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의 꽃
조현예 지음, 박태희 사진 / 안목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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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느낌이 사랑일 때에 바야흐로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28] 조현애·박태희, 《사막의 꽃》(안목,2011)


 나는 1998년에 사진찍기를 처음 배웠습니다. 사진읽기 또한 이때에 처음 배웠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던 나는 신문기자가 되는 길이 아니면 그저 신문배달만 하면서 먹고살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신문배달만큼 ‘쓰레기 안 만들면서 조용하고 착하게 땀흘려 일해서 살림을 꾸리는’ 좋은 일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런 제도권학교에서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느꼈지만 막상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둘레에 아무도 고등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 주며 힘을 북돋아 준 동무 또한 없었습니다.

 어영부영 고등학교를 마치고 1994년에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갔으나, 대학교 또한 고등학교와 다를 구석 없이 제도권학교였고, 대학생 선배라는 사람은 그닥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대학 교수라 해서 지식이나 지성이나 슬기나 아름다움을 건사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한 학기는 버티자고 다짐했지만, 한 학기를 버티면서도 대학교는 지나치게 비싼 돈을 받으며 참배움을 나누지 못한다고 깨달아 몹시 갑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학기에는 강의는 거의 안 듣고 도서관과 학교 앞 새책방과 서울 시내 여러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 울타리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1995년 가을에 스스로 영장을 받아 군대에 들어갑니다. 1997년 겨울에 군대에서 용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옵니다. 군대 가기 앞서 하던 신문배달을 잇습니다. 이제 대학교에는 자퇴서를 내고 싶지만 어머니가 한 해를 더 다녀 보고 네 마음대로 하라 말씀하셔서 한 해를 더 다니기로 하면서, ‘고졸자도 신문기자로 받아 준다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꾸는 꿈에 따라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듣기로 하고, 이때에 보도사진 강의를 듣습니다. 이무렵 한국외대와 중앙대에서 강사로 뛰던 허현주 님이 보도사진 강의를 했고, 허현주 님은 ‘사진찍기’와 함께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사진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찍기와 읽기와 쓰기, 여기에 듣기 한 가지까지 더했습니다.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 받고 태어난 아이가 듣기와 말하기와 읽기와 쓰기로 말과 글을 익히듯, 허현주 님 보도사진 강의는 네 가지를 고루 받아들이면서 ‘기계 같은 사진기자’가 아니라 ‘사람내음이 나는 사진쟁이’가 되도록 길동무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무렵 보도사진 강의를 듣는 사람 가운데 나만 혼자 사진기가 없어 쩔쩔매다가 1회용 사진기를 쓰다가, 또 망가진 싸구려 사진기 하나를 3만 원 주고 고쳐서 쓰다가, 나중에는 후배한테서 낡은 사진기 하나를 얻어 5만 원을 들여 고쳐서 쓰는 동안 ‘사진기는 목걸이로구나’ 하고 배웁니다. 또,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는 ‘사진이 보이’겠지만, 이렇게 보이는 사진에 사진쟁이가 담을 이야기란 곧 ‘내 사랑과 믿음’이요, 이리하여 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이 아닌 ‘내 사랑과 믿음이 깃든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안목,2011)을 펼칩니다. 글 하나와 사진 하나가 예쁘게 어우러진 사진책입니다. 참 오랜만에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아니, 참 오랜만에 ‘나라안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나라밖 예쁜 사진책은 수두룩하게 흔히 보지만, 나라안 예쁜 사진책은 더없이 드뭅니다.

 나라안 사진책들은 하나같이 조금 더 잘 팔리거나 한결 돋보이거나 더욱 이름값 높이려는 예술이나 작품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은 작품집이 아니요, 예술품이 아닙니다. 그저 사진책 하나입니다.

 조현애 님은 “나는 새벽 길을 좋아했다 / 자전거타기를 더 좋아했다 / 네게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2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고, 박태희 님은 새벽 길을 좋아하고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며 너한테 가는 길을 좋아하는 느낌을 당신 사랑과 믿음을 사뿐히 실어서 사진 하나로 보여줍니다.

 조현애 님은 다시 “나에게 네가 없다면 삶이 없다(26쪽).” 같은 글을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나한테 네가 없으면 내 삶이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당신 사랑과 믿음에 따라 사진 하나로 드러냅니다.

 조현애 님은 거듭 “뉴욕은 내 꿈을 대변하였으나 / 어느새 내 꿈을 잡아먹은 도시가 되어 버렸네 /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추위와 / 택시 드라이버, 트레비스의 고독을 기억하는 동안 / 가난한 예술 혼이 내 꿈을 지켜주었지만 / 지하철을 버리고 택시를 타고 차를 몰고 /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125쪽).” 같은 글을 울먹이며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사랑길과 믿음길 결을 찬찬히 어루만지면서 사진 하나를 넌지시 내밉니다.

