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는 ‘生방송’인가
[말사랑·글꽃·삶빛 4] 바로바로 생각하는 말

 


  오늘날 초등학교가 아직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1980년대 첫무렵, 어린 나는 동네 구멍가게에서 ‘해피라면’을 90원 치르고 사다 먹었습니다. 이무렵 라면은 오늘날처럼 ‘엠에스지’를 안 쓴다고 밝히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라면도 화학조미료와 화학성분이 많이 깃들지만, 이무렵에는 어떤 화학조미료와 화학성분을 쓰는지 따로 밝히지 않았어요. 이와 같은 라면을 거의 생각 없이 사다 먹었기에, 이제 어른이 된 내가 아이를 낳으면, 우리 아이들한테 아토피가 여러모로 나타날밖에 없다고 뒤늦게 깨닫습니다.


  내 어릴 적을 떠올리면 나와 동무들은 ‘두드러기’가 곧잘 나타났습니다. 이를테면 꽃가루라든지 닭고기라든지 마늘이라든지 어떤 먹을거리에 두드러기를 보이는 아이가 있었어요. 내가 국민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생으로 지낼 무렵, ‘두드러기’라는 말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이무렵 사람들은 이즈음 더 도드라지게 나타나거나 더 모질게 드러나는 두드러기는 여느 ‘두드러기’라 할 수 없고 ‘알레르기(Allergie)’나 ‘알러지’라고 따로 가리켜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아마 두 가지는 똑같다 할 수 없겠지요. 그렇지만, 지난날이나 오늘날이나 국어사전을 뒤적여 두 낱말을 찾아보았을 때에는, 두 낱말을 굳이 달리 써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요. 왜냐하면, ‘두드러기’를 영어로 옮기거나 독일말로 옮기면 어떻게 적어야 하느냐를 떠올린다면, 궁금함은 쉽게 풀려요.


  서양사람은 ‘수레’를 가리키는 영어 ‘car’를 오늘날 싱싱 내달리는 자동차한테도 똑같이 붙여요. 한국사람이 ‘자동차’라 할 때에는 1930년대에 처음 들어온 탈거리한테뿐 아니라 1960년대 탈거리나 2010년대 탈거리한테도 똑같이 ‘자동차’예요. 더 맵시나거나 더 빠르다 해서 ‘자동차’라는 이름을 바꾸지 않아요. 기름 먹는 자동차가 아니라 물이나 햇볕을 먹는 자동차가 나오더라도 똑같이 ‘자동차’예요. 곧, 낱말 하나를 고스란히 살리면서 새로운 모습과 구실과 쓰임새를 더 넓고 깊게 담아내는 셈입니다.


  한국말 ‘두드러기’는 새 모습과 구실과 쓰임새를 나타내는 자리에 쓸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을 기울여 낱말뜻을 넓히면 됩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으면 ‘두드러기’ 같은 낱말은 오늘날 아이들 병치레를 가리키기에 걸맞을 만한 낱말이 될 수 없어요. 시나브로 사라지다가는 국어사전에 자그마한 자국으로 남는 낱말로 머물겠지요.


  나는 어릴 적에 ‘해피라면’에서 ‘해피’가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둘레 어른 가운데 이 라면 이름을 따지거나 나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분이 없었습니다. 둘레 어른이 따지는 이야기는 딱 하나, ‘소고기라면’이 맞느냐 ‘쇠고기라면’이 맞느냐였어요.


  어른들이 두 가지 이름을 나란히 쓰니 아이인 나로서는 헷갈리기만 합니다. 참말 어느 쪽이 맞을까요?


  어른들 스스로 옳고 바르게 이름을 붙이지 않으며 툭탁거리셨는데, ‘소고기’이든 ‘쇠고기’이든 둘 모두 틀리다 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소의 고기”라 해서 “소 + 의 + 고기” 꼴로 ‘쇠고기’로 적을 수 있습니다. 한국말은 ‘-의’를 애써 안 붙이며 새말을 빚기도 하는 만큼 “소 + (-의) + 고기” 꼴로 ‘소고기’로 적어도 돼요. 말이든 돼지이든 양이든 그냥 말고기, 돼지고기, 양고기라고만 가리켜요.


