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일본사진가 - 사진시대총서 12
와따나베 쯔도무 / 해뜸 / 1992년 9월
평점 :
품절




 사진이란 얼마나 즐거운 놀이인가
 [찾아 읽는 사진책 17] 와따나베 쯔도무, 《현대일본사진가》(해뜸,1988)



 일본 사진쟁이가 일본 사진밭을 돌아보면서 쓴 《현대일본사진가》라는 책을 읽을 수 있는 일은 몹시 고마우며 반갑습니다. 저는 한국말만 할 줄 알기에, 일본책이나 미국책이나 독일책이나 네덜란드책이나 베트남책이 있달지라도 그림이나 사진만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이렇게 한국말로 옮겨서 내놓은 책이 있으면, 눈물을 흘리며 고맙다고 꾸벅 절을 합니다. 비록, 이 번역책들 번역 말투가 엉터리라 할는지라도 처음으로 글을 쓴 일본사람이나 미국사람이나 독일사람이나 네덜란드사람이나 베트남사람이 그네 나라 말투로 어떻게 이야기를 펼쳤는가를 마음속으로 그려 봅니다. 비록, 이 번역책들을 처음 쓴 그네 나라 사람하고 마주하면서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하더라도 눈빛과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듯이 책을 읽습니다.


- “과연 사진기를 메고 나서면 걷게 마련입니다. 나이가 먹으면 건강에 좋다는 그분의 표현이 내 가슴을 흐뭇하게 해 주었답니다. 여하튼 사진기란 별 게 아닙니다. 내가 생각한 것, 내가 본 것을 찍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때문에 사진은 즐거운 것입니다.” (아끼야마 료오지/68∼69쪽)


 그러나 이 나라 한국사람 가운데 《현대일본사진가》 같은 책을 즐거이 곁에 두면서 가슴으로 새길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현대일본사진가”가 아니라 “현대세계사진가”라든지 “현대유럽사진가”라든지 “현대미국사진가”라 하면 꽤나 사랑받으면서 읽힐 책이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참말, 한국 사진쟁이는 일본 사진쟁이와 사진밭을 너무 모를 뿐 아니라, 처음부터 살피지도 않고, 아예 들여다보지도 못합니다.

 수많은 ‘현대 한국 사진’은 ‘꽤 예전 일본 사진’에서 보던 모습들이곤 합니다. 만드는 사진이든 상업사진이든 예술사진이든 순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일본에서는 일찌감치 ‘다 해 본 사진’을 이제 와서 새로운 사진이라도 되는 듯이 하는 분이 꽤나 많습니다.

 일본에서 지난날 우리보다 먼저 했다 해서 오늘날 우리가 하는 사진이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거나 어리석을 수 없습니다. 더 따지면, 일본에 앞서 유럽사람과 미국사람이 일찍부터 사진을 해 왔고, 일본은 이러한 나라밖 사진을 보면서 바지런히 배웠을 테니까요.

 그러나, 일본과 한국은 다르며, 한국은 일본하고 대면 퍽 슬픕니다. 따르거나 배우거나 흉내내거나 고개숙이거나 어떻게 하거나 하든, 우리는 우리 길을 걸어야 합니다. 일본사람은 일본사람 길을 걷고 한국사람은 한국사람 길을 걸으면 돼요. 니콘 사진기를 쓰든 캐논 사진기를 쓰든 한국사람은 한국 사진길을 걸으면 됩니다. 콘탁스를 쓰든 라이카를 쓰든, 미국사람은 미국 사진길을 걸으면 됩니다.

 생각해 보면,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쟁이로서 사진길을 걷고, 사진기를 만드는 사람은 만듦쟁이로서 사진길을 걸으면 돼요. 고작 얇고 작은 유리 한 장이라지만, 한국에서는 유브이 필터 하나 만들지 못합니다. 기껏 얇고 작은 플라스틱 쪼가리 하나라지만, 한국에서는 후드 하나 만들지 못해요. 그렇다면, 일본 사진밭 만듦쟁이들은 처음부터 ‘잘 할 줄 알아’서 이렇게 사진기도 만들고 필터도 만들며 후드도 만들었을까요. 《현대일본사진가》에서 다루는 숱한 ‘1975년 무렵 현대 일본 사진쟁이’는 처음부터 ‘사진을 잘 찍을 줄 알아’서 이렇게 손꼽히는 사진쟁이로 떠받들리면서 사진말을 쏟아낼 수 있을까요.


