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도토리 쪽빛그림책 1
마쓰나리 마리코 지음, 고향옥 옮김 / 청어람미디어 / 2007년 4월
평점 :
절판



 숲길을 걷는 즐거움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3] 마쓰나리 마리코, 《길 잃은 도토리》



 숲길을 거닐다가 도토리 한 알 주워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앙증맞으면서 고운가를 압니다. 이 앙증맞으면서 곱고 작은 도토리 한 알이 얼마나 우람하며 씩씩하고 튼튼하게 크는가를 올려다보면서 자연이란 무척 놀라우며 거룩한 줄을 새삼 깨닫습니다. 따로 누군가 나무를 심어 자라는 도토리나무가 아닙니다(‘도토리나무’라고 했지만, 졸참나무나 떡갈나무나 상수리나무나 신갈나무라고 낱낱이 이름을 들어 말해야 맞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떨구거나 다람쥐가 먹으려고 갉다가 떨어진 씨앗이 제힘으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자라는 도토리나무입니다(그렇다고 땅에 떨어지는 모든 도토리가 뿌리를 내리며 나무로 자라지는 못합니다. 아무래도 수많은 도토리 가운데 고작 몇 알이 겨우 뿌리를 내리고, 이 가운데에서도 나무로 자라나는 도토리는 몹시 드물기 때문에 더더욱 자연이 대단하며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도토리 한 알은 한 해 두 해 세 해 네 해 …… 길디긴 나날을 제힘으로 조용히 큽니다. 씨앗 한 알이 어린 싹이 되고, 어린 싹이 어린나무가 되며 어린나무가 차츰차츰 우람한 어른나무로 뻗습니다.

 일본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그린 그림책을 들여다보면 숲길을 거니는 이야기를 쉽게 만납니다. 한국사람이 쓴 문학책이나 그린 그림책을 살피면 숲길을 거니는 이야기는 좀처럼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 어린이문학을 읽으면 숲길을 가로지르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곧잘 만납니다. 한국 어린이문학을 읽으면 숲길을 즐기며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이야기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림책 《길 잃은 도토리》는 일본에서 2002년에 나오고, 한국에서는 2007년에 옮겨집니다. 도토리 한 알을 알뜰히 아끼며 좋아한 아이 하나가 숲속에서 얼마나 신나게 ‘도토리 놀이’를 했는가를 보여주다가는, 그만 숲속에서 잃은 도토리가 아이 품에서 떨어진 채 여러 해를 보내며 열 몇 해 뒤에는 그예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되어 새삼스레 다시 만나는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습니다. 참 일본사람 그림책답구나 하고 느낍니다. 참 한국사람은 이런 그림책을 못 그리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곰곰이 떠올리면, 일본이라고 해서 오늘날 시골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숲속을 한참 가로지르며 즐길까 궁금합니다만, 〈녹차의 맛〉이나 〈워터 보이즈〉나 〈스윙 걸즈〉 같은 영화를 보노라면 자연을 벗삼은 학교가 고스란히 이어져 있지 않나 싶습니다. 우리 나라를 돌아보면 큰도시에서는 아주 마땅하게도 자연이란 눈꼽만큼도 없으며, 작은도시는 큰도시 뒤를 따라 자연을 짓밟습니다. 읍이나 면에 있는 학교라면 자연을 둘러싸거나 자연을 품에 안을 만하지 싶은데, 자연과 가까운 작은 학교는 거의 모조리 문을 닫았고, 읍이나 면에 있는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이 ‘시골에서 시골다움을 느끼며 학교를 다닐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흙길을 두 다리로 걷거나 자전거로 달리며 오가는 아이는 몇이나 될까요. 시골 학교를 다니는 한국 아이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달린다 하여도 아스팔트길로 다닐 테고, 이 길은 자동차가 무시무시하게 내달리느라 아슬아슬하다며 어버이가 자가용을 태우거나 학원버스나 학교버스로 아이들을 실어 나르지 않나 싶습니다. 한두 시간에 한 대 지나가는 시골버스를 타고 학교를 다니는 아이들 가운데 논밭이 가득한 시골길이나마 차분하게 즐기며 맞아들이는 가슴은 몇이나 될까요.


.. 준비 땅! 코우가 소리쳤어요. 우리는 떼굴떼굴 떽떼굴 구르며 코우랑 달리기 시합을 해요. 신나게 코우랑 놀아요. 어항을 겨누어 탕. 휘익 날아갈 때 기분 최고! 아무리 멀리 날아가도 코우는 나를 찾으러 와 주어요. 엉덩이만 보면 알아요 ..  (6∼9쪽)


 그런데 그림책 《길 잃은 도토리》를 보며 어딘가 얄궂어 자꾸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아이가 숲속에서 ‘도토리 던지기’ 놀이를 하는데 어항을 겨누어 던집니다. 다른 데도 아닌 숲속에서. 숲속에 왠 어항? 숲속이라면 벼락을 맞아 쓰러진 나무에 난 구멍이라든지 딱따구리가 파 놓은 구멍이라든지를 이야기해야 걸맞지 않을는지요. 이 그림책을 그린 분이 어린 날 숲속에서 ‘버려진 어항’을 보고는 오래도록 신나게 놀던 일이 있었기에 뜬금없이 숲속 어항을 보여주는가요.

