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빨래 개는 옆에서 빨래 개기를 따라하는 어린이.

 - 2010.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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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11번가’ 바보짓


 내 새 책 《사랑하는 글쓰기》가 나왔다. 제때에 나오지 못했으나, 이렇게 종이에 곱게 찍혀 태어난 모습을 보니 눈물이 글썽하다. 이 아이는 나와 내 둘레 사람들이 얼마나 아끼거나 사랑할 수 있으려나. 책이 새로 나오기도 했고, 옆지기가 인천에 오랜만에 마실을 하고프다고 말한다. 애 아빠는 이런저런 볼일로 지난달에 인천으로 마실을 했지만, 옆지기는 넉 달 만에 인천으로 마실을 한다. 아이랑 모두 인천으로 마실을 다니기도 넉 달 만이다.

 전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는 길에 아이를 어르고 달래며 온몸이 찌뿌둥하다. 아주 잠깐조차 쉬지 않으며 놀아대려 하는 아이를 전철에 얌전히 앉힐 수 없다. 뛰놀고픈 아이는 전철 같은 데가 얼마나 갑갑할까. 콩콩 통통 튀고플 텐데.

 아이하고 복닥이다가 살짝 숨을 돌리려고 머리를 창문에 기댄다. 히유 하고 한숨을 쉬는데, 오른쪽 위에 대롱대롱 달린 광고판이 보인다. 전철이든 버스이든, 이런 탈거리 구석구석은 눈을 쉴 곳이 없이 광고판이다. 버스나 전철이 사람 눈길이 닿는 데마다 이렇게 광고판을 덕지덕지 붙인다면, 이들 회사가 광고삯 받는 만큼 버스삯이나 전철삯을 안 받아야 옳지 않으려나. 광고삯은 광고삯대로 받으며 우리 눈을 어지럽히고 마음을 흔들면서 찻삯은 또 찻삯대로 다 받으니 얼마나 몹쓸 노릇인가.

 광고판 그림에는 책을 잔뜩 그려 놓았다. 책 그림 옆으로는 예쁘장한 아가씨가 선다. 사이에 잔글씨로 무어라무어라 적었구나. 안경을 쓰고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번 주 베스트셀러는 무조건 무료 배송 …….” 아, ‘싸게’ 살 뿐더러 집에 드러누워 거저로 받아 보기까지 하는 이 책들이란 ‘읽는’ 책인가, ‘사서 쓰고 버리는’ 책인가. 모든 책은 적어도 10% 에누리에 적립금까지 몇 퍼센트가 되는데, 이 몫은 누가 내지? 책값에 이 몫이 담기는가, 출판사가 피를 뱉어야 하는가, 책방이 살을 깎는가? 내 삶을 밝히며 내 넋을 살찌우는 책을 나누는 좋은 책방 이야기란 어디론가 숨고, 이처럼 서로서로 더 싸게 많이 팔아치우는 장사꾼들 놀음놀이만 번쩍번쩍 춤을 추어야 하는가?

 그러나, 책방들이 이렇게 춤을 추면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이 이 춤 가락에 맞춘다. 한두 사람이 아닌 참 많은 사람이 이 가락에 이 춤을 추고 저 가락에 저 노래를 부른다. 책을 장만해서 읽는 사람이란 차츰 사라지면서, 1회용품 같은 싸구려 물건을 늘 새롭게 장만해서 쓰고 버리는 사람만 자꾸 늘어난다. 책이 태어나지 못하고, 책이 읽히지 못하며, 책이 녹아들지 못한다. 바보짓이 바보짓이 아닌 듯 뿌리를 내리고, 바보짓을 할수록 돈을 거머쥘 뿐 아니라, 바보짓 막놀이가 온누리를 휘감는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 살던 동안에 당신 책이 ‘느낌표 책’으로든 무슨 책으로든 뽑혀서 불티나게 팔리는 일을 두려워 했다. 가만히 보면, ‘느낌표 책’으로뿐 아니라 무슨무슨 추천도서나 필독도서나 권장도서로 뽑히는 일도 두렵다. 책은 기관이나 단체나 교사가 ‘좋은 책’이랍시고 뽑아서 이름표를 붙일 수 없다. 책은 책을 장만해서 읽는 사람 스스로 가슴으로 마주하고 사랑으로 껴안으며 나무처럼 가지를 벌리고 잎을 틔우며 꽃을 피워 열매를 맺어야 한다.