- “부친이 돌아가셨기 때문에 슬퍼서 운다든가 연인에게 배신당하여 운다든가 바로 그런 때에 나타나는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는 수단이야말로 사진이 가장 유효하지 않을까요.” (아라끼 노브요시/105쪽)


 ‘아키야마 료지’ 같은 사진쟁이를 알 한국사람은 거의 없겠지요. ‘아라키 노부요시’ 같은 사진쟁이는 꽤나 잘 알 터이나, ‘기무라 이헤이’나 ‘토몬 켄’ 같은 사진쟁이를 아는 한국사람은 얼마나 되려나요. “과연 사진기를 메고 나서면 걷게 마련입니다”라 말하다가는 “사진은 즐거운 것입니다”라 말할 수 있는 한국 사진쟁이는 있기나 있으려나요.

 무거운 사진장비를 짊어지고 걷기만 하여도 ‘돋보이는 사진 작품 하나 건지지 못하는 사람’일지라도 ‘사진은 즐겁게 즐기는 셈이다’ 하고 말할 줄 아는 한국땅 사진쟁이나 사진비평가는 몇 사람쯤 있다 할 만한가요. 사진을 사진으로서 바라보고, 사진을 사진답게 다루며, 사진을 사진으로서 껴안다가는, 사진을 사진다이 사랑하는 사진쟁이나 사진비평가라고 스스로 밝힐 만한 사람은 누가 있다 할 만한지요.

 강운구도 있고 배병우도 있고 주명덕도 있겠지요. 임응식도 있고 이해선도 있고 이명동도 있겠지요. 김중만도 있고 조세현도 있고 조선희도 있겠지요. 그런데 사진이란 무엇인가요. 그러면 사진이란 어떤 삶인가요. 그래 사진하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 “만일 내가 이데올로기상으로 그분의 영향을 받았다면 사진기를 무기로 좌익운동에 참가했었는지 모르지, 하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가 않고 그저 서민과 더불어 생활한다는 것뿐이었어 … 피사체가 잘 들어와 주었다는 것은 아주 좋은 조건이었어. 대상이 잘 들어와 주지 않으면, 잘못되면, 찍는 사람의 악만 남게 하니까. 내게는 그것이 잘 들어와 주었다는 말이지. 지금은 사진기의 성능이 너무 좋아져서 오히려 상대적으로 잘 들어오지 않게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겠지.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지금 사람들은 피사체를 사진기에 넣는 노력이 좀 부족한 것 같아.” (기무라 이헤이/205, 210쪽)


 아이를 돌보며 집살림을 도맡는 애 아빠 삶은 아주 고단합니다.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집안 치우며 아이랑 놀아 주며 설거지랑 빨래로 하루가 저물다 보면, 내가 도무지 뭘 하는 사람인지 알 노릇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수많은 애 엄마는 제 이름을 잊거나 잃으면서 스스로 살림꾼인지 애보개인지 밥어미인지조차 모르면서 살아갑니다.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똥구멍으로 들어가는지조차 모르면서 지냅니다. 나이가 먹는지 주는지 잊으면서 복닥입니다. 손바닥에 꾸덕살이 박였는지 하얀손이 까만손이 되었는지 살피지 못하면서 뒹굽니다.

 사진이란 누가 하는 일입니까. 사진이란 뭘 하는 예술입니까. 사진은 어디에서 부리는 멋입니까. 사진은 어떤 눈썰미로 펼치는 사랑입니까.

 일흔을 앞둔 아버지는 설날 제사상에서 잔씻이를 하다가 불쑥 일어나서 절을 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이 절을 안 하고 멀뚱멀뚱 하니까 왜 절을 않느냐고 외려 묻습니다. 살짝 말이 없다가 작은아버지가 젓가락을 고르지 않았다고 말하니, 아버지는 살며시 생각하다가, 어 하면서 깜빡 했다고 이야기합니다. 스무 해쯤 앞서 차례상을 떠올리고 서른 해쯤 앞서 제사상을 되새깁니다. 그무렵 이런 잘잘못이 생기면 어떤 불벼락이 여기저기서 떨어졌는지 곱씹습니다. 하나둘 나이를 먹는 어른들과 아이들을 헤아립니다. 어른들은 자꾸자꾸 잘못을 저지르고,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어른이기 앞서 젊은이였던 사람들은 차츰 늙은이로 바뀌고, 아이이기 앞서 갓난쟁이였던 사람들은 차츰 젊은이로 달라집니다.

