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터리 정치꾼을 왜 자꾸 뽑는가


 선거를 앞둘 때마다 언론에서 으레 하는 말이 ‘찍을 만한 사람이 없다’는 소리입니다만, 찍을 사람이 없다기보다 우리들 가운데에 옳고 바르며 곱게 살아가는 사람이 드문 노릇이 아닌가 궁금합니다. 후보자들이 당신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내는 일뿐 아니라 땅장사에 돈장사에 나쁜 짓을 일삼고 있으면서 버젓이 선거 후보자로 나오는 까닭이란, 다름아닌 여느 우리 삶에서 이처럼 법을 어기거나 짓밟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요, 이들한테서 콩고물을 얻어먹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궁금합니다.

 낮에 아이를 데리고 바깥바람을 쏘인다면서 이 골목 저 골목을 두 시간 남짓 돌아다니는데, 엊그제에도 그랬지만 사람들 복닥이는 자리에서는 한 가지 빛깔로 옷을 맞춰 입은 사람들이 노래를 크게 틀어 놓고 춤을 추고 있습니다. 아이와 함께 집에 있는 동안에도 바깥에서 울리는 노래소리 때문에 아이가 잠을 제대로 못 들기까지 했습니다. 후보자들이 나누어 주는 이름쪽을 뒤집으면 몇 가지 공약 사항이 보이는데, 이 공약 사항은 어김없이 숫자놀음을 하는 재개발 이권과 일류대학 학벌 높이기와 무슨무슨 복지에 더 많은 돈을 바치겠다는 글월일 뿐입니다. 돈을 들이지 않으면서 우리 터전을 살찌우거나 돌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경제력ㆍ경쟁력ㆍ학력ㆍ얻으려는 예산 따위를 온통 숫자로 발라 놓기만 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삶에서 숫자란 더없이 큽니다. 1등이 아니면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은 기득권과 광고지 같은 무슨무슨 신문만이 아닙니다. 진보를 밝히는 지식인마저 1등 싸움을 하고, 개혁을 외치는 정치꾼 또한 1등 다툼을 벌이며, 환경을 사랑한다는 우리들까지 1등을 거머쥐려는 마음을 놓지 못합니다. 입으로는 ‘아름다운 꼴찌’를 외치지만, 정작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이 아름다운 꼴찌가 되어 사랑과 믿음을 착하고 참되며 곱게 가다듬으려 하지 않습니다. 저라고 썩 나은 사람이 못 된 터라 2002년까지는 ‘1등 뽑는 선거’에 목매달았습니다. 그무렵까지 아직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못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부질없는 1등 뽑는 선거가 아닌 ‘아름다운 사람 찾는 선거’를 생각하고, 하다못해 ‘몹쓸 사람 솎는 선거’를 헤아립니다. 텔레비전과 세탁기와 냉장고를 버리고 자동차와 아파트와 높은 연봉을 처음부터 들여놓지 않을 수 있으면, 누구나 아름다운 삶을 꾸리며 아름다운 선거를 이룰 수 있습니다. (4343.5.2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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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멍청한 정치꾼은 누가 왜 뽑는가


 내 한 표를 받은 사람이 시장이나 구의원이 되는 일은 놀라우며 반갑고 기쁜 일입니다. 내 한 표를 받지 않은 사람이 시장이 되든 구의원이 되든 우리가 곁에서 꼼꼼하게 지켜보고 따스하게 어루만지면서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정책을 마련해서 꾸릴 수 있도록 이끈다면 더욱 놀라우며 반갑고 기쁜 일입니다. 민주주의는 한 표 권리를 쓰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한 표 권리란 민주주의로 가는 아주 작은 단추꿰기입니다. 단추 하나를 꿰었다고 옷을 입은 셈이 아닐 뿐더러, 웃도리나 바지 한 벌 입은 차림새 또한 아닙니다. 단추를 꿰고 볼 일이지만, 옷을 제대로 차려입어야 하고, 위아래와 속옷하고 신을 골고루 갖출 노릇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비롯해 사회ㆍ경제ㆍ문화ㆍ환경ㆍ교육 모두 다른 사람 손에 돈을 들여 맡겨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란 참다운 자유와 평화와 통일과 복지와 예술이 살아숨쉬어야 합니다. 어느 당 후보를 안 찍는다고 4대강이나 경인운하 물길이 꺾이지 않습니다. 엊그제 신포시장에 먹을거리 장만하러 갔다가 받은 어느 야당 선거공약집을 들추니, 이분이 내놓은 공약은 온통 ‘또다른 모습으로 밀어붙일 개발’투성이입니다. ‘뉴타운’도 재개발이지만 ‘웰타운’도 막개발입니다. 우리는 국립공원만 깨끗이 지켜서는 안 됩니다. 국립공원부터 깨끗이 지키며 여느 사람 살아가는 도시가 막개발 아닌 오래도록 스스로 손질하고 조그맣게 가꾸는 작고 고운 마을 삶터로 나아갈 수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동화 쓰던 할배는 죽음을 앞두고 우리들한테 자동차를 버리며 전쟁을 막자고 외쳤습니다. 곰곰이 따지면, 자동차를 버릴 줄 알아야 한 표 권리를 누구한테 써야 하는가를 깨달을 수 있고, 두 다리와 자전거로 살아가고 있으면 어느 누가 정치꾼으로 뽑히더라도 우리 마을은 우리 손으로 사랑스럽고 넉넉하며 빛깔 곱게 가꿀 수 있습니다. 이놈 저놈 다 몹쓸 놈이 아니라, 이놈 저놈 모두 더 큰 돈과 빠른 차를 공약으로 내걸지 않도록 처음부터 다스릴 2010년 6월 2일을 맞이할 수 있으면 기쁘겠습니다. (4343.5.26.물.ㅎㄲㅅㄱ) 

