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책을
 [‘사진책 도서관’ 함께살기] 도서관일기 2011.3.18.



 나는 내가 좋아하는 책을 즐겁게 찾아 읽습니다. 나는 내가 즐겁게 찾아 읽은 책으로 내 도서관을 열었기 때문에, 내 도서관 책꽂이 짜임새는 오로지 내가 좋아하는 틀에 맞춥니다. 십진분류법이라든지 여느 사람들이 바라는 찾기법에 따라 책을 꽂지 않습니다. 더욱이, 십진분류법으로는 사진책을 갈무리하거나 가눌 수 없어요. 사진책을 알맞게 나눌 만한 나눔법이란 아직 없습니다.

 사람들이 내 도서관에 찾아와서 어느 책이 어디에 꽂혔는지 모르더라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 도서관이 지식 책터가 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때그때 보면서 마음에 드는 사랑스럽거나 아름다운 책을 알아보기를 바랍니다. 이름난 사람들 책만 보면 된다거나, 널리 알려진 책을 보면 즐겁다고 하는 틀이 슬픕니다. 왜 우리는 틀에 갇힌 넋으로 책을 만나려 하나요. 왜 우리는 아름다운 삶을 놓치며 딱딱한 틀에 따라 책을 사귀려 하지요.

 그러나 목록 없이 꾸리는 도서관이기 때문에, 나조차 내가 좋아하는 책이 어디에 꽂혔는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나는 그다지 똑똑한 사람이 아니라, 책이 그럭저럭 있던 때에는 목록 따위야 없어도 돼, 하고 생각했는데, 요즈음 들어서는 책꽂이마다 목록표를 붙여야 하나 생각해 보곤 합니다.

 목록표 붙일 힘이 있으면 새로운 책을 하나 더 사서 읽거나, 못 찾은 그 책을 다시 사서 보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보스러운 생각이고 바보스러운 삶인데, 거듭 생각하면, 참 바보스럽게 살아왔으니 내 돈으로 장만한 내 아까운 책으로 누구나 손으로 만지작거리며 읽을 수 있는 도서관을 열었겠지요.

 아직 많이 추워 도서관에서는 손이 얼어붙으니 책 보러 마실 오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아직 많이 추우니 도서관 책이나 짐을 살뜰히 치우지도 못했습니다. 삼월을 넘었는데 이렇게 손가락이 얼얼해도 되나 생각하지만, 시골이요 멧자락이니까 마땅한 노릇 아니겠느냐 하고 생각을 고쳐먹습니다.

 얼얼한 손가락으로 ‘일본 보육사(保育社)’에서 펴낸 손바닥책인 ‘color books’를 만지작거립니다. 이 조그마한 손바닥책을 예나 이제나 도서관 한켠 썩 잘 보이는 자리에 올려놓습니다. 알아보는 사람은 기쁘게 알아보고, 못 알아보는 사람은 쥐어서 내밀어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일본사람은 “빛깔 있는 책들”을 이처럼 앙증맞으며 값싸게 꾸준히 내놓으면서 일본 책밭을 일구었습니다. 이 책들은 책밭뿐 아니라 사진밭까지 알뜰히 일구는 밑거름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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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가는 말 45] 개수대

 부엌에서 밥그릇이나 수저를 씻는 물을 일컬어 ‘개수’라 합니다. 부엌에서 쓴 물이 흘러 나가도록 마련한 곳을 ‘수채’라 합니다. 그렇지만 어릴 적부터 이와 같은 말을 들은 적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씽크대(sink臺)’와 ‘하수도(下水道)’라는 낱말만 들었습니다. 어린 날부터 ‘싱크대’조차 아닌 ‘씽크대’와 ‘하수도’라는 낱말만 들었기 때문에, 나이 들어서도 으레 ‘씽크대’와 ‘하수도’라고만 말할 뿐, 달리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알지 못했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이 스물을 넘어 내 어버이 집에서 나와 홀로 살림하며 살아가던 때에 비로소 다른 사람들 입에서 ‘개수대’와 ‘수채구멍’이라는 낱말을 듣습니다. 처음으로 듣는 낱말이니 낯설었지만, 낯설다고 느끼기 앞서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온 사람인지 뿌리부터 궁금했습니다. 이제 나는 우리 집에서 우리 아이한테 ‘개수대’와 ‘수채구멍’이라는 말을 씁니다. 아이는 제 아버지 말을 귀담아들으며 “응, 개수대.”나 “응, 수채구멍.” 하고 되뇝니다. 오늘날에는 어릴 적부터 ‘개수대’나 ‘수채구멍’이라는 말을 들을 또래는 없을 테지만, 애 아버지인 나는 설거지를 개수대에서 하고 수채구멍에 개수를 쏟는걸요. (4344.3.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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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겨우 책읽기


