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기로운 사람
[말사랑·글꽃·삶빛 23] 내 나름대로 사랑하는 말

 


  어린이 눈높이로 엮은 그림책 《흙 속에 누가 살아?》(웃는돌고래,2012)를 읽다가 11쪽에서 “산타가 건망증이 심한 거 알고 있지요?”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어린이책뿐 아니라 어른책에서도 쉽게 볼 만한 글월입니다. 어린이도 어른도 이 같은 글월을 두루 씁니다.


  책을 살며시 덮고 생각에 잠깁니다. 이러한 글월이 잘못이라고 따질 수 없습니다. 글 얼거리 가운데 몇 군데 손질하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으나, 글쓴이 스스로 이녁 글월을 사랑스레 손질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글월은 앞으로도 곳곳에 수없이 쓰입니다.


  내 나름대로 헤아려서 이 글월을 다시 적어 봅니다. 나라면 이러한 글월을 어떻게 쓸까 하고 생각을 기울입니다. 먼저, 나는 “심(甚)한 거” 같은 글월을 안 씁니다. “심히 실망(失望)스럽다”느니 “심하게 아프다”느니 하고 둘레에서 말하지만, 나는 “몹시 서운하다”나 “매우 아프다”처럼 말합니다. 그런데 바로 앞에 ‘건망증(健忘症)’이라고 나오니, 이 자리에서는 ‘심하게’를 ‘몹시’나 ‘매우’로 고쳐쓰지 않습니다. 깜빡깜빡 잘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쓰는 ‘건망증’이니 ‘깜빡증(-症)’이라든지 ‘깜빡병(-病)’으로 적바림할 수 있고, 말뜻 그대로 “잘 잊는다”나 “곧잘 깜빡거린다”처럼 적바림해도 돼요. 아이나 어른이나 으레 쓰는 ‘까먹다’를 써도 되고요. 한국말 ‘까먹다’는 비속어가 아니에요. 널리 쉽게 쓰는 말이에요. 조금 더 얌전하게 쓴다면 ‘잊다’일 뿐이에요. 그러니까 보기글 앞쪽은 “깜빡증이 대단한 줄”로 손질하거나 “잘 잊어버리는 줄”이나 “곧잘 까먹는 줄”로 손질해 봅니다. 다음으로 “알고 있지요”는 서양말 현재진행형을 잘못 적은 꼴이면서 일본말 ‘中’을 어설피 옮긴 꼴이에요. “길을 가는 중이에요”나 “길을 가고 있어요”나 모두 잘못 쓰는 말투예요. “길을 가요”라고 적어야 올발라요.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와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도 잘못 쓰는 말투예요. ‘中’을 ‘-고 있는’이나 ‘가운데’로 옮긴다 해서 한국말이 될 수 없어요. 서양말은 서양말이고 일본말은 일본말이거든요. 서양말에서 흔히 나오는 관사 ‘a(an)’를 ‘한’으로 옮겨 “a book”을 “한 책”으로 적으면 몹시 어설퍼요. “한 세일즈맨의 죽음” 같은 번역은 번역이라 하기 어려운 번역이기도 해요. 그냥 “세일즈맨의 죽음”이라 옮기든지 “어느 세일즈맨의 죽음”이라 옮겨야 맞아요. 한국말에는 관사가 없으니, 한국말에 억지로 ‘관사 같은’ 말씨를 넣는 일은 여러모로 안 어울려요. 곧, 한국말에 없는 현재진행형 꼴을 함부로 쓰는 일도 한국말하고 어울릴 수 없어요. 이리하여, 나는 이 글월 한 줄을 “산타가 자주 깜빡거리는 줄 알지요?”라든지 “산타가 곧잘 잊어버리는 줄 알지요?”처럼 적을 수 있습니다.


  어떤 말을 하든 나는 내 나름대로 말을 합니다. 내가 오늘 이곳에 서기까지 스스로 익히고 살피며 가다듬은 대로 말을 합니다. 책에서 배운 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스승이나 어른이 들려주는 대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장 사랑할 만한 말을 스스로 생각해서 익힙니다. 내가 가장 즐길 만한 말을 스스로 살피면서 배웁니다.


