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 얼얼 빨래


 집에서 먹는 쌀이 다 떨어져서 자전거를 타고 마을 어귀 보리밥집으로 가서 4.5킬로그램을 사다. 쌀을 사서 집으로 돌아오고 나서 씻는다. 씻으면서 민소매 웃옷하고 아기 똥기저귀 한 벌을 빤다. 겨울에는 뼛마디가 꽁꽁 얼어붙는다고 느끼도록 차갑던 물은 이른여름을 앞둔 오월 끝무렵에는 손가락이 얼얼하다고 느낄 만큼 시원하다. 똥기저귀는 따순 물로 빨아야 하는데, 차디찬 물로 몸을 씻으면서 그냥 찬물로 북북 비벼서 빤다. 다른 똥기저귀가 두 벌 더 나오면 삶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제 곧 여름이니 여름답게 차디찬 물로 손이 시리도록 빨래를 한 번쯤 해 보고 싶기도 하다. 아니, 이렇게 찬물로 몸을 씻을 때에는 내 몸에서 튕기는 차디찬 물이 똥기저귀로 후두둑 떨어지면서 저절로 헹구어지는 느낌이 좋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언제 어디에서나 수도물이니까 여름이든 겨울이든 물온도가 엇비슷하다. 시골에서도 여름이든 겨울이든 물온도가 엇비슷하다 할 만한데, 시골물은 쓰면 쓸수록 물이 더 차갑다. 땅밑에서 길어올리는 물로 신나게 씻고 빨래를 하고 나면 몇 시간쯤 더위란 오간 데 없다. (4344.5.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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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말(인터넷말) 73] 바로가기, 자료보기

 생각하면서 사랑스레 말을 나누는 사람이 있고, 생각하지 않으나 얼결에 사랑스레 말을 나누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사랑스레 주고받는 말마디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따로 더 생각하지 않더라도 사랑스레 주고받는 말마디가 샘솟을 텐데, 어릴 때부터 얄궂거나 슬프게 무너진 말마디에 젖어든 사람이라면 따로 더 생각하더라도 사랑스레 주고받는 말마디를 북돋우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보면 볼수록 익숙해지고 쓰면 쓸수록 손에 익기 마련입니다. ‘go’나 ‘guick’을 자꾸 써 버릇하면 이러한 영어 아니고서는 내 마음이나 뜻을 나타낼 수 없는 듯 여기고 맙니다. ‘바로가기’ 같은 말마디를 알뜰히 일구어 쓴다면, ‘자료보기’ 같은 낱말로 예쁘게 가지를 칩니다. 다만, 아직 걸음마이기 때문에 ‘새 자료보기’처럼 적지는 못하고 ‘신착자료보기’처럼 적었습니다. (4344.5.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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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리말(인터넷말) 72] 한국 사진쟁이 누리집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 발자국을 조금 더 알아보려고 누리집을 찾아서 들어가다가는 깜짝 놀랍니다. 나라밖 사람한테 당신 작품누리를 보여주려고 꾸민 누리집이 아니라, 나라안 사람, 그러니까 한국말을 하는 한국사람한테 당신 작품누리를 보여주려고 꾸민 누리집인데, 게시판 이름에 한글이 하나도 없을 뿐더러, 당신 이름마저 한글로 적지 않습니다. 나라밖 사람한테 작품누리를 밝히려 한다면 한글과 알파벳을 함께 적을 노릇입니다. 아예 영어로만 누리집을 만들든지요. 게시판 글은 한글로 적으면서 게시판 이름하고 사진쟁이 이름은 알파벳으로 적는다면, 이 어긋난 누리집 모습을 어떻게 헤아리며 받아들여야 할는지 알쏭달쏭합니다. (4344.5.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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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 만지는 손으로 책읽기


 첫째가 태어난 2008년 8월 16일부터 하루도 똥을 안 만지면서 보낸 날이 없습니다. 아기는 날마다 똥을 누니까 날마다 똥을 만집니다. 때로는 속이 안 좋은지 며칠 똥을 못 누곤 하지만, 며칠 지나면 어김없이 똥을 뿌지직 누어, 이 똥을 아버지가 치웁니다.

