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슬 선언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김예슬 지음 / 느린걸음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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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52 ― 대학은 왜 대학다움을 잃었는가
 : 김예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책이름 :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 글 : 김예슬
- 펴낸곳 : 느린걸음 (2010.4.14.)
- 책값 : 7500원


 (1) 이 나라에 무슨 배움터가 있는가


 대학교 사진학과를 나왔다고 해서 사진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는 학과를 다녔다고 해서 그림작가가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 문예창작과를 마친 사람이 글작가이지 않습니다. 대학생일 때에 빼어난 작품을 내놓았으면 이때부터 작가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고등학생 때에 작가 소리를 듣고, 어느 사람은 예순이나 일흔 나이에 비로소 작가 소리를 듣습니다.

 사진 강좌를 들었다고 사진을 잘 찍을 수 없습니다. 출판 강좌를 들었다고 책을 잘 만들 수 없습니다. 요리 강좌를 들었다고 밥을 잘 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 강의나 교육관 강좌란 지식을 차근차근 일러 주며 지식에 따라 하나하나 깨우치도록 이끄는 이야기나눔일 뿐입니다. 이러한 지식이 있다고 해서 어떠한 일을 잘 해내거나 훌륭히 해낼 수 없습니다.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사진으로 찍어야 하는가를 깨닫고 꾸준하게 한길을 걸을 때에 비로소 작가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어떻게 왜 책으로 담아야 하는가를 느끼며 차근차근 책을 만들어야 비로소 책쟁이입니다. 스스로 누구하고 어떻게 어느 자리에서 밥을 나누려 하는가를 살피며 국자나 칼을 들어야 비로소 밥하기(요리)를 한다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늘 우리 터전에서는 전문 직업인이 되자면 어쩔 수 없이 대학교를 나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저는 제가 그동안 읽어 온 책을 그러모아 동네 한켠에서 조그맣게 도서관 하나를 열었습니다만, 우리 나라 법으로는 제가 연 도서관은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쓸 수 없을 뿐더러, 허가를 내주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에서 도서관을 열고자 한다면 반드시 대학교 도서관학과를 마쳐야 하고 사서자격증까지 따 놓아야 합니다. 스스로 책을 사랑하고 아끼며 깊이 보듬는 삶을 꾸린다고 해서 도서관을 열 수는 없는 우리 나라입니다.

 이는 기자가 될 때에도 다르지 않습니다. 고등학교만 마쳤으나 빛나는 넋과 밝은 눈과 굳센 손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자로 뽑아서 어깨동무하는 언론매체는 한 군데라도 있을는지요. 아무런 학교를 다니지 않았으나 옳고 맑고 푸르게 살아가는 사람을 기자로 받아들여 손잡는 언론매체가 있는지요.

 의사라고 하는 일이든 법관이라 하는 일이든 공무원이라고 하는 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해내는 지식하고 대학교 졸업장이 있어야만 참말로 그 일을 잘 해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지식을 다루는 마음이 없거나 지식을 펼칠 줄 아는 매무새를 살피지 않고 졸업장과 자격증만으로 전문 직업인을 쏟아내는 사회 얼거리란 얼마나 올바를는지 궁금합니다.

 교사를 가린다고 하는 교사 자격증이란 ‘어느 한 사람이 얼마나 교사다운가’ 하고 말해 주는 자격증이 될 만할까요. 교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이들을 옳고 바르고 아름다이 가르칠 수 있는가요. 교사 자격증이란, 교과서 지식을 학년과정에 맞추어 머리속에 알뜰히 집어넣을 수 있는 재주를 갖춘 사람임을 말하는 셈 아닌지요.