 조현애 님은 새삼 “나도 널 초대해서 좋은 시간 갖고 싶다 / ‘네 목소린 참 정겹다’ 말해 주고 싶다(138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으며, 박태희 님은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님을 부르는 손짓과 목소리라 할 만한 사진을 하나 살그머니 내놓습니다.

 사진은 내 느낌입니다. 글은 내 느낌입니다. 그림은 내 느낌입니다. 노래와 춤과 연극과 영화 또한 내 느낌입니다.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청소하기와 아이돌보기 모두 내 느낌이에요. 논일과 밭일과 바닷일도 하나같이 내 느낌이에요.

 나는 둘레 아이들한테고 어른들한테고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요사이에 꽤 자주 합니다. 어린 날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한 이야기를 서른일곱 나이에 바야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열 살 안팎 어린이였던 내 지난날을 더듬으면, ‘네로가 그림을 좋아한’ 줄을 잘 떠올리지 못했어요. 아니,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프랑스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예쁘장한 네로와 아로아와 파트라슈 이야기쯤으로만 떠올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들여다보니, 또 위다 님이 쓴 원작소설 《플랜더스의 개》(비룡소,2004)를 읽으니, 이 얘기에서 네로가 그림을 얼마나 아끼거나 좋아하느냐는 대단히 큰 자리를 차지하더군요. 가난하고 학교 문턱은 밟은 적이 없으며 한겨울에도 양말과 장갑 없이 우유 나르기를 거든 네로는 ‘아로아를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지 못’해요. 네로는 스스로 그린 그림 가운데 어느 그림도 돈을 받고 누구한테 준 적이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아무런 그림 기법을 모르지만 네로가 품은 사랑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떠한 그림쟁이도 모르나, 오직 하나, 루벤스라는 사람이 어떠한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서 나누었는가를 되새기면서 네로는 네로라는 아이 가슴에서 피어나는 믿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네로가 본 그림은 루벤스 님이 그림 그린 한 점뿐이었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죽기 앞서 루벤스 님 다른 그림 두 점을 더 보았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이 사진책이 되자면 이와 같이 내 느낌, 곧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내 느낌이 사랑이며 믿음일 때에 사진책이 됩니다.

 글로 빚는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을 더 많이 담거나 정보를 한껏 싣는다 해서 문학책이나 인문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담아야 문학책이고, 믿음이 감돌아야 인문책입니다.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을 놓고, 요즈음 이분이 ‘친일작가’이니 아니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생계형 친일’이니 ‘친일이면 다 똑같은 친일’이니 하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을 놓고 친일이요 아니요 하고 읊는 이들 가운데 이원수 님 발자취를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든지,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부터 1981년에 구강암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어떠한 글을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려 했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1980년 전라도 광주 일을 병자리에서 먼 소식으로 들으면서 이제 더는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꼼짝도 못하면서 광주 이야기를 동화로 써서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싶은데 못할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안타깝다 읊조린 말마디를 곱씹으면서, 1981년 전두환 독재정권 사슬을 슬프게 바라보며 숨을 거둔 마지막길을 톺아보는 사람은 있기나 있을까요.

 나는 서정주 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기리는 시를 썼대서 서정주 님을 그닥 안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 시를 읽을 때에 내 가슴이 울렁이는 사랑이나 믿음이 딱히 없기 때문에 그닥 안 좋아합니다. 잘 썼다는 글이라든지 토박이말을 잘 살렸다는 글이라든지 이름값 높다는 사람 글이라든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수룩하게 쓰면 어떻습니까. 글에 사랑이 있어야 글이지요. 이름값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글에 믿음이 깃들어야 글이지요.

 사진작가로 이름이 드높아야 훌륭한 사진이지 않습니다. 사진마다 알알이 깃든 사랑이 있을 때에 바야흐로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사진 흐름을 뒤흔들거나 사진 역사를 새로 쓰도록 했다는 사진이래서 나한테까지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 눈물샘을 터뜨리면서 아름답거나, 내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아리따울 때에, 나는 비로소 이 하나를 사진이로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문학으로 한삶을 바친 이원수 님은 틀림없이 ‘친일시’를 썼으나 ‘친일작가’가 아닌 ‘어린이문학가’입니다. 한때 저지른 당신 잘못을 온삶을 바친 ‘어린이문학 한길 걷기’로 뉘우쳤어요. 왜냐하면, 이원수 님 동시나 동화나 수필이나 번역동화를 읽다 보면, 이분이 얼마나 사랑과 믿음을 당신 글에 녹여냈는지 느낄 수 있거든요.

