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보문고에 책을 안 팔면?


 내 헌책방 이야기를 펴내 준 그물코 출판사에서 내놓은 다른 책들을 교보문고에서 만나기 힘들어진 지 꽤 된다. 문득 궁금해서 교보문고에서 그물코 책들을 죽 헤아리는데 하나같이 ‘품절’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다. ‘교보 추천’ 빨간 댕기가 붙은 책이건 나온 지 얼마 안 되는 책이건 송두리째 ‘품절’이다. 그러고 보면 그물코 출판사에서 요사이에 새로 내놓은 책은 아예 안 뜨기까지 한다. 펴낸 책 가짓수가 제법 되는 출판사치고 교보문고에 책을 안 파는 곳이 몇 군데쯤 될까. 아예 없지는 않을 테지만, 교보문고에 책을 넣지 않겠다고 하는 곳이 하나둘 늘어난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나 교보문고만 출판사 일꾼을 들볶거나 얄궂은 짓을 하기 때문에 교보문고에 책을 안 팔지는 않는다. 다른 큰책방이라고 그리 다르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누리책방이라 해서 한결 낫다고 여기기 어렵다. 작은책방이 차츰차츰 큰책방한테 잡아먹힐 뿐 아니라 큰책방 말고는 여느 책방이 살아남을 수 없는데다가 인문책을 즐겨 다루는 책방이라든지 예술책을 힘써 다루는 책방이 버틸 수 없는 한국땅이다. 그래도 서울 홍대 앞쪽에는 만화책만 다루는 책방 〈한양문고〉와 〈북새통〉 두 군데가 씩씩하게 뿌리내린 지 꽤 되었다. 사람들이 책을 책다이 마주하며 어깨동무할 뿐 아니라 착하게 사랑할 수 있자면, 가까이에 걸어가서 책을 찾아보는 작은책방이 동네마다 있어야 한다. 동네빵집과 동네술집과 동네밥집처럼 동네책집이 자그맣게 있어야 한다. 때때로 다리품을 팔며 멀리 마실을 다닐 만한 좋은 인문책방이나 예술책방이 함께 있어야 한다. 어린이책방이나 만화책방이나 그림책방 또한 곳곳에 있는 한편, 크고작은 헌책방이 도시와 시골마다 곳곳에 자리하고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 이렇게 책방이 책방답게 마을살림을 할 수 있다면 온 나라에 크고작은 예쁜 도서관 또한 맑고 싱그러이 태어나겠지.

 도서관은 기적처럼 지어서는 안 된다. 도서관은 작은책방이 밑바탕에 깔려 있은 다음에 스스로 태어나도록 해야 한다. 기적 어린 도서관은 책을 살리지 못한다. 기적에 흠뻑 빠진 도서관은 책을 돈푼이나 상품으로 다루고 만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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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을 맞이해 우리 말 이야기를 한 꼭지 걸쳐 본다. 


 알량한 말 바로잡기
 (1552) 시작 37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


.. 단원이 삼 년간 현감으로 재직한 연풍현 관아는 오래 전에 답사한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  《송명규-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 120쪽

 “삼 년간(三 年間)”은 “세 해 동안”이나 “세 해”나 “세 해를”로 다듬고, ‘재직(在職)한’은 ‘있던’이나 ‘일한’이나 ‘지낸’으로 다듬습니다. “오래 전(前)에 답사(踏査)한”은 그대로 두어도 괜찮으나, “퍽 예전에 다녀 본”이나 “꽤 옛날에 밟아 본”으로 손볼 수 있습니다. ‘여행(旅行)’ 같은 한자말은 한자말이라 하기보다는 우리 말이라 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이 자리에서는 그대로 두어도 괜찮고, ‘마실’이나 ‘나들이’나 ‘길’로 손질해 볼 수 있습니다.

 ┌ 여행은 옥순봉부터 시작하기로 (x)
 └ 여행은 옥순봉부터 하기로 (o)


 10월 9일은 한글날입니다. 한 해에 한 차례 ‘한글 난 날’을 맞이합니다. 한글날을 맞이하면서 이날을 기리는 사람이 있으나, 이날이 한글날인지 아닌지 못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했기에 조금 더 내 말과 글을 돌아보며 아끼고 사랑하자고 다짐하는 사람이 있는 한편, 한글날이건 말건 엉터리 말글을 아무렇지 않게 뇌까리는 사람이 있어요.