 사진이란 왜 즐기는 놀이인가요. 사진이란 어떻게 나누는 삶인가요. 사진은 누구랑 어깨동무하는 손잡기인가요. 사진은 어떤 손길로 뻗어서 마주하는 믿음인가요.


- 최근의 젊은 세대의 우수한 사진가들은 사진가라기보다는 표현자라고 말하는 것이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된다 … 필자를 본 그는 나를 붙잡고 이처럼 중대한 역사적 사건을 사진기로 기록하지 못하고 있는 자기가 과연 사진가냐고 한탄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는 하도 분해서 눈물까지 흘리던 것을 필자는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당시 겨우 주목을 끌게 되던 시절이라곤 하지만, 나또리 요오노스께의 ‘일본공방’을 그만두었던 가난한 도몬 껜은 한 대의 사진기조차 갖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 그는 일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다. 일본인의 마음의 원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 그의 언동으로부터 스며나온다 ..  (도몬 껜/252, 253, 155쪽)


 한때, 한국땅 글쟁이들은 너나없이 ‘쉼표 마침표’를 글월 아무 데에나 불쑥불쑥 집어넣곤 했습니다. 갑자기 이런 바람이 불어 너도 나도 이렇게 해야만 글이 되거나 문학이 되는 줄 여기곤 했습니다. 이제, 이 바람은 간곳없이 사라졌고, 이제는 온갖 치레하는 군말을 붙여야 글이 되거나 문학이 되는 줄 여깁니다. 갖은 영어와 온갖 고사성어를 끼워야 글이 되는듯 문학이 되는듯 잘못 압니다. 글쓰기를 다루는 책이 수없이 쏟아지는데, 막상 글재주 부리는 이야기만 넘칠 뿐, 사람들마다 다 다른 삶을 글로 여미는 즐거움을 나누려 하는 글쓰기 책은 좀처럼 안 보입니다.

 사진하는 사람들한테 도움이 되겠다며 적바림하는 ‘사진 길잡이책’이 하나둘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막상 쉰 예순 일흔 여든 늙은이가 함께 즐길 만한 ‘사진 길잡이책’은 눈에 안 뜨입니다. 어린이와 푸름이가 즐기며 맞아들일 ‘사진 길잡이책’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쉰 예순 일흔 여든 늙은이한테 ‘어르신들 이제부터 즐기면 되걸랑요?’ 하면서 사진을 즐기는 매무새와 넋을 보여주는 ‘사진 이야기책’은 여태껏 한 권조차 안 나옵니다. 어린이와 푸름이한테 ‘이봐 이봐 너희야말로 이 멋진 삶을 즐기면서 사진도 함께 즐기자고?’ 하면서 사진을 나누는 몸가짐과 얼을 선보이는 ‘사진 이야기책’ 또한 이제껏 한 권이 안 나옵니다.

 그래도, 사진은 사진입니다. 사진쟁이가 사진을 사진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사진 ‘작품’으로 껴안든, 사진비평가가 사진을 사진으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사진 ‘논문’만 쓰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사진을 찍고 보여주며 즐기는 나날을 누립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진이고, 이야기열매를 먹는 사진이며, 이야기뿌리를 내리는 사진입니다. 이야기나무와 같이 우람하며 푸른 사진입니다. 이야기씨앗과 같이 꿈을 꾸며 반가운 사진입니다. 추운 겨울날에도 나무마다 새눈이 소담스레 자라나듯, 아직까지도 썰렁하며 메마른 한국땅 사진밭이라 할 터이나, 이 땅 한국에서도 틀림없이 골골샅샅 구석구석 온갖 자리에서 조용히 사진밭을 일구며 사진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4344.2.3.물.ㅎㄲㅅㄱ)


― 현대일본사진가 (와따나베 쯔도무渡邊 勉 씀,홍순태 옮김,해뜸 펴냄,198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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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대와 책읽기