 사진책 《사막의 꽃》을 거듭 되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자가용 모는 사람을 되게 싫어합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을 아주 미워합니다. 그러나, 차를 타야 할 때에는 차를 몰아야 하고, 저 또한 때때로 차를 얻어 타요. 자가용을 모느냐 안 모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떤 마음이고 어떤 삶이냐가 대수롭습니다. 조현애 님처럼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 하고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 목소리를 사진 하나로 예쁘게 담아서 울먹이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을 수 있다”고 피울음 나는 목소리로 외쳤는데,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을 곱게 어루만지는 글을 당신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날까지 예쁘게 적바림해 주었습니다. 예쁜 삶으로 예쁜 글을 쓰고, 예쁜 사랑으로 예쁜 사진을 빚습니다. (4344.4.15.쇠.ㅎㄲㅅㄱ)


― 사막의 꽃 (조현애 글,박태희 사진,안목 펴냄,2011.2.8./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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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용법 -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
정은숙 지음 / 마음산책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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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석 장 느낌글 008] 책 사용법


 《책 사용법》은 이 책을 펴낸 출판사 대표인 정은숙 님이 쓴 책으로, ‘한 편집자의 독서 분투기’라는 곁이름이 붙습니다. 정은숙 님은 232쪽에 이르는 책에서 도란도란 책이야기를 펼칩니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를 한 줄로 갈무리한다면, “책을 읽는 데 필요한 것은 미안한 말이지만 책과 시간밖에 없다(57쪽).”가 아닐까 싶습니다. 참말 그렇겠지요. 책을 읽으려면 책이 있어야 하고, 책을 펼칠 겨를이 있어야 해요.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쩐지 허전합니다. 책과 겨를이 있으면 누구나 책을 읽을 만할까요. 이 책을 죽 읽으며 어느 한 곳에도 밑줄을 긋지 못합니다. 정은숙 님은 당신이 읽은 여러 책에서 밑줄을 그었음직한 글월을 옮기는데, 옮긴 글에서도 그닥 밑줄 그을 만한 대목을 못 찾습니다. 나로서는 책을 읽을 때에 ‘책과 겨를’은 그리 대수롭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책을 읽을 때에 종이책이 없어도 책을 읽습니다. 빨래를 하면서도 책을 읽고 잠을 자면서도 책을 읽습니다. 아이를 안으면서 책을 읽고 쑥을 뜯으며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는다 할 때에는 지식이나 정보가 아니라 사랑과 믿음이 있을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돈이고 뭐고 없어도 책을 얼마든지 읽습니다. (4344.4.15.쇠.ㅎㄲㅅㄱ)

― 정은숙 씀, 마음산책 펴냄, 201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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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빨래삶이


 지난해 섣달부터 올 사월 첫머리까지 빨래삶이를 못했다. 집물을 못 쓰며 빨래를 다른 집에서 했기 때문이다. 넉 달 만에 빨래삶이를 할 수 있는 날을 맞이한다. 날은 따뜻하고 바람도 조용하다. 이런 날 이불도 함께 빨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침부터 여러 집일을 하느라 등허리가 쑤셔서 이불빨래는 엄두를 못 낸다. 다가오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둘째한테 쓸 새 기저귀를 삶으면서 이불빨래를 하나하나 할까 생각한다. 아무쪼록 토요일이나 일요일이 맑은 날씨이기를 바란다.

 나 혼자 살아가던 때에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딱히 즐기지 않았고, 둘이서 함께 살아가던 때에도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굳이 즐기지 않았다. 이레를 돌아보며 하루나 이틀쯤 느긋하게 쉰다 여길는지 모르나, 토요일이라서 밥을 굶어도 되거나 일요일이라서 손발을 안 씻고 자도 괜찮지는 않다. 나날이 밥을 먹고 날마다 새 빨래가 나온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날씨가 맑기를 바란다. 꽤 예전이라 할 내 스무 살 적에 신문배달을 하던 때라든지, 군대에 갔다 오고 난 뒤로 다시 신문배달을 하던 때에는 토요일 낮부터 일요일까지 비가 몰아서 오기를 비손했다. 왜냐하면 토요일 낮부터 일요일까지는 신문을 돌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신문을 돌리는 여느 날에 비가 내리면 신문비닐도 많이 써야 할 뿐더러, 비 맞으며 서너 시간씩 신문을 돌리는 일이 몹시 고되다.

 신문배달을 그만두고 홀살이를 하던 때라든지, 이제 딸아이 하나를 돌보며 둘째를 기다리는 내 삶에서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햇볕이 쨍쨍 내리쬐기를 빈다. 왜냐하면 이런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사람들이 어디 놀러다닌다든지 쉰다든지 하면서 나로서도 집일에 더 품과 땀과 겨를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오덕학교에서 아이들 가르치는 일도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없다. 아이들과 할 공부를 헤아리며 무슨 이야기를 나눌는지 생각하지 않으면서 집일에 더 마음을 기울일 수 있기에 꽤 홀가분하면서 느긋하다. 느긋하게 이불을 빨 수 있고, 홀가분하게 아이를 씻길 만하다.

