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살아가는 말 37] 사흘거리

 지난 십이월 첫머리부터 꽁꽁 얼어붙던 날씨가 이듬해 이월 첫머리에는 비로소 풀리는지 궁금합니다. 이토록 꽁꽁 얼어붙으면 기름값부터 걱정이지만, 한 번 까딱 잘못해서 물이 얼어붙으면 도무지 녹을 줄 모르기에 근심입니다. 처음부터 집을 잘 건사해서 기름을 덜 먹어도 되도록 하고, 물이 안 얼도록 하면 가장 훌륭합니다. 이렇게 못하면서 날씨 탓만 하는 사람은 바보입니다. 아무래도 바보로 살다 보니 바보스레 생각하거나 바보스레 말하는구나 싶은데, 바보스러운 삶이니 바보스러운 굴레에서 이야기를 나누겠지요. 추운 겨울날 문득문득 이제 참말 ‘사흘거리’는 끝나고 없는데, 이 언제 적 이야기인 사흘거리를 자꾸 떠올리는가 싶어 또다시 바보스럽다고 느낍니다. 사흘거리로 찾아오던 따뜻한 날씨를, ‘나흘거리’로 거듭 추위가 찾아들던 날씨를, 그러니까 이 나라 이 땅에 자동차가 많지 않고 공장 또한 적었으며 고속도로며 기차길이며 어마어마하게 뚫리지 않던 지난날 날씨를, 오늘날처럼 자동차에다가 공장에다가 비행기에다가 고속도로며 고속철도며 큰 아파트며 수두룩한 터전에서 무슨 사흘거리나 나흘거리를 찾겠습니까. 텔레비전 기상캐스터들은 三寒四溫을 주절주절 읊습니다. (4344.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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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25] PyeongChang 2018

 올림픽이나 월드컵이나 아시안게임 같은 큰 운동경기대회를 좋아할 분이 퍽 많다고 느낍니다. 나라밖에서 운동경기를 벌여 이기거나 메달을 목에 건다면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만, 운동경기를 하는 이들은 이기려고 날마다 땀을 흘렸으니까 이길 수 있고 메달을 딸 수 있어요. 그런데 이들 운동선수는 젊음이 지나가면 어쩌지요. 오직 경기 하나를 해서 이기거나 메달을 따는 훈련만 받은 한국땅 운동선수는 나중에 어쩌지요. 메달을 못 따도 좋으니, 운동은 운동대로 좋아하면서 살아가는 좋은 이웃이 되어야 하지는 않을까요. 또다시 ‘강원도 평창 겨울올림픽 끌어들이기’ 운동이 벌어집니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모이는 운동경기를 치르자면 경기장 새로 짓지 뭘 또 하지 하면서 돈을 어마어마하게 들이부어야 합니다. 돈을 들이붓는 만큼 새 일자리와 돈벌이가 생긴다는데, 이렇게 돈을 쏟아 돈을 버는 삶이란 얼마나 아름답거나 즐거울 삶이 될까요. 배드민턴이 꼭 올림픽 경기여야 할까요. 탁구가 반드시 올림픽 종목이어야 하나요. 겨울날 즐기는 놀이는 겨울날 누구나 흐뭇하게 즐기면 좋을 텐데요. 그러나 이 나라 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운동경기 지켜보면서 금메달 따기를 바라는 만큼, 평창이든 어디이든 겨울올림픽을 끌어들이기만 하면 기쁘다 여기겠지요. 그래, 한국사람 힘을 모으자는 “PyeongChang 2018”입니다. 아니, “평창 2018”이 아닌 “PyeongChang 2018”이로군요. (4344.2.1.불.ㅎㄲㅅㄱ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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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석하는 책읽기


 글을 쓰는 사람 가운데 ‘분석하면서’ 쓰는 사람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모저모 따지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아예 없지 않겠지요. 생각없는 글이란 쓸 수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작품분석’이나 ‘창작분석’이란 없습니다. 글읽기와 글쓰기가 있습니다. 글이란 글이지 작품이 아니요, 사진은 사진일 뿐 작품이 아닙니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치고 작품을 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름난 노래이건 대단한 노래이건 따지지 않습니다. 내 가슴에 사무치면서 혀로 감돌기에 부르는 노래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글쓴이 이름을 따질 까닭이 없습니다. 저처럼 우리 말글 다듬기 일을 하는 사람이야, 책을 읽으면서 이모저모 잘못 쓴 대목을 짚을 수 있으나, 저 또한 책을 읽을 때에는 그저 책을 읽습니다. ‘문장분석’ 따위를 할 수 없고, 할 까닭이 없으며, 이런 일을 하면 하루하루 아깝습니다.

