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 최민식의 포토에세이
최민식 지음 / 하다(HadA)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젊은이한테 남길 수 있는 사진 선물
 [찾아 읽는 사진책 37] 최민식,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하다,2010)



 늙은 사람이 젊은 사람한테 남길 수 있는 선물은 돈이 아닙니다. 늙은 사람은 젊은 사람보다 ‘먼저’ 살아낸 나날을 뒤돌아보면서 ‘말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늙은 사람이 남길 수 있는 말씀이란 사랑과 믿음과 나눔입니다. 사랑과 믿음과 나눔은 착하고 참다우며 아름다이 일굽니다.

 “본래 우리 인간의 신체는 태양, 산과 강, 초목, 대지로 이루어진 자연 속에서 생활하도록 만들어졌다(90쪽).”고 이야기하는 사진수필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하다,2010)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두 아이와 아픈 옆지기를 보살피며 살아가는 아버지로서 생각합니다. 저녁나절 잠자리에 들기 앞서, 오늘도 겨우 하루를 보냈구나 하고 돌아보면서 마무리 똥기저귀 빨래와 집식구 옷가지를 빨래를 하고 나서 책을 펼쳐 들고 생각합니다. 이제 갓 석 주를 살아낸 둘째는 똥기저귀를 날마다 마흔 장 남짓 내놓습니다. 네 살 첫째는 하루 내내 저랑 놀아 달라며 뛰고 달리며 노래합니다. 밥하고 빨래하며 치우기만 하더라도 하루는 아주 짧고 깁니다. 등허리를 누일 틈이 없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최민식 님이 남자 아닌 여자로서 ‘사람을 찍는 사진길’을 쉰 해쯤 걸었을 때에는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라는 책에 어떤 이야기를 담았을는지 궁금합니다.

 “지식의 가치란 아는 것의 양이 아니라 올바른 목적을 위해 그것을 얼마나 잘 활용할 수 있느냐에 있다(28쪽).” 같은 말마디는 참으로 옳습니다. 옳기는 옳은데 쉬운 말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이 아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올바로 잘 살아갈 수 있느냐에 따라 값이 달라진다’고 이야기해야 여느 살림을 꾸리는 어머니나 할머니도 알아들을 만합니다.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만, 최민식 님 말씀을 그러모은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라는 책은 ‘한국에서 남자 어른’으로 살아낸 발자국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한국 남자 어른’으로서 젊은이한테 들려주는 말이지, ‘살림하며 살아온 어른 한 사람’으로서 젊은이한테 들려주는 말이 아닙니다.

 살림하며 살아가는 어른이라면, “꼭 고전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도 한자는 우리들의 삶과 문화를 이해하고 우리 말과 사유체계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반드시 배우고 알아야만 한다. 변화하는 21세기 정보화시대에 적응해 나갈 수 있는 능력과 도덕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한자 조기교육과 국·한문혼용을 생활화해야 할 것이다. 정부는 한문교육 정책을 하루 빨리 반영하고, 학생들은 독학으로라도 한문을 배워야 마땅하다(44쪽).” 같은 이야기를 펼치지 않습니다. 나라밖 고전을 읽자면 영어나 독일말이나 라틴말을 알아야 할까요? 일본사람은 한자를 몰라도 일본 고전을 알뜰히 읽을 뿐 아니라, 나라밖 옛책(고전) 또한 알뜰히 읽습니다. 왜냐하면, 옛책은 옛말로 되었는데, 옛말을 따로 배워서 읽을 수도 있으나, 뜻있는 옛책이라면 어김없이 오늘날 쉬운 말로 다시 쓰기 마련이거든요. 한자를 함께 쓰자고 틈틈이 외치는 ㅈㅈㄷ 신문조차 신문글을 한자로 적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머릿기사 이름을 뽑을 때에 북녘을 ‘北’으로 적거나 미국을 ‘美’로 적기는 하지만, 신문글에는 ‘북한’이나 ‘미국’이라고만 적습니다. 오늘날 우리 글살림은 오직 한글입니다. 한글을 옳고 바르게 써야 하고, 우리 말삶을 참다이 깨달아야 합니다. 한자는 중국글이나 한국글이 아닐 뿐더러, 한자로 지은 낱말이 많은 까닭은 지난날부터 ‘이 나라 권력자들이 중국글을 빌어 쓰던 낱말이 많았기 때문’이지 ‘이 나라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이 중국글을 빌어 생각을 주고받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가난한 사람들 자리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밝히는 최민식 님이라 한다면, 이처럼 외치는 이야기는 앞뒤가 어긋날 뿐 아니라 올바르지 않습니다.