  더 생각해 보면, 염소를 잡아서 삶는 고기라 하면 ‘염소고기’라 합니다. ‘염쇠고기’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다시금 생각합니다. ‘닭고기’라고 말하지 ‘닭의고기’라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달걀(북녘은 닭알)’이라 하지 ‘닭의알’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어요. ‘오리알’ 아닌 ‘오리의알’처럼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들풀 가운데 ‘닭의장풀’이 있어요. 흔히 ‘달개비’라 일컫는 풀인데, 닭장 밑에서도 잘 자란다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하더군요. 가만히 보면 올바르지 않다 싶은 ‘닭의장풀’ 꼴이에요. 왜냐하면 닭장 밑에서 잘 자라는 풀이라 하면 ‘닭의 장(에서 자라는) 풀’이 아닌 ‘닭장(에서 자라는) 풀’이라 이름을 붙여야 올바르거든요. 시골 흙일꾼이든 도시내기이든 ‘닭장’이라고 말하지 ‘닭의장’이나 ‘닭의 장’처럼 말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 가지 말씀씀이를 헤아리면,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살피거나 바르게 쓰지 못한다 할 만합니다. 띄어쓰기나 맞춤법을 높이 여기거나 꼼꼼히 따진다지만, 막상 띄어쓰기나 맞춤법이 제대로 이루어지는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다 할 수 있어요.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한국말 문법’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아이들이 한국말 씀씀이를 옳고 바르며 알맞게 배운다 하기 힘들다고 느껴요. 사랑스레 쓰는 말이 못 되고 슬프게 깎아내리는 말입니다. 아름다이 쓰는 글이 못 되고 아무렇게나 쓰는 글입니다.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합니다. 왜 라면공장 어른들은 ‘행복(幸福)라면’이라 이름을 못 붙이고 ‘해피(happy)라면’이라 이름을 붙였을까요. 아니, 왜 라면공장 어른들은 ‘즐거운라면’처럼 처음부터 한국말로 곱게 이름을 붙이는 길을 걷지 못했을까요. 누런쌀로 빚는 기름을 만드는 어느 공장에서는 ‘라온현미유’를 내놓습니다. ‘현미(玄米)’는 쌀겨 가운데 겉껍질만 벗겨 누렇게 보이는 쌀을 가리킵니다. 곧 ‘누런쌀’입니다. 속껍질까지 벗겨 하얗게 보이는 쌀은 흰쌀, 이른바 ‘백미(白米)’입니다. ‘현미유(-油)’란 현미로 짠 기름, 그러니까 누런쌀로 짠 기름인 셈입니다. 한국말로 이름을 붙이자면 ‘누런쌀기름’입니다. 포도씨로 기름을 짜면 ‘포도씨기름’이에요. 누런쌀로 기름을 짜 마련한 물건에 ‘라온’이라는 이름은 붙이지만, 뒤따르는 낱말은 더 살뜰히 보듬지 못해요.


  ‘라온’은 ‘즐거운’을 뜻하는 한겨레 옛말입니다. 곧, ‘라온현미유’란 “즐거운누런쌀기름”을 뜻하는 셈입니다. 예전에 ‘참나무통맑은소주’라는 술이름이 한 번 태어난 적 있으니, 이처럼 말뜻과 말결을 고이 살리며 이름을 붙이면 대단히 어여쁘지만, 이렇게 이름을 붙이며 말빛과 말삶을 살찌우자고 생각하는 어른이 아주 적습니다.


  길을 걷다가 어느 빵집에서 길가에 내놓고 팔던 ‘바로빵’을 본 일이 있습니다. 그날그날 바로바로 구워서 팔기에 ‘바로빵’이라 했어요. 이와 비슷한 꼴이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끓여 먹는다는 ‘즉석(卽席) 라면’이 있어요. 이른바 ‘즉석 식품’입니다. 어느 은행에서는 현금인출기를 ‘바로바로 코너’라고 일컫습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돈을 뽑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 어릴 적 동네 동무들이 “야 지금 바로 나와!” 하면서 부른 적 있습니다. 1980년대 일인데, 동무들과 한창 골목에서 노는데, 만화영화라든지 프로야구라든지 사내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무언가 텔레비전에서 나오면 “바로 나와!” 하고 외치면서 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서 보자고 했어요. 어른들도 으레 이런 말을 했어요. 텔레비전을 보면서 “어, 저기 바로 나오네!” 하고.


  나는 그때에나 요즈음에나 제대로 깨닫지 못했지만, 예전 동무들이나 어른들이 으레 톡톡 내뱉던 ‘바로’가 바로 ‘live’나 ‘生방송’을 일컫는 한 마디였습니다.


