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딩, 자전거 길을 만들다
박남정 글, 이형진 그림 / 소나무 / 200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이 책 하나 76 ― 자전거 못 타게 하는 나라에서 우리 권리란
 : 박남정, 《초딩, 자전거 길을 만들다》



- 책이름 : 초딩, 자전거 길을 만들다
- 글 : 박남정
- 그림 : 이형진
- 펴낸곳 : 소나무 (2008.10.27.)
- 책값 : 8500원


 (1) 학교와 자전거


 숱한 뺑소니 사고(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다가 차가 자전거를 친 뺑소니 사고)를 겪고 난 뒤탈로 마음껏 자전거 나들이를 즐기지 못합니다. 이러다 보니 둘레에서는 으레 ‘작은 차라도 하나 사서 타고 다니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볍지 않은 사진장비에다가,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사들이는 책도 많은데, 아기까지 있는 몸으로 어찌 다 짊어지고 다니느냐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운전면허조차 일부러 따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리 차를 사라고 한들 소 귀에 읽는 불경일 뿐입니다. 저한테는 운전면허도 없지만 운전면허를 딸 생각도 없고, 앞으로 환경파괴가 하나도 없는 자동차가 나온다면 모르지만, 그때를 맞이하더라도 운전면허를 따고픈 마음이 없습니다. 비록 사고 난 자리(어깨, 팔꿈치, 손목, 무릎)가 결리고 쑤시고 아프지만, 틈틈이 짧은 거리나마 자전거로 움직입니다. 장보기를 하면서, 볼일을 보면서, 골목마실을 하면서 자전거를 탑니다.


.. 그때였다. 교실 앞쪽 벽에 달린 스피커가 칙칙거리더니 교감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아, 알립니다. 당산초등학교 어린이 여러분. 특히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다니는 어린이들은 잘 들으세요. 학교 주변 빌라와 아파트 주민들이 우리 학교 학생들이 자전거를 아무렇게나 세워 두는 바람에 불편하다며 항의를 하셨습니다. 에…… 또……, 학교 주변 도로도 사정이 좋지 않아 사고가 날 위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학교에서는 자전거 통학을 금지하기로 했습니다. 내일부터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오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알립니다. 절대로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오면 안 됩니다.” “뭐야, 무슨 소리야? 자전거를 타지 말라고?” ..  (16쪽)


 1987년 2월, 국민학교 졸업을 앞둔 어느 날, 앞으로 우리가 갈 중학교를 알려주는 담임선생은 저를 따로 불러서 “종규 넌 좋겠다. 앞으로 학교에 자전거 타고 다니겠네?” 하고 이야기했습니다. 제가 갈 중학교는 우리 국민학교를 통틀어 꼭 열여섯만 가게 되었는데, 집에서 짧지 않은 거리를 걸어가야 했습니다(사십 분 남짓). 다른 동무들이 많이 가는 ‘집하고 가까운 중학교’에는 뽑히지 않고(뺑뺑이였으니), 몇몇 아이들하고 멀디먼 데까지 가야 해서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습니다. 가까이 지내던 동무들하고는 죄다 떨어질 뿐 아니라, ‘자전거 통학은 무슨 얼어죽을 자전거 통학. 누가 자전거를 공짜로 사 주기나 하나?’ 하는 생각에 슬프기까지 했습니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제가 갈 고등학교는 중학교 바로 옆에 있는 학교로 떨어집니다. 뺑뺑이질은 어김없이 괴로운 가시밭길만 선사합니다. 중학교 다니던 그 길은 왼편으로는 목재처리장이 있고 오른편으로는 폐수처리장이 있으며, 학교 뒤로는 화학공장이 있고, 그 옆으로는 돌산이 있었습니다(건물에 쓰는 돌을 캐는 산). 중학교 세 해 동안 이 모진 터전을 겨우 견디었다 싶더니, 고등학교 세 해도 이 모진 터전에서 숨막혀야 하는가 싶으니, 울고 싶더군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서울로 보금자리를 옮긴 해, 대학교 앞 신문사 지국에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전거를 몹니다. 중학교 때 같은 반 동무는 새벽에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돌린 다음 학교에 오곤 했는데, 그무렵 그렇게 집안살림을 거들며 공부하는 녀석이 몹시 대단하다고 느꼈습니다. 저는 새벽 다섯 시 반쯤 일어나 어머님이 해 주신 아침을 먹고는 새벽 여섯 시 반 즈음 해서 학교에 닿아 아침 자율학습과 보충수업 앞서까지 ‘교과서 아닌 책’을 읽으면서 마음닦이를 한다고 깝죽을 떨었지만, 정작 책삶에만 기울고 이렇게 새벽나절을 땀흘리 일하는 데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음을 느꼈어요. 이리하여 ‘나도 언제쯤 동무녀석처럼 새벽에 신문 돌려서 살림을 보태고 낮에는 공부하고’ 하는 삶을 붙잡을 수 있을까를 헤아렸고, 이 헤아림은 네 해 만에 이룬 셈입니다.


.. 솔직히 혜진이는 자전거 통학이 금지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집이 학교와 가까워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올 일도 없거니와 평소에도 자전거 타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  (19쪽)


 국민학교 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반드시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 괜히 선생님 말씀을 어기고 ‘했다가 들키면’ 각목이나 당구채로 몽둥이찜질을 받았습니다.

 중학교 때, 학교에서 선생님들이 ‘하지 말라’고 하면 국민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하지 말아야 했습니다만, 제아무리 선생님들이 뺨따귀를 올려붙이고 야구방망이를 휘둘러도 ‘옳지 않다’고 느낀 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 일은 옳지 않습니다’ 하고 따졌습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은 체벌과 주먹질로만 다스리려고 할 뿐, 사람과 사람으로, 또 말과 말로 문제를 푸는 민주주의를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지난 아홉 해와 다름없이 ‘하지 말라’는 당신들 말씀을 하느님 말씀처럼 섬기라고 우리들한테 한 주에 두 차례씩 아침모임을 하면서 우리 머리에 집어넣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게 보아도 옳지 않다고 느껴지는 일을 옳다며 따를 수 없는 노릇. 이때에도 중학교 때와 다름없이 선생님들은 발길질과 체벌과 얼차려와 점수깎이로 우리 머리를 깔아뭉개려고 했습니다. 초중고 열두 해라는 세월은 민주주의와 조금도 가까이 사귈 수 없는 나날이었으며, 우리 나라는 조금도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우는 나라가 아님을 깨닫는 하루하루였습니다.

 이 열두 해를 더듬어 보면, 학교에 자전거를 타고 오는 동무는 없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오는 교사도 없었습니다. 걸어서 오는 동무나 교사도 아주 드물었습니다. 적어도 시내버스를 탑니다. 다음으로 자가용을 탑니다. 고등학교 때에는 학교버스를 탑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럴밖에 없구나 싶은데, 처음부터 ‘자전거 타고 학교를 오가는 사람이 없’으니, 제가 다닌 학교에서는 ‘자전거로는 위험하니까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오지 말도록!’ 하고 다그치는 교장 교감 교무주임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2) 사회와 자전거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는 동안, 신문배달 자전거를 타고 ‘그리 넓지 않은 강의실 건물’을 오갔습니다. 그리 넓지 않은 학교임에도 걸어서 움직이면 ‘쉬는 시간 10분은 금세 지나가기’ 마련입니다. 잠깐 오줌 누러 뒷간에 가기도 벅차고요. 초중고등학교 때처럼 한 교실에서 배우고 교사가 왔다갔다 하는 틀이 아니니, 강의 하나가 조금이라도 늦게 끝나기라도 하면, 다음 강의를 맡는 강사는 ‘지각생은 안 받겠다며 문을 잠그는’ 일이 생기기도 해서, 자전거로 달리면서 오가는 일은 퍽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때에도 자전거를 타고 대학교 강의를 들으러 오는 선후배나 동무는 없었다고 떠오릅니다. 다만, 제가 타는 짐자전거 바구니에 담배꽁초를 휙휙 버리는 사람은 늘 있었고, 신문배달 자전거 바구니 바닥에 책이 긁히지 않게 깔아 놓은 신문지 한 장을 몰래 훔쳐가는 사람 또한 언제나 있었습니다. 신문배달 자전거이고 신문사 지국 이름이 굵게 적혀 있던 만큼 자물쇠를 안 채우고 살았는데, 세 해 동안 이 자전거를 타고 대학교를 오가는 사이 딱 한 번 도둑을 맞았습니다.