 초중고등학교를 열두 해 다닌 제 지난날을 헤아리면, 이동안 만난 교사들 가운데 몽둥이를 들지 않거나 손찌검을 하지 않은 교사란 다섯 손가락에 꼽기 어려울 만큼 거의 없습니다. 아이들인 우리한테 욕이나 거친 말을 쏟아내지 않은 교사 또한 다섯 손가락에 꼽기 힘들 만큼 아주 드뭅니다. 이들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은 모두 교사 자격증을 딴 사람들이요, 교육대학교에서 교육을 배운 이들일 텐데, 아이와 마주한 자리에서 어른다움을 보여주며 스스로 본보기가 되지는 못했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운 길을 걷는 아름다운 스승으로 서고자 마음을 쓰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열두 해에 걸쳐 학교라는 울타리 안쪽에서 아름다운 스승을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언제나 학교 안쪽에 머물 마음이 없었고 이무렵 학교에서 복닥인 이야기는 거의 떠올리지 못합니다. 마음에 아로새겨질 만한 아름다운 이야기를 학교에서는 느끼거나 얻거나 배우지 못했습니다.

 교사들은 왜 교과서 진도에 발목이 잡혀 있어야 할까요. 교과서는 우리한테 얼마나 아름답고 훌륭하며 멋지고 사랑스러운 책일까요. 교사가 학생한테 할 일은 교과서 지식 집어넣기가 끝인가요. 교사란 어떤 사람이요 어떻게 살아갈 사람일까요. 교사들은 으레 우리들 앞에서 “교사도 사람이야!” 하고 외치며 성을 내고 몽둥이를 휘둘렀습니다. 그러면 몽둥이에 얻어맞을 뿐 아니라 머리카락이 잘리고 욕설을 듣고 햇볕이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새벽부터 밤까지 갇혀 지내야 하는 “학생도 사람”일 텐데, 학생도 사람이라고 여긴 교사란 얼마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2010년대로 접어든 오늘날, 학교라는 울타리가 지난날과 견주어 새롭게 바뀌었다거나 크게 달라졌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지난날 제 어릴 적에는 국민학생 때에 틈나는 대로 온갖 놀이를 즐겼습니다. 언니 오빠 형 누나 들한테서 온갖 놀이를 물려받으며 동생한테 온갖 놀이를 고스란히 물려주며 놀았습니다. 이 흐름은 중학교 문턱을 밟자마자 깨졌는데, 어린이일 때에 어린이 놀이가 가로막히면서 푸름이들이 푸름이 놀이를 즐기지 못하도록 하는 굴레를 여섯 해나 보내다 보니,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 동무들이 즐긴다는 놀이란 고작 술ㆍ담배ㆍ당구뿐이었고, 참다운 사랑이 아닌 아랫도리 사랑뿐이었습니다. 올바로 배우도록 이끌지 못한 학교인 까닭에 올바로 배우지도 못했지만, 즐겁게 놀도록 풀어놓지 않은 학교인 터라 즐거이 놀 줄을 잊은 한편, 참다운 사랑을 나누지 않은 학교였기에 참다운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마음씨를 잃었다고 하겠습니다.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가 아름답고 즐거우며 슬기롭고 신나는 열두 해로 자리매기지 못하는 우리 나라입니다. 이리하여 고등학교를 마치고 들어간다는 대학교에서 아름답고 즐거우며 슬기롭고 신나는 새 배움과 새 사랑과 새 기쁨과 새 마음과 새 넋으로 이어지거나 거듭날 수 없구나 싶습니다.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갑작스레 훌륭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앞서 말했듯이 대학교 사진학과에 들어간다고 사진작가가 되거나 예술가가 되겠습니까. 아름다운 밑바탕을 다지지 못한 지난 열두 해인데, 대학생이 된 젊은이들이 무엇을 알고 무엇을 하겠습니까. 무엇을 배우며 무엇을 나누겠습니까. 마음껏 술 마시고 담배 피우며 (아랫도리) 사랑놀이에 빠질 줄은 알아도, 마음껏 배우고 실컷 (참) 사랑을 하며 기쁘게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보람을 어떻게 스스로 찾을 수 있겠습니까.

