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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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52 ― 대학은 왜 대학다움을 잃었는가
 : 김예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책이름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글 : 김예슬
- 펴낸곳 : 느린걸음 (2010.4.14.)
- 책값 : 7500원


 (1) 이 나라에 무슨 배움터가 있는가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사진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는 학과를 다녔다고 해서 그림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마친 사람이 글작가이지 않습니다. 대학생일 때에 빼어난 작품을 내놓았으면 이때부터 작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등학생 때에 작가 소리를 듣고, 어느 사람은 예순이나 일흔 나이에 비로소 작가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 강좌를 들었다고 사진을 잘 찍을 수 없습니다. 출판 강좌를 들었다고 책을 잘 만들 수 없습니다. 요리 강좌를 들었다고 밥을 잘 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 강의나 교육관 강좌란 지식을 차근차근 일러 주며 지식에 따라 하나하나 깨우치도록 이끄는 이야기나눔일 뿐입니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어떠한 일을 잘 해내거나 훌륭히 해낼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사진으로 찍어야 하는가를 깨닫고 꾸준하게 한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작가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책으로 담아야 하는가를 느끼며 차근차근 책을 만들어야 비로소 책쟁이입니다. 스스로 누구하고 어떻게 어느 자리에서 밥을 나누려 하는가를 살피며 국자나 칼을 들어야 비로소 밥하기(요리)를 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늘 우리 터전에서는 전문 직업인이 되자면 어쩔 수 없이 대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제가 그동안 읽어 온 책을 그러모아 동네 한켠에서 조그맣게 도서관 하나를 열었습니다만, 우리 나라 법으로는 제가 연 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을 뿐더러, 허가를 내주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도서관을 열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학교 도서관학과를 마쳐야 하고 사서자격증까지 따 놓아야 합니다. 스스로 책을 사랑하고 아끼며 깊이 보듬는 삶을 꾸린다고 해서 도서관을 열 수는 없는 우리 나라입니다.

 이는 기자가 될 때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쳤으나 빛나는 넋과 밝은 눈과 굳센 손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자로 뽑아서 어깨동무하는 언론매체는 한 군데라도 있을는지요. 아무런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나 옳고 맑고 푸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기자로 받아들여 손잡는 언론매체가 있는지요.

 의사라고 하는 일이든 법관이라 하는 일이든 공무원이라고 하는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내는 지식하고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만 참말로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지식을 다루는 마음이 없거나 지식을 펼칠 줄 아는 매무새를 살피지 않고 졸업장과 자격증만으로 전문 직업인을 쏟아내는 사회 얼거리란 얼마나 올바를는지 궁금합니다.

 교사를 가린다고 하는 교사 자격증이란 ‘어느 한 사람이 얼마나 교사다운가’ 하고 말해 주는 자격증이 될 만할까요. 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옳고 바르고 아름다이 가르칠 수 있는가요. 교사 자격증이란, 교과서 지식을 학년과정에 맞추어 머리속에 알뜰히 집어넣을 수 있는 재주를 갖춘 사람임을 말하는 셈 아닌지요.

 초중고등학교를 열두 해 다닌 제 지난날을 헤아리면, 이동안 만난 교사들 가운데 몽둥이를 들지 않거나 손찌검을 하지 않은 교사란 다섯 손가락에 꼽기 어려울 만큼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인 우리한테 욕이나 거친 말을 쏟아내지 않은 교사 또한 다섯 손가락에 꼽기 힘들 만큼 아주 드뭅니다. 이들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은 모두 교사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요, 교육대학교에서 교육을 배운 이들일 텐데, 아이와 마주한 자리에서 어른다움을 보여주며 스스로 본보기가 되지는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길을 걷는 아름다운 스승으로 서고자 마음을 쓰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열두 해에 걸쳐 학교라는 울타리 안쪽에서 아름다운 스승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언제나 학교 안쪽에 머물 마음이 없었고 이무렵 학교에서 복닥인 이야기는 거의 떠올리지 못합니다. 마음에 아로새겨질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학교에서는 느끼거나 얻거나 배우지 못했습니다.

 교사들은 왜 교과서 진도에 발목이 잡혀 있어야 할까요. 교과서는 우리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며 멋지고 사랑스러운 책일까요. 교사가 학생한테 할 일은 교과서 지식 집어넣기가 끝인가요. 교사란 어떤 사람이요 어떻게 살아갈 사람일까요. 교사들은 으레 우리들 앞에서 “교사도 사람이야!” 하고 외치며 성을 내고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면 몽둥이에 얻어맞을 뿐 아니라 머리카락이 잘리고 욕설을 듣고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학생도 사람”일 텐데, 학생도 사람이라고 여긴 교사란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학교라는 울타리가 지난날과 견주어 새롭게 바뀌었다거나 크게 달라졌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지난날 제 어릴 적에는 국민학생 때에 틈나는 대로 온갖 놀이를 즐겼습니다. 언니 오빠 형 누나 들한테서 온갖 놀이를 물려받으며 동생한테 온갖 놀이를 고스란히 물려주며 놀았습니다. 이 흐름은 중학교 문턱을 밟자마자 깨졌는데, 어린이일 때에 어린이 놀이가 가로막히면서 푸름이들이 푸름이 놀이를 즐기지 못하도록 하는 굴레를 여섯 해나 보내다 보니,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동무들이 즐긴다는 놀이란 고작 술ㆍ담배ㆍ당구뿐이었고, 참다운 사랑이 아닌 아랫도리 사랑뿐이었습니다. 올바로 배우도록 이끌지 못한 학교인 까닭에 올바로 배우지도 못했지만, 즐겁게 놀도록 풀어놓지 않은 학교인 터라 즐거이 놀 줄을 잊은 한편, 참다운 사랑을 나누지 않은 학교였기에 참다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마음씨를 잃었다고 하겠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가 아름답고 즐거우며 슬기롭고 신나는 열두 해로 자리매기지 못하는 우리 나라입니다. 이리하여 고등학교를 마치고 들어간다는 대학교에서 아름답고 즐거우며 슬기롭고 신나는 새 배움과 새 사랑과 새 기쁨과 새 마음과 새 넋으로 이어지거나 거듭날 수 없구나 싶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갑작스레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앞서 말했듯이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간다고 사진작가가 되거나 예술가가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밑바탕을 다지지 못한 지난 열두 해인데, 대학생이 된 젊은이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나누겠습니까. 마음껏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아랫도리) 사랑놀이에 빠질 줄은 알아도, 마음껏 배우고 실컷 (참) 사랑을 하며 기쁘게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보람을 어떻게 스스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학교가 대학교다우려면 대학교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하지만, 이에 앞서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가 올바르게 고쳐져야 합니다. 대학바라기 열두 해가 아닌, 초등은 초등대로 아름답고 알차며 즐거운 나날이요, 중등은 중등대로 훌륭하며 살갑고 기쁜 나날인 가운데, 고등은 고등대로 빛나며 멋지고 재미난 나날이 되도록 학교 얼거리가 싹 바뀌어야 합니다. 교과서란 교육과정을 돕는 교재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교사가 먼저 깨달아 학생한테 스스로 ‘책다운 책’을 찾아 읽도록 돕는 한편, 교사 또한 언제나 ‘책다운 책’을 바지런히 찾아 읽으며 슬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학교 울타리 안쪽에서 너무 긴 나날을 보내지 않아야 하고, 학교 울타리 바깥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웃과 동무를 널리 사귀고 마주하면서 우리 삶터를 깊고 넓게 헤아리는 눈썰미를 교사와 학생이 나란히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인 밥과 옷과 집을 내 손으로 스스로 일구어 얻을 수 있게끔 교사부터 살아내고 학생들 또한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알뜰히 익히도록 어버이들이 가르치고 도와야 합니다. 교사와 어버이란 사람들은 이름만 ‘어른’이 아닌 속살 가득 참어른으로 살아내면서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튼튼한 버팀나무이자 싱그러운 나무그늘 노릇을 하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배움’이란 바로 삶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어떻게 꾸리느냐가 바로 배움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삶을 어느 결에 따라 일구느냐가 바로 배움입니다. 우리 나라 교육기관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나뉘어 있지만, 정작 배움터다운 모습은 하나도 못 갖추고 있습니다.


 (2) 사람다이 살고픈 외침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 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13∼14쪽).”고 외친 김예슬 님이 당신 생각을 책 하나로 갈무리했습니다. 김예슬 님에 앞서 대학교를 그만둔 사람이 많았고, 김예슬 님 뒤에 대학교를 그만둘 사람도 많을 텐데, 사람들은 ‘김예슬 선언’이라는 이름을 붙여 김예슬 님을 떠올리거나 이야기합니다.

 김예슬 님 생각이 담긴 책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125쪽짜리 작은 책입니다. 김예슬 님이 대자보 하나를 쓰고 1인시위를 하면서 그만둔 대학 삶을 ‘짤막한’ 대자보로는 모두 밝힐 수 없었기에 ‘조금 긴’ 글을 써서 책으로 묶었다고 합니다. 자격증 장사를 하는 대학교이고, 소비중독으로 내모는 학습중독으로 젖어들도록 하며, 삶은 없이 학문만 가득한 지식인들 모습을 당신한테서 스스로 느끼는 가운데,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 없는데다가 우리들은 88만 원 세대가 아니라고 하는 외침을 한 올 두 올 담았습니다.