 한글날이라 해서 더 아름답거나 알차게 말글을 북돋우려는 사람이 있지만, 한글날조차 내 말글을 멍청하고 미련스레 망가뜨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글날을 맞이한 아침 책을 한 권 꺼내어 읽다가 씁쓸하게 웃습니다. 굳이 한글날이기에 우리 말글을 헤아리는 책을 찾아 읽고 싶지 않을 뿐더러, 한글날이라 해서 사람들이 한결 알차며 곱게 여민 말글로 이루어진 책을 읽을 마음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날이 한글날이다 보니 책을 읽으며 마주하는 글월에 자꾸 마음을 쓰고야 맙니다. 이분은 왜 이런 글로 이렇게 당신 삶을 이야기해야 하나 싶고, 이분 글을 책으로 낸 책마을 일꾼은 이분 글을 찬찬히 어루만지거나 보듬을 수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한자말 ‘시작’을 생각합니다. 이 낱말을 한자말로 여긴다거나 이 낱말을 다듬어 보고자 마음을 쏟는 사람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나 이제나 앞으로나 ‘시작’과 같은 낱말을 알뜰살뜰 털어내거나 씻어내기는 어려우리라 봅니다. 이와 같은 낱말 하나 털어내지 못한들 한글이 크게 망가진다든지 어처구니없이 무너지지 않을 테지요. 그러나 이 낱말 하나마저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면 이 나라 말글을 비롯해 이 나라 넋이 튼튼히 서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시작’과 같은 숱한 한자말이 우리 삶에 스며든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뗄 수 없다고 얘기하지만, 참말 이런 낱말들을 우리 입이나 손에서 떼어 보고자 애쓴 사람은 아주 드물거나 아예 없습니다. 참다이 말글 사랑을 해 본 적이 없는 한국사람입니다. 착하게 말글 가꾸기를 해 보려 땀흘리지 않는 한겨레입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돌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오르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어린 날, “준비, 시이작!” 하는 말을 곧잘 듣고 으레 꺼냈습니다. 그러나 “준비, 땅!” 하는 말을 나란히 듣고 흔히 주고받았습니다. 따로 우리 말글을 더 아끼려고 하면서 ‘시작’을 ‘땅’으로 고쳐쓰지는 않았습니다. 어쩐지 ‘시작’이라는 낱말이 썩 내키지 않았을 뿐입니다. 아마 국민학교 4학년이나 5학년 무렵이 아닌가 싶은데, ‘준비’라는 낱말도 ‘시작’이라는 낱말과 함께 한자말이 아닌가 하고 느끼면서, 이 낱말들을 곰곰이 되씹었습니다. 내 둘레 어른들은 어떤 말을 쓰는가 살펴보았고, 책에는 이런 말을 꺼내야 할 자리에 어떻게 적혀 있는가를 들여다보았습니다.

 “자, 해 보자!”나 “하나, 둘, 셋!” 같은 말마디는 이무렵 느끼고 들으며 받아들입니다. 따로 말다듬기나 글다듬기를 할 생각은 아니었고, 저한테 더 알맞거나 살가울 말마디를 찾고 싶었습니다. 말을 사랑하거나 글을 아끼려는 마음까지는 아니고, 더 쉬우며 포근한 말이나 글을 맞아들이고 싶었습니다. 머나먼 옛날 농사짓던 여느 할매와 할배가 쓰던 말을 나 또한 쓰고 싶었고, 까마득한 지난날 산골과 들판과 바닷가에서 살아가며 뛰노는 아이들이 쓰던 말을 나도 함께 쓰고 싶었습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다니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구경하기로 했다
 └ 이번에는 옥순봉부터 보기로 했다

 시골집에서 고무신을 신고 흙을 밟으며 나무를 쓰다듬는 가운데 생각합니다. 나무를 쓰다듬어 보지 않고서야, 흙을 밟아 보지 않고서야, 텃밭에서 풀을 뽑거나 무를 뽑아 보지 않고서야, 내 삶을 어루만질 만한 말마디를 얻지는 못한다고 느낍니다.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를 달릴 때에 비로소 생각다운 생각을 할 말미를 마련하는구나 싶지만, 이만큼으로는 모자랍니다. 두 다리로 어디를 걷거나 자전거를 달려 어디를 오가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을 이루는 바탕이 무엇이며, 내 삶자리는 어느 곳에 있는가를 알아채야 합니다.

