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 4

부산일보 기자가 내 사진을 멋대로 가져다쓰고서 아무 말이 없은 줄 나중에 알다. 부산일보에 전화를 걸어 그 기자한테 따졌다. 그 기자가 하는 말, “내가 좋은 뜻으로 사진을 써서 부산 보수동 헌책방골목을 좋게 알리는 일을 했는데 뭐가 잘못이오?” 훔침질을 한 사람이, 기자란 분이, 되레 큰소리이다. 기자가 되는 이는 저작권법 공부를 안 하는 듯하다. 2014.10.1.


저작권 5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말이지, 내 사진을 표절한 작품에 무슨 사진공모전 대상을 주었단다. 그곳 무슨 과장인가 하는 분하고 직원 한 사람이 고흥에 왔다. 이들은 사진저작권 도용을 둘러싸고서 우리한테 200만 원 피해배상을 하기로 하면서, 그 사진은 그대로 공모전 대상으로 삼겠다고 한다. 그런데 고흥에서 서울로 돌아간 그들은 말을 바꾸어 연락을 뚝 끊네. 이러더니 우리가 그들을 협박하면서 200만 원을 뜯어내려 한다고 변호사한테 이 일을 넘겼다고 밝힌다. 그분들은 왜 이런 짓을 벌일까? 잘못해서 무릎 꿇고 빌겠다며 찾아왔으면 그 값을 치르든지, 잘못한 일이 없다고 여긴다면 굳이 고흥에 올 일도 없고, 사진공모전 대상이라는 작품을 널리 퍼뜨리든지. 그들은 그들 누리집에 올렸던 시상식 사진을 지우고, 공모전을 했다는 자취도 다 지웠다. 가만 보니 ‘잘못했습니다’ 같은 말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네 싶다. 2016.2.1.


저작권 6

아마 2002년 일이었다고 떠오르는데, 경향신문에서 내 사진을 빌려갔다. 기사에 쓰고서 돌려주기로 했는데 안 돌려준다. 이레 뒤에 연락하니 곧 돌려주겠노라 했고, 한 달이 지나도 꿩 잡아먹은 듯하여 다시 연락하니 사진을 잃어버렸단다. 기자한테 묻는다. “사진값을 치르기에는 신문사 형편이 어렵다 하셔서 좋은 마음으로 사진을 빌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돌려주지 않으시고, 잃어버리셨다면, 잃어버린 그 사진값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열 몇 해 된 이야기를 굳이 남겨 본다. 왜냐하면, 뭐 이런 일이 있은 뒤, 이 때문은 아닐 테지만, 경향신문에서 내 책을 꼭 한 권조차도 소개한 적이 없네. 2016.7.5.


저작권 7

연합뉴스에서 2017년에 내 사진을 멋대로 쓰고서 연합뉴스 이름까지 박아서 퍼뜨렸다. 이런 일을 몇 달이 지나고서야 알았네. 그런데 2019년에 이런 일이 또 불거졌다. 참 딱하다. 왜 그럴까? 왜 사진값을 제대로 치르면서 쓰려 하지 않는가? 더구나 사진에 사진저작권을 적을 생각을 안 하고서 써도 되는가? 2019.2.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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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1

이오덕 어른은 금고를 따로 마련해서 이곳에 내용증명 글월을 건사하셨다. 어떤 내용증명인가를 살피니, 출판사에서 판매부수를 속인 짓을 따지는 내용증명에, 그동안 치르지 않은 글삯을 내놓고 이제 책을 절판하라는 내용증명이 여럿 있다. 이밖에 이오덕 어른 일기를 보니 이오덕 어른뿐 아니라 권정생 할배 책을 둘러싸고 이름난 출판사들이 글삯을 떼어먹거나 인지 장난을 으레 저지른 이야기가 흐른다. 어느 출판사는 얼추 2억에 가까운 글삯을 떼어먹었더라. 그렇게 떼어먹은 돈으로 그 출판사는 오늘 어떤 책을 내는가? 2005.2.3.


