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길과 글쓰기


 내가 살아가는 하루를 돌아보았을 때에 빨래를 하고 빨래를 털고 짜며 빨래를 널었다가 빨래를 걷어서 빨래를 개는 데에 들이는 품이란 참 많다. 쌀을 씻어서 불리고 밥을 안치고 밥상을 차린 다음에 치우는 품 또한 많다. 아이랑 부대낀다든지 집일을 하며 들이는 품이란 얼마나 많은가. 나는 글쓰는 사람이라 하지만 정작 글쓰기를 하는 데에 들일 품이란 얼마나 적은가. 그러나 우리 어머니를 생각하고 옆지기 어머니를 헤아리면, 내가 집살림에 들이는 품이란 참 적다. 우리 어머니이든 옆지기 어머니이든 당신 온삶을 집살림에 바치고 있다. 두 분 어머니한테서 맛난 밥상을 받을 수 있는 까닭이라든지, 두 분 어머니를 마주하면서 느끼는 넉넉함이란 갑작스레 하늘에서 떨어진 선물이 아니다. 두 분 어머니가 이제까지 살아온 하루하루가 모두어지며 저절로 느끼는 고마움이다. 그러니까, 나로서는 내 살림살이에 제대로 손길을 바치지 못하는 주제에 살림이 어떠하다느니 살림이란 어떠해야 한다느니 하고 떠벌일 수 없다. ‘그나마’가 아니라 ‘꽤 많이’ 품과 틈을 들여 글쓰기를 하고 있는 내 삶이다. 집살림을 하느라, 또 자전거를 타느라, 여기에 사진기를 쥐느라 내 손가락과 손바닥에는 딱딱하게 굳은살이 박히기는 했지만, 내 글쓰기는 다름아닌 굳은살에서 우러나오지 않는가. 앞으로 내 손에는 굳은살이 더 많이 박힐 테며, 이에 따라 글쓰기에 쏟을 겨를은 훨씬 줄어들 텐데, 이렇게 글쓰기에 쏟을 겨를이 훨씬 줄어들면서 외려 ‘글쓰기 삶’은 더 길어지겠지. (4343.7.14.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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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저널리즘 -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지음, 구자호.이기명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2월
평점 :
절판



 사진은 어디에서 어떻게 배우는가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7] 케네스 코브레, 《포토저널리즘 (5판)》



 사진은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찍기 또한 가르칠 수 없습니다. 사진읽기마저 가르칠 수 없습니다.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이 아닙니다. 이름난 사진쟁이가 가르칠 수 있는 사진찍기가 아닙니다. 평론가나 비평가나 지식인이 가르칠 수 있는 사진읽기가 아닙니다.

 스스로 깨우치는 사진입니다. 스스로 익히는 사진찍기입니다. 스스로 깨닫는 사진읽기입니다.

 그러나 사진이든 사진찍기이든 사진읽기이든 대학교를 다닌다든지 사진강좌를 듣는다든지 하면서 배우려고 하는 우리들입니다. 어느 학교에서도 사진이나 사진찍기나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을 뿐 아니라, 어떠한 강좌나 이론 또한 사진이며 사진찍기이며 사진읽기를 가르칠 수 없음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아니, 처음부터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을 곰곰이 살피면, 사진뿐 아니라 사랑 또한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지 않습니다. 누구한테 아무개를 사랑하라고 가르칠 수 없을 뿐더러 어떻게 해야 사랑이 된다고 알려줄 수 없습니다. 사랑편지를 쓰라느니, 만나면 어디를 가라느니 하고 도움말을 할 수는 있으나, 마음이 맞는 두 짝꿍이 이루는 사랑은 두 사람 스스로 두 사람 깜냥껏 이룰 뿐입니다.

 사랑만 스스로 깜냥껏 이루지 않습니다. 우리들 누구나 ‘어머니 손맛’을 이야기하는데, 어머니들 스스로 어머니 손맛을 이루어지기까지 누구한테서 살림살이 비법을 배운 적이 있겠습니까. 누구나 처음부터 어머니이지 않았고, 누구도 처음부터 어머니 손맛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그저 살아내면서 차츰차츰 어머니가 되고 어머니 손맛을 익힐 뿐입니다.

 학자가 되는 길이든 교사가 되는 길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내놓아야 학자가 아닙니다. 대학원을 다녀야 학자로 설 수 있지 않아요. 내 배움길을 스스로 갈고닦으며 살피고 가다듬으며 비로소 학자가 됩니다. 교대를 나와 교사자격증을 땄다고 교사이지 않습니다. 배움터에서 아이들하고 부대끼는 가운데 한 해 두 해 차근차근 교사다움을 익히고 받아들이면서 아주 천천히 교사가 됩니다.

 《포토저널리즘 (5판)》이라고 하는 ‘사진 길잡이책’은 사진과 사진찍기와 사진읽기를 ‘학교라는 울타리에 갇혀’ 배우려고 하는 사람들한테 살짝이나마 사진밭을 맛보도록 이끄는 책입니다. 이 사진책은 ‘전문 사진기자가 되려는 사람한테 도움말을 건네는 책’이라 할 만하지만, 전문 사진기자이든 아마추어이든, 또는 집에서 꽃이나 강아지나 식구들을 찍으며 사진을 즐기든, 사진을 좀더 깊이 헤아리면서 좋아하고자 하는 이들한테 사진말을 나누어 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사진을 좋아하고 싶으면 읽는 책이요, 사진을 배우고 싶을 때에 ‘사진을 배우는 길’이란 어디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까를 익히는 책입니다.