 작은 책, 그야말로 작은 책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이야기는 하나도 새롭지 않습니다. 이 조그마한 책에 담긴 줄거리는 어느 하나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이 수수한 책에 깃든 생각자락을 모르는 지식인은 하나도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 조촐한 책에 서린 아픔과 생채기를 모를 여느 어른이나 교사나 어버이 또한 따로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다들 알고 있다고 하는 대학 문제는 그치지 않습니다. 다들 느끼고 있다는 대학 문제는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다들 알고 있다고 하면서 대학 문제를 비롯해 교육 문제를 푸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다들 느끼고 있다지만 정작 몸으로는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니 더더욱 단단해질 뿐 아니라 팍팍해지는 대학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말글학자로만 알고 있으나, 교육학자로 오랜 나날을 보냈던 최현배 님은 일제강점기에 ‘페스탈로찌 논문’을 썼고, 해방 뒤에는 《나라 건지는 교육》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말글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최현배 님은 1950년대에 진작 ‘대학입시가 큰 문제’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대학입시뿐 아니라 국민학교 입시 또한 몹시 큰 말썽거리였다니까, 오늘날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느니 뭐를 더 가르치느니 하면서 떠들썩한 모양새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지난날에는 국민학교 입시 때문에 어린이들이 어린 나날부터 들볶여야 했고, 오늘날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부터 알파벳을 가르친다고 법석이요 참다운 마음닦이를 하도록 이끌지 못하니, 예나 이제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들볶이기만 합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는 내내 최현배 님이 쓴 《나라 건지는 교육》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순 해가 흐르는 동안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물질문명은 더할 나위 없이 나아졌으나, ‘생각하고 말하고 배우고 나누고 사랑하는’ 마음살이는 그지없이 뒷걸음을 치거나 나동그라지고 있구나 싶습니다. 참다이 나아지지 못하는 이 나라이니, 참다운 넋과 얼이 발돋움하지 못하고, 참다운 넋과 얼이 발돋움하지 못하는 판이기에 곱고 맑은 꿈이 꽃피우기 어렵습니다.

 대학교는 대학교다워야 할 뿐 아니라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고 살림집은 살림집다워야 합니다. 동네는 동네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새로워진다고 이 하나가 제대로 새로워진다 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와 초중고등학교와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나란히 새로워지면서 올바른 길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교사만 훌륭해진다고 학생들이 좋을 수 없습니다. 교사를 비롯해 여느 어른 모두와 어버이들이 다 함께 훌륭해져야 하고, 여느 자리 여느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훌륭히 가르친다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와서 엉망진창이라거나 동네 삶터는 엉터리라 한다면 모든 배움이란 도루묵이요 부질없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동네 삶터는 아름답거나 집안 살림살이는 훌륭하달지라도 학교가 엉터리라면 아이들은 아주 힘들고 벅찹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와 아이를 맡아 가르친다는 교사를 비롯해 동네 어른이자 형이자 언니이자 누나이자 오빠인 사람 모두 참되고 착하고 고운 길을 살피고 찾고 느끼며 누릴 수 있어야 비로소 “나라 건지는 배움”이 이루어집니다. 이럴 때에 바야흐로 “대학교를 다녀도 좋고 대학교를 안 다녀도 좋은”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3) 되새겨 읽는 배움말


 김예슬 님 앞서 대학교를 그만두거나 처음부터 안 다닌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김예슬 님은 숱한 ‘고졸자’나 ‘중졸자’나 ‘국졸자’나 ‘무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학력을 으뜸으로 치면서 경쟁주의와 1등주의가 넘실거리는 한국땅에서는 졸업장 하나 안 가지면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손해가 제법 큽니다. 가방끈 짧은 사람한테는 전문 직업인 길이란 거의 꽉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 직업인이 아닌 살림꾼 자리는 가방끈하고 하나도 얽히지 않습니다. 가방끈이 길어야 사랑을 잘하겠습니까. 가방끈이 짧으면 믿음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가방끈이 길어야 아이를 잘 낳을까요. 가방끈이 짧으면 농사를 못 짓겠습니까.

 김예슬 님으로서는 주류 권력층 자리에서 스스로 떨려 나왔는데, 주류 권력층을 생각하면 아쉽겠지만 낮은 자리와 가난한 자리를 헤아리면 한결 너르고 넉넉하며 너그러운 새 이웃과 동무를 만나고 사귈 수 있어 기쁠 수 있습니다. 주류를 살피지 않고 사람을 살피는 자리로 들어선 김예슬 님이라 할 만하고, 권력층을 기웃거리지 않고 못목숨을 사랑하는 자리에 한 발 디딘 김예슬 님이라 할 만합니다.

 다만, 한 발을 디뎠을 뿐이지, 걸음을 걷는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막 디딘 한 발이 튼튼한 걸음걸이가 될 수 있게끔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디디는 한 발 두 발이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스스로 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가난한 배움에 가난한 몸에 가난한 마음에 가난한 믿음에 가난한 말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님은 ‘말이 가난해야 하느님 뜻을 알아듣고 하느님 뜻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살림과 배움과 몸과 마음과 믿음뿐 아니라 말까지 가난한 자리를 찾아야 하는 이음고리를 곰곰이 되짚으며 스스로 가난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나눌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책에 알알이 실린 말마디 몇 가지를 추려서 되새겨 봅니다. (4343.6.22.불.ㅎㄲㅅㄱ)


[20, 45쪽] 이상했다.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왜?”라고 물은 사람은 없었다 … 이 졸업장과 자격증은 도대체 누가 요구하는가?

[28, 40∼41, 58∼59쪽] 초등학교 때는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중학교 때는 아직 평준화가 되기 전 명문고에 진입하기 위해 시험과 시험의 허들을 넘었다. 그렇게 들어간 명문고에서 다시 명문대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내달려 왔다 … 입시 전쟁을 치르고 나니 등록금 전쟁이 기다리고, 다시 취업 전쟁이 시작된다 … 점점 늘어나는 영어 강의는 얼마나 학문을 이해했는가보다 얼마나 알아들었는가를 확인하는 자리다 … 자신의 경험과 개성을 바탕으로 해서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가는 일은, 삶에서 진정 필요한 일은 모조리 시장으로 떠넘겨 버렸다.

[30, 43쪽] 쉽게 더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을 찾아 들으며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피곤하게 논쟁할 일이 생기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우린 그냥 생각이 다를 뿐이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두기로 착하고 매너있게 관계를 유지하면 됐다. 대학생이 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그나마의 자유는, 그저 20년 동안 공부로 쌓인 것을 다 풀어내겠다는 듯 어른들의 밤거리를 닮은 대학 밤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 …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세계화가 누구의 손에 돌아가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웰빙타령은 하면서도 내가 먹고 쓰는 게 어디에서 길러지고 누가 만드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제대로 연애할 줄도 모르고 자기를 성찰할 줄도 모른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실제적인 문제에 우리는 얼마나 당혹하고 무지한가? … 돈을 벌고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세상에 살면서, 그것 외의 모든 것에 스스로 무능해져 버렸다.

[52, 59, 62쪽] 대학은 이제부터 차라리 진리의 전당이기를 당당하게 포기 선언하고 취업고시 학원이라고 천명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취직도 안 된 청년들을 리콜하든지 손해배상하든지 해야 하지 않은가 … ‘자격증 장사 브로커’인 대학의 실체를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똑똑한 불량품’들의 존재가 죽은 대학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일 것이다 … 대졸자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소비에 대한 기대치는 부풀려지고, 과시적인 소비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진다 … 더 기계화되고 도시화될수록, 고유의 개성을 살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는 점점 더 박탈되고 있다.

[57, 65쪽] 신문, TV, 인터넷은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으로 평생학습 시대를 전파하며 광범위하게 지식을 판매하고 있다 … 직접 시를 쓰고 봉사를 하면서 그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충만감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면서 인생 전체에 걸쳐 더 발전해 나아가면 될 것이다.

[69∼71, 79쪽]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언론이 대응하는 방식과 차원에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 사회과학적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내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삶의 총제적 진보는 아닌 듯했다. 제도와 정책은 진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삶의 내용과 생활문화는 한참 후진 듯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장은 옳을지 몰라도 내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과 사람의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 왜 ‘진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생고통은 커져만 가는데 생활민심과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 내가 접혀 온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 지구 시대에 ‘고르게 부자인 삶’의 꿈이 진정한 진보일까?.

[80, 94쪽] 대학을 나오지 않고 주류적으로 살지 않아도 억울하거나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다른 삶이 존중되는 사회적 가치를 먼저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대학을 거부한 나의 요구는 88만 원을 188만 원으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더 근원적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 좋은 일로 성공까지 하겠다는 것도 또 하나의 성공경쟁이 아닌지. 기아 분쟁 지역에서 봉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고통 받는 그이들의 존엄한 감정이 자신의 맑은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일깨울 수 있도록 좀 나직하게 나아갈 수 없을까.