 게다가 번역이 영 못마땅합니다. “준비 땅!”이라니요. 일본말 “요이 땅!”을 “준비 땅!”으로 옮긴다고 우리 말이 될 수 없습니다. “준비 시작!”처럼 옮길 때에도 우리 말이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말로 적바림하자면 “하나 둘 셋!”이라 하거나 “자, 달린다!”라 해야 알맞습니다. ‘시합(試合)’ 같은 일본 한자말은 이 그림책뿐 아니라 운동경기를 말하는 사람들 누구나 아주 함부로 잘못 씁니다. 이 그림책을 우리 말로 옮긴 한 사람을 탓할 수 없어요. 그러나 그림책을 내놓은 출판사 일꾼이 ‘시합’ 같은 일본말은 ‘내기’나 ‘겨루기’로 손질해 주어야 합니다. “기분 최고!”라는 대목 또한 일본책을 제대로 못 옮긴 말마디가 아닐까 싶은데, “아슬아슬 짜릿짜릿!”이나 “시원시원 좋아좋아!”처럼 말느낌이나 말맛을 살리며 옮겨야 알맞으리라 봅니다.

 번역 말썽은 “코우의 집”이나 “코우의 발소리”나 “코우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것 같아서요” 같은 데에서도 엿봅니다. 우리 말로 제대로 옮기자면 “코우네 집”이요 “코우 발소리”이며 “코우가 있는 곳까지 이어져 있을 듯해서요”입니다. 어른책뿐 아니라 어린이책에까지 ‘-의’를 마구 넣는 버릇은 털어야 하며, ‘것’을 섣불리 자주 쓰는 매무새 또한 가다듬어야 합니다. 책 끝에는 “가끔씩 코우가 여기에 와서”라는 대목이 있는데, ‘가끔씩’처럼 적으면 틀립니다. ‘가끔’이라고만 적어야 올바릅니다. ‘가끔’과 ‘이따금’이라는 낱말 뒤에는 ‘-씩’을 붙일 수 없는데, 이를 깨달으며 알맞춤하게 말을 하거나 글을 쓰는 사람이 나날이 줄어듭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쓰고자 마음을 기울이는 어른이 자꾸자꾸 사라집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가누지 못하면서 어린이책을 쓰고 어른책을 내놓습니다. 참답고 착하며 고운 넋을 참답고 착하며 고운 말에 실어 참답고 착하며 고운 삶을 일구고자 하는 어린이로 크도록 사랑을 나누는 어버이가 시나브로 자취를 감춥니다.


.. 코우의 가방 속엔 도토리가 가득. 모두 나무의 씨앗. 나무의 아기 ..  (4쪽)


 이 대목 또한 “코우 가방엔 도토리가 가득. 모두 나무가 맺은 씨앗. 나무가 낳은 아기.”로 고쳐야 알맞습니다. “가방에 든 도토리”이지 “가방 속에 든 도토리”가 아닙니다. 뒷 대목은 “모두 나무 씨앗. 나무 아기.”로 적바림할 수 있습니다. 번역을 깔끔하며 정갈하게 했어야 《길 잃은 도토리》라는 그림책이 한결 빛났을 텐데, 차분하지 못하고 매끄럽지 못한 번역이 몹시 아쉽습니다. 그렇지만 ‘뜬금없는 숲속 어항’이라든지 ‘도토리 한 알이 아이한테 지나치게 얽매인 줄거리 흐름’이라든지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그림책 모습으로는 코우라는 아이가 고작 스물을 갓 넘긴 얼굴인데 기껏 열 해 남짓 지났어도 도토리나무가 그림책에 나오듯 이토록 우람하게 가지가 우거질 수 있나 궁금합니다. 코우라는 아이가 ‘어린 날 코우만 한 나이인 아이와 함께 도토리나무 앞에 선 모습’쯤으로 그려 주어야 어느 만큼 고개를 끄덕일 수 있을 텐데요.

 그래도 일본에서는 일본 어른들이 숲길 걷기와 숲속 도토리 한 알을 잊지 않고 그림책 하나로 알뜰살뜰 엮습니다. 한국에서는 한국 어른들이 아이들한테 베푸는 그림책이란 오로지 지식과 정보 그림책에 머뭅니다. 살갑게 부대낄 이야기 하나로 거듭나지 못합니다. 숲속에서 벌어지는 숱한 이야기 가운데 끄트머리 하나라도 붙안지 못합니다. 사람이 다니는 오솔길조차 아닌, 멧짐승만 지나다녔을 숲길을 천천히 오르내리면서 나뭇가지를 쓰다듬는 느낌을 담지 못합니다. 가랑잎 흐드러진 숲길을, 나뭇잎이 바람을 맞으며 내는 소리를, 숲속에 깃든 짐승과 벌레가 내는 소리를, 나뭇잎 사이를 스쳐 들어오는 햇살을, 보송보송해서 손가락을 눌러도 쏘옥 들어가는 좋은 흙을 그림책에 살포시 담으려 하지 않습니다.