 “사진기자들은 제한된 시간 동안 최상의 사진을 얻기 위해 계속 촬영을 한다. 아마추어들은 몇 장의 스냅사진을 찍고 최상의 작품을 기대한다 … 많은 사진기자들이 필름을 다 쓰기 전에 촬영을 멈춘다. 필름을 남겨 두는 이유는 누군가 건물 밖으로 뛰어내리는 것과 같은 극적인 상황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28, 33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사진기자와 아마추어를 빗대어 말하고 있습니다만, 이는 나라밖에서 훌륭하며 알뜰히 사진기자로 뛰는 사람하고 이와 같지 않은 사람을 나누는 잣대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한국땅 사진기자들 가운데 ‘가장 나은 사진을 얻고자 쉬지 않고 찍는’ 사람은 퍽 드물거든요. 한국땅 사진기자는 너무 바쁜 나머지 취재현장에 오래 있지 않을 뿐더러(아예 취재현장에 안 오기 일쑤입니다), 미리 와서 살펴보지 않고, 행사나 사건이 끝난 다음까지 더 남아서 뒷모습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빨리 찍고 떠나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그림 될 만한 모습을 찍으면 어느새 사라지는 한국땅 사진기자입니다.

 예식장 사진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 사진기자는 예식장 사진기사하고 닮았습니다. 주문받은 사진첩 하나에 넣을 사진만 착착 찍을 뿐, 혼인을 치르는 다 다른 짝꿍들한테서 느낄 다 다를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예식장에 미리 찾아와 온갖 모습을 두루 찍는다든지, 예식을 치르는 동안 벌어지는 갖가지 모습을 골고루 담는다든지, 예식을 마치고 나서 어우러지는 숱한 모습을 적바림한다든지 하지 않아요.

 이리하여 《포토저널리즘 (5판)》에 나오는 “최고의 렌즈 테크닉과 빛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도, 사진기자는 여전히 세금 인상을 위해 소집된 시의회와 지역구의 학교 수를 줄이기 위해 열린 회의의 차이를 독자를 위해 구별해 줘야 하는 어려움을 가진다(72쪽).” 같은 대목을 재미나게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문 사진기자들일수록 더 사진을 못 찍는다 할 만합니다. 전문 사진기자라 하는 분들이 사진강좌를 곧잘 열곤 하지만, 이런 분들한테서 사진을 배운다고 한다면, 아마추어이든 그저 ‘사진 즐김이’이든, 저마다 사랑하고 아끼며 가슴으로 받아들일 사진하고는 자꾸 멀어지고 맙니다. 우리는 어떤 대단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라, 우리 삶에서 사랑할 자리를 찾고 깨닫고 느끼면서 이러한 모습을 꾸밈없이 담으며 좋아해야 할 사람입니다. 우리는 무슨 그럴싸한 사진을 찍어야 할 사람이 아니요, 우리 삶에서 사랑스런 살붙이와 이웃을 살피고 어깨동무하는 가운데 이들 삶자락을 알뜰살뜰 담으며 기뻐해야 할 사람입니다.

 기자들한테만 “만약 촬영 대상이 카메라 앞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포토저널리즘적으로 뛰어난 기술도 내면을 드러내는 포트레이트를 만들지 못할 것이다(124쪽).” 하고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 집에서 내 식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똑같습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된 우리들이 아이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 아이가 ‘아이 참, 싫다는데 왜 자꾸 찍어요?’ 하며 이맛살을 찌푸린다면 어떤 사진이 나오겠습니까. 꽃이나 나무 사진을 찍는다 할지라도, 꽃이나 나무가 어떠한 터전을 좋아하고 반기는가를 살피지 않고 찍는다면 고운 꽃 사진 하나 나올 수 있겠습니까. 신문기자 사진이든 여느 생활사진이든 사진 한 장에는 가장 깊은 사랑과 가장 너른 믿음과 가장 따순 손길을 담을 노릇입니다.