 흔히들 ‘지면분석’을 하고 ‘지면연구’를 합니다. 사람들이 더욱 잘 들여다보도록 편집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편집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편집할 글이 있어야 편집을 합니다. 편집할 글이 없이 편집을 할 수 없습니다.

 편집이란 글고치기가 아닙니다. 편집이란 글쓴이 넋을 매만지는 일이 아닙니다. 서툰 글이든 돋보이는 글이든, 그저 이 글마다 어떠한 삶이 깃들었는가를 돌아보는 일이 편집입니다. 이 글이 실린 책을 읽을 때에 눈이 아프지 않도록 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한결 마음이 느긋하거나 사랑스럽도록 이끄는 편집입니다. 눈부시게 해야 할 편집이 아니고, 눈부셔야 할 편집이 아닙니다. 편집에 앞서 글부터, 눈부셔야 할 글이 아니요, 눈부실 까닭이 없는 글입니다. 삶을 담는 글이고, 삶을 엮는 편집입니다.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집은 집입니다. 디자인 건축품이 아닙니다. 디자인 작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고, 건축 작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살림집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살림집이면서 예쁘장하다면 좋을 수 있겠지요. 살림집이면서 예쁘장할 때에는 좋다 할 뿐, 더도 덜도 아닙니다. 살림집은 살림집답게 일구어야 해요.

 춤은 춤처럼 즐기는 춤입니다. 연극은 연극대로 즐기는 연극입니다. 글은 글맛이 나도록 쓰며 읽는 글입니다.

 시를 분석하며 읽을 수 없습니다. 그림책을 낱낱이 파헤치거나 따지면서 읽힐 수 없습니다. 만화책을 넘기면서 그림결이 몹시 엉성한 작품들은 퍽 껄끄럽기는 하지만, 껄끄러운 대로 줄거리와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처음부터 만화쟁이 한 사람 그림결이 빈틈없이 마무리될 수 없는 노릇이니까, 이런 대목은 술렁술렁 지나치려 합니다. 그런데, 참말 좋은 만화를 사랑스레 그리는 이들은 새내기 때이든 익숙내기 때이든 그림결이 아주 따사롭습니다. 투박할 때에는 투박한 대로 따사롭고, 보드라울 때에는 보드라운 대로 따사롭더군요.

 젊을 때에는 한껏 거칠거나 윽박지르듯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늙을 때에는 한결 차분하면서 쓰다듬듯이 글을 쓸 수 있습니다. 어느 때 어느 글이 더 훌륭하거나 낫다 여길 수 없습니다. 젊은이 글은 젊은이 글대로 좋고, 늙은이 글은 늙은이 글대로 좋습니다. 늙은이이면서 젊은이처럼 살아가면 이 글은 이 글대로 좋고, 젊은이이면서 애늙은이가 다 되었다면 애늙은이 글은 또 이러한 결대로 좋습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이기에, 다 다른 글을 다 다른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글은 짜거나 재거나 꿰어맞출 수 없습니다. 글은 오로지 즐길 뿐이요, 읽을 뿐입니다. 글은 오직 쓸 뿐이요, 나눌 뿐입니다. (4344.2.1.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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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를 찍다 - 사진작가 이광호의 쿠바 사진여행
이광호 지음 / 북하우스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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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배와 같다고 느끼는 사진을 찍으려면
 [찾아 읽는 사진책 16] 이광호, 《쿠바를 찍다》(북하우스,2006)


 서울예대 사진과를 나오고, 《노블레스》라는 잡지 사진기자로 일하고, 이탈리아 사진대학을 다녀오고, 서울 청담동에서 개인 스튜디오를 열었고, 계원조형예술대학교·청강문화산업대학교·서일대학교·송담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친다고 하는 이광호 님이 내놓은 사진책 《쿠바를 찍다》를 읽습니다. 사진학과를 다녀 사진기자가 된 다음, 사진 찍는 일터를 마련한 한편, 사진학과 강사(또는 교수)가 되어 사진을 가르치는 분이 내놓은 사진책입니다.

 책날개에 적힌 사진쟁이 해적이를 읽으면서 가만히 생각합니다. 이광호 님으로서는 어떤 사진을 왜 어떻게 얼마나 좋아하는가를 한 줄로도 읽지 못합니다. 다만, 이광호 님으로서는 무언가 끌리는 사진을 좋아하면서, 이렇게 끌리는 모습을 당신도 사진으로 담아서 나누고 싶어 한다고는 느낍니다.