 한국땅에서 남자로 태어난 사람은 누구나 군대를 가야 한다. 군대가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서 남자는 군대를 안 갈 수 없는 나라 한국이다. 군대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배우거나 길들면서 ‘살인 병기가 되는 훈련’을 받는 곳인데, 평화를 사랑하든 아끼든 좋아하든 군대에 안 갈 길이란 없다. 그토록 끔찍한 군대를 무시무시하게 키워 온누리 곳곳에서 전쟁을 일으키면서 돈과 권력을 움켜쥐는 미국조차 군대는 ‘남자가 반드시 억지로 끌려가야 하는 곳’이 아니다. 그런데 막상 ‘고요한 아침 나라’라는 허울을 내세우는 이 나라에서는 푸르디푸른 넋이 총칼 훈련에 여러 해 길들어야 하는 곳을 나와야 ‘한 남자가 된다’느니 ‘한 사람이 된다’느니 하는 말을 떠벌이기까지 한다.

 돈이나 이름이나 힘을 써서 군대를 가지 않는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은 나쁘다. 군대로 끌려가야 하는 돈없고 이름없으며 힘없는 사람들한테 아주 크나크게 잘못을 저지르는 셈이다.

 그런데,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있는 사람은 왜 군대에 안 갈까?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없는 사람은 왜 군대에 끌려갈까?

 왜 있는 사람은 있는 대로 군대에 안 가려 하는가. 군대에서 보내는 나날이 그네들한테 도움이 된다면 군대에 안 갈 까닭이 있는가. 군대를 다녀와서 ‘한 남자가 되’고 ‘한 사람이 된’다면 군대에 안 갈 까닭이 있는가.

 나쁜 꼼수를 써서 군대 그물을 벗어나는 이들은 몹시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들이다. 이들은, 저희한테 있는 돈과 이름과 힘을 써서 ‘이 나라 모든 사람이 군대라는 곳에 끌려가지 않도록’ 애써야 옳다. 아니, 이 나라 이 땅에서 군대를 없애야 마땅하다.

 한입으로는 ‘나라 지키기’를 해야 한다고 외치면서, 정작 스스로 군대를 안 가거나 요리조리 빠져나오려고 한다면, 이는 얼마나 두동진 모습인가. 이들은 스스로 알게 모르게 ‘군대 = 나라 지키기’가 아닌 줄 아니까 군대에 안 간다. ‘군대 = 나라 지키기’가 아니라 ‘군대 = 권력 지키기’이다. ‘군대 = 권력 지키기’이기 때문에, 있는 사람들은 군대에 가지 않으려 하면서, 없는 사람들은 군대에 끌려가도록 몰아붙이고, 저희들 있는 사람 권력을 지키도록 길들이려 한다. 없는 사람들은 군대에 끌려가서 길들며 주눅들고 짓눌리면서 ‘군대 = 나라 지키기’라는 거짓말을 달달 외우고야 만다.

 군대는 사람을 바보로 만들 뿐 아니라 살인무기로 만든다. 군대에서는 ‘사람이 사람다이 살면서 사람됨을 갖추도록’ 이끄는 책을 읽히지 않는다. 군대라는 곳은 ‘사람이 사람다이 살도록 이끄는 아름다운 책’을 모조리 불온도서로 삼아야 한다. 군대를 지켜서 권력을 지키려 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착하고 참다우며 고운 마음을 건사하도록 하는 책’은 온통 ‘나쁜 빨갱이 책’이라는 꼬리표를 달아 불태우려 할밖에 없다. 총알받이로 써먹어야 할 군인들이 ‘생각하는 사람’이 된다면, 군대 밑뿌리를 알아채면서 캐내기 때문에, 군대는 젊은 남자가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놓아 주지 않는다. 군대는, 군인으로 끌려가는 젊은 사내들이 ‘젊은 기운과 넋’을 엉뚱한 데에 쏟아부으면서 ‘여자를 성욕 노리개’로 삼는 틀에 가두려 한다.