 

(가톨릭환경연대에서 부탁을 받고 신나게 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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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로 가는 길과 책으로 가는 길
 ― 좋은 영화와 책은 어떻게 태어나는가



 이탈리아 영화 〈길(라 스트라다)〉을 보았습니다. 이와 함께 〈바드다드 카페〉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이라는 영화도 보았습니다. 오늘날은 나라 안팎 좋은 영화를 집에 앉아 내리 여러 편을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으로 보든 비디오로 보든 디브이디로 보든 인터넷으로 보든 아주 손쉽게 옛날 영화부터 요즈음 영화까지 볼 수 있습니다. 자그마치 쉰여섯 해를 묵은 영화를 아무런 어려움 없이 봅니다. 퍽 어린 아이를 키우는 우리 식구로서는 극장마실을 할 수 없는 터라, 집에서 영화를 함께 볼 수 있는 대목이 몹시 고맙습니다. 더구나, 비디오나 디브이디를 갖고 있으면 한 번 보고 나서 가슴이 젖어든 영화를 잇달아 다시 볼 수 있습니다. 극장에서 커다란 화면으로 자잘한 곳까지 눈여겨보는 맛하고 견줄 수 없습니다만, 집에서 여러 차례 볼 때에는 극장에서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맛이 있습니다. 오줌 마려운 아이한테 오줌을 누이느라 살짝 멈추었다가 다시 보아도 되고, 배고픈 아이한테 밥을 차려 주며 밥을 먹이는 가운데 영화를 볼 수 있습니다.

 영화 세 편을 보고 나서 소설 《모비딕》을 펼칩니다. 《모비딕》을 손에 쥔 지 석 달째입니다. 아직 이 책 하나를 다 끝내지 않고 있습니다. 휙 읽어치울 수 있습니다만, 허먼 멜빌이라는 분이 한 땀 두 땀 이루어 낸 결을 헤아리면서 찬찬히 읽습니다.

 다른 책을 읽다가 ‘《모비딕》이야말로 문학이란 이름이 어울린다’는 대목을 곧잘 만납니다. 우리 옆지기 또한 《모비딕》만 한 소설이 아니라면 읽을 만하지 않다고 이야기합니다. 얼마 앞서 새로운 번역으로 나온 《모비딕》인데, 언제가 될는지 모르나 이 책을 헌책방에서 영어판으로 찾아내어 영어로 읽을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번역이 아주 나쁘지는 않으나 책을 읽는 사이사이 턱턱 막힌다거나 그리 알맞아 보이지 않는 대목이 눈에 뜨이기 때문입니다. 못한 번역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비딕》이 훌륭한 문학이라 한다면, 훌륭한 문학에 걸맞을 훌륭한 번역이라 할 수 있느냐고 묻는 자리에서는 고개를 젓겠습니다. 괜찮은 번역이지만 훌륭한 번역문학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맙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라 할 테지만, 번역을 할 때에도 번역쟁이 한 사람이 창작을 하던 글쟁이 한 사람만큼 품과 땀과 시간과 마음을 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출판사에서 번역쟁이한테 좀더 긴 시간을 좀더 나은 일삯을 내주어 문학 하나를 아름다이 꽃피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준다면, 허먼 멜빌 《모비딕》 새로운 번역은 이름만 ‘새로운’ 번역이 아니라 이름으로도 ‘아름다운’ 번역이거나 ‘훌륭한’ 번역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출판사에서는 돈을 따지지 않을 수 없으니 더 넉넉히 일삯을 챙기지 못하는 한편, 번역할 시간을 넉넉히 마련하지 못합니다. 이러면서 새로운 번역을 내놓을 때에 ‘새 번역’이라느니 ‘완역’이라느니 하는 이름만 붙이는데, 정작 어느 새로운 완전번역 작품이라 할지라도 ‘아름다운’ 번역이라는 이름이나 ‘훌륭한’ 번역이라는 이름은 못 붙입니다.

 아무래도 어렵겠지만, 《모비딕》을 우리 말로 옮기려 한다면 적어도 다섯 해쯤은 시간을 주어야 하며, 웬만하면 열 해쯤은 시간을 주되 오로지 이 하나에만 온힘을 쏟도록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낱말 하나 글월 하나 말투 하나 짜임새 하나 촘촘하면서 너르게 보듬는 옹근 번역이 되도록 북돋우자면 책 하나 섣불리 내놓지 말 노릇이라고 봅니다.

 1954년 이탈리아 영화 〈길〉을 보고 나서 세 식구는 잠자리에 듭니다. 고단하고 졸립고 힘들어, 누운 채 몇 마디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오늘 본 영화 모두 훌륭하기는 훌륭한데, 이 가운데 100번을 내리 볼 영화를 고르라면 아무래도 〈길〉을 꼽겠다는 말을 나눕니다.

 페데리코 펠리니 님은 〈길〉이라는 영화에서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슬프며 아름다운 길을 여러 갈래에서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슬픈 길이든 즐거운 길이든 어두운 길이든 밝은 길이든 저 멀디먼 구름 같은 나라에만 있지 않음을 수수하게 보여줍니다. 딱히 밑바닥 사람들 삶을 보여주지 않고, 굳이 잘난 사람들 삶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예 사람 삶을 보여줍니다. 사람이 걷는 길을 보여주고 사람이 살아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예전에 자리가 될 때마다 보느라 네 번 본 장이모 님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서도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슬프며 아름다운 길이 여러 갈래로 나와 있습니다. 이 영화에서도 굳이 어떤 장치를 쓰거나 따로 무언가 꾸며서 내보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사람들과 삶자락과 보금자리를 보여주는 가운데 이 영화를 보고 있는 사람 스스로 우러나오는 뭉클함을 보듬습니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한테 어디 먼 남쪽나라이든 북쪽나라이든 밖에서만 길을 찾다가는 길이고 뭐고 볼 수 없음을 넌지시 이야기합니다.