- 아바나를 떠나기 하루 전 서점에 들렀다. 그리고 한 컷의 사진을 보게 되었다. 그저 우연이었다. 햇빛이 역광으로 들어오는 아바나의 골목 풍경을 잡아낸 컷이었다. 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134쪽)


 이광호 님은 “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 느낍니다. 이렇게 느끼는 일은 잘못이 아닙니다. 사진과를 나오거나 사진과를 다니거나 사진과에서 가르치는 수많은 사람들이 으레 이렇게 느끼거나 생각하니까요.

 그러나, 내 사진을 좋아하거나 사랑하자면 “아, 왜 나는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 하고 느낄 일이란 없습니다. “어, 이렇게 찍은 사진이 참 좋네.” 하고 느낄 뿐입니다. 나는 왜 이렇게 생각하지 못했을까가 아니라, 이야 이렇게 찍으니 참 좋구나 하고 느끼면 넉넉합니다.

 사진찍기란 사진읽기입니다. 내가 찍은 사진을 나부터 잘 읽어야 나 스스로 새롭게 사진을 찍지, 내가 애써 찍은 사진이 어떠한 사진인가를 옳게 읽지 못한다면, 제아무리 수십만 수백만 장에 이르는 새 사진을 찍는달지라도, 이 가운데 무엇이 알짜요 무엇이 빛이요 무엇이 껍데기요 무엇이 그늘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 다녀온 후 환상이 깨어진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뜨거운 애정을 가진 사람들의 훈훈한 입김이 아직도 나에게 남아 내 시간을 풍요하게 만들어 준다. (10쪽)


 ‘환상’이란 다녀오기 앞서도 품고 다녀온 다음에도 품습니다. ‘깨진 환상’은 다녀오기 앞서도 깨지고 다녀온 다음에도 깨집니다.

 삶은 환상이 아닙니다. 한자말로 하자면 ‘삶 = 현실’입니다. 나로서는 그곳에서 살아가지 않으면서 그곳 사람들이 ‘내 꿈에 나오는 모습’처럼 있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바랄 수 없다가 아니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내가 꿈으로 그리는 어떤 모습이 있으면, 내가 이러한 꿈처럼 내 터전에서 살아갈 노릇입니다. 남들보고 내 꿈으로 그리는 모습대로 살아가라고 바랄 수 없을 뿐더러 바라서는 안 됩니다.

 사진이란 삶찍기입니다. 내 둘레 사람들이건 내 모습이건 삶을 찍는 사진찍기라서, ‘사진찍기 = 삶찍기’입니다.

 앞서, 사진찍기에 앞서 사진읽기를 옳게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니까, ‘사진찍기 = 삶찍기 = 삶읽기’입니다. 삶읽기를 할 수 있으면 사진찍기를 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삶읽기 = 삶찍기 = 사진찍기’가 됩니다.

 내 삶을 읽고 내 둘레 사람들 삶을 읽어야, 비로소 내가 사진으로 무엇을 왜 어떻게 얼마나 찍고 싶어 하는가를 알아챕니다. 알아챈 다음에야 사진기를 쥐어들 수 있고, 알아채고서 사진기를 쥐어들면 내 앞에 마주하는 사람들이 나를 보며 빙긋 웃는다든지 스스럼없이 마주한다든지 거리끼지 않으며 얼싸안습니다. 사랑스러운 낯빛 몸짓이 사라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광호 님은 《쿠바를 찍다》에서 골목맥주 파는 사람들 앞에 놓인 자전거를 안 치우고 사진을 찍었다 하는데, 이광호 님이 스스로 자주 밝히는 대로 ‘말을 걸면서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면, “이봐, 사진 좀 멋나게 찍게 자전거 좀 살짝 옆으로 밀어 놓고 또 한 번 찍을래?” 하고 말을 걸면 됩니다. “사진기 앞이라고 그렇게 얼굴 굳히거나 딱딱하게 있지 말라구?” 하며 다시금 말을 걸면 돼요. 말걸기란, 인사말이나 허드렛말을 아무렇게나 읊는 일이 아니라, 내가 사진으로 담고픈 사람들하고 이곳 이때에 차분히 마주하면서 살가이 ‘이야기꽃’ 피우는 일입니다. ‘치즈!’나 ‘김치!’ 하고 외는 말조차 말걸기입니다.


- 내게 베네치아는 충격이었고 보는 것마다 취재거리였다. (28쪽)


 스스로 충격을 바라는 사람은 베네치아에서도 충격이요 보는 모습마다 취재거리이면서, 서울 사직동에서도 충격이며 보는 모습마다 취재거리입니다. 스스로 충격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강원도 양구 멧골짜기에서도 충격이고 보는 모습마다 취재거리입니다. 꼭 베네치아로 나아가야 충격이 되지 않아요. 내 가슴이 얼마나 ‘충격을 가슴에 안고파 하느냐’입니다. 내 눈길과 마음길이 얼마나 ‘취재거리를 알아채며 느끼려 하느냐’예요.