 마땅한 일이 마땅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우리 나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가 초중고등학교다운 적이란 없고, 언제나 입시지옥 굴레에서 허덕입니다. 대학교가 대학교다운 날이란 없으며, 늘 대기업 취직을 바라는 싸움터로만 구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우리 배움터 모습이 언론에 옳고 바르게 나타나는 일이란 몹시 드뭅니다. 진보를 외치든 보수를 말하든, 참다운 우리 터전을 사랑하면서 우리 터전을 보여주는 목소리는 꽤 드뭅니다. “매체로서의 사진은 당연히 우리의 사회를 반영해야 한다. 당연한 소리다. 그러나 불행히도 편집자들은 고의적이거나 은근한 무시를 통해 전체 인구 구성에서 흑인, 게이와 레즈비언, 중남미인, 아시아인, 모든 종족의 여성을 고려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242쪽).”는 대목을 읽으며, 이 땅 진보나 보수가 얼마나 이 땅 너른 사람들 삶을 담아내는가를 살펴봅니다. 좌파가 진보이거나 우파가 보수이지 않습니다. 좌파는 좌파이고 우파는 우파이며, 진보는 진보이고 보수는 보수입니다. 저마다 우리 삶터를 아름답고 사랑스러우며 참된 쪽으로 이끌어 갈 물줄기입니다. 어느 쪽이 옳거나 그른 물줄기가 아니에요. 사진이란, 또 사진찍기란, 그리고 사진읽기란 어떻게 해야 옳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떻게 하면 그르다고 가를 수 없습니다. 참되고 착하며 고운 길을 걷는 가운데 저마다 다 다른 사람들한테서 사랑과 믿음을 길어올리는 몸짓이 사진으로 됩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찍는 누구나 나 스스로 좋아하며 사랑하는 삶을 찍습니다. 나 스스로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을 담습니다. 나 스스로 아끼거나 돌보고픈 터전을 적바림합니다. “사진기자는 사진 콘테스트나 편집자 혹은 동료 사진기자들을 위해 사진을 촬영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독자들에게 행복한 순간뿐만 아니라 슬픈 순간에 대한 정보도 제공하기 위해 사진을 촬영한다(385쪽).”는 말마따나, 사진이란 내 모든 삶을 곱다시 담으며 즐기는 문화이며 예술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이며, 삶을 즐기는 예술인 사진입니다. 삶을 느끼는 문화를 어디 다른 데에서 배울 수 있겠습니까. 삶을 즐기는 예술을 학교를 오래 다닌다거나 나라밖으로 배우러 다녀온다고 깨닫겠습니까. 스스로 익히고 스스로 찾으며 스스로 즐길 사진입니다. 나 스스로 좀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책을 찾아 읽을 뿐이요, 나 스스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 있다면, 내 사진은 아주 저절로 차츰차츰 한결 나은 사진으로 거듭나고 있는 셈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알차게 일구고 있으면, 내 사진 또한 시나브로 알차게 일구고 있는 셈입니다.

 사진을 배우려면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진찍기를 제대로 하고 싶으면 스스로 내 삶을 가꾸어야 합니다. 사진읽기를 똑바로 받아들이려면 스스로 내 삶을 껴안아야 합니다. 사진 배움길이란 오직 이 하나입니다. (4343.7.14.물.ㅎㄲㅅㄱ)


― 포토저널리즘, 프로 사진가의 접근 (케네스 코브레 씀, 구자호·이기명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5.2.20./3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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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잡지


 지난주에 살짝 서울마실을 하며 헌책방에 들렀을 때에 《PHOTO 291》이라는 사진잡지를 두 권 장만했다. 살 때에는 몰랐는데, 사고 나서 집에 와서 들여다보니 이날 장만한 두 권은 창간 2호와 3호였다. 1988년에 처음 나온 잡지라고 하는데, 좀더 눈여겨보며 들여다보고 살폈다면 창간호라든지 이 뒤에 나온 다른 잡지도 알아보지 않았으랴 싶다.

 그러나 《PHOTO 291》이라는 사진잡지에서 읽을거리는 몇 가지 찾아내기 어렵다. 나로서는 이 사진잡지가 ‘사진을 말하고 사진을 다루는 잡지’로서만 뜻이 있을 뿐, 이 잡지가 오늘까지 나오든 나오지 않든 그리 마음이 쓰이지 않는다. 사진을 즐기는 사람을 더욱 넓히면서 사진 즐김이 스스로 사진이라고 하는 아름다움 하나를 붙잡도록 이끌지 못한다고 느끼는 《PHOTO 291》였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아름다움을 골고루 알아채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만큼, 사진하는 아름다움을 말하지 못하더라도 이런 사진잡지 또한 즐겁게 우리 누리에 나오며 사랑받을 수 있어야 한다.

 이달 2010년 7월을 끝으로 사진잡지 《PHOTONET》이 더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한동안 숨을 죽이고 있다가 다시 나올는지 모를 노릇이지만, 사진잡지를 받아보는 사람이 늘지 않으며 잡지사 살림이 어렵기 때문에 더는 못 낸다고 한다. 이 사진잡지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뽑는 훌륭한 잡지이기도 하지만, 문화체육관광부에서는 그럴싸한 훈장은 붙일지언정, 이러한 훈장이 붙는 잡지가 튼튼하고 즐거이 꾸준하게 나오도록 뒷배를 하지는 못하는 셈이라고도 하겠다.

 그런데 《PHOTONET》이라는 사진잡지가 나오지 못하는 대목 또한 아쉽지만, 이 사진잡지에 글을 쓰기도 하고, 이 사진잡지를 아끼기도 하는 내 눈길로 들여다볼 때에는 이 사진잡지가 못하거나 모자란 대목이 많이 보인 만큼, 이와 같이 숨을 거두는 일을 그리 슬프다고 느끼지 않는다. 잡지를 받아보는 사람이 늘지 못한 일은 틀림없이 안타까운 노릇이요, 제아무리 이 사진잡지가 깊이와 너비를 고루 갖추지 못했다 할지라도 사랑받지 못할 까닭이란 없다.