 둘째가 우리 집에 온 날부터 똥치우기 일은 늘어납니다. 둘째를 낳은 어머니는 몸이 몹시 나빠서 집에 좌변기를 놓고 똥을 누도록 합니다. 첫째는 제법 커서 제 오줌그릇에 똥을 눌 줄 압니다. 어미 돼지 하나와 새끼 돼지 둘이 누는 똥을 아비 돼지가 치웁니다. 처음 이틀 배냇똥을 누어 똥빛이 푸르던 아이는 어머니젖을 차츰차츰 받아먹으면서 똥빛 또한 노오란 빛깔로 바뀝니다. 고작 젖을 먹고도 요런 똥이 나오는구나 여길 수 있지만, 바로 젖을 먹었기 때문에 이같이 똥을 누네 하고 생각합니다. 어머니젖이 이러한 똥으로 바뀐단 말이지?

 갓난쟁이 둘째가 기저귀에 누는 똥을 빨면서 헤아립니다. 첫째가 기저귀에 똥을 누던 때에는 어떠했을까. 첫째도 처음 세이레 동안에는 똥기저귀를 하루에 스무 장씩 내놓았던가. 아침부터 밤까지, 밤부터 아침까지, 똥기저귀를 그치지 않으면서 제 아비를 잠 못 자게 했던가.

 밤새 삼십 분이나 한 시간마다 둘째 똥기저귀를 치웁니다. 옆지기가 여보 하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부를 때마다 벌떡 일어납니다. 업어 가도 모르도록 곯아떨어진 주제에 옆에서 부르는 소리 한 마디에 벌떡 일어납니다. 딱히 부르지 않더라도 갓난쟁이가 뿌직 하는 소리를 내면 어지러운 꿈결을 깨고 일어납니다. 시계를 보아 첫째가 잠든 지 세 시간이 지난 한 시 십구 분에 번쩍 안아 쉬를 누이려는데 번쩍 안을 때에 그만 이불에 쉬를 지릅니다. 그래도 오줌그릇에 앉아 쉬를 또 눕니다. 다시 세 시간이 지난 네 시 이십일 분에 쉬를 더 누입니다. 둘째가 우리한테 와서 함께 살아가니까, 젖을 먹이는 어미는 젖을 물리느라 밤새 잠을 못 자고, 기저귀를 치우는 아비는 기저귀를 치우느라 밤새 잠을 못 자지만, 이동안 곧 석 돌을 맞이할 첫째 밤오줌 가리기를 할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첫째 낮오줌 가리기를 하던 지난날, 첫째가 아직 오줌을 제대로 가눌 줄 몰라 방구석 여기저기를 오줌바다로 만들어도 아이고 에그그 하면서 날마다 수없이 걸레질을 해대고 빨래를 했듯이, 밤오줌을 가리기까지 또 숱하게 걸레질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할 테지요. 내가 내 아이한테 오줌 가리기를 하자며 잠을 못 이루듯이, 내 어버이는 내가 갓난쟁이요 어린이였을 때에 숱한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며 애쓰셨겠지요.

 어느덧 날이 밝고, 날이 밝은 김에 밤새 나온 똥기저귀 다섯 장하고 옆지기 핏기저귀에다가 첫째가 오줌으로 버린 바지와 치마 한 벌씩 신나게 빨아서 넙니다. (4344.5.28.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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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개 방실이 책공장더불어 동물만화 2
최동인 지음, 정혜진 그림 / 책공장더불어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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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이든 재개발이든, 고운 삶 짓밟는 돈벌이
 [만화책 즐겨읽기 45] 정혜진·최동인, 《용산개 방실이》


 사람들은 누구나 살아갑니다. 뿌연 하늘을 이면서 살아가기도 하고, 맑은 하늘을 어깨동무하면서 살아가기도 합니다.