저작권 2

한겨레신문에서 내 사진을 쓰고 싶다고 연락한다. 사진값은 얼마를 주겠느냐고 물으니 “저희 신문사 사정이 어려워서 사진값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하고 말한다. “사진값으로 1만 원을 줄 수도 있습니다. 1만 원을 줄 돈이 없나요?” “…….” “사진이 좋아서 꼭 쓰고 싶다면 사진값을 치러야겠지요. 한겨레신문에서 일하는 분들은 자원봉사로 일삯 안 받고서 글을 쓰고 사진을 찍어서 신문을 내나요?” “…….” “사진값으로 1만 원도 내지 못하는 신문사라면 그만 문닫는 길이 낫지 않을까요?” “그거는 좀.” “제가 기자님이라면 제 주머니에서라도 1만 원을 꺼내서 드립니다.” “죄송합니다. 그 대신 밥이나 한끼 사겠습니다.” “아이고, 밥 사지 마시고요, 그 돈으로 사진값 1만 원을 치르면 되지 않나요?” 2005.11.3.


저작권 3

ㅅ출판사에서 책을 낸다는 어느 미술평론가가 나한테 사진 두 자락을 ‘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사진을 책에 싣도록 ‘사용권을 빌려주는’ 계약서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그런 계약서란 없고, 사진을 ‘그냥 줄’ 수 있느냐고 다시 묻는다. 그래서 ‘내 사진을 어떤 글하고 어울리도록 싣는지, 먼저 글을 보여 달라’고, ‘내 사진이 들어갈 자리에 적힌 글이 먼저 내 마음에 들어야 빌려주든지 말든’지 할 수 있다고 대꾸한다.  덧붙여 그 책에 ‘사진 찍은 사람’ 이름이 제대로 간기에 적히는가를 묻는다. 그런데 그 책에 글쓴이 이름만 들어가고 사진 찍은 사람 이름은 안 들어간단다. 무엇보다 사진값을 치를 수 없단다. 그 얘기에 ‘사진값을 주지 못한다면 책은 주느냐’ 하고 다시 물으니, 사진값도 없지만 책도 안 준단다. 좀 어이없구나 싶어서, 사진 저작권자한테 아무런 권리도 보람도 없는데 사진을 왜 ‘주어’야 하느냐고 물으니, 좋은 뜻으로 좋은 책을 내려고 하니 협조를 바란단다. 그 좋은 책이라면, 좋은 값을 사진저작권자한테 치르고, 성명표시권을 지키고, 종이책으로 나온 결과물을 사진저작권자한테 ‘배포’하여 어떻게 나왔는가를 알려야 하지 않나? 2013.9.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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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1

쓸 수 없다. 담임이 뻔히 들여다보는데 일기에 그때 내 마음·뜻·생각·꿈·사랑·길을 한 줄도. 1987.12.31.


일기 2

중학교에 들어오니 드디어 일기 검사가 사라진다. 이제는 내 마음껏 일기를 쓸 수 있다. 그런데 중학교 1학년부터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 시까지 입시지옥 공부를 시킨다며 학교에 붙잡아 둔다. 막상 집에 돌아오면 연필 쥘 힘이 없다. 어쩌면 핑계일 테지만, 힘이 빠져서 일기를 못 쓴다. 게다가 기운을 내 보려 해도 날마다 똑같은 일만 벌어지는 이 따분한 학교에서 무엇을 일기에 쓸 수 있을까. 1988.4.21.


일기 3

자전거를 몰며 집집마다 돌면서 새벽을 여는 신문배달이란 얼마나 멋진 일인가. 도시에서 이보다 멋진 일거리가 또 있을까? 대학교 강의에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는 대목을 배운다면, 새벽 신문배달은 날마다 새롭게 배우는 것투성이라 할 수 있다. 날마다 새로우니 날마다 하루 이야기가 온몸에 새겨진다. 일기란 일기장에만 쓰지 않는구나. 비가 와서 옴팡 젖으면서 신문을 돌린 날, 장마가 져서 물바다가 된 골목에서 헤엄치며 신문을 안 적시고 돌린 날, 봄에서 여름으로 바뀐 바람맛을 먹으면서 돌린 날, 호젓한 마을길하고 다른 석탄공장 곁길을 지나가면서 동이 트려는 하늘을 바라보는 날, 아무리 불볕이라 해도 새벽바람은 이렇게 시원하면서 좋구나 하고 느끼는 날, 모두 새롭다. 1995.6.7.