 이름난 배우만 사진 모델이 되란 법 없습니다. 새내기 배우 또한 사진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예쁘장한 여배우만 사진잡지 겉장을 채워야 하지 않습니다. 못생기면 어떻게 안 생기면 어떤가요.

 그러나 어떠한 사람을 놓고 잘생기니 못생기니 말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 제 삶과 제 낯과 제 꿈을 간직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낯과 삶과 꿈을 읽을 수 있어야 비로소 사람을 사귑니다. 지난날 《샘이 깊은 물》이라는 잡지에서 ‘이름 널리 판 모델 아닌 여느 살림꾼 아줌마’를 겉장으로 채운 넋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삶을 읽으며 사람을 사귀어야 바야흐로 ‘여행을 하면서 여행하며 만난 사람 모습 사진’을 찍습니다.


- 수선공도 그렇고 장소도 그렇고 구도가 마음에 들었다. 웃으며 한 컷 찍으려고 하니 얼굴을 굳히며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닌가. 약간은 당황스러웠지만 … 더 놀란 건 간단한 수선이니 신발 고치는 값을 받지 않겠다며 그냥 가라고 할 때였다. 그들의 자존심인 것인지, 사진을 찍을 때엔 돈을 내라더니 정작 신발은 그냥 고쳐 주다니. 재미있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억지로 1불을 내미니 그는 사진 포즈를 취해 주었다. (82쪽)


 쿠바에 한 달이나 머물렀으면서 《쿠바를 찍다》처럼 홀쭉한 사진책을 내놓는 일은 부끄럽습니다. 고작 한 달인가 하고 여길 수 있으나, 한 달이란 대단히 긴 나날입니다. 그렇다고 한 해나 두 해 머문다 해서 더 멋지거나 놀랍거나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찍지는 않아요. 하루나 이틀을 머문다 해서 더 모자라거나 어리숙하거나 못난 사진을 얻지는 않아요. 살짝 스쳐 지나간달지라도, 내가 내 가슴으로 무슨 사랑을 피워 올리는가에 따라 사진이 달라집니다. 딱 1초 겨를이 나서 1/30초로 사진 한 장 찰칵 찍을 수 있다 하더라도 아름답다 싶은 사진을 얻습니다.

 한 달이면 한 달이라는 나날을 놓고 하루에 사진책 한 권을 엮는 매무새로 서른 날치 사진 가운데 몇 장씩 뽑아 사진책 하나를 새삼스레 또 하나 일굴 만합니다. 그러면, 《쿠바를 찍다》는 쿠바에서 무엇을 찍었는지요. 쿠바 골목을 찍었는지요. 쿠바 사람들을 찍었는지요. 쿠바 바다를 찍었는지요. 쿠바 살림집을 찍었는지요.

 쿠바를 찍든 한국을 찍든 서울을 찍든 흐리멍덩하게 찍으면 사진이 아닙니다. 그냥 ‘찍기놀이’입니다. 찍기놀이를 했는데 ‘사진을 찍었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찍기놀이가 나쁜 일이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찍기놀이는 찍기놀이대로 즐겁습니다. 찍기놀이는 찍기놀이요, 사진찍기는 사진찍기인 줄을 옳게 가누어야 합니다.

 사진찍기는 사진읽기요, 삶읽기요 삶찍기라고 했습니다.

 찍기놀이는 찍기놀이입니다. 찍으며 노는 일입니다. 찍으며 노는 사람은 사진기를 쥔 나 혼자입니다. 나 혼자 여기도 다니고 저기도 다니면서 즐겁게 노는 찍기놀이입니다.

 찍기놀이로도 얼마든지 사진책을 낼 수 있습니다. 찍기놀이로 사진책을 내놓는 《두나's 도쿄놀이》나 《두나's 런던놀이》가 있습니다. 배두나 님 사진책은 처음부터 사진책이라고 여기지 않으며 내놓은 사진책이고, 스스로 사진이라 생각하지 않으며 즐긴 찍기놀이입니다.

 가볍다 해서 나쁠 까닭이 없고, 가볍기 때문에 더 좋을 까닭이 없습니다. 가벼운 찍기놀이는 말 그대로 가벼운 찍기놀이입니다.

 우리 집 서른두 달짜리 어린 딸아이도 날마다 찍기놀이를 합니다. 찍기놀이를 하다가는 아빠 사진기를 빼앗아서 제가 사진을 찍기도 합니다. 아이는 아이대로 아이 눈썰미에 따라 제 아버지랑 어머니를 마주하면서 부대끼는 ‘삶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느끼는 삶결 그대로 삶읽기를 합니다. 삶읽기가 그예 삶찍기인 사진찍기로 이어갑니다.