 시골집 밤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저녁에 첫째를 씻기고 나서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아이 손을 잡고 멧길을 조금 오르다가는 마을 안쪽 길을 조금 걷습니다. 어두운 멧자락 한켠에서 우리 살림집을 바라보면 어떠한가 하고 아이한테 보여줍니다. 어디에도 불빛이 없이 깜깜한 시골자락을 이야기합니다. 하늘에 뜬 별이 반짝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이제 첫째 아이도 제법 컸으니 시골 밤녘에는 눈을 틔워 밤길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 “방실이고 뭐고 왜 데리고 왔냐고?” “같이 살 거니까.” (58쪽)
- “당신이 우겨 봤자 방실이는 이제 우리 가족이야.” “가족? 허, 참, 개가 가족이라고? 미치겠네, 정말.” “당신이 아무리 그래도 방실이 안 보내.” (60쪽)



 오늘날 한국에서는 들짐승이나 멧짐승 가운데 사람을 잡아먹을 만한 짐승이 없습니다. 깊은 밤이고 이른 밤이고 새벽이고 낮이고, 사람 그림자 보이지 않는 멧자락이든 들판이든 무서울 일이 없습니다. 참말 사람이 가장 무섭지, 사람 아닌 목숨이 무서울 일이 사라진 오늘날 한국입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보는 그림책에는 범도 나오고 사자도 나오며 늑대나 여우도 나옵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갈 일이 없는 코뿔소나 코끼리나 기린이나 불곰이나 흰곰이나 이구아나 들은 그림책에 얼마든지 나옵니다.

 생각하는 힘을 키운다는 그림책이라지만, 막상 한 번도 두 눈으로 볼 일이 없을 뿐더러, 두 눈으로 본다 하더라도 동물원에서나 볼 뿐이니, 범이나 사자가 무서울 턱이 없습니다. 왜 무섭거나 어떻게 무서운지 알 수 없어요. 어른들이 무섭다 말하니 무서운가 보다 할 뿐이에요.

 그러니까, 이 땅 이 나라에는 사람 아닌 목숨은 없는 셈입니다. 드문드문 고라니를 보거나 다람쥐를 보거나 생쥐를 본다 하더라도 참 드문드문 보는 목숨입니다. 참새나 비둘기나 까치는 좀 흔하다 싶지만, 이러한 새를 사람하고 똑같이 아름다우며 사랑스러운 목숨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사람 스스로 목숨빛을 잃거나 잊으면서, 숱한 다른 목숨은 아예 이 터전에서 깡그리 쫓겨나거나 사라지고 맙니다.


- “재개발, 재개발, 도대체 몇 번째야. 심심하면 나오는 소리.” “신경쓰지 마. 할 것 같으면 벌써 하고도 남았지.” “하긴. 얼마 전에도 말만 있다가 흐지부지된 거잖아.” “그러니 신경쓰지 마.” “근데 재개발하면 돈 번다는데 우리도 그런가? 새 가게도 주고 인테리어 비용도 주고 그러는 건가?” “…….” “당신도 몰라?” “모르지.” (76∼77쪽)


 만화책 《용산개 방실이》를 읽습니다. 그림결은 그저 그러한 만화책을 펼치면서, 한국사람 만화 그리는 솜씨는 그닥 발돋움하지 못하네 하고 느낍니다. 밑틀을 단단히 다스리면서 꾸준히 발돋움하는 한국 만화란 한국 터전에서는 꿈꾸거나 바랄 수 없는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한국사람 스스로 한국사람다이 살아가며 서로서로 아끼거나 사랑하도록 열리거나 아름다운 터전이 못 되거든요. 더 겨루거나 다투어야 하고, 혼자서 더 거머쥐어야 하며, 홀로 더 누려야 하는 한국 터전입니다.