 책을 덮으며 다시금 생각합니다. 책이름이 《길 잃은 도토리》인데, “길 잃은”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도토리로서는 길을 잃었다 할 까닭이 없습니다. 도토리로서는 제자리를 찾아 ‘하늘이 내려진 고마운 선물’ 그대로 땅에 뿌리를 내리며 우람한 나무 한 그루로 자랍니다(좀더 제대로 말하자면, 도토리 한 알이 나무로 자라자면 다람쥐가 겨우내 먹으려고 갈무리해서 땅에 묻은 씨앗 가운데 한 알이 자라난다고 하더군요). 도토리 한 알은 시골아이랑 한참 신나게 놀다가 제 갈 길을 찾아 조용하면서 따순 흙 품에 안겼고, 흙 품에서 씩씩한 새 삶을 일굽니다. 시골아이는 숲길을 걷는 즐거움을 듬뿍 느끼며 도토리를 만납니다. 도토리 한 알은 흙 품에 안기며 자라는 즐거움을 느끼기 앞서 시골아이 하나를 만나 신나게 놀았습니다. 시골아이와 도토리는 자연이라는 너른 품에서 아름다이 어우러지는 살가운 벗입니다. (4343.9.28.불.ㅎㄲㅅㄱ)


― 길 잃은 도토리 

 (마쓰나리 마리코 글·그림,고향옥 옮김,청어람미디어 펴냄,2007.4.25./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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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산책자 - 대영박물관에서 떠난 13갈래 문명기행
이케자와 나츠키 지음, 노재명 옮김 / 산책자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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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영박물관이 품은 문화유산은 쓰레기
 [책읽기 삶읽기 5] 이케자와 나쓰키, 《문명의 산책자》



 “인류가 이룩한 물질적, 기술적, 사회 구조적인 발전”을 가리킨다는 ‘문명(文明)’이라고 합니다. “세계의 모든 사람”을 일컫는다는 ‘인류(人類)’랍니다. 온누리에 손꼽는 몇 가지 커다란 ‘문명’이 있다고 하는데, 커다란 문명을 돌아보면 모조리 ‘큰 도시를 이룬 터전’입니다. 수수하거나 조촐하게 농사지어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든지, 짐승을 사냥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놓고는 ‘문명’이라 하지 않습니다.

 갖가지 전기·전자 제품을 쓰는 사람을 가리켜 ‘문화인’이라 합니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텔레비전을 들여다보는 사람을 두고 ‘문화인’이라 합니다. 하다못해 손전화를 안 쓴다거나 셈틀을 안 쓴다거나 하면 ‘원시인’이라 합니다. 극장에 갈 일이 없거나 텔레비전을 집에 들여놓지 않거나 하면 ‘원시인’이라 합니다.

 “대영박물관에서 떠난 13갈래 문명 기행”이라는 이름이 붙은 《문명의 산책자》라는 책을 읽으며 ‘문명’이란 무엇을 말하고 ‘문화’란 어떤 대목을 가리키는지 자꾸자꾸 알쏭달쏭합니다. 몇 가지 흙그릇이나 돌연장을 남겨야 문명이 되는지 궁금합니다. 어마어마하게 큰 무덤이나 건물을 지어 놓아야 문명을 이룩한 셈인지 아리송합니다. 조용히 살며 쓰레기(문화재) 하나 안 남기는 삶이란 무엇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문화재로 삼는 ‘유물’이란 “남겨 놓거나 대물림을 하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땅에서 캐낸 ‘쓰레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몇 백 해가 흐르거나 즈믄 해가 흘렀어도 썩거나 바스라져 흙으로 돌아가려 하지 않고 남아 있으니 ‘쓰레기’인 셈입니다. 사람들은 ‘값어치’를 따져 비닐봉지하고 문화재는 다르다 말하지만, 앞으로 즈믄 해가 흐른 뒤에는 오늘날 우리가 이토록 많이 쓰는 비닐봉지를 놓고 ‘2000년대 생활문화 발자국’으로 삼아 문화재가 될는지 안 될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래, 똑같은 비닐봉지 가운데에서도 2005년 대구 중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하고 2008년 광주 동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하고 2010년 인천 서구청에서 쓰던 쓰레기봉투를 따로따로 뜻깊은 문화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2100년쯤 ‘비닐봉지 박물관’을 누군가 세운다면 이런 비닐봉지는 얼마든지 문화재가 됩니다. 2010년 오늘날에도 1970년대 새우깡 과자봉지나 1980년대 초코파이 과자봉지는 얼마든지 문화재 노릇을 합니다. 아니, 문화재 노릇을 톡톡히 하며 무척 비싼 값에 사고팔립니다. 쓰레기통에 처넣으면 그예 쓰레기입니다만, 1985년 서울 은평구 갈현동에서 쓰던 ‘까만 봉지’라는 자취가 남아 있으면 이런 비닐봉지 또한 얼마든지 문화재로 삼을 수 있습니다. 어제 구멍가게에서 사다 마신 깡통맥주를 안 버리고 서른 해쯤 놓아 둔다고 생각해 보셔요. 아니, 스무 해나 열 해만 그대로 놓아도 ‘어, 옛날엔 이랬구나.’ 하면서 문화재 구실을 합니다. 베스킨라빈스 얼음과자 주걱이든 700원짜리 얼음과자 막대기이든, 어떻게 바라보거나 다루느냐에 따라 쓰레기가 되거나 문화재가 됩니다.


