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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딸 - 닝 라오 타이타이의 자전적 삶의 기록
아이다 프루잇 지음, 설순봉 옮김 / 루덴스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스물여덟 해 만에 다시 나온 판인데, 안타깝게도 또 절판되고 마네요...)
아이랑 옆지기랑 지내는 나날
― 아이다 프루잍·닝 라오 타이타이, 《중국의 딸》
- 책이름 : 중국의 딸
- 엮은이 : 아이다 프루잍
- 말한이 : 닝 라오 타이타이
- 옮긴이 : 설순봉
- 펴낸곳 : 청년사 (1980.4.12.)
아이는 어머니 품에서 열 달을 무럭무럭 자란 다음 바깥으로 나옵니다. 어머니 품에서 자라는 아이는 어머니 피와 살과 뼈를 먹으면서 제 피와 살과 뼈를 이룹니다. 바깥으로 나온 아이는 처음 몇 해 동안 어머니젖을 빨아먹다가는, 이내 어머니가 마련하는 밥과 국과 물을 먹으면서 제 피와 살과 뼈를 이룹니다.
밥과 국과 물은 어머니가 차리기도 하지만 아버지가 차리기도 합니다. 차릴 수 있는 사람이 차리는 밥과 국과 물이니, 굳이 어머니가 차려야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차리거나 언니나 오빠가 차리거나 다 좋은 밥과 국과 물입니다.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아이를 품에 안을 때에 사랑으로 제 피와 살과 뼈를 내어줍니다. 아이한테 젖을 먹일 때에도 사랑으로 젖을 먹입니다. 아버지가 밥을 차리면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사랑으로 밥을 차리고, 언니나 오빠가 밥을 차린다면 언니나 오빠도 언니대로 오빠대로 사랑을 담아 밥을 차리겠지요.
사랑이 있지 않고서는 목숨을 품에 안지 못하고, 사랑이 가득하지 않고서야 밥을 차리지 못합니다.
그런데 막상 밥상을 받는 사람들은 밥상을 차리는 사람들 사랑을 제대로 못 느끼기 일쑤입니다. 사랑을 못 느끼면서 밥을 먹을 뿐 아니라, 밥을 먹으며 얻은 기운을 사랑으로 나누지 못하곤 합니다.
나락 한 알도 목숨 깃든 사랑이요, 물고기 한 점도 목숨 깃든 사랑이며, 콩 한 알도 목숨 깃든 사랑인데다가, 돼지 목살 한 점도 목숨 깃든 사랑입니다. 목숨은 이곳에서 천천히 자라 저곳으로 천천히 옮습니다. 목숨은 이곳에서 예쁘게 꽃피우다가 다른 목숨한테 넘어가고, 목숨은 저곳에서 다른 목숨을 받아먹으며 어여삐 북돋웁니다. 홀로 자라는 목숨이란 없고, 홀로 크는 목숨 또한 없습니다. 홀로 자라는 목숨이 아닌 줄 안다면 사랑을 알고, 홀로 크는 목숨일 수 없는 줄 깨달을 때에 바야흐로 새 목숨을 품에 안습니다.
.. 부인은 그 사람을 데려다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부인은 내게서 많은 결함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유모, 우리 애들 봐줄 대 그렇게 더러운 옷을 입지 말아요.” “전 가난해서 옷 사입을 돈이 없으니 이거라도 입어야지요. 어린애를 보는 사람의 옷자락이 어떻게 늘 깨끗하기만 하겠어요?” 부인은 그때까지 몇 년 동안 내 옷을 가지고 잔소리를 한 적이 없었다. 나는 마침내 부인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부인의 방으로 갔다. “야들리 부인, 누군가 마음에 정한 사람이 있으신 것 같군요. 그래서 걸핏하면 나를 탓하는 것 아니겠어요? 마루에 발자국을 냈다고 공연한 탓을 하더니 이젠 멀쩡한 옷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니 말이요! 밀린 돈을 주세요. 나갈 테니까.” …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동안 집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딸이 남자를 집에 끌어들여 사람들의 입에 오른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이상 무슨 일이 또 일어났는지는 알지 못했다. 나는 딸에게 철없는 짓을 했다고 나무랐고, 무엇 때문에 그 남자의 말을 들었느냐고 꾸짖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번지르르한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저쪽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마당에 좋은 말을 암만 하면 내 딸에게 무슨 이득이 있나? 남자에게는 처자식이 있었다. 열여섯 살과 열다섯 살 난 아들이 있고 또 어린애까지 딸려 있었다. 딸은 미련하게 행동한 것이다 .. (275∼276쪽)
중국사람 ‘닝 라오 타이타이’ 님은 할머니입니다. 중국에서 여느 살림집 딸아이로 태어나서 여느 살림집 어머니로 살다가 여느 살림집 할머니로 삶을 마감합니다. 더 잘날 구석이 없는 삶이면서 더 못날 구석이 없는 삶입니다. 여느 이웃처럼 즐거운 일 많고 여느 이웃처럼 고단한 일 많습니다. 아이들은 귀엽게 자라다가도 못나게 괘씸한 짓을 저지릅니다. 아이들은 웃음꽃을 잔뜩 선물하다가도 눈물열매를 가득 내놓습니다.