 좋은 영화 세 가지를 하루 만에 보고 나서 날마다 야금야금 읽고 있는 《모비딕》을 바닥에 펼쳐 놓고 야금야금 읽는 동안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문학 《모비딕》이 훌륭하다는 소리를 듣는 작품이라 할 때에는 이 문학 하나에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길을 여러 갈래로 보여주되 따로 무슨 장치를 하거나 딱히 어떤 꾸밈거리가 가득하지 않기 때문이겠구나 하고. 사람들이 복닥이고 있는 결을 글쓴이부터 고스란히 껴안는 한편 깊이 삭이고 있으며, 사람들이 웃고 우는 삶을 글쓴이부터 스스럼없이 맞아들이는 한편 신나게 즐기고 있습니다. 따로 미움이라 이름붙일 수 없는 삶을 바라봅니다. 굳이 기쁨이라 이름붙이지 않아도 될 삶을 들여다봅니다. 좋은 영화이든 좋은 문학이든 바로 우리 곁에서 이야기를 얻고 있음을 말하고 있고, 좋은 영화나 좋은 문학이 나오는 샘터는 바로 우리 가슴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길〉이든 〈바그다드 카페〉이든 〈집으로 가는 길〉이든 《모비딕》이든, 참 쉬운 영화이고 쉬운 책입니다. 참 아무것 아닌 영화이고 아무것 아닌 책입니다. 참 흔한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며 문학입니다. 참 가볍게 일군 영화이자 문학입니다.

 다만, 이렇게 좋은 영화나 책(문학)이란 영화쟁이나 문학쟁이가 당신 삶을 차곡차곡 바칠 수 있으면 언제 어디에서나 얼마든지 일굴 수 있습니다. 품을 들이고 땀을 들이고 세월을 들이면 누구나 아름다운 영화와 책을 선보일 수 있습니다.

 엊그제 여든여덟 나이를 꾸리는 그림할머님을 뵈었습니다. 그림할머님은 “나도 다섯 살이었고, 나도 열다섯 살이었는데, 이제는 여든여덟이라우.” 하면서 “내가 돈을 숭배하는 사람이었으면 돈이 바라는 대로 따르며 살았겠지만, 나는 하나님을 숭배하는 사람이라서 하나님이 바라는 대로 따르며 살았다우.” 하는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 그림할머님을 낳아 키운 박두성이라는 어른은 일제강점기에 ‘앞 못 보는 사람’한테 빛이 되고자 한글로 된 점글을 만들었습니다. 그림할머님은 당신 아버님이 시키는 대로 손과 팔과 허리가 아프도록 송곳으로 꾹꾹 누르며 점글책을 만들어 앞 못 보는 사람한테 나누어 주는 일을 함께하셨습니다. 당신 아버님이 숨을 거두고 당신 남편 또한 저승사람이 된 뒤에는 당신이 당신 아이들하고 살고 있는 집에 ‘평안 수채화의 집’이라는 새 문패를 세우고는 아흔이 코앞인 나이에도 신나게 그림을 그리며 이웃사람들한테 사랑을 나누어 주고 있어요. 여든여덟이라는 길에서 당신이 걸어온 이야기와 삶이란 어느 하나 돈 될 구석이 없는데, 여든여덟 해에 걸쳐 밥을 굶지 않았을 뿐더러 둘레에 밥을 나누기까지 했습니다. 그림할머님 당신으로서는 돈이 아닌 믿음을 섬기고 사랑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영화 하나를 찍으면서 이 영화가 얼마나 사랑받거나 팔리는가를 헤아린다면 어쩔 수 없이 어느 만큼 사랑받거나 웬만큼 팔리는 영화가 될 수 있습니다. 어쩌면 1000만이 보는 영화가 될 수 있고 500만이 본 영화가 될 수 있겠지요. 그런데 2010년에 1000만이 본 영화를 2020년에는 몇 사람이나 다시 볼 만할까요. 2050년에는 몇 사람이나 다시 볼까요. 2100년을 맞이할 때에는 2010년에 1000만이 본 영화를 몇 사람이나 좋아하며 챙겨 볼는지요.

 2010년 오늘 100만 권이 팔리거나 10만 권이 팔리는 책이라고 하면 이 책에는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은 책은 역사에도 남아 길이길이 이어지곤 합니다. 그런데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이 붙은 책을 놓고 ‘가슴시린’ 문학이라 하거나 ‘아름다운’ 문학이라 하거나 ‘훌륭한’ 문학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예 없다고 해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많이 팔린 책이 훌륭한 책이지는 않으니까요. 훌륭한 책이면서 많이 팔릴 수 있으나, 훌륭한 책이기에 많이 안 팔리기도 하며, 많이 팔리지 않으려는 훌륭한 책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훌륭한 책이란 돈을 바라거나 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훌륭한 책이란 처음부터 사랑과 믿음을 섬기고 아낍니다. 훌륭한 책 하나를 빚고자 땀흘리는 사람은 처음부터 ‘다문 열 사람이 사서 읽어 주기’조차 바라지 않습니다. 오직 ‘이 책 하나가 얼마나 내 한 사람이 고운 한 사람으로서 착하고 참되게 살아가는가’ 하는 뿌리를 캘 뿐입니다.