  일본사람은 영어 ‘live’를 한자를 빌어 ‘生放送’으로 번역했습니다. 한국사람은 일본사람이 영어를 번역한 낱말을 글꼴만 한글로 적어 ‘생방송’이라 말합니다. 처음에는 ‘생방송’이라 하는 일본 한자말이 아무렇지 않게 쓰였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이 일본 한자말을 그대로 쓰면 나쁘다 하여 ‘현장 방송’으로 고쳐써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국립국어원 국어사전 풀이를 살펴도 ‘생방송’은 바로잡아야 할 낱말로 다룹니다. 그렇지만, 방송국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생방송’을 ‘현장 방송’으로 고쳐쓰거나 바로잡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아마 ‘현장 방송’이라는 낱말이 썩 안 어울린다고 여겨 안 쓰거나 아예 눈길을 안 두기 때문일 텐데, 이러하다면 한국 방송국에 알맞을 만한 새 한국말을 지어야 하겠으나, 새 낱말을 지으려고 생각을 기울이는 사람 또한 없습니다.


  곰곰이 헤아린다면, 방송국 일꾼도 스스로 모르게 “자, 이제 바로 찍겠습니다.” 하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말마디에서 ‘바로’는 ‘현장(現場)’을 가리킵니다. ‘바로’는 ‘이곳’과 ‘이때’를 아울러 가리키는 낱말입니다. 곧, 일본 한자말 ‘생방송’을 한국말답게 적바림하려 했다면 ‘현장 방송’보다는 ‘바로 방송’이라 적바림했어야 한결 걸맞았으리라 느껴요. 텔레비전 화면 한쪽에 ‘生’이나 ‘생’이나 ‘live’라는 낱말을 넣기보다는 ‘바로’라는 낱말을 넣으면 참 잘 어울립니다.


  다만, ‘바로’가 아무리 잘 어울린다 하더라도 이 낱말을 스스로 써 버릇하지 않으면 익숙하게 쓰기 어렵습니다. 여느 때에 제대로 이 낱말을 쓰지 않으면, 이 낱말 쓰임새가 얼마나 넓은지 헤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알맞게 쓰지도 못합니다.


  생각을 할 때에 사랑스럽게 쓰는 말입니다. 생각을 기울일 때에 아름답게 빚는 말입니다. 생각을 펼칠 때에 슬기롭게 가다듬는 이야기입니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생각하는 꿈이 없습니다. (4345.4.8.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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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2-04-09 15:16   좋아요 0 | URL
이 글을 보며 생각한 건데요, 이런 바른 한국말 사용은 몇몇 사람들이 애쓸 게 아니라
아예 방송국에서 자연스럽게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전파력이 강할 것 같아요.

휴대폰이라는 말을 요즘 많이 사용하는데, 이것도 잘못된 표현인 것 같아요. 휴대 라는 한국말과 폰이라는 영어의 합성어라서요. 그냥 영어로 핸드폰이든지 한국말로 휴대전화 라고 해야 할 것 같아요. ㅋ

무엇보다 된장님처럼 우리말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게 우선 과제이겠죠. ㅋ

숲노래 2012-04-09 17:24   좋아요 0 | URL
방송국은 시청율로 광고비를 벌어들여야 하니까,
말이든 넋이든 삶이든
옳게 바라보도록 애쓸 수 없는 얼거리예요.

그런데, 방송국뿐 아니라,
여느 자리 여느 사람들 또한
하루하루 밥벌이 일자리에 매달리면서
스스로 말과 넋과 삶을
사랑스레 보듬는 데에서
자꾸 동떨어지고 말아요...

그러니까, 한국에서는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아요...
 

찻집과 커피숍
[말사랑·글꽃·삶빛 3] ‘세 가지 말’ 쓰는 한국사람

 


  한국사람은 세 가지 말을 씁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옳게 깨닫지 못합니다만, 한국사람은 세 가지 말을 쓰며 살아갑니다. 첫째,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씁니다. 둘째, 한국사람은 한자말을 씁니다. 셋째, 한국사람은 미국말을 씁니다.