 해리포터·하루키는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으로 읽혀야 한다. 이오덕·리영희는 지성인이 아닌 책으로 읽혀야 한다. 이원수·권정생은 추천명작이 아닌 책으로 읽혀야 한다. 책은 삶으로 자리를 잡고, 삶은 책으로 다시 살아숨쉬며, 사람은 책을 책다이 가꾸는 가운데, 사람은 삶을 삶다이 일구어야 한다. 바보짓 사람들이 바보짓을 멈추지 않으니 ‘도서 11번가’는 바보짓을 그치지 않을 뿐더러, 앞으로도 새삼스러이 바보짓을 벌일밖에 없다. 책방들이 책방 구실을 하도록, 책을 읽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 구실을 옳고 착하며 예쁘게 해야 한다. (4343.12.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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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옷과 글쓰기


 엄마랑 아빠랑 마실을 나온 지 사흘째, 바깥사람을 잔뜩 만나며 아침부터 쉴새없이 놀던 아이가 저녁을 먹을 무렵 금세 곯아떨어진다. 아침잠이 거의 없고 낮잠은 아예 없다시피 하는 아이는 배가 꽤 고플 텐데 이렇게 밥자리에 앞서 곯아떨어지곤 한다. 아빠는 아이를 안고 밥집으로 들어선다. 스물아홉 달째 살아가며 키가 제법 큰 아이는 걸상 둘을 옆에 붙인 다음 머리를 아빠 허벅지에 올려야 비로소 눕힐 만하다. 한 시간 남짓 이렇게 눕혀 놓는데 허벅지 눌리는 무게가 퍽 나간다. 아이는 하루하루 새롭고 새삼스레 자랄 테니까. 허벅지 눌리는 무게를 가늠하면서 우리 아이가 어느 만큼 더 자랐는가를 곱씹고, 아이가 자라는 만큼 내가 이 아이 나이만 하던 어린 나날 내 어버이는 나를 돌보느라 얼마나 속을 썩이거나 애를 먹였을까 하며 돌아본다. 아이가 꽤 짓궂다 싶도록 말썽을 부린다든지 말을 안 듣는 모습이란 아이가 나쁜 넋이라서가 아니라, 아이 나름대로 힘들거나 고단하기 때문이라고 생각을 추스른다. 아빠가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한결 살갑거나 따스히 해 주지 못하는 일이 많으니까. 집일을 하고 글쓰기를 한다면서 아이랑 더 놀지 못하는 한편, 아이 손을 잡고 멧길 따라 숲마실 하기도 제대로 못하니까.

 허벅지에 아무 느낌이 없을 무렵 아이 머리를 걸상에 내려놓는다. 고이 잠든 아이는 깨지 않는다. 함께 밥자리에 있던 분이 겉옷을 벗어 아이한테 씌워 주었다. 밥집에 들어왔기에 겉옷을 벗을 만하기도 했는데, 애 아빠는 따로 겉옷을 입지 않았다. 더위도 잘 타고 추위는 잘 안 타며 가방 짐이 무겁다면서 겉옷을 잘 안 입는다. 이러다 보니, 이렇게 겨울날 밖에서 아이가 잠들었어도 아이를 감싸 줄 너른 품 옷이 없다.