 영화로 가는 길이란 책으로 가는 길하고 같으면서 다릅니다. 영화나 책으로 가는 길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길하고 같으면서 다릅니다. 농사짓는 길하고 같으면서 다른 영화길과 책길입니다. 사람을 섬기는 뜻을 담으면 어떠한 영화이든 아름다울밖에 없고, 사람을 사랑하는 넋을 실으면 어떠한 책이든 훌륭할밖에 없으며, 사람을 아끼는 얼을 깃들이면 어떠한 곳에서 무슨 일을 하든 참될밖에 없습니다. 영화쟁이이기 앞서 참사랑 나누는 수수한 한 사람이어야 하고, 책쟁이이기 앞서 참믿음 펼치는 조촐한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집살림을 꾸리든 돈벌이를 하든 참마음 고이 다스리는 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4343.5.25.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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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mily Zone - 선우 家의 자연 이야기, 선우중호 가족 사진집
선우중호 사진 / 눈빛 / 2009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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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기 살 돈으로 사진책 사소서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19] 선우중호 가족 사진집, 《FAMILY ZONE》



- 책이름 : FAMILY ZONE, 선우家의 자연 이야기
- 글, 사진 : 선우중호와 네 식구
- 펴낸곳 : 눈빛 (2009.12.2.)
- 책값 : 3만 원 

 




 (1) 사진기는 어떻게 사야 하는가


 지난 2007년 4월 15일부터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 한켠에 문을 열어 놓고 있던 사진책 도서관은 2010년 6월 15일에 문을 닫기로 했습니다. 세 해하고 두 달을 비싼 달삯 치르며 버티었으나, 인천이라는 도시에서 사진벗을 마주하기 힘들고 벅차 시골마을로 살림터와 책터를 옮기기로 했습니다.

 꾸려야 할 책짐이 5톤 짐차로 석 대를 가득 채우고 남을 만큼 되기에 몇 달 앞서부터 틈틈이 책을 묶어 두고 있습니다. 집살림 꾸리고 아이 함께 돌보는 가운데 겨우 틈을 조금 내어 책을 묶기에 퍽 오래 걸립니다. 내 책들이 어느덧 열한 번째 묶이며 터덜터덜 먼 나들이를 떠나는가 하고 생각하면 미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번에 옮기면 적어도 열 해 동안은 느긋하게 쉬도록 해 주고 싶다고 생각해 봅니다. 두 번 다시 안 옮겨도 되도록 살림돈이 넉넉하여 마땅한 집 하나를 마련한다면 가장 좋을 테지만, 우리 딸아이가 오늘 제 나이만큼 크더라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봅니다. 그저 앞으로 또다시 책짐을 꾸려야 할 수 있으니, 나중에는 더 많은 책을 더 오랜 품을 들여 묶고 나를 만한 힘이 튼튼히 살아 있도록 몸을 추슬러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한창 책짐을 꾸리고 있을 때에 도서관에 손님 두 분 찾아옵니다. 살짝살짝 책 구경을 마친 두 분이 도서관을 나설 무렵 저한테 사진 한 장 찍어 달라 말씀합니다. 사진기를 어깨에 걸치고 있던 분이 당신 짝꿍을 찍어 달라 말씀하는군요. 그냥 당신이 찍으면 될 텐데 왜 나한테?

 한 분만 찍을 까닭이 없기에 두 분이 함께 앉으면 찍겠다고 해서 두 분을 앉히고 사진기를 건네받습니다. 사진기에 붙인 렌즈는 제가 쓰는 렌즈하고 같은 값싸구려이지만, 사진기 몸통은 저로서는 꿈꾸기 어려운 ‘마크 머시기’라는 녀석입니다. 사진기를 왼손으로 감싸고 오른손으로 단추께를 만지작거리는데 느낌이 사뭇 다릅니다. 퍼뜩 생각합니다. ‘이러니까, 돈있는 사람이라면 마크 머시기를 쓰는구나’

 웃는 얼굴로 걸상에 앉은 두 분을 사진기로 들여다봅니다. 오, 이런. 같은 값싸구려 렌즈이지만 마크 머시기에 붙은 이 렌즈로 들여다보이는 모습이란 넓고 시원합니다. 한 마디로 아주 좋습니다. 속으로 눈물 찔끔 납니다. 그런데 사진 한 장 두 장 시험판으로 찍어 보니 제가 생각하던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 하고 살짝 생각하다가 사진 설정과 화이트밸런스 설정 두 가지를 눌러 봅니다. 아하, 이분은 이 두 가지 설정을 처음 그대로 놓고 있군요. 사진기를 장만한 사람들은 사진 설정이나 화이트밸런스 설정이나 다른 여러 가지를 당신 사진감에 맞추어 손질해 놓아야 하는데 아직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저 감도만 800으로 돌려놓아 실내에서 어둡지 않게 나오는 데에만 마음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늘 찍는 대로 사진 설정은 ‘풍경’으로 고치고, 화이트밸런스 설정은 ‘그늘’로 고칩니다. 저는 디지털사진기를 장만하고 두 해쯤 뒤에 비로소 이 설정을 처음 깨달았는데, 어느 디지털사진기이든 필름사진기와 견주어 ‘좀더 밝게’ 찍히고 ‘좀더 날카롭게’ 찍힙니다. 디지털사진기에 맞추어져 있는 처음 설정을 그대로 두면 새내기나 풋내기들도 웬만큼 어긋나거나 틀리지 않는 사진이 나오도록 되어 있는 설정이라서, 사진을 제법 찍어 온 사람들 눈이나 느낌에는 꽤 동떨어진 사진이 되기 일쑤입니다. 괜히 디지털사진은 ‘날선’ 느낌이라 싫다고 잘못 생각하고 맙니다.