  때로는 책을 읽으며 깨닫습니다. 때로는 이야기를 나누다가 깨닫습니다. 때로는 누군가 슬그머니 일깨워 줍니다. 그런데, 책을 읽든 이야기를 나누든 누가 일깨우든, 내가 알아채거나 느껴야 받아들여요. 나 스스로 내 말삶을 북돋우려는 마음일 때에 내 말밭을 일굴 수 있어요.


  내 손을 움직여 밥술을 뜹니다. 내 다리를 움직여 길을 걷습니다. 내 눈알을 굴려 이곳저곳 바라봅니다. 내 마음을 기울여 사랑을 나눕니다. 이와 같은 흐름하고 똑같이, 나는 내 넋을 가만히 헤아리면서 내가 나눌 말을 고릅니다. 내 얼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내가 쓸 글을 가눕니다.


  생각할 때에 말이 태어납니다. 생각할 때에 말이 꽃피울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생각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가슴속에 슬기로운 생각이 있습니다. 내가 깨우는 생각이고, 내가 가꾸는 생각이요, 내가 돌보는 생각이며, 내가 나누는 생각입니다.


  곱게 생각해 보셔요. 곱게 주고받을 말을 빚을 수 있어요. 사랑스레 생각해 보셔요. 사랑스레 주고받을 말을 길어올릴 수 있어요. 참다운 길을 살피며 생각해 보셔요. 참답게 주고받을 멋스러운 말을 낳을 수 있어요. (4345.10.4.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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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K’와 ‘스낵바’
[말사랑·글꽃·삶빛 29] 푸름이 앞에서 어떤 말을 쓰는가

 


  종이를 사러 문방구에 찾아간 어느 날 ‘miilk’라는 이름이 큼직하게 적힌 꾸러미를 보았습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들여다보니, ‘우유’를 가리키는 ‘milk’를 바탕으로 붙인 이름이었습니다. 우유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느낌을 알리고 싶었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왜 ‘우유 닮은 빛깔’을 ‘우유빛(우윳빛)’처럼 안 적고 ‘miilk’라 적어야 하는지 아리송합니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여러 고등학교 푸름이가 모여 ‘우리 말글 이야기마당’을 여는 자리에 찾아가 보았습니다. 푸름이들한테 한국말은 무엇이고 한국말을 쓰는 삶이란 무엇이요 한국말을 생각하는 길이란 어떠한가 하고 이야기합니다.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는데, 이야기마당 꾀한 분이 다들 배가 출출하지 않겠느냐면서 빵과 우유를 마련했다고, 이야기터 한켠에 놓았으니 모둠마다 두 사람씩 나와서 가져가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푸름이들한테 말씀하는 그분은 ‘한쪽’에 놓았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양 사이드’에 놓았다고 말씀합니다.


  이날 자리가 여느 이야기마당이 아닌 우리 말글 이야기마당이지만, 그분은 늘 쓰던 말투 그대로 말씀한 셈입니다. 어느 모로 보면 슬프지만, 어느 모로 보면 투박한 모습이에요. 아무것 아니라 할 만한 말마디인데,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말매무새를 어떻게 추스르고 말투를 어떻게 가다듬어야 아름다운가를 거의 못 느끼거나 생각을 안 하는구나 싶어요.


  종이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분들은 왜 ‘miilk’ 같은 이름을 내세워야 했을까요. ‘세계화’ 때문에? 이제 영어는 바깥말 아닌 한국말하고 나란히 쓸 만한 말이기에? 영어를 널리 쓰고, 한글 아닌 알파벳으로 물건이름이나 회사이름을 붙여야 ‘세계화’가 될까요? 어떻게 해야 ‘세계화’이고, 세계화로 나아가는 길이란 우리 삶을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며 뜻있게 갈고닦는다 할 만할까요?