  다시금 말하자면,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이라고 여기는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은 ‘중국이나 일본에서 쓰는 한자말’, 곧 중국말이나 일본말을 한자말로 삼아 씁니다. 한국사람은 영국 영어 아닌 미국 영어, 곧 ‘미국사람이 쓰는 말’인 미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말 그대로 한국말이라 할 테지만, 오늘날 한국사람 한국말은 참다이 한국말이라 하기 어렵습니다. 외국사람이 한국에 와서 한국말을 익힌다 할 때에는 ‘한국말 아닌 말’이 너무 많기 때문에 무척 힘들어 합니다. 외국사람은 ‘한국말’에다가 ‘한자말’이랑 ‘미국말’을 함께 배워야 하는 만큼, 자그마치 세 나라 말을 한꺼번에 익혀야 해요. 이는 서양사람이 일본말을 익힐 때에 한자까지 익혀야 하느라 힘들어 하고, 중국말을 익힐 때에도 한자를 나란히 익혀야 하니 힘들어 하는 일하고 같습니다.


  말만 배울 때에는 일본말이나 중국말이나 힘들지 않아요. 말을 담는 글까지 함께 배우려 하니, 글이 한 갈래가 아니라 힘들어 합니다. 일본사람은 히라가나하고 가타가나만 써도 넉넉하지만, 여러모로 한자가 깃들면서 곱배기로 글을 익히고 맙니다. 중국사람도 이와 같아요. 그래서, 중국사람 가운데에는 글을 모르는 사람이 퍽 많습니다. ‘한자’를 모르고 ‘중국말’을 하는 사람이 무척 많습니다. 거꾸로, 한국에도 ‘한글’을 모르고 ‘한국말’을 하는 사람이 아직 꽤 있어요.

 

 ㄱ. 한국말
 ㄴ. 한자말
 ㄷ. 미국말

 

  무엇보다 한국사람은 한국사람이 쓰는 말을 잘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말을 모르고도 말을 한다지만, 좀 뚱딴지 같은 소리로 들을는지 모르는데, 참말 말을 모르고도 말을 하는데, 스무 살이 되건 서른이나 마흔이나 쉰 살이 되건, 한국사람은 스스로 말을 옳고 똑똑히 익히도록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말을 옳게 알지 못하는 스물이나 서른 살이라 한다면, 이 나이에 사랑하는 짝꿍을 만나 아이를 낳은 뒤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에서도 말을 익히지만, 이에 앞서 제 어버이한테서 말을 익혀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 말투와 말씨를 물려받아요. 제 어버이가 옳고 바르게 말하는 매무새라면 아이들 또한 옳고 바르게 말하는 매무새예요. 제 어버이가 핀란드사람이면 핀란드말을 물려받아요. 제 어버이가 몽골사람이면 몽골말을 이어받아요. 제 어버이가 경상도사람이면 경상도말을 물려받겠지요. 제 어버이가 서울사람이면 서울말을 이어받을 테고요.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그릇된 말투로 말을 하더라도 ‘그릇된 줄’ 모르고 물려받습니다. 아이들은 제 어버이가 거칠거나 일그러진 말글을 일삼더라도 ‘거칠거나 일그러진’ 줄 모르며 이어받습니다. 아이들이 뇌까리는 막말은 모두 어른들이 으레 뇌까리는 막말이에요. 그러니까, 요즈음 아이들이 바르고 참다우며 좋고 보드라이 말하기를 바란다면, 어른들부터 누구나 바르고 참다우며 좋고 보드라이 말하도록 삶을 고치고 바로잡으며 추슬러야 합니다.


  마흔이나 쉰 살이 되어도 내 말글을 다스리지 못하면, 또 예순이나 일흔 살이 되어도 내 말글을 다스리지 못하면, 내가 사귀거나 만나는 사람한테 잘못된 말투나 뒤틀린 말씨를 물들입니다. 귀여운 손자 손녀를 만난 자리에서 ‘엉터리로 뿌리내린’ 말투를 들려주면 귀여운 손자 손녀는 할아버지 할머니한테서 ‘엉터리로 뿌리내린’ 말투를 배워요. 일흔이나 여든 살 나이라 하더라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말을 옳게 살피고 바르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들한테 슬픈 모습을 물려줄 뿐 아니라, 비틀리거나 일그러지거나 잘못된 말로 살아가는 어른부터 스스로 비틀리거나 일그러지거나 잘못된 매무새가 몸에 박힌 채 떨어지지 않으니 더없이 슬프거든요.