 저로서는 이태 만에 겨우 이러한 대목을 깨달았습니다만, 필름사진만 찍는 숱한 분들은 아직 이러한 대목을 못 깨닫습니다. 사진 설정을 고치면 ‘필름으로 찍을 때하고 똑같을’ 뿐 아니라 ‘사람 두 눈으로 바라보는 빛과 느낌’ 그대로 찍을 수 있음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같은 필름사진이라도 니콘과 캐논과 미놀타에 같은 필름을 앉히고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찍어 보아도 사진은 똑같이 나오지 않습니다. 이는 라이카를 쓰든 콘탁스를 쓰든 마찬가지입니다. 기계에 따라 빛과 느낌과 날카로움이 아주 가늘고 자잘하게 다릅니다. 이 또한 디지털사진기에서도 매한가지라, 사진 전문가들은 ‘이제 막 사진을 찍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떠한 사진감을 즐겨서 찍으려’ 하는가를 귀기울여 들은 다음에 이이한테 가장 어울릴 기계와 필름(또는 디지털파일 형식)을 일러 주어야 합니다. 움직이는 사람을 찍을 때에 한결 잘 어울리는 기계와 필름이 있고, 멈춘 사람을 찍을 때에 한결 돋보이도록 돕는 기계와 필름이 있습니다. 건물을 찍거나 옷가지나 보석을 찍을 때에 더욱 걸맞는 기계와 필름이 있습니다.

 더 좋거나 더 나쁜 장비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기계마다 쓰임새가 다르고 구실이 다르다는 소리입니다. 어느 기계를 쓰든 다루는 사람이 잘 다루면 그만이지만, 기계를 처음 만든 공장과 일꾼이 어느 쪽에 더 마음을 기울였느냐에 따라서 기계가 살릴 수 있는 사진감이 다릅니다. 이를테면, 장도리로도 못을 박고 망치로도 못을 박습니다. 어느 연장을 쓰든 못을 박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 연장이 똑같은 쓰임새이거나 구실이지는 않습니다. 오직 못 박는 한 가지에만 쓰도록 망치를 만드는 까닭이 따로 있습니다. 사진기에서도 기계마다 어느 자리에 더 알맞거나 걸맞거나 어울리는 구실이 있습니다. 사진관 일꾼이나 사진쟁이는 이렇게 다른 구실을 옳게 깨닫거나 알아채면서 사진기를 팔거나 사진을 찍어야 합니다.

 더 비싼 장비가 더 좋은 장비가 아닙니다. 알맞춤한 자리에 알맞춤한 장비입니다. 내 사진감 쓰임새에 따라 나 스스로 여러 해에 걸쳐 목돈을 모아 반드시 장만해야 할 장비가 있으며, 내 사진감 쓰임새에 따라 적은 돈을 들여 값싸게 장만하여 아주 신나게 쓸 장비가 있습니다.

 광고에 휘둘려 무슨무슨 사진기가 가장 뛰어나다는 듯한 엉터리에 속으면서 애먼 데에 돈을 쓸 일이 아닙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면 사진기를 장만하기 앞서 내가 무엇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는가를 오래도록 생각하고 찾아야 합니다. 굳이 내가 사진기를 장만해서 애써 내가 뭔가를 사진으로 담으려는 까닭을 두고두고 살피고 느껴야 합니다. 이런 시간을 아무리 짧아도 한두 해쯤 ‘사진기 없이 보내’면서, 나한테 사진기가 없기 때문에 내가 사진감으로 삼으려 하던 이 모습을 코앞에서 뻔히 보고 있으나 찍지 못하니 속에서 불이 나고 갑갑하고 미칠 노릇이라 안 되겠다고 느낄 때에 사진기를 장만해야 합니다.


.. 지난 1990년대 말, 갑작스럽게 집에서 한가한 시간을 가져야만 했을 때에 사진은 내게 일거리라는 귀한 선물을 주었다 ..  (머리말)


 베스트셀러이니 뭐니 하고 떠들썩한 책이 나한테 가장 좋은 읽을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좋다고 야단법석인 책이 내가 읽을 만한 책이지 않습니다. 어쩌다 운 좋게 이러한 책 가운데 나한테 어울리는 책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한테 좋은 책은 나 스스로 오랫동안 살피고 더듬고 찾아나서야 비로소 만납니다. 찾고 찾고 또 찾으면서 다리품을 팔며 장만할 책 한 권입니다.

 사진기를 장만할 때뿐 아니라, 사진기를 장만한 다음 사진을 찍는 자리에서도 ‘내가 사진으로 무엇을 담아 말을 걸려고 하지?’ 하는 물음을 채우려면 오래오래 다리품을 팔아야 하고 생각을 거듭해야 하며 삶을 알차게 꾸려야 합니다. 










 (2) 사진기 살 돈과 사진책 살 돈


 “나무가 그렇게 아름답고 사람에게 주는 교훈이 큰지는 예전에는 미처 알지 못하였다 … 이제야 겨우 이런 자연의 신비함을 알아볼 수 있게 되었으니 ‘자신 참으로 둔하게 살기도 하였구나’ 하고 탄식을 하게 된다(35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사진책 《FAMILY ZONE》을 봅니다. 사진책 《FAMILY ZONE》은 광주과학기술원장인 선우중호 님이 당신 사진과 당신 식구들 사진을 한데 그러모아 펴낸 책입니다.

 전문 사진쟁이가 아닌 선우중호 님이지만 풋내기 사진쟁이 또한 아닌 선우중호 님입니다. 취미가 사진이라지만 그예 취미로만 마주하지 않는 사진입니다.