 “한글사랑 나라사랑” 같은 푯말을 아무리 드높인다 하더라도 이 나라 사람들이 두루두루 한글과 우리 말을 사랑할 수 있지는 않습니다. 삶을 스스로 바꾸어야 하고, 삶터를 스스로 일구어야 하며, 삶사랑으로 살붙이와 동무와 이웃을 사귀어야 합니다. 제아무리 좋은 외침말이라 할지라도 한낱 외침말에 그칩니다. 우리 말 살리기이든 우리 강 살리기이든 우리 땅 살리기이든, 입으로 할 수 없고 글쓰기로 할 수 없습니다. 살아내는 내 하루로 할 뿐입니다.

 한글날을 기리며 한글과 우리 말을 다루는 좋은 책을 읽는다고 해서 살뜰히 말사랑 글사랑을 배울 수 있지 않아요. 책에서 다루는 이야기는 지식입니다. 나와 너는 머리에 담는 지식이 아닌 날마다 살아내며 나누는 이야기를 가누어 빛깔 고운 슬기를 살포시 베풀어야 합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며 오늘과 어제와 글피를 보내는 나라면, 내가 세우는 일터에 ‘무슨무슨 주니어’나 ‘무슨무슨 닷컴’ 같은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삶을 삶답게 여기지 못하며 오늘도 어제도 글피도 달력에 적힌 날짜로 바라보는 나이기에, 내가 다니는 일터 이름이 적힌 이름쪽 하나에 갖가지 자잘한 영어나 한자를 새겨 놓습니다.

 처음 그대로 살고 처음처럼 죽습니다. ‘시작’과 끝이 아닌 ‘처음’과 끝입니다. 세 살 버릇이 여든 간다지만, 세 살뿐 아니라 어머니 배에 깃들어 있을 때부터 내 삶은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 어머니가 살아온 바탕을 내가 받아먹고, 내가 태어나 자라며 보는 그대로 내 아이한테 물려줍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으려면 내 어머니가 당신 쓰던 말을 사랑으로 보듬어야 합니다. 내가 쓰는 말을 사랑으로 보듬는다면 내 아이가 쓰는 말 또한 내 아이 스스로 사랑으로 보듬습니다.

 첫머리를 옳고 착하며 곱게 붙잡아야 합니다. 말머리를 바르며 맑고 밝게 다잡아야 합니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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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0-10-09 23:36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로 순수 우리말을 억지로 한자어로 바꾼 경우에 그 말을 살릴 필요도 있지만 오랜기간 사용한 한자어를 굳이 한글로 억지로 고칠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보다는 요즘에 10~20대 층들이 사용하는 말들이 오히려 한글을 더 망치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파란놀 2010-10-10 06:17   좋아요 0 | URL
어린이와 청소년이 쓰는 말은 모두 '어른이 쓰는 말'을 따라하고, 이 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어른들이 어떤 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어린이와 청소년 말은 달라집니다. 어른들이 '말을 가다듬으려 애쓰는 만큼' 아이들도 아무 말이나 함부로 안 쓰지요.

4대강 같은 사업을 반대하는 사람이라면, 말과 글을 '한 나라 사람 누구나(학력이 짧든 아는 것이 적든) 손쉽고 즐거이 나누는 테두리'를 헤아려야 합니다. '한글로 억지로 고치는' 일이란 없습니다. '제자리로 가도록 바로잡는' 일입니다.
 


