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항 님과 진보집권플랜


 김규항 님이 〈한겨레〉라는 신문에 “좀더 양식 있게”라는 글을 실었단다. 이 글에서 오연호 님과 조국 님이 낸 책이름 《진보집권플랜》을 걸고 넘어진다. 걸고 넘어질 수밖에 없는 책이름이니 마땅히 걸고 넘어져야 한다. 나는 이런 엉터리 이름은 아예 걸고 넘어질 값이나 뜻이나 보람이 없다고 느꼈다. 누리신문 〈오마이뉴스〉는 처음부터 진보신문도 좌파신문도 개혁신문도 민주신문도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보수신문이나 우파신문이나 수구신문이나 짝퉁신문이나 상업신문도 아니다. 그냥 ‘서울 지식인 신문’쯤이라고 하면 될까. 김규항 님은 오연호 님이나 조국 님을 일컬어 ‘개혁적인 중산층 엘리트’라고 하지만, ‘개혁적’과 ‘엘리트’라는 낱말은 걸맞지 않다. ‘중산층’ 하나는 걸맞는다고 느낀다. 이명박 정권을 나무라고 노무현 정권을 추켜세운대서 개혁이지 않다. 무엇을 나무라고 무엇을 추켜세우는가를 돌아보면서 개혁이 참다운 개혁인가 아닌가를 살펴야 한다. 어떤 삶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삶바라기’가 참으로 개혁다운가 아닌가를 돌아보아야 한다.

 생각해 보면, 모든 부질없는 말놀이는 다들 ‘서울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느낀다. 서울에 몰려들어 서울에서 오글오글 권력다툼 이름다툼 돈다툼을 하니까 불거지는구나 싶다.

 가만히 보면 ‘진보 집권’이든 ‘개혁 집권’이든 ‘민주 집권’이든 걸맞지 않다. ‘서울 집권’일 뿐이다. 서울에서 서울시장이나 서울에서 정치하는 사람들 몸짓 발짓 손짓에 따라 춤을 춘다. 큰 틀에서 볼 수 있다면, 조선일보이든 한겨레이든 중앙일보이든 경향신문이든 온통 ‘서울신문’이다. 매일경제이든 파이낸셜뉴스이든 오로지 ‘서울신문’이다. 서울에서 정치하고 장사하며 문화하고 철학하는 사람들 이야기만 다루는 신문들이다.

 기자와 지식인과 교수와 운동가와 시민단체가 ‘서울 아닌 한국땅’에서 ‘서울사람 아닌 지역사람’으로서 살아간다면, 진보집권플랜처럼 껍데기만 잘 씌운 빈수레 이야기는 나올 까닭이 없을 뿐 아니라, 이런 책을 옳게 못 읽는 사람 또한 없으리라 생각한다.

 김규항 님은 서울 또는 서울 둘레에서 살아가지만 서울바라기가 아니다. 이리하여, 진보집권플랜 같은 이름과 책과 속살을 이럭저럭 옳게 짚거나 읽는다. 서울 또는 서울 둘레에서 안 살더라도 서울바라기와 같은 삶매무새라면 진보집권플랜이 뒤집어쓴 껍데기를 알아채지 못한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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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을 잘 읽어 주는 사람


 책을 잘 읽어 주는 사람은 꼭 있다. 사진을 잘 헤아리는 사람 또한 반드시 있다. 그리고, 책을 잘 못 읽거나 사진을 엉뚱하게 헤아리는 사람은 늘 있다.

 내가 쓴 글을 잘 읽어 주기에 이이를 고맙게 여겨야 하는가. 내가 찍은 사진을 옳게 헤아리기에 이녁을 살가이 마주해야 하는가. 내가 쓴 글을 잘 못 읽었기에 이이를 불쌍히 생각해야 하는가. 내가 찍은 사진을 엉터리로 살피기에 이녁하고 등을 돌려야 하는가.