.. (50여 년 전 대학에 다닐 때에) 내 전 재산을 털어서 산 비싼 카메라이고 재산목록 1호라서 다루기도 조심스럽게 다루어서인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카메라는 손색이 없이 잘 작동되고 있다. 요즈음은 이런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이 오히려 요란스러운 디지털 카메라를 들고 다니는 것보다 더 전문가답게 보여진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사람들이 좀 많이 모이는 곳이면 오히려 이런 골동품을 가지고 나가 전문가인 양 과시하기도 한다. 우리같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한다면 카메라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비싼 카메라를 가진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이지 좋은 사진을 찍는 것과는 크게 관계가 없다 … 현재 쓰고 있는 카메라가 전혀 문제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혹시카메라를 새로운 모델이나 다른 종류로 바꾸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짧은 생각에서 새로운 모델로 바꾸다 보니, 내 카메라 장 안에는 카메라가 하나 가득 있다. 대부분이 아직도 멀쩡하기만 한 카메라들이라 볼 때마다 좀 미안한 느낌이 든다 ..  (21∼22쪽)


 짧지 않은 햇수에 걸쳐 즐겨 온 사진 가운데 사람들한테 좀더 널리 나누고 싶은 사진을 몇 가지 간추려서 묶은 《FAMILY ZONE》에는 선우중호 님이 사진과 사진기와 사진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밝힌 글이 사이사이 실려 있습니다. 흔히들 이런 사진책을 내면서 사진만 덜렁 싣는데, 선우중호 님은 ‘사진에 할 말 있다’는 듯 여러 가지 말씀을 들려줍니다.


.. 비교적 근래에 산 카메라들은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서 그런지 최상의 기종들이지만, 솔직히 말해서 작품의 질은 카메라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나 자신부터 솔직히 인정한다 ..  (23쪽)


 아마, 이런 글을 읽는 분들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리라 봅니다. 틀림없이 고개를 끄덕일 만한 글입니다. 그런데 저로서는 고개를 끄덕일 수 없는 글입니다. 왜냐하면 제 살림살이와 제 삶과 제 사진길로 돌아볼 때에는 이런 말마디는 한낱 배부른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선우중호 님 스스로 “우리같이 취미로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말한다면 카메라가 좋고 나쁘고 하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주머니에 여유가 있어”서 “최상의 기종”들을 사 모으고 있습니다.

 참으로 딱합니다. 왜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에 ‘그때그때 새로 나온 사진기’를 사서 모아 놓고 먼지만 먹히십니까. 주머니에 돈이 좀 있을 때에 ‘그때그때 새로 나온 좋은 사진책’을 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그때 새로 나온 좋은 사진책을 장만하셨다면 이 사진책은 먼지를 먹을 일이 없습니다. 당신 스스로 수없이 다시 꺼내고 들추고 펼치고 하면서 손때가 잔뜩 먹습니다. 당신과 함께 사진을 좋아하는 식구들 또한 이 사진책을 넘기거나 펼치면서 사진책이 낡고 닳아 똑같은 사진책을 두 번 세 번 다시 장만하는 일이 생기기도 할 테고요. 당신한테 찾아온 손님한테 당신이 사랑하고 아끼는 사진책을 선물할 수 있습니다. 참 좋다고 느낀 사진책이라면 열 권쯤 장만한 다음 한 권씩 선물해 주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요.


.. 아무리 아름다운 것일지라도 매일 접하게 되면 아름답다고 느끼지 않게 된다. 그래서인지 흔히들 유럽과 같은 외국에 다녀오고서는 그들의 예술 작품에 대해 너무나 감명을 받은 나머지 우리 전통예술을 폄하하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크게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접하지 못하던 것을 처음 접하면 그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 ..  (52쪽)


 사진을 찍든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제대로 살피며 삶으로 삭일 노릇입니다. 제대로 살피지 못하거나 올바로 삭이지 못하면 엉터리 사진만 찍고 어설픈 그림만 그리며 어줍잖은 글만 씁니다.

 최고경영자 자리에 선 이들 누구나 똑같을 텐데, 최고경영자란 회사나 학교 살림을 가장 훌륭히 꾸리는 사람입니다. 당신들이 맡고 있는 자리를 제대로 살필 노릇이요 당신 삶을 바쳐 올바로 삭일 노릇입니다. 어설피 하거나 어줍잖게 맡아도 될 최고경영자 자리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 스스로 제대로 살필 줄을 모르기 때문에 아름다움을 제대로 못 느낍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볼 줄을 안다면 날마다 마주하는 아름다움이 얼마나 즐겁고 반가우고 고마운가를 새삼 헤아리며 날마다 기쁩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움을 올바로 삭이는 삶을 꾸리고 있다면, 참된 아름다움 앞에서 저절로 눈물이 흐릅니다. 우리 스스로 아름다움을 알뜰히 돌보고 있으면, 거짓 꾸민 아름다움 앞에서 혀를 끌끌 차며 슬픔에 북받쳐 눈물이 흐릅니다.


.. 왜 흑백을 고집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흑백사진과 컬러 사진의 차이를 책을 읽는 것과 TV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고 설명한다. 컬러 사진이 눈에 즐거움을 주는 것이라면 흑백사진은 뇌에 즐거움을 준다고 말을 한다. 흑백사진 애호가로서 좀 과장된 비유라고 들리기는 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흑백사진은 컬러 사진보다 사람들에게 더 많은 감동을 준다. 우리 눈은 자연의 각종 색들에 익숙하기 때문에 컬러 사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은 그저 아름다움으로 그칠 뿐이다. 그 작품성을 제외하고는 오랫동안 마음에 찡하고 남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 보통의 컬러 사진이다 ..  (79∼80쪽)


 곱고 밝게 찍어야 감동이 샘솟습니다. 흑백사진으로 찍었기에 감동이 샘솟지 않습니다. 선우중호 님은 “흑백사진은 좀 다르다. 자연의 모든 색을 흑과 백 그리고 그 사이의 색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작품에 있는 피사체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그런 피사체가 아니다(80쪽)”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맞습니다. 그래서 이 말마따나 적잖은 흑백사진들은 ‘몇 가지로 줄인 빛깔로 엮은 사진’인 터라 수수하거나 한결 깊은 느낌을 자아내곤 합니다.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도 이런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빛깔사진을 찍자면 누구나 아무렇게나 찍어서는 수수하거나 한결 깊은 느낌을 자아내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늘 바라보는 모습이 빛깔이 어우러진 삶이기 때문에, 빛깔사진은 빛깔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따라 크게 갈립니다.