.. 신호가 바뀌자 민우가 먼저 출발했다. 새 자전거를 탔으니 사이클 선수처럼 폼 나게 쌩쌩 달려 보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희망사항일 뿐, 속도를 늦추지 않고 달리다 사랑마트 앞길에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불록불록 솟은 보도블록 때문에 바퀴가 튕겨 오른 것이다. 롯데상가 앞에서는 숫제 자전거를 끌고 가야 했다. 아무렇게나 주차해 놓은 차들이며 가게에서 내놓은 짐이 아침부터 길을 다 차지하고 있었다. 인도로 차도로 오르락내리락 곡예를 하듯 자전거를 달려 학교 앞에 도착한 민우와 성태는 늘 하듯이 교문 앞 아세아 빌라 주차장에 자전거를 세웠다. 민우는 이미 세워져 있는 서너 대의 자전거를 밀쳐가며 기둥 옆에 자전거를 바짝 세웠다. 그리고는 앞바퀴에 하나, 뒷바퀴에 하나, 열쇠를 두 개나 채웠다. “이 정도 해 두면 아무도 안 가져가겠지?” 열쇠가 잘 채워졌는지 끈을 흔들어 보기까지 하고도 민우는 자전거 옆을 떠날 줄을 모른다. “그렇게 걱정되는데 새 자전거는 왜 타고 왔냐?” “학교 올 때 아니면 탈 시간이 없잖냐. 학원 마치고 집에 가면 캄캄한 밤이고. 학교 안에 자전거 보관소가 있으면 좋을 텐데…….” ..  (10쪽)


 신문사 지국을 나와 출판사에서 일하는 동안, 책 나르는 일을 하자면 자동차 없이는 안 됨을 느낍니다. 그러나, 늘 길이 꽉꽉 막히는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는 동안, 전철로 움직이거나 자전거로 움직이면 한결 빠르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 한 대 굴리자면 달마다 일꾼 한 사람 쓰는 돈이 들기 마련일 뿐더러 차값이나 보험값 들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차로 움직인다고 더 빠르지 않습니다. 저한테는 면허가 없으니 늘 얻어타고 움직이는데, 큰짐을 나를 때에는 짐차를 불러서 나르고, 여느 때에는 자전거로 움직이는 일이, 나무한테 고맙게 종이를 얻어서 책을 만들어 먹고사는 우리들로서는 마땅히 할 노릇이 아니냐는 생각을 지울 길 없었습니다.

 그러나, 영업을 하면서 자전거를 탄다고 하면 모두들 코웃음을 칩니다. 서울 시내만 해도 자전거로 다니면 훨씬 빠를 듯하다고 이야기하면 술이나 마시라며 말허리를 뚝 끊었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생각있는 일을 하는 어느 누구라도,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대학교를 다니는 동안, 자기 두 다리를 써서 자전거를 굴리면서 움직이는 일이 얼마나 자기 몸과 마음에 도움이 되는지 배운 적이 없습니다. 가르친 사람이 없으니 배울 사람이 없습니다. 가르치는 책이 없으니 스스로 익힌다 하여도 알아낼 길이 없습니다. 더 많은 책은 읽고 더 많은 스승한테 훌륭히 가르침을 물려받았다고는 하지만, 삶으로 곰삭여서 엮어내는 마음밭을 가꾸는 ‘깨우친이’는 드물었습니다.

 자전거를 타는 환경운동가가 몇 안 되고, 자전거를 타는 진보운동가가 얼마 안 됩니다. 자전거를 타는 생협운동과 여성운동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자전거를 타는 교육운동이나 사회운동과 정치운동은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박정희 독재경제가 ‘검은 굴뚝에다가 노동자 착취’로 이루어졌음은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검은 굴뚝에다가 노동자 착취’를 어떻게 씻어내면 좋을지를 헤아리거나 아는 사람은 씨가 말랐다고 할까요. 훌륭하다고 할 만한 생각을 엿들을 지식인은 둘레에 많이 보였지만, 훌륭하다고 할 만한 생각을 몸으로 옮기는 지식인은 좀처럼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만나는 자리에서도, 만나고 돌아선 뒤에도, 그분이 쓴 책을 읽으면서도.


.. “솔직히 처음에는 자전거 도로가 생기면 학교 다니기 편하겠다는 생각에 시작을 한 건데, 하면서 보니 자전거 도로가 생기면 우리뿐 아니라 우리 후배들, 그리고 우리 마을 사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었습니다. 물론, 거창하게 말하면 지구 환경도 지킬 수 있는 일이고요. 그래서 어제 제가 집에 가서 시장님께 편지를 써 봤습니다.” ..  (73∼74쪽)


 어쩌면, 아무래도, 어쩔 수 없이, 우리 형편에서는, 자전거란 한낱 ‘추억’인지 모를 노릇입니다. 헌책방이라는 곳을 ‘추억’을 넘어 ‘우리 삶(현실)’으로 받아들이거나 껴안을 줄 아는 지식인이 드물듯, 자전거를 추억이 아닌 우리 삶으로 느끼면서 스스로 땀흘리며 부대끼려고 하는 지식인이 드물더군요. 자기 몸을 써서 땀을 내는 일은 한결같이 손사래를 칩니다. 그러면, 우리 몫으로 다른 이들이 땀을 흘려 주어야만 할까요. 우리가 먹는 밥과 입는 옷과 자는 집은, 내 손이 아닌 다른 이들 값싼 품삯으로 얻어야만 하나요.

 밥하기, 빨래하기, 치우기, 아기보기를 비롯한 온갖 집안일을 제 두 손으로 치러내는 지식인이, 아니 ‘배운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자기 짐을 자기 가방에 넣어서 자기 어깨힘으로 나르는 사람, 또 자기 움직일 곳을 자기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서 찾아가는 사람, 밖에서 밥을 사먹지 않고 손수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는 사람, 무엇보다도 이웃사람 목숨을 아끼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일거리를 찾아서 즐기는 사람은, 아니 ‘배운 사람’은 얼마나 되는지 늘 궁금합니다.





 (3)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하는 나라


 베네수엘라 가난한 산동네 아이들은 자기한테 내려진 권리를 짓밟는 어른(공무원)한테 맞서서 다부지게 자기들 권리를 찾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놀이터를 만들어 주세요》라는 그림책에 담겨서,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한테 기쁨과 웃음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도 서울 당산초등학교 아이들은 자기한테 주어진 권리를 헌신짝처럼 내버리려는 어른(교장 교감과 빌라촌 주민)한테 맞서서 당차게 자기들 권리를 찾아냈고, 이 이야기는 이야기책 《초딩, 자전거 길을 만들다》에 소록소록 담깁니다.