 영어를 아무 데나 함부로 쓰는 젊은 사진쟁이들한테 한자를 배우라고 외치는 목소리는 얼마나 씨알이 먹힐는지 모르겠습니다. 젊은 사진쟁이는 영어도 한자도 아닌 한글을 바른 우리 말로 가다듬으면서 즐기거나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이 알아야 할 말은 한국말이고, 한국사람이 할 사진은 한국사진입니다. 한국사람은 세계말이나 세계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은 한국말로 빚은 한국사진을 할 때에, 이 한국사진이 세계사진이 되기도 할 뿐입니다. 미국사람이래서 세계사진을 하지 않고 미국사람은 미국사진을 하며, 독일사람은 독일사진을, 스웨덴사람은 스웨덴사진을 합니다.

 뜻있는 옛책이라지만 오늘날 쉬운 말로 다시 옮기지 못하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뜻있는 옛책이라면 쉬운 요즘말로 찬찬히 옮기기 마련입니다. 정약용이든 이규보이든 홍대용이든 허난설헌이든 쉬운 요즘말로 옮겨서 새롭게 다시 읽습니다. 정약용을 한문으로 읽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더 생각한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한글을 쓰는데, ‘훈민정음이 버젓이 있던 조선 끝무렵’ 한국 지식인 가운데 훈민정음으로 쉽고 바르게 글을 써서 펼친 사람은 몹시 드물어요. 삶이 이와 같은데 왜 한자를 배워야 할까 알쏭달쏭합니다. ‘여느 수수하고 투박한 사람’ 삶과 눈높이를 헤아리지 않으면서 ‘권력자 한문’으로 글을 쓴 사람들 책을 굳이 오늘날 사람들이 애써 읽어야 할는지 아리송합니다. 거듭 돌아보자면, ‘21세기 정보화·세계화’라 하니까 ‘한자 섞어쓰기(국한문혼용)’뿐 아니라 ‘영어 함께쓰기(영어병용)’를 하자고 외쳐야 할 테지요. 그런데, 정보와 세계를 다루는 새로운 2000년대인 만큼 너나없이 즐거이 나눌 쉬운 말글을 살피며 북돋울 수 있어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길은 사진과 함께 살아가는 길입니다. 사진기 다루는 솜씨만 빼어나대서 사진을 훌륭히 찍지 않습니다. 사진틀이 멋들어진다지만 사진이야기까지 멋들어지지 않으니까요. 내 삶을 일구는 매무새가 아름다울 때라야 내 사진 또한 아름답습니다. 곧, “관찰 결과가 쌓일수록 역사도 쌓여 가고, 그렇게 해서 축적된 역사는 다시 관찰력을 결정한다(166쪽).”는 말은 옳지 않습니다. 내가 내 삶을 얼마나 참다이 일구느냐에 따라 내가 내 삶과 이웃 삶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달라집니다. 내 삶을 참다이 일굴 때에는 사진기를 쥐어 바라보는 눈길 또한 참답습니다. 내 삶을 거짓되이 겉치레할 때에는 사진기를 들며 마주하는 눈매 또한 거짓됩니다.

 착한 사람이기에 착한 사진을 얻습니다. 예쁜 사람이기에 예쁜 사진을 얻습니다. 스스로 거룩하게 살아가지 않고서 거룩해 보이려는 사진을 얻으려 한다면, ‘거룩해 보이는’ 사진은 만들겠지만 ‘거룩한 사진’은 태어나지 않아요.