 흑백사진은 다루어야 하는 빛깔이 아주 적기 때문에 살짝만 건드려 주어도 느낌이 달라지거나 살아납니다만, 빛깔사진은 다루어야 하는 빛깔이 아주 많은데다가 흑백사진과 마찬가지로 ‘그늘 자리’하고 ‘같은 빛깔이라 할지라도 짙기와 옅기에 따라 느낌이 다른’ 만큼 이러한 짙기와 옅기를 함께 건드려야 합니다. 몹시 어려운 사진이 빛깔사진입니다. 사진을 잘 모르는 사람은 마치 흑백사진을 해야만 작품이 되는 줄 잘못 알고 있습니다만, 작품이 되려면 사진을 잘 찍도록 애써야지 흑백사진을 찍을 노릇이 아닙니다. 저마다 붙잡고자 하는 사진감이 무엇인가를 헤아리면서 흑백사진으로 할는지 빛깔사진으로 할는지를 골라야 합니다. 이러면서 두 가지로 사진을 함께하는 가운데 흑백사진으로 살릴 수 있는 이야기는 흑백사진으로 살리고, 빛깔사진으로 살릴 만한 이야기는 빛깔사진으로 살려야 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어느 한 가지 생각에 지나치게 매여 있으면, 사진을 찍는 동안 ‘내가 얼마나 훌륭한 작품을 하고 있는데?’ 하는 자랑만 사진에 담깁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 스스로 ‘오늘 내가 아주 훌륭하다 싶은 사진을 하나 얻었다’고 느낄지라도 이 사진은 고작 오늘 하루로 그치는 사진입니다. 오늘을 마감하고 글피를 맞이할 때에는 글피에 걸맞게 ‘오늘 훌륭히 찍은 사진은 스스로 내려놓은’ 다음, 이보다 거듭나면서 이보다 한 걸음 더 내디딘 더 훌륭한 사진을 품에 안도록 땀을 흘릴 노릇입니다. ‘어제까지 내가 찍은 사진은 모조리 바보스러울 뿐입니다’ 하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오늘까지 내가 얻은 사진은 아직 어수룩할 뿐입니다’ 하는 생각이어야 합니다.

 게다가, 흑백사진이라 할지라도 흑백필름을 무엇으로 쓰느냐에 따라 다르고, 흑백필름을 안칠 사진기를 무엇으로 하느냐에 따라 다릅니다. 나아가, 35미리 사진기를 쓸는지 중형사진기를 쓸는지 대형사진기를 쓸는지에 따라 다릅니다. 또한, 여느 필름사진기를 쓰느냐하고 파노라마사진기를 쓰느냐하고 갈립니다. 같은 중형사진기라 하더라도 핫셀과 마미야와 브로니카가 다르며, 파노라마일 때에도 린호프인지 호스만인지 후지인지에 따라 다릅니다.

 선우중호 님은 《FAMILY ZONE》에서 “솔직히 말해서 작품의 질은 카메라 가격에 비례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렇다면 “작품 질이란 흑백이나 빛깔이냐에 따라 갈리지 않는다”고 말해야 앞뒤가 맞으면서 올바릅니다. 바로 이 사진책 《FAMILY ZONE》부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데, 선우중호 님은 흑백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으나, 당신 옆지기와 아이들을 모두 빛깔사진으로 담아내고 있습니다. 선우중호 님으로서는 당신 식구들이 빛깔사진 아닌 흑백사진으로 담았을 때에 한결 멋스러우며 작품값을 한다고 여기실는지 모릅니다만, 제 눈으로 들여다볼 때에는 흑백으로 하든 빛깔로 하든 스스로 붙잡은 사진감으로 얼마나 깊이 스며들며 하나로 어우러져 있는가에 따라 작품이라 할 만한지 아닌지가 갈리는구나 싶습니다. 흑백사진을 한다 할지라도 내가 담으려는 사진감하고 제대로 어깨동무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장걸음을 하는 사진입니다. 한자말로는 습작이요 우리 말로는 풋내기 작품입니다. 내가 담으려고 하는 사진감하고 살가이 하나가 되어 있으면 바야흐로 눈물과 웃음이 절로 샘솟는 작품입니다. 우리가 흔히 우러러 마지 않는 나라밖 몇몇 사진쟁이들은 당신들 스스로 언제나 예전 사진하고 견주어 한 걸음씩 나아가며 거듭나려는 몸짓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아름답거나 훌륭하다고 느낄 만합니다. 이들이 다큐를 하든 예술을 하든 상업을 하든 ‘흑백사진을 찍어’서 아름답다거나 훌륭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사진에 바치는 땀방울이 아름답기에 사진이 아름답습니다. 사진에 깃들이는 사랑이 훌륭하기에 사진이 훌륭합니다.

