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 골목을 헤아려 본다. 날이 갑자기 추워지니 여름을 떠올리는가. 그러나저러나, 어느 살림집이든 대문 앞이 꽃과 풀로 가득하다면, 집을 나서거나 들어올 때마다 푸른 내음을 즐거이 맡겠지.

 - 2010.8.14. 인천 동구 창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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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창 신나게 놀다가 곯아떨어진 아이. 아빠한테 귤을 까먹이다가 그만, 큰베개에 엎어진 그대로 잠든 아이. 그래, 넌 참 귀엽구나. 

- 2010.11.19.

 

 덤 : 책 읽는 돼지. 늘 책을 읽으니 하나도 새삼스럽지 않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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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멋진 책 읽는 멋진 삶


 재미있게 읽을 책하고 멋지다고 느끼는 책이 같을 수 있으나, 다를 때가 잦습니다. 좋다고 하는 책이 늘 재미있다 할 만하지는 않으며, 훌륭하다 여기는 책이 꼭 좋거나 재미있지 않곤 합니다.

 재미있는 책이랑 좋은 책이랑 훌륭한 책은 서로 다릅니다. 여기에 멋진 책과 고운 책과 예쁜 책 또한 다릅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내가 쥔 책이 어떠한 책인지를 옳게 깨달아야 합니다. 재미있게 읽는 책이라면 참말 재미있게 읽으며 즐겨야 합니다. 좋은 줄거리 담고 좋은 넋 가득한 책이라면 좋은 줄거리와 넋을 기쁘게 받아안아야 합니다. 멋진 책이라면, 이 멋진 책을 쓴 멋진 사람 멋진 삶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이어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널리 사랑하는 책이라 해서 반드시 재미있다거나 좋다거나 멋지지는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거나 사랑하는 책이지만, 책으로 놓고 볼 때에는 썩 재미있지 않을 뿐더러 좋거나 멋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어느 한 갈래 책을 좋아하는 일은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고, 따져서는 안 됩니다. 다만, 판가름할 수 있습니다. 누가 어느 책을 좋아한다고 할 때에 이이가 좋아하는 책이 ‘영 재미없는 책’이라 하지만 얼마든지 좋아할 만하고, 좋아할 값이 있습니다. 누가 어느 책을 사랑하거나 아낀다 할 때에 이이가 사랑하거나 아끼는 책이 ‘썩 멋있지 않은 책’이라 하더라도 마음껏 사랑하거나 아낄만 한 값어치가 있어요. 그리고, 책을 즐기는 나 스스로 옳게 느끼고 바르게 깨달을 노릇입니다. 책으로 볼 때에는 그닥 재미있는 책이 아니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책임을 느껴야 합니다. 책 하나로 살필 때에는 그리 멋있지 않은 책이 아니라지만 나로서는 사랑하는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환경책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참으로 멋진 환경책이 있고, 무척 훌륭한 환경책이 있는 한편, 아주 좋은 환경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 환경책은 그리 재미있지 않기 일쑤입니다. 꽤 재미있으면서 좋은 환경책이 있는데, 제대로 알아보거나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이 매우 많습니다. 환경책은 유행이 아닌데, 유행처럼 만들어 내는 출판사가 있고, 유행으로 여기며 소개하는 기자가 있으며, 유행이라 생각하며 한두 권쯤 맛보기로 읽는 책손이 있어요.

 재미가 없더라도 멋진 환경책을 알아보는 눈길을 기를 일입니다. 재미가 있으면서 아름다운 환경책을 곱게 사랑할 줄 아는 손길을 다스릴 노릇입니다. 삶을 아끼고 넋을 보듬으며 말을 살찌울 우리들입니다. (4343.11.22.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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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비룡소의 그림동화 7
존 버닝햄 지음, 엄혜숙 옮김 / 비룡소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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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롭지 않도록 보살펴 주셔요
 [다 함께 즐기는 그림책 33] 존 버닝햄,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비룡소,1996)



 잠자리에서 아이하고 나란히 누워 그림책을 읽히는 재미란, 아이를 키우는 어버이만 맛봅니다. 아이를 낳은 어버이로서 이와 같은 재미를 누릴 수 있고, 아이를 낳지 않은 어른이지만 이모이든 큰아빠이든 삼촌이든 하는 자리에서 이 같은 재미를 누릴 수 있어요. 낳은 어버이로서 아이한테 사랑을 듬뿍 나눌 수 있으며, 함께 살아가는 어른으로서 아이한테 사랑을 널리 나눌 수 있어요.