 아이가 잠든다. 히유. 아니, 아이가 잠든다기보다 아빠가 잠든다.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쉬지 못하며 몰아친 아빠가 아이를 팔베개를 하면서 “아빠 좀 안아 줘.” 하고 말하면서 먼저 잠든다. 아이는 무척 졸립지만 더 놀고프다며 이불을 발로 걷어차다가는, “아빠 좀 안아 줘.” 하는 말에 얌전히 아빠를 안아 준다. 아빠는 조곤조곤 속삭인다. 하루 내내 말 안 들으며 땡깡쟁이로 놀던 아이였으나 이렇게 말을 잘 듣는 아이인걸, 하면서 이렇게 착한 아이는 둘도 없으리라 다시금 속삭인다. 그러고는 까무룩 잠들었다. 문득 팔이 몹시 저리며 뻣뻣하다. 팔이 저려서 잠에서 깬다. 아, 나도 이렇게 잠들고 말았네, 하고 혼잣말을 하며 팔을 살살 뺀다. 찌릿찌릿하다. 기저귀를 들고 아이한테 채우려 한다. 아이도 살짝 깨며 웅얼웅얼한다. 그러나 기저귀를 채우고 이불을 다시 덮으며 토닥토닥하니까 아이는 이내 잠든다. 이제부터 아빠도 홀가분하게 글쓰기를 하든 책읽기를 하든 할 수 있다. 오늘은 글쓰기를 거의 못했으니까 글을 좀 만진 다음에 집을 치우고, 책도 조금 읽다가는 다시 아이 옆에 누워서 깊디깊이 밤잠을 자야겠다. (4344.3.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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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값을 매기는 책읽기


 사람들이 값을 매깁니다. 사람들이 책방에 값을 매기고, 사람들이 책에 값을 매깁니다. 돈을 치러 사고파는 물건이라면 마땅히 값을 매겨야 합니다. 책마다 값이 얼마라고 붙어야 비로소 사고팔 만합니다.

 내 가슴을 건드리거나 움직이는 좋은 책을 만났다고 하는 이들은 ‘이 책 하나는 어떤 큰 돈을 받아도 팔지 않는다’라든지 ‘이 책 하나를 사는 돈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여깁니다. 사랑스럽거나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좋은 책은, 겉에 적힌 숫자(책값)가 부질없습니다.

 때때로 ‘책값이 아깝다’고 느끼는 책을 만나곤 합니다. 책이 책이 아니라 물건이 되고 말기에 책값이 아깝다고 느낍니다. 책이 책다울 때에는 나무를 베어 만든 종이에 글을 찍은 종이뭉텅이가 아닙니다. 책이 책다울 때에는 만 원이요 십만 원이요 백만 원이요 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책이 책다울 때에는 살아숨쉬는 이야기요 싱그럽거나 해맑거나 착한 삶을 북돋우는 길동무입니다.

 사람들이 값을 매깁니다. 별 몇 개를 잣대로 삼아, 이 찻집은 별 몇 개짜리이고, 저 헌책방은 별 몇을 붙일 만하다고 값을 매깁니다.

 저마다 다 다르게 느꼈을 테니, 누군가한테는 이 찻집이 참으로 아늑했을 테고, 누군가한테는 저 헌책방이 꽤 좋았을 테지요. 누군가한테는 이 찻집에서 내어준 차가 맛났을 테며, 누군가한테는 저 헌책방에서 사들인 헌책이 값싸며 훌륭했다고 느꼈을 테지요.

