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 3

“신촌엔 어디에 헌책집이 있나요?” 신촌에 있는 대학교에 다니는 선배한테 묻는다. “헌책집? 웬 헌책집? 그냥 새책집에 가면 되잖아? 헌책집은 모르겠는데.” 물어본 내가 잘못일 수 있지만, 대학교에 다니는 선배를 보면 꼬박꼬박 그 대학교 앞이나 옆이나 둘레나 가까이에 헌책집이 있는가 없는가를 물어본다. 한 해 동안 오백이 넘는 선배한테 물어보았으나 어느 누구도 헌책집을 가르쳐 주지 못했다. 가르쳐 주지 못한 까닭은 그 대학교 곁에 헌책집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들이 그곳을 안 갔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하나같이 “뭐하러 헌책집까지 가? 새책집에도 책 많잖아?” 하고 대꾸한다. 그러나 다르다. 새책집하고 헌책집에 있는 책이 다르다. 갓 나온 책도 헌책집에 들어오지만, 서른 해나 쉰 해를 묵은 책이 새책집에 들어오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책, 나라밖 책도 헌책집에 들어온다. 때로는 백 해나 이백 해쯤 묵은 책도 들어오는 헌책집이요, 비매품도 어엿이 들어오는 헌책집이다. 헌책집에 찾아가서 헌책을 읽지 않는다면 책을 모르는 셈이다. 1994.12.3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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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2

헌책이 부르는 소리를 들어 보자. 헌책은 누구나 똑같이 부른다. 가멸찬 사람도 가난한 사람도 부른다. 누구나 배울 마음이 있으면 기꺼이 부른다. 500원짜리 헌책도 5000원짜리 헌책도 5만 원짜리 헌책도 모두 아름답다. 값 때문에 아름답지 않다. 겉이 아무리 허름하더라도 속에 담은 알맹이가 한결같기에 아름답다. 살짝 눈을 감아 볼까? 눈을 감고서 한손에는 헌책을, 다른 한손에는 새책을 쥐어 보자. 손으로 만져서 어느 쪽이 헌책이고 새책인지 가름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둘을 가름해 놓고 나서 무엇이 다른 줄 얼마나 알겠는가? 눈을 감고 귀를 기울이는 나한테, 누가 헌책을 읽어 준들 새책을 읽어 준들 ‘헌책에 흐르는 이야기’가 헐게 들리거나, ‘새책에 흐르는 이야기’가 새롭게 들린다고 느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야기를 읽는다. 헌책은, 우리더러 책을 읽을 적에 겉이 아닌 속을 읽으라고 속삭인다.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를 읽으라고 속살인다. 1993.2.20.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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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 1

헌책은 낡은 책이 아니다. 낡은 책이라면 ‘낡은책’이라고 한다. 헌책은 오래된 책이 아니다. 오래된 책이라면 ‘오랜책’이라 한다. 헌책은 옛날 책이 아니다. 옛날 책이라면 ‘옛책’이라 해야겠지. 그러면 헌책은 뭔가? 말 그대로 ‘헌책’이다. 헌책이란, 누가 먼저 손을 댄 책, 어느 한 사람 손길이 먼저 닿은 책이다. 새책이란 뭘까? 새책이란 아직 아무도 손을 안 댄 책이다. 그러니 도서관에 있는 책이라면 모두 헌책이다. 왜 그러겠는가? 새책집에서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기는 동안 사람손을 탔으니 헌책이지. 책으로 삶길을 배우는 사람이 건사하는 서재에 있는 책도 헌책이다. 책으로 삶길을 배우려 하니 모든 책을 차근차근 손으로 펴서 읽었겠지. 모든 읽힌 책은 헌책이다. 아직 안 읽힌 모든 책은 새책이다. 읽히면서 사랑을 받았기에 헌책이다. 앞으로 읽히기를 바라며 기다리기에 새책이다. 1992.9.28.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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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1

아기가 태어나면 어버이는 으레 가장 좋은 옷감을 살펴 가장 이쁘면서 사랑스러운 배냇저고리를 입히고 싶다. 아기한테 입힐 배냇저고리를 헤아리며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고, 미리 삶고 볕을 쪼여 아기가 이 땅에서 햇볕이며 바람이며 냇물이며 풀내음이며 싱그러이 누리기를 빈다. 2008.6.15.


옷 2

곁님 어버이도 우리 어버이도 큰아이한테 고운 옷을 입히고 싶다며 돈을 주시고, 아이를 데리고 옷집에 가기도 한다. “아기가 곧 자라서 올해밖에 못 입힐 텐데 굳이 안 사 주셔도 되어요.” 하고 여쭈니 “에이! 안 그래요! 올해만 입힌다고 하더라도 아이한테 고운 옷을 입혀야지!” 하는 말씀. 듣고 보니 그렇다. 한 해를 입더라도 아이가 가장 반길 뿐 아니라, 아이를 바라보는 어버이로서도 해사하구나 싶은 옷을 지어서 입힐 노릇 아닌가. 한 사람이 한 벌 읽고 지나갈 글이라서 아무렇게나 써도 될까? 아니다. 다문 한 사람이 읽어 줄 글이어도 온마음을 쏟을 노릇이다. 2008.12.20.