 그렇지만, 조금은 엉성한 그림결이라 하더라도 무슨 이야기를 나누려 하느냐 하는 실마리가 있으면 반갑습니다. 따스한 실마리 하나로 이루어지는 만화이고 문학이며 삶입니다.

 서울에서 수수하게 살고프다 하든, 작은 도시에서 조촐히 살고 싶다 하든, 시골에서 조용히 살겠다 하든, 한국에서는 좀처럼 사람을 사람다이 놓아 주지 않습니다. 서울사람은 서울사람대로 갖은 재개발이나 학력이나 돈줄 따위에 얽매입니다. 지역사람은 지역사람대로 서울바라기가 되면서 제 고장을 참다이 사랑할 줄을 모릅니다. 조용한 시골은 땅값이 싸다며 숱한 공장이 자꾸 밀려들 뿐 아니라, 도시사람은 시골사람이 농약과 풀약과 비료와 항생제 안 쓰며 흙을 일구도록 놓아 두지 않습니다. 더 굵으며 때깔 좋게 보이는 푸성귀와 곡식과 열매를 거두라 할 뿐 아니라, 돈 되는 농사 아니면 짓지 말라며 논밭을 허물거나 깎거나 밀어서 고속도로나 고속철도를 깔거나 아파트나 공장을 세우려 합니다.

 애꿎으며 슬프게 숨을 거두고 만 용산사람 둘레에 방실이라는 작은 개가 있었다면, 애꿎으며 슬프게 숨을 거두지만, 서울사람 신문·방송에 실리지 못할 뿐더러 알려지지 못하면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 둘레에는 온갖 작은 목숨과 꿈과 사랑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뜸부기가 죽는 줄 살피지 않아요. 어느 누구도 꾀꼬리가 쫓겨나도 알아채지 못해요. 어느 누구도 맹꽁이가 밟히는 일을 느끼지 않아요. 어느 누구도 잠자리와 나비가 차에 치여 스러져도 알아보지 못해요.


- ‘거창한 걸 바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지금처럼만 살면 좋겠다.’ (185쪽)
- “왜 이리 살기가 힘드냐.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뭐 하나 되는 일도 없고. 인생이 왜 이리 내리막길이냐.” (202쪽)


 서울 용산에서 죽은 사람이건, 살아남은 사람이건, 대단한 꿈을 빌지 않았습니다. 떵떵거리는 삶이라든지 잘나가는 삶을 꾀하지 않았어요. 다만, 대단하지 않다 할 만한 꿈이라지만, 아주 안 대단한 꿈은 아니었습니다. 아주 작은 삶은 아니었어요.

 더 작은 아파트도 좋고, 아파트 아닌 작은 연립집이어도 좋습니다. 서울 아닌 부천이나 인천이나 광명도 좋습니다. 도시 아닌 시골도 좋아요. 굳이 시여야 하지 않아요. 군이어도 좋고, 읍이나 면에서 살아도 아름답습니다.

 빚을 몇 억씩 짊어지면서 서울에서 장사를 하며 빚 갚고 돈 벌기를 꾀하는 일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빚을 안 지고 내 논밭을 내 자그마한 돈으로 마련해서 내 자그마한 손으로 내 자그마한 살림을 조용히 일구면서 살아갈 수 있어요. 갑갑한 시멘트집에서 외롭게 지낼 방실이가 아니라, 너른 땅에서 흙을 밟고 멧자락을 타고 숲을 누빌 방실이가 되게 할 수 있어요. 방실이도 흙을 밟고, 방실이네 어머니랑 아버지도 흙을 밟을 수 있어요.

 정치권력을 쥔 사람이나 개발업자들이 돈에 눈이 멀어 이웃과 동무를 바라보지 못하는 일은 몹시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치권력을 안 쥐거나 개발업자로 살아갈 마음이 없는 여느 사람들이 돈에 너무 젖어든 서울 같은 큰도시에서 ‘수수한 꿈’을 꾼다는 일이 어쩌면 터무니없는 꿈이 아닌가 싶어요. 서울은 수수한 사람 수수한 꿈이 수수하게 이루어지며 수수한 삶이 되도록 풀어 주지 않습니다. 서울은 피가 튀기도록 치고박으면서 더 힘이 세고 더 돈이 있으며 더 이름 드높이는 사람만 살아남도록 하는 싸움터입니다.