일기 4

이오덕 어른이 쓴 일기가 능금상자 하나 가득 있더라. 어른이 읽은 책을 모두 하나씩 끄집어내어 책 사이에 엽서나 편지나 쪽글이 있나 하고 살피고, 이 책에 쌓인 먼지를 닦아 주다가 드디어 일기꾸러미를 찾아냈다. 면장갑을 끼고 어른 일기장을 만져야 하지만, 오늘 딱 하루만 맨손으로 일기장을 만져 보자. 아무리 고되거나 지치거나 아프거나 힘들어도 꾹꾹 눌러쓴 일기장이 놀랍다. 역사가 다른 데에 있지 않구나. 스스로 겪고 듣고 보고 하고 마주한 삶을 고스란히 옮겨적은 마흔 해치 일기장이 그대로 한국현대사로구나. 군사독재 서슬이 시퍼렇던 무렵 멧골학교 교사로서 적은 이 일기장이. 2005.2.10.


일기 5

아이가 곁에 왔다. 아기가 나한테 오면서 내 삶은 확 바뀐다. 곁님이 나한테 온 뒤로도 내 삶은 바뀌었는데, 아기는 나더러 예전처럼 살지 말라고 말없이 말한다. 온하루를 아기한테 바치느라 육아일기를 끄적일 겨를이 없는데, 어쩌다가 육아일기를 끄적일 적에 늘 느낀다. 육아일기란, 아이를 돌본 일을 적는 글이 아니다. 육아일기라고 한다면, 오늘 이때까지 어른도 어버이도 아닌, 몸만 어정쩡하게 다 자랐다고 하는 사람이 비로소 어른이나 어버이가 되어 가는 길을 새롭게 배운 엄청난 사랑을 눈물하고 웃음으로 아로새기는 글이로구나 싶다. 아이한테서 배운 사랑을 적는 글을 육아일기라는 이름으로 쓴다. 2008.9.10.


일기 6

사진일기라고 하는 글을 읽다가 너무 어이없어서 책을 집어던졌다. 어쩜 이렇게 겉멋만 반지르르한 엉터리 이야기를 사진일기라는 이름을 붙여서 책으로 냈을까? 이토록 사진도 모르고 일기도 모르면서 무슨 사진책이랍시고 내놓을까? 한참 식식거리다가 옥상마당으로 나와서 구름바라기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사람은 그 사람이 아는 대로만 사진일기를 쓰지 않았을까? 그 사람 삶은 남한테 잘 보이려는 꾸미는 몸짓이었으니 그런 글밖에 달리 못 쓰지 않는가? 남을 탓할 일이 없다. 사진일기다운 사진일기가 없다면, 그렇게 느낀 내가 쓰면 될 노릇이다. 그래, 남 말은 하지 말자. 내 말을 하자. 내가 사진일기를 쓰면 되지. 바로 오늘부터. 2009.3.2.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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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1

어머니한테 꽃이름을 여쭈면 어머니는 꽃잎이 아닌 풀잎만 보고도 어떤 꽃인지 척척 알려준다. “우아, 어머니 대단하다! 어떻게 꽃이름을 이렇게 다 알아요?” “응, 그냥 알지.” “어머니는 식물도감보다 훨씬 훌륭해요!” “뭘. 시골에서 나고 자랐으면 다들 알아.” 1985.7.2.


꽃 2

“네가 먹는 모든 과일은 다 꽃이었어. 몰랐니?” “…….” “어머, 우리 종규가 모르는 것도 다 있네. 학교에서 그런 것도 안 가르쳐 줬니? 호호호.” 1987.9.4.


꽃 3

남자고등학교란 데는 참 웃기다. 누가 꽃무늬나 꽃그림이 들어간 옷이라든지 신이라든지 책받침이라든지 공책을 쓰면 바로 손가락질을 하며 계집애 같다고 놀린다. 어쩜 이렇게 엉터리 같은 생각을 다 할까. 꽃이 없이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1991.4.16.