.. “사실 학교에서 자전거 통학 금지를 했지만, 전 자전거를 타고 다녔습니다. 자전거 타고 다니는 게 편하고 재미도 있어서 포기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혹시라도 선생님한테 들킬까 봐, 친구들이 보고 학교에다 이야기할까 봐 걱정하면서 몰래 자전거를 타고 다녔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게 참 바보같이 느껴졌습니다. 자전거 타는 게 죄짓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건 그래.” 환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래서 전, 자전거를 안 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친구와 사이가 벌어진 것도 같지만, 죄 지은 사람처럼 눈치 보며 자전거를 타고 싶지는 않았어요. ……” ..  (37∼38쪽)


 그런데 우리 나라 당산초등학교 아이들 앞길은 무척 거칠었습니다. 어른들(교장 교감을 비롯한 다른 교사들)은 ‘말 한 마디로 손쉽게 자전거 금지령’을 내렸고, 아이들은 ‘말 한 마디 대꾸도 못하는 채 그저 따르기만 해야’ 했습니다. 따르지 않고 몰래 자전거를 탔어도 마음 한켠이 켕기면서 답답했다고 합니다. ‘자전거 금지령’을 내려야 했다고 해도, 학교 다른 교사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든지, 아이들 생각을 들었다든지 하지 않고, 그저 하루아침에 뚝딱 하고 만들어서 내려보내기만 할 뿐입니다. 더욱이, 아이들이건 어른들이건 자전거를 타고 학교나 일터를 오갈 권리가 있음에도, 이러한 권리를 지키지 않고, 외려 권리를 막거나 밟는 쪽으로 나아갑니다.

 학교 둘레 길 형편이 자전거 타기에 알맞지 않아서 자전거를 못 타게 한다는 생각이 아니라, 학교 둘레가 자전거 타기에 알맞는 길 형편이 되도록 마음을 쏟고 정책을 꾸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전거로 오가기에 알맞지 않은 길은 걸어서 오가기에도 알맞지 않을 뿐 아니라, 차로 오가기에도 나쁩니다. 우리들은 차를 교실 안까지 타고 들어가지 못하거든요. 더욱이 모든 학생과 교사가 자가용으로 다니게 된다면, 이리하여 서울이든 다른 도시이든 모든 사람이 자기 차로 움직이기만 한다면 우리 나라 길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사람이 걸어서만 움직일 때, 또 모든 사람이 자전거를 타고 움직일 때에는 아무런 말썽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자동차를 타면 말썽이 크게 생기고, 나라는 아주 뒤죽박죽이 되고 맙니다.


.. 1886년 자동차가 발명되면서 뜨겁던 자전거의 인기는 한순간 차갑게 식어 버렸어요. 그러다 20세기 후반부터 자전거에 대한 관심이 다시 치솟게 되었습니다. 자전거를 많이 탈수록 선진국이라 불릴 정도지요. 이번에도 이유는 자동차. 폭발적으로 늘어난 자동차가 지구를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 한국교통연구원에 따르면, 대도시 사람들이 지금보다 딱 두 배만 더 자전거를 이용해도 공기오염이 줄고, 기름 사용이 줄고, 도로를 새로 만들거나 수리하는 일이 줄고, 병원비나 약값이 줄어들어 3조 원 정도는 절약될 것이라고 합니다 ..  (97, 101쪽)


 자전거 수송분담률이 2.4%라고 하는 우리 나라인데, 우리 둘레를 돌아볼 때 ‘2%라는 숫자도 믿기 어렵다’는 말이 절로 나오곤 합니다. 우리 나라는 1%도 아닌 영점 몇 퍼센트밖에 안 되지 않을까 모를 일입니다. 숫자를 곧이곧대로 믿어서 2.4%라고 해도, 두 곱이 늘어 5%가 조금 못 되어 나라살림이 3조가 줄어든다면, 네 곱이 늘어 10%가 되면 나라살림은 십 조원 넘게 아낄 수 있을 테지요. 이렇게 되면 미국 무역에 기대어 달러값이 솟느니 주식값이 떨어지느니 하며 걱정할 일도 많이 걷힙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나아지게 할 일을 안 하면서 투정만 부리는, 아니,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아름답게 가꾸지 않으면서 우리 삶터가 지저분하거나 엉망이거나 좋지 않다며 투덜거리고만 있는 셈이라고 느낍니다.

 자전거길은 새로 만들지 않고, 찻길 50센티미터쯤만 페인트를 그어서 자전거한테 내주어도 넉넉합니다. 자전거 세울 자리가 마땅하지 않으면 건물 한쪽 빈자리에 마련하면 되기도 하지만, 자기 책걸상 옆에 접어서 놓아도 됩니다. 바퀴 큰 26인치짜리만 자전거가 아니라, 10인치와 16인치와 20인치짜리도 자전거입니다. (4341.1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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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하고 살벌한 음식의 역사 아찔한 세계사 박물관 1
리처드 플랫 지음, 김은령 옮김, 노희성 그림 / 푸른숲주니어 / 2008년 8월
평점 :
절판




 이 책을 본 아이들은 햄버거를 먹고 싶을까?


- 지은이 : 리처드 플랫
- 옮긴이 : 김은령
- 그림 : 노희성
- 펴낸곳 : 푸른숲 (2008.8.15.)
- 책값 : 9500원



 함께 책장을 넘기던 옆지기가, 책을 덮은 뒤 이야기합니다. “이 책을 본 아이들은 햄버거를 먹고 싶어 할까요?” 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참 그렇겠구나 싶습니다. 햄버거라는 먹을거리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온갖 공정을 꼼꼼히’ 말해 주지는 않으나, 우리가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가면서 몸속에 집어넣는 먹을거리로 무엇이 있고, 또 햄버거 같은 화학약품에 찌든 조합물하고 지난날부터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몸속에 알뜰히 넣었던 먹을거리가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어요. 우리한테 익숙한 먹을거리가 꼭 몸에 좋은 먹을거리인지 아닌지, 우리한테 낯선 먹을거리라면 우리 몸에 나쁜 먹을거리일지 아닐지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다고 딱 잘라서 말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보여주면서 우리 스스로 생각해 보도록 이끕니다.

 《달콤하고 살벌한 음식의 역사》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큰 문제를 아주 짤막하고 손쉽게 풀어내면서, 아이 스스로 자기가 날마다 먹는 밥이 어떠한가를 알아보도록 돕습니다. 다만, 이러한 이야기를 영국 옥스포드대학 출판부에서는 애써서 책 하나로 묶어내어 아이들한테 선물을 해 주는데, 우리 나라 서울대학 출판부나 연세대 출판부, 또 고려대 출판부를 비롯해서, 이화여대 출판부, 숙명여대 출판부, 그리고 나라에서 스스로 내로라하는 대학교 출판부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궁금해집니다. 또 대학교수님들은 무엇을 하는지 궁금한 한편, 우리 나라에서 손꼽히는 출판사들은 아이들한테 ‘어떤 책을 선물해 주려고’ 땀을 흘리는지 궁금합니다. “달콤하고 살벌한 우리 음식 발자취”를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일지요. (4341.9.2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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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소중해요
국제앰네스티 지음, 김태희 옮김, 니키 달리 외 그림 / 사파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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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한테 틀림없이 없는 책이기는 한데


