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 우리 시대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삶과 사진 이야기
송수정 글, 강재훈 외 사진 / 포토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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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내 삶길에 즐거운 내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22] 송수정,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진을 얘기할 수 없(머리말)”다고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책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1권과 2권이 일곱 사람씩 나누어 보여주는 대목만 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게 둘로 나누었다 여길 수 있고, 열네 사람을 두 갈래로 바라보며 열네 가지 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을 느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한다는 열네 사람을 만난 송수정 님은 사진길을 걷는 사람들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하는가 궁금해 합니다. 송수정 님 스스로 궁금한 이야기를 물으며, 송수정 님 사진길을 북돋우고 싶어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송수정 님이 북돋우는 사진길을 따라 걸으면서 도움이 되는 길잡이말을 들을 수 있기도 할 테고, 나로서는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할 테지요.

 어느 쪽이든 즐겁고,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느 한 갈래 길만 사진길일 수 없으니까요. 어느 한 가지 길만 걸어야 비로소 사진길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조셉 쿠델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분석하며 ‘에이, 나는 왜 그들처럼 안 될까’ 고민했던 흔적이 그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성남훈/2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책 《유민의 땅》을 보면서 아쉽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구나 싶어 거듭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성남훈은 성남훈이지 성남훈이 살가도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살가도처럼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으로 살아야지 쿠델카처럼 살 수 없을 뿐더러 쿠델카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 값을 해야지, 브레송 같은 이름값을 얻거나 브레송처럼 돈을 벌기를 바라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 사진을 찍으며 제 사진길을 걷고, 성남훈 님은 성남훈 님 사진을 찍으며 성남훈 님 사진길을 걸으면 즐겁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길을 걸을 노릇이요, 교사는 교사 길을 걸을 노릇이며, 공무원은 공무원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방법론입니다. 어떤 대상이가 상황 앞에서 스스로가 용인하지 않는 촬영 방법으로는 도저히 찍을 수가 없습니다(서헌강/3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보면서 그닥 내키지 않던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내켜 하지 않는대서 서헌강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잘못 찍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좋아할 테지만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안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이 괜찮다 할 테지만, 누군가는 풋내기 티 풀풀 난다며 손가락질하겠지요.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 삶을 일구며 서헌강 님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서헌강 님한테 안승일이나 김기찬이 되라 할 수 없습니다. 서헌강 님이 강원도 깊은 멧골자락 멧골집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안승일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고, 서헌강 님이 서울 골목길을 찍을 때에 김기찬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이 살아온 결에 따라 당신 사진감을 찾아 당신 사진이야기를 길어올릴 당신 사진길을 걸어야 가장 아름다우면서 좋아요. 사진을 읽는 내가 다 다른 사진쟁이 다 다른 사진길을 느끼며 다 다른 맛과 멋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 찍는 이와 사진 즐기는 이가 나란히 아름다울 노릇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체에 걸러진 흙이 제일 고운 것처럼 나는 그냥 오랫동안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 주제로 잠깐씩 거쳐 간 작업들과 자연스럽게 차이점이 생기겠지요(류은규/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쭈뼛쭈뼛합니다.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흙을 체로 거를 때에 맨 나중에 나오는 흙이 가장 곱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운 흙은 맨 먼저 떨어집니다. 맨 나중에 떨어지며 걸러지는 흙은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입니다.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이 ‘곱게 걸러지기’까지 더디 걸리고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진길에서는 ‘가장 곱게 걸러내어 사진으로 담기 힘든 사진이야기’일수록 오래 걸릴 뿐입니다. 오래도록 더 많은 품과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손길을 들여 이룰 사진열매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금세 빛과 꿈과 뜻을 이루어 살가이 나눌 사진열매가 있어요.

 모든 사진이야기가 모두 오래오래 삭여야 잘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두 해만 사진을 찍든 한두 달만 사진을 찍든 하루이틀만 사진을 찍든 한두 시간만 사진을 찍든 일이 분만 사진을 찍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마주하며 보낸 삶에 걸맞게 사진이 태어납니다.

 수박은 수박만 해야 수박답습니다. 그런데 수박 가운데 참외 크기만 할지라도 수박맛을 다하는 수박이 있습니다. 살구는 살구만 해야 살구답습니다. 살구가 박만 해서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나무줄기조차 휘어진다면 살구랄 수 없어요.

 곡식에는 수수가 있고 기장이 있으며 보리와 벼와 율무와 조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곡식은 다 다른 대로 값을 하며 보람이 있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곰삭일 사진이면 오래도록 곰삭이는 대로 아름답고,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이면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으로서 아름답습니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여도, 그 아이들이 다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광각렌즈를 써서 힘있게 표현한 사진에 너무 길들어 있다 싶기도 하고(강재훈/84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싱긋 웃습니다. 사람들은 광각렌즈에도 길들고 표준렌즈에도 길들며 줌렌즈나 망원렌즈에도 길듭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사진을 즐기면 넉넉한데, 사진이 아닌 다른 대목에 자꾸 얽매이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찍기로 즐거우면 될 텐데, 자꾸만 다른 곁길로 샙니다.

 돈이 있어서 더 낫다 하는 사진장비를 쓴다면 나로서는 더 나은 사진을 낳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더 나은 사진을 얻은 내 삶 또한 더 낫다 할 수 있나요. 한 달에 2백만 원이 아닌 2천만 원을 벌어야 더 낫다는 삶을 꾸리겠습니까. 다달이 2천만 원을 훌쩍 넘어서는 2억 원을 번다면 아주 훌륭하다는 삶을 일구려나요. 아니, 한 달에 고작 2십만 원을 벌거나 2만 원을 번다면 아주 못난 삶으로 나뒹굴는지 궁금합니다.