[86∼87쪽]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과 ‘삶’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학’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자기중심주의를 깨뜨린 삶의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 머리속에 집중적으로 집어넣는 인문학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나는 나 자신과 친구들과 비판적 지식인들을 접하며 절감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인문지식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지식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삶과 실천의 흡수능력을 넘어서는 인문학은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런 자기 내어줌의 실천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과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100쪽] 세상 모든 좋은 부모님들께 부탁 드린다. 특히 진보적이라는 부모님들께 말씀 드린다 …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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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말과 헌책방 7
최종규 지음 / 그물코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시중 책방에 배본을 안 하는 1인잡지인 만큼, 마지막으로 배본을 했던 책에다가 이 글을 달아 놓습니다. 즐겁게 기념 삼아~ ^^)


 교보·영풍·알라딘 어디에도 배본 안 하는 책
 - ‘작은 책’과 ‘작은 책마을’이라는 이름


 작은 책방만으로 책마을을 살릴 수 있을는지, 큰 책방이 함께 있어야 책마을을 알뜰살뜰 살릴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다만, 큰 책방만으로는 책마을을 살릴 수 없으며, 작은 책방이 씨가 말라 가는 오늘날 흐름에서는 책마을이 오롯이 살아나기란 더욱 어려우리라 생각합니다.

 무엇보다도 큰 책방에서 마련해 놓고 있는 ‘점수쌓기(마일리지)’가 없어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책 또한 물건이라 여길 수 있는 만큼 책을 살 때마다 어느 만큼 점수를 쌓아 나중에 덤을 선물받을 수 있도록 하는 일도 괜찮은 노릇이지만, 책을 찾아 읽는 우리들은 점수가 아닌 내 삶을 살찌우는 책 알맹이에 더 눈길을 둘 노릇이 아니랴 싶습니다. 더 많은 책을 더 많은 돈을 치르고 사들이는 우리들이 아니라, 다문 한 권을 찾아 읽더라도 내 삶을 가다듬고 내 넋을 보듬으며 내 몸을 새롭게 추스르는 책이 되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같은 책을 한꺼번에 열 권이나 스무 권씩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하는 때라면 좀더 눅은 값으로 사들일 길을 찾느라 출판사에 전화로 여쭐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때에도 우리들은 되도록 책에 적힌 값 그대로 장만해서 둘레에 선물해야 더욱 좋으리라 봅니다. 우리가 찾아서 읽는 책이 더없이 훌륭하고, 우리가 둘레에 선물하려는 책이 참으로 아름답다 한다면, 이 책을 쓰느라 애쓴 사람과 이 책을 펴내느라 힘쓴 일꾼이 땀값을 알뜰히 거둘 수 있도록 ‘책값 에누리하기’는 되도록 안 해야 올바른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달이 나오는 잡지 가운데 ‘작은 책’이 있습니다. ‘좋은 생각’이 있고 ‘아름다운 동행’이 있습니다. ‘마음 수련’이 있고, 제가 잘 모르는 수많은 잡지가 있습니다. 너나없이 곱고 멋지며 좋은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들 잡지를 돌아볼 때에 참말 이 잡지에 붙은 이름 그대로 잡지 알맹이가 이루어져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허울은 훌륭하나 속살은 허술한 짜임새가 아닌지 궁금합니다. 참으로 작게 여미는 ‘작은 책’인지 궁금하고, 더없이 좋은 생각을 나누는 ‘좋은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어느 만큼 아름다운 길벗이 되는 ‘아름다운 동행’일까요. 우리들 마음을 갈고닦는 자리에서 얼마나 알찬 ‘마음 수련’일까요.

 책을 펴내는 일터를 곰곰이 돌아보면 어느 곳이건 그지없이 좋은 이름을 붙이고 있다고 느낍니다. 그런데 이들 좋은 이름을 쓰는 출판사 가운데 ‘처음과 같이 작은 살림으로 작게 책을 내는’ 곳을 뺀, ‘처음과 달리 크게 북돋운 살림으로 크게 책을 내는’ 곳들은 당신들 이름에 걸맞게 한길을 곧게 걸어가고 있는지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먹고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첫마음을 버리거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말마디로 참마음을 걷어차고 있지는 않느냐고 여쭙고 싶습니다.

 그러나, 저부터 제 책 하나 엮어내면서 참마음을 어느 만큼 건사하고 있는지 늘 돌아볼 노릇입니다. 다른 사람 말을 하기 앞서 저부터 올바르거나 착하거나 참되거나 곱게 살아가며 책에 이러한 기운을 불어넣고 있는지 되새길 노릇입니다. 







 

 

 

 

 

 

 

 

 이번에 제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 9호인 《작은 책방이 살리는 책마을》을 내놓으며 곰곰이 생각에 잠깁니다. 제가 틈틈이 내놓는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은 지난 8호인 《오래된 책은 아름답다》 때부터 시중 새책방이나 인터넷책방에 배본을 안 하고 있습니다. 잡지 7호까지는 시중 새책방이나 인터넷책방에 배본을 했으나, 8호부터는 오로지 정기구독만 받기로 했고, 동네 한켠에서 알뜰히 꾸리는 몇 군데 책방에만 ‘손수 배달’을 해 주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제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은 교보, 영풍, 알라딘, 예스24, 인터파크 어디에서도 찾아보실 수 없습니다. 점수쌓기를 하고 제값팔기(정가제)를 안 하는 책방에는 “우리 말과 헌책방”을 배본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책값이란 책을 쓰고 만드는 사람들 땀방울에 값하면서 다음 책을 내놓을 힘을 얻는 보람으로 붙여야지, 점수쌓기와 깎아팔기를 따져서 비싸게 올려붙이는 숫자놀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글쓴이와 출판사 일꾼이 살고, 여기에 책방 일꾼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아름다운 책마을이 되도록 더 작게 책을 내고 더 작게 책을 팔며 더 작게 책을 나누어야 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오늘날 우리 누리에서 교보, 영풍, 알라딘, 예스24, 인터파크 같은 곳에 책을 들여놓지 않고서 어떻게 책을 팔아 먹고사느냐고 걱정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꽤 즐겁게 책을 팔고 책을 나누며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잘 팔리는 책을 내놓아야 먹고살 만하지 않습니다. 많고 적고가 아닌 알맞게 사랑받고 알맞게 나눌 수 있는 책으로 알맞춤한 살림을 꾸리면 넉넉하고 즐겁습니다.

 저는 저 스스로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거나 아이를 안거나 손잡고 걸리며 함께 천천히 걸어다니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쓴 책을 즐겁게 찾아보려 하거나 만나려 하는 분들이라면 저처럼 자전거를 즐기거나 두 다리로 걸어다니면서 이 땅에서 알차고 신나며 보람있게 일하고 놀고 어울릴 수 있기를 꿈꿉니다. 스스로 아름다운 삶을 꾸리며 스스로 아름다운 책 하나 곁에 놓고, 스스로 아름다운 넋을 추스르며 스스로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우는 고운 길을 어깨동무하고 싶습니다. (4343.6.20.해.ㅎㄲㅅㄱ)

 



   
   1인잡지 “우리 말과 헌책방”을 살 수 있는 책방 :
  - 인천 배다리 책쉼터 〈나비날다〉
  - 서울 명륜동 인문사회과학책방 〈풀무질〉

(살가운 작은 책방을 차츰차츰 알아보며, ‘다리품 팔아 찾아가 책을 만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할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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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두 권 받아보기 : 12×8000 - 6000 = 90000원
 평생 받아보기 : 200만 원
 
   

= 잡지 9호 차례 = 
가. 헌책방
 - 〈숨어있는 책〉 발자국
 - 〈숨어있는 책〉 일꾼과 나눈 이야기
 - 예전 이야기나눔 몇 대목
 - 〈숨어있는 책〉 나들이 ㄱ
 - 〈숨어있는 책〉 나들이 ㄴ
 - 〈숨어있는 책〉 풍경 하나, 말 하나
나. 책과 삶
 - 작은 책방이 살리는 책마을
 - 골목마실
 - 신개념 헌책방
 - 반갑고 기쁘며 좋은 책은
 - 아픈 목소리
 - 책방에 가는 아빠
 - 글을 쓸 때에
 - 문학과 글쓰기
 - 젊은 대학생을 보며
 - 내 사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 인천사람 책읽기
 - 이지연
다. 우리 말
 - 내가 좋아하는 말
 - 함께 살아가는 말
 - 한 바닥 이야기 (16꼭지)
 - '-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 '-적' 없애야 말 된다
 - 좋은 말 새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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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신미식 포토에세이
신미식 지음 / 푸른솔 / 2007년 7월
평점 :
절판



 구경꾼 사진인가 사랑꾼 사진인가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22] 신미식,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책이름 :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
- 글ㆍ사진 : 신미식
- 펴낸곳 : 푸른솔 (2007.7.7.)
- 책값 : 27000원


 (1) 구경하는 사진과 살아가는 사진


 제가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는 고등학교입니다. 제가 마친 고등학교는 여느 인문계 고등학교이기에 따로 어떤 특기나 재주를 배우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마친 학교가 이곳이든 저곳이든 저로서는 학교에서 배웠다고 내세울 만한 대목이 따로 없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치거나 중학교만 마친 사람이 대학교에서 강사나 교수가 되는 일은 아주 드뭅니다. 대학교라는 자리에서 대학생을 가르치는 몫을 맡는 사람은 모두 자격증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대학교 졸업장이란 숱한 자격증 가운데 하나이며 거의 언제나 어디에서든 내밀어야만 하는 자격증입니다. 흔히 말하는 전문 일자리를 얻으려면 대학교 졸업장을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책 만드는 일을 하는 출판사이든, 온누리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루는 언론사이든, 아이들 가르치는 터전이라는 학교이든, 동네사람을 보듬는 일을 맡는다는 공공기관(동사무소)이든, 졸업장이 없고서는 입사지원서 하나 내놓지 못합니다.