 사진길을 무척 오래 걸었던 최민식 님은 ‘훈계록’보다는 ‘참회록’을 써야 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는 오직 꾸짖는(훈계) 말만 가득합니다. 스스로 뉘우치는(참회) 이야기는 조금도 엿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꾸짖는 말마디조차 자꾸 어긋납니다. 곁길로 새거나 벼랑길로 치닫습니다.

 최민식 님은 “내 사진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은 현실의 생활 형태 속에, 즉 인간 생활 속에 존재한다(259쪽).”고 이야기하면서, 정작 그림쟁이 고흐 님 그림을 다룰 때에는 “〈감자 먹는 사람들〉은 가난한 삶과 힘든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으나 노동하는 사람이 대지에 뿌리내리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인상주의의 화폭에서 부르주아의 감성적 흔들림이 엿보인다면, 고흐의 화폭에서는 무겁고 거칠지만 든든한 느낌이 전해진다(221쪽).”고 이야기합니다.

 가난하고 힘들게 살면서 ‘가난하고 힘든 삶’을 그림으로 담은 고흐 님 〈감자 먹는 사람들〉인데, 이 그림이 “가난한 삶과 힘든 노동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니요? 최민식 님은 고흐 님을 “부르주아의 감성적 흔들림”이 아니라고 이야기하지만, 고흐 님 또한 ‘인상주의 그림쟁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고흐의 그림에는 노동하는 사람에 대한 깊은 애정이 담겨 있다(221쪽).”고 적으면서 어떻게 가난한 삶과 힘든 일을 꾸밈없이 그리지 않았다고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가난한 삶과 힘든 일을 꾸밈없이 담은 그림이기에, 이 그림에는 가난한 사람과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을 따스한 사랑으로 감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참말 여러모로 궁금합니다. 바라보는 사람에 따라 달리 바라볼 수 있는 일이기는 하겠지만, 참말 이와 같다고 못박으면서 사진길을 걸어온 나날이 아름답다 할 만한지 궁금합니다.

 고흐 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흙일꾼 손’을 보라는 그림입니다. 흙일꾼 손이 얼마나 흙빛을 닮으면서 울퉁불퉁하고 커다란가를 보라는 그림입니다. 시커먼 손이 아닌 흙빛 손입니다. 얼굴도 흙빛입니다. 옷도 집도 신도 밥상도 모두 흙빛입니다. 그런데 감자에서 모락모락 김이 납니다. 웃는 낯도 우는 낯도 아니요, 슬픈 낯도 기쁜 낯도 아닙니다. 그예 하루를 고맙게 돌아보면서 즐거이 끼니를 맞아들이는 낯입니다. 가난하고 힘들다면 가난하고 힘든 그대로 흙일꾼 삶인 〈감자 먹는 사람들〉입니다.

 새벽 네 시 반, 둘째 오줌기저귀를 갈며 생각에 잠깁니다. 사진쟁이 최민식 님이 ‘더 나은 사진’과 ‘더 가난한 사람들 사진’을 한 장 더 찍으려고 바지런히 다리품을 판 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만, 사진 한 장을 덜 찍더라도 집에서 아이들 오줌기저귀나 똥기저귀를 손수 갈며 손빨래를 하는 나날을 조금 더 보내면서 집식구 밥상을 손수 차리는 삶을 일구었으면, 최민식 님 글과 사진은 훨씬 달라지거나 사뭇 다른 길을 걷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사진은 가르침이 아니요 훈계도 아니며 꾸짖음이나 타이름 또한 아닙니다. 사진은 그저 삶이고, 따스한 삶이며, 따스한 손길로 사랑을 나누는 삶입니다. 아무쪼록 최민식 님 ‘사진길 마무리’는 예쁘면서 살가운 빛이 감돌면서 착한 사랑이 가득 담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4.6.12.해.ㅎㄲㅅㄱ)


― 사람은 무엇으로 가는가 (최민식 글·사진,하다 펴냄,2010.9.17./127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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