 다만, 살림이 참 힘들어 더는 내기 어려워진 오늘 모습이라 한다면, 살림이 참 힘들었던 까닭을 스스로 더 캐고 뉘우치며 슬퍼할 수 있으면 좋겠다. 잡지 《PHOTONET》에서 다루는 사진은 어떤 사진이었으며, 잡지 《PHOTONET》이 일구려는 사진밭이란 어떤 모습이었고, 잡지 《PHOTONET》이 사랑하고 껴안으려는 사진삶이란 무엇이었는가를 가만히 되씹으면 좋겠다. 꽤나 비싼 사진기를 선뜻 장만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진잡지까지 선뜻 정기구독하지 못한 오늘 우리 모습을 어떻게 바라보며 어떻게 이끌고 어떻게 다스려야 좋을는지를 잡지 《PHOTONET》은 어느 만큼 헤아렸는지 깨달으면 좋겠다. 왜 사진잡지여야 하며, 사진잡지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려야 하고, 사진이란 무엇이며, 사진이 걷는 길과 사진으로 이루는 일과 놀이란 또 무엇인지를 낱낱이 살필 수 있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잡지라 하더라도 살아남기 어려운 판인데, 생각하는 잡지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아남겠는가. 한동안 돈을 벌는지 몰라도 생각하는 잡지가 아니라면 오래 가지 못할 뿐 아니라, 빛이 바래고 만다. 돈은 잔뜩 벌었으나 엉뚱하고 멍청한 길을 걷는 잡지사와 출판사가 한둘인가? 돈은 못 벌지만 아름답고 빛나는 길을 걷는 잡지사와 출판사가 아예 없는가? 돈은 돈대로 알맞게 벌면서 잡지는 잡지대로 아름다울 수 있도록, 《PHOTONET》이라는 사진잡지가 참답고 착하며 고운 길을 슬기롭게 새삼 찾아내거나 느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는다. 사진이란 삶이고 책 또한 삶이며 사람은 살아야 사람이다. (4343.7.13.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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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자의 길
마루야마 겐지 지음, 조양욱 옮김 / 현대문학북스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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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책 하나 149 ― 살아숨쉬는 사람만이 쓰는 글
 : 마루야마 겐지, 《산 자의 길》



- 책이름 : 산 자의 길
- 글 : 마루야마 겐지
- 옮긴이 : 조양욱
- 펴낸곳 : 현대문학북스 (2001.3.30.)
- 책값 : 8000원



 (1) 글쓰는 사람이 걷는 길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일이란 그리 만만하지 않습니다. 글이란 내 삶을 송두리째 담아내어 보여주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쓰기란 잘나거나 못나거나 가리지 않고 내 모습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글이 담긴 책이란 즐겁거나 슬프거나 따지기 앞서 먼저 내 얼굴을 꾸밈없이 내보이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없는 이야기를 지어서 글을 쓰든 겪은 이야기를 차근차근 담아내는 글을 쓰든 매한가지입니다. 어느 쪽 글이 되든 내 삶이 글에 묻어납니다. 어떠한 글로 나아가고자 하든 내 넋이 글에 스며듭니다. 스스로 벌거벗는 삶이요 스스로 벌거벗으면서 거리끼지 않아야 할 삶입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면,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할지라도 언제나 만만하지 않은 삶입니다. 믿음을 섬기는 삶이든, 아이들과 부대끼는 삶이든, 법이나 의료를 다루는 삶이든, 행정이나 기계를 다루는 삶이든 한결같이 만만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 일을 어떤 마음결로 붙잡든 일하는 사람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글을 쓰는 사람한테는 글에 그이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행정을 하는 사람은 행정서류에 그이 삶과 넋과 얼굴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따로 글을 쓴다고 해서 더 벌거벗은 삶이 되지 않습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무엇을 하든 우리들은 내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바라보기 마련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못 느낄 뿐이지, 우리는 내 삶을 둘레에 보여주고 둘레 삶을 고스란히 바라봅니다.

 자전거를 타고 도시 찻길을 달리다 보면 어김없이 길가마다 서 있는 자동차하고 부대낍니다. 자동차들은 찻길만 차지하지 않습니다. 찻길에다가 길가에다가 사람들 거님길까지 차지할 뿐 아니라, 사람들 살림집 앞이나 가게 앞자리까지 차지합니다.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이나 자전거를 타고 움직이는 사람은 어디로든 움직이지 못합니다. 늘 가로막힙니다. 자동차에 탄 사람 가운데 자전거로 달리는 사람이나 두 다리로 걷는 사람을 헤아리는 이를 만나기는 몹시 어렵습니다. 자동차에 탄 당신이 가야 할 곳으로 얼마나 더 빨리 길이 덜 막히면서 달릴 수 있는가에 마음을 기울일 뿐입니다. 이러는 삶에 익숙해지면서 시나브로 책읽기하고는 동떨어지고, 이러한 매무새로 책을 읽는다 할지라도 내 둘레에 이웃과 동무가 있음을 깨닫는다든지 내 둘레 사랑스럽고 따스한 살붙이가 있음을 헤아린다든지 하기란 힘듭니다.