- 한 장 한 장의 사진이 소중한 것은 바로 그 순간 그 분위기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238쪽)


 사진쟁이 이광호 님은 보배와 같다고 느낄 사진을 찍으려 하는구나 싶습니다. 좋습니다. 누구는 찍기놀이를 하고, 누구는 보배사진을 얻으려 합니다. 누구는 살아가며 사진을 즐기고, 누구는 강단에서 사진 이론을 들려줍니다. 이렇게 해도 사진이고 저렇게 해도 사진인 한편, 이렇게 하니 그저 삶이고 저렇게 하니 그저 놀이입니다. 구태여 ‘사진 울타리’에 집어넣으려 할 까닭이 없습니다.

 《강운구 사진론》이라는 책에서 강운구 님이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이야기하는데, ‘예술을 하는 사람이 예술을 하면서 사진을 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사진이 아닌 예술을 하면서 예술을 굳이 사진이라고 말할 까닭이 없습니다. 찍기놀이를 하면 그냥 찍기놀이를 즐기면 될 뿐, 찍기놀이도 사진이라고 우길 까닭이 없습니다. 쿠바를 여행하면서 찍기놀이를 즐겼으면 찍기놀이를 즐겼을 뿐입니다. 그때그때 숱한 사람과 부대끼며 ‘이광호 님이 받은 느낌’을 사진으로 담고팠다면, ‘사진이라는 매체’를 쓰며 찍기놀이를 했을 뿐이지 ‘사진을 한’ 셈은 아닙니다. 쿠바를 여행한 나날을 글로 적거나 그림으로 그렸을 때에도 ‘쓰기놀이나 그리기놀이를 했다고 해야, 글쓰기를 했다거나 그림그리기를 했다고 할 수 없’어요.

 어쩌면, 이런 이야기가 좀 지나치다고 느낄 분이 있을까 궁금한데요, 하나도 지나친 이야기가 아닙니다. 쿠바사람은 쿠바라는 나라에서 ‘억지로 예술스러운 노래를 부르’거나 ‘일부러 예술스러운 집을 꾸미며 살지’ 않습니다. 그저 쿠바사람은 쿠바사람 삶을 즐깁니다. 쿠바사람이 쿠바사람대로 즐기는 삶을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아, 이것 참 예술이로구나.’ 하고 생각할 뿐입니다. 부에노 비스타 소셜 클럽이든 무엇이든, 이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해서 노래를 부르지, 예술이 되거나 작품이 되라며 노래를 부르지 않습니다. 좋아서 부르는 노래를 듣는 우리들이 ‘이 노래야말로 예술이라고!’ 하고 외친들 얼마나 부질없습니다. 정작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즐거이 춤추고 마시며 흐드러지는데.

 쿠바를 찍는 사진들은 어설피 “쿠바를 찍다”라 말해서는 안 됩니다. “쿠바에서 함께 놀았다”고 말해야지요. 아니, “쿠바에서 찍기놀이를 조금 맛보았다”고 말해야지요.

 삶을 읽지 않았으니 삶을 찍지 못하고, 삶을 찍지 못했으니 사진찍기라 할 수 없으며, 사진찍기를 할 수 없었으니 사진을 한 셈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진을 하고 싶어 이모저모 애쓰거나 땀을 흘린 삶입니다. 사진으로 걸어가고자 힘을 쏟고 마음을 바친 나날입니다. 부디, 이 땀과 발걸음을 예쁘게 돌아보면서 착하게 보듬어 주면 좋겠습니다. 이럴 때에 비로소 내 나름대로 내가 보배와 같다고 느끼는 사진 한 장을 얻습니다. 다른 사람이 좋다고 말해 줄 사진이 아니라, 내가 사랑하며 좋아할 사진 한 장을 얻어야 할 사진삶입니다. (4344.2.1.불.ㅎㄲㅅㄱ)


- 쿠바를 찍다 (이광호 사진·글,북하우스 펴냄,2006.7.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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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 받침 한 글자 사계절 저학년문고 42
김은영 지음, 김수현 그림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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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입으로 쓰고 마음으로 읽는 시
 [책읽기 삶읽기 38] 김은영, 《ㄹ받침 한 글자》



 (1) 동시 한 자락, 슬픈 얼굴


 나날이 ‘어른이 써서 어른하고 나누어 읽는 시’를 마주하기 힘들다 합니다만, 어른시를 쓰는 사람은 제법 있습니다. 예나 이제나 ‘어른이 써서 어린이하고 나누어 읽는 시’는 참으로 드물다 하는데, 참말 어린이시를 쓰는 사람은 몹시 적습니다.