 사람들은 누구나 스스로 살아온 결에 따라 사람을 본다. 머리에 든 지식으로 사람을 보려 한다면, 이 사람은 그동안 지식을 머리에 가득가득 쌓는 삶을 꾸렸다는 소리이다. 주머니에 든 돈으로 사람을 재려 한다면, 이 사람은 이제껏 주머니에 돈을 그득그득 채우는 삶을 일구었다는 뜻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매무새가 아닌 매무새로 사람을 맞이하거나 마주하거나 맞아들이지 못한다. 스스로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은 착하게 이웃이나 동무를 사귄다. 스스로 올바로 살아가는 사람은 올바르게 이웃이나 동무를 사귄다. 스스로 참다이 살아가는 사람은 참답게 이웃이나 동무를 사귄다.

 사람은 삶으로 보아야지 얼굴이나 몸매나 옷차림으로 볼 수 없다. 사람은 사랑으로 만나야지 주먹이나 주머니나 주민등록증으로 볼 수 없다. 사람은 그저 사람으로 사귄다. 사람 아닌 이름값으로 사귈 수 있을까. 나 스스로 이름값으로 사람을 사귈 때에는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 또한 이름값으로 다가올밖에 없다. 나부터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나한테 다가오는 사람이 다르다.

 내가 읽는 글이나 책이란 내가 즐기며 좋아하는 삶에 걸맞는 글이나 책이다. 훌륭하다는 책이나 거룩하다는 책이나 아름답다는 책이 아니라, 내가 즐기며 좋아하는 삶에 걸맞게 내가 읽을 글이나 책을 고르기 마련이다. 온누리에는 훌륭한 책이나 거룩한 책이나 아름다운 책은 없다. 즐기는 책과 좋아하는 책과 사랑하는 책이 있을 뿐이다.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고 싶은 길대로, 누구나 스스로 살아가는 오늘 하루대로, 누구나 스스로 꿈꾸거나 바라는 모양대로, 책 하나 골라서 장만하여 읽는다.

 글이나 책을 잘 읽어 주는 사람은 글이나 책에 앞서 사람을 잘 읽어 주고 사랑과 삶을 잘 읽어 주는 사람이다. 글이나 책을 잘 못 읽어 주는 사람이라면, 글이나 책에 앞서 사람과 사랑과 삶을 잘 못 읽어 주는 사람이다.

 마음이 맞는 벗이 고맙고, 나 스스로 마음이 맞는 좋은 벗으로 살아가고 싶다. 마음을 읽는 사람이 사랑스럽고, 나부터 마음을 읽는 사람으로서 사랑스럽고 싶다. 그렇지만 참 어수룩하다. 참 어수룩하니까 꿈을 꾸고, 꿈을 꾸는 대로 살아간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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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꿈치와 책읽기


 요사이 오른팔꿈치가 새삼스레 다시 저리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오른팔꿈치인데, 요사이 오른팔을 쓸 일이 많았을까. 아니면 몸이 힘들기에 오른팔꿈치도 다시금 찌릿찌릿 저리는가. 병원에 가 보면 금세 나을 오른팔꿈치일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병원에 간다 한들 달라질 수 없는 오른팔꿈치일는지 모른다. 그저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죽 안고 지내야 할 내 팔꿈치이고, 더 다치거나 도지지 않도록 알뜰히 건사해야 할 테지. 그런데 둘째를 낳아 두 아이를 데리고 다녀야 할 때면 이 팔꿈치는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아이를 안거나 업는다 해서 팔꿈치가 저리지는 않는다. 아마 손빨래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만, 손빨래를 안 한대서 오른팔꿈치가 좋아질 수 있다고 느끼지 않는다. 도서관 책을 나르거나 옮기거나 갈무리하지 않는대서 이 팔꿈치가 나아지겠는가. 사진기를 쥐지 않거나 글을 안 쓴다면 이 팔꿈치가 안 아플 수 있겠는가.