.. 일본 음식은 미국과 거의 같은 수준으로, 음식이라기보다 공업 제품에 가깝다 ..  (25쪽)


 이야기책 《문명의 산책자》는 영국에 있는 대영박물관에서 만난 문화재를 ‘박물관에 갇힌 유물’이 아닌 ‘이 문화재가 처음 있던 곳에서 어떤 모양으로 사람들 손을 탔는가’를 몸소 알아보고 싶어 지구 곳곳을 찾아다닌 발자국을 차곡차곡 담습니다. 아무래도 “공업 제품 아닌 밥”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글쓴이라서, 유리 진열장에 처박힌 쓰레기가 아니라 사람들 손을 타는 살림살이를 만나고 싶었겠지요. 유리 진열장에 처박히면 무척 값나가거나 값비싼 쓰레기가 되지만, 사람들 손을 타는 동안에는 값어치를 따지지 않을 뿐더러 몹시 값싼 살림살이입니다. 할머니 적부터 쓰던 숟가락이란 집에서 늘 쓰면 그냥 살림살이이며 돈값으로 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런 밥숟가락 하나일지라도 박물관에 옮겨놓으면 비싸구려 문화유산이 됩니다. 자개장이든 노리개이든 무쇠솥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살아가며 쓰면 소담스러운 살림살이인 지게이지만, 박물관에 들어서면 곰팡이가 슬고 좀이 먹는 나무쓰레기요 짚쓰레기입니다.


.. 인도에서는 나무가 있으면 그 아래 사람이 있다. 이런 햇살 아래에서는 나무 밑이 아니라면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이 없다. 인도인은 사람이 바깥에서 활동을 해 나가려면 우선 그곳에 나무를 심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  (96쪽)


 오늘 이 나라 한국땅 어디에서나 무섭도록 올라서는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바라볼 때면 우리 스스로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문화재처럼 여긴다’고 느낍니다. 2020년이나 2030년이나 2050년에 새로 태어나 자라고 살아갈 뒷사람한테 오늘날 아파트와 고속도로를 문화유산으로 물려주고 싶어하네 하고 느낍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살아가는 그대로 뒷사람한테 물려주지, 우리가 살아가지 않는 대로 뒷사람한테 물려주지 못합니다. 우리가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이 살아간다면 참되고 착하며 아름다운 삶자락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자동차를 사랑하며 살아가면 뒷사람한테는 자동차를 물려줍니다. 우리가 더 많고 큰 돈을 바라며 살아가면 뒷사람한테는 더 많고 큰 돈을 물려줍니다. 우리가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어깨동무하며 살아가면 뒷사람은 따순 사랑과 너른 믿음을 물려받겠지요.

 《문명의 산책자》를 쓴 일본사람은 당신 두 발로 이 땅을 단단히 디디며 살아가려는 수수한 몸가짐을 보여줍니다. 이 책 하나는 퍽 알뜰히 엮었습니다. 어디 모자라거나 어줍잖은 구석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문명을 찾아나선다는 사람”이 찾아나선 문화재라는 물건이 얼마나 어떻게 문화재답다 할 만한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인류가 이룩한 발전이 드러난 물건’이란 무슨 잣대로 잴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인도사람은 사람이 바깥에서 일하자면 나무그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말하지만, 나무 한 그루가 그늘을 드리우기까지는 몇 해가 걸리는가요. 나무는 어떻게 해야 심을 수 있는가요. 사람이 억지로 심을 수 있는 나무일까요. 씨앗 하나가 땅에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는 나날이란 무엇인가요.

 쓰다 버린, 또는 쓰다가 버려진, 때로는 잘 쓰고 있는데 권력자가 일으킨 싸움 때문에 그만 망가지거나 나뒹굴고 만, 더군다나 큰 싸움을 일으키며 이웃나라한테서 빼앗은 물건이 제아무리 아름답거나 빛나거나 값있다 하더라도 이런 물건을 살피며 ‘인류 문명’을 따지는 일이란 부질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문명에 앞서 내 삶과 이웃 삶과 동무 삶을 들여다보며 어깨동무할 고운 사람 하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4343.9.27.달.ㅎㄲㅅㄱ)


― 문명의 산책자 (이케자와 나쓰키 씀,노재명 옮김,산책자 펴냄,2009.8.25./2만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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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펑의 개구쟁이 1
라트 글.그림, 박인하.홍윤표 옮김 / 꿈틀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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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과 햇빛과 물빛과 풀빛과 삶빛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12] 라트 글·그림+박인하·홍윤표 옮김, 《캄펑의 개구쟁이 1·2》



 한가위날에는 보름달이 아닌 비구름을 보았습니다. 이튿날 날씨는 몹시 맑아 시리도록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을 올려다봅니다. 이튿날 밤에는 보름달이 매우 밝아 집안으로 스며드는 달빛을 느끼며 잠자리에 듭니다. 새벽에도 달은 아직 넘어가지 않아 하얗고 밝은 빛을 듬뿍 느끼지만 깊은 밤만큼은 아닙니다.

 우리 살림집이 멧부리에 깃들어 있기에 환하고 하얀 달빛을 느낄 수 있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밤나절, 아이를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 하고 이야기할 수 있고, 밝디밝은 달빛에 비치는 저녁하늘 구름이 또렷해 아이는 ‘구름!’ 하고 외칩니다.