 어린이가 즐기는 시는 어른이 쓰기도 하고, 어린이가 스스로 쓰기도 합니다. 어린이가 쓴 시를 문학으로 여겨 처음으로 갈무리하여 선보인 분은 이오덕 님입니다.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책은 오로지 어린이시로 이루어집니다.

 이오덕 님은 아이들이 ‘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아이들 스스로 살아가는 터전에서 아이들 스스로 생각하거나 느낀 이야기를 고스란히 적도록 도왔습니다. 말을 치레해야 문학이 아니요, 말을 꾸며야 일기가 아니며, 말을 덧발라야 재미나지 않음을 아이들이 깨닫도록 살폈습니다.

 문학이란 이야기입니다. 문학이란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면서 꿈꾸는 이야기이든, 살아가면서 부대낀 이야기이든, 문학이란 한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인 이야기입니다. 어린이한테는 어린이대로 어린이 눈높이에 따라 바라보거나 마주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있습니다. 이러한 나날을 어린이로서 어린이답게 글로 담으면 곧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른이 써서 어린이하고 나누기에 어린이문학이요, 어린이 스스로 써서 어린이 스스로 즐기기에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가 읽을 시는 말놀이로 쓸 수 없습니다. 시는 말놀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동화이든 소설이든 말놀이가 아닙니다. 말재주를 피운다 해서 문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말재주는 한낱 말재주입니다.


.. 설 쇠러 가네 / 친척들 만나러 가네 // 어서 가서 / 사촌들 보고 싶은데 // 길이 막혀 / 차들이 설설 기네 // 자동차에 / 날개가 달렸으면 좋겠네 ..  (설)


 동시책 《ㄹ받침 한 글자》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ㄹ받침으로 끝맺는 외글자 낱말을 글이름으로 삼아 짤막한 시를 잇달아 씁니다. 참 돋보이는 글이로구나 싶으나, 돋보인다뿐, 일부러 재미나게 쓰려고 하는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합니다. 너무도 뻔한 틀에 더없이 얽매인 생각에서 헤어나지 않습니다.

 자칫, ‘수수한 여느 삶’을 ‘흔한 삶’으로 잘못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한테 명절날 자가용 타고 ‘시골(고향)’로 가는 일이 수수한 여느 삶이라 해도 틀리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이러한 삶도 얼마든지 시로 적바림할 만하지요. 시로 잘 갈무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ㄹ받침 한 글자》에서 다루는 〈설〉이라는 동시는 얼마나 문학답거나 시다울까 궁금합니다. 꽉 막히는 고속도로에서 우리 집 자동차만 날개를 달면 무엇이 좋을까요. 왜 이 아이 어버이는 명절날 고속도로가 자가용으로 가득 막히는 줄 알면서 자가용을 끌고 나왔을까요. 시외버스나 기차를 탈 수 없었으려나요. 여느 때 여느 자리에서도 이처럼 자가용을 몰고 이리 다니고 저리 누비고 하겠지요. 요새 웬만한 집에는 다 있다는 자가용이라지만, 우리 집에는 자가용이 없고, 우리 집마냥 자가용 없는 가난한 살림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자가용으로 시골을 찾아가는 사람도 많을 터이나, 버스나 기차를 타고 찾아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껏 버스나 기차를 타고 시골로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도무지 찾아낼 길이 없습니다. 버스를 타거나 기차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시골집으로 찾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는 문학으로 태어나지를 못합니다. 문학하는 이들은 이러한 삶을 겪지도 않고 치르지도 않으니 모를 테고, 이와 같이 살아가는 사람은 문학을 하지 않으니 ‘수수한 여느 삶’이 문학으로 나오지 않겠지요.

 살아가는 자리에서 바라보는 만큼, 살아가는 자리가 어떠한가에 따라 글이 달라지고, 아이를 바라보는 눈매가 달라지며, 아이하고 나눌 수 있는 이야기 깊이 또한 달라집니다. ‘설설’ 기는 이 한 마디 말놀이 때문에 ‘설’이라는 낱말을 이렇게밖에 다루지 못하는 일은 슬픕니다.


.. 이순신 장군이 / 활시위를 당기네 // →→→→→ / →→→→→ // 적들이 쓰러지네 / 우리나라를 지켰네 ..  (활)


 시에 문자표를 넣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문자표도 얼마든지 알뜰살뜰 넣을 만합니다. 아무래도 아이들한테 읽히는 위인전에 나오는 이순신 장군이며, 왜놈이며, 나라사랑이며를 밝힐밖에 없는 제도권 학교 울타리인 터라, 〈활〉이라는 동시는 “우리나라를 지켰네” 같은 실마리 하나로 끝맺는구나 싶습니다.