 돈을 벌겠다는 생각이 나쁘다는 소리가 아니라, 삶을 사랑하겠다는 아름다운 생각으로 거듭나야 할 내 모습이 아닌가 싶어요. 부지런히 땀흘리면서 보람을 느끼지 못하는 도시에서 훌훌 떠나, 부지런히 땀흘리는 만큼 보람과 기쁨과 웃음을 누리는 고즈넉하며 따사로운 살림터를 찾아야 하지 않느냐 싶어요.


- ‘망루에 올라가는 걸 말리지 못했다. 다만 얼마라도 건져야지란 생각에. 아이들 아빠도 두려움을 애써 감추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말리지 못했다.’ (247쪽)


 ‘용산개 방실이’에 앞서 수많은 방실이가 있었고 수많은 용산이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든, 서울 둘레에서든, 한국에서든, 이웃나라에서든, 돈과 이름과 힘이 없는 사람은 언제나 짓밟히거나 짓눌립니다. 그런데, 정치권력자나 공무원이나 개발업자만 수수한 여느 사람을 짓밟거나 짓누르지 않습니다. ‘자그마한 꿈’이라고 말하지만, 막상 따지고 보면 ‘돈을 더 벌겠다’는 꿈인 수수한 여느 사람들 마음자리가 앞으로도 수많은 용산과 수없는 방실이 이야기를 쏟아내리라 생각합니다.

 내 밥그릇을 채우려면 내 이웃 밥그릇에서 빼앗아야 해요. 내 이웃 밥그릇을 채우려면 내 밥그릇에서 덜어야 해요. 다 함께 돈이 넘치는 길이란 없습니다. 다 함께 나누는 길은 있으나, 다 함께 돈을 벌며 흥청거리는 길이란 없어요. 서울 용산에서 재개발을 밀어붙이려 했던 사람들도, 또 이러한 일을 밀어붙일 때에 주먹과 방패와 몽둥이를 들고 앞장서던 사람들도, 또 이러한 일을 언론에 기사로 쓰거나 법정에서 법으로 다스리는 사람들도, 서로서로 사랑을 나누려는 마음으로 제 밥그릇에서 밥술을 하나 덜지 않을 때에는 다시금 아픔과 슬픔이 되풀이됩니다.

 싱그러운 벼포기가 볍씨를 나누어 주어, 이 볍씨로 쌀을 만들어 밥을 해 먹습니다. 벼한테서 목숨을 선물받아 고이 살아가는 목숨인 사람이에요. 돼지한테도 목숨을 얻고 소한테도 목숨을 얻으며 닭한테도 목숨을 얻어요. 머리가 나쁜 사람을 일컬어 닭대가리라 놀리지만, 닭한테서 고운 목숨을 얻는 줄 잊는다면 사람이야말로 머리가 나쁜 노릇이에요. 올챙이 적을 모르는 개구리보다 고마움을 모르는 사람이 되고 말아요.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러운 나라가 되자면, 더 많은 돈이 있으면 안 돼요. 더 높은 경제성장이나 더 많은 자격증이나 더 좋다는 졸업장이 있으면 안 돼요. 더 센 힘이나 더 큰 군대나 무기는 참으로 부질없을 뿐 아니라,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하고는 참 동떨어져요.

 우리는 누구나 따뜻한 마음으로 넉넉히 사랑을 나누어야 할 고운 목숨을 선물받은 한 사람입니다. (4344.5.28.흙.ㅎㄲㅅㄱ)


― 용산개 방실이 (정혜진 그림,최동인 글,책공장더불어 펴냄,2011.1.13./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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