 대학교가 대학교다우려면 대학교 스스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하지만, 이에 앞서 초중고등학교 열두 해가 올바르게 고쳐져야 합니다. 대학바라기 열두 해가 아닌, 초등은 초등대로 아름답고 알차며 즐거운 나날이요, 중등은 중등대로 훌륭하며 살갑고 기쁜 나날인 가운데, 고등은 고등대로 빛나며 멋지고 재미난 나날이 되도록 학교 얼거리가 싹 바뀌어야 합니다. 교과서란 교육과정을 돕는 교재 가운데 하나일 뿐임을 교사가 먼저 깨달아 학생한테 스스로 ‘책다운 책’을 찾아 읽도록 돕는 한편, 교사 또한 언제나 ‘책다운 책’을 바지런히 찾아 읽으며 슬기를 나누어야 합니다. 학교 울타리 안쪽에서 너무 긴 나날을 보내지 않아야 하고, 학교 울타리 바깥쪽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이웃과 동무를 널리 사귀고 마주하면서 우리 삶터를 깊고 넓게 헤아리는 눈썰미를 교사와 학생이 나란히 북돋워야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인 밥과 옷과 집을 내 손으로 스스로 일구어 얻을 수 있게끔 교사부터 살아내고 학생들 또한 집안에서 살림살이를 알뜰히 익히도록 어버이들이 가르치고 도와야 합니다. 교사와 어버이란 사람들은 이름만 ‘어른’이 아닌 속살 가득 참어른으로 살아내면서 아이들한테 좋은 삶을 몸소 보여주어야 합니다. 튼튼한 버팀나무이자 싱그러운 나무그늘 노릇을 하는 어른이어야 합니다.

 교육이란, 그러니까 우리 말로 하자면 ‘배움’이란 바로 삶입니다. 저마다 다른 삶을 어떻게 꾸리느냐가 바로 배움입니다. 사람마다 다 다른 삶을 어느 결에 따라 일구느냐가 바로 배움입니다. 우리 나라 교육기관은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로 나뉘어 있지만, 정작 배움터다운 모습은 하나도 못 갖추고 있습니다.


 (2) 사람다이 살고픈 외침


 “‘공부만 잘하면’ 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 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13∼14쪽).”고 외친 김예슬 님이 당신 생각을 책 하나로 갈무리했습니다. 김예슬 님에 앞서 대학교를 그만둔 사람이 많았고, 김예슬 님 뒤에 대학교를 그만둘 사람도 많을 텐데, 사람들은 ‘김예슬 선언’이라는 이름을 붙여 김예슬 님을 떠올리거나 이야기합니다.

 김예슬 님 생각이 담긴 책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125쪽짜리 작은 책입니다. 김예슬 님이 대자보 하나를 쓰고 1인시위를 하면서 그만둔 대학 삶을 ‘짤막한’ 대자보로는 모두 밝힐 수 없었기에 ‘조금 긴’ 글을 써서 책으로 묶었다고 합니다. 자격증 장사를 하는 대학교이고, 소비중독으로 내모는 학습중독으로 젖어들도록 하며, 삶은 없이 학문만 가득한 지식인들 모습을 당신한테서 스스로 느끼는 가운데, 모두가 김연아가 될 수 없는데다가 우리들은 88만 원 세대가 아니라고 하는 외침을 한 올 두 올 담았습니다.

 작은 책, 그야말로 작은 책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이 작은 책에 담긴 이야기는 하나도 새롭지 않습니다. 이 조그마한 책에 담긴 줄거리는 어느 하나 새삼스럽지 않습니다. 이 수수한 책에 깃든 생각자락을 모르는 지식인은 하나도 없지 않으랴 싶습니다. 이 조촐한 책에 서린 아픔과 생채기를 모를 여느 어른이나 교사나 어버이 또한 따로 없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다들 알고 있다고 하는 대학 문제는 그치지 않습니다. 다들 느끼고 있다는 대학 문제는 바로잡히지 않습니다. 다들 알고 있다고 하면서 대학 문제를 비롯해 교육 문제를 푸는 데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다들 느끼고 있다지만 정작 몸으로는 바로잡으려 하지 않으니 더더욱 단단해질 뿐 아니라 팍팍해지는 대학 문제입니다.