  우유는 ‘牛乳’ 소리값을 한글로 적은 낱말입니다. ‘牛乳’란 곧 ‘소젖’입니다. ‘소젖’이라 말하면 남우세스럽거나 어딘가 알맞지 않다 여기는 분이 있을는지 모르는데, 어머니가 아기한테 먹이는 젖은 ‘어머니젖(엄마젖)’입니다. ‘모유(母乳)’가 아니에요. 양이 제 새끼한테 먹이는 젖은 ‘양젖’입니다. 염소가 제 새끼한테 먹이는 젖은 ‘염소젖’이에요. 목숨을 살리는 젖이요, 목숨을 밝히는 젖입니다. 이와 같은 낱말을 한국사람 스스로 알맞고 바르며 씩씩하게 쓰지 않는다면, 한국말은 어디에 서야 할까 궁금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안 쓰고 바깥말만 아끼거나 즐겨쓴다면, 한국말은 어떤 모습과 빛깔이어야 할까 궁금합니다.


  경기도 파주에서 푸름이들을 만난 이듬날, 기차를 타고 고흥 시골집으로 돌아갑니다. 기차 때를 맞추느라 ‘KTX’를 탑니다. ‘한국고속철도’를 일컫는 이름을 ‘ㅎㄱㅊ’이든 ‘한고철’이든 알맞게 간추려 이름을 붙이지 않고 알파벳으로 이름을 붙였다 해서, 맨 처음에는 이 이름을 놓고 여러 곳에서 나무랐어요. 그러나, 한 해 두 해 열 해 남짓 흐르며 모두들 이 알파벳 이름을 익숙하게 받아들여요. 이제 아무도 ‘KTX’를 나무라지 않아요. 빨리 달리는 기차라 하면, 빛처럼 빠르다고 빗대어 ‘빛누리’라든지 ‘빛나래’처럼 이름을 붙일 만했으나, 이처럼 생각을 빛낸 어른은 찾아볼 수 없어요. 아무튼, ‘고속철도’ 아닌 ‘KTX’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안내방송을 하는 분이 ‘스낵 바’를 말씀합니다. 스낵 바에서 도시락이나 과자나 마실거리를 장만해서 자시라고 말씀합니다.


  영어사전에서 ‘snack’을 찾아보면 “간단한 식사”라고 풀이합니다. ‘bar’를 찾아보면 “술집, 바, 술집 카운터, 전문점”라고 풀이합니다. 영어 ‘bar’를 “바”라고 풀이하는 모습은 너무 엉뚱한데, 가만히 보면 한국이라는 나라 영어 전문가 참모습이 이쯤이라는 뜻이라고 느낍니다. 어쨌든, 고속철도 안내방송에서 흐르는 ‘스낵 바’란 “간단한 식사를 즐기는 전문점”이란 소리가 됩니다. 말풀이를 살핀다면 잘못 쓰거나 틀리게 쓰는 이름이라고는 할 만하지 않은 듯합니다. 그렇지만 어딘가 어설프구나 싶어요. 그닥 어울리지 않는 듯해요. 이것저것 골고루 파는 “자그마한 가게”일 텐데, 굳이 영어로 ‘스낵 바’처럼 이름을 붙여야 했을까 싶어요. 말뜻과 쓰임새 그대로 ‘작은가게(작은 가게)’라 이름을 붙이면 돼요. 또는 ‘쉼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어요. 고속도로 사이사이 있는 ‘쉼터’는 먹고 마시며 쉬는 곳이요, 고속철도에 있는 가게 또한 ‘쉼터’ 구실을 해요. 동네 자그마한 가게를 일컫는 ‘나들가게’라는 이름을 새로 빚었듯, 고속철도에서도 ‘나들가게’라 할 수 있어요. 스스로 생각을 기울일 때에 말이 꽃피우고, 스스로 마음을 쓸 때에 말이 싱그럽게 빛나요.


  사람들이 영어를 쓰든 안 쓰든 대수롭지 않다고 느껴요. 스스로 영어로 겉멋을 부리거나 겉치레를 하려 애쓴다면, 이렇게 겉멋과 겉치레로 흐를 노릇이라고 느껴요. 스스로 꾸밈없거나 수수하거나 곱게 살아가고 싶으면, 꾸밈없는 말과 수수한 말과 고운 말로 스스로를 보살필 노릇이라고 느껴요.