 군대는 권력 지키기를 하면서 가부장제를 튼튼히 닦아 세운다. 군대를 다녀왔대서 가산점을 받으려 하는 남자들은 아주 불쌍하다. 군대 때문에 삶과 넋과 말이 엉망진창이 되었는데, 어줍잖은 가산점이란 무슨 값을 하는가. 잃어버린 나날은 돌이킬 수 없다. 잃은 젊음과 아름다움은 돈 몇 푼으로 갚을 수 없다. 회사나 공공기관에 들어갈 때에 ‘군 가산점’을 매기는 일이란 아주 어처구니없다. 그러나 회사나 공공기관은 사람이 사람다이 일하는 곳이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더 빨리 벌어들이려 하는 곳이기 때문에 군 가산점을 줄밖에 없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재주를 길들이는 곳을 다녀왔는데 군 가산점을 준다니, 그야말로 터무니없다. 가산점이란 아주 부질없으나, 굳이 가산점을 주어야 한다면 ‘아이를 낳은 어머니’한테 주어야 하고, ‘살림을 꾸린 사람’한테 주어야 하며, ‘내 둘레 이웃하고 사랑과 믿음을 나눈 사람’한테 주어야 한다. 자격증이 있대서 가산점을 줄 까닭이 없다. 자격증이란 기술 증명서이지, 삶을 가꾸는 슬기가 아니다. 그렇지만, 회사나 공공기관은 삶을 가꾸는 슬기를 빛내어 아름다운 터전을 보듬는 일터가 아니기 때문에 군복무와 자격증을 높이 살밖에 없다. 이는 정치밭이나 경제밭에서 똑같이 여기는 대목이요, 공직자나 정치꾼들한테 ‘군대를 나왔느냐 안 나왔느냐’를 따져 묻는 바보스러운 물음이나 살피도록 내몰고 만다.

 한국 남자는 군대에 끌려가기 때문에 책을 못 읽는다. 한국 남자는 군대에서 살인무기가 되도록 길드는 나머지 책하고 등을 돌린다. 한국 남자는 군대라는 틀거리에 몸을 맞추는 버릇을 털지 못하면서 회사원이 되거나 남편이 되기 때문에 책과 깊이 사귀는 사랑을 깨우치지 못한다.

 군대가 있는 나라에서는 책이 책이 되기 어렵다. 군대를 북돋우는 나라에서는 책을 책다이 일구기 힘들다. 군대에 얽매이는 나라에서는 책으로 삶을 이야기하는 빛줄기를 누리지 못한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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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집 아이들


 지난 한가위에도 작은집 아이들을 만나지 못하고, 올 설에도 작은집 아이들을 만나지 못한다. 퍽 여러 해 작은집 아이들을 못 만났다고 느낀다. 작은집 아이들 이름을 떠올리면서, 이 아이들 나이가 몇 살이었는가 하고 곱씹는데, 큰애가 중학생쯤 아닐까 했으나, 작은어머니 말씀을 들으니 큰애가 고3이요 작은애가 중3이라 한다. 설에도 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동네 동무를 만나서 논다는데, 이 아이들은 큰아버지 댁에 발길을 해 본 지 꽤 되었다. 올 설에는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모처럼 함께 찾아왔다. 막내 작은집 큰애는 스물여섯, 작은애는 스물넷. 못 본 지 여러 해 지났던 만큼 이렇게 숙숙 크는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막내 작은집 작은애는 고2인가 고3때 마지막으로 보고 이렇게 보았으니 얼마만인가. 제사상을 차리고 치우는 동안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일손을 제법 거든다. 이 아이들은 알까. 저희들이 그동안 제사상 차리고 치울 때에 일손을 거의 안 도왔는 줄. 이제 이렇게 알뜰히 손길을 나누어 즐거이 도와주는 줄 깨달을까. 그러나 막내 작은집 아이들도 제사밥을 큰어머니가 어떻게 마련해서 차려 놓은 줄을 알지는 못한다. 만두를 먹고 떡을 먹고 고기를 먹고 나물을 먹고 지짐이를 먹고 닭을 먹고 하지만, 이 모든 제사밥을 밥상에 올려놓기까지 며칠에 걸쳐 몇 시간을 들여 한 땀 두 땀 사랑을 쏟았는지를 알 수는 없다.

 작은집 아이들이 보고 싶다. 작은집 아이들이 ㅅ대학교이든 서울에 있는 대학교이든 철썩 붙는 일도 좋다고 생각한다. 올해에 붙을는지 모르고 이듬해에 붙을는지 모른다. 그만 자꾸자꾸 떨어질 수도 있겠지. 대학생이 된 다음에는 명절마실을 할까. 대학생이 되고 난 다음 할 명절마실 때에는 작은집 아이들은 이 집에서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무엇을 즐기거나 무엇을 느끼려나.