꽃 4

“선배, 꽃무늬옷 예뻐요. 어울려요. 그 옷 어디서 났어요?” “응, 새벽에 신문배달을 할 적에 아파트도 한 곳 돌리거든. 그곳에 헌옷 모으는 상자가 있는데, 거기를 뒤지면 입을 만한 옷이 있더라. 거기서 한 벌 가져왔어.” 1999.5.9.


꽃 5

봄이 되어 갓 봉오리를 터뜨린 꽃을 본다. 향긋한 냄새를 맡으려고 눈을 감고 코를 살며시 대려 하는데 파르르 떠는 몸짓을 느껴 문득 눈을 뜬다. 눈앞에 딱히 아무것도 없다. 뭐지? 다시 눈을 감고 코를 꽃송이에 대는데, 나한테 꽃내음을 베푸는 꽃송이가 파르르 떠는 기운을 느낀다. 아, 꽃이 파르르 떨었네. 설마 제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내밀었다고 이렇게 기뻐하면서 파르르 떨었나? 벌이며 나비가 꿀하고 꽃가루를 찾아서 꽃마다 찾아드는 마음을 알겠다. 2004.3.29.


꽃 6

어린 날에는 동무들하고 골목에서 구슬치기를 하거나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를 하거나 딱지를 치거나 제기를 차거나 팽이를 돌리거나 연을 날리거나 자치기를 하거나 땅따먹기를 하면서 흙바닥이나 돌틈에 꽃이 핀 줄 하나도 못 알아챘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떠난 인천에 돌아온 이제, 어릴 적 놀던 골목이나 태어나서 자란 골목을 다시 거닐어 보니 곳곳이 꽃밭이다. 골목집에서 길바닥을 들어내어 마련한 손바닥만 한 꽃밭뿐 아니라 돌틈이며 온갖 곳에서 꽃이 흐드러진다. 골목이 그냥 골목이 아니네. 온통 꽃골목이네. 새가 심고 골목사람이 심어서 자라는 꽃으로 골목이 아주 밝은 냄새로 가득하네. 2007.4.15.


꽃 7

꽃은 기다린다. 저를 눈여겨보거나 들여다보거나 바라보다가 가만히 다가와서 쓰다듬어 주기를. 우리 집 뒤꼍에 옮겨심은 나무가 여섯 해 만에 꽃을 피운다. 뒤꼍으로 오르는 길목에 흰민들레 두 송이가 피었다. 내가 심은 민들레일까, 아이들이 꽃씨를 후후 불며 놀았기에 뿌리를 뻗은 민들레일까. 2019.3.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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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마바지

사내란 몸으로 치마를, 더욱이 꽃치마나 깡똥치마를 두르고 돌아다니면 갖은 사람들이 쳐다본다. 사내가 치마를 둘러서 놀라운가? 그런데 옛날에는 누구나 치마를 둘렀지. 사내랑 가시내를 가르는 차림새가 아니었지. 치마를 두르기에 좋으면 치마를 두르고, 바지를 꿰기에 좋으면 바지를 꿸 뿐이다. 가만 보면 가시내가 치마를 막 벗어던지고 씩씩하게 바지를 꿸 적에 온갖 사람들이 ‘바지 꿴 가시내’를 쳐다보았겠지. 때로는 놀리고 흉보고 괴롭히고 삿대질하고 따돌리고 때리기까지 했지. 그러면 이제 보자. 가시내가 바지를 스스럼없이 꿰고 즐겁게 꿰며 홀가분히 꿰는 오늘날 이 삶터는 얼마나 달라졌는가? 제법 어깨동무하는 삶터로 달라지지 않았을까? 사내인 몸으로 치마를 두르는 뜻을 밝히자면, 스스로 치마가, 무엇보다 꽃치마나 깡똥치마가 즐거워서 두르지만, 이보다는 뭇사내가 바지를 벗어던지고 치마를 꿰는 새로운 살림판을 벌이면 이 삶터는 참다이 어깨동무하는 길로 확 거듭날 만하겠구나 하고 느낀다. 한마디로 “가시내가 바지를 꿰고 사내가 치마를 두르면 아름답다(평화롭다+평등하다)” 2017.12.3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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