  푸름이 앞에서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는가를 오늘날 어른 스스로 생각하면 좋겠어요. 어린이 앞에서 어떤 어버이나 어른으로 살아가는지를 오늘날 여느 어버이와 여느 어른 스스로 헤아리면 좋겠어요. 푸름이와 어린이가 이 나라 새빛이요 앞날이라는 말만 읊지 말고, 푸름이와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 모두 새롭게 거듭나며 환하게 빛날 앞날이 되도록 사랑과 꿈을 나눌 수 있기를 빌어요. (4345.9.22.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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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버릇과 삶버릇
[말사랑·글꽃·삶빛 27] ‘물방울’과 ‘땡땡이’

 


  시는 문학입니다. 수필도 소설도 문학입니다. 시나 수필이나 소설, 또 희곡 모두 ‘말’로 빚는 문학이요, ‘말’로 이루는 예술이며, ‘말’로 드러내는 삶이에요. 그래서 어느 갈래 어느 문학이라 하더라도 말을 어느 만큼 슬기롭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빛깔이 달라져요. 말을 어느 만큼 아름답게 보살피느냐에 따라 무늬가 달라져요.


  시와 수필을 쓰는 신달자 님이 쓴 시집 《열애》(민음사,2007)를 읽다가, 58쪽에서 “아파트 일 층인 내 방 창에는 / 녹음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 사월부터 연둣빛 땡땡이 무늬가 어른거리더니 / 서너 달 지나며 창은 짙푸린 비단으로 출렁거렸다.” 같은 글월을 봅니다. 시와 수필을 쓰는 신달자 님은 ‘땡땡이 무늬’라는 말투를 시에 고스란히 담습니다. 신달자 님은 1943년에 경상남도 거창에서 태어나셨는데, 한창 일제강점기로 한겨레 누구나 한국말 아닌 일본말을 쓰고 일본 문화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 국민’이 되는 학교교육을 받던 무렵이에요. 신달자 님을 둘러싼 어른들은 모두 일본말을 쓰셨겠지요. 해방이 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일본 말투와 말버릇을 털지 못했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런 말투와 말버릇은 곳곳에 그대로 남았어요. ‘땡땡(点点, てんてん)’은 숱한 일본 말투와 말버릇 가운데 하나입니다.


  한국말로 하자면 ‘방울방울’이에요. 물방울이든 이슬방울이든 ‘방울’입니다. 방울을 무늬처럼 수없이 그리기에 ‘방울방울’ 모양이고, 일본사람은 이 모습을 바라보며 ‘점과 점이 수없이 모였다’ 해서 ‘点点’이라는 한자로 적으면서 ‘てんてん’이라고 읽어요. 이 소리값이 ‘텐텐’, ‘땡땡’이 되고 한국사람은 뒤에 ‘-이’를 붙여 ‘땡땡이’라고 써요.


  1944년에 태어난 내 아버지는 초등학교 교사로 마흔 해를 일하시고는 교장으로 정년퇴임을 하셨어요. 내 아버지 사는 충청북도 음성으로 아이들과 마실을 가서 내 아버지가 모는 자동차를 얻어 탈 때면, 어디에 차를 대거나 좁은 길을 빠져나올 때, 아버지도 어머니도 모두 ‘오라이’라고 말씀합니다. 내 아버지는 자동차에 기름을 넣을 때에도 ‘만땅’이나 ‘이빠이’라고 말합니다. 내 아버지조차 이런 일본 말투와 말버릇을 쓰니 잘못이라거나 슬프다는 이야기는 아니에요. 시를 쓰는 신달자 님이든 내 아버지이든, 오늘날 할머니와 할아버지 또래를 이루는 분들은 어둡고 고단한 나날을 보내면서 ‘얄궂은 말버릇’이 너무 짙게 몸과 입과 머리와 혀와 마음에 아로새겨지고 말았다는 이야기예요. 당신 스스로 ‘아이들 앞에서 이러한 일본 말투를 함부로 쓰면 안 되는 줄 알’아도 입으로는 어느새 술술 이러한 말투가 흘러나와요.


  내 아버지도 ‘오라이’나 ‘이빠이’ 같은 일본 말투뿐 아니라 ‘땡땡이’라는 일본 말투를 쓰시겠지요. 그렇지만 나와 내 옆지기는 이러한 일본 말투를 안 씁니다. 나는 한국 말투를 쓰고 싶어요. 나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아끼고 싶어요. 우리 집 두 아이한테는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쓰는 어버이로서, 아이들이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운 한국말을 예쁘게 들으면서 삶을 곱게 빛낼 수 있기를 빌어요. 좋은 말버릇으로 좋은 삶버릇을 익힌다면 참으로 아름답겠지요. 맑은 말버릇으로 맑은 삶버릇을 들인다면 더없이 어여쁘겠지요.