서양사람 ‘아이다 프루잍’은 일본이 중국으로 쳐들어가며 깡그리 짓밟을 무렵 중국 할머니 한 사람한테서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를 듣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제 나라로 돌아간 뒤로는 중국땅 여느 살림집 할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더 알지 못합니다. 어쩌면 일본사람 총칼에 맞아 죽었을는지 모르며, 어쩌면 일본사람 총칼에도 살아남았을는지 모릅니다.
애꿎게 죽은 사람도 많고 용하게 산 사람도 많습니다. 슬프게 살아남은 사람도 많고 조용히 죽은 사람도 많습니다. 다들 어찌저찌 살아갑니다. 모두들 이렁저렁 돕거나 해코지하면서 살아갑니다. 《중국의 딸》에 나오는 ‘닝 라오 타이타이’ 할머님 삶이란 중국땅에서만 들을 만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한국땅이나 일본땅에서도 들을 법한 이야기요, 중국사람이 중국땅에서만 겪을 듯한 이야기라 할 수 있으면서, 한국땅이나 일본땅 어디에서나 누구나 겪을 듯한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 그 애는 언제 떠나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 애는 식모의 옷차림이나 농사짓는 여자의 차림을 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 안전할 거라고. 일본사람들은 농부를 잡아서 조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수·데같이 교육을 많이 받고 손이 고운 여자가 어떻게 농부의 차림을 하고 발각이 되지 않을 수 있을지? 나는 손녀 때문에 두려움에 싸여 있다. 그 애 떠나는 걸 보고 싶지만 손녀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아무도 그 애가 언제 떠나는지, 어디서 무얼 타고 가는지 알지 못했다. 눈물이 그 애 얼굴에, 그 애 어미 얼굴에, 내 얼굴에 흘러내렸다. 나는 손녀 때문에 걱정을 하고 있다. 나 한 몸이라면 두려울 게 없다. 나는 이미 늙은 몸이다. 무슨 일이 생긴들 겁날 게 있겠는가? 나는 어린 손주 녀석들 때문에도 걱정이 된다. 하지만 나와 내 아들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이 생명들을 위해 몸바쳐 일할 것이다 .. (323∼324쪽)
《중국의 딸》에 나오는 할머니 한 분은 당신 한삶을 이럭저럭 살아냈기에 서양사람한테든 이웃 중국사람한테든 조곤조곤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즐겁든 괴롭든 한삶을 보낸 뒤에야 지난날을 가만히 곱씹으면서 내 하루하루를 들려줄 수 있습니다.
우리 집에서도 말괄돼지 첫째랑 올망졸망 살아가기에 이 아이하고 복닥이는 하루를 나 스스로 되돌아보든 이웃한테 들려주든 합니다. 이 멧골집에서도 아픈 옆지기랑 툭탁툭탁 살 부비며 살아가니까 아픈 옆지기하고 부대끼는 나날을 나 스스로 되씹든 동무하고 이야기하든 합니다.
죽으면 죽는 대로 흙으로 돌아가 거름이 될 테니 반드시 서운하지는 않습니다. 살면 사는 대로 이런 말꽃 저런 꿈열매 가꿀 테니까 가난하거나 고달프거나 꼭 슬프지는 않습니다.
《중국의 딸》을 읽으며 오늘 하루 더 기운을 내면서 살자고 새삼스레 다짐합니다. 《중국의 딸》을 두고두고 곁에 놓으면서 나한테 주어진 나날 더 알뜰살뜰 일구면서 살자고 다시금 생각합니다. (4344.2.10.나무.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