 이리하여 글쓰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그림그리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노래부르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춤추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사진찍기를 가르치거나 배운다 할 때,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왔다거나 어느어느 사람한테서 배웠다고 하는 경력이나 자격을 들이밀어야 합니다.

 나아가, 글이나 그림이나 사진 따위를 처음으로 배운다든지 새롭게 배운다든지 하는 우리들 스스로 ‘어느어느 대학교’라든지 ‘무슨무슨 대학교를 나온 아무개’라든지 ‘이런저런 강좌나 특강’이라든지 ‘어찌어찌 이름난 누군가’를 찾아나섭니다. 하다못해(는 아니지만 어쩔 수 없는 우리 삶에 따라) 밥하기를 배운다는 자리에서도, 우리를 낳아 기르며 먹여살린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밥하기를 배우려 하는 사람은 얼마 안 됩니다. 요리학원에 나가야 하고, 요리교실을 들어야 하며, 요리책을 들여다보거나 요리방송을 보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다고 대학교라는 틀이 나쁜 틀이라고는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하나 섬돌을 밟아 올라가듯 차근차근 가르쳐 주는 틀입니다. 샛길로 빠지거나 어긋나지 않도록 잘 붙잡아 주며 이끄는 틀입니다.

 그런데, 대학교라는 배움터는 열린 마당이 아닌 갇힌 틀입니다. 저마다 다른 사람들이 저마다 다른 길을 찾으며 저마다 다른 삶을 꾸리도록 길벗이 되어 주는 열린 마당이 아니라, 어떠한 자격증을 따내도록 한 가지 길을 걸어가도록 하는 갇힌 틀입니다.

 열린 마당에서는 무슨 솜씨나 재주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따로 가르칠 일이 없습니다. 밥물 맞추기와 나물 무치기를 알려주는 할머니가 무슨 솜씨나 재주를 부려서 더 맛나게 하라고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저 밥을 할 때에는 물을 어찌 맞추고 나물을 무칠 때에는 어떻게 하면 된다고 가르칠 뿐입니다. 갇힌 틀에서는 언제나 솜씨와 재주를 가르칩니다. 따로 가르치지 않고서는 따로 배울 수 없습니다. 밥물을 맞출 때에 비율을 따지고 부피를 셈합니다. 쌀알을 몇 그램 떠서 몇 차례 씻어서 어느 높이가 되도록 맞추도록 지시를 내립니다. 나물은 몇 그램을 마련하고 어디를 어느 만한 길이로 다듬어서 몇 분에 걸쳐 어떠한 그릇이나 냄비나 불판을 쓰는데 어떤 양념을 얼마만한 부피를 어느 때에 넣어서 무치라고 가르칩니다.

 지난주부터 어찌저찌하여 어느 대안학교 선생님들한테 사진을 가르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저처럼 대학교를 안 나왔을 뿐 아니라, 사진 전공조차 안 했으며, 가르쳐 준 사진 스승이 없는 사람한테 사진을 배우겠다고 하는 분들이 참 용하구나 싶은데, 저로서는 즐겁게 사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너덧 해쯤 앞서 국립공원을지키는시민모임 자원봉사 활동가 아줌마 아저씨한테 사진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그때나 이때나 제 마음은 매한가지입니다. 저한테 ‘사진 배우기’를 하겠다는 분들은 ‘가르쳐’ 주기를 바라시지만, 저는 사진을 가르치지 못하고 가르칠 생각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을 가르치려 한다면, 모든 사진기마다 딸려 있는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손전화를 장만해도 이 손전화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잘 다룰 수 있습니다. 자전거를 마련해도 이 자전거에 딸린 사용설명서를 읽으면 됩니다. 자동차를 사서 몰든 오토바이를 사서 몰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든 물건에 딸린 설명서를 찬찬히 읽으면서 이 물건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가를 스스로 익힐 노릇입니다. 사진이라고 다르지 않고, 그림이나 글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볼펜을 쓰는 솜씨를 익히고자 글쓰기를 배운다 하지 않겠지요? 붓을 놀리는 재주를 알고자 그림그리기를 배운다 하지 않을 테고요.

 사진기 다루는 재주나 솜씨 때문이라면 저 같은 사람한테서 사진을 배울 까닭이 없습니다. 아니, 누구한테서든 배울 까닭이 없어요. 이는 대학교에서도 마찬가지요, 사진강좌나 사진교실 같은 데에서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어느 누구도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을 찍는 재주나 솜씨는 ‘사진기 사용설명서’를 읽으며 스스로 알아차릴 노릇입니다. 그러니까, 사진기 단추를 눌러 사진을 만드는 일이란, 빨래기계 단추를 눌러 빨래를 하는 일하고 똑같습니다.

 사진을 배운다고 할 때에는 사진기 다루는 재주가 아닌 사진 한 장에 담을 내 넋과 삶을 배우려 한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합니다. 사진 한 장을 어떠한 눈길과 매무새로 바라보는가를 돌아보고, 사진 한 장을 얻고자 어떻게 마음쓰고 애쓰고 힘써야 하는가를 살피며, 사진 한 장을 얻고 나서 이 사진으로 내 둘레 이웃과 동무하고 즐거운 눈물과 웃음을 주고받느냐를 헤아릴 노릇이라고 봅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사진을 찍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에 따라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람을 사귑니다. 이리하여 사진을 배운다 할 때에는 우리 삶을 배우겠다는 셈이요, 이제까지 보내 온 내 삶을 찬찬히 되새기고 되짚으면서 앞으로 꾸릴 내 삶이 어떠한 모습과 매무새가 되면 좋을까 하고 내다보는 셈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대로 사진을 읽을 수 있고, 우리가 살아가려는 걸음걸이대로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사진을 배우려는 사람들은 누구나 맨 먼저 내 삶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면 사진찍기는 못합니다. 내 삶을 모르는데 무슨 글쓰기를 하며, 내 삶을 알려 하지 않는데 무슨 그림그리기를 하겠어요.

 오늘날 숱한 사람들이 사진기를 쉽게 장만하고 사진을 쉽게 찍습니다. 참으로 반가운 일입니다. 사진찍기란 몇몇 부자나 예술쟁이들이 겉멋 부리듯 하는 놀음놀이가 아니니까요. 비싸구려 사진기만 사진기가 아니요, 값싼 1회용 사진기 또한 사진기입니다. 사진은 누구나 찍을 수 있어야 하며, 사진기는 누구나 장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빼어난 장비를 갖추었다고 빼어난 사진이 나오지 않으며, 허술한 장비밖에 없다고 허술한 사진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사진입니다. 숟가락을 들고 주걱을 들며 칼을 든 살림꾼 마음에 따라 달라지는 밥이듯, 사진기를 쥔 우리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어디에서 언제 찍으려 하느냐는 마음가짐을 다스리는 만큼 사진이 태어납니다.

 사진기를 들고는 겉멋을 부리고 싶다면야 얼마든지 겉멋을 부릴 수 있습니다. 스스로 겉멋에 들린 삶을 꾸리며 겉멋을 한껏 뽐내는 또다른 길로 사진기를 쥘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길을 걸어간다고 잘못이라거나 몹쓸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스스로 아름다워지는 길로 접어들지 못할 뿐이니, 이렇게 겉스치는 길로 걸어가면서 사진을 찍는 동안에는 구경꾼 사진을 얻습니다. 나 스스로 속알을 채우며 보듬는 길을 걸어가려 한다면 시나브로 속알이 야무지거나 단단하여 그윽한 멋이 풍기는 사진을 얻습니다. 사랑스레 꾸리는 삶이기에 사랑꾼 사진을 얻어요.

 그런데 사진 가르치기를 두 번째로 해 보면서 적잖이 걱정스럽습니다. 저로서는 제 삶을 아름다이 가꾸고 싶어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고 싶은데, 사진을 배우려는 분들은 어떤 길을 걷고자 하시는지 잘 모르겠기 때문입니다. 따로 사진 재주만을 배우려 하지 않느냐 싶어 근심스럽습니다. 대안학교에서 아이들하고 어울리는 하루하루란 아이들한테 지식을 집어넣는 일이 아닐 텐데, 대안학교 선생님들이 배우려 하는 사진이란 당신 스스로 ‘사진 다루는 지식’으로 흐르지 않느냐 싶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 구경하는 삶이라 할 때에는 오로지 구경하는 사진만 얻으며 구경하는 사진이 아름다운 듯 여길 뿐 아니라 구경하는 사진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우리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라 할 때에는, 그러니까 땀흘리고 마음쏟으며 꾸리는 참삶일 때에는 땀흘리는 사진이고 내 마음 깊이 바쳐진 사진이며 참다운 사진으로 나날이 거듭납니다. 어제는 어제대로 아름다우나, 오늘은 오늘대로 어제까지 보낸 삶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디는 새로우며 빛나는 삶을 사랑하고 싶다면, 티없는 사랑꾼 사진을 즐기고 싶다면, 우리는 사진 지식을 내려놓고 사진 사랑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2) 사람 삶터를 담는 사진이란


 “사진가가 아름다운 풍광에 눈물을 흘릴 수 있는 것은 분명 축복이다(34쪽).” 하고 말하는 신미식 님은 당신 사진을 그러모은 작품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얼마 앞서 《사진은 감동이다》(2010)를 엮었고, 《떠나고 싶을 때 떠날 수 있을 때》(2009)라든지 《천국의 땅, 에티오피아》(2009)라든지 《행복 정거장》(2008)이라든지 《마치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2008)이라든지 《미침, 여행과 사진에 미치다》(2007)라든지 《카메라를 던져라!》(2006)라든지 《마다가스카르 이야기》(2006)라든지, 지난 2002년부터 숱한 사진책을 꾸준히 내놓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2007)는 사진찍기 한길을 걸어가는 당신 삶과 넋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책입니다.