  사월부터 연둣빛으로 빛나며 어른거리는 무늬라면 ‘방울방울’이요 ‘동글동글’입니다. ‘물방울’이며 ‘둥글둥글’이에요. 때로는 ‘탱글탱글’이나 ‘통통’ 같은 느낌말로 나타내 볼 만하겠지요. ‘탱글탱글 고욤알 같은 무늬’라든지 ‘통통 튀는 물방울 같은 무늬’처럼 말할 수 있어요. (4345.9.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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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14: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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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2 19: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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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과 ‘하늘’
[말사랑·글꽃·삶빛 28] 아이들과 즐겁게 쓸 말이란

 


  아이들한테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합니다. 아이들은 위를 올려다봅니다. 낮에는 파랗게 빛나는 하늘을 느끼고, 밤에는 까맣게 어두운 하늘을 느낍니다. 하늘은 어디부터 어디까지일까요. 폴짝 뛰어올라 감나무 가지를 건드린 데부터 하늘일까요. 아버지 어깨에 올라타고 붙잡는 처마부터 하늘일까요.


  사람이 하늘이라고 느끼는 곳과 개미가 하늘이라고 느끼는 곳은 얼마나 같거나 다를까요. 개구리와 풀꽃이 하늘이라고 느끼는 곳이랑 새들이 하늘이라고 느끼는 곳은 얼마나 같거나 다를까요.


  나는 학교에 들기 앞서까지는 ‘하늘’이라는 낱말만 썼습니다.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 여섯 해를 다니면서 ‘하늘’ 말고 ‘공중’하고 ‘허공’이라는 낱말을 어른들한테서 듣기는 들었으나, 이 낱말, 곧 한자말 ‘공중’이랑 ‘허공’이 하늘하고 어떻게 다른가를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모두 같은 하늘이지만, 굳이 이렇게 저렇게 금을 갈랐을 뿐 아닌가 싶었습니다. 새로운 학교에 들어 세 해를 다니고, 또 세 해를 다닙니다. 이동안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는 두툼해지고 가짓수도 늘어납니다. 이제 학교에서 우리들한테 문학을 가르칩니다. 우리들이 배우는 문학책에는 ‘하늘’이라는 낱말이 거의 안 나타납니다. ‘공중’과 ‘허공’이라는 한자말에 이어 ‘창공’이라는 한자말이 으레 나타납니다. 학교에서 한국문학을 배우며 더 궁금합니다. 왜 문학을 하는 어른들은 ‘하늘’이라는 낱말은 안 쓰고 이런저런 한자말만 자꾸 쓰려고 할까.


  어느 날 내 궁금함을 풀려고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맨 먼저 ‘하늘’을 찾습니다. 국어사전에서는 ‘하늘’을 “지평선이나 수평선 위로 보이는 무한대의 넓은 공간”으로 풀이합니다. 다음으로 ‘공중(空中)’을 찾아봅니다. “하늘과 땅 사이의 빈 곳”으로 풀이합니다. ‘허공(虛空)’을 찾아봅니다. “텅 빈 공중”으로 풀이합니다. ‘창공(蒼空)’을 찾아봅니다. “= 창천(蒼天)”으로 풀이합니다. ‘창천(蒼天)’을 찾아봅니다. “맑고 푸른 하늘”로 풀이합니다.


  이제 낱말뜻을 살피며 생각합니다. 하늘과 땅 사이 빈 곳이 ‘공중’인데, “텅 빈 공중”이 ‘허공’이라는군요. ‘공중’이라는 낱말부터 “빈 곳”을 가리키는데 “텅 빈 공중”이란 어떤 데일까요. 이와 같은 말풀이는 말이 되는 말풀이라 할 만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창공’은 ‘창천’과 같은 낱말이라 하는데 “맑고 푸른 하늘”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가만히 생각합니다. 하늘이 맑을 때에는 ‘파란 빛깔’이 눈부십니다. 하늘이 파랗게 눈부실 때에는 ‘맑’습니다. 그러니까, “맑고 푸른 하늘”은 하늘이 아주 맑거나 아주 파랗다는 소리입니다. 그나저나, 하늘빛은 ‘파랑’이지 ‘푸름’이 아니에요. 그런데 국어사전에서는 ‘푸른’ 하늘이라고 적습니다.