 아프니까 아픈 채 살아간다. 고단하니 고단한 채 지낸다. 배고프면 배고픈 대로 산다. 그렇지만 배고프면 살기 어려우니까 밥을 먹으려 애쓰고, 끼니를 이으려 용을 쓴다. 아픈 데는 틈틈이 주물러 주고, 아픈 옆지기 또한 틈틈이 몸 곳곳을 주물러 주면서, 집안을 조금이나마 치워야 한다. 몸이 고단하거나 지치더라도 아이하고 놀아 주거나 아이한테 그림책 읽는 틈을 내어야 한다.

 날마다 이래저래 밀리거나 쌓이는 일이 많다. 날마다 조금이기는 하고 모자라기는 하나 이럭저럭 하는 일도 있다. 밀리는 일이라 해서 서운해 할 까닭이 없다. 나는 내 몸과 마음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내 걸음걸이대로 걸어가면 된다. 할 수 있으면 하고, 할 수 없으면 못한다. 할 수 있으니 꾸준히 하고, 할 수 없으니 손을 놓을는지 모르지만, 할 수 없더라도 조금은 건드려 본다. 하다가 안 되기에 도와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꺼내고, 할 수 없기에 해 달라고 비손을 한다.

 내 몸 팔꿈치가 오롯하거나 튼튼하기만 하다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몸 여러 곳이 쑤시고 결리며 저리지만, 이렇게 몸 곳곳에서 아픈 소리를 내니까 서툰 꿈을 덜 꿀 수 있지 않느냐고 여긴다. 몸 곳곳에서 아픈 소리를 내니, 나보다 힘들 옆지기가 둘째를 더욱 사랑스레 보듬도록 옆에서 북돋우지 못하지만, 내 몸이 한결 튼튼했다면, 아픈 사람 아픈 몸이나 마음을 더 못 느끼거나 안 느낀 채 집 바깥으로만 맴돌려고 했으리라 본다. 팔꿈치가 아프니 멧골집에 고맙게 머물면서 이제껏 그러모은 책을 되읽고 다시 읽는다. (4344.2.11.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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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딸 - 닝 라오 타이타이의 자전적 삶의 기록
아이다 프루잇 지음, 설순봉 옮김 / 루덴스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스물여덟 해 만에 다시 나온 판인데, 안타깝게도 또 절판되고 마네요...) 

아이랑 옆지기랑 지내는 나날
― 아이다 프루잍·닝 라오 타이타이, 《중국의 딸》



- 책이름 : 중국의 딸
- 엮은이 : 아이다 프루잍
- 말한이 : 닝 라오 타이타이
- 옮긴이 : 설순봉
- 펴낸곳 : 청년사 (1980.4.12.)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열 달을 무럭무럭 자란 다음 바깥으로 나옵니다. 어머니 품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머니 피와 살과 뼈를 먹으면서 제 피와 살과 뼈를 이룹니다. 바깥으로 나온 아이는 처음 몇 해 동안 어머니젖을 빨아먹다가는, 이내 어머니가 마련하는 밥과 국과 물을 먹으면서 제 피와 살과 뼈를 이룹니다.

 밥과 국과 물은 어머니가 차리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차리기도 합니다. 차릴 수 있는 사람이 차리는 밥과 국과 물이니, 굳이 어머니가 차려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차리거나 언니나 오빠가 차리거나 다 좋은 밥과 국과 물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이를 품에 안을 때에 사랑으로 제 피와 살과 뼈를 내어줍니다. 아이한테 젖을 먹일 때에도 사랑으로 젖을 먹입니다. 아버지가 밥을 차리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사랑으로 밥을 차리고, 언니나 오빠가 밥을 차린다면 언니나 오빠도 언니대로 오빠대로 사랑을 담아 밥을 차리겠지요.

 사랑이 있지 않고서는 목숨을 품에 안지 못하고, 사랑이 가득하지 않고서야 밥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막상 밥상을 받는 사람들은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사랑을 제대로 못 느끼기 일쑤입니다. 사랑을 못 느끼면서 밥을 먹을 뿐 아니라, 밥을 먹으며 얻은 기운을 사랑으로 나누지 못하곤 합니다.

