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서 아닌 책지기

도서관에서 일하면 ‘사서’라 하고, 책집에서 일하면 ‘점원’이라 하고, 출판사에서 일하면 ‘직원’이라 한다. ‘사서·점원·직원’이란 한자말 이름을 그냥 쓸 수도 있을 테지만, 나는 새이름을 그린다. 도서관에서도 책집에서도 출판사에서도 모두 ‘책’을 다루되, 이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면서 돌보려는 손길이자 숨결일 테니 ‘책지기’라 이야기하고 싶다. 이러면서 더 생각한다. 사서 아닌 ‘도서관 책지기’라면, 도서관을 어떻게 꾸릴 적에 즐겁고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울까 하고. 첫째, 책지기는 ‘갖출 책’을 알아보고서 사들여 두는 일꾼. 둘째, 사람들이 ‘구입 희망 도서 신청’을 한대서 아무 책이나 받아들이지 않고 알맞게 가릴 줄 아는 일꾼. 셋재, 대출 실적이 없더라도 서른 해를 넘고 쉰 해를 넘으며 백 해를 넘도록 도서관에 건사할 만한 책을 지키거나 보살피면서 둘레에 알릴 수 있는 일꾼. 넷째, 도서관에 굳이 둘 만하지 않은 책을 사람들이 ‘갖춰 달라고 바랄’ 적에 ‘그런 책은 스스로 사서 읽으셔요’ 하고 상냥하게 잘라말할 줄 아는 일꾼. 다섯째, 만화책이나 사진책을 얕보지 않을 뿐 아니라, 겉모습이나 이름값으로 책을 바라보지 않고, 속에 담은 넋하고 이야기로 어떤 빛이 있는 책인가를 눈여겨보고 솎아낼 줄 아는 일꾼. 이 다섯 가지 매무새일 적에 비로소 도서관 책지기라고 여긴다. 2019.4.2.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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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한 혐일

《앤의 마고마고 도서랜드》라는 만화책을 읽었는데 이렇게 재미없고 생각날개가 밑바닥인 만화가 다 있나 싶어 혀를 내둘렀다. 겉보기로는 만화이되 도무지 만화라고 여길 수 없다고 여겼다. 그런데 이 만화를 그린 히구치 타치바나라는 분은 ‘혐한 작가’라고 하네. 한국을 끔찍히 싫어하는 이이 만화라면 안 읽겠다는 분도 있고, 이를 아랑곳하지 않는 분도 있다. 사람마다 다르게 보겠지. 다르게 보니까 엉뚱하게 토를 달면서 ‘혐한’ 같은 말을 일삼으면서 뜬금없이 깎아내리리라. 곰곰이 보면 한국이든 일본이든 못난이는 못난이 짓을 한다. 아름이는 아름이다운 꽃일을 한다. 한국사람이라서 더 낫지 않고, 일본사람이라서 덜떨어지지 않다. 친일파란 이는 한국사람이지 일본사람이 아니다. 한국 역사나 사회나 문화를 제대로 알리고 가꾸며 사랑하는 일본사람도 무척 많다. 히구치 타치바나라는 분 만화책을 여러 가지 읽는 동안, 이이가 어떤 마음결이나 눈길인지 몰랐으나, 만화로만 볼 적에 너무 재미없었다. 꼭 그러하지는 않을 텐데, 코앞에 있는 이웃나라를 제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 얕은 마음결이나 눈길인 터라, 만화라는 생각날개를 활짝 꽃피우는 길하고도 멀어지지 않을까? 무턱대고 싫어하는 눈에 봄꽃이 보일 턱이 없다. 마냥 손사래치는 마음에 들딸기 맛난 맛이 스며들기 어렵다. 눈길을 틔워야 생각이 활개친다. 마음을 열어야 글길도 그림길도 사진길도 살림길도 열고, 이러면서 사랑길을 새롭게 지을 만하다. 2019.4.3.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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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지 모르겠다