- 글 : 국제엠네스티
- 그림 : 존 버닝햄을 비롯해 스물일곱 사람
- 옮긴이 : 김태희
- 펴낸곳 : 사파리 (2008.9.30.)
- 책값 : 12000원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자면 밥을 먹고 옷을 입고 잠을 자야 합니다. 밥과 옷과 집, 이 세 가지는 누구한테서도 빼앗을 수 없을 뿐더러 빼앗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돈으로 움직이는 한국과 같은 자본주의 나라에서는,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프며 크고작은 사고로 살림살이가 힘겨운 사람들을 죽음 구덩이로 내몰고 있습니다. 오로지 경쟁, 남보다 앞서야 하는 경쟁, 남을 밟고 올라서도록 하는 경쟁만 나돕니다. 이러다 보니, 어른이 읽는 책뿐 아니라 아이들한테 읽히는 책에서도 경쟁을 넘어 사랑과 믿음과 나눔이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줄거리를 제대로 못 담아내곤 합니다. 억지스런 가르침이나 우격다짐 같은 충효가 아니라, 살갑게 받아들일 아름다움과 고맙게 받아먹는 깨우침이어야 할 텐데, 자꾸만 ‘골든벨’이나 ‘우리 말 달인’과 같은 지식잔치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세계인권선언 서른 가지 조항에 따라 그림 하나씩 넣어 엮은 책 《우리는 모두 소중해요》는, 선언은 있으나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실천도 뒤따르지 않지만 한국땅에서는 거의 대접조차 받지 못하는 인권 문제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스물여덟에 이르는 그림책 작가들이 보여주는 재미나고 톡톡 튀는 그림결은 우리가 미처 못 보거나 못 느낄 ‘우리 둘레 이웃과 동무가 나와 함께 누릴 권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그림책을 그려낸 작가들이요, 아이들이 즐겁게 받아쥐는 그림책을 엮어낸 작가들이요,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들도 함께 즐겨보는 그림책을 펴낸 작가들입니다. 다 다른 나라에서 다 다른 삶을 꾸리는 동안 저마다 달리 부대끼거나 부딪힌 삶 한 자락들이, 그림책 한 권에서 골고루 섞이면서 무지개 빛깔로 새삼스레 피어난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책장을 한 장 두 장 넘기고 마지막 장까지 넘기고 나서는, 한숨이 푸우우욱 하고 나옵니다. 서른 가지 세계인권은 우리 삶하고 그다지 이어져 있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무엇이든 도시로 쏠리며 무너지거나 고달프게 되는 시골 농사꾼 삶, 같은 노동자이면서도 학력에 따라 대접이 달라지는 사회 얼거리, 돈-힘-이름 세 가지를 움켜쥔 권력자와 기득권이 제 밥그릇을 튼튼히 지키려고 공직과 언론을 쥐고 흔드는 모습, 인권을 짓밟는 국가보안법이 버젓이 살아숨쉬는 정치 흐름, 교육이 아닌 입시밖에 없어서 아이들이 벼랑에 내몰린 교육 터전, 돈 없으면 못난쟁이로 여겨지는 경제판, 아이 밥상뿐 아니라 어른 밥상에 유전자조작을 하고 비료와 항생제로 찌든 먹을거리만 올리게 되는 형편, 남북이 아직까지 끝없이 군대를 크게 키우며 무기산업에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붓고 보건복지는 뒷전인 나라, 그런데 우리 스스로 이 모든 문제를 바로보거나 고치도록 마음먹지 못하게 되고 만 얼거리, 값비싼 아파트만 새로 짓고 서민 살 골목집은 때려부수는 토건 왕국, 차 없으면 길거리에 나다닐 수 없게끔 짜여진 도시계획 …… 2000년대 세계인권선언이라면, 아니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권리’를 말하자면 이렇게 간지러운 곳을 긁어 줄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땅 우리 아이들한테 두루뭉술한 ‘명제’만 읽도록 할 일이 아니라, 지금 내 옆집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고 그이는 어떤 일로 즐거워하거나 괴로워하는지를 꼼꼼이 짚어내고 밝혀내면서 아이 스스로 세상을 알아보면서 세상을 밝힐 작은 촛불 하나 켤 수 있게끔 이끌어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만, 허울뿐인 외침이라고는 하나, 이렇게 ‘인권선언이 있음을 보여주는 그림책’이라도 달랑 하나쯤은 우리 나라 책방과 도서관에 꽂히면서, ‘여보시오, 인권이란 게 있읍디다’ 하고 말건넴이라도 해야 하는 우리 사회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한테 틀림없이 없는 소중한 그림책이지만 알맹이가 빠져 있어 아쉬운데, 그래도 이만한 책이라도 한 권 펴내 주니 고맙습니다. (4341.10.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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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손 빨래와 책읽기


 나흘 앞서부터 오른어깨가 전기라도 먹은듯 결리더니, 그제부터는 오른손목까지 결립니다. 갑자기 왜 이렇게 결릴까 궁금하지만, 지난날 자전거 타고 한창 다닐 때 뺑소니 차에 치여 오른어깨며 오른손목이며 오른팔꿈치며 망가지다시피 다친 적이 있어서, 이렇게 때 되면 아프게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하여, 날마다 수북히 쌓이는 아기 천기저귀 빨래를 하느라 애를 먹습니다. 옆지기가 아이를 낳은 지 일흔 날쯤 되는 만큼 몸은 어느덧 나아져서 혼자서 하루치 기저귀 빨래를 해내기도 하지만, 아무리 하루치 기저귀 빨래를 혼자서 해낸다고 하여도 옹글게 나아진 몸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루 힘을 빼면 이튿날은 곁에서 보기에 안쓰럽도록 몸이 축났구나 하는 느낌이 들고, 아기를 어르고 달랠 때에도 고단해 보입니다. 멍해지지요. 서로서로 힘들고 지치는데, 큰식구가 아닌 작은식구로 아이를 돌보자니 힘들고 지칠밖에 없습니다. 생각해 보면, 오늘날 집식구는 큰식구가 아닌 작은식구들뿐입니다. 작은식구가 되어 아이를 낳으니, 집식구 가운데 하나는 바깥에 돈 벌러 나가야 하고, 한 사람이 남아서 오로지 혼자 애를 보아야 하는데, 지치디지쳐서 어디 시설에라도 맡기고 싶어지고, 돈을 주고라도 사람을 써서 돌보게 하고 싶겠구나 싶습니다. 아이 키우는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기 어려운 작은식구가 아니랴 싶습니다.




 나흘 앞서는 어깨 결림을 느끼면서 왼손 빨래로 조금 하다가 거의 오른손 빨래로 했는데, 오른손목이 결리는 그제부터는 거의 왼손 빨래를 하다가 살짝 오른손 빨래를 합니다. 처음 왼손 빨래를 해 본 때는, 신문배달을 하다가 오른손가락이 다쳐서인데, 99년이었던가, 신문배달을 마치고 지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뒤에서 자전거를 들이받은 뺑소니 사고로 오른손목이 맛이 갔습니다. 그때는 죽지 않고 오른손목만 망가져서 한숨을 돌렸다고 할 텐데, 이제 와서 그때 그 아픔을 떠올려보았자 다친 오른손목이 나아질 일이란 없고, 다만, 그때 그렇게 다치면서 한 달 남짓 오른손 빨래를 할 수 없었습니다. 밥숟가락 들기도 어려웠는걸요. 그래, 처음 오른손가락이 다칠 때 조금씩 왼손 수저질을 익히고 왼글씨 쓰기를 해 보다가 그때 한 달 남짓 끙끙대며 왼손 빨래를 하고 왼손 젓가락질을 부지런히 했습니다. 그러면서, 오른손목이 많이 나아진 뒤로는 오른손으로만 하는 일을 크게 줄이고, 왼손으로 일손을 나누었어요. 셈틀을 쓸 때 다람쥐를 왼쪽에 놓고 씁니다. 오른쪽에 몰려 있는 숫자 글쇠를 안 쓰고 자판 위쪽에 한 줄로 있는 숫자 글쇠를 씁니다. 이 모두 오른손 짐을 덜고 왼오른손이 고르게 쓰이도록 하는 일입니다.