 그런데, 우리는 무엇에 값을 매길 수 있을까요. 우리는 왜 값을 매겨야 하나요. 내 아이가 오늘 얼마나 말썽을 피우는가를 값으로 매겨서 꾸짖거나 토닥여야 하는지요. 오늘 차린 밥상은 맛이 어떠한가를 별점으로 매겨야 하는지요. 하늘빛을, 바람세기를, 새봄 새싹을,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를 값으로 매기며 들여다보아야 할까요.

 사람한테는 값을 매길 수 없고, 사람이 하는 일에도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뭇 짐승한테는 값을 매길 수 없으며, 어떤 풀과 나무라 하더라도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책이든 헌책방이든 값을 매길 수 없습니다. 값을 매기려 한다면, 값을 매기는 사람부터 늘 값으로 매겨 돌아본다는 소리입니다. 책이 아닌 값을 보고, 이야기가 아닌 값을 느끼려 한다는 뜻입니다.

 나는 값있는 책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니, 나는 내가 만난 모든 책들에 저마다 다른 값이 깃든다고 느낍니다. 더 거룩한 값이라서 더 좋아하지 않습니다. 더 어설픈 값이라서 막 다룰 만하지 않습니다. 더 높은 값이니까 고이 아낄 까닭이 없고, 더 낮은 값이니까 불쏘시개로 써도 되지 않습니다. 책은 그저 책이고, 사람은 그예 사람입니다. (4344.3.21.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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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 우리 시대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삶과 사진 이야기
송수정 글, 강재훈 외 사진 / 포토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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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내 삶길에 즐거운 내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22] 송수정,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진을 얘기할 수 없(머리말)”다고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책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1권과 2권이 일곱 사람씩 나누어 보여주는 대목만 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게 둘로 나누었다 여길 수 있고, 열네 사람을 두 갈래로 바라보며 열네 가지 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을 느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한다는 열네 사람을 만난 송수정 님은 사진길을 걷는 사람들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하는가 궁금해 합니다. 송수정 님 스스로 궁금한 이야기를 물으며, 송수정 님 사진길을 북돋우고 싶어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송수정 님이 북돋우는 사진길을 따라 걸으면서 도움이 되는 길잡이말을 들을 수 있기도 할 테고, 나로서는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할 테지요.

 어느 쪽이든 즐겁고,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느 한 갈래 길만 사진길일 수 없으니까요. 어느 한 가지 길만 걸어야 비로소 사진길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조셉 쿠델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분석하며 ‘에이, 나는 왜 그들처럼 안 될까’ 고민했던 흔적이 그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성남훈/2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책 《유민의 땅》을 보면서 아쉽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구나 싶어 거듭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성남훈은 성남훈이지 성남훈이 살가도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살가도처럼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으로 살아야지 쿠델카처럼 살 수 없을 뿐더러 쿠델카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 값을 해야지, 브레송 같은 이름값을 얻거나 브레송처럼 돈을 벌기를 바라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 사진을 찍으며 제 사진길을 걷고, 성남훈 님은 성남훈 님 사진을 찍으며 성남훈 님 사진길을 걸으면 즐겁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길을 걸을 노릇이요, 교사는 교사 길을 걸을 노릇이며, 공무원은 공무원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방법론입니다. 어떤 대상이가 상황 앞에서 스스로가 용인하지 않는 촬영 방법으로는 도저히 찍을 수가 없습니다(서헌강/3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보면서 그닥 내키지 않던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내켜 하지 않는대서 서헌강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잘못 찍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좋아할 테지만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안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이 괜찮다 할 테지만, 누군가는 풋내기 티 풀풀 난다며 손가락질하겠지요.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 삶을 일구며 서헌강 님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서헌강 님한테 안승일이나 김기찬이 되라 할 수 없습니다. 서헌강 님이 강원도 깊은 멧골자락 멧골집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안승일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고, 서헌강 님이 서울 골목길을 찍을 때에 김기찬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이 살아온 결에 따라 당신 사진감을 찾아 당신 사진이야기를 길어올릴 당신 사진길을 걸어야 가장 아름다우면서 좋아요. 사진을 읽는 내가 다 다른 사진쟁이 다 다른 사진길을 느끼며 다 다른 맛과 멋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 찍는 이와 사진 즐기는 이가 나란히 아름다울 노릇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체에 걸러진 흙이 제일 고운 것처럼 나는 그냥 오랫동안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 주제로 잠깐씩 거쳐 간 작업들과 자연스럽게 차이점이 생기겠지요(류은규/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쭈뼛쭈뼛합니다.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흙을 체로 거를 때에 맨 나중에 나오는 흙이 가장 곱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운 흙은 맨 먼저 떨어집니다. 맨 나중에 떨어지며 걸러지는 흙은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입니다.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이 ‘곱게 걸러지기’까지 더디 걸리고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진길에서는 ‘가장 곱게 걸러내어 사진으로 담기 힘든 사진이야기’일수록 오래 걸릴 뿐입니다. 오래도록 더 많은 품과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손길을 들여 이룰 사진열매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금세 빛과 꿈과 뜻을 이루어 살가이 나눌 사진열매가 있어요.