 때에 따라 렌즈를 고르고, 쓰임새에 따라 사진기를 갖추며, 주머니라든지 내 몸에 맞추어 사진을 합니다. 안젤 아담스가 높은 산봉우리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대서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똑딱이를 주머니에 넣고 산에 올라 사진을 찍어도 됩니다. 안젤 아담스는 안젤 아담스대로 살며 안젤 아담스 사진을 찍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즐기며 내 사진 또한 즐깁니다.

 “나한테는 이야기가 우선이고, 잘 찍는 건 두 번째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는 사실 헛고민이에요. 걸어다니면서 생활 현장에서 사람과 직접 부딪히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제일 좋은 사진입니다. 나는 서양 사진을 약탈적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요. 주류가 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육신이 힘들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법이지요(노익상/10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습니다. 참말, 걸어다니지 않고서야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취재할 곳에 자가용을 몰아 씽하니 달려가면 더 빨리 더 금방 사진을 얻겠지요. 그러나 취재할 곳에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시골버스를 타고 갈 때에는, 내가 취재할 곳이 어떠하며 내가 취재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동네 어떤 터전에서 살아가는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쁘면 자가용을 몰 노릇이요, 바쁘지 않으면 걸을 노릇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대서 자동차에 탄 채로 사진기 단추만 우악스레 누를 수 없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몇 걸음 옮긴 다음 몇 초 동안이라도 가만히 멈추어 선 채로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지, 솜씨를 담지 않습니다. 솜씨를 보여주자면 인공지능 컴퓨터한테 맡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오로지 ‘사진에 담을 이야기 하나’입니다. 흔들리면 어떻고 빛이 어긋나면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있대서 사진인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림 한쪽이 다치면 어떻습니까. 나중에 손질해도 되고, 그저 그런 대로 잘 어울립니다. 찌개를 끓이는 데에 양념을 0.1그램 더 넣으면 맛이 확 바뀌기도 한다지만, 확 바뀌면 확 바뀌는 대로 좋고, 못 느끼면 못 느끼는 대로 좋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에 양념이나 건더기를 그램으로 하나하나 따질 수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며 쌀을 씻거나 밥그릇에 퍼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 목소리를 듣다 보면, 사람마다 생각과 삶이 이다지도 다르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 여러 사람 목소리 가운데 내 삶에 이바지한다 싶은 대목은 곱게 받아들이고, 아직 나로서는 지나친 목소리이구나 싶으면 다음에 다시 새기며, 어딘가 섣부르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는 목소리라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들고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작가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면은 참 좋은데 에너지가 없어요. 예전에 컬라와 흑백을 동시에 작업해 본 적 있는데, 그건 양쪽 작업을 다 버리는 일이에요. 한 가지에만 몰입해도 제대로 나오기 힘들어요(이갑철/12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진기 하나를 들고도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많은 렌즈를 갈아끼우든 렌즈 하나로 찍든, 참말 여기저기 마구 찍어대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런데, 참말 마구 찍어대는 듯 보이지만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작품을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장 두 장 꼼꼼히 골라서 사진기 단추를 아주 적게 누르며 훌륭한 사진을 엮는 분이 있으나, 아끼며 사진을 찍는다 하나 정작 뭘 찍는지 알 노릇이 없는 사람 또한 있어요.

 사진기를 여러 대 들든 한 대만 들든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장비를 쓰건 다를 턱이 없습니다.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를 써야 비로소 사진이 되지 않듯, 까망하양을 하건, 무지개빛을 하건,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은 으레 까망하양에만 기울어집니다. 무지개빛 사람들을 ‘무지개빛처럼 다 다른 모습과 삶이 어떠한가를 고스란히 읽’으며 ‘무지개빛으로 고우면서 다 다른 멋을 나누어 주’듯이 사진으로 담는 분이 아주 드뭅니다.

 까망하양이래서 무지개빛을 못 담지 않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얼마든지 하늘에 걸린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시냇물과 바닷물을 담을 수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까망하양으로만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 까망하양으로 모든 무지개빛을 다 다른 짙기와 옅기와 느낌과 결과 무늬를 담아내려고 온힘을 쏟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까망하양이 잘 안 된다 싶으면 무지개빛으로 건너가고, 무지개빛이 좀 어지럽다 싶으면 까망하양으로 오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똑같이 어지럽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한결같이 아름다워요.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문득 느낍니다. 어쩌면, 좀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말마디를 들었기 때문에 ‘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살아오며 겪거나 받아들인 사진말을 길어올립니다. 사진쟁이한테서 삶이 묻어난 이야기를 살뜰히 받아들여도 좋고, 나 스스로 내 사진길을 깨닫거나 찾으며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큐사진 열네 사람을 하늘처럼 우러르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다 다른 열네 사람 다 다른 사진길을 마주하면서,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사랑과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이야기꽃을 사진열매로 어떻게 영그는가를 느끼자는 책이겠지요.

 좋으면 좋은 대로 받아들여 북돋웁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맞아들여 다스립니다. 사진은 어차피 내가 찍는 내 삶입니다. 사진이란 곧 내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어깨동무하는 내 길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사진’ 아닌 ‘책’이든 ‘만화’이든 ‘진보’이든 ‘통일’이든 ‘민주’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글쓰기’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집안살림’이든 ‘밥벌이’이든 넣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읽을 수 있으면 삶을 읽을 수 있고, 삶을 읽을 수 있을 때에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똑바로 사랑스레 참답게 읽습니다. (4344.3.21.달.ㅎㄲㅅㄱ)


―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송수정 글,포토넷 기획,포토넷 펴냄,2009.3.1./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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