 지난해나 지지난해에 인천 골목동네에 살면서도 달을 보았습니다. 가난한 우리 살림으로는 아파트에 깃들 수 없기도 하지만, 돈이 있다 해도 아파트에는 살고 싶지 않습니다. 오늘 이 나라에서는 집이 아닌 재산이고 마는 아파트를 보금자리로 삼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더군다나 아파트에 살면서 무슨 하늘과 땅과 풀과 나무를 벗삼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골목집에 깃든다 하여도 하늘이든 땅이든 풀이든 나무이든 가까이하기에는 만만하지 않습니다. 골목집에 깃든 숱한 이웃들 또한 아파트사람과 마찬가지로 돈벌이에 바쁘고 텔레비전에 매여 있거든요.

 그래도 우리 식구는 인천 골목동네에 깃들며 언제나 달을 보았습니다. 아파트숲과 견주면 훨씬 적은 밤거리 등불이기에 골목동네에서는 ‘썩 안 밝아’도 보름달을 볼 수 있고, 밤거리 등불이 거의 없는 후미진 골목길에서는 ‘꽤 밝은’ 보름달을 보았습니다.

 시골 살림집에서 지내며 햇볕을 더욱 따사롭게 느낍니다. 아니, 더욱 따사로울 수밖에 없고, 한결 따사롭기 마련입니다. 집 안쪽에만 머물면 도시이든 시골이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집 바깥쪽에서 일하고 놀 때에는 도시와 시골은 사뭇 다릅니다. 해가 쨍쨍 날 때에는 쨍쨍 나는 햇볕을 바라보며 기지개를 켜고 이불과 빨래를 말리면서 ‘따뜻하다’고 느낍니다. 비가 펑펑 쏟아질 때에는 골짝과 도랑을 따라 콸콸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빨래는 언제 마를까. 곰팡이가 걱정스러운걸’ 하고 생각합니다. 도시에서 살던 때에는 밤거리 등불 때문에 밤에도 깜깜하다고 느끼기 어려웠으나, 시골에서는 밤이면 아주 깜깜합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깜깜한 길이 눈에 익습니다. 밤에는 별을 보고 새벽에는 안개를 봅니다. 가을로 접어들고 겨울 문턱이 가까우니까 새벽마다 안개가 자욱합니다. 국민학생이던 1980년대에는 인천에서도 봄가을 새벽에는 늘 안개가 자욱했습니다. 이제는 인천이든 서울이든 부산이든 대구이든 이 나라 큰도시에서는 안개를 만나기 어렵습니다. 큰도시 하얀 물방울 무리는 안개라 할 수 없고 ‘스모그’라 해야 어울립니다. 영어로는 ‘smog’이고 우리 말로 하자면 ‘먼지구름’이나 ‘먼지안개’인 셈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도시에 안개가 사라지고 스모그만 가득한 줄 뻔히 압니다. 학교에서 가르치고 신문과 방송에 나옵니다. 그런데 뻔히 스모그인 줄 알면서 스모그가 왜 생기는가를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모그가 사라지고 안개가 돌아오도록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스모그가 누구 때문에 생기는지를, 스모그가 언제 생기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는 안개가 없지만 이슬도 없고 성에도 없습니다. 아마 그림책에는 있겠지요. 그림책에는 논도 있고 밭도 있습니다. 그림책에는 개구리도 있고 맹꽁이도 있습니다. 그림책에는 여우도 있고 곰도 있습니다. 숱한 사람들이 〈아침이슬〉이라는 노래를 애틋하게 즐깁니다만, 참말 아침이슬을 맑고 싱그럽게 마주하지 못하는 채 즐기는 노래 〈아침이슬〉인 요즈음입니다.

 정부가 밀어붙이는 4대강 사업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물줄기를 죽이는 끔찍한 짓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면 4대강 아닌 다른 물줄기는 어떠하지요. 4대강을 젖줄로 삼아 수도물을 끌어들이는 도시 터전은 어떠한가요. 4대강 사업을 막을 수 있으면 우리 터전은 살아나는가요. 4대강 사업이라도 막아내야 우리 삶터가 그나마 낫다 할 만한지요. 4대강 사업을 몰아낼 우리들은 어떤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좋을까요.

 만화와 같은 그림으로 이야기를 엮은 《캄펑의 개구쟁이》 1권과 2권을 넘깁니다. 말레이지아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을 벗삼으며 살다가 도시로 떠나 온 한 아이 삶이 고스란히 담긴 그림책(또는 만화책)입니다. 《캄펑의 개구쟁이》에 담긴 이야기는 머리로 지어낸 생각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낸 이야기입니다. 그림책으로만 바라보는 해와 달과 별이 아닌, 온몸으로 부대끼며 받아들인 해와 달과 별 이야기를 담습니다. 텔레비전 방송이나 다큐멘터리로만 배우는 풀과 꽃과 나무와 짐승이 아닌, 온삶으로 복닥이며 맞아들인 풀과 꽃과 나무와 짐승 이야기를 싣습니다.