 모든 사진이야기가 모두 오래오래 삭여야 잘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두 해만 사진을 찍든 한두 달만 사진을 찍든 하루이틀만 사진을 찍든 한두 시간만 사진을 찍든 일이 분만 사진을 찍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마주하며 보낸 삶에 걸맞게 사진이 태어납니다.

 수박은 수박만 해야 수박답습니다. 그런데 수박 가운데 참외 크기만 할지라도 수박맛을 다하는 수박이 있습니다. 살구는 살구만 해야 살구답습니다. 살구가 박만 해서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나무줄기조차 휘어진다면 살구랄 수 없어요.

 곡식에는 수수가 있고 기장이 있으며 보리와 벼와 율무와 조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곡식은 다 다른 대로 값을 하며 보람이 있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곰삭일 사진이면 오래도록 곰삭이는 대로 아름답고,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이면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으로서 아름답습니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여도, 그 아이들이 다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광각렌즈를 써서 힘있게 표현한 사진에 너무 길들어 있다 싶기도 하고(강재훈/84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싱긋 웃습니다. 사람들은 광각렌즈에도 길들고 표준렌즈에도 길들며 줌렌즈나 망원렌즈에도 길듭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사진을 즐기면 넉넉한데, 사진이 아닌 다른 대목에 자꾸 얽매이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찍기로 즐거우면 될 텐데, 자꾸만 다른 곁길로 샙니다.

 돈이 있어서 더 낫다 하는 사진장비를 쓴다면 나로서는 더 나은 사진을 낳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더 나은 사진을 얻은 내 삶 또한 더 낫다 할 수 있나요. 한 달에 2백만 원이 아닌 2천만 원을 벌어야 더 낫다는 삶을 꾸리겠습니까. 다달이 2천만 원을 훌쩍 넘어서는 2억 원을 번다면 아주 훌륭하다는 삶을 일구려나요. 아니, 한 달에 고작 2십만 원을 벌거나 2만 원을 번다면 아주 못난 삶으로 나뒹굴는지 궁금합니다.

 때에 따라 렌즈를 고르고, 쓰임새에 따라 사진기를 갖추며, 주머니라든지 내 몸에 맞추어 사진을 합니다. 안젤 아담스가 높은 산봉우리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대서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똑딱이를 주머니에 넣고 산에 올라 사진을 찍어도 됩니다. 안젤 아담스는 안젤 아담스대로 살며 안젤 아담스 사진을 찍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즐기며 내 사진 또한 즐깁니다.