 자전거를 타고 시골 찻길을 달리고 있으면 길가에 서 있는 자동차를 만나지 못합니다. 시골길을 달리는 자동차들은 시골길에서 차를 세워 둘 곳이 없음을 뻔히 알기 때문에 길가에 차를 대지 않습니다. 길 안쪽 쉴 자리라든지 나무 그늘 자리를 찾아가서 차를 세웁니다. 아무 데나 차를 세울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시골길에서 자전거로 달릴 때에는 자동차하고 똑같이 찻길 한복판을 달려야 합니다. 시골길에서는 길섶이란 거의 없어 사람이 거닐 길이든 자전거가 다닐 길이든 아예 없기 일쑤입니다. 이런 길이지만 시골 자동차는 무시무시하게 내달립니다. 어르신과 어린이가 느릿느릿 거니는 시골길에서 팔십 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는 드뭅니다. 으레 백 킬로미터나 백이십 킬로미터를 밟습니다. 도시처럼 차가 많지 않아 막힐 일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으나 다들 ‘자동차 최고성능’을 낼 생각인 듯 마구마구 달립니다. 이러는 삶에 길들면서 아주 마땅히 책읽기하고는 등을 돌리고, 이러한 매무새로 책을 읽는다 해 보았자 내 둘레 이웃과 동무 삶을 곱씹을 책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생각합니다. 나는 글을 쓰기 때문에 자동차를 몰 수 없습니다. 운전면허조차 딸 수 없습니다. 나중에 내 주머니에 돈이 엄청나게 들어온다 할지라도 운전사를 하나 두며 자동차에 내 몸을 실을 수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쓰는 삶을 일구는 동안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탈밖에 없습니다. 나는 글을 쓸 뿐 아니라 책을 읽는 삶을 꾸리는 동안 드문드문 버스를 타거나 다른 이 차를 얻어 탈 수 있을는지 몰라도, 내 손으로 차를 몰거나 장만할 꿈은 꾸지 못하겠다고 느낍니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새삼 곱씹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자동차를 모는 사람은 모두 거짓말쟁이가 아닌가 싶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자동차 몰기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말재주만 피우고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글을 쓴다고 하면서 두 다리로 걷지 않거나 자전거를 탈 마음이 아니라면 도무지 내 이웃과 동무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글쓰기란 다름아닌 삶쓰기입니다. 글나부랭이를 종이에 이냥저냥 끄적이면 되는 글쓰기가 아니라, 온몸으로 내 삶을 껴안고 복닥이면서 땀흘리고 있어야 비로소 이루어 내는 글쓰기입니다.

 돈벌이에 눈먼 글쓰기가 아니라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려는 글쓰기를 하고 싶은 내 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돈벌이에 눈먼 글쓰기 또한 글쓰기가 아니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사랑하고 싶은 글쓰기는 내 삶을 사랑하며 아끼려는 글쓰기 한 가지입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면서 나 스스로 고운 사람으로 거듭나고 싶은 글쓰기 한길을 가고 싶습니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일이 나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글을 써서 돈만 벌고 돈으로 내 삶을 망가뜨리는 모습이 나쁘다고 느낍니다.

 아름다우며 좋은 책 하나를 찾아내어 읽는 가운데 내 삶을 나부터 나 스스로 아름다우며 좋게 일구고 싶은 매무새일 때에는, 아주 마땅하면서 부드러이 내 삶을 나 스스로 글 하나로 담아내자는 꿈을 품습니다. 아름다우며 좋은 책 하나 읽기, 곧 책읽기란 줄거리를 머리속에 집어넣는다든지 갖은 지식과 정보로 내 온마음을 감싸려고 하는 뻘짓거리하고 사뭇 다릅니다. 책읽기라는 이름이 붙으려면 나 스스로 고르고 살펴 장만하여 읽고 집안에 건사해 놓는 책으로 내 삶을 꾸리겠다는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장만하거나 갖춘 책으로 내 삶을 다시 보며 내 삶을 새로 읽어 내 삶을 올바로 돌보겠다는 마음이 되어야 책읽기라 할 수 있습니다. 무슨무슨 베스트셀러를 읽었다던지 어떤어떤 스테디셀러를 얼마나 알아보고 읽었다 할지라도 책읽기가 아닙니다. 몇 만 권이나 몇 천 권에 이르는 책을 읽었다 해서 책읽기가 되지 않습니다. 책읽기는 나를 내세우는 이름값이 아니고, 책읽기는 내 몸값을 부풀리는 돈값이 아니며, 책읽기는 우쭐우쭐 어슬렁거리는 권력이 아닙니다. 글쓰기가 삶쓰기라면 책읽기는 삶읽기입니다. 글쓰기가 삶쓰기인 만큼 사진찍기는 삶찍기입니다. 사진찍기가 삶찍기인 터라 그림그리기는 삶그리기입니다. 그림그리기란 삶그리기인 까닭에 노래부르기란 삶부르기요, 춤추기란 삶추기입니다.

 살아가기에 글을 씁니다. 살아가며 글을 쓰기에 책을 읽습니다. 살아가며 글을 쓰고 책을 읽기에 사진 하나 찍고, 그림 하나 그리거나 즐기며, 노래 하나 부르거나 듣고, 춤을 추거나 바라봅니다. 삶이 온통 글이고 책이며 그림이고 사진인 가운데 춤과 노래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기에 글을 쓰고 책을 읽으며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립니다. 살아내고 싶어 글을 쓰고, 살아숨쉬는 넋으로 책을 읽습니다. 삶결이 글결로 묻어나고, 삶마디가 사진마디로 이어지며, 삶무늬가 그림무늬로 새겨집니다.