 

 ㄱ. 찻집
 ㄴ. 다방
 ㄷ. 커피숍

 

  한국사람은 세 가지 말을 쓴다고 밝혔습니다. 첫째, 한국말로는 ‘찻집’입니다. 둘째, 한자말로는 ‘다방(茶房)’입니다. 셋째, 미국말로는 ‘커피숍(coffee shop)’입니다. ‘차’라는 말은 ‘茶’라는 한자라 하지만, “차를 마셔요” 하고 말하는 사람 가운데 이 낱말이 한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차는 그냥 ‘차’입니다. 그러나 ‘다방’이라 할 때에는 달라요. ‘다방’이 무엇인지 알자면 ‘다’와 ‘방’이 어떤 낱말인가를 새롭게 새겨야 합니다. ‘커피숍’도 이렇게 말마디를 하나하나 뜯어 살펴야 합니다.


  빵집을 두고 ‘빵집’이라 하면 빵을 파는 곳입니다. ‘제과점(製菓店)’이라 하면 낱말을 뜯어야 합니다. ‘베이커리(bakery)’라 할 때에도 새삼스레 낱말을 뜯어야 해요. 언제부터인지 스며든 ‘브런치(brunch)’라는 미국말 또한 낱낱이 뜯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은 한자말로 ‘점심(點心)’이라 했지만, 예부터 익히 ‘낮밥’이라고들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아침-낮-저녁’이듯 ‘아침밥-낮밥-저녁밥’이기 때문입니다. 시골 흙일꾼만 ‘낮밥’이라 말하지 않았어요. 말놀이 삼아 ‘아점’이라고도 했는데, 옳게 말놀이를 했다면 ‘아낮’이라 해야 올바르겠지요. 그러니까, ‘브런치’는 한국말 아닌 미국말이면서 한국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쓰는 낱말입니다. ‘점심’이나 ‘다방’이나 ‘제과점’은 한국말 아닌 한자말이지만, 한국사람 스스로 여느 한국말을 잊은 채 이냥저냥 쓰는 낱말입니다. 이리하여, 한국말을 배우려 하는 외국사람은 이 낱말들을 모조리 외워야 합니다. 세 갈래 말을 하나하나 외우면서 한국사람하고 사귀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을 옳게 살피지 못하고 제대로 가누지 않은 나머지, 이제 ‘커피숍’하고 ‘다방’하고 ‘찻집’은 다르다 여기는 사람이 생깁니다. ‘낮밥’이랑 ‘점심’이랑 ‘브런치’는 다르다고 여기는 사람이 생깁니다. 이와 함께, ‘부엌’이랑 ‘주방(廚房)’이랑 ‘키친(kitchen)’은 모두 다르다 여기는 사람이 생겨요.


  한국사람 스스로 틀을 세웁니다. 서양에서 새로 들어온 무언가를 문화나 문명으로 누릴 때에는 서양에서 쓰는 낱말을 써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일본을 거쳐 들어오는 서양 문화나 문명 또한 서양말을 고스란히 살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한국사람은 겉모습은 한국사람이지만, 한국사람답게 한국말을 나누던 삶과 매무새를 스스로 잃습니다. 낱말도 잃지만, 낱말을 엮는 말투와 말씨 또한 잃습니다. 한국말에는 ‘현재진행형’이나 ‘과거분사’ 꼴이 없는데, 영어를 배우고 외국말을 익히면서 그만 ‘현재진행형 번역 한국말’이나 ‘과거분사 번역 한국글’을 써요. 일본사람이 일본말을 하며 붙이는 ‘の’를 섣불리 ‘-의’라는 토씨로 바꾸어 아무 곳에나 쓰는데다가, 미국사람이 미국땅에서 미국 이웃이랑 주고받을 때에 쓰던 미국말을 거침없이 받아들입니다.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 중국 이웃이랑 주고받거나, 일본사람이 일본땅에서 일본 이웃이랑 주고받던 한자말까지 아무렇지 않게 맞아들입니다.

 

 사랑방 안방
 곳간 뒷간

 

  곰곰이 생각하면, 한국말에는 ‘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느 고을에서 여느 흙을 일구던 여느 사람들 여느 살림집에는 ‘방’이 없었어요. 한자말로 ‘초가삼간’이라 했어요. 여느 사람들은 한자를 안 쓰고 한국말만 썼으니, 여느 사람한테는 그저 ‘풀집’이지만, 여느 사람을 바라보던 지식인과 권력자는 중국글을 빌어 ‘草家三間’이라 적었습니다. 곰곰이 옛 흙집을 헤아립니다. 옛 흙집에는 참말 ‘방’이 없습니다. 중국글 ‘草家三間’처럼, 한국땅 여느 한국사람 살림집은 ‘간(칸)’만 나눕니다. 곳간, 뒷간, 정지간처럼 이야기했어요. ‘사랑방’이나 ‘안방’은 기와를 얹은 집에서 살아가던, 돈과 이름과 힘이 있던 사람들 살림새입니다. 이들은 중국글을 들여와서 누리던 사람이요, 중국글을 들여와 중국글로 집살림을 가리켰습니다. 이 흐름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늘날 아파트에는 ‘중국글인 한자’ 아닌 ‘서양글인 영어(또는 미국말)’로 이름을 붙입니다.