 아이도 알겠지. 제 아빠가 겉옷 없이 살며 제 몸을 한껏 따스히 보듬지 못하는 줄을. 아이는 아이 스스로 더 튼튼해지거나 씩씩해지거나 다부지게 살아야 한다고 시나브로 알아채겠지. 제 두 다리로 일찍부터 우뚝 서면서 제 길을 걸어야 하는 줄을. (4343.12.17.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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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러 날 인천마실을 하는 요 며칠. 책값으로도 또 꽤나 돈이 나가고, 책값 아닌 돈으로도 여러모로 돈이 나가다. 그러나, 네 식구 다 함께 오랜만에 인천 배다리에 들러 여러 사람들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주고받는다. 글은 한 줄 끄적일 겨를조차 없으나, 이렇게 보내는 하루하루도 나와 옆지기랑 첫째랑 뱃속 둘째 모두 너그러이 받아들여 주리라 믿어 본다. 

 고마운 사람과 고마운 생각을 나누며 고마운 삶을 즐겁게 받아 안는다. 사들이는 책을 읽으면서도 좋은 마음을 북돋우지만, 마주하는 사람들 얼굴로도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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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소년 9
시무라 타카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아이들은 ‘우물 개구리’가 아닙니다
 [만화책 즐겨읽기 17] 시무라 다카코, 《방랑 소년 (9)》


 저마다 예쁘게 살아가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꿈을 꾸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이제 여자축구는 남자축구 못지않게 눈길을 끌거나 사랑을 받을 만하다 싶으나, 여자가 축구를 한다 할 때에 뱀눈으로 보는 사람은 아직 많습니다. 여자가 권투를 하거나 격투기를 한다 할 때에도 비슷합니다. 언제나처럼 떠도는 도깨비 같은 말이란 ‘그러다 시집 어떻게 갈래?’입니다.

 남자로 살아가는 저는 으레 듣는 물음이 이렇습니다. ‘당신 그렇게 살면서 어떻게 식구들 먹여살릴래?’

 집식구는 남자가 집안기둥이 되어 홀로 벌어먹여야 할까 궁금합니다. 남자는 오로지 바깥일을 도맡고 여자는 오직 집안일을 도맡으며 살아야 하나 궁금합니다. 다 함께 바깥일에 힘쓰고 모두 다 집안일을 북돋우며 즐거이 살아가면 아름답지 않나 생각합니다. 로라 잉걸스 와일더 님이 쓴 “큰숲 작은집” 이야기책을 읽으면 집안일이건 집밖일이건 식구들이 모두 힘을 쏟아 함께합니다. 워낙 사람 숫자가 적은 외딴 멧골집에서 살아가니까 이렇게 할밖에 없다 말할 수 있으나, 참말 이렇게 꾸리는 살림살이가 동양이든 서양이든 ‘가난하고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 나라 역사책이나 인문지리책에 ‘가난하고 수수한 여느 사람들’ 삶이 적힌 적이 없기에 종잡기는 어렵습니다만,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에서 엮은 “민중자서전”을 읽다 보면, 없는 사람들은 돈이 없다뿐 사랑이 있고 마음이 있으며 가슴이 있습니다. 사랑과 마음과 가슴으로 서로를 보듬거나 돌보거나 어루만집니다.


.. “얘(친구)는 단순한 취미 생활이야. 이 녀석(동생)은 여자가 되고 싶어한다구. 그렇지?” (13쪽)


 만화책 《방랑 소년》 9권을 읽습니다. 한 권 두 권 호수를 채울 때마다 아슬아슬한 금에서 오락가락하는 만화책 《방랑 소년》입니다. 책이름부터 ‘방랑’이라 적었기 때문일 테지요.

 이 만화책에 나오는 두 주인공 슈이치(남자)와 요시노(여자)는 서로 같은 꿈을 서로 다르게 품으며 살아갑니다. 먼저, 슈이치와 요시노는 ‘내가 태어나며 받은 성별’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슈이치는 여자로 살고픈 남자아이요, 요시노는 남자로 살고픈 여자아이예요.