 (2) 살아 있기에 글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


 일본사람 마루야마 겐지 님이 쓴 《산 자의 길》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마루야마 겐지 님이 말하는 “산 사람이 걷는 길”이란, 당신 스스로 살아 있어서 글을 쓰고 있는 길이라는 소리입니다. 당신이 똑바로 살았건 그릇되이 살았건, 당신이 아름다이 살았건 엉터리로 살았건, 당신이 착하게 살았건 짓궂게 살았건, 당신이 참다이 살았건 바보스레 살았건, 당신은 오늘 이 땅에 두 다리를 디디고 있음을 잘 느끼고 있기에 이렇게 글조각을 푼푼이 그러모아 책 하나로 가만히 내놓는구나 싶습니다.

 《산 자의 길》을 읽은 사람 가운데 스스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분이라면, 마루야마 겐지 님과는 또다른 길을 걷는 당신 삶을 책 하나로 가만히 여밀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산 자의 길》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어떻게 어디에서 살아 있는가를 느끼지 못한다면, 이 책에서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헤아리지 못하는 한편, 나 스스로 내 삶을 엮어 책 하나로 일구는 길을 보지 못합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은 참으로 살고 싶어서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살아 있음을 느끼고자 글을 쓰는 사람입니다. 먼바다를 누비는 배를 타는 일꾼이 되고 싶었든, 소설 《모비딕》에 흠뻑 빠진 사람으로 지냈든, 혼인은 했으나 아이는 낳지 않고 지내든, 자동차나 오토바이에 미친 듯이 빠져 지낸 적이 있든, 마루야마 겐지 님은 당신 삶을 하나도 숨기지 않습니다. 당신 삶을 조금도 덧바르지 않습니다. 당신 삶을 보기 좋게 꾸민다든지, 그럴싸하게 허울을 입히지 않습니다. 그예 당신 몸뚱이가 살아숨쉬는 그대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며 일을 하고 사랑을 나누며 살아갈 뿐입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글은 온통 꾸밈없이 숨쉬고 사랑하며 생각하는 삶이 고스란히 담긴 영화 하나입니다. 보면 볼수록 새로운 모습을 새삼스레 찾아볼 수 있는 그림 한 장입니다.

 한국땅 어느 소설쟁이는 ‘살아남은 사람이 느끼는 슬픔’을 이야기했는데, 마루야마 겐지 님은 따로 슬픔이건 기쁨이건 밝히거나 다루지 않습니다. 그저 살아남아 있음만 밝히거나 다룹니다. 살아내는 동안 느끼는 슬픔은 언제까지나 슬픔이기만 하지 않고, 살아 있는 가운데 받아들일 기쁨은 노상 기쁨이기만 하지 않으니까요. 슬픔은 그예 슬픔이고 기쁨은 그저 기쁨입니다. 슬픔이 기쁨으로 바뀐다든지 기쁨이 슬픔으로 달라지는 일이란 없습니다. 사라지지 않고 잊히지 않습니다. 다시 태어나거나 새로 샘솟지 않습니다. 삶에는 모든 이야기가 골고루 있으며, 우리가 숨을 쉬는 동안에는 이 모든 이야기를 내 몸뚱이로 붙잡고 있을 뿐입니다.

 소설을 쓰는 마루야마 겐지 님이니, 당신은 당신 이야기를 소설이라는 무대에 풀어놓습니다. 이 무대에는 당신이 보낸 삶이 알알이 묻어나 있는 한편, 당신이 바라보는 삶이 소록소록 담겨 있습니다. 당신이 느끼는 삶이 차곡차곡 쌓이는 가운데, 당신이 꿈꾸는 삶이 새록새록 깃듭니다. 딱히 수수하다거나 투박하다 할 대목이란 없습니다. 무언가 한결 곱다거나 멋있다 할 대목 또한 없습니다. 어딘가 남다르다거나 돋보인다 할 대목은 없습니다. 새삼스레 따스하다거나 넉넉하다 할 대목도 없습니다. 마루야마 겐지 님 소설은 오로지 마루야마 겐지 님 삶이기에 좋은 소설이고 문학입니다.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닌 당신 삶만큼 소설을 쓰며 즐기고 있기에 좋은 이야기입니다.

 살아 있기에 글을 쓰고, 살아가는 만큼 글을 쓰며, 살아숨쉬는 그대로 글을 씁니다. 글 하나 쓰는 밑바탕이란 오직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로 글을 쓸 뿐이고, 이 세 가지로 책을 읽을 뿐이며, 이 세 가지로 사람을 사귀고 사랑을 나누며 일을 하거나 놀이를 즐길 뿐입니다.

 살아 있지 않다면 글을 쓰지 못하고, 살아 있지 못한데 글을 쓸 까닭이 없으며, 살아 있지 않은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없습니다. 소설을 놓고 으레 ‘꾸미는 이야기’라 하지만, 더욱이 글쓴이 스스로 아직 겪어 보지 못한 이야기를 쓸 뿐이라고도 하나, 아직 겪어 보지 못했다기보다 느껴 보지 못한 삶을 곰곰이 생각하면서 쓴다고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나와 함께 살아가는 뭇사람 삶이기에 이러한 삶을 이야기 한 자락으로 갈무리한다고 느낍니다.