 우리들은 말글학자로만 알고 있으나, 교육학자로 오랜 나날을 보냈던 최현배 님은 일제강점기에 ‘페스탈로찌 논문’을 썼고, 해방 뒤에는 《나라 건지는 교육》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러니까, 말글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최현배 님은 1950년대에 진작 ‘대학입시가 큰 문제’라고 밝힌 바 있습니다. 1950년대에는 대학입시뿐 아니라 국민학교 입시 또한 몹시 큰 말썽거리였다니까, 오늘날 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느니 뭐를 더 가르치느니 하면서 떠들썩한 모양새하고 매한가지입니다. 지난날에는 국민학교 입시 때문에 어린이들이 어린 나날부터 들볶여야 했고, 오늘날에는 어린이집과 유치원부터 알파벳을 가르친다고 법석이요 참다운 마음닦이를 하도록 이끌지 못하니, 예나 이제나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들볶이기만 합니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를 읽는 내내 최현배 님이 쓴 《나라 건지는 교육》이 떠올랐습니다. 우리 나라는 예순 해가 흐르는 동안 ‘먹고 입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물질문명은 더할 나위 없이 나아졌으나, ‘생각하고 말하고 배우고 나누고 사랑하는’ 마음살이는 그지없이 뒷걸음을 치거나 나동그라지고 있구나 싶습니다. 참다이 나아지지 못하는 이 나라이니, 참다운 넋과 얼이 발돋움하지 못하고, 참다운 넋과 얼이 발돋움하지 못하는 판이기에 곱고 맑은 꿈이 꽃피우기 어렵습니다.

 대학교는 대학교다워야 할 뿐 아니라 대통령은 대통령다워야 합니다. 교사는 교사다워야 하고 살림집은 살림집다워야 합니다. 동네는 동네다워야 하고 어른은 어른다워야 합니다. 어느 하나만 새로워진다고 이 하나가 제대로 새로워진다 할 수 없습니다. 대학교와 초중고등학교와 정치와 사회와 문화가 나란히 새로워지면서 올바른 길로 접어들어야 합니다.

 교사만 훌륭해진다고 학생들이 좋을 수 없습니다. 교사를 비롯해 여느 어른 모두와 어버이들이 다 함께 훌륭해져야 하고, 여느 자리 여느 삶에서 아름다움을 찾아야 합니다. 학교에서는 훌륭히 가르친다 하더라도 집으로 돌아와서 엉망진창이라거나 동네 삶터는 엉터리라 한다면 모든 배움이란 도루묵이요 부질없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동네 삶터는 아름답거나 집안 살림살이는 훌륭하달지라도 학교가 엉터리라면 아이들은 아주 힘들고 벅찹니다. 아이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와 아이를 맡아 가르친다는 교사를 비롯해 동네 어른이자 형이자 언니이자 누나이자 오빠인 사람 모두 참되고 착하고 고운 길을 살피고 찾고 느끼며 누릴 수 있어야 비로소 “나라 건지는 배움”이 이루어집니다. 이럴 때에 바야흐로 “대학교를 다녀도 좋고 대학교를 안 다녀도 좋은”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3) 되새겨 읽는 배움말


 김예슬 님 앞서 대학교를 그만두거나 처음부터 안 다닌 사람은 아주 많습니다. 김예슬 님은 숱한 ‘고졸자’나 ‘중졸자’나 ‘국졸자’나 ‘무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학력을 으뜸으로 치면서 경쟁주의와 1등주의가 넘실거리는 한국땅에서는 졸업장 하나 안 가지면서 받아야 할 불이익과 손해가 제법 큽니다. 가방끈 짧은 사람한테는 전문 직업인 길이란 거의 꽉 막혀 있습니다.

 그러나 전문 직업인이 아닌 살림꾼 자리는 가방끈하고 하나도 얽히지 않습니다. 가방끈이 길어야 사랑을 잘하겠습니까. 가방끈이 짧으면 믿음을 누리지 못하겠습니까. 가방끈이 길어야 아이를 잘 낳을까요. 가방끈이 짧으면 농사를 못 짓겠습니까.