 이 시가 잘못이라거나 어디가 틀린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이 시는 그저 슬픕니다. 틀에 박힌 생각을 틀에 박힌 짜임새로 선보일 뿐인데, 이러한 시를 시라고, 더욱이 동시라 할 수 있는지 알쏭달쏭합니다.

 어린이가 읽는 문학을 어른들께서는 너무 얕게 보거나 가볍게 보거나 섣불리 보지 않나 걱정스럽습니다. 어린이가 읽는 문학에 ‘이 문학을 빚는 어른들 삶과 넋과 꿈과 뜻과 빛과 얼과 살과 피와 뼈’가 고스란히 녹아들도록 애쓰는지 힘쓰는지 용쓰는지 근심스럽습니다.

 지난날 이오덕 님이 어린이시를 책으로 묶어 아름다운 문학임을 보여줄 때에도 익히 이야기하셨는데, 어린이문학은 어린이만 보는 문학이 아니라 어린이부터 모두 보는 문학입니다. 어린이부터 어른 누구나 즐기는 문학이 어린이문학입니다. 어린이시라면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누구나 즐기는 시입니다. 어린이문학을 다루는 글(평론)은 어른문학을 다루는 글하고 똑같이 써야 하며, ‘문학인가 아닌가’와 ‘문학다운가 문학답지 않은가’를 헤아려야 합니다.


.. 사슴아 / 사슴아 // 뿔이 예쁜 / 꽃사슴아 // 왜 뿔이 없니? / 누가 잘라 갔니? ..  (뿔)


 이 나라 들판이나 멧자락에는 들사슴이 없습니다. 들여우도 들늑대도 없습니다. 시골에서 가끔 마주하는 사슴들은 사슴우리에서 풀린 녀석들입니다. 한창 사슴고기가 유행처럼 퍼지던 때에 기르다가, 사슴고기 유행이 지나면서 돈벌이가 안 되어 문닫은 우리에서 사슴들이 굶어죽기 싫어 뛰쳐나온 녀석들이 새끼를 치고 퍼지며 조금 돌아다닙니다. 노루도 매한가지입니다. 다, 사람들이 고기며 가죽이며 뿔이며, 이렁저렁 쓰려고 우리에 가두어 키우던 녀석입니다. 가만히 보면 들짐승이 들짐승다이 살아갈 터전이란 한국에는 모조리 사라졌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몸피가 작아 먹이가 조금 적어도 괜찮다 싶은 짐승만 살아남지만, 이마저도 들과 멧자락에서 먹이를 얻기 힘들어 사람 사는 마을로 내려와야 합니다.

 문학이란, 이 가운데 시란, 또 어린이시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다룰 때에도 얼마든지 문학이요 시요 어린이시가 되지만, 겉훑기로 그친다면 참말 문학인지 시인지 어린이시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으면서, 눈에 안 보이는 마음과 생각을 살며시 실을 때에 비로소 문학이며 시이며 어린이시입니다. 사슴 머리에 난 뿔을 다루려는 〈뿔〉이라 한다면, 남자 어른들이 사타구니 힘을 기르겠다며 먹는다는 뿔만이 아니라, 사슴들 삶과 이 나라 자연 터전 삶을 함께 아우르면서 생각하여 짧은 글줄에 아름다이 담아내야 합니다. ‘자연보호를 하자. 휴지를 줍자.’ 같은 낡은 독재시대 계몽구호와 같은 글을 적어 놓고, 이러한 글이 시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2) 동시 두 자락, 보듬을 얼굴


 동시책 《ㄹ받침 한 글자》를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이 책에 실린 글을 우리 아이한테 읽힐 만한지 가만히 생각합니다. 굳이 이 책에 실린 글을 읽지 않아도 되겠다고 느끼지만, 꼭 세 가지 글은 찬찬히 읽어도 흐뭇하리라 생각합니다.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은 모두 시라 할 만하고도 하는데,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이란 둘레 어른한테서 배운 말을 어린이 스스로 짜고 맞추며 엮은 말입니다. 티없이 바라보거나 생각하는 어린이 말이라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티있으며 모난 어른들 말을 아이들이 삭이거나 걸러서 길어올린 말이라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린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말이 모두 시라기보다, 어른 스스로 얼마나 티없으며 아리땁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어린이 말이 시가 되기도 하지만, 그저 군소리가 되기도 합니다. 곧, 어른들 스스로 어른 입에서 터져나오도록 하는 말이 모두 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린이라서 시가 되고 어른이라서 시가 안 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든, 살아가는 결이 어떠한가에 따라 이이 말이 시가 되지만 엉터리가 되기도 합니다. 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나온 사람 입에서 터져나와야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대학교는커녕 중·고등학교 문턱을 못 밟은 사람 입에서 터져나와도, 이이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따라 얼마든지 문학이 됩니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자리에 있어야 어린이 삶을 잘 헤아리며 좋다 할 만한 시를 쓰지 않습니다. 학교하고는 담 쌓은 여느 아저씨일지라도, 이이 스스로 살아내는 하루하루가 아름다우면서 해맑을 때에는 이이 입에서 터져나오는 온갖 말이 고스란히 시이자 문학이자 어린이시입니다.