 몇 시간씩 빨래삶이를 하거나 이불빨래를 하고 나서 마당에 빨래를 잔뜩 널어 놓는다. 잠자리에 까는 평상도 마당에 펼친다. 아이는 마당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아버지 집일을 거든다고 부산을 떤다. 등허리를 톡톡 토닥이면서 이제 좀 기다리면 될까 하고 마당에서 기지개를 켜다가는 걸상 하나를 비워 책 하나 들고 나와 해바라기를 하며 읽으려 하면, 아이도 걸상 하나에 있던 빨래를 옆으로 치우고 영차영차 올라와서 아버지 하는 양을 따라하려 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을 기다린다. 맑은 토요일과 밝은 일요일이 되기를 비손한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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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4.8. 

인천 중구 경동. 

 일부러 골목을 에돌아 다니면, 골목에서 조용히 보금자리와 먹이를 찾는 가녀린 짐승들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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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의 탄생 -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
최경봉 지음 / 책과함께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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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말은 아직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책읽기 삶읽기 50] 최경봉, 《우리말의 탄생》(책과함께,2005)


 (1) 한국사람·한국말·한국말사전


 한국사람은 한국말을 씁니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쓰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한국말사전을 들추어야 합니다. 한국사람으로서 내가 쓰는 말글이 얼마나 알맞거나 올바른가를 살펴야 하니까요.

 퍽 예전에는 한글학회 일꾼이 힘을 모아 한국어사전을 내놓았습니다. 오늘날에는 여러 학자나 대학교나 출판사나 국립국어원까지 한국어사전을 내놓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어버이들은 아이들한테 읽힐 국어사전을 애써 찾아서 쥐어 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여러 가지 국어사전을 어릴 적부터 곁에 한 권쯤 두곤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은 국어사전보다 영어사전을 자주 들춥니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 가운데 국어사전을 틈틈이 들추면서 말을 살피거나 익히려는 분은 몹시 드뭅니다. 찾아본다면 영어사전을 찾아보지, 국어사전을 뒤적이지 않아요. 늘 쓰는 한국말이지만, 늘 쓰면서 어떠한 말뜻이요 말쓰임이며 말느낌인가를 헤아리지 않습니다.


.. 개화 세력은 양반 귀족의 소통 도구였던 한문보다는 일반 대중의 소통 도구였던 한글을 공식문자로 삼음으로써, 자신들의 생각과 정책을 일반 대중과 폭넓게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 일본어 상용 정책이 지속적으로 추진되는 상황에서 조선어에 대한 조선인의 인식도 점점 바뀌게 된다. 그럼 이 세상에 조선어는 무용하다는 세 명의 아동은 십 년 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일본어를 해야만 살 수 있는 현실을 보며, 아마 자신의 생각이 옳았음을 확인했을 것이다 ..  (27, 283쪽)


 이야기책 《우리말의 탄생》은 ‘최초의 국어사전 만들기 50년의 역사’라는 이름이 딸립니다. 한국어사전이 없이 한국말이 없다 할 만하기 때문에, 책이름이 《우리말의 탄생》입니다.

 그런데 ‘-의 誕生’이라는 말투는 한국사람 말투라 할 만할까 아리송합니다. 이렇게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에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다지만, 못 알아들을 사람이 없다 해서 한국사람 말투라 해도 괜찮은지 알쏭달쏭합니다. 한국사람 말투대로 적자면 “우리 말이 태어나다”라 해야 할 텐데요. 또는 “새로 태어난 우리 말”이라든지 “갓 태어난 우리 말”이라 하든지요.

 곰곰이 살피면, “最初의 국어사전” 또한 한국사람 말투일 수 없습니다. “첫 국어사전”이라 해야 한국사람 말투입니다. “국어사전 만들기 50年의 역사”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국어사전 만들기의 50년의 역사”처럼 적지 않으니 반갑기는 하지만, “국어사전 만들기 50년 역사”쯤으로는 적어야 비로소 한국사람 말투라 할 만합니다. 한 걸음 더 헤아린다면 “국어사전 만들기 50년 발자취”라든지 “국어사전 만들기 쉰 돌 발자취”라 할 수 있어요.

 어쩔 수 없다고 여기면 어쩔 수 없는 노릇입니다만,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이 으뜸으로 자리잡았고, 일제강점기 앞서는 한문이 으뜸으로 자리잡았습니다. 일제강점기에서 풀려난 1945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영어가 으뜸으로 자리잡습니다.

