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1

글이 예술이라면 삶이 예술이라는 뜻. 글이 아름답다면 삶이 아름답다는 뜻. 1993.11.7.


글 2

술술 흘러나올 적에 써야 글이다. 머리를 쥐어짜면 언제나 쥐어짜기가 되어, 이런 글은 읽어 주는 사람부터 벅차다. 쓰는 사람이 신나게 노래하듯 술술 넘치는 글을 써야, 이런 글은 읽어 주는 사람도 나란히 홀가분하면서 즐겁다. 1995.8.3.


글 3

이오덕 어른을 만나뵙고 온 일을 돌아본다. 어른이 계신 과천집은 온통 책밭이었다. 적어도 이쯤 되는 책은 읽어야 ‘읽었다’고 할 수 있구나. 내가 쓴 글은 많이 허술했을 텐데, 어른은 딱 두 가지만 짚어 주었다. ‘가끔씩’은 겹말이니 ‘가끔’이라고만 쓰라고, 또 하나는 ‘부르다’는 사람을 보면서 말할 적에만 쓴다고. 어른이 나한테 왜 두 가지만 짚어 주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신문을 돌린다. 내가 이오덕 어른 같은 분이면서 새파란 젊은이를 마주한다면, 나는 젊은이한테 무엇을 어떻게 짚어 주는 사람이 될 만할까? 어른은 그냥 어른이 되지 않는구나. 1999.4.20.


글 4

2003년 8월 25일 새벽에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아침에 우리 일터(‘보리 국어사전’ 편집실)에 알려졌다. 어른 유족은 이를 바깥에 알리지 않기를 바라셨다는데 어떻게 우리 일터에 이런 이야기를 알려주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글쓰기연구회 교사들이 전화기에 불이 나게 여기저기에 알리는 듯하다. 제발 그런 짓 좀 그만해야 하지 않나? 돌아가신 분이 남긴 뜻이 있다면, 좀 알리지 말고 조용해야 하지 않나. 아니나 다를까. 누리신문에 어느새 이오덕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가 속보로 오른다. 참 대단하다. 이게 어른 뜻을 따른다는 제자란 사람들이 하는 짓이네. 하루 동안 어떤 추모글이 올라오는가를 지켜본다. 이 사람도 저 사람도 ‘내가 이오덕 으뜸 제자요!’ 하고 외치는 글 같다. 참으로 글이 무엇인지 모르네. 글이란 자랑이 아니다. 추모란 이름으로 ‘내가 이런 훌륭한 어른하고 이렇게 오랫동안 곁에서 따르며 배웠소이다’ 하고 밝히는 일이란 거짓부렁이다. 떠난 어른을 기리는 글이라고 한다면, 떠난 어른이 그동안 어떤 숨결로 이 땅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심으려 했는가를 되새기면서 나 스스로 앞으로 무엇을 배워서 어떻게 무슨 일을 하면서 살겠노라 하는 다짐을 조용히 곱씹고 고개 숙이려는 마음을 밝히는 글이라고 해야겠지. 더는 두고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내가 써 보자. 몇 사람이 읽어 주든 말든 대수롭지 않으니, 이레에 걸쳐서 “이오덕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추모글이 아닌 “이오덕을 읽읍시다”란 뜻으로 이오덕 어른이 남긴 책을 몽땅 되읽고 새기는 독후감을 쓰기로 한다. 2003.8.25. (* 덧글 : 이날부터 이레에 걸쳐서 글종이 700쪽 길이로 ‘이오덕 독후감’을 써서 누리신문 오마이뉴스에 띄웠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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