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르다 1
모르는 데 모른다고 하겠지. 알면서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알기에 알고, 모르기에 모른다. 그런데 알더라도 더 배우려 한다. 모르는 결을 알기에 배우려 한다. 모르니까 못 배운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니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줄줄이 모르기 마련이다. 사랑을 알기에 더 사랑스러운 길을 배우려고 나선다. 사랑을 모르기에 사랑하고 자꾸 동떨어진 길을 가는데에도 스스로 모르고 못 느끼며 나뒹굴고야 만다. 무엇을 안다면, 무엇을 모르는가를 안다는 뜻이라고 느낀다. 알기에 배우고, 모르기에 못 배운다. 알기에 새로 배우면서 글 한 줄을 쓰려고 땀흘릴 테고, 모르기에 무엇을 배워야 하는가를 그야말로 모르는 채 쳇바퀴를 도는 글을 쓴다거나 다른 사람 글을 베끼거나 흉내내거나 훔치는 짓도 일삼는다. 이렇게 하고도 까맣게 모르니 스스로 무슨 짓을 했는지 못 느끼고 무덤덤하구나 싶다. 1999.9.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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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기저귀

아이가 우리한테 오고서야 기저귀를 눈여겨본다. 이때까지 기저귀가 무엇인지 제대로 짚지 못했다. 사전에 실린 말뜻으로는 ‘기저귀’를 바라볼 수 있었어도, 아이 샅에 기저귀를 대는 살림을 짓고서야 비로소 ‘기저귀’가 그냥 낱말 하나가 아닌 엄청나게 오래며 깊은 삶이 넓게 스면 사랑인 줄 깨닫는다. 우리 집에서는 아이한테 천기저귀를 댄다. 기저귀를 마련하면서, 이 기저귀도 여럿인 줄 새삼스레 배우는데, 한 벌 쓰고 버리는 기저귀는 으레 공장에서 종이로 척척 찍어내니 ‘종이기저귀’이다. 아기를 낳는 몸인 가시내가 다달이 쓰는 기저귀는 핏물을 받으니 ‘핏기저귀’이다. 아기는 똥오줌을 가릴 수 없는 몸이라 기저귀를 댄다. ‘오줌기저귀’하고 ‘똥기저귀’를 갈라서 삶고 헹구고 볕에 말리며 바람을 쏘인다. 아이 하나가 가르치는 살림이란 대단하구나. 살림을 가르치는 아기는 말도 저절로 가르치는 스승이요 길잡이요 별님이자 꽃송이 같다. 2008.8.2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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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는

바라는 만큼 쓴다. 바라지 않는데 더 나아가면서 쓸 수는 없다. 배우려고 하는 마음, 오늘 이 자리에 머물지 않고서 한결 나아가려는 마음을 품지 않으면, 그냥 그대로 맴돌면서 쓴다. 그렇다고 맴도는 제자리걸음 글쓰기가 나쁘지 않다. 그저 그뿐이라는 소리이다. 배우기를 바라지 않으니 새롭게 쓰지 못한다. 배우기를 바라니 언제나 새롭게 쓸 뿐 아니라, 글 한 줄을 쓰면서도 거듭나는 숨결을 느낀다. 배울 수 없는 살림이란 없으니, 스스로 무엇을 얼마나 바라는가부터 헤아리면 된다. ‘를’ 한 마디를 조물딱조물딱 갖고 놀듯이 배우려는 마음으로 글을 쓸 수 있다. ‘사라지다’나 ‘없다’ 같은 낱말이 사전 뜻풀이를 훌쩍 넘어서는 어떤 깊이나 너비가 있는가를 새삼스레 스스로 배우려는 마음으로 글을 쓸 만하다. 바라면 바라는 대로 되지만, 바라지 않으면 바라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안 된다. 2019.3.1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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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절 5

표절이란 저작권을 훔치거나 가로챈 짓. 다른 이가 일꾼 땀방울을 몰래 빼돌리는 짓. 그런데 이보다는 훔치거나 가로채거나 빼돌린 사람 스스로 땀흘리는 기쁨을 못 배우고 마는 굴레. 훔치거나 가로채거나 빼돌린 사람 스스로 새롭게 깨어나거나 눈뜨는 아름다움하고 멀어지는 덫. 훔치거나 가로채거나 빼돌린 사람 스스로 눈부신 꽃을 짓밟다가 빠지고 마는 수렁. 2017.2.6.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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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1

글이 예술이라면 삶이 예술이라는 뜻. 글이 아름답다면 삶이 아름답다는 뜻. 1993.11.7.


글 2

술술 흘러나올 적에 써야 글이다. 머리를 쥐어짜면 언제나 쥐어짜기가 되어, 이런 글은 읽어 주는 사람부터 벅차다. 쓰는 사람이 신나게 노래하듯 술술 넘치는 글을 써야, 이런 글은 읽어 주는 사람도 나란히 홀가분하면서 즐겁다. 1995.8.3.


글 3

이오덕 어른을 만나뵙고 온 일을 돌아본다. 어른이 계신 과천집은 온통 책밭이었다. 적어도 이쯤 되는 책은 읽어야 ‘읽었다’고 할 수 있구나. 내가 쓴 글은 많이 허술했을 텐데, 어른은 딱 두 가지만 짚어 주었다. ‘가끔씩’은 겹말이니 ‘가끔’이라고만 쓰라고, 또 하나는 ‘부르다’는 사람을 보면서 말할 적에만 쓴다고. 어른이 나한테 왜 두 가지만 짚어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신문을 돌린다. 내가 이오덕 어른 같은 분이면서 새파란 젊은이를 마주한다면, 나는 젊은이한테 무엇을 어떻게 짚어 주는 사람이 될 만할까? 어른은 그냥 어른이 되지 않는구나. 1999.4.20.


글 4

2003년 8월 25일 새벽에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아침에 우리 일터(‘보리 국어사전’ 편집실)에 알려졌다. 어른 유족은 이를 바깥에 알리지 않기를 바라셨다는데 어떻게 우리 일터에 이런 이야기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글쓰기연구회 교사들이 전화기에 불이 나게 여기저기에 알리는 듯하다. 제발 그런 짓 좀 그만해야 하지 않나? 돌아가신 분이 남긴 뜻이 있다면, 좀 알리지 말고 조용해야 하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누리신문에 어느새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속보로 오른다. 참 대단하다. 이게 어른 뜻을 따른다는 제자란 사람들이 하는 짓이네. 하루 동안 어떤 추모글이 올라오는가를 지켜본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내가 이오덕 으뜸 제자요!’ 하고 외치는 글 같다. 참으로 글이 무엇인지 모르네. 글이란 자랑이 아니다. 추모란 이름으로 ‘내가 이런 훌륭한 어른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곁에서 따르며 배웠소이다’ 하고 밝히는 일이란 거짓부렁이다. 떠난 어른을 기리는 글이라고 한다면, 떠난 어른이 그동안 어떤 숨결로 이 땅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려 했는가를 되새기면서 나 스스로 앞으로 무엇을 배워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겠노라 하는 다짐을 조용히 곱씹고 고개 숙이려는 마음을 밝히는 글이라고 해야겠지. 더는 두고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내가 써 보자. 몇 사람이 읽어 주든 말든 대수롭지 않으니, 이레에 걸쳐서 “이오덕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추모글이 아닌 “이오덕을 읽읍시다”란 뜻으로 이오덕 어른이 남긴 책을 몽땅 되읽고 새기는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2003.8.25. (* 덧글 : 이날부터 이레에 걸쳐서 글종이 700쪽 길이로 ‘이오덕 독후감’을 써서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 띄웠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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