 지난 2006년에 숨을 거둔 만화쟁이 신영식 님은 ‘짱뚱이’ 이야기를 꾸준히 그렸습니다. 당신이 살아온 어린 나날을 떠올리며 당신 옆지기와 함께 ‘한국땅 1960년대 시골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1960년대에도 냉장고를 쓰고 자가용을 모는 한국사람이 있었습니다만, 훨씬 많은 한국사람은 자연에 터를 내리고 살았습니다. 만화쟁이 길창덕 님은 ‘꺼벙이’를 내세워 ‘한국땅 1970년대 골목동네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만화쟁이 김수정 님은 ‘둘리’와 ‘소금자’와 ‘오달자’와 ‘막순이’와 ‘동동’ 들을 내세워 ‘한국땅 1980년대 여느 어린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가 되고 2000년대가 되며 2010년대가 되는 동안 이 나라 이 땅 여느 어린이 삶이 묻어나는 살가운 그림이나 만화는 도무지 만나지 못합니다. 어쩌면 ‘여느’라 이름붙일 만한 삶을 찾을 수 없기도 할 텐데, ‘여느’라는 이름이 붙는 삶은 하나같이 입시지옥에 얽매이면서 온통 아파트와 자가용과 텔레비전에 사로잡힌 나날이라, 굳이 만화나 그림으로 담아 널리 선보일 만한 이야기로 엮을 수 없기 때문이겠지요.

 자연과 어깨동무하는 삶에서 몸으로 헤아리며 받아들이는 흐름은 어느덧 사라졌습니다. 자연을 따로 배워 지식으로 삼는 흐름만 넘실거립니다. 학교는 아름다운 배움터가 아닌 입시지옥 싸움터입니다. 동네는 좋은 일터이자 놀이터가 아닌 그저 잠자는 곳인데다가, 두 다리로 동네를 거닐 일이 없습니다. 시골마을이나 골목동네는 집집마다 생김새와 모양새와 삶이 달라 언제나 즐거이 쏘다니며 이웃집 마실을 할 만한 터전이지만, 아파트숲은 두 다리로 거닐 만하지 않을 뿐더러 온통 똑같은 삶에 자동차 없이는 움직이기 까다로운 터전입니다. 아파트 툇간에 황조롱이가 둥지를 틀기도 한다지만, ‘모든 아파트 툇간’에 들새가 둥지를 틀지는 않습니다.

 어떤 눈길로는 《캄펑의 개구쟁이》나 “짱뚱이 만화”는 옛이야기를 떠올리도록 이끄는 그림이나 만화입니다. 《캄펑의 개구쟁이》를 그린 라트 님이나 “짱뚱이 만화”를 그린 신영식 님은 오늘 우리 삶보다는 옛이야기(추억)를 남기거나 나누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틀림없이 “짱뚱이 만화”에 나오는 듯한 시골마을 삶이나 놀이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시골마을은 예나 이제나 있습니다. “꺼벙이 만화”나 “김수정 만화”에 나오는 도시 골목동네 터전을 쉽사리 못 찾는다 말할 분이 있으나, 가난하면서 씩씩하고 오붓하게 살림을 꾸리는 자그마한 골목동네 터전은 오늘날에도 어김없이 있습니다.

 그저 한 가지가 다를 뿐입니다. 지난날에는 누구나 달빛과 햇빛과 물빛과 풀빛을 부대끼며 삶빛을 저마다 다 달리 선보일 수 있었다면, 오늘날에는 누구도 달빛과 햇빛과 물빛과 풀빛을 부대끼지 않습니다. 달과 해가 아닌 돈을 바라보는 오늘날입니다. 물과 풀이 아닌 이름값을 찾아나서는 오늘날입니다. 오늘날 삶자리는 조금도 아름답지 않습니다. 말레이지아도 한국도 오늘날 삶자리는 그예 슬프며 고단합니다. 《캄펑의 개구쟁이》와 “짱뚱이 만화”는 아주 까마득하게 먼 옛날 옛적 범아비 담배 피던 나날 이야기가 되고 마는 이 나라입니다. (4343.9.26.해.ㅎㄲㅅㄱ)


― 캄펑의 개구쟁이 1·2 (라트 글·그림+박인하·홍윤표 옮김,꿈틀 펴냄/2008.8.10./8800원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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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손가락을 따라 무언가를 들여다본다. 

이내 스스로 책을 읽는다. 

엄마랑 아빠랑 옆에서 함께 안 놀아 주고 

책만 읽으니 

아이도 이냥저냥 엉기고 어리광을 부리다가 

스스로 놀다가 책을 펼친다. 

아이가 스스로 씩씩하게 놀아서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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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가면 44
미우치 스즈에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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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다운 작품은 아름다운 삶으로
 [책읽기 삶읽기 4] 미우치 스즈에, 《유리가면》



 만화책 《유리가면》을 1권부터 44권까지 며칠 만에 읽어내다. 미우치 스즈에 님은 1976년부터 2009년까지 서른네 해에 걸쳐 그렸는데 나는 고작 며칠 만에 이 만화 한 질을 ‘아직 연재가 끝나지 않았’다지만 훌쩍 읽어치우고 만다. 1/3쯤 읽을 무렵 문득 한 가지를 깨닫는다. ‘책을 읽는 사람’은 제아무리 어느 한 작품을 깊이 새기며 사랑할 수 있다지만 ‘책을 쓰는 사람’ 마음이나 삶이 될 수 없다고.