  나한테는 외국에서 살다 한국으로 온 벗이 없어 잘 모릅니다만, 한국에 찾아와 한국사람을 사귀는 외국사람은 여러모로 머리가 아프리라 생각합니다. 영화 하나를 보러 간다 할 때에도, 한국사람은 ‘영화’라는 말마저 안 써 버릇해요. ‘무비’에다가 ‘씨네’라고까지 합니다. 한국에서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노래’라는 말을 안 쓰고 ‘음악(音樂)’이라는 한자말이랑 ‘뮤직(music)’이라는 미국말을 써요. 노래를 조금 손질하는 일, 이를테면 ‘노래고치기’를 놓고 예전에는 ‘편곡(編曲)’이라는 한자말로 가리켰지만, 요사이는 미국말 ‘리메이크(remake)’를 무척 널리 씁니다.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말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국말로 한국땅 삶자락을 나타내지 않습니다. 한국땅에서 좋은 한국사람을 동무나 이웃으로 사귀면서 내 넋과 얼을 아름다이 빛내거나 북돋우는 길을 살피지 않습니다.
 (4345.4.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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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4-03 11:00   좋아요 0 | URL
사방으로 찔리는 좋은 글이세요...
배워온 것도, 지금 접하고 읽는 것들도 다 섞인 말들이라 어렵네요. ㅠ

숲노래 2012-04-03 16:12   좋아요 0 | URL
워낙 모두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좋게 다스리기'란 어려울 노릇이지만,
'좋게 다스리는 삶과 말'을
이야기하거나 생각하지 않으면
그대로 굳겠지요...
 

 

 

‘참말’은 하나
[말사랑·글꽃·삶빛 2] ‘팩트’와 강용석

 


 나는 강용석이라는 분이 누구인지 모릅니다. 이분이 어떠한 일을 하며 살았고, 어떠한 생각을 펼친다거나, 앞으로 어찌 지낼는가를 살피지 않으며, 딱히 알고 싶은 대목은 한 가지조차 없습니다. 나로서는, 또 우리 집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아이들한테까지도, 이분 넋이나 얼이 조금도 스며들지 않습니다.

 

 그나저나, 2012년 첫머리를 뜨겁게 달구는 사람으로 이름 석 자를 올리는 강용석 님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2013년에도 이렇게 뜨겁게 달구는 이름 석 자가 될까요. 2022년에는 어떠할까요. 2032년이나 2202년에는 어떠할까요. 앞으로 2412년이나 2712년에는 또 어떠할는지요.


 ‘팩트’ 한방에 화성으로 날아간 강용석 (한겨레 2012.2.25.)


 누리편지를 열어 보려고 셈틀을 켜던 며칠 앞서, ‘팩트’라는 낱말을 큼직한 사진 밑에 작은따옴표까지 달아서 띄운 글 첫 줄을 보았습니다. 보려고 해서 보지는 않았으나, 한국말로 곱게 이름을 붙인 신문에서 띄운 머릿기사에 적은 낱말이 ‘팩트’였기 때문인지, 이 대목이 갑자기 내 눈에 뜨였구나 싶습니다.

 

 왜 ‘팩트’일까 문득 궁금했으나, 궁금하기보다는 슬펐습니다. 아니, 슬프다고 할 수도 없어요. 껍데기는 한글이면서 알맹이는 한국말 아닌 낱말과 말투가 얼마나 넘치는데요. 어설피 뭇칼질을 하며 깎아내리는 한겨레 말글이 얼마나 많은데요. 슬프게 스러지고 아프게 사라지는 한겨레 말글은 얼마나 많은가요.

 

 참말, ‘참말’이 죽습니다. 참으로, ‘참’이 숨을 거둡니다.

 

 거짓말이 날뜁니다. 거짓이 춤춥니다.