 김예슬 님으로서는 주류 권력층 자리에서 스스로 떨려 나왔는데, 주류 권력층을 생각하면 아쉽겠지만 낮은 자리와 가난한 자리를 헤아리면 한결 너르고 넉넉하며 너그러운 새 이웃과 동무를 만나고 사귈 수 있어 기쁠 수 있습니다. 주류를 살피지 않고 사람을 살피는 자리로 들어선 김예슬 님이라 할 만하고, 권력층을 기웃거리지 않고 못목숨을 사랑하는 자리에 한 발 디딘 김예슬 님이라 할 만합니다.

 다만, 한 발을 디뎠을 뿐이지, 걸음을 걷는다 할 수 없습니다. 이제 막 디딘 한 발이 튼튼한 걸음걸이가 될 수 있게끔 스스로를 다스려야 합니다. 이제부터 새롭게 디디는 한 발 두 발이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스스로 더 고개를 숙이고 몸을 낮추며 말을 다스려야 합니다. 가난한 살림에 가난한 배움에 가난한 몸에 가난한 마음에 가난한 믿음에 가난한 말이 되어 주면 좋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님은 ‘말이 가난해야 하느님 뜻을 알아듣고 하느님 뜻을 이웃과 나눌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살림과 배움과 몸과 마음과 믿음뿐 아니라 말까지 가난한 자리를 찾아야 하는 이음고리를 곰곰이 되짚으며 스스로 가난한 아름다움을 꽃피우고 나눌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책에 알알이 실린 말마디 몇 가지를 추려서 되새겨 봅니다. (4343.6.22.불.ㅎㄲㅅㄱ)


[20, 45쪽] 이상했다. 대학을 가겠다고 했을 때 “왜?”라고 물은 사람은 없었다 … 이 졸업장과 자격증은 도대체 누가 요구하는가?

[28, 40∼41, 58∼59쪽] 초등학교 때는 좋은 성적으로 중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애썼다. 중학교 때는 아직 평준화가 되기 전 명문고에 진입하기 위해 시험과 시험의 허들을 넘었다. 그렇게 들어간 명문고에서 다시 명문대의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해 내달려 왔다 … 입시 전쟁을 치르고 나니 등록금 전쟁이 기다리고, 다시 취업 전쟁이 시작된다 … 점점 늘어나는 영어 강의는 얼마나 학문을 이해했는가보다 얼마나 알아들었는가를 확인하는 자리다 … 자신의 경험과 개성을 바탕으로 해서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가는 일은, 삶에서 진정 필요한 일은 모조리 시장으로 떠넘겨 버렸다.

[30, 43쪽] 쉽게 더 좋은 학점을 받을 수 있는 수업을 찾아 들으며 프로젝트에 매달렸다. 피곤하게 논쟁할 일이 생기면 옳고 그름을 따지지 말고 우린 그냥 생각이 다를 뿐이라고,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서로를 침범하지 않으며 적당한 거리두기로 착하고 매너있게 관계를 유지하면 됐다. 대학생이 된 내가 누릴 수 있었던 그나마의 자유는, 그저 20년 동안 공부로 쌓인 것을 다 풀어내겠다는 듯 어른들의 밤거리를 닮은 대학 밤거리에서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것 … 이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세계화가 누구의 손에 돌아가고, 지금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웰빙타령은 하면서도 내가 먹고 쓰는 게 어디에서 길러지고 누가 만드는지도 모른다. 솔직히 제대로 연애할 줄도 모르고 자기를 성찰할 줄도 모른다.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의 삶에 닥친 수많은 실제적인 문제에 우리는 얼마나 당혹하고 무지한가? … 돈을 벌고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한 세상에 살면서, 그것 외의 모든 것에 스스로 무능해져 버렸다.