 책을 여러 번 되읽으며 곰곰이 헤아립니다. 틀림없이 ‘사진쟁이가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으면 기쁜’ 일인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진쟁이 스스로 내가 남긴 사진에 아름다운 모습이 담겼을 때 눈물을 흘릴 뿐 아니라, 이 아름다이 찍은 사진 한 장을 이튿날이 되어 보잘것없다고 느낄 줄 안다면 참으로 기쁜’ 일입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든 ‘어제 쓴 글’과 견주어 ‘오늘 쓴 글’이 더 아름답거나 훌륭하기 마련이요, ‘어제 그린 그림’과 맞대어 ‘오늘 그린 그림’이 한결 빛나거나 놀랍기 마련입니다. 사진쟁이라 해서 다르지 않습니다. 사진책을 내놓으려고 하는 이들은 으레 한 가지 사진감을 놓고 아무리 짧아도 열 해는 잇달아 꾸준히 찍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 까닭은 오직 이 한 가지 때문입니다. 어제 찍은 사진이 제아무리 훌륭했어도 오늘 찍은 사진을 들여다보면 보잘것없거든요.

 사진쟁이가 되었든 그림쟁이나 글쟁이가 되었든 모두 한 가지 매무새입니다. 첫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둘째, 내 사진에 아름다움이 담겼으면 눈물을 흘릴 줄 알아야 합니다. 셋째, 오늘 찍은 사진은 오늘로 잊고 이듬날에는 이듬날 새로운 사진을 찍을 수 있어야 합니다.


.. 이 일이 나에게 물질적으로 풍요를 채워 주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나에게 사진은 직업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사진은 내가 살아가는 호흡법이기 때문이다 … 이곳에 실린 사진의 인물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에겐 잊혀지지 않을 사람들이다. 이들은 나와 동떨어진 피사체가 아니라 나의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친구로 다가가 찍은 사진들이 결국 내 마음을 만진다 …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은 작품성의 의미를 떠나 신미식이 만난 귀한 친구들이라는 사실이 나에겐 너무나 소중하다. 사진을 찍기 전에 사람을 먼저 사랑하자고 스스로 다짐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모아져 결국은 지금의 내가 되었다. 카메라를 장만한 지 이제 16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내가 선택한 이 길에서 스스로 감사하며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원한다. 만들어진 틀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아닌 스스로 찾아낸 삶의 현장에서 사진을 찍는 사진쟁이가 된 것은 나에겐 행운이다 ..  (책을 내면서)


 사진 한 장 아름다이 찍은 사람은 누구보다 사진쟁이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칩니다. 아름다운 모습을 바라보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아름다움 그대로 담아낸 사진쟁이는 이웃사람이 아름다움을 느끼며 가슴이 벅차오르도록 이끌기 앞서, 사진기 단추를 누르는 손이 덜덜 떨리면서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사진쟁이라는 사람은 당신 가슴이 벅차오르는 느낌을 죽이거나 밀어내어 손가락이 덜덜 떨리지 않도록 다그치면서 차분하게 아름다움을 담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진쟁이 스스로 손가락이 덜덜 떨리면서 찍은 사진이 아니고서는 이웃사람한테 벅차오르는 가슴이 무엇인지를 나누지 못합니다. 벅차오르는 가슴일 때에 벅차오르는 그대로를 담아야지, 벅차오르는 가슴을 다독이며 담은 사진에는 ‘벌써 차분해지고 만 재미없거나 따분한’ 사진이 박히고 맙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으로서는 ‘이 사진을 찍을 때에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데?’ 하고 말할는지 모르나, 사진을 보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쟁이가 덧붙이는 말’ 때문에 ‘그렇군요!’ 하고 생각하지, 사진을 보는 사람 스스로 가슴이 울렁거리지 못합니다.

 신미식 님은 2007년에 열여섯 해째 사진찍기를 했다 했으니, 2010년이면 열아홉 해째요, 2011년에는 스무 해째가 될 테지요. 그렇다면 궁금합니다. 이제는 신미식 님이 “(당신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감동이 있는 사진을 계속 찍을” 생각인지, ‘누구보다 당신 스스로 가슴이 벅차오르는 삶을 꾸리며 사진을 즐길’ 생각인지 궁금합니다. 신미식 님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영향을 주는 그런 존재로 남길” 바라기 앞서, 신미식 님 스스로 찍은 사진으로 남들보다 당신 스스로한테 영향을 끼치며 당신 삶을 스스로 티없이 맑고 밝으며 곱게 다스릴 수 있기를 바라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소금호텔을 나와 다시 가던 길을 재촉한다. 길 하나 없는 하얀 사막을 달리는 운전사는 이정표도 없는 길을 잘도 찾아간다. 아마 이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들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길이 있는 듯하다 … 난 정신없이 셔터를 눌렀다. 플라밍고의 동작 하나하나를 담기 위해 숨죽이며 가까이 다가갔다. 그렇게 분홍빛의 플라밍고는 처음으로 내 카메라의 포로가 되었다. 한참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운전사가 오더니 나를 보고 웃는다. 왜 그러냐고 어깨를 들썩이니, 이곳은 플라밍고가 많은 곳이 아니고 다음에 가는 호수가 진짜 제대로 된 플라밍고 서식지라는 것이다. 난 이곳만으로도 충분히 감동적이었는데, 이보다 더 큰 서식지가 있다니 그저 놀라울 수밖에 ..  (30, 33쪽)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신미식 님은 ‘사진쟁이로서 당신 나름대로 아름다이 걸었던 길’은 그다지 밝히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로 걷는 아름다운 길’이 아니라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아름다움을 본 길’만 자꾸 되풀이합니다. 당신이 두 눈과 두 다리와 온몸으로 부대낀 여행지에서 마주한 아름다움을 그저 ‘풍광’으로 받아들일 뿐, 당신 ‘삶’으로는 삭이지 못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왜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내딛었을지도 모르는 낯선 자연과 그들의 소중한 삶 속에서 난 미치도록 행복한 마음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82쪽)” 같은 말을 해야 하고 들어야 할까요. 우리는 이런 말마디에 뭉클해 해야 할는지요. 우리는 우리 둘레 여느 삶터 여느 이웃하고 복닥이는 삶에서 ‘미치도록 즐거운 삶자락’을 느끼고 잡아채며 담아내는 사진쟁이 길을 걸어야 참다이 아름답지 않으랴 싶습니다. 내 보금자리에서 내 아름다움을 깨달을 때에 내 이웃 보금자리에서도 내 이웃이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를 깨닫지 않느냐 싶습니다.

 사진쟁이 신미식 님 말은 슬픕니다. 아직 한국사람이 안 내디뎠다는 그곳 모습을 처음으로 찍어야만 미치도록 즐거울는지요. 수많은 사람이 다녀간 곳에서 ‘수없이 스친 사람들 어느 누구도 깨닫지 못하거나 마주하지 못하거나 느끼지 못한’ 모습을 신미식 님 당신만은 날카롭고 포근하며 따스하게 잡아채거나 느껴 사진 한 장으로 옮길 노릇이 아닌지요.

 아무도 못 본 모습을 처음으로 사진으로 담을 때에 즐겁다면, 그예 1등주의와 다름없는 최초주의로 머무는 삶이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사진찍기란 1등주의가 아니고 최초주의가 아닌데, 사진찍기란 글쓰기와 그림그리기와 다름없는 아름다움 찾기일 텐데, 사진찍기란 사진기를 든 사람부터 아름답게 거듭나면서 둘레 이웃과 동무한테 아름다움을 나누는 일일 텐데, 왜 ‘(구경꾼한테) 더 아름답게 보인다’고 일컫는 곳에만 찾아가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 벌어진 틈이 있는 곳에서는 아름다운 연기가 올라온다. 함께 온 여행자들의 입에서는 탄성소리가 터져나온다. 여행의 즐거움은 이런 것이다. 함께 기쁨을 나눌 사람이 있다는 것 … 이곳에 서면 사람은 모두가 작아진다. 그리고 한없이 작아진 가슴속에서 터져나오는 행복을 느낄 것이다. 내가 이곳에서 그랬듯이, 이곳을 여행하는 모든 여행자가 그랬듯이. 감격에 겨워 흘린 눈물은 새로운 여행자들을 이곳으로 인도할 것이다 … 직접 오를 수는 없지만 눈으로 볼 수 있는 여행자의 특권 앞에 난 심장이 뛰었다 ..  (50, 62, 77쪽)


 여행하는 사람은 당신한테 낯선 곳을 찾아가는 사람입니다. 여행하는 사람 당신으로서는 낯선 곳이지만, 여행하는 사람이 찾아간 곳에서 태어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사람한테는 하나도 낯설지 않은 곳입니다.