 그러니까, 글쟁이 한 사람은 ‘느끼는 가슴’으로 ‘살아 있는 목숨’일 때에 비로소 붓을 놀립니다. 책쟁이 한 사람은 글쟁이 한 사람이 느끼는 가슴으로 살아 있는 목숨을 담아낸 글을 또다른 한 사람으로서 ‘느끼는 가슴’이 되고 ‘살아 있는 목숨’으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책읽기가 이루어집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란 동떨어진 일이 아닙니다. 글쓰기와 책읽기란 한동아리입니다. 《산 자의 길》이라는 책을 읽은 분이라면 적어도 이만한 느낌을 선물로 받으면서 내 글쓰기와 삶쓰기와 책읽기와 삶읽기를 고이 모두어 내리라 믿습니다. 이 책 하나를 손에 쥐면서 섣부른 생각이나 치우친 마음이 없었다면.


 (3) 살아숨쉬는 글월 새롭게 읽기


 나온 지 제법 되기는 했지만 아쉽게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산 자의 길》입니다. 아무래도 이 나라에서는 이 같은 문학이 옳게 읽히기는 힘들지 않느냐 싶습니다. 이 땅 사람들 스스로 “살아 있는 사람”이 되고자 하지 않으니까요. 손꼽히는 몇몇 대학 졸업장을 따려 하고, 연봉 높은 일자리를 얻으려 하며, 자동차 굴리기에 허덕이는 가운데, 더 크고 값나가는 아파트를 장만하는 쇠사슬에 꽁꽁 묶여 있는 한국땅에서 《산 자의 길》이란 꿈 같은 헛소리에 지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살아숨쉬지 않는 사람들한테는 어느 구석도 읽히기 힘든 《산 자의 길》인데, 이렇게 살아숨쉬지 않는 한국사람들한테 더욱 읽힐 《산 자의 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책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다시 그은 대목을 곰곰이 되읽습니다. (4343.7.13.불.ㅎㄲㅅㄱ)


[9∼10쪽] 어떠한 권위에도 굴하지 않고, 어떠한 집단에도 의지하는 법이 없으며, 그렇다고 세상을 등진 사람의 부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로 인해 치러야 할 대가에 코웃음을 날리면서, 어디까지나 개인의 자유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신과 권리를 추구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격렬한 기질의 소유자야말로 참된 창작자이며, 참된 산 자이다.

[24, 58, 88, 91∼92쪽] 국가 권력에 의해 잔혹한 대변화를 강요당한, 저 전쟁(태평양전쟁)의 시대를 용케 헤쳐나와 얼마 지나지 않았던 어른들로서는, 필경 그처럼 아무런 자극도 없는 안정이야말로 다시없는 보물이었으리라 … 내가 가고 싶은 곳은 도회의 번잡함이 아니라 우주에 직결되어 있는 광대한 바다였다 … 주변에는 샐러리맨이 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 같은 인간이 수두룩했다. 적응력이 풍부하다고 할까, 순종하는 체질이랄까, 전형적인 현실파라고나 할까 … 왜 그들은 돌과 화염병과 쇠파이프밖에 손에 쥐려고 하지 않는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어린아이 장난 같은, 아예 무기류에도 들어가지 않을 소도구를 휘두르는 것이 어떻게 과격파인가 하는 의문도 생겼다.

[43, 44, 125, 145쪽] 이토록 많은 책을 읽어도 고작 이 정도 사내밖에 못 되는가. 분수도 모르는 꿈을 주책없이 쫓아가다가는 결국 어떻게 되어 버리는가 하는, 그런 간단한 일마저 자신의 아내에게 이해시키지 못한단 말인가. 자식이 헤매고 괴로워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여기에 있노라고 가르쳐 주지도 못한단 말인가. 그런 사내가 지금까지 수십 년이나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 왔다는 말인가 … 전혀 도움이 되지 않고, 도저히 현명하다고는 말하기 어려운 부모를 가짐으로써, 나는 확실히 자립과 독립의 길을 망설이지 않고 나아갔던 것이다 … 나는 소위 지식인은 아니었다. 또한 지식인 사이에 끼워 주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식인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진 자들의 대다수가 도저히 올바른 지식인으로는 비치지 않았던 탓이다. 만약 그들이 참된 지식인이라면 제 발로 신문사를 찾아가거나, 텔레비전에 나가고 싶어하거나, 마음대로 먹고 마신 외상값을 출판사에 떠넘기거나, 직책에 연연해 하거나, 권위에 추파를 던지거나 할 리가 없다 … 술냄새가 풀풀 나는 입에서 튀어나오는 묘하게 차원 높은 이론은 대체적으로 자신들의 작품에는 전혀 반영되어 있지도 않았다.

[52, 108쪽] 나는 《백경》을 탐독했다. 거듭 되풀이해서 읽었다. 읽을 때마다 새로운 발견과 감동이 솟았으며, 더군다나 그것은 퍼올려도 마르지 않는 샘물 같았다 … 일본문학에서는 도저히 바랄 수 없는 커다란 스케일과 높은 질. 너무나도 리얼한 대모험의 이야기. 철학적이자 박물학적이면서도 일직선으로 혼에까지 도달하는 깊은 감동. 파워, 볼륨, 기품의 3박자가 갖추어진 대걸작 … 외국의 걸작에는 믿어지지 않을 만치 시간을 허비한 경우가 많았다. 5년, 10년이라는 세월을 아낌없이 썼으며, 그것이 예사였다. 그 중에는 한 작품에 일생을 공들인 작가마저 있을 정도였다. 어쩌면 외국문학과 일본문학의 극심한 수준 차이는, 소비한 시간의 차이가 크게 연관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영화이건 문학이건, 그런 짧은 시간에 해치우면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나오는 게 뻔한 일이 아닐까.

