교’로 바로잡아야 알맞아요.

  그러나, 사람들은 이런 대목까지 안 짚습니다. 일제강점기 찌꺼기 하나를 털면 끝이라고 여길 뿐입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찌꺼기조차 제대로 털지 못하는데, 더군다나 학교이름은 바꾼다지만,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다니면서 무엇을 보고 느끼며 배울 때에 아름답게 자라는가를 생각하지 않아요. 대학바라기에 앞선 초등 교육 과정으로 바라볼 뿐인 나머지, 초등학교에 영어교실을 열잖아요. 더 일찍 지식을 가르치면 지식을 더 일찍 머릿속에 담을 뿐인 줄 깨닫지 않아요. 아이들이 어린 나이에 배우며 익힐 몸가짐이나 꿈이나 사랑은 살피지 않아요. 아이들이 즐겁게 뛰놀 운동장이나 놀이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아요. 아이들을 학원 한 군데라도 더 보내려고 애쓸 뿐이에요. 아이들이 아이답게 고우며 맑은 눈망울이 싱그러이 빛나도록 어깨동무를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초등학교에서는 교사나 학생이나 ‘말’을 말답게 못 가르치고 못 배웁니다. 말을 말답게 가르치고 배우자면, 학교는 입시싸움터여서는 안 돼요. 학교가 지식공장이나 시험공장처럼 흐른다면, 아이들은 아무런 삶도 사랑도 꿈도 배우지 못해요. 지식공장이나 시험공장처럼 학교를 굴리면, 아이들은 톱니바퀴가 되고 말아요. 공장 부속품처럼 되거나 노예처럼 되고 말아요.


  아이들은 학교에서 ‘예쁜 토박이말’을 배워야 하지 않아요. 아이들은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마을에서 ‘아름다운 삶’을 배워야 해요. 어른들 스스로 아름답게 일구는 삶을 언제 어디에서나 지켜보며 즐길 수 있어야 해요. 시험성적으로 금을 긋는 학교일 때에는 아이들 마음이 망가져요. 중학교 예비지식을 초등학교에서 가르치려 하면 아이들 꿈이 무너져요. 대학바라기를 내다보며 일찌감치 학원에 집어넣으면 아이들 사랑이 사라져요.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꿈을 키우는 말을 어른한테서 배울 때에 즐겁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사랑을 나누도록 돕는 말을 어버이한테서 물려받을 때에 기쁩니다. 어린이는 어린이다운 삶을 일구도록 이끄는 말을 동무하고 살가이 나눌 때에 환하게 빛납니다.


  ‘학교(學校)’란 무엇일까요. 배우는 기관인가요? 가르치는 시설인가요? 배우는 집인가요? 놀고 배우며 살아가는 마당인가요? 지난 1996년에 비록 ‘어린이학교’나 ‘어린이배움터’라는 이름으로 바뀌지 못했지만, 학교에 ‘어린이’라는 이름을 넣을 때에 아름다우며 참뜻을 살릴 수 있다고 느낀 몇몇 분들이 ‘유치원’이나 ‘유아원’ 아닌 ‘어린이집’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제는 이 ‘어린이집’ 이름마저 ‘예비 초등 교육기관’처럼 바뀌었으나, 어린이가 다닐 배움집이기에 ‘어린이집’이에요. 어린이는 놀면서 자랍니다. 어린이는 놀고 또 놀며 다시 놀면서 몸과 마음이 큽니다. 어린이한테는 놀이터가 있어야 해요. 어린이는 마당을 누려야 해요. 어른도 놀이터가 있어야 해요. 어른도 마당을 누려야 해요. 어른은 마당 한켠에서 일하고, 어린이는 마당 한켠에서 놀아야 해요. ‘어린이마당’이 이 땅에서 슬기롭고 어여쁘게 이루어지는 모습을 꿈꿉니다. (4345.11.17.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국어사전 뒤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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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는 어떻게 쓰는가
[말사랑·글꽃·삶빛 35] 삶을 망가뜨리는 ‘영어 일기’

 


  하루를 돌아보면서 일기를 씁니다. 내가 한 일을 떠올리고, 내가 한 말을 되새기며, 내가 들은 말이랑 내가 본 모습을 아로새깁니다. 일기는 저녁이나 밤에 쓸 수 있으나 아침부터 쓸 수 있습니다. 아침부터 숱한 일을 겪는다면, 겪은 뒤 곧바로 일기장을 꺼내어 적을 수 있어요. 아침에 한 차례 쓰고 낮에 두 차례 쓰며 저녁에 세 차례 쓸 수 있어요. 일기는 몇 시 몇 분이 될 때에 짜잔 하고 쓰지 않아요. 스스로 내키는 때에 씁니다.


  일기는 날마다 쓸 수 있지만, 여러 날 띄엄띄엄 걸러서 쓸 수 있습니다. 누가 시켜서 쓰는 일기가 아니요, 누가 쓰지 말라 해서 안 쓰는 일기가 아닙니다. 남한테 보여주려고 쓰는 일기가 아니라, 스스로 되읽고 되새기며 되돌아보려는 뜻으로 쓰는 일기입니다.