 ‘여행지’라는 곳이 ‘고향’인 사람하고 여행지가 말 그대로 ‘여행지’요 ‘낯선 곳’이요 ‘처음 내딛는 곳’인 사람하고는 느낌이 다릅니다. 여행하는 사람은 여행지 모습을 당신으로서는 ‘처음 사진으로 담는다’ 할지라도 여행지를 여행지 아닌 고향으로 여기며 살아온 사람은 ‘늘 으레 보던 모습’이요 ‘늘 으레 사진으로 담은 모습’입니다.

 플라밍고 호수를 사진으로 찍는 신미식 님을 보며 웃던 운전기사는 ‘플라밍고가 조금 모여 있는 곳은 이 나름대로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한편 ‘플라밍고가 구름처럼 모여 있으며 대단히 아름답다’고 하는 곳을 함께 알고 있습니다. 어느 쪽이 더 아름답다는 소리가 아니라, 두 곳이 저마다 달리 아름다운 줄을 알고 있습니다. 고향땅 운전기사는 어느 곳에 가든 그곳에 알맞춤하게 아름다움을 맛보며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그러나 여행하는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땅 사람’처럼 머물고 살고 일하고 놀며 지낼 수 없으니 겉훑기처럼 몇 가지만 살짝 보고 그치겠지요.

 여행이란 ‘눈을 넓히는 일’이 아닌 ‘좁은 눈을 자랑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여행을 떠나며 내 삶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본다지만, 내가 보았다는 사뭇 다른 모습이란 ‘속내를 알고 보면 내가 찾아간 낯선 땅 참모습이 아닌 몇 가지 겉스친 모습’이기 일쑤입니다. 내가 찾아간 낯선 땅을 속속들이 느긋하고 너그러이 돌아볼 수 있으면 여행이란 더없이 ‘눈을 넓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여행을 한다는 분들은 얼마나 ‘눈을 넓히고자 넉넉하고 느긋하고 따스하게 여행하는 발걸음을 떼고’ 있으려나요. 우리들 여행자는 나라밖에서는 나라밖에서대로 좁은 눈으로 몇 가지만 겉스쳐 보고 있는 한편, 나라안에서는 나라안에서대로 내 삶터와 동네와 이웃을 넉넉하고 속깊이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그저 밖으로만 눈을 돌리고 있지 않는지요. 우리들한테 고향을 우리 고향으로 여기지 못하면서, 다른 ‘여행지가 고향인 사람들 터전’ 또한 얼마나 깊고 아름다운 곳인지를 살피지 못하는 쳇바퀴 돌기가 아닐는지요.


.. 사진으로 남기는 것과 가슴으로 남기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내가 남긴 수많은 사진들이 전부 가슴에 담기는 것은 아닐 것이다 … 바쁘게 살아갈 필요가 없는 이곳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은 두고두고 나에게 많은 교훈을 던져 줬다 … 아마존의 숲을 걸었다. 그토록 오고 싶었던 이 숲속 길을 걸으면서 내가 정말 아마존의 밀림에 와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수없이 던져야 했다. 이곳에 오기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 온 내 여행의 여정들을 생각해 봤다. 여행가라는 직업을 선택한 후로 가장 가슴에 남는 여행이라고 생각되어진 이곳에서 난 너무나 행복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꿈꾸던 그곳에서 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존재하는 것만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  (114, 141쪽)


 신미식 님은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라는 사진책에서 끊임없이 스스로한테 말합니다. “여행이란 꼭 대단한 것을 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그러나 이런 말 뒤에는 어김없이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 같은 말마디가 이어집니다. 입으로는 대단한 모습을 보아야만 하는 여행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사진으로는 대단한 모습만을 사진으로 담아야 하는 듯 책을 엮었습니다.


.. 인도의 골목에는 내가 이해하기 힘들 만큼 많은 이야기가 담겨져 있다. 사진을 찍을 것인가, 그냥 지나칠 것인가는 전적으로 사진가의 선택이다 … 여행자들은 사파의 순수한 사람들을 보고 싶어 찾아오지만 정작 이들은 이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면 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야 만날 수 있겠지 … 모른다바 바닷가의 눈부시도록 신비한 오렌지색 하늘과 그 아래 휴식을 취하러 나온 사람들의 찬란한 오후는 하늘의 신이 이들에게 선물한 최고의 자연이다. 난 이들이 매일 접하는 이 아름답고 평화로운 하늘을 잠시 훔쳐본 이방인일 뿐이다 … 니켈의 주요 생산지이자 뉴칼레도니아의 수도인 누메아는 흔히 작은 프랑스라고 불릴 정도로 현대적인 프랑스의 모습을 닮았다.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프랑스의 니스를 옮겨 놓은 듯한 건물들과 부둣가에 정박돼 있는 화려한 요트들을 구경하는 것도 이곳에서의 즐거움 중 하나다 ..  (214, 251, 323, 355쪽)


 인도 골목길이든 한국 골목길이든 숱한 이야기가 서려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골목동네 사람들이 잘 읽거나 깨달을 수 있으나, 토박이 아닌 구경꾼 또한 어느 만큼 읽거나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오래도록 머무는 사람이라고 더 잘 읽거나 깨닫지 않으며, 구경꾼이라고 하나도 못 알아채거나 못 읽지 않습니다. 저마다 살아낸 만큼 읽습니다. 저마다 살아가려는 몸짓만큼 읽습니다.

 사진책 《I am a photographer 나는 사진쟁이다》를 덮을 무렵, “태평양에서 프랑스의 문화를 느껴 보는 즐거움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하는 대목을 읽고는 무릎을 칩니다. 그렇군요. 신미식 님은 태평양에서 태평양 문화를 느끼는 즐거움 못지않게 ‘프랑스 문화’를 좋아하고 즐기고 있었군요. 태평양 한복판에 뜬금없이 프랑스 문화가 있는 까닭을, 프랑스사람이 왜 뜬금없이 태평양 한복판까지 저희 문화를 심어 놓았는지를 읽지는 못하는군요.

 스스로 더 읽으려 하지 않거나 스스로 더 알려고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스스로 더 아름다이 살려고 하지 않는다면 스스로 더 바라볼 수 없으며 스스로 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바라보는 눈길에 따라, 한국땅 곳곳에 숱하게 남아 있는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자가 심어 놓은 집과 건물과 문물’ 또한 즐겁게 맛볼 수 있는 노릇입니다. 서울 한복판에 못박혀 있는 일제강점기 문화를 얼마든지 즐겁게 맛볼 수 있습니다. 신미식 님이 태평양 한복판 ‘프랑스 식민지 자국’을 즐겁게 맛본다고 하는데 토를 달거나 말꼬리를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진을 하는 분들 마음이 이토록 가난하다면 어떤 사진이 태어날까요. (4343.6.1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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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에 스미다 - 그대에게 띄우는 50장의 그림엽서
민봄내 지음 / 아트북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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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삶으로 스며야 할 그림읽기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39] 민봄내, 《그림에 스미다》


 잘 놀던 아이가 잠이 듭니다. 아침부터 낮까지 쉴새없이 뛰고 놀고 노래하고 말하고 하던 아이가 까무룩 잠이 듭니다. 더운 날씨에 물놀이를 시키니 한 시간이 넘도록 물에서 나오지 않고 놀려고 하더니, 물에서 나와 물기를 닦고 옷을 입히니 이 더운 날씨에 양말 신겨 달라며 칭얼거리다가 한쪽 발에 꿰어 주니 어느새 큰 베개에 제 몸을 넙죽 엎드린 채 그대로 잠이 듭니다.

 잠이 든 아이를 삼십 분 즈음 그대로 둡니다. 삼십 분이 지나고서야 자리에 눕힙니다. 아이는 살짜이나마 깨어나지도 않습니다. 이런 채 두 시간 반이 넘도록 깊이 잠들어 있습니다. 아이가 잠든 이맘때는 애 아빠가 비로소 책을 읽든 글을 쓰든 동네마실을 다니든 할 만한 말미인데, 그렇다고 애 아빠 스스로 뭔가 다른 일을 하지 못합니다. 이른 새벽에 아이가 깨어나기 앞서 일어나 주섬주섬 이 살림 저 살림 하는 가운데 하루 내내 아이랑 씨름하며 지내다 보니, 아이가 늦은 낮잠을 자는 이때에는 애 아빠도 고단하고 지치기 때문입니다. 드러누운 아이 옆에 함께 드러누워 늦은 낮잠을 함께 자고 싶습니다.