 나락 한 알도 목숨 깃든 사랑이요, 물고기 한 점도 목숨 깃든 사랑이며, 콩 한 알도 목숨 깃든 사랑인데다가, 돼지 목살 한 점도 목숨 깃든 사랑입니다. 목숨은 이곳에서 천천히 자라 저곳으로 천천히 옮습니다. 목숨은 이곳에서 예쁘게 꽃피우다가 다른 목숨한테 넘어가고, 목숨은 저곳에서 다른 목숨을 받아먹으며 어여삐 북돋웁니다. 홀로 자라는 목숨이란 없고, 홀로 크는 목숨 또한 없습니다. 홀로 자라는 목숨이 아닌 줄 안다면 사랑을 알고, 홀로 크는 목숨일 수 없는 줄 깨달을 때에 바야흐로 새 목숨을 품에 안습니다.


.. 부인은 그 사람을 데려다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부인은 내게서 많은 결함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유모, 우리 애들 봐줄 대 그렇게 더러운 옷을 입지 말아요.” “전 가난해서 옷 사입을 돈이 없으니 이거라도 입어야지요. 어린애를 보는 사람의 옷자락이 어떻게 늘 깨끗하기만 하겠어요?” 부인은 그때까지 몇 년 동안 내 옷을 가지고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마침내 부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부인의 방으로 갔다. “야들리 부인, 누군가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으신 것 같군요. 그래서 걸핏하면 나를 탓하는 것 아니겠어요? 마루에 발자국을 냈다고 공연한 탓을 하더니 이젠 멀쩡한 옷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니 말이요! 밀린 돈을 주세요. 나갈 테니까.” …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동안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딸이 남자를 집에 끌어들여 사람들의 입에 오른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무슨 일이 또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딸에게 철없는 짓을 했다고 나무랐고, 무엇 때문에 그 남자의 말을 들었느냐고 꾸짖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번지르르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쪽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마당에 좋은 말을 암만 하면 내 딸에게 무슨 이득이 있나? 남자에게는 처자식이 있었다. 열여섯 살과 열다섯 살 난 아들이 있고 또 어린애까지 딸려 있었다. 딸은 미련하게 행동한 것이다 ..  (275∼276쪽)


 중국사람 ‘닝 라오 타이타이’ 님은 할머니입니다. 중국에서 여느 살림집 딸아이로 태어나서 여느 살림집 어머니로 살다가 여느 살림집 할머니로 삶을 마감합니다. 더 잘날 구석이 없는 삶이면서 더 못날 구석이 없는 삶입니다. 여느 이웃처럼 즐거운 일 많고 여느 이웃처럼 고단한 일 많습니다. 아이들은 귀엽게 자라다가도 못나게 괘씸한 짓을 저지릅니다. 아이들은 웃음꽃을 잔뜩 선물하다가도 눈물열매를 가득 내놓습니다.

 서양사람 ‘아이다 프루잍’은 일본이 중국으로 쳐들어가며 깡그리 짓밟을 무렵 중국 할머니 한 사람한테서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제 나라로 돌아간 뒤로는 중국땅 여느 살림집 할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일본사람 총칼에 맞아 죽었을는지 모르며, 어쩌면 일본사람 총칼에도 살아남았을는지 모릅니다.

 애꿎게 죽은 사람도 많고 용하게 산 사람도 많습니다. 슬프게 살아남은 사람도 많고 조용히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다들 어찌저찌 살아갑니다. 모두들 이렁저렁 돕거나 해코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중국의 딸》에 나오는 ‘닝 라오 타이타이’ 할머님 삶이란 중국땅에서만 들을 만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한국땅이나 일본땅에서도 들을 법한 이야기요,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만 겪을 듯한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면서, 한국땅이나 일본땅 어디에서나 누구나 겪을 듯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 그 애는 언제 떠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애는 식모의 옷차림이나 농사짓는 여자의 차림을 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 안전할 거라고. 일본사람들은 농부를 잡아서 조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데같이 교육을 많이 받고 손이 고운 여자가 어떻게 농부의 차림을 하고 발각이 되지 않을 수 있을지? 나는 손녀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있다. 그 애 떠나는 걸 보고 싶지만 손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무도 그 애가 언제 떠나는지, 어디서 무얼 타고 가는지 알지 못했다. 눈물이 그 애 얼굴에, 그 애 어미 얼굴에, 내 얼굴에 흘러내렸다. 나는 손녀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 나 한 몸이라면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미 늙은 몸이다. 무슨 일이 생긴들 겁날 게 있겠는가? 나는 어린 손주 녀석들 때문에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나와 내 아들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 생명들을 위해 몸바쳐 일할 것이다 ..  (323∼324쪽)