옷 3

“어쩜 아이들 옷은 이렇게 이쁘게 지을까? 내가 입고 싶어.” 곁님이 문득 말한다. 이 말을 듣고서 꼬까옷을 새삼스레 바라본다. 참으로 꼬까옷이 얼마나 곱고 이쁜지 모른다. 그런데 어른들 옷은 이렇게 곱거나 이쁘지 않기 일쑤이다. 게다가 사내가 입는 옷은 너무 투박하기 일쑤. 왜? 왜 사내한테는 꽃옷을 안 입힐까? 왜 사내는 시커먼 옷을 입히려 할까? 사내도 가시내도 모두 꽃사람, 그러니까 꽃사내에 꽃가시내일 텐데, 거무튀튀한 옷을 입히면서 마음도 몸짓도 거무튀쥐하지는 않을까? 사내한테 배롱꽃빛 옷을 입히고 파란 하늘빛에 찔레꽃처럼 하얀 옷을 입히면 마음결도 몸짓도 확 달라지지 않을까? 군인한테 시커먼 옷을 입히는 까닭을, 공무원한테 똑같이 시커먼 옷을 갖춘옷이라며 입히려는 뜻을 어렴풋이 알 만하다. 2009.8.20.


옷 4

중·고등학교 여섯 해만 학교옷을 입히려는 이 나라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왜 학교옷을 안 입힐까? ‘마음대로 걸치는 옷’일 적에 아이들 사이에 ‘위화감’이 생긴다는 교육청 논리인데, 앞뒤가 안 맞는다. 그러면 초등학교는 걱정없고? 또 고등학교를 마친 뒤에는? 스무 살부터는 모든 젊은이가 ‘위화감’을 느끼고 살아도 되나? ‘위화감’을 따지겠다면, 값비싼 자동차도 없어져야 하지 않나? 이 나라 구석구석 어디를 보아도 온통 위아래로 가르는 몸짓인데, 왜 중·고등학교 푸름이를 ‘굴레옷’으로 꽁꽁 조여서 괴롭히려 들까? 아이들은 학교옷이 아닌 사랑옷을 입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은 저마다 다른 푸른 숨결을 피울 수 있는 차림새를 스스로 살피면서 지을 줄 알아야 한다. 굴레옷에 조이며 자란 푸름이 손에서 어떤 글이 태어날까? 굴레옷에 갇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 입에서 어떤 말이 샘솟을까? 사랑옷을, 날개옷을, 꽃옷을, 하늘옷을, 숲옷을, 기쁜 살림옷을 누릴 적에 비로소 글다운 글이며 말다운 말이 자란다. 2010.3.4.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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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님

한국말은 바탕이 어깨동무이다. 한국말은 위아래로 가르려 하지 않는다. 섬기거나 아끼는 마음은 있되, 위아래 아닌 어깨동무로 나아가려 한다. 이 얼거리를 안다면, 가시버시 사이가 되든, 어른하고 아이 사이가 되면, 어떤 말씨를 짓거나 가꾸어야 슬기롭고 사랑스러운가를 깨달을 수 있다. 나는 예전부터 ‘아내’란 이름이 몹시 거북했다. ‘아내’는 일본 한자말 ‘내자(內子)’를 고스란히 옮긴 말씨일 뿐이다. 예전에는 이를 ‘안해’라 했고, 요새는 ‘아내’로 적는데, “안에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가시버시 가운데 ‘가시(각시)’ 쪽은 집안에 머무는 사람이라는 뜻을 나타내니, 한국말하고는 안 어울린다. 어떤 이름을 써야 좋을까 하고 헤매다가 2004년에 그물코 출판사 책지기님이 쓰는 ‘옆지기’가 퍽 좋아 보여 그 말씨를 배워서 쓰기로 했다. 그러나 ‘옆지기’는 썩 혀에 안 붙어서 힘들었다. 이제 오늘부터 ‘곁님’이란 이름을 새로 헤아려서 쓰려 한다. ‘옆’하고 ‘곁’은 느낌이나 뜻이나 결이 살짝 갈린다. 어린이가 해님이나 꽃님이라 말하듯, 곁에 있는 이를 ‘곁이’ 아닌 ‘곁님’이라 이르고 싶다. 서로 아끼고 서로 돌보는 마음을 ‘님’이란 말끝에 실으려 한다. 사내도 가시내한테 곁님이요, 가시내도 사내한테 곁님이다. 어깨동무하는 이름이다. 2013.11.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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