.. 나의 아빠 또한 딸에게 처음이고 싶은 게 많았다. 비행기가 착륙할 때 기장에게 박수를 보내는 에티켓, 정찬을 먹는 순서, 두 발 자전거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셨고, 막걸리 넣은 밀반죽을 아랫목에 묻었다가 찐빵이 돼 가는 과정도 보여주셨다. 그네를 탈 때 뒤로 나뒹굴지 않는 요령과 어린 동생을 돌보는 법, 어른들에게 꼭 인사해야 하는 이유와 동물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울지 않는 뚝심까지. 하지만 공식적인 어른이 될 때까지 난 그것들을 스스로 익혀 왔다고 여겼다 ..  (55쪽)


 아이가 잘 자고 있는지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잠든 아이가 쉬를 했습니다. 날이 더워 낮잠 잘 때에는 기저귀를 채우지 않았더니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바지를 벗기고 기저귀천으로 오줌자리를 훔칩니다. 아이한테 새 바지를 입힙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아이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기계빨래를 하는 분들은 빨랫감을 모아서 할 텐데, 손빨래를 하는 사람도 하루치 빨래를 한꺼번에 모아서 하는 날도 있으나, 으레 그때그때 빨래를 해서 널어 놓습니다. 요사이처럼 더운 날은 일부러 손빨래를 자주 하며 몸을 식힙니다.

 다 한 빨래를 빨랫대에 널어 놓습니다. 아이 오줌으로 젖어 아침에 널어 놓은 담요가 언제쯤 마를까 모르겠습니다. 다 안 마르면 아빠가 안 젖은 자리 쪽으로 해서 바닥에 깔고 자야지요.

 요즈음은 사람들을 마주할 때에 아이 키우는 이야기를 자주 나누곤 하는데,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기에 아이 이야기를 나눈다 할 테지만, 하루 내내 아이랑 붙어서 복닥이기 때문에 저절로 아이 이야기가 샘솟습니다. 축구 경기에 하루 내내 마음을 파는 분들이라면 으레 축구 얘기가 터져나올 테고, 정치 소식에 늘 눈길 두는 분들이라면 저절로 정치 얘기가 흘러나올 테지요.

 그러고 보면, 저는 지난날에는 사람들을 만날 때에 책 얘기만 했지 싶습니다. 이러면서 헌책방 얘기를 신나게 했구나 싶습니다. 혼자 살림을 꾸리며 살아가는 동안 책 만드는 일을 하고 책을 쉼없이 사 읽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바지런히 글을 썼으니까요. 이래도 책 저래도 책 그래도 책인 삶이었습니다.

 가만히 살피니 그렇습니다. 누구나 살아가는 대로 생각하고, 살아가는 대로 말합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좋아할 책을 찾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반가운 짝을 사귑니다.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몸에 맞는 밥을 먹고, 살아가는 대로 저마다 흐뭇해 하는 일거리를 붙잡습니다.


.. 내가 아는 노래의 미덕이란 그런 것이었다. 장르나 시대상을 몰라도 물의 하류처럼 고여 드는 기분. 귀에 콕 박혀서 버스 노선같이 외워지는 가사들. 꼭 그만큼의 흡입력이면 됐다 ..  (82쪽)


 사진을 읽을 때에, 사진을 꼭 잘 알아야 사진을 잘 읽지 않습니다. 스스로 좋아하는 느낌에 따라 사진을 읽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 꾸리는 삶이 나 스스로 좋아하는 결을 찾지 못한다면, 나 스스로 내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추천하는’ 사진이라든지 ‘널리 이름났다는’ 사진에 매달립니다.

 그림을 읽을 때에, 그림을 잘 안다든지 그림쟁이를 잘 알아야 그림을 잘 읽지 않습니다. 그림읽기란, 그러니까 ‘그림 감상을 하며 감동하기’란 그림 지식을 불리거나 뽐내는 일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내 삶에 따라 내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을 찾아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본다든지 오래도록 마주 바라보면서 마음속 깊은 데에서 샘솟는 뭉클함을 사랑하는 일이 그림읽기입니다.

 민봄내라는 분이 쓴 《그림에 스미다》라는 이야기책 하나는 바로 이렇게 그림을 읽은 삶을 담은 책입니다. 민봄내 님 책 《그림에 스미다》라는 책에서는 민봄내 님 스스로 좋아하고 아끼는 그림을 놓고 ‘기교가 어떻고 유파가 어떠하며 주제가 무엇이다’ 하고 밝히지 않습니다. 굳이 이런 지식조각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림읽기를 하며 우리가 따질 대목은 오로지 하나이거든요. 이 그림을 들여다보는 나 스스로 눈물을 흘리거나 웃음을 띄우면서 즐거웠느냐입니다.


.. 내가 유난히 좋아했던 건 커다란 이불 홑청 아래 만들어지는 약간의 응달이었다. 그 자그마한 빨래 그림자가 태양의 뒤뜰이라고 믿은 적도 있었다. 한번 앉으면 오래 노는 걸 알고 있던 엄마는, 가끔 빨래줄 장대를 옮겨 달라고 명하셨다 ..  (164쪽)


 책읽기란 그림읽기하고 같습니다. 책 하나 장만하여 읽는 자리에 서기까지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방마실을 합니다. 또는 셈틀을 켜고 누리집을 뒤적입니다. 우리들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양새대로 책을 펼치고 줄거리를 살피며 이 책에 담긴 이야기를 ‘실천으로 받아들일는’지 ‘머리에 지식으로 채울는’지를 가름합니다.

 책읽기를 마친 뒤 ‘책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그림읽기를 마친 다음 ‘그림 읽은 느낌 쓰기’를 할 때이든 똑같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책이나 그림이란, 우리 가슴으로 스며든 책이나 그림 이야기이지, 이 책이나 그림에 얽힌 지식조각이 아닙니다. 글쓴이나 그린이가 어찌저찌하고는 하나도 돌아볼 대목이 아닙니다. 나 스스로 책 하나가 내 품에 고이 안겼느냐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 그림 하나가 내 가슴에 푸근히 기대었느냐를 헤아려야 합니다.


.. 언젠가 열대 나라를 여행하면서 단 한 줄도 읽지 못한 (그러나 몹시 아끼는) 책을, 베개로 삼은 적이 있다. 지치고 목이 말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응달진 회랑을 찾아가 책 모서리에 머리를 걸치고 누워 버렸다. 돌아올 때까지 완독은 못했지만, 좋았다. 아끼는 제목과 문구들을 배낭에 지고 걷는다는 느낌만으로도 신이 났으니까. 읽고 난 후에도 마음 밖에서 겉도는 문장들. 책의 백양백색을 따지다 보면, 늘 한 가지 생각이 든다. 책은 세상살이에 있어, 참 괜찮은 친구라는 것 ..  (232쪽)


 민봄내 님 《그림으로 스미다》는 오늘날에 이르러 비로소 겉멋 들린 그림읽기에서 살짝살짝 홀가분해지는 매무새를 언뜻선뜻 보여줍니다. 지난날에는 갖가지 어렵고 딱딱한 말로 겉치레를 해대는 ‘예술비평’만 있었는데, 민봄내 님 책은 이런 겉치레 딱딱함하고는 동떨어져 있습니다. 좋은 그림읽기란 좋은 삶에서 비롯하는 만큼, 잘나거나 못나거나 한 삶이 아닌 나 스스로 나한테 좋으며 내 이웃과 동무 모두한테 좋은 삶인가를 곱씹으면서 그림을 읽고 그림을 말하며 그림을 나누면 됩니다.

 그러나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은 아직 마무리가 슬기롭게 되지는 못합니다. 그림읽기를 겉멋으로 하지 않고 당신 삶자락으로 하고 있는 민봄내 님인데, 민봄내 님이 어떻게 무엇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가를 드러낸 《그림으로 스미다》라는 책에서 민봄내 님 넋은 아쉽게도 착하고 아름다우며 빛나는 맑은 곳으로 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자 나이 서른이면 세 가지 틀을 완성시키라고 했다. 돈과 일과 사랑. 혹시 혼자여서 이 모든 것을 온전히 갖추지 못했다고 우물쭈물하고 있다면, 그럼에도 서른은 ‘나홀로 세상에’라고 말해 주고 싶다(19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를 떨굽니다. 왜 ‘돈과 일과 사랑’이어야 할는지 안타까워 고개를 떨굽니다. 그나마 ‘사랑’이 있으나 민봄내 님이 밝히는 사랑은 남녀 사이에 맺는 살섞기 틀을 넘어서지 못하는 사랑입니다. 숱하고 너른 사랑 가운데 아주 작은 귀퉁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일’이라고 하여도 도시에서 전문직업인으로 하는 일이지, 나 스스로 아름다워질 뿐 아니라 내 이웃과 뭇목숨을 아끼고 돌볼 줄 아는 일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돈’은 두말할 까닭이 없겠지요. 더없이 빛나는 나이인 서른에 한낱 돈을 생각하고 있다면, 이 얼마나 안쓰럽고 슬픈 넋인지요. 스물이든 서른이든, 마흔이든 쉰이든, 우리는 ‘돈-일-사랑’이라는 겉발린 허울에서 홀가분할 수 없을까요.