 엊저녁 열 시쯤 잠이 들었습니다. 세 식구 모두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힘들기도 했고, 옆지기가 많이 멍하다고 해서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저도 일감이 잔뜩 밀려 있고 빨래감도 우리를 기다리지만 다 미루고 잠들었습니다. 그렇게 일찍 자니 아기도 잘 자 주어 고맙기도 했지만, 저는 새벽 한 시부터 잠에서 깨었습니다. 새벽에 깨어 아기 기저귀를 갈고 나서 ‘오늘은 이제부터 일어나서 일할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다가, ‘아니야, 그래도 한 시간은 더 자야지’ 하고 도로 누워서 두 시에 다시 깼다가 네 시에 벌떡 일어납니다.

 네 시 반쯤, 옆지기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더 자도 될 텐데, 일찍 잔 까닭에 일찍 일어나서 말똥말똥해지는구나 싶습니다. 아기를 키우는 집에서는 온 식구가 일찍 자고 아빠 엄마가 새벽녘에 일어나 밀린 일손을 조용히 하면 훨씬 수월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기가 깨어 같이 놀아 달라는 낮에는 집안일이고 뭐고 붙잡기 어렵거든요. 차라리 온 식구가 일찍 자자고 하면 아기도 잡니다. 그러나 일이 많아서 늦어진다고 늦게까지 안 자면 아기도 안 자요. 그런데 용하게도 아기는 새벽에는 안 일어나 줍니다. 아침까지 내처 잡니다. 이리 고마울 데가 없는데, 어쩌면, 아기가 우리 두 사람을 헤아려 주는지 모릅니다.

 밀린 일을 어느 만큼 마무리하고 나서, 씻는방으로 가서 빨래를 합니다. 기저귀 일곱 장과 배냇저고리 한 장과 수건 한 장. 아기 똥오줌이 묻은 옆지기 옷과 속싸개가 있는데, 남은 빨래는 아침에 해 뜨면 하려고 남겨 둡니다. 오늘은 모든 빨래를 왼손 빨래로만 합니다. 햇수를 따지면 벌써 열 해가 되는 왼손 빨래인데, 아직 오른손 빨래만큼 비빔질이 잘되지는 않습니다. 오른손이 다치거나 아플 때마다 하기는 했던 왼손 빨래고, 오른손 빨래를 하는 틈틈이 왼손 빨래를 하기는 했지만, 제가 오른손잡이라 잘 안 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나 아픈 오른팔을 더 쓰기 어려우니 왼손으로만 북북 빠는데, 조금씩 비빔질 힘이 잘 들어간다는 느낌입니다. 문득, 지난달께 우리 도서관에 취재를 왔던 어느 촬영기사가 묻던 말이 떠오릅니다. “어떻게 이렇게 빨래를 잘하세요?”

 혼자서 살림 다하고 살면 저절로 하게 되는 빨래인데. 세탁기를 비롯한 기계문명을 아예 안 쓰거나 되도록 덜 쓰려고 하면 마땅히 하게 되는 손빨래인데. 내가 남자라 그렇지, 내가 여자였다면 그렇게 물어 보지 않았을 텐데. 여자가 아닌 남자라 해도 집살림을 알뜰살뜰 할 수 있도록 매무새를 가다듬을 수 있어야 할 텐데.

 비빔질을 하면서 문득, 세상사람이 ‘한 사람 삶’을 바라보는 눈이 너무 외곬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또다른 생각이 이어집니다. 고등학교 때인데, 반 아이들이 학교에서 공부깨나 한다는 동무들한테 묻던 말. “야, 넌 어떻게 그렇게 공부를 잘하냐?” 전교에서 1등을 홀로 차지하는 동무녀석은 이 물음을 꽤 자주 들었는데, 그 아이 지능지수는 저보다 한참 낮았고 반에서 그럭저럭 공부하는 동무들하고 엇비슷했지만, 시험성적은 꼭 높았습니다. 동무녀석은 늘 수줍게 웃으면서, “야, 내가 머리 안 좋은 건 너희들도 알잖아. 그냥 부지런히 하면 돼.” 하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동무녀석을 가만히 보면, 참 부지런히 공부에 파고들었고, 한번 파고들면 옆에서 떠들어도 떠드는 소리를 못 듣고 교과서나 참고서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타고나기를 마음모으기 잘하는 매무새였는지 모르나, 그런 타고남이 어느 만큼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보다는 그 동무녀석 스스로 자기한테 무엇이 모자라는 줄 또렷이 깨달으면서 자기가 바라는 길로 나아가고자 날마다 무던히 힘쓴 보람이 그런 시험성적으로 빛을 보지 않았으랴 싶어요.





 오늘 새벽, 왼손 빨래를 하면서 동무녀석을 떠올리고, 또 사람들이 저한테 뻔질나게 물어 보는, “어떻게 헌책방에서 그런 드문 책을 잘 찾아내셔요?” 하는 말, “어떻게 좋은 책을 찾아내어 읽어요?” 하는 말을 곱씹습니다. 옛적 동무녀석이 다른 동무들한테 하던 말처럼, “부지런히 헌책방을 다니면 책이 저절로 보여요.”, “좋다 나쁘다 가리지 말고 이 책 저 책 골고루 부지런히 오래오래 읽다 보면 저절로 느껴요.” 하는 말을 해 주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익숙한 왼손 빨래가 아니라, 한 해 두 해 한다고 잘할 수 있는 왼손 빨래가 아니라, 다섯 해 열 해 스무 해씩 해야 비로소 익숙해지는 왼손 빨래이며(왼손잡이한테는 오론손 빨래), 막다른 골목까지 밀리고 또 밀리면서 끝까지 견디고 이겨내면서 치러내어 몸에 배도록 하는 왼손 빨래입니다. 눈물 콧물 흘리면서 스승들한테 배우기도 하지만, 있는 돈 없는 돈 있는 시간 없는 시간 모두 바치고 바쳐 열 해고 스무 해고 들이면서 스스로 눈을 뜨게 되는 책읽기입니다. 가난뱅이라서 못 찍는 사진이 아니라, 가난뱅이임에도 죽어라 알바 뛰고 뭐 뛰고 해서 필름값 벌고 사진기값 모아 애써 한 장 두 장 찍는 가운데 몸뚱이로 배우는 사진찍기입니다.

 추천도서목록에 적힌 책을 줄줄줄 찾아서 읽는다고 해서 우리 스스로 좋은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훌륭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으로 거듭나지 않습니다. 멋진 사람이나 아름다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지 않습니다. 좋다는 책 몇 권 읽었다 하여도 괜찮은 사람으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이름난 사람이 알려주는 책이라든지, 훌륭한 분이 건네주는 책이라든지, 아름다운 이가 선물해 주는 책 몇 가지를 읽는다고 하여 우리 삶이 하루아침에 뒤바뀌면서 우리 넋과 얼이 새로워지지 않습니다. 피를 흘리고 땀을 흘려야 합니다. 피를 바치고 살을 들여야 합니다. 내 팔을 잘라서 바치듯, 내 다리를 베어서 드리듯, 온몸과 온마음을 쏟지 않고서야 ‘책 읽는 매무새’를, ‘책 알아내는 눈길’을, ‘책 보듬는 마음결’을, ‘책 꿰뚫는 가슴’을, ‘책 쥐어드는 손길’을, ‘책 짊어지는 등판’을 갈고닦을 수 없습니다. (4341.10.24.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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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지구온난화 시대에 도시와 시민이 해야 할 일
정혜진 지음 / 녹색평론사 / 2007년 11월
평점 :
품절





 도시에서 착하게 사는 길을 어떻게 찾을까
 [잠깐 읽기 16] 정혜진,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책이름 :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 글쓴이 : 정혜진
- 펴낸곳 : 녹색평론사 (2007.11.7.)
- 책값 : 1만 원



 (1) 내가 찾는 길


 옆지기가 스탠 냄비를 장만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노래하기에, 개수대 밑에 쟁여 놓기만 하고 안 쓰던 스탠 냄비를 꺼냅니다. 혼자 살던 예닐곱 해 앞서, 옛동무와 어머니한테서 받은 스탠 냄비인데, 혼자 먹고살면서 쓰기에는 크고 무겁다고 느껴서 고이 모셔 두기만 하고 있었는데, 이 냄비들을 꺼내니 옆지기가 깜짝 놀랍니다. 왜 이 좋은 스탠 냄비를 여태 쓰지 않고 그렇게 두었느냐고.