[63, 77쪽] 위험한 이상을 뒤집어쓴 자본주의가 너무나도 일본적인 해석과 일본적인 활용에 의해 사회와 개인의 자유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아무리 엄격한 공산주의 국가이더라도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개미나 벌들의 사회를 빼다 박은 듯한 국민 통제는 불가능하지 않았을까 … 빈부의 차가 아무리 벌어져도, 그럭저럭 밥을 먹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도 진심으로 몸을 던져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제아무리 과격한 노동조합이더라도 무장봉기가 되면 즉각 넙죽 엎드리고 말 것이다.

[126, 127, 131, 163쪽] 예술의 핵심이 아니라 예술의 분위기만을 즐기는 듯한 무리들의 혼은 출발점부터 이미 썩은 것이 아닌가 … 내가 열성적인 문학 독자였더라도 그런 야단법석은 혐오했을 것이다. 자신이 읽고 싶은 소설은 스스로 찾지, 문학상이나 광고 문구에 이끌려 사는 것 같은 짓은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 그러나 많은 문학 팬들은 헤밍웨이와 파장이 딱 들어맞았다. 헤밍웨이가 꾸며 보이는 그런 세계에 왜 자신이 도취되는가 하는 것은 거의 따지지 않고, 도리어 그런 것에서는 얼굴을 돌리고 천진스럽게 빨려들어 갔다 … 발표 무대가 늘어남에 따라 작품의 질은 점차 떨어졌고, 그렇게 하는 사이에 무엇보다 팔리는 작가를 발굴해야 한다는 숙명을 짊어진 편집자들도 눈에 듸게 변해 갔다. 사무적인 업무에 쫓겨 감성을 연마할 시간이 없어졌고, 시야가 좁아졌으며, 편집자의 생명과도 같은 ‘모든 것에 대한 흥미와 관심’의 정도가 극단적으로 얕아지고 말았다.

[156, 204, 208, 220쪽] 시대나 세대에 장단을 맞추어 일시적인 총아가 되기보다는, 보편적이고 중후한 테마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활자 중독자들의 싸구려 자기 현시욕에서 나오는 경박한 문학론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진짜 안목을 갖춘 참된 독자가 탄성을 지르도록 만드는 작가를 지향할 수 있다면, 이 세계에 머물러 있을 의의와 가치가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 오랜 세월 그들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주고, 앞으로도 그들의 기분에 맞춰 줄 소설은, 그들로서는 틀림없는 문학일지 몰라도, 그러나 나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 진짜 재능을 지닌 사람이었다면, 참된 미란 현실의 진흙탕 속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을 처음부터 간파하고 있어야 했다 … 나만은 독자적인 문학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새삼 각오를 다졌다. 읽어 줄 독자들의 시선에 신경을 곤두세우면서 작품을 써서는 안 된다고 다짐했다.

[157쪽] 학교 공부를 지독하게 싫어한 이유는 좋아하지도 않는 여러 지식을 일방적으로 퍼부으며, 무조건 외우기만 하면 된다는 납득되지 않는 교육이었던 탓이다.

[227쪽]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나는 즉시 나의 생활로 돌아갔다. 나로서는 장편소설을 마무리짓는 일 쪽이 더 중요했다. 꺼져 버리는 촛불처럼 깨끗한 마지막을 맞기 위해서라도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말고, 부지런히 소설을 써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이튿날에는 아버지의 일은 이미 내 머리에 없었다. 몇 십 년이나 전에 죽은 친구와 마찬가지의 희미한 인상이 되고 말았다. 필경 아버지 역시 몇 십 년 전부터 가족의 일 따위는 염두에 두고 있지 않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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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말하는 글


 책을 말하는 글이 되자면 책에 얽힌 정보가 아닌 책이 우리한테 들려주는 이야기를 담아야 합니다. 사람을 말하는 글이 되자면 사람에 얽힌 정보가 아닌 어느 한 사람이 당신 삶에서 어떠한 기쁨과 슬픔을 느끼며 당신 나날을 일구고 있는가를 들려주는 이야기를 실어야 합니다. 줄거리를 말한다거나 글쓴이가 무슨 일을 한다고 말한다거나 해서 책을 말하는 글이 되지 못합니다. 어느 한 사람 나이를 밝힌다거나 옷차림이나 몸매나 얼굴 모습을 밝힌다고 해서 어느 한 사람을 말하는 글이 될 수 없습니다.

 겉을 훑거나 스치는 우리 누리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책을 말하는 글을 만나기 몹시 어렵습니다. 사랑과 맏음으로 사귀려 하지 않는 이 나라 사람이기 때문인지 몰라도, 사람을 말하는 글을 마주하기 매우 힘듭니다.

 나 스스로 아름다우면서 좋은 열매를 얻어 싱그럽고 튼튼한 기운으로 살아가고자 하면서 책을 읽는 흐름이 옅다고 느낍니다. 나부터 참되면서 착한 사람으로 거듭나는 가운데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나누려고 마음을 기울이는 물줄기는 자꾸 끊기고 있다고 느낍니다.

 책을 말하는 글이란 그예 자취를 감추고, 사람을 말하는 글이란 가없이 사라지기만 합니다. (4343.7.1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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