 만화책 《유리가면》에서 ‘꼬마’ 마야를 가르치며 ‘어른’ 마야가 되도록 이끄는 츠기카게 치구사라는 스승은 〈홍천녀〉라는 작품을 할 때에 스승인 츠기카게 치구사가 선보이는 〈홍천녀〉가 아닌 어린 마야가 어른 마야가 되며 선보이는 새로운 〈홍천녀〉가 되도록 하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만화책 《유리가면》을 읽는 사람 또한 ‘미우치 스즈에’ 마음이 아닌 ‘읽는이 아무개’ 마음으로 읽을밖에 없겠지. 아니, 읽으면서 ‘미우치 스즈에’ 마음으로 읽되 ‘읽는이 아무개’ 삶으로 받아들여야 할 테지. 또는 ‘미우치 스즈에’라면 이 만화를 어떻게 그리며 어떻게 읽을까 하고 곰곰이 되새기며 한몸 한마음이 되어 읽는 가운데, 이 책을 덮은 뒤에는 ‘무대에서 내려와서(책을 덮고)’ 내 삶을 내 나름대로 내 두 다리와 두 손으로 씩씩하게 일굴 때 아름답다는 셈이 될 테지.

 만화책 《유리가면》을 들여다보면 온누리에 명작이라고 손꼽히는 숱한 연극 이야기가 나온다.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나오니 세계 명작이라 일컫는 온갖 작품을 들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명작을 하나하나 들추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만화책 《유리가면》은 오늘날에 이르러 또다른 명작 자리에 들어선다. 이제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을 놓고 《작은 아씨들》이라든지 《한 여름 밤의 꿈》과 같은 작품처럼 명작이 아니라 말할 사람은 없으리라 본다.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서른네 해에 걸쳐 스스로 ‘명작을 낳은 사람’이 되었고, 앞으로 《유리가면》 연재를 마무리짓든 연재를 마무리짓지 못하고 숨을 거두든, 뒷날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만화책 하나를 연극 대본으로 새롭게 고쳐쓰며 또다른 무대를 선보일 수 있겠지. 그런데 이냥저냥 《유리가면》을 무대에 올린다면(만화영화로든 영화로든 연속극으로든 연극으로든 노래로든 춤으로든), 이렇게 무대에 올리는 사람은 스스로 명작이 되지 못한다. 아마 수많은 ‘이냥저냥 작품’이나 ‘고만고만 작품’이 쏟아지고 나서야 비로소 한 사람이 문득 깨우쳐 ‘마냥 따라하는 무대’가 아닌 ‘내 깜냥껏 내 삶을 바친 온 사랑 깃든 새 무대’를 마련하리라 본다. 그때에는 《유리가면》이라는 만화책 하나는 다른 한 사람이 새로운 명작을 내놓는 데에 밑거름이 되는 셈이요, 이렇게 《유리가면》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명작이 하나 태어난다면, 더 먼 뒷날에는 새로운 명작 하나를 밑거름 삼아 새삼스럽게 다른 명작 하나 다시금 태어날 수 있겠지.