 한자말로 적으니 ‘방랑’입니다만, 이제 막 중학교 1학년에 들어선 이 아이들로서는 섣불로 홀로 서기 어려운 나이와 넋과 삶인 까닭에, 망설입니다. 갈팡질팡합니다. 오락가락합니다. 흔들립니다. 떠돕니다. 헤맵니다. 무엇보다 가슴이 아프고 쓸쓸합니다.

 이 아이들하고 마음을 툭 터놓고 이야기를 들어 주거나 들려주는 어른이란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 아이들 마음을 읽어내어 따숩게 껴안거나 얼싸안는 어른 또한 만나기 어렵습니다.

 왜 이 아이들이 설 자리를 마련하지 못하나요. 왜 이 아이들 꿈을 놀림감으로 삼으며 따돌리거나 꾸짖거나 못마땅해 하기만 하나요.

 착하며 아름답게 살아가고픈 길에 선 아이들입니다. 속마음을 숨긴 채 겉치레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 아이들입니다. 저마다 다 달리 태어난 몸과 마음을 곱게 건사하면서 예쁘게 북돋우고 싶은 아이들입니다. 맑은 눈망울과 밝은 눈빛으로 이 땅에서 씩씩하게 한길을 걷고픈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한참 흔들리며 슬프고, 눈물을 짓지만, 바보가 아닙니다. 바보가 아니지만 똑똑이도 아닙니다. 그냥 한 사람입니다. 사랑스러운 목숨을 포근히 보듬는 한 사람입니다.


.. ‘난 말하지 못했어. 슈이치는 당당했다.’ ..  (36쪽)


 어른들은 아이들을 제도권 울타리에 가두어 놓으며 흐뭇해 해서는 안 됩니다. 아이들을 어린이집에 넣다가는 초등학교에 보내고, 중·고등학교에서 입시공부만 하다가는 대학교에 들어간 다음, 돈 잘 버는 회사를 찾아 사무직 일꾼이 되기를 바랄 노릇이 아닙니다. 이 다음 길은? 뻔하지요. 시집장가 잘 가서 아이 둘쯤 낳아 효도 하기.

 이 땅 아이들은 어떠한 길을 걸어야 할까 생각해야 합니다. 이 땅 아이들이 걸어가며 즐길 가장 아름다우며 빛나는 길을 헤아려야 합니다. 다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은 길을 걷도록 내모는 오늘날 어른들 사회 얼거리가 아이들한테 얼마나 고되고 괴로우며 슬픈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아이들이 씩씩하게 크도록 길동무가 되어야 할 어버이요 어른입니다. 아이들이 튼튼하게 살도록 옆지기가 되어야 할 어버이면서 어른입니다. 훈계를 늘어놓거나 설교를 하는 사람은 어버이도 아니고 어른도 아닙니다.


.. “집에도 설 자리가 없는 느낌?” “누나가 학교에 안 갈지도 몰라요. 나도 이제 가기 싫어요. 나만 보건실로 끌ㄹ려가고, 나만 엄마가 데리러 왔어요. (여자아이) 치즈루랑 요시노는 (남자 옷을 입고 왔어도) 아무도 비웃지 않았는데, 나만 비웃음을 당했어요.” ..  (46∼48쪽)


 새벽녘 쉬가 마려운지 깬 아이가 다시 잠들지 못하고는, 훨씬 이른 새벽부터 깨어나 일하는 아빠 곁으로 살금살금 걸어옵니다. 아이는 언제나 아빠 곁에 붙어서 아빠가 무얼 하는가 가만히 바라보다가는 고 모양새를 저도 따라합니다. 고 모양새를 아이가 따라하는 모습을 슬쩍 바라볼라치면 아이는 상긋 웃습니다. 아이는 엄마 곁에서도 엄마가 하는 양을 따라합니다. 할머니가 마실을 오면 할머니 매무새 또한 따라합니다. 아이는 둘레 어른들 살아가는 하루하루를 제 교과서로 삼습니다. 제 앞길로 삼아요.