  하나하나 간추립니다. 말풀이를 다른 듯 적지만, ‘공중’과 ‘허공’은 같은 낱말입니다. 그리고, 두 낱말은 ‘하늘’을 가리킬 뿐입니다. ‘창공’과 ‘창천’은 ‘파란 하늘’을 가리킵니다.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린 날 나는 다시금 생각합니다. 쉽게 하면 될 말을 왜 어른들은 쉽게 안 할까. 이윽고 또 한 가지 생각합니다. 한자말로 ‘창공’이랑 ‘창천’이라고 적으면서, 왜 한국말로는 ‘파란하늘’이라 안 적을까. 한국말로도 ‘파란하늘’을 한 낱말로 삼아야 올바르지 않을까.


  셀마 라게를뢰프 님이 쓴 《닐스의 신기한 여행》(오즈북스,2006) 1권을 읽다가 44쪽에서 “공중에서 들이마시는 공기가 이토록 신선하고, 좋은 땅 냄새와 소나무 냄새까지 품고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 어떨까,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같은 대목을 봅니다. 얼추 서른 해 앞서도 이 책을 읽었을 텐데, 그무렵에는 이런 번역글을 옳게 가누지는 못했어요. 그러니까, 번역글 첫머리에는 “공중에서 들이마시는 공기”라 말하고, 번역글 뒤쪽에는 “하늘 높이 날아오르면”이라 말해요. 그런데 이 글에서 ‘공중’과 ‘하늘’은 같은 데를 가리켜요. 같은 데를 가리키는 낱말인데 두 낱말을 섞어서 써요.


  아이들과 즐겁게 쓸 말은 어떤 말일 때에 참으로 즐거우면서 아름다울까요. 어린이가 푸름이가 되고, 또 어른이 되는 길목에서 즐겁게 쓰면서 생각을 북돋우며 꿈을 가꾸도록 돕는 말은 어떤 말일 때에 더없이 즐거우면서 환하게 빛날까요. 시골마을에서 두 아이와 살아가며 늘 헤아려 봅니다. 두 아이와 날마다 아침하늘과 저녁하늘 올려다보며 곰곰이 헤아려 봅니다. 두 아이 어버이로서 나는 ‘하늘’이라는 낱말을 씁니다. 내 나름대로 ‘아침하늘’이나 ‘새벽하늘’이나 ‘밤하늘’ 같은 낱말을 지어서 씁니다. 밤에는 ‘별하늘’이라고도 하고, 구름이 많이 낀 날은 ‘구름하늘’이라고도 합니다. 동이 틀 무렵에는 ‘붉은하늘’도 되고 ‘노란하늘’도 되며 ‘보라하늘’도 됩니다. 해가 뜨고 지는 결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을 헤아리며 하늘빛을 헤아립니다. 비오는 여름에는 ‘비하늘’이고, 눈오는 겨울에는 ‘눈하늘’이에요. 하늘을 바라보며 논둑을 걷습니다. 하늘을 마주보며 시골길을 자전거로 달립니다. (4345.9.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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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즐겁게 읽기
[말사랑·글꽃·삶빛 26] ‘행복’과 ‘즐거움’

 


  나는 늘 즐겁게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며 즐겁지 않은 일이 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빨래를 하든 밥을 하든 즐겁습니다. 옷을 입든 밥을 먹든 즐겁습니다. 나는 스스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썩 반기지 않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만, 반기지 않더라도 즐겁게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가장 좋아하면서 가장 믿음직하고 가장 사랑스러운 일을 할 때에 가장 즐겁습니다. 가장 좋은 마음이 되어 가장 좋은 길을 걸을 때에 가장 기뻐요.