사람은 사람. 사람이 짓는 책은 사람들 삶이 담기지. 그래서 모든 책은 쪽이며 두께이며 짜임새가 다르다. 쉰 쪽짜리 책이 있고 삼백 쪽짜리 책이 있고 천 쪽짜리 책이 있다. 삼백 쪽짜리 낱권이 열 자락이 모이는 긴긴 소설이 있고, 이백오십 쪽짜리 낱권 쉰 권이나 백 권이 모이는 긴긴 만화가 있다. 자, 생각해 볼까? 쉰 권이나 백 권짜리 긴긴 만화를 다루는 글을 쓸 적에 어떻게 쓰면 좋을까? 쉰 권을 하나씩 따로 다루는 글을 쉰 자락에 걸쳐서 쓸 수 있겠지? 긴긴 만화 쉰 권이라면 적어도 열다섯 해나 스무 해라는 긴긴 나날을 쏟아부어야 가까스로 이룬다. 긴긴 소설만 긴긴 나날을 들이지 않아. 긴긴 만화도 어마어마하다 싶은 나날에 걸쳐서 어마어마하다 싶은 땀이며 품을 쏟아붓지. 이런 긴긴 만화책을 몇 줄로 간추릴 수도 있지만, 있는 그대로 느낀 이야기를 쏟아내어 조금 길다고 느낄 만하게 쓸 수도 있겠지. 생각해 봐. 종이신문은 글길이를 늘리기 힘들어. 그러나 누리신문은 글길이를 그렇게까지 얽매지 않아도 돼. 무척 길다 싶은, 책을 이야기하는 느낌글로 자그마치 글종이 쉰 쪽이나 백 쪽이나 이백 쪽짜리를 써 볼 수 있어. 생각해 봐. 논문만 길게 쓰거나 책 하나가 되어야 하니? 만화책 하나를 놓고도 논문을 쓸 수 있고, 책 하나뿐 아니라 두어 권이 될 만한 느낌글을 쓸 수 있어. 거꾸로 보면, 스무 해에 걸쳐 쉰 권이 나온 만화책을 놓고서 고작 다섯 줄로 느낌글을 갈무리할 수 있지. 이처럼 고작 쉰 쪽자리 작은 만화책을 놓고서 자그마치 오백 쪽짜리 느낌글을 새롭게 쓸 수도 있어. 뭐가 길지? 뭐가 긴지 모르겠어. 뭐가 크지? 뭐가 큰지 모르겠다. 2007.3.21.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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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속

자전거를 탈 적에 모든 이가 평속 35km로 달려야 할까? 어떤 이는 대단히 잘 달리지만 일부러 5km로 달릴 수 있어. 어떤 이는 그럭저럭 15km를 지킬 수 있어. 어떤 이는 달리는 틈틈이 쉴 수 있어. 우리가 쓰는 글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우리 사는 이곳도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가 아닐는지? 우리가 하는 일, 우리가 만나는 사람, 우리가 바라보는 삶터, 우리가 부대끼는 모든 것은 자전거 타기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누구는 평속 35km도 모자라다고, 평속 50km쯤 아무렇지도 않게 달릴는지 몰라. 누구는 평속은 안 따지고 신나게 쉬면서 신나게 놀면서 신나게 노래하면서 달릴 수 있지. 아니, 아예 ‘달리기’를 안 하고서 ‘노닐기’를 할 수 있어. 그뿐이야. 자전거에 몸을 실을 적에는 평속을 따지지 말자. 글을 쓰고 싶으면 ‘글’만 바라보자. 2007.3.19.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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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데일리