 “나한테는 이야기가 우선이고, 잘 찍는 건 두 번째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는 사실 헛고민이에요. 걸어다니면서 생활 현장에서 사람과 직접 부딪히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제일 좋은 사진입니다. 나는 서양 사진을 약탈적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요. 주류가 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육신이 힘들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법이지요(노익상/10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습니다. 참말, 걸어다니지 않고서야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취재할 곳에 자가용을 몰아 씽하니 달려가면 더 빨리 더 금방 사진을 얻겠지요. 그러나 취재할 곳에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시골버스를 타고 갈 때에는, 내가 취재할 곳이 어떠하며 내가 취재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동네 어떤 터전에서 살아가는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쁘면 자가용을 몰 노릇이요, 바쁘지 않으면 걸을 노릇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대서 자동차에 탄 채로 사진기 단추만 우악스레 누를 수 없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몇 걸음 옮긴 다음 몇 초 동안이라도 가만히 멈추어 선 채로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지, 솜씨를 담지 않습니다. 솜씨를 보여주자면 인공지능 컴퓨터한테 맡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오로지 ‘사진에 담을 이야기 하나’입니다. 흔들리면 어떻고 빛이 어긋나면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있대서 사진인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림 한쪽이 다치면 어떻습니까. 나중에 손질해도 되고, 그저 그런 대로 잘 어울립니다. 찌개를 끓이는 데에 양념을 0.1그램 더 넣으면 맛이 확 바뀌기도 한다지만, 확 바뀌면 확 바뀌는 대로 좋고, 못 느끼면 못 느끼는 대로 좋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에 양념이나 건더기를 그램으로 하나하나 따질 수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며 쌀을 씻거나 밥그릇에 퍼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 목소리를 듣다 보면, 사람마다 생각과 삶이 이다지도 다르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 여러 사람 목소리 가운데 내 삶에 이바지한다 싶은 대목은 곱게 받아들이고, 아직 나로서는 지나친 목소리이구나 싶으면 다음에 다시 새기며, 어딘가 섣부르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는 목소리라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들고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작가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면은 참 좋은데 에너지가 없어요. 예전에 컬라와 흑백을 동시에 작업해 본 적 있는데, 그건 양쪽 작업을 다 버리는 일이에요. 한 가지에만 몰입해도 제대로 나오기 힘들어요(이갑철/12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진기 하나를 들고도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많은 렌즈를 갈아끼우든 렌즈 하나로 찍든, 참말 여기저기 마구 찍어대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런데, 참말 마구 찍어대는 듯 보이지만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작품을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장 두 장 꼼꼼히 골라서 사진기 단추를 아주 적게 누르며 훌륭한 사진을 엮는 분이 있으나, 아끼며 사진을 찍는다 하나 정작 뭘 찍는지 알 노릇이 없는 사람 또한 있어요.

 사진기를 여러 대 들든 한 대만 들든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장비를 쓰건 다를 턱이 없습니다.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를 써야 비로소 사진이 되지 않듯, 까망하양을 하건, 무지개빛을 하건,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은 으레 까망하양에만 기울어집니다. 무지개빛 사람들을 ‘무지개빛처럼 다 다른 모습과 삶이 어떠한가를 고스란히 읽’으며 ‘무지개빛으로 고우면서 다 다른 멋을 나누어 주’듯이 사진으로 담는 분이 아주 드뭅니다.

 까망하양이래서 무지개빛을 못 담지 않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얼마든지 하늘에 걸린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시냇물과 바닷물을 담을 수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까망하양으로만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 까망하양으로 모든 무지개빛을 다 다른 짙기와 옅기와 느낌과 결과 무늬를 담아내려고 온힘을 쏟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까망하양이 잘 안 된다 싶으면 무지개빛으로 건너가고, 무지개빛이 좀 어지럽다 싶으면 까망하양으로 오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똑같이 어지럽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한결같이 아름다워요.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문득 느낍니다. 어쩌면, 좀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말마디를 들었기 때문에 ‘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살아오며 겪거나 받아들인 사진말을 길어올립니다. 사진쟁이한테서 삶이 묻어난 이야기를 살뜰히 받아들여도 좋고, 나 스스로 내 사진길을 깨닫거나 찾으며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큐사진 열네 사람을 하늘처럼 우러르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다 다른 열네 사람 다 다른 사진길을 마주하면서,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사랑과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이야기꽃을 사진열매로 어떻게 영그는가를 느끼자는 책이겠지요.

 좋으면 좋은 대로 받아들여 북돋웁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맞아들여 다스립니다. 사진은 어차피 내가 찍는 내 삶입니다. 사진이란 곧 내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어깨동무하는 내 길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사진’ 아닌 ‘책’이든 ‘만화’이든 ‘진보’이든 ‘통일’이든 ‘민주’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글쓰기’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집안살림’이든 ‘밥벌이’이든 넣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읽을 수 있으면 삶을 읽을 수 있고, 삶을 읽을 수 있을 때에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똑바로 사랑스레 참답게 읽습니다. (4344.3.21.달.ㅎㄲㅅㄱ)


―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송수정 글,포토넷 기획,포토넷 펴냄,2009.3.1./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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