 어설픈 틀에 매이지 않는 그림읽기요, 어줍잖은 틀에 갇히지 않는 그림읽기이며, 어리석은 틀을 내세우지 않는 그림읽기인 《그림에 스미다》이지만, 어설픈 돈과 어줍잖은 일과 어리석은 사랑으로 스스로를 옥죄고 맙니다. 아무쪼록 ‘참-착함-고움(진선미)’을 찾으며 깨닫고 곰삭이는 싱그럽고 푸르디푸른 봄볕으로 빛나는 냇물 한 줄기로 우리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사랑어린 빗물 같은 《그림에 스미다》로 다시 태어나 주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 《그림에 스미다》(아트북스,2010)
 ├ 글 : 민봄내
 └ 책값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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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생뚱맞다고 생각하거나 느끼는 분이라는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놓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를 모르는 분일 테지요. 〈우리교육을 걱정하는 사람들 http://cafe.naver.com/saveuriedu〉이라는 자리가 있으니, 이곳에 올려진 글이라도 좀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교육〉이라고 하는 배움책


 대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은 꽤 많습니다. 돈이 없어 그만두기도 하고, 대학교는 배움터가 아님을 깨달아 그만두기도 합니다. 돈벌이를 일찍부터 하고자 그만두기도 하며, 대학교보다 훌륭한 배움터를 다른 곳에서 찾았기에 그만두기도 합니다.

 고려대학교를 다니던 김예슬 님이 이 학교를 그만두면서 쪽글을 하나 적바림했고, 이 쪽글에 살을 입혀 자그마한 책을 하나 내놓았습니다. 김예슬 님 이야기와 생각이 담긴 책은 참 자그맣고 가벼우며 값이 쌌습니다.

 김예슬 님은 대학교를 그만두기는 했으나, 아직 당신이 걸어갈 길을 스스로 옳고 바르고 착하며 참된 가운데 곱게 깨닫거나 붙잡고 있지는 못합니다. 느낌을 버리지 않고 생각을 붙잡아 대학교를 떨칠 수는 있었으나, 아직은 대학교 떨치기만 했을 뿐, 아름다우며 참되고 바른 삶을 붙잡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김예슬 님 생각을 담은 책이 꽤 사랑을 받으며 팔립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 여러모로 알려졌기에 사랑받을 만하고 팔릴 만하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을 ‘생각(주의주장)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삶(실천)으로 살아가는 사람’ 눈길로 들여다본다면 이런저런 부스러기 생각이 모여 있을 뿐, 부스러기로 있는 생각을 어떻게 왜 누구하고 언제 어디에서 그러모으고자 하는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는 얼마든지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야 하는지를 이 새로운 잡지를 만들고자 하는 일꾼들은 어느 만큼 고개숙이면서 삶을 다부지게 붙잡으며 살피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지난날 〈우리교육〉에 몸담고 있던 그대로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쫓겨난 사람들이 모인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그동안 〈옛 우리교육〉에서는 제대로 담아내거나 나타내지 못했던 삶자락을 차곡차곡 담아내어 배움터 안팎에서 땀흘리고 눈물흘리며 피흘리는 이웃과 동무와 살붙이한테 웃음과 눈물이 되고자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하시는지요.

 〈옛 우리교육〉은 아마 ‘(주) 우리교육’에서 어떠한 모습으로든 내놓으리라 봅니다. 〈새 우리교육〉을 ‘(주) 우리교육에서 쫓겨난 일꾼’이 낼 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옷만 새로 갈아입을 뿐, 줄거리와 고갱이와 삶은 예전 그대로는 아닐까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삶이 아니라면 어떡하느냐 싶어 걱정스럽습니다.

 새로운 옷을 입었다고 새로운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잡지를 낸다고 새로운 이야기를 담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글쟁이들이 새로운 글을 써서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새로운 이름이 붙는다고 새로운 잡지가 될까요?

 김예슬 님이 낸 책을 읽으며 ‘이 젊은 넋은 아주 마땅하게도 옳고 바르며 고운 삶을 아직 모를 뿐 아니라, 옳고 바르며 고운 삶으로 나아갈 마음이 없음’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옳고 바르며 고운 삶자락 한 귀퉁이라도 찾아보고자 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새 우리교육〉은 어느 무엇보다도 (1) 참됨(올바름) (2) 착함(사랑과 믿음) (3) 고움(아름다움), 이렇게 세 가지를 제대로 깨닫고 찾으면서 담아내는 잡지가 되기를 꿈꿉니다. 이 세 가지를 담아낼 수 있으면 어떠한 잡지이든 괜찮습니다.

 반드시 교육잡지라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꼭 교사와 학부모 중심으로 읽힐 잡지여야 하지 않습니다. 교육이란 교사만 하는 일이 아니요, 학부모만 마음쓸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교사 아닌 누구나 교사여야 하고, 학부모 아닌 누구나 학부모로서 우리 마을 아이들을 살피고 사랑하며 돌보아야 합니다. 교사 아닌 동네 아저씨 아주머니 모두 지식이 아닌 삶으로 아이들 앞에서 좋은 스승으로 보여지도록 참다이 살아가야 합니다.

 〈새 우리교육〉을 만들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알맹이가 참되고 착하며 고와야 하는데, 올바르고 사랑스러우며 아름다워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우리 배움터뿐 아니라 책마을까지 슬기로운 넋을 일깨우는 책이어야 합니다.

 이리하여, 〈새 우리교육〉이라 한다면 《김예슬 선언》처럼 자그맣고 값싸며 가벼운 종이를 쓴 잡지가 될 수 있기를 꿈꿉니다. 사진이 들어가도 되고 그림이 들어가도 되지만, 사진과 그림이 한 장조차 없어도 됩니다. 100쪽짜리 잡지여도 좋고 200쪽짜리 잡지여도 좋은데, 주머니에 들어갈 만큼 작은 책이 되기를 꿈꿉니다. 아니면 한손으로 가벼이 들고 다니며 어디에서나 읽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선물하기에 좋은 판짜임이면 좋겠다고 꿈꿉니다.

 참배움(‘참교육’이 아닌)이라 한다면, 학교라는 울타리 안쪽에서만 제대로 가르치는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는 사람이 되도록 이끄는 모든 몸짓과 넋이 참배움이라고 느낍니다. 참되게 살아가자면 무엇을 알고 느끼며 생각하며 나아가야 할까요? 바로, 무엇보다도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참다이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교사뿐 아니라 아이들 누구나 내 힘으로 먹고 입고 잠자는 세 가지를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돈만 벌면 되겠습니까. 도시에서 살아가면서도 얼마든지 텃밭을 일굴 수 있으며, 교실 안쪽이든 집 안쪽이든 꽃그릇 하나 마련하여 콩을 심어 거둘 수 있습니다. 아이들과 교사가 서로서로 바느질을 하고 손빨래를 하며 청소와 밥하기를 제대로 슬기로이 배우고 가르치는 틀이 〈새 우리교육〉에 담겨야 한다고 느낍니다.

 이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바탕(본질)’을 캐내고 밝혀야 비로소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새 우리교육〉이라는 잡지가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얼마 앞서까지 다달이 나왔던 〈옛 우리교육〉을 보면서 ‘이렇게 지식조각만 가득한 잡지라 한다면 “우리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을 만큼 부끄러운 잡지’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했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이 아이들한테 ‘다양한 직업을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사람이 마땅히 찾아서 즐길 일거리를 저마다 제 몸과 마음에 맞도록 찾도록 이끄는’ 모습이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옛 우리교육〉이라는 잡지를 받아서 읽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분들 가운데 제도권 교육 얼거리를 스스로 떨쳐내고 당신 삶자리에서 조용하게 당신 삶부터 옳고 바르고 착하게 돌보신 분이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부디 지식은 다루지 않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제발 지식이 아닌 땀방울과 굳은살을 다루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다달이 내야 할 까닭이 없는 〈새 우리교육〉입니다. 한 해에 두어 번 내는 ‘무크’가 되더라도, 한 권 한 권 알뜰하고 사랑스러워, 이 잡지를 만드는 일꾼들부터 도시에서 살든 시골에서 살든 사람과 땅과 목숨 모두를 사랑하고 믿고 껴안는 참사람으로 거듭나도록 돕는 〈새 우리교육〉이 되기를 빕니다.

 무슨무슨 꼭지가 있어야 하느냐를 생각하기 앞서, 무슨무슨 마음가짐이어야 하느냐를 생각할 〈새 우리교육〉입니다. 잡지는 한 사람이 만들어도 되고, 열 사람이 만들어도 됩니다. 그냥 ‘갱지에 문고판으로 만들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참배움이란 껍데기가 아닌 알맹이요, 껍데기에 눈이 팔리는 사람이 아닌 알맹이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이끄는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껍데기라 하여 허술하게 할 까닭이 없으나, 정작 우리가 살필 모습이란 사람들 겉모습이 아니라 사람들 속마음입니다. 우리 스스로 속마음을 살피고 아끼려는 사람이라 한다면, 잡지를 만들 때에도 속알맹이가 얼마나 아름다우며 참되고 착하도록 짜고 엮어야 하는 데에 온마음을 기울여야 할 줄 압니다.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저는 이 잡지를 즐겁게 받아볼 생각인 한편, 저 스스로 내 삶을 곱게 일구려고 애쓰면서 부대끼는 이야기를 글이든 사진으로든 갈무리해서 자원봉사로 보내 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속살로 아름다운 〈새 우리교육〉으로 나아갈 뜻이 아니라 한다면, 저는 〈헌 우리교육〉이든 〈새 우리교육〉이든 그리 생각해 보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빠로 살아가는 데에도 하루 스물네 시간이란 더없이 빠듯하고 고됩니다. (4343.6.1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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