 사진책 《FAMILY ZONE》을 덮으면서 생각합니다. ‘사진 찍는 최고경영자’들께서 사진잔치도 열고 사진책도 내면서 ‘사진밭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킨다 할 만한데, 사진을 취미로 여기든 사진을 삶으로 여기든 사진을 직업으로 여기든 좋습니다만, 사진을 어떻게 맞아들여 즐기고 있든지 ‘사진은 사진으로 곰삭여’ 주십사 하고 바랍니다. 사진은 사진답게 해야지, 사진을 사진답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땅한 노릇입니다만, 회사를 꾸리는 자리에서 회사를 회사답게 꾸려야지 회사답지 않게 꾸릴 수 없고, 학교살림 맡은 분으로서는 학교를 학교답게 일구어야지 학교를 직업훈련소나 영어학원처럼 일굴 수 없는 노릇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을 할 때에는 온통 사진으로 생각하고 사진으로 살며 사진으로 보여주어야 합니다. 니콘이니 핫셀이니 마미야니 라이카니 올림푸스니 하는 이름은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는 몇 가지 길입니다. 표준렌즈를 쓰느니 광각렌즈를 쓰느니 망원렌즈를 쓰느니 또한 여러 갈래 길입니다. 필름을 쓰느냐 디지털파일을 쓰느냐 또한 여러 갈래 길이며, 디지털파일에서도 raw가 있고 jpg가 있습니다. 필름에서도 흑백뿐 아니라 빛깔필름에서는 여느 필름과 슬라이드가 있습니다. 이 모두 사진쟁이들이 사진을 하는 숱한 길 가운데 하나이지, 이러한 길 가운데 어느 길로 가야 작품이 된다거나 멋이 담긴다든가 좋다든가 하는 틀이 되지 않습니다. 어느 한 가지 길만이 사진이 아니며, 이 모두가 사진으로 가는 길인 한편, 이 가운데 사진을 사진으로서 제대로 삭이며 살아내는 자리에서 오래도록 고이 이어가는 아름다움을 꽃피웁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사진이 되면 비로소 ‘사진은 예술’이라 말할 수 있고, 사진이 사진다우며 사진으로 나누는 삶이 무엇인가 하고 두루 선보일 수 있습니다.


.. 결국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다른 전문가의 사진을 따라 찍는 것이 사진수업을 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작가의 사진이지 자기 자신의 사진은 아니다. 같은 피사체를 같은 장소에서 찍는다 하더라도 찍는 사람에 따라 다른 사진이 되는 것은 각기 피사체를 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진은 피사체를 찍는 것이 아니라 자기 생각을 피사체에 옮기고 이를 사진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  (132쪽)


 1940년에 태어난 선우중호 님은 어느덧 일흔 나이입니다. 일흔 나이에 사진을 새로 배우거나 다시 배우라 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취미로 여기든 돈벌이로 삼든 어떻게 바라보든지, 사진이 참 좋아 사진길을 걷고자 하신다면 일흔 나이에라도 새롭게 사진을 배울 노릇이요 여든이나 아흔에도 새롭게 다시 배우며 사진을 찍을 노릇입니다. 나이를 많이 먹었기에 더는 새로 배울 겨를이 없을 뿐 아니라 힘들어서 못 배우겠다고 하신다면 사진기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모든 문화와 예술과 교육과 정치와 사회와 경제가 매한가지인데,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없고 오늘과 똑같은 글피가 없습니다. 늘 새로 태어나는 하루요 노상 새로 일구는 삶입니다. 최고경영자라는 이름이란 언제나 새롭게 일하며 한결같이 새로움을 나누는 자리라고 생각합니다. 선우중호 님은 《FAMILY ZONE》을 내놓는 자리에서 “결국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깨닫습니다. 그런데 사진은 “자기를 찍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진이란 “사진기를 든 내 삶을 보여주는” 노릇입니다. “자기 생각을 피사체에 옮기”는 일에 그치지 않고, “내 삶이 내 사진에 고스란히 담깁”니다.

 흑백사진으로든 빛깔사진으로든 이 사진 하나를 바라보며 나 스스로 가슴이 뭉클하다면, 이이는 사진을 잘 찍어서가 아니라 삶을 알차게 꾸렸기 때문입니다. 사진을 쉰 해나 예순 해를 해 왔다고 해서 이이 사진이 아름다울까요? 사진을 고작 한두 달만 했다고 이이 사진은 형편없을까요?

 사진에 담는 깊이란 사진을 찍어 온 밥그릇(찍은 필름) 숫자가 아닙니다. 내가 얼마나 온누리를 뜨겁게 부둥켜안으며 따스히 손잡고 살아왔는가 하는 데에 달린 사진 찍는 깊이입니다.

 사진에 담는 멋이란 어떤 사진 장비를 쓰거나 어떤 필름을 쓰거나 어떤 장치를 하느냐 하고 동떨어져 있습니다. 내가 얼마나 나 스스로를 아름다이 가꾸고자 땀을 흘렸는가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에 담는 멋입니다. (4343.5.23.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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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터에 따라 삶이 다릅니다


 삶이 다르기에 넋이 다르고, 넋이 다르기에 눈길과 손길이 다릅니다. 다른 눈길과 손길에 따라 읽을 책이 다르고, 읽을 책이 다르니 받아들이는 그릇과 느낌이 다릅니다. 받아들이는 그릇과 느낌이 다르니 이를 담고 나누려는 글쓰기가 다릅니다. 도시에서 살아갈 때에는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버리며 더 많이 사고팔 글이 아니면 안 됩니다. 글이고 그림이고 사진이고 자꾸자꾸 더 많아야 합니다. 쓰레기봉투에 넣어 내놓는다고 사라질 쓰레기가 아닙니다만, 도시에서는 내 집에서 다른 동네나 시골로 쓰레기를 치워 버리고 있어도 이 흐름을 느끼거나 알아챌 가슴이 없습니다. 끝없이 이어질 말꼬리와 말재주가 판칠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밑뿌리를 살피며 보듬어 낼 고운 마음밭이란 싹트기 어렵습니다.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일자리 얻어 살고 있다 이야기하는데, 우리는 참말 어쩔 수 없이 도시에 뿌리내리거나 빌붙은 채 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는 참으로 나으며 더없이 빛나는 좋은 삶을 꾸리며 우리 넋과 몸을 가꾸면서 좋게 돌볼 수 있으나, 이러한 길하고 스스로 울타리를 쌓고 있지 않나 궁금합니다. 생협과 진보와 환경사랑과 참배움과 다문화권리 같은 이야기는 몸부림입니다. 즐거운 삶을 이루는 밑일이지 모든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올바르게 일구기 싫은 한편, 우리 이웃과 동무를 곱다시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예 도시에 붙잡히거나 얽매인 채 살고 있지 않느냐 하고 돌아보아야 합니다. (4343.5.2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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