 뒷통수를 긁적입니다. 어떤 냄비를 써야 하는가를 잘 몰랐고, 냄비 하나가 우리 밥차림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를 제대로 살피지 않아 왔습니다. 부끄러운 노릇이지만,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모르기도 했으나, 저 스스로 알아보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선물해 주는 냄비는 으레 값비싼 녀석이었습니다. 저는 늘 값싼 냄비를 쓰고 있었습니다. 혼자 살면서 저 비싼 녀석을 쓸 까닭이 없으리라 생각했고, 또 아깝다고 여겼으며, 선물 받은 모양새 그대로 모셔 두기만 했습니다.

 그동안 쓰던 양은 냄비며 법랑 발린 지짐판이며 모두 개수대 밑으로 들어가고, 이제까지 개수대 밑에서 잠자던 네다섯 개나 되는 스탠 냄비가 밖으로 나옵니다. 전기밥솥도 그만 쓰기로 하고 냄비로 밥을 하고, 기름을 두르지 않고 달걀을 부치고 볶음밥을 합니다. 물을 안 넣고 감자와 고구마를 찝니다. 찐빵을 찌거나 구을 때에도 물을 붓지 않고 기름을 두르지 않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 스탠 냄비는 훨씬 빨리 달궈지고 더욱 오래 따뜻함이 이어갑니다. 끼니에 맞춤하게 짓는 밥은 여태까지 먹던 밥맛과는 견줄 수 없이 맛있습니다.


..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쓰거나 절약하는 행위는 지역사회를 더 건강하게 만든다. 에너지를 덜 쓰려면 외곽에 있는 쇼핑몰보다 동네 슈퍼를 자주 이용하게 된다. 혼자 차를 운전하는 것보다 이웃 혹은 직장 동료와 카풀을 하면 에너지를 보다 효율적으로 쓰게 된다. 좀더 걷고 자동차를 덜 쓰면 자신의 건강을 챙기고 지역 상권이 활성화되고 지역사회 전체적으로는 공기가 더 맑아지며 교통 혼잡 비용이 줄어든다. 절약해서 남는 돈으로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기면 지역사회 전체 문화 수준도 올라간다 … 거대 기업이 들어와서 단지 사업의 목적만을 위해 옥수수를 싹쓸이할 때에는 농산물값 폭등까지 이어지지만, 도시 공동체 사람들의 삶의 양식도 함께 바뀔 때에는 노는 땅이 에너지 작물을 키우는 땅이 되고, 깨끗한 기름을 쓸 수 있고, 폐기름을 줄이게 되며, 공기도 깨끗해진다는 것이다 ..  (6, 62쪽)


 곰곰이 돌아봅니다. 내가 바꾸지 못한 삶은 무엇이고 내가 바꾼 삶은 무엇인지. 나는 어디에 마음을 기울이고 어디에는 마음을 못 기울이고 있는지. 내 스스로 바꾸지 못하겠다며 손을 흔드는 삶은 무엇이고, 미처 깨닫지 못할 뿐 바꾸려 한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삶은 무엇인지.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라는 책에 ‘자동차 별거기’라고 해서 나이먹은 분으로서 자동차를 멀리하고 자전거를 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러고 보면, 저도 자전거 타기만큼은 좀더 찬찬히 생각하면서 이 하나는 바꾸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살던 때, 신문배달로 먹고살며 짐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긴 했으나, 서울 시내 헌책방을 찾아나설 때에는 전철을 탔습니다. 이문동에서 안암동까지는 자전거로 갔어도, 혜화동이나 종로부터는 전철로 움직였습니다. 아직 서울이 낯설기만 한 시골도시 사람은 짐자전거로 멀다고 느껴지는 길을 선뜻 나서지 못했습니다. 다섯 해쯤 서울에서 지내다가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출판사로 자리를 옮기니 자전거하고 멀어집니다. 집과 일터가 퍽 멀기도 했지만(동대문구 이문동에서 강서구 방화동) 자전거로 오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신문배달 하던 때에는 달삯이 아주 적기는 했어도 내 자전거가 있었기에 따로 자전거 장만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일하니 내 자전거는 없으나 일삯은 예전과 견주면 일고여덟 갑절이라서, 살림돈 십만 얼마와 책값과 필름값 삼십만 원을 빼고 모두 은행에 맡겼고, 자전거 없이 보내던 삶은 오래지 않아 끝내고 처음으로 제 돈을 주고 제 자전거를 장만합니다.

 자전거를 장만하면서 서울시내 꼼꼼길그림도 함께 장만하면서 길을 눈에 익힙니다. 이제는 전철이 아닌 자전거를 몰며 헌책방 나들이를 다닙니다. 종로구 평동에서 신촌으로 오가는 길은, 전철은 빙 돌아서 가는데다가 버스 타는 곳은 집에서 너무 멀어서 으레 사십 분이나 걸리곤 했는데, 자전거로 움직이니 짧으면 8분, 길어도 12분이면 넉넉했습니다. 이제, 웬만한 곳은 모두 자전거로 움직이는 버릇이 붙고, 대중교통인 버스나 전철마저 가까이하고픈 마음이 조금씩 사라집니다.

 지금 살고 있는 인천에서도, 옆지기와 함께 돌아다닐 일이 아니라면 혼자서 자전거를 몰고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인천과 서울을 오갈 때에도 자전거를 타면 전철로 갈 때와 거의 같거나 좀더 빠릅니다(동인천에서 마포큰다리까지 50분, 광화문까지는 1시간 2분). 다만, 자전거를 타면 책을 못 읽을 뿐입니다.

 그래, 이 하나, 자전거 타기만큼은 아주 잘 바꾸었다고 느낍니다. 모르는 일인데, 신문배달을 자전거로 했기 때문에 자전거 타기가 많이 익숙해졌고, 신문배달 짐자전거로 웬만한 오르내리막을 두루 꿰다 보니 자전거로 서울 시내 돌아다니면서 아무런 어려움을 못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저탄소 도시’나 ‘친환경 에너지 도시’처럼 온실가스 배출 감축, 재생가능 에너지 보급 확대 자체가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도시에서의 삶의 방식 변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 지구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도시민은 지구 표면의 2%에서 자원의 75%를 소비한다 … 어떤 지자체에서는 화석연료의 안락에 길든 도시 생활을 바꾸려는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태양광 발전, 풍력 발전 설치에만 열을 올린다. 그런 단체장은 진정한 의미에서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정책을 실행하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는 한 건’을 원하고 있다 ..  (34∼35, 58쪽)


 그리고 또 무엇이 있을까. 자전거 다음으로는 옷이 있을까. 신문배달 하던 때에는 늘 헌옷 모으는 통에서 옷을 주워서 입었지(예전에는 옷 모으는 통이 열려 있었습니다). 또, 가까운 대학교에서 행사를 할 때마다 나눠 주는 옷을 슬쩍 끼어서 얻어입기도 하고(우리 신문 독자인 학생들이니까). 형이 안 입는 옷을 치수가 많이 크지만 고맙게 물려입기도 하고. 길에서 2000원에 파는 반바지 몇 벌 사다가 입고, 청바지 두어 벌은 길에서 5000원에 파는 녀석으로 장만했고. 출판사 사장님이 나를 불쌍히 여겨 당신 아들내미가 안 입는 옷을 한 보따리 안겨 주기도 했고.