  사람들이 쓰는 글 가운데 스스로 가장 빛나는 글이라면 바로 일기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쓴 일기를 읽을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 할 테지만, 일기를 쓸 적에는 내 삶을 스스로 북돋우려고 마음을 기울입니다. 일기를 쓰면서 내 꿈과 사랑과 믿음을 살찌우려고 마음을 쏟습니다.


  일기를 쓰며 상장을 받거나 상금을 타려고 하는 사람은 없어요. 일기를 쓰며 글자랑을 한다거나 글솜씨를 뽐내려는 사람 또한 없어요. 일기를 쓰는 까닭은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고 싶기 때문이에요. 일기쓰기를 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이 일기쓰기를 버릇으로 들이도록 이끄는 까닭이란, 일기 한 줄이 내 삶 한 자락을 밝히는 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은 아이들이 영어를 더 잘 쓸 수 있도록 이끌려고 일기쓰기를 시키기도 합니다. 참말 그래요. 아이나 어른이나 일기를 영어로 쓰면서 영어 솜씨를 한껏 북돋울 만합니다. 그러면, 거꾸로 생각해 봐요. 따로 ‘영어 일기쓰기’를 하기 앞서까지는 ‘한국말 일기쓰기’를 했을 테지요. 일기쓰기를 하면 무엇을 북돋울 수 있다고 하나요?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살찌울 수 있다고 이야기해요. 곧, 한국말로 일기쓰기를 하는 이들은 날마다 생각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삶을 새롭게 읽어요. ‘한국말 일기쓰기’를 하면서 ‘한국말 솜씨를 북돋운다’고는 이야기하지 않으나, 한국말로 일기쓰기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 ‘한국말 솜씨를 북돋운’ 셈이에요.


  다시 말하자면, 한국말로 일기를 쓰던 사람이 영어로 일기를 쓴다면, 영어 솜씨를 북돋우겠지요. 그렇지만, 영어 솜씨를 북돋우면서 ‘삶을 돌아보고 생각을 살찌우는’ 길하고는 동떨어져요. 영어 낱말을 더 많이 써 보고, 영어 말투에 익숙해지려고 애쓸 뿐, 영어로 ‘어떤 삶’을 돌아보고 ‘어떤 생각’을 살찌우려 하는가와 같은 대목은 소홀히 하고 말아요.


  어쩔 수 없겠지요. ‘영어를 더 잘 쓰려는 생각’이 되어 영어로 일기를 쓰는 이들은, ‘영어로 일기를 얼마나 잘 썼는가 검사를 받’아요. 나중에는 검사를 안 받아도 된다 하지만, 이제부터 ‘영어로 일기를 쓰기’는 삶을 가꾸는 글하고는 등지고, 삶을 빛내는 글하고도 고개를 돌리며, 삶을 밝히는 글하고도 멀리 떨어지고 말아요.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는 분들은 으레 이 대목을 가볍게 지나칩니다. 아이나 어른이나 ‘영어만 잘 쓰면 된다’는 생각에서 홀가분하게 벗어나지 못하고 맙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가 영어 제국주의로 치닫기 때문이라 할 테지만, 제아무리 한국 사회가 영어 미친바람이 분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하더라도, ‘한국말로 일기를 쓰든 영어로 일기를 쓰든’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생각을 살찌우도록 이끌어야지 싶어요. 삶을 돌아보지 못하면서 영어 솜씨만 북돋우면 스스로 무슨 도움이 될까요. 생각을 살찌우지 못하면서 영어 재주만 갈고닦는다면 스스로 어떤 보람을 누릴까요.


  영어 솜씨를 기르고 싶다면 ‘영어로 일기를 쓰기’보다는 ‘영어로 글을 쓰기’를 시켜야지 싶어요. 영어로 시를 쓰도록 이끌고, 영어로 짧은 산문을 써 보도록 시켜야지 싶습니다. 일기쓰기를 영어로 시켜서는 안 될 노릇이라고 느껴요. 일기쓰기는 누구나 ‘어릴 적부터 어버이한테서 배운 내 삶말’로 가장 맑고 밝게 써야지 싶어요. 영어를 잘 쓰고 싶으면 영어를 잘 쓸 수 있는 ‘다른 글’을 쓸 노릇이에요. 한국에서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사귀면서 살아갈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말을 가장 슬기롭고 아름답게 쓰는 밑길이 되면서, 한겨레 넋을 스스로 가장 북돋우고 살찌우는 ‘한국말로 일기를 쓰기’를 해야겠지요.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사람을 아끼고 어깨동무할 사람한테 영어로 일기를 쓰도록 시키는 일이란, 스스로 고운 넋과 얼을 모두 내버리거나 내팽개치면서 내 아름다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는 눈썰미를 짓밟는 짓이 되리라 느껴요. (4345.11.1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2 - 우리말 사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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