  사진을 좋아하는 삶을 이야기하는 《사진일기, 날마다 나를 찾아가는 길》(포토넷,2012)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사진으로 쓰는 일기를 말하는 글을 즐겁게 읽습니다. 즐겁게 읽다가 63쪽에서 “각자 이유는 다르겠지만 결국 내가 즐겁고 행복하려고 선택한 것 아닌가.”와 같은 글월을 봅니다. “즐겁고 행복하려고”라는 말마디를 가만히 되읽습니다. 새삼스레 국어사전을 펼칩니다. 국어사전에서 ‘행복(幸福)’은 “(1) 복된 좋은 운수 (2)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으로 풀이합니다. 말풀이에 나온 ‘만족(滿足)’은 “(1) 마음에 흡족함 (2) 모자람이 없이 충분하고 넉넉함”으로 풀이합니다. ‘기쁨’은 “마음에 즐거운 느낌이 있다”로 풀이하고, ‘흡족(洽足)’은 “조금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넉넉하여 만족함”으로 풀이합니다. 마지막으로 ‘복(福)되다’를 찾아보니, “복을 받아 기쁘고 즐겁다”로 풀이하고, ‘흐뭇하다’는 “마음에 흡족하여 매우 만족스럽다”로 풀이합니다.


  국어사전 풀이말을 놓고 곰곰이 살핍니다. 먼저 ‘만족 = 충분함 = 넉넉함’이 됩니다. 다음으로 ‘흡족 = 흐뭇함’이 됩니다. 그리고 ‘행복 = 기쁨 = 즐거움’이 돼요.


  다시 한 번 국어사전을 뒤적여 ‘즐겁다’를 찾아봅니다. 국어사전에서는 “마음에 거슬림이 없이 흐뭇하고 기쁘다”로 풀이합니다. 모두 돌림풀이인 셈입니다. 한국말을 한자말로 풀이하고,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이합니다. 한국말도 한자말도 다른 어슷비슷한 낱말하고 뭉뚱그리듯 ‘돌려막기’를 합니다. 다만, ‘기쁘다’는 어떠한 삶을 ‘느끼는’ 대목을 나타내기에 알맞고, ‘즐겁다’는 어떠한 삶을 ‘누리는’ 대목을 나타내기에 걸맞겠구나 싶어요.


  그나저나, ‘행복’이란 ‘복되다’를 가리키고, ‘복되다’는 ‘즐겁다’를 가리키는데, 이렇게 가리키는 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이 땅에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말을 하면서 국어사전을 살피는 사람이 있을까요. 말을 하면서 국어사전을 살피면서 곰곰이 생각하고 거듭 생각하면서 말뜻과 말느낌을 헤아리는 사람이 있을까요.


  옳고 바르게 써야 하기 때문에 국어사전을 뒤적이거나 말뜻을 살피지 않습니다. 바른 말 고운 말이 아름다운 말이라서 국어사전을 찾거나 말느낌을 헤아리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나타내고 내 삶을 드러내는 말을 깨달으려고 국어사전을 뒤적입니다. 내 마음을 찾고 내 삶을 누리려고 말을 살피고 생각합니다.


  한번 거꾸로 생각해 봅니다. 한국말 ‘즐겁다’를 영어로 옮길 적에는 어떤 낱말로 적바림할까요. 한자말 ‘행복’을 영어로 옮길 적에는 어떤 낱말로 적을까요. 한국사람은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한테 ‘기쁨-즐거움-흐뭇함’을 어떤 낱말로 들려줄 수 있을까요. ‘행복-만족-흡족’을 어떤 영어로 외국사람한테 알려줄 수 있는가요.


  즐겁게 생각하는 말입니다. 즐겁게 주고받는 글입니다. 즐겁게 살아가는 나날입니다. 즐겁게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책 한 권 즐겁게 읽습니다. 밥 한 그릇 즐겁게 먹습니다. 내 한 삶 즐겁게 누립니다. 밭뙈기에서 즐겁게 김을 맵니다. 아이들을 즐겁게 씻깁니다. 들바람을 쐬면서 즐겁게 자전거를 달립니다. 숲바람을 느끼면서 즐겁게 고개를 오르내립니다. 즐거울 때에 아름다움을 생각합니다. 즐거웁기에 사랑을 깨닫습니다. 즐거울 적에 꿈을 꿉니다. 즐거운 나머지 활짝 웃고 두 팔 벌려 서로서로 예쁘게 껴안습니다. (4345.8.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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