 그 다음으로는 가게에서 주는 비닐봉지를 안 받고 천가방을 챙기며 다니는 버릇. 한 번 쓰고 버리는 나무젓가락을 새것으로 안 쓰고, 다른 이가 쓰고 버린 것을 주워서 씻어 말린 다음 가방에 챙겨넣고 다니면서 쓰는 버릇. 길바닥에 널부러진 종이조각이나 광고명함 주워서 책갈피로 쓰는 버릇. 둘레에 많이 버려지는 이면지를 내 공책이나 편지지로 삼는 버릇. 그리고 ……, 음, 세탁기 안 쓰고 손빨래 하기? 텔레비전 안 모시고 살기? 운전면허증을 아예 안 따기? 값싸고 질긴 고무신 신고 다니기? 음식물쓰레기가 아예 나오지 않게끔 포도알 포도껍질 사과알 사과속까지 냠냠짭짭 먹으면서 먹을거리 다스리기? 손전화기는 마르고 닳도록 쓰고 쓰다가 망가져서 더는 못 쓰게 되어서야 바꾸어 주기? 밑 닦을 때 휴지는 한 칸이나 두 칸만 쓰기?


 .. 차를 타고 달릴 땐 사람들이 아닌 차만 보였던 걸까. 새로울 것도 없는 사람 사는 풍경이 마치 신기한 이국 풍경인 듯, 자가용을 타지 않는 나는 그동안 내 눈에 보이지 않던 풍경을 새삼스레 즐겼다 … 질적으로 검소한 것은 소비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사지 않고 필요한 기술이나 서비스에 돈을 쓰는 것을 뜻한다. 무분별한 소비로 괜히 쓰레기만 만들지 말고, 창의적인 기술과 서비스에 제값을 지불하자는 것이다 ..  (38, 65쪽)


 다음으로, 무엇을 쓰고 사는가 손꼽아 봅니다. 무엇보다 첫째로는 책. 둘째로는 필름. 셋째로는 술. 넷째로는 ……, 넷째, 넷째가 있나. 모르겠네. 이밖에 돈 나가는 데라면 집삯과 전기삯과 물삯 따위인데. 몇 군데 시민단체에 보내는 돈 얼마, 길에서 만나는 동냥꾼한테 건네는 돈 얼마, 성당에 내는 돈 얼마.

 그렇군. 쓸 데가 많지 않으니 처음부터 많이 벌 생각도 안 하는 듯하군. 출판사에서 일하던 때에는 비앙키 자전거 하나 갖고픈 꿈을 키웠는데, 이제 이 꿈은 이루지 못할 물거품이나 뜬구름이지. 아이를 키우려면 돈 부지런히 벌어야 한다지만,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을 뿐, 아이를 어디 학원에 넣을 일 없지 아이를 연예인처럼 예쁘장하게 꾸밀 일 없지 하니, 딱히 무엇을 더 쓰거나 누려야 할까 싶고.

 그저 재개발이니 재생사업이니 하면서, 우리처럼 밑돈 없는 사람이 겨우 깃들어 사는 골목집을 밀어내는 정부정책이나 없으면 더 바랄 일이 없습니다.


.. 인도는 분명히 차를 위한 공간이 아닌데도 도시 곳곳의 인도들이 차들로 점령당하고 있다. 그래도 나는 신경질만 내고 나면 그만이다. 자전거에서 내려 잠시 차도로 내려갔다가 다시 인도로 올라가면 되니까. 그런데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나, 전동휠체어를 모는 노인들, 그리고 큰 유모차를 미는 엄마들은 … 걷다가 인도에 주차된 차들을 만나면 자전거를 탈 때보다는 덜하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도대체 차를 이곳에 주차한 이 사람은 예의라는 게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일까 … 차를 몰든 안 몰든 똑같이 낸 세금으로 닦아 놓은 도로를 그들은 질주하면서, 역시 세금으로 만든 인도까지 그들이 점령한다. 똑같이 세금 내면서 차를 몰지 않는 이들은 도로에 세금 퍼주고, 차량으로 인한 대기오염은 공유하고, 인도까지 운전자들에게 점령당한다. 그런데도 인도를 점령한 운전자들은 별로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  (148∼149쪽)


 늘 골목마실을 하면서, 틈틈이 동네 이웃을 만나면서, 꾸준히 헌책방 나들이를 하면서, 한 사람이 이 땅에 태어나서 살아가는 동안 맛보는 기쁨과 즐거움과 보람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고 느낍니다. 돈을 많이 움켜쥐고 있다고 해서 더 많이 누릴 수 있지 않다고 느낍니다. 5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5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500만 원짜리 자전거를 타든, 자전거 타는 기쁨은 매한가지입니다. 보증금 없이 10만원짜리 달삯집에 살든, 보증금 천만 원에 달삯 없는 집에 살든, 싯가 이십억짜리 아파트에 살든, 또 몇 억에 이르는 아파트에 살든, 사람 사는 모양새는 다를 바 없을 뿐더러 사람 사는 즐거움이 벌어지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가난하니 자꾸만 남 앞에서 우쭐거리고픈 옷을 입고 차를 몰고 집을 얻지 않으랴 싶습니다. 마음이 허거프니 자꾸자꾸 남 위에 올라서면서 이웃나눔과 어깨동무하고는 멀어지면서 살지 않으랴 싶습니다. 마음이 메마르니 숱한 물질문명을 누리는 일이 세상 사는 기쁨인 줄 잘못 알면서, 자기 스스로 자기 몸마저도 망가뜨리지 않으랴 싶어요.

 자가용 끌고 출퇴근하면서 ‘운동이 모자라’ 헬스클럽에 가는 일은 얼마나 자기 삶을 좀먹는 일인가요. 몸 갉아먹으면서 한 해에 억대 연봉을 받는 일을 한다지만, 이렇게 일하면서 갉아먹힌 몸을 추스르느라 적잖은 돈을 보양식에 쓰고 어디 물 좋고 공기 좋은데 놀러가서 쉬는데 쓰고 있으니, 고작 며칠은 쉴는지 모르지만 정작 훨씬 긴 자기 삶은 쉼없이 휘몰아치며 두 손에는 아무것도 안 남고 말지 않습니까.

 더 빨리든, 더 많이든, 더 크게든, 누군가 더 천천히 가야 하기에, 또 더 적게 가져야 하기에, 또 더 작게 웅크려들어야 하기에 누릴 수 있습니다. 이웃을 눌러야 더 빨라집니다. 동무를 꺾어야 더 많아집니다. 살붙이를 멀리하거나 등쳐야 더 커집니다. 이와 같은 삶이, 이처럼 무언가 누리는 듯 보이는 삶이, 참으로 우리한테 도움이 되거나 웃음꽃이 피어나게 해 주고 있는지, 차분하게 돌아보거나 곱씹을 수 있어야지 싶은데.