 이 나라에서는 어느 한때고 한국말이 으뜸으로 자리잡은 적이 없습니다. 나라에서는 아이들한테 영어를 가르치려 하는 데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돈을 쏟아붓습니다. 지자채와 교육부에서도 엄청나게 큰 돈을 들이붓습니다. 그렇지만, 이 나라 아이들이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알맞고 바르며 아름다이 나누도록 북돋우는 데에는 거의 아무런 돈도 품도 땀도 마음도 사랑도 베풀지 않습니다.


.. 조선어사전을 집필할 당시에는 조선총독부의 검열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민족의식과 관련된 단어의 경우 뜻풀이를 축소하거나 아예 수록 대상에서 빼버리는 일이 있었던 반면, 언어 현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폭넓게 사용되던 일본식 어휘들은 많이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독립국가의 공용어가 될 민족어 사전과 식민 지배를 받는 일개 민족어의 사전이 같은 체제와 내용으로 출판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  (41쪽)


 한국사람은 한국말 발자취조차 제대로 모릅니다. 기껏 안다고 한다면 세종큰임금이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지식이 있다뿐, 막상 훈민정음이 어떤 글이고 이 글을 지난날 지식인이 어떻게 다루었는지는 거의 모르기 일쑤입니다.

 그래도 최경봉 님 같은 분들이 《우리말의 탄생》 같은 책을 써 주기에, 이 책 하나를 읽으면서 한국말사전이 어떻게 태어났는가 하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지만, 한국말사전이 태어나는 이야기를 다루는 책에 깃드는 말마디부터 썩 사랑스럽지 못합니다. “언어 현실을 고려해야 했기 때문에 당시 폭넓게 사용되던 일본식 어휘들은 많이 포함시킬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말마디를 한국말이라고 할 수 있으려나요. 왜 이런 말마디로 한국말사전 이야기를 펼쳐야 할까요.


.. 사전이 처음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사전에는 어려운 단어가 우선적으로 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찬자들이 많았다 ..  (182쪽)


 어렵다 싶은 낱말이란 따로 없습니다. 쉽다 할 만한 낱말 또한 따로 없습니다. ‘있다’나 ‘없다’라는 낱말을 어떻게 풀이할 수 있겠습니까. ‘보다’와 ‘쓰다’는 어떻게 풀이할 수 있을까요. 영어사전에서 ‘be’나 ‘go’나 ‘get’ 같은 낱말을 찾아본다면 알 테지만, 영어사전에서는 이런 ‘쉽다 할 만한 낱말’을 아주 꼼꼼하면서 길게 풀이합니다.

 한국말사전에서 ‘있다-없다-보다-쓰다-주다-갖다-넣다-가다’ 같은 낱말을 어떻게 풀이하는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이러한 낱말부터 옳게 다루지 못하는 한국말사전이라면 한국말사전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없습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람들이 이냥저냥 쓰는 말마디를 되도록 더 많이 주워담은 잡동사니 책이라고 해야 할 뿐입니다.


 (2) ‘언어민족주의’가 있을까


 한국말사전 쉰 해 발자취를 담는다는 책 《우리말의 탄생》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답답합니다. 이 책은 ‘한국말사전이 처음 태어난 쉰 해 발자취’를 다룬다고 했지만, 정작 뚜껑을 열어 보니 ‘조선어학회 언어민족주의 비판’이 곳곳에 자꾸자꾸 되풀이되기 때문입니다. 그저 차분하게 한국말사전 발자취를 다루는 학문책이었으면 좋으련만, 왜 자꾸 글쓴이 ‘한쪽 생각만 옳다’는 투로 이야기를 펼치는지 안타깝습니다.

 글쓴이 생각은 옳을는지 모르나 그를 수 있습니다. 글쓴이 생각을 밝히려 한다면 아예 주의주장을 다루는 책으로 내야지, 책이름을 “우리 말글이 태어나다”나 “첫 국어사전 발자취”라 적으면서 껍데기를 씌우지 말아야 합니다.


.. 우리말에 담긴 민족성이 두드러지게 강조되면서, ‘언어는 사회적 의사소통을 위한 도구’라는 생각보다는 ‘언어는 민족의 얼’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인 진리로 자리잡았다. 언어의 타락을 민족혼의 타락으로 보는 경향이나 조선어가 가장 위대한 언어이고 훈민정음이 가장 위대한 문자라고 보는 국수주의적 경향도 이 시기부터 형성된 것이다 ..  (34쪽)


 ‘말은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는 그릇’ 노릇만 하지 않습니다. 영어는 영어를 쓰는 겨레나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 얼을 보여줍니다. 한자와 중국말은 중국사람 넋을 보여줍니다. 한자와 일본말은 일본사람 얼을 밝힙니다. 티벳말은 티벳사람 넋을 보여주고, 덴마크말은 덴마크사람 얼을 밝혀요.