 

 참말은 노래하지 못하고, 거짓말이 노래합니다. 참이 살아나지 못하고 거짓이 들뜹니다.

 

 참사랑으로 참삶을 일구어 참넋을 아끼는 참뜻으로 빚는 참말을 보살필 줄 아는 참사람을 이 나라에서 찾아보는 일이란 부질없는 꿈일 수 있습니다. 아니, 둘레에서 참말을 참사랑으로 아끼는 참사람을 찾지 말고, 나 스스로 조용히 살아가며 내 살붙이들이랑 참말로 참사랑을 나누면 넉넉하겠지요. 먼발치에서 찾을 참말이 아닌 내 삶에서 스스로 누리는 참말이면 흐뭇하겠지요.


 ‘참말’ 한 마디에 입을 다문 아무개
 ‘참말’ 한 마디에 할 말 없는 아무개
 ‘참말’ 한 마디에 ‘거짓말’ 들통난 아무개


 부디 거짓스러운 껍데기 스스로 거둬들여, 좋으며 참다운 삶을 착하게 누리는 이웃이요 동무라면 좋겠습니다. 나도 너도 우리도, 서로서로 참다운 이야기를 참다이 빛나는 말글로 꽃피우는 하루라면 좋겠습니다. (4345.2.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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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27 10:59   좋아요 0 | URL
너무 좋은 글입니다.
구절구절이 다 와닿습니다. 저는 YTN 뉴스에서
날씨 안내하기 전 화면에 '웨더' 라고 나오는 이 부분이, 볼 때마다 거슬려 미치겠습니다.

숲노래 2012-02-27 19:37   좋아요 0 | URL
아, 그러기도 하나요?
웨더라...
좀 많이 지나치네요 에궁...

페크pek0501 2012-02-27 12:22   좋아요 0 | URL
공감합니다. 어제 티브이를 보니 리액션이란 말이 많이 나오는데, 거슬렸어요. 꼭 그런 말을 써야 하나, 싶어요. ㅋㅋ

숲노래 2012-02-27 19:37   좋아요 0 | URL
리액션은
일본만화 때문에
크게 물들었구나 싶어요.
아니, 일본 연예방송에서도
이런 말은 자주 나오겠지요...
 

새로 생긴 어느 누리신문에서 우리 말 이야기를 써 달라는 말을 듣고는,

새롭게 우리 말 이야기를 쓰자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새 글은 새 게시판에!

이리하여,

새 우리 말 이야기는

새로운 이름, "국어사전 뒤집기"로 붙입니다 ㅋㅋㅋ

 

..

 

송창식 님한테 트리뷰트하는 뮤직
[말사랑·글꽃·삶빛 1] 좋은 노래를 바치고 싶어요

 


 노래하는 송창식 님을 기리는 노래잔치를 보고 나서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송창식 님을 ‘노래하는 사람’, 곧 ‘노래꾼’이라 생각합니다. 송창식 님이 지난날 부르거나 지은 노래를 한 자리에 그러모아 젊은 노래꾼이 ‘새롭게 엮어’서 부릅니다. 그러니까, 여러 노래꾼이 송창식 님 노래삶을 ‘기리’는 뜻으로 ‘노래잔치’를 열었어요. ‘노래한마당’이라 할 만합니다.

 

 국어사전을 들추면, ‘기리다’ 뜻풀이를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추어서 말하다”로 적습니다. 뜻풀이에 ‘위대(偉大)한’이라는 한자말이 나타나서 다시 국어사전을 들추어 ‘위대’를 찾습니다. ‘위대’는 “도량이나 능력, 업적 따위가 뛰어나고 훌륭하다”로 적습니다. 곧, ‘기리다’ 뜻풀이는 겹말인 셈입니다. 잘못되었어요.

 

 이러한 뜻풀이를 살피면서 ‘뛰어나다’라는 토박이말을 ‘偉大하다’라는 한자말로 적는 줄 깨닫습니다. 곧, 한겨레 사람들은 두 가지 말을 한 자리에서 쓴다 할 수 있어요.