 나는 내가 남자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나날을 썩 좋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로 태어나서 옆지기를 만나 아이를 낳고 살아오는 나날이면서, 이렇게 명절날 쉴새없이 씩씩하게 갖은 집일을 함께 나누어 할 수 있기에 기쁘며 신난다. 내가 여자이면서 집일을 이렇게 한다면 으레 ‘아주 마땅하다’고 여길 테지만, 내가 남자이면서 집일을 이렇게 할 때에는 참말 ‘아주 고맙다’고 여기는데, 작은집 아이들이 남자이면서 명절날 안 온다든지 명절날 아무것도 안 하며 가만히 텔레비전만 본다든지 한다면 몹시 못마땅할 터이나, 여자이면서 명절날 안 오거나 그저 텔레비전만 본다든지 하는 일은 그닥 못마땅하지 않을 뿐더러 괜찮은데, 함께 저희 어머니하고 부엌일도 하고 다른 잔일을 거들 때에는 더없이 어여쁘다고 느낀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에 앞서 사람이고, 아이이니까. 대학생이 되기 앞서 사람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고, 지식인이나 비즈니스맨이나 공무원이 되기 앞서에도 사람이 되어야 할 우리들이니까. 작은집 아이들이 똑똑한 사람이 되기보다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비손을 올린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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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38] 물짜기

 설을 맞이해서 아이를 데리고 할머니랑 할아버지 사는 집으로 찾아갑니다. 집안일을 얼추 마무리짓고 가려 했으나, 이러다가는 너무 늦어질까 싶어 빨래감은 그냥 들고 가서 눈치껏 쉴 때에 하자고 생각합니다. 할머니 할아버지 댁에서는 물이 세 차례 얼어 콘크리트까지 깨서 물을 녹였답니다. 물이 다시 얼지 않도록 씻는방에 꽤 세게 물을 틀어놓으셨기에 이 물로 손빨래를 할까 생각하는데, “그냥 세탁기 돌리지?” 하고 말씀하셔서 빨래하는 기계를 써 보기로 합니다. 빨래하는 기계에는 ‘세탁·헹굼·탈수……’ 같은 말이 적힙니다.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구나. 빨래하는 빨래틀이나 빨래기계나 빨래통이 아닌, 세탁하는 세탁기니까 세탁이라고 적겠구나.’ 저녁나절, 아이가 입던 겉옷도 빨래하자고 생각하며, 모두들 쉬며 텔레비전을 보는 때에 신나게 빨아서 널어 놓습니다. 어머니가 보시고는 “탈수라도 하지?” 하십니다. “그럴까요? 물이라도 짤까요?” 씻는방에서 손으로 더 짠 다음 빨래통에 넣습니다. ‘탈수’ 단추를 누릅니다. 스무 해 훨씬 앞서는 집에 짤순이가 있었기에 으레 ‘물짜기’를 말했지만, 이제 ‘세탁기’ ‘탈수’ 단추가 있는 만큼, 어머니 말씨는 ‘탈수’로 굳어집니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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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와 책읽기


 설을 맞아 막내 작은집 아이들이 함께 왔습니다. 여러 해 만에 보는 막내 작은집 아이들은 스물여섯과 스물넷. 젊음이 한껏 무르익는 나이인 아이들이지만 우리 집 아기한테는 처음 마주하는 고모, 오촌 고모. 큰 오촌 고모는 큰댁에 와서 맨 처음으로 하는 일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르는 개 두 마리 구경하기. 많이 따뜻해진 날씨이지만 쌀쌀한 시골 날씨요, 해가 져서 어두운데에도 바깥에서 퍽 오랫동안 개하고 놉니다. 집에서 개를 기르기도 한다지만 개를 퍽 좋아하는군요. 생각해 보면,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모처럼 찾아가는 집에 있을 책시렁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즐길 테고,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술벗을 찾아 술상을 차릴 테며, 연속극을 좋아하는 사람은 텔레비전 앞에 도란도란 모여 앉을 테지요.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곳에서 다 다른 삶으로 다 다른 좋아하는 일과 놀이를 붙잡습니다. (4344.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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