나는 〈북데일리〉라는 누리신문이 ‘최초의 책 이야기 전문 신문’이라는 이름을 내걸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썼다. ‘맨 처음’ 했다는 대목이 뭐가 그리 대수로운가. 둘째는 떨어지거나 처지나? 셋째이면 어떻고 막째이면 어떨까. ‘맨 처음’으로 치자면, 나는 대한민국에서 맨 처음으로 “헌책방 모임”을 열었고 “헌책방 이야기책”을 펴냈으며 “헌책방 전문 사진”을 맨 처음으로 찍었다. “헌책방 사진 전시회”도 맨 처음으로 했고, “우리말 운동가” 이름도 가장 어린 나이에 올렸더라. 그러나 이런 ‘맨 처음’이 뭐가 대수로울까. 일찍 했든 늦게 했든, 얼마나 올바르고 알뜰하고 재미나고 보람차고 신나고 조촐하게 제 길을 걸어가느냐가 대수롭지 않을는지? 맨 처음 어느 일을 열었더라도 첫마음을 잃거나 잊거나 나뒹군다면, ‘맨 처음’이란 무슨 값이 있을까? 내가 맨 처음으로 무엇을 했대서 누가 둘째나 셋째나 쉰째로 이 일을 하더라도 나만 목소리를 내야 할 턱이 없다. 누구나 다 다른 목소리로 어떤 이야기를 신나게 펼 수 있으면 좋다. 그리고 이렇게 해야 재미있고 즐거운 이야기판이 태어난다. 우리는 ‘맨 처음’보다는 ‘어떤 책 이야기를 어떻게 누구와 함께 언제 어디에서’ 하는가를 대수롭게 보아야지 싶다. 책이란 ‘다 다름’이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눈길로 바라보며 생각한 이야기를 다 다르게 담아서 다 다른 자리에서 사고팔기에 다 다른 때에 다 다른 까닭으로 만나서 다 다르게 받아들이며 읽고 다 다른 삶에 받아들이거나 곰삭이도록 이끌어 주는 ‘책 누리신문’이 될 만하다고 느낀다. 이리하여, 나는 이 ‘다 다름’ 가운데 한 가지 목소리를 내고자 했다. 예전부터도 그랬고 오늘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이렇게 내 목소리를 내며 살 생각이다. 그러면 오늘 ‘북데일리’가 보여주는 목소리는 어떠한가? 얼마나 ‘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다 다른 삶’을 바탕으로 ‘다 다른 책’을 보여주는가? 〈북데일리〉에 첫 글을 보내고 나서, 이곳에 실린 글을 죽 살피다가 ‘아차, 내가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하기는 했다. 〈북데일리〉는 어느 한곬 목소리만 내는 ‘책 이야기 누리신문’인 줄 미처 몰랐으니까. 그러나 나는 나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삶도 하늘처럼 섬겨야 하며, 내가 모르거나 못 느끼는 대목도 짚기 때문에, 고개숙여 배워야 한다고 느끼며, 그 뒤로도 꾸준하게 글을 보내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북데일리〉가 나한테 책을 이야기하는 글을 써서 보내 달라고 대표기자가 찾아와서 여쭈었을 적에도 이곳 스스로 결을 넓히고 품을 키우려 했으리라 하고 여겼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고서 돌아보니 아니네. 〈북데일리〉는 그저 ‘책을 이야기하는 첫 누리신문’이란 이름을 얻고자 했을 뿐, 온누리 온갖 책을 두루 다루려는 눈길이나 손길이 아닌, 외곬로 치달으면서 온누리 숱한 책을 모르쇠로 등돌리거나 내치려는 곳이었네. 이 모습을 둘러싸고서 몇 마디 이야기를 한 나를 뜬금없이 ‘강퇴’한 대목으로도 깜짝 놀랐다. 나를 ‘책을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모시려 할 적은 언제이고, 계약해지나 해명 한 마디 없이 회원계정까지 없애버리는 짓은 뭘까? 내가 쓴 글이 정 거북했으면 전화로든 누리글월로든 따지거나 물어보면 되지 않나? 또는 누리신문에서 ‘수다판’을 펼 수 있겠지. 곰곰이 따지면 그대들은 계약위반에 명예훼손에 인격모독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다. 그대들 〈북데일리〉에 하고픈 말은 오직 하나이다. 나는 내 글이 〈북데일리〉에 갑작스레 못 실리는 일이 안타깝지 않다. ‘최종규이든 다른 사람’이든, ‘다 다른 생각과 목소리로 살아가는 사람’ 이야기가, 칼을 쥔 사람 힘 앞에 난데없이 목아지가 달아날 수 있다는 이런 어마어마한 칼부림이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으면서 일어나는 일이 놀라울 뿐이다. 총자루나 칼자루보다 붓자루가 무섭구나 하고 느낀다. 붓자루가 사람을 더 칼로 후벼파는구나. 책을 말한다는 붓자루로도 얼마든지 금을 긋고서 이 나라를 갈기갈기 찢으려는 일을 벌일 수 있구나. 2007.3.20. (덧말 : 〈북데일리〉라는 ‘책을 말하는 누리신문’은 그 뒤 그리 오래 지나지 않아서 아무 자취를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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