 《중국의 딸》에 나오는 할머니 한 분은 당신 한삶을 이럭저럭 살아냈기에 서양사람한테든 이웃 중국사람한테든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즐겁든 괴롭든 한삶을 보낸 뒤에야 지난날을 가만히 곱씹으면서 내 하루하루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말괄돼지 첫째랑 올망졸망 살아가기에 이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를 나 스스로 되돌아보든 이웃한테 들려주든 합니다. 이 멧골집에서도 아픈 옆지기랑 툭탁툭탁 살 부비며 살아가니까 아픈 옆지기하고 부대끼는 나날을 나 스스로 되씹든 동무하고 이야기하든 합니다.

 죽으면 죽는 대로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될 테니 반드시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살면 사는 대로 이런 말꽃 저런 꿈열매 가꿀 테니까 가난하거나 고달프거나 꼭 슬프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딸》을 읽으며 오늘 하루 더 기운을 내면서 살자고 새삼스레 다짐합니다. 《중국의 딸》을 두고두고 곁에 놓으면서 나한테 주어진 나날 더 알뜰살뜰 일구면서 살자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4344.2.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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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30] 퀵view, books, 무비&스테이지

 인터넷에 방을 마련하는 사람들은 다 다릅니다. 다 다른 사람들은 다 달리 살아오며 다 달리 배운 말로 인터넷방을 꾸밉니다. 인터넷에 마련한 방을 일컬어 누리집이라 합니다. 인터넷으로 보는 신문은 인터넷신문, 곧 누리신문입니다. 이 누리집에 쓰는 말을 어떻게 가다듬으면 좋은가 하는 틀은 어김없이 있습니다. 그러나 굳이 이 틀에 맞추어야만 하지는 않고, 반드시 이 틀만 따라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저마다 다 다르게 살아오며 받아들인 말마디로 꾸미는 누리집에서 쓰는 말은 사람들하고 어떤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매무새로 쓰는 말이라 할까요. ‘뉴스’라는 말은 아주 흔히 쓰니 그렇다 할 만하겠지요. 그러면 ‘books’는 어떨까요. ‘뉴스’는 한글로 적으면서 ‘books’는 알파벳으로 적어야 할 까닭이 있나요. 아니 ‘새소식’으로 쓰기 싫어 ‘뉴스’로 쓴다지만, ‘책’이라 하기 싫어 ‘books’라 해야 할까요. 그런데 ‘무비&스테이지’는 왜 한글로 적었나요. ‘books’를 알파벳으로 적는다면 ‘무비&스테이지’도 알파벳으로 적어야지요. 적어도 모두 한글로는 적든지, 한글로만 적을 뿐 아니라, 옳고 바른 우리 말로 적도록 마음을 쏟아야지요. 그러나 ‘퀵view’라든지 ‘이미지프레시안’ 같은 말마디를 들여다보면, 이 인터넷방, 곧 이 누리집을 꾸민 분들이 얼마나 우리 말과 글을 생각하지 않거나 살피지 않는지를 알 만합니다. 누리집(누리신문) 이름이 ‘프레시안’도 아닌 ‘PRESSian’이니까 어쩔 수 없는 셈인지 궁금합니다만, 아무리 영어를 좋아한달지라도, 사람들이 인터넷을 켜서 들어와서 글을 읽고 사진을 볼 때에 제대로 찾아 알맞게 보도록 이끌자면, 게시판 이름이나 차림판 이름을 어떻게 붙여야 알맞으며 좋은가를 조금이나마 짚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4344.2.1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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