 아이하고 함께 살아가는 어른들은 누구나 느끼기 마련이면서 누구나 못 느끼기도 하는데, 아이한테는 아주 좋은 어린이집이나 보육원이나 학교나 대안학교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제 어버이하고 둘레 어른이 도움이 됩니다. 아이는 학교에서 배우지 않습니다. 아이는 학교를 다니며 길들 뿐입니다. 아이는 집에서 배우고 마을에서 배웁니다. 아이는 집과 마을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집과 마을에서 사랑과 믿음을 익힙니다. 아이는 학교를 다니며 머리통만 굵어지다가는 깊은 생채기를 받는 가운데 스스로 좁은 우물(제도권)에 빠져들어 허우적거립니다.

 참다이 가르치며 배우는 가운데 살아갈 길은 모두 집에 있습니다. 그냥 집이 아닌 살림집에 있습니다. 농사를 짓고 밥을 하며 옷을 기우고 빨래를 하며 집 안팎을 쓸고 닦아 치우는 모든 살림살이에 아이를 가르치며 배우는 참살길이 깃듭니다.

 아이들은 제 먹을거리를 제 손으로 키우는 땀을 알아야 하는 한편, 제 먹을거리를 손수 밥상에 차리는 품을 알아야 하고, 제 밥상을 제 손으로 치우는 겨를을 알아야 합니다. 밥과 옷과 집이 하늘에서 똑 떨어지거나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을 뿐더러, 내 손과 몸둥이로 이루어 내는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참살길을 밝히며 보여주어야지, ‘돈 벌 길’이나 ‘이름 높일 길’이나 ‘힘 쌓을 길’을 보여주거나 이 길로 떠밀면 안 됩니다.


.. “선생님을 모셔 올까?” “그냥 보건실로 갈게. 카나코한테 말해 줘.” (같은 반 남자아이가 슈이치를 보며 지나가듯이 말한다) “너 바보지?” (슈이치는 고개를 떨구며 보건실로 가는 길에 생각한다) ‘바보인가? 바보지, 뭐.’ ..  (83∼86쪽)


 내 아이는 딸아이로 태어나도 좋고 아들아이로 태어나도 좋습니다. 내 아이는 딸아이로 살아도 좋고 아들아이로 살아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 아이는 그예 내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고운 목숨 예쁘게 일구는 삶이면 즐겁기 때문입니다. 착한 삶이냐 참다운 삶이냐 어여쁜 삶이냐를 눈여겨볼 일입니다. ‘계집아이처럼 군다’든지 ‘수줍음을 탄다’든지 하는 빛깔은 아무것 아닐 뿐더러, 따숩게 받아들이면 넉넉합니다. 내 아이가 학교성적이 처진다든지 달리기가 느리다든지 눈이 나쁘다든지 책을 잘 안 읽는다든지 하면 어떻습니까. 사랑스러우면서 씩씩하고 다부지게 자라나면 훌륭합니다.

 《방랑 소년》에 나오는 슈이치는 9권에 이르러 드디어 홀로 설 자리를 찾으려 하는데, 참으로 이 아이가 홀로 설 만한 자리는 어디에도 안 보인다고 새삼스레 깨닫습니다. 학교라는 곳이, 제도라는 곳이, 사회라는 곳이, 어느 만큼 답답하며 무시무시한가를 몸소 깨닫습니다.

 누가 바보일까요? 누가 바보인가요? 바보는 왜 있어야 하고, 바보라는 낱말은 왜 태어났을까요? 예부터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라 했습니다. 누가 우물 안에 갇힌 개구리일까요? (4343.12.14.불.ㅎㄲㅅㄱ)


― 방랑 소년 9 (시무라 다카코 글·그림,설은미 옮김,학산문화사,2010.10.25./4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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