 전철에서 책읽기 2


 송명규 님이 쓴 산문책 《후투티를 기다리며》(따님,2010)를 읽다가 126쪽에서 멈춘다. “가방을 팽개치고 허겁지겁 차 속에서 쌍안경을 꺼내들었다. 렌즈 한켠에 달걀처럼 생긴 검은 물체가 아른가렸다. 떨리는 두 손을 진정시키며 가까스로 초점을 맞췄다. ……. 부엉이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지에 걸린 채 햇빛을 반사하며 바람에 나부끼고 있는 까만 비닐봉지였다. 나는 무엇에 얻어맞은 듯 한참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나는 내가 사는 시대를 착각했다. 나는 현대인이다. 그리고 현대는 미루나무에 부엉이 대신 비닐봉지가 앉아 있는 게 자연스러운 시대다.”라는 대목을 두 번 세 번 네 번 거듭 되읽는다. 고개를 그리 끄덕이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이 나라 이 땅 모습이다. 틀림없이 우리 삶자락 이야기이다.

 오늘 이대 앞에서 지하철을 타는데 코를 찌르고 살을 후벼파는 냄새가 잔뜩 나서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 바깥은 그지없이 하늘 파랗고 구름 하얀데, 지하철역으로 들어서니 온통 불빛이요, 눈이 어두워지고 만다. 새삼스레 이 도시 서울을 생각한다. 우리는 왜 땅밑으로 내려가야 하는가. 왜 이 땅밑 기차를 타고 움직여야 하는가. 우리한테 얼마나 넓은 땅이 있어야 하느냐는 물음에 앞서 우리는 얼마나 멀리 넓게 나다니며 사람을 사귀거나 다른 마을 구경을 해야 하는가. 내 조그마한 보금자리와 삶터를 조촐히 사랑하며 아낄 수는 없는가. 지하철을 타며 책을 읽으면 ‘시간 살리기’라 여겨 왔는데, 굳이 지하철까지 타야 하거나 책까지 챙겨 읽어야 하느냐 싶다.

 맑은 햇살을 받아들이며 빨래를 해서 널고, 이 햇살을 아이와 옆지기랑 느끼며 산길을 천천히 오르내릴 때에 한결 기쁘며 뿌듯하겠구나. 얼굴과 손발이 푸석해지고 목이 마르다. 오늘이 한글날이라고 한다. (4343.10.9.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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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걸레와 글쓰기

 걸레를 손으로 빨아 무릎을 꿇고 방바닥을 훔치면, 내가 얼마만 한 방이 있는 집에서 살아야 좋을까를 알 수 있다. 연필을 손으로 깎아 조그마한 쪽종이 하나, 이를테면 껌종이라든지 부동산에서 골목마다 붙이는 전세방 알림종이를 길에서 주워 여기에 몇 줄 글월을 적바림해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글을 써서 나누어야 좋을까를 헤아릴 수 있다. 내가 땀흘려 일하여 번 돈을, 그러니까 텃밭농사를 지어 배추 몇 포기나 무 몇 뿌리를 저잣거리 한 귀퉁이에 자리를 얻어 길장사를 해서 번 돈을 손에 쥐고 다리품을 팔아 책방마실을 하는 가운데 책 하나를 장만해 보면, 내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 내 삶을 일구어야 아름다운가를 깨달을 수 있다. (4343.10.8.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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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걷는 골목


 내 눈에만 어여삐 보일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언제나 어여쁘기 때문에 동네 골목 마실을 꾸준하게 오래오래 이어가며 사진을 찍고 글을 쓴다. 다른 사람은 지저분하게 바라보거나 아무것 아니라고 얕잡아 보더라도 내가 골목동네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골목길 삶자락은 가없이 아름다우니까 내가 느낀 이 아름다움을 글과 사진으로 고스란히 담아내고자 한다.

 내 마음에만 알차게 보일 수 있으나, 내가 읽기에는 노상 알차기 때문에 판이 끊어진 책이건 나라밖 책이건 거의 안 알려진 채 조용히 묻힌 책이건 기쁘게 읽고 나서 느낌글을 쓴다. 다른 사람은 뭐 그런 책을 굳이 읽느냐고 묻는다. 잘 팔리거나 널리 사랑받는 책도 많은데 애써 뻘밭에 묻힌 책을 캐려 할 까닭이 있느냐고 말한다. 틀림없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모든 사람이 좋아한다는 책도 좋아할 만하지만, 누구보다 내 가슴에 아로새길 수 있으면서 내 눈과 마음과 손으로 고이 껴안을 수 있는 책을 읽고 싶다. (4343.10.7.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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