[52, 59, 62쪽] 대학은 이제부터 차라리 진리의 전당이기를 당당하게 포기 선언하고 취업고시 학원이라고 천명해야 하지 않은가. 그리고 취직도 안 된 청년들을 리콜하든지 손해배상하든지 해야 하지 않은가 … ‘자격증 장사 브로커’인 대학의 실체를 알면서도 그것을 인정하는 ‘똑똑한 불량품’들의 존재가 죽은 대학을 정당화하는 유일한 근거일 것이다 … 대졸자들이 주류인 사회에서 소비에 대한 기대치는 부풀려지고, 과시적인 소비에 대한 욕망은 점점 커진다 … 더 기계화되고 도시화될수록, 고유의 개성을 살리고 의미 있는 일을 할 기회는 점점 더 박탈되고 있다.

[57, 65쪽] 신문, TV, 인터넷은 자신들이 가진 영향력으로 평생학습 시대를 전파하며 광범위하게 지식을 판매하고 있다 … 직접 시를 쓰고 봉사를 하면서 그 순간 내가 살아 있다는 충만감을 느끼면 그것으로 충분하고, 내가 더 좋은 사람이 되면서 인생 전체에 걸쳐 더 발전해 나아가면 될 것이다.

[69∼71, 79쪽] 진보적이라는 지식인들과 언론이 대응하는 방식과 차원에서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 사회과학적 진보는 있을지 몰라도 내 일상과 긴밀히 연결된 삶의 총제적 진보는 아닌 듯했다. 제도와 정책은 진보일지 몰라도 그것을 통해 이루어질 삶의 내용과 생활문화는 한참 후진 듯 다가왔다. 무엇보다 주장은 옳을지 몰라도 내 가슴을 울리는 그 무엇과 사람의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 왜 ‘진짜’ 진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민생고통은 커져만 가는데 생활민심과 멀어지기만 하는 걸까? … 내가 접혀 온 진보는 충분히 래디컬하지 못하기에 쓸데없이 과격하고, 위험하게 실용주의적이고, 민망하게 투박하고, 어이없이 분열적이고, 놀랍도록 실적경쟁에 매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 지구 시대에 ‘고르게 부자인 삶’의 꿈이 진정한 진보일까?.

[80, 94쪽] 대학을 나오지 않고 주류적으로 살지 않아도 억울하거나 비참하게 느껴지지 않으며 저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그런 다른 삶이 존중되는 사회적 가치를 먼저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 대학을 거부한 나의 요구는 88만 원을 188만 원으로 올려 달라고 요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나는 더 근원적으로 나아가고 싶은 것이다 … 좋은 일로 성공까지 하겠다는 것도 또 하나의 성공경쟁이 아닌지. 기아 분쟁 지역에서 봉사를 하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은 고통 받는 그이들의 존엄한 감정이 자신의 맑은 가슴으로 흘러들어와 다른 사람들의 선함을 일깨울 수 있도록 좀 나직하게 나아갈 수 없을까.

[86∼87쪽] 정말 인문학인가? 나는 인문‘학’이 아니라 인문‘삶’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학’과 ‘삶’ 사이는 머리와 가슴보다 더 멀지 않은가. 아무리 사랑‘학’을 전공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사랑을 잘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 자기중심주의를 깨뜨린 삶의 실천이 없는 상태에서 머리속에 집중적으로 집어넣는 인문학이 얼마나 큰 문제인지를 나는 나 자신과 친구들과 비판적 지식인들을 접하며 절감하고 있다. 아무리 좋은 인문지식에도 ‘한계’라는 것이 있다. 지식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다. 삶과 실천의 흡수능력을 넘어서는 인문학은 독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자신을 움직이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면, 가난한 마음이 없다면, 그런 자기 내어줌의 실천이 없다면, 그 많은 지식과 진리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100쪽] 세상 모든 좋은 부모님들께 부탁 드린다. 특히 진보적이라는 부모님들께 말씀 드린다 … 아이를 위해 ‘좋은 부모’가 되려 하지 말고 당신의 ‘좋은 삶’을 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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