 졸린 아이가 어서 잠들 수 있도록 불빛을 살짝 어둡게 하고는 함께 눕습니다. 아이는 더 놀고 싶거나 말을 하고 싶은지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종알종알 두런두런 합니다. 아무래도 그대로 고이 잠들지 못하겠구나 싶어, 엊그제는 《가을 아이》(이와사키 치히로 그림)를 읽었으니 오늘은 《겨울 아이》를 읽을까 생각합니다. 그런데 《겨울 아이》는 보드라운 수채그림이다 보니 흐릿한 불빛으로는 그림 나누기가 만만하지 않습니다. 아빠 혼자 실컷 보다가 제자리에 꽂아 놓습니다. 이번에는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를 집어서 펼칩니다. 첫머리를 “플럼스터 씨와 플럼스터 부인이라는 기러기 부부가 있었습니다(3쪽).”로 엽니다. 음, 이 대목을 우째 읽나 걱정합니다. 도무지 우리 말이 아닌 말로 첫머리를 열기 때문입니다. “기러기 부부인 플럼스터 아저씨와 플럼스터 아줌마가 있습니다.”쯤으로는 적바림해야 할 텐데요. 우리들이 ‘이웃집 부부’를 일컬을 때 어떻게 말을 하나요. 함부로 ‘아무개 씨’ 하고 부르는 일은 없습니다. 어른들끼리는 이렇게 부르겠지요. 그러나 아이들은 달라요. 아이들이 읽는 그림책을 헤아린다면, 또 어른이라 할지라도 아이한테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한다면, ‘이웃집 부부’를 가리키는 부름말을 달리 적바림해야 알맞습니다. 그나저나 기러기라 하면서 꽤나 뚱뚱해 보여 ‘기러기인데 너무 뚱뚱하다. 이렇게 뚱뚱해서 하늘을 날 수 있을까?’ 하는 말로 고쳐 읽고 다음 쪽으로 넘깁니다.

 다음 쪽에는 꽃이 나오고 알을 품는 어미 기러기 뒤편으로 노오란 해가 보입니다. 5쪽 그림에서는 기러기 부부가 제법 날씬해 보이는군요. 그래요. 기러기라 한다면 이쯤 되어야 날 만하겠다고 느낍니다. 그나저나 다음 쪽에서는 얄궂다 싶은 낱말이 두 군데 보입니다. 그림으로 보기에는 하나도 메마르거나 거칠지 않으나, “황량(荒凉)한 늪지(-地)에서 살았습니다(4쪽)”라고 나옵니다. 크고작은 꽃이 소담스레 핀 그림임을 살핀다면, “조용한 늪가에서 살았습니다”로 고쳐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5쪽에는 “가끔씩 쉿쉿거렸습니다”라는 글월이 나오는데 ‘가끔’으로 고쳐야 합니다. ‘가끔씩’은 틀린 글월입니다.

 아이는 5쪽에 나오는 해 그림을 보며 자꾸 ‘달’이라고 말합니다. 으음, 곰곰이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달일 수 없습니다. 아이 볼을 살살 꼬집으며, 녀석아 너 달이 아무리 좋아도 모두 달이라고만 하면 어떡하니, 이 노랗고 동그란 그림은 해야, 하고 말합니다.

 10쪽에 이르자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가 비로소 나옵니다. 모두 다섯 남매인 보르카네인데, 보르카는 홀로 깃털이 없습니다. 처음 태어날 때부터 깃털이 없다는군요. 저런, 기러기한테 깃털이 없으면 어찌 날지? 어찌 헤엄치지? 그나저나 10쪽에서도 “플럼스터 씨와 플럼스터 부인은 걱정이 되었습니다” 같은 글월을 “플럼스터 아저씨와 플럼스터 아줌마는 걱정이 되었습니다”로 고쳐 주어야겠습니다. 서양 그림책이나 문학책을 한국말로 옮기며 으레 ‘아무개 부인(婦人)’처럼 옮기는 분들이 있는데, 혼인한 여자를 일컫는 부름말로는 ‘부인’이 아닌 ‘아줌마’나 ‘아주머니’를 적어 넣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정말(正-) 드문 경우(境遇)인데(10쪽).” 같은 글월은 “참으로 드문 일인데.”나 “참말 드문데.”로 손질합니다.

 다음 쪽을 펼칩니다. 기러기 아주머님이 뜨개질을 합니다. 아, 뜨개질을 하네요. 우리 집 애 엄마도 한창 뜨개질을 하는데. 둘째를 몸에 밴 뒤로는 뜨개질에 마음을 쏟습니다. 몸이 무거우며 힘들고, 마음 또한 무겁고 고단한 애 엄마는 뜨개질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립니다. 문득문득 느끼는데, 나라밖 그림책을 보노라면 어머니나 아가씨나 아이가 뜨개질을 하는 모습을 어렵잖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만, 아저씨나 총각이 뜨개질을 하는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요. 저도 뜨개질은 잘 못합니다. 그림책에만 나오는 모습이라 여길는지 모르지만, 나라밖 사람들도 ‘옷을 사 입히곤’ 하는 가운데, ‘집에서 손수 뜨개질을 해서 옷을 마련하여 입히곤’ 합니다. 어느 집에서나 흔한 삶이고, 누구한테서나 쉬 찾아보는 삶이에요. 그림책이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라서 깃털옷을 마련해 주려고 뜨개질을 한다고만 볼 수 없습니다. 언제나