 어느 겨레가 쓰는 말이든 이 말을 쓰는 겨레얼이 깃듭니다. 영국사람이 쓰는 영어하고 미국사람이 쓰는 영어는 같을 수 없습니다. 영국 영어와 미국 영어는 넋과 얼이 사뭇 달라요. ‘사람들이 생각을 나누는 그릇’ 노릇을 틀림없이 하면서, 저마다 다 다른 겨레와 나라마다 제 터전과 삶자락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말마디에 싣습니다. 섣불리 ‘국수주의’이니 무어니 하고 꼬리표를 붙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훈민정음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 할 수 없으나 ‘가장 요즈음에 만들고 가장 과학 원리에 따라 만든 글’이니, 깊이 살피지 않는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테지요.


.. 조선어사전편찬회의 결성은 주시경 이후 조선어 연구의 한 경향이 된 언어민족주의가 대중적으로 확산된 결과였다. 주시경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조선어연구회는 ‘조선어는 곧 우리 민족의 얼이자 우리 민족 그 자체’라는 언어민족주의에 기대어 연구 방향을 설정하였다 ..  (67쪽)


 한국사람이 한국말을 살피는 일이 ‘언어민족주의’일 수 없습니다. 제 겨레나 제 나라를 이루는 사람들이 쓰는 말을 살피는 일은 언어주의도 민족주의도 언어민족주의도 아닙니다. 그저 학문입니다. 한 마디를 붙일 수 있다면 나라와 겨레와 말과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요.

 영국사람이 영어사전을 만들고, 독일사람이 독일어사전을 만드는 까닭은 언어민족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영어학이나 독일어학이나 중국어학이 나오는 까닭 또한 언어민족주의 때문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한국어학을 하는 분들은 자꾸 ‘무슨무슨 민족주의’ 또는 ‘무슨무슨 국수주의’라는 이름표를 섣불리 붙이곤 합니다. 이런 주의주장을 해야 논문이 되거나 학문이 되는지 잘 모르겠으나, 말을 살피거나 다루는 사람들한테 자꾸 애먼 ‘주의자’라고 하는 일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살피는 사람은 주의자가 아닐 뿐더러 ‘기계’도 아닙니다. ‘의사소통 도구’로만 한국말을 살피는 기계인 학자란 있을 수 없습니다.


.. 나무를 보다가 숲속에서 길을 잃은 꼴이 된 조선어학회는 자신들의 아집에 사로잡혀 모국어의 정리와 통일의 결정체가 될 모국어사전의 출판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홍기문은 조선어학회의 활동의 의미를 부정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부정했던 것은 조선어학회의 아집이었다. 그리고 그가 가장 우려했던 것은 조선어 연구가 쇼비니즘적 경향을 띠는 것이었다. 국수주의에 경도된 언어 연구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분위기로 이어질 것이고, 당시 조선어학회의 위상을 볼 때 조선어학회는 조선어의 신성함을 지키는 절대적 문화 권력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  (232쪽)


 글쓴이 최경봉 님은 ‘국수주의’와 ‘언어민족주의’와 ‘쇼비니즘’이라는 말을 끝없이 되풀이하면서 조선어학회 학자들을 비판합니다. 책은 《우리말의 탄생》이지만, 우리 말글이 어떻게 국어사전으로 갈무리되면서 틀을 잡는가 하는 이야기에서 이래저래 벗어나려 합니다.

 일제강점기에 조선어를 살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함께하는 사람이었다고 《우리말의 탄생》에서 거듭거듭 나옵니다. 독립운동을 하던 일제강점기 조선어학자들이 조선말이 어떠한가를 말하거나 밝힐 때에 어떻게 말하거나 밝히려나요. 《이응호-미군정기의 한글운동사》(성청사,1974) 같은 책에서 그러모은 예전 자료에서도 쉽게 엿볼 수 있습니다만,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즐겨쓰던 사람들은 식민지살이를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권력을 누립니다. 조선어학회 사람들이건 조선말을 살피는 학자이건 독립운동을 하며 조선말을 살피는 사람은 ‘권력 아닌 탄압’을 누립(?)니다.

 글쓴이는 어쩌면 나무도 숲도 보지 않으면서 ‘국어사전 발자취’를 살피려 하면서, 일부러 조선어학회 비판에만 불꽃을 피우지 않나 싶기까지 합니다.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이라 해서 더 거룩하거나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국사람이 쓰는 한국말은 한국사람한테는 거룩하거나 훌륭합니다.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말을 쓰는 일이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미국사람은 미국땅에서 미국말을 쓸 때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습니다. 일본사람은 일본땅에서 일본말을 쓸 때에 가장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겠지요.

 하나도 민족주의가 아니며 국수주의라든지 쇼비니즘 따위가 아닙니다. 말결이고 말흐름이며 말삶입니다. ‘절대적 문화 권력’이란, 지난날 한문을 쓰던 지식인이요 일제강점기에 일본말을 아끼던 지식인이며 오늘날 영어를 사랑하는 지식인입니다. 이들 지식인은 예나 이제나 우리 말글을 옳거나 바르거나 알맞게 쓰지 못합니다.