.. 술값 몇 만 원 아끼는 것과 전기요금 몇 만 원 아끼는 것은 간접비용의 차원이 다르다. 술값에는 간접비용이 별로 없다. 과음하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나 전기요금의 뒤에는 원자력 발전소 뒤치다꺼리 비용, 송배전 인프라 비용 등이 있다. 숨어 있는 비용을 계산한다면 술값 몇 만 원과 전기요금 몇 만 원은 결코 같은 몇 만 원이 아니다. 그런데 당신과 다른 단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몇 만 원을 같은 금액으로 생각한다. 그러니 두뇌회전을 즐기는 데서 만족감을 얻는 당신의 계산이 필요하다 ..  (212∼213쪽)


 (2) 스스로 길찾기를 막고 만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


 몇 해 앞서 《태양도시》라는 책을 펴낸 정혜진 님은 대구에 있는 〈영남일보〉 기자입니다. 우리 나라 기자가 보여주는 여느 모습을 돌아볼 때, 정혜진 님처럼 생태와 환경에 눈길을 깊이 두면서 ‘우리가 지금 삶터에서 좀더 아름다운 쪽으로 나아지는 길을 찾으려는 움직임’은 몹시 남다르면서 훌륭하다고 느껴집니다.

 여러 달 앞서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책을 사기는, 나오자마자 책방에 달려가서 샀는데, 책을 사서 읽는 내내 마음 한켠이 무거웠습니다. 무거움은 자꾸만 더해 갔고, 나중에는 응어리까지 맺히면서 풀리지 않습니다.

 책을 다 읽고 책꽂이 한쪽에 꽂아 놓습니다. 여러 달 잊고 지냅니다. 그리고 다시 끄집어내어 펼칩니다. 정혜진 님 책을 두 권째 읽는 동안, 어딘가 아쉽다는, 아니 어딘가 가슴으로 와닿지 않는다는, 어쩌면 귀로 듣고 눈으로 읽는 이야기로는 반갑거나 놀라울는지 모르나, 정작 우리 스스로 어떻게 길찾기를 하면서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르게 꾸려가는 삶을 일구면 좋은가 하는 생각을 얻기가 어려웠는데, 그 실마리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펼칩니다.


..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한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은 과다한 온실가스 배출이다. 이건 너무 많은 안락을 추구하다 보니 벌어진 일이다. 문제의 원인을 부시나 다른 사람에게 돌릴 일이 아니다. 당신이 편하게 살아온 만큼 당신도 책임이 있다. 그러니 지구온난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반성’이 출발이다 ..  (199쪽)


 정혜진 님 말대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원인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한테 ‘지구온난화’는 발등에 떨어진 불입니다. 그런데 지구온난화는 왜 생겨났을까요. ‘온실가스 배출’ 때문일까요? 그러면 온실가스 배출이란 무엇일까요? “너무 많은 안락을 추구하다” 보니까 생겨났다고 할 만할까요? 그러면 우리가 여태까지 누려온 “너무 많은 안락”이란 무엇일까요? 우리는 왜 ‘안락’을 누리면서도 조금도 ‘안락을 누린다’고는 여기지 않으며 ‘더 많은 안락’을 좇게끔 길들여져 있을까요? 왜 우리 사회와 교육과 문화와 정치와 경제 모두 ‘더 많은 안락’으로만 나아가고 있을까요? 정혜진 님이 몸담은 언론사 〈영남일보〉는, 우리 사회가 어떠한 쪽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면서 기사를 실어서 대구 사람들한테 읽히고 있을까요? 정치가 어디로 나아가도록, 경제가 어떻게 꾸려지도록, 문화가 어떻게 뿌리내리도록, 교육이 어떻게 펼쳐지도록 바라면서 기사를 풀어내고 있을까요?

 우리들은 틀림없이 ‘뉘우쳐야(반성)’ 합니다. 지금처럼 꾸리는 삶이 얼마나 우리 스스로를 좀먹는지 뉘우쳐야 합니다. 지구를 무너뜨리거나 온실가스를 많이 내뿜어서 뉘우친다기보다, 무엇보다 내 삶을 망가뜨리고 내 삶터를 엉망으로 흔들며 내 몸과 마음을 내 손으로 갉아먹고 있음을 못 느끼며 살고 있는 지금 흐름을 뉘우쳐야 합니다.


..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지만,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을 포기하고 과거로 돌아가는 것은 쉽지 않다. 우리 부모님 세대처럼 없어서 안 쓰고, 낭비할 수 없어 아끼던 그런 시대는 지났다. 기후변화의 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시대로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이 우리의 딜레마일지도 모른다. 몇몇 훌륭한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시의 풍요를 ‘건전하게’ 누리는 수준일 것이다 ..  (마무리글 / 229쪽)


 그러나 뉘우침은 첫걸음이 아니지만, 마지막 걸음도 아닙니다. 뉘우침을 넘어서 ‘삶을 두루 돌아보는 눈’을 길러야 합니다. ‘삶을 깊이 들여다보는 눈’을 닦아야 합니다. 그리고 ‘뉘우침’을 한다면 마땅히 ‘지금 누리는 것 가운데 꽤 많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회개와 고해성사는 있는데 달라지는 삶이 없다’면, 이러한 회개와 고해성사는 거짓 회개와 껍데기 고해성사일 뿐입니다. 회개를 못하고 고해성사 또한 할 용기가 없을지라도, 다문 한 가지나마 자기 삶을 바꾸면서 살아갈 수 있다면 됩니다. 하루에 한 가지가 어려우면 한 달에 한 가지, 한 달에 한 가지조차 어려우면 한 해에 한 가지씩 자기 삶을 바꾸어 나가면 됩니다. 이렇게 우리 스스로 우리 삶에서 ‘놓아도 되는 대목’은 놓으면서 바꾸어야 비로소, 어떤 정책이나 대책이나 대안을 나라나 지자체에서 세우지 않아도 저절로 서민 스스로 ‘문화도시’도 이루고 ‘착한 도시’도 이루며 ‘깨끗한 도시’도 이루는 가운데 ‘살기 좋은 도시’가 마련됩니다.

 그런데 정혜진 님 책 《착한 도시가 지구를 살린다》는 사람마다 다 다르게 할 수 있는 길찾기를 처음부터 금을 그어 놓고서 “아끼는 삶 = 과거로 돌아가는 것”인 듯 풀이를 내려 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곳곳에 밑줄을 긋기는 하지만 선뜻 가슴으로 스며들지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건전하게’ 누리는 삶이란 어떤 삶인지 또렷하게 밝혀 보이지 않고 ‘건전’이라는 낱말을 섣불리 쓰고 마니까, 입에서 까끌까끌하게 맴돌기만 할 뿐, 제 몸으로 스며들지는 못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는 “예전 시대로 돌아갈” 까닭이 없습니다만, “예전 시대에서 훌륭한 대목은 기꺼이 배워야” 합니다. 예전 시대에서 잘하던 대목, 예전 시대에서 놀랍게 이루어 낸 대목은 앞으로도 고개숙여 배워야 합니다. 새로운 대체에너지만이, 새로운 대안운동만이, 새로운 기술개발과 유럽 선진국 사례 모으기만이 우리가 나아갈 길이 아닙니다. 나중에 세 번째 책을 엮어낼 꿈을 품으신다면, 모쪼록, 앞선 두 책을 넘어서 주기를, 아니 앞선 두 책을 정혜진 님 스스로 밑줄을 그어 가면서 물음표를 찍고 찬찬히 읽어 보아 주기를 바랍니다. (4341.10.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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