 《유리가면》 애장판으로 13권째를 보면 333쪽에서 마야가 “에? 왠지 나무가 따뜻하다. 나무에게도 체온이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대목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며 맞춤법 틀린 데뿐 아니라 번역이 얄궂다고 느낀 데가 무척 많았다. 이 대목에서는 “에?”가 아닌 “어?”로 적어야 올바르다. 마야는 ‘문득 놀라’서 한 마디를 절로 뱉어내니까 “에?”가 아닌 “어?”가 맞다. 아무튼, 만화쟁이 미우치 스즈에 님은 곳곳에서 이와 같은 이야기를 1권부터 44권까지 언제나 다른 모습 다른 느낌 다른 말마디로 들려준다. 나무가 따뜻하다고 느낀 당신 삶을 보여주고, 나무가 따뜻하다고 느끼며 품은 궁금함과 놀라움과 기쁨을 슬며시 밝힌다. 그러니까 〈홍천녀〉라는 연극 하나를 놓고 이리도 길며 ‘하나도 안 길다’고 느낄 만큼 만화를 그릴 수 있는 힘이 있지 않느냐 싶다. 이름도 돈도 무엇도 버리며 넋으로 사랑할 짝꿍이란, 남녀 사이에만 이루어지는 애틋함일 수 없다. 농사짓는 사람한테 흙과 햇볕과 바람과 물과 씨앗과 푸성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한테도 매한가지이다. 무럭무럭 자라는 어린이와 푸름이라고 다를 수 없다. 저잣거리 장사꾼이라든지 운전기사라든지 정치꾼이라든지 기자라든지 다를 까닭이 없다. 우리는 우리 삶을 밝히며 일구는 고운 나날을 맞이해야 한다. 돈바라기 삶이 아닌 사랑바라기 삶이어야 한다. 이름바라기 일거리 아닌 꿈바라기 일거리여야 한다. 내 밥그릇을 채우거나 내 몸값을 높이는 일터를 찾아 대학 졸업장을 챙길 슬픈 우리 삶은 내버리거나 놓아 주고, 내 마음그릇을 갈고닦으며 내 믿음을 북돋우는 일자리를 깨달아 노상 웃고 울며 어깨동무하는 아름다운 길을 걸을 수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삶이란 무엇인가 하고 보여주는 만화인 《유리가면》이라 할 수 있다. 그러면 만화책 《유리가면》만 아름다울까. 그린이 미우치 스즈에 님 삶은 안 아름다울까. 아름다운 삶이 아닌 만화쟁이임에도 만화책 《유리가면》 하나만 아름답게 그려낼 수 있을까. 작품과 삶은 다른가. 작품과 사람은 동떨어져 있을까. 작품을 내놓는 사람과 작품을 받아들일 사람은 얼마나 벌어져 있는가. 아직 애장판으로는 나오지 않고 얇은 낱권으로만 나온 43권(2009년 8월) 137쪽을 보면 ‘어른이 되어 가는’ 마야가 밥 한 그릇을 받아먹으며 〈홍천녀〉에 나오는 아코야 삶이 되어 “잘 먹겠습니다” 하고 한 마디를 읊고는 마치 부처님과 같은 매무새로 거듭나는 대목이 나온다. 어린 마야는 연극을 하며 ‘무대에서는 딴 사람 새로운 삶’이 된다는 대목만 어렴풋이 알아차리는데, 차츰차츰 연극 무대 연기란 한낱 연기로 끝나지 않고 어린 마야 삶을 어른 마야 삶으로 이끌어 가는 고마운 벗이요 스승임을 몸으로 받아들인다. 마야라는 아가씨는 천재라는 소리를 듣지만, 천재라기보다 맑고 밝은 넋이요 곱고 착한 넋이다. 맑고 밝기 때문에 하늘이 내린 재주를 받을 수 있다. 곱고 착하기 때문에 하늘이 ‘누구한테나 물려준 선물’을 즐거이 나눌 수 있다. 츠기카게 치구사라는 스승은 자꾸자꾸 “네 안에 있는 홍천녀를 찾으라”고 외친다. “네 안에 있는 홍천녀”란 무엇이겠는가. 바로 내 삶을 나 스스로 보며 즐기라는 소리이다. 내 삶은 내가 즐길 뿐 누가 즐겨 줄 수 없다. 내가 읽는 책 하나는 나 스스로 내 마음그릇대로 받아들인다. 아무리 뛰어난 작품을 읽는 사람일지라도 나 스스로 뛰어난 사람으로 살지 못하면 이 작품 하나가 얼마나 뛰어난지 깨달을 수 없다. 아무리 아름다운 작품을 보는 사람일지라도 나 스스로 아름다운 사람으로 손잡지 않으면 이 작품 하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 수 없다. 우리 나라에 세계 명작 번역은 어마어마하게 많이 나와 있으나 정작 나라안에 ‘세계 명작은 둘째치고 국내 명작’이라도 될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운 까닭이 어디에 있을까. ‘세계화 시대에 세계 시민이 안 되었’기 때문에 국내 명작이나 세계 명작이 ‘한글 문학이나 문화나 예술’로 못 나오지는 않는다. 이 나라 사람들 스스로 아름답고 착하며 참된 삶을 붙잡지 않기 때문에 한국땅 한글 명작이 나올 수 없다. 몇몇 이름난 글쟁이들을 두고 ‘이제 한국에서도 노벨문학상이 나올 만하지 않느냐?’ 하고 떠들지만, 내가 보기로는 이 나라에서 이름난 글쟁이들은 그저 ‘이름난’ 글쟁이일 뿐이다. 조금도 ‘아름답’지 못할 뿐더러 하나도 ‘어른답’지 않다고 느낀다. 이래서야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은커녕 국내 명작이 될 수조차 없다. 백 해 이백 해뿐 아니라 즈믄 해를 살아내며 빛날 작품이 명작이다. 오늘 2010년 한국에서 3010년 뒷날에까지 즐거이 읽거나 읽힐 작품으로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앞으로 즈믄 해 뒤에 이 땅에서 살아갈 사람들이 기쁘며 반갑게 맞아들여 읽을 작품으로 무엇을 손꼽을 수 있는가. 줄거리만 재미나면 그만인가. 제법 사랑받으며 100만 권이나 1000만 권이 팔리면 되겠는가. 작품으로도 아름답고 작품을 담은 ‘말과 글’로도 아름다우며 작품을 빚은 한 사람 삶으로도 아름다울 때에 비로소 명작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유리가면》 애장판 7권 328쪽을 보면 마야가 고등학교를 마치며 졸업장과 사진첩을 ‘보라빛 장미를 베푸는 분’한테 보내는 대목이 나온다. 이 대목에 나오는 말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 애는 당신에게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미우치 스즈에 님으로서는 만화쟁이 당신한테 소담스러운 삶을 이 작품 하나에 쏟아부었다. 아니, 쏟아부었다기보다 스스로 만화가 되어 송두리째 내보였다. 이 피와 땀을 읽을 수 있다면 만화책 《유리가면》은 그냥 허울좋이 붙이는 명작이 아닌, 내 삶과 네 삶 모두 아름다이 바라보며 어우러질 길을 붙안는 사랑임을 알 수 있겠지.

 나보다 먼저 《유리가면》을 다 읽은 집식구한테 “《유리가면》을 읽은 사람 가운데 이 작품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은지를 제대로 읽는 사람은 아주 드물 수밖에 없을 듯해요.” 하고 말했다. 대학교 졸업장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 삶터인데 뭐. 대학교 졸업장을 고이 가슴에 안을 줄 모르는 한국 터전인데 뭐. (4343.9.2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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