.. 그들(민족주의 언어학자)은 일관되게 우리말이 우리 민족과 함께 수천 년을 이어온 것임을 강조하였다. 계통론적 시각에서 우리말의 기원을 다른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무의미한 일일 수 있었다 ..  (331∼333쪽)


 말투를 하나하나 따진다면, “다른 언어와의 관련 속에서 살펴보는 것 자체가 그들에게는” 같은 말투는 우리 말투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 말투대로 말을 하자면, “다른 말과 얽혀 살펴보는 일이 이들 학자한테는”이라고 가다듬어야 합니다. “관련 속에서” 같은 말투는 영어를 일본사람들이 옮겨적던 말투를 한국 지식인이 생각없이 받아들여 퍼뜨리는 말투입니다. 앞에 ‘-와 + 의’처럼 붙인 토씨 또한 일본 말투입니다. ‘自體’ 같은 한자말 또한 우리 말투가 아닙니다. ‘것’을 아무 데나 넣는다든지 ‘그들’ 같은 대이름씨를 섣불리 쓰는 말투 또한 우리 말투가 아니에요.

 말은 계통론으로도 살피지만, 한 곳에서 오래도록 살아낸 사람들 말버릇으로도 살핍니다. 고장말로도 살피는 말이요, 이웃한 고장이나 이웃한 나라나 겨레하고 견주면서도 살피는 말이에요.

 어느 한 가지로만 살필 수 없는 말입니다. 말은 죽기도 하지만 태어나기도 하고 되살아나기도 합니다. 어느 한 가지로 틀을 지을 수 없는 말이에요. 어느 한 가지 틀을 섣불리 세울 수 없기 때문에, 적기법이라든지 띄어쓰기라든지 맞춤법이라든지 받침이라든지, 무엇 하나를 놓고도 참 오래도록 힘겨운 입씨름을 하거나 생각을 그러모은 끝에 국어사전 하나를 빚습니다.


.. 이희승 《국어대사전》은 ‘국어사전이면서 백과사전이나 각종 전문사전의 구실을 겸할 수 있도록 엮은’ 사전으로 우리 국어사전의 특성을 잘 보여준 대표적인 사전이다 … 그 어휘의 증가분 중 상당 부분이 외래어나 한자어라는 점에서 많은 비판이 있었는데, 이와 같은 어휘 수록 양상은 새말의 수용이나 전문어의 확대 과정에서 빚어진 결과로 보인다 ..  (364쪽)


 글쓴이가 《국어대사전》을 비롯한 ‘고침판 이희승 국어사전’을 얼마나 살펴보고 이렇게 적는지 궁금합니다. ‘ㄹ 항목’ 하나만 살펴보더라도 이희승 국어사전에 일본말이든 서양말이든 외국 물건이름이 얼마나 많이 실렸으며, 뜬구름 잡기라도 되는 듯한 외국사람 이름이 얼마나 많이 실렸고, ‘스쿨걸’과 ‘스쿨보이’ 같은 영어까지 마구잡이로 쑤셔넣은 이희승 국어사전인 줄을 스스로 살폈더라면, 이러한 이야기를 펼치지는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롱’이나 ‘라이프’나 ‘리빙’ 같은 낱말은 영어이지 한국말이 될 수 없습니다. ‘롱스커트’나 ‘로스트 비프’나 ‘록(= 바위)’이나 ‘리레코(= 리레코딩)’나 ‘리딩(= 읽기)’이나 ‘리밋(= 한계)’ 같은 영어를 슬그머니 실어 놓은 매무새로 올림말 숫자를 늘린 이희승 국어사전인데, 올림말 숫자가 많대서 새롭거나 남다른 한국어사전이 될 턱이 없습니다. 이런 영어까지 실었으니, 우리가 안 쓰는 한자말이나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만 쓰는 한자말은 오죽 많이 실었겠습니까.

 이희승 님이 엮은 한국어사전은 이 한국어사전대로 보람과 뜻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낱말이 아닌 일본말과 일본 한자말을 지나치게 실은 대목에서 비판을 받을밖에 없습니다. 우리 낱말을 다루는 책이어야 할 국어사전에 왜 우리 낱말을 제대로 못 실을까요. 게다가 최경봉 님은 왜 이러한 대목을 옳게 짚지 못할까요.