 

 이번에는 국어사전에서 ‘트리뷰트(tribute)’라는 낱말을 찾아봅니다. 국어사전에는 이 낱말이 안 실립니다. 국어사전이니까 영어사전에 실을 낱말은 안 실어야 옳겠지요. 영어사전에서 ‘tribute’라는 낱말을 찾습니다. 이 낱말은 “(특히 죽은 사람에게 바치는) 헌사나 찬사”라고 풀이합니다. 이제 ‘헌사(獻辭)’와 ‘찬사(讚辭)’라는 한자말이 궁금합니다.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우리 국어사전에는 한국말 아닌 중국말(한자말)이 참 많이 실립니다. 한자사전 아닌 국어사전, 곧 ‘우리 말 사전’이지만, 참말 우리 말이라 할 만한 낱말을 실었는지 온갖 말을 골고루 실었는지 알쏭달쏭해요.

 

 ‘헌사’는 “축하하거나 찬양하는 뜻으로 바치는 글”이라 합니다. ‘찬사’는 “칭찬하거나 찬양하는 말이나 글”이라 합니다. 이제는 ‘찬양(讚揚)’이라는 낱말이 궁금합니다. 다시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찬양’은 “아름답고 훌륭함을 크게 기리고 드러냄”이라 풀이합니다. 이리하여, ‘헌사-찬사-찬양’으로 이어지는 한자말은 모두 “아름답거나 훌륭한 누군가를 크게 기리는 일”을 가리키는 자리에 쓰는 줄 깨닫습니다. 한 줄로 갈무리해 보겠습니다.


― 노래하는 송창식 님을 기리는 노래잔치
― 노래꾼 송창식 님한테 바치는 노래마당


 나는 이 글월을 얻고 싶어 국어사전과 영어사전을 여러 차례 뒤적입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꾼 송창식 님과 얽힌 ‘노래말’을 내 나름대로 예쁘게 밝히고 싶어 이렁저렁 생각을 기울입니다.

 

 왜냐하면, 얼마 앞서 “송창식 선생님께 트리뷰트하는 음악”이라는 말을 들었거든요. 그리고, 어느 노래꾼이 “아들아, 아빠가 뮤직 열심히 해서 받은 상이야” 하고 말하는 모습을 보았어요.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대로 말을 하겠지요. 누구나 둘레에서 마주하는 사람들하고 생각을 주고받는 말로 생각꽃을 피우겠지요. 송창식 님은 ‘죽은 이’가 아닌 ‘산 이’인 만큼, 영어 낱말뜻을 헤아리더라도 ‘트리뷰트한다’고 말하는 일은 옳지 않아요. 유치원을 다닌다는 아들한테 아버지가 ‘뮤직’을 바지런히 한다고 말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잘 모르겠어요.

 

 송창식 님을 곱게 기리면서 좋아하고 싶습니다. 우리 집 아이들이나 이웃 아이들하고 즐거이 노래를 부르면서 노랫말에 담긴 어여쁜 꿈과 사랑을 나누고 싶습니다. (4345.2.6.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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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2-06 19:21   좋아요 0 | URL
어제인가 그제인가, TV에서 송창식 님의 <불후의 명곡>이 있었는데
새삼 송창식 님의 노래가 얼마나 좋던지, 넋을 빼고 들었어요....
전 <사랑이야>를 너무 좋아해요.

노래꾼 송창식 님을 기리는 노래 마당. 저는 이게 좋네요.
잔치나 마당 말고 다른 말은 없을까요? 네? 머랄까, 많이 당기지는 않아서요.. 헤헤.

숲노래 2012-02-07 05:22   좋아요 0 | URL
익숙하지 않아서 당기지 않기 마련이에요.
익숙하지 않은 까닭은
듣기 어렵거나 스스로 생각하며 말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노래나라, 노래누리, 노래물결, 노래꽃, 노래나무...
이름은 누구나 가장 아름답다 여기는 대로 붙이면 되니까요,
이러한 틀을 생각할 수 있으면 돼요~

재는재로 2012-02-06 21:18   좋아요 0 | URL
왜불러 고래사냥 이두노래가 가장 좋던데 ㅋㅋ

숲노래 2012-02-07 05:24   좋아요 0 | URL
어릴 적 송창식 님을 버린 어머니 때문에
응어리진 아픔을 담은 <왜 불러>는
그야말로 송창식 님 스스로와 당신 어머니한테 바치는
슬프면서 아름다운 노래예요.

<왜 불러> 노래말은,
송창식 님 어머니가 나중에 송창식 님이 고등학생이 되고서야
얼굴을 보고 싶다며 찾아와서 대문 앞에서
자꾸 당신 이름을 불러서
너무 괴로웠다면서 지은 노래라고 하거든요.

이 노래말을 곱씹으며 이 노래를 들으면
얼마나 가슴이 미어지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