 글을 몰라 종이에 글을 적바림하지 못하더라도, 살아낸 나날이 아리따운 사람들은 입으로 글을 쓰고 입으로 문학을 합니다.


..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 / “홀몸이니 홀가분해.” 하시지만 /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집에 놀러 오셔요 // 홀로 사는 옆집 할머니 / “혼자 먹으니 입맛이 없어.” 하시면서 / 나물 반찬 들고 우리 집에 밥 먹으러 오셔요 ..  (홀)


 〈홀〉이라는 동시는 제법 눈여겨볼 만합니다. 홀로 사는 할머니 삶을 잘 짚습니다. 다만, 더 살가이 짚지는 못해 아쉽습니다. 이만큼 적바림한 동시로도 고맙습니다만, 이만큼 적바림하며 끝맺을 수는 없는 ‘홀’이 아닌가 싶습니다. 홀로 살아가는 나날을 ‘혼자 = 외롭다’로 못박아도 괜찮은지 궁금합니다. 할머니가 홀로 살아오기까지 걸어온 길과 홀로 살면서 부대낀 아픔과 홀로 살아내며 일구는 아름다움을 함께 드러낼 때에 비로소 〈홀〉이 마무리됩니다.


.. 나는 딸이야 / 엄마도 딸이었어 / 할머니도 딸이었어 // 나도 커서 / 딸 낳고 싶어 / 딸은 엄마가 되거든 ..  (딸)


 〈딸〉은 〈아들〉로 바꾸어도 똑같은 글과 글 얼개입니다. 세 딸을 보듬으며 세 여자 삶을 단출한 글월로 품었기에 퍽 좋구나 하고 느끼면서, 막상 ‘세 딸 세 여자’ 삶이란 무엇인지를 마지막 한 줄에서 다루지 못해 아쉽습니다. 초등학생쯤 되면 이제 아기말 ‘엄마’를 털고 ‘어머니’라 말해야 옳습니다만, 요새 사람들은 워낙 말을 말다이 못 쓰니 어쩔 수 없는 대목이고, 이보다 “딸은 엄마가 되거든”이라는 말마디에서는 미처 짚지 못하는 ‘어머니로 살아가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를 밝힐 한 마디를 넣으면 한결 빛날 동시로 다시 태어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엄마는 잠결에도 / 아기 숨결 느끼고 // 아기는 꿈결에도 / 엄마 살결 느끼고 ..  (결)


 잠든 아기 숨결을 느끼는 사람은 어버이입니다. 아이를 낳았대서 모두 어버이가 되지는 않아요. 아이를 낳기 앞서부터 작은 목숨씨를 사랑으로 보듬으며 사랑으로 기다린 끝에 사랑으로 낳아 사랑으로 기르는 이들이 어버이입니다.

 어버이는 아이 숨결뿐 아니라 손결과 마음결과 이야기결을 나란히 한몸 한마음이 되어 받아들입니다. 어버이 말결이 아이 말결이 되는 줄 몸으로 알고, 어버이 삶결이 아이 삶결로 이어가는 줄 마음으로 깨닫습니다. 아이가 먹도록 마련하여 차린 밥자리는 영양소를 아이 몸에 집어넣는 자리가 아니라, 어버이 손결이 담긴 목숨결을 따사로이 받아들이는 자리입니다.

 동시집 《ㄹ받침 한 글자》를 하나하나 따지면, 썩 괜찮다 여길 만한 동시일지라도 아쉬운 대목이 참 많이 보입니다. 그래도, 이렇게 아쉽다 할지라도 참으로 ‘수수한 여느 삶자리’를 톺아보면서 나누려는 매무새일 때에는 반갑습니다. 억지스런 말놀이가 아니라 살가운 삶나눔인 동시라는 옷을 입으면 고맙습니다.

 머리로 쓰는 시가 아니라 입으로 쓰는 시입니다. 머리로 읽는 시가 아니라 마음으로 읽는 시입니다. 머리로 빚는 말놀이가 아닙니다. 삶으로 일구는 이야기입니다. (4344.2.1.불.ㅎㄲㅅㄱ)


― ㄹ받침 한 글자 (김은영 글,김수현 그림,사계절 펴냄,2008.8.5./7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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