 한자말을 쓰는 일이나 영어를 쓰는 일을 꼭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쓸 만하다면 써야지요. 쓸 만하지 않다면 안 써야지요. 엉터리로 쓰거나 얄궂게 쓰거나 겉치레로 쓴다면 한국어사전에는 함부로 싣지 말아야지요.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 또한 이런 대목에서 비판받아야 할 뿐 아니라, 풀이말과 올림말과 보기글이 어긋나는 대목이 많습니다. 국립국어원 누리집 한국어사전은 잘못된 풀이말과 올림말과 보기글을 꾸준히 바로잡지만, 정작 종이로 나온 《표준국어대사전》은 잘못된 곳을 바로잡지 못합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말의 탄생》이라는 책에서는 오늘날 나오는 한국어사전을 다루면서 오늘날 나오는 한국어사전에서 잘 돌아보며 담은 대목이나 잘못 건드리며 얄궂게 된 대목을 찬찬히 보여주지 못합니다. 남영신 님이나 박용수 님이 일군 ‘우리말 분류사전’ 이야기는 한 줄로도 적바림하지 않습니다. 김광해 교수가 이룬 ‘유의어·반의어 사전’이라든지, 정재도 님이 이룬 ‘국어사전 바로잡기’라든지, 임홍빈 교수가 펼친 ‘말느낌(뉘앙스)에 따라 다른 말풀이’와 같은 새로우면서 깊이있게 파고드는 한국어사전 톺아보기 이야기 또한 다루지 못해요.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최경봉 님은 “우리 말글이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펼칩니다만, 이 책에 나온 이야기로 헤아리자니, “우리 말글은 아직 안 태어났”습니다. 더욱이 “우리 말글이 태어나올 땅이 꽁꽁 막혔”습니다. 학자와 정부와 관료와 지식인과 여느 학부모까지 “우리 말글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알껍데기에 무쇠붙이를 철썩 뒤집어씌웠다”고 할 만합니다. 태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태어날 수 없게끔 가로막힌 한국말 이야기를 펼치자니, 《우리말의 탄생》이 구석구석 갑갑하거나 턱턱 막힐 수밖에 없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4344.4.14.나무.ㅎㄲㅅㄱ)
 

  

(밑에는, 이희승 국어사전 올림말 들여다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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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몽 2012-02-20 22: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 쓰신 글이신지요...?
너무 가슴아프게(?) 잘 읽었습니다.
'가슴아프게'라고 한 것은, 저도 그렇게 생각해 왔기 때문입니다.
우리말 좋은 점을 얘기해 놓고는 끄트머리에 '그래서 한글을 뛰어나'-이것도 꼭 '우수'라는 한자말을 쓰지요...-라고 끝을 맺지요.
그리고 한글이 뛰어나다고 하던 나랏말학자들도, 하지만 우리말 만으로는 말글사는 데에 모자라고 한자말 같은 게 있어야 한다고 하지요...
더더구나 안타까운 것은, 한글이 우수하다고 하는 그 분들도 잘 들어보면, 흔히 인터넷에 떠도는, 맨날 똑같은 그 얘기 말고는 근거를 들지 못합니다.(마치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정광태 씨 노랫말에서 밖에서 못 찾는 것처럼...)
그리고 딴겨레말 떠받들고 우리말 죽이는 국립국어원과 엄청난 돈을 들이고도 완전 엉터리로 만든 표준국어대사전까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지만...^^
여튼 너무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http://2dreamy.wordpress.com/

파란놀 2012-02-21 06:08   좋아요 0 | URL
제가 쓴 글이 아니면 서재에 올릴 수 없겠지요.

..

한글은 한국사람이 주고받는 한국말을 한겨레가
가장 슬기로이 담는 그릇이지만,
이 그릇을 제대로 다룰 때에 좋은 그릇이고,
제대로 다루지 못하면 슬픈 그릇이 됩니다...

깨몽 2012-02-21 12:01   좋아요 0 | URL
하하... 그런가요...^^;;
여튼 꿰뚫어 보시는 힘이 대단합니다.
이른바 나랏말학자라는 이들과 우리말글운동한다는 이들도 잘 깨닫지 못하고, 심지어 얘기를 해도 바로 보기 싫어하는 것을 꿰뚫어 보시니...
그러고 보면, 되장 님도 그렇지만, 제가 존경하는 이오덕 선생님이나 이 책을 쓰신 최경봉 님, 그 밖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말글을 바로 보고 계시는데도 불구하고 평소에는 그런 분들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어쩌면 '주류'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도 싶습니다.(엉터리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앉아... ㅡ.ㅡ)
아마 그래서 이 글이 더 반가웠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을 만한 글이 많아 마음이 좀 급하긴 하지만, 두고두고 천천히 읽어보고 많이 배우겠습니다.
혹 SNS(페이스북이나 트위터)도 하시면 알려주시면 말씀 나누면서 배웠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파란놀 2012-02-21 13:31   좋아요 0 | URL
저는 따로 트위터 같은 것은 하지 않아요.

주류이거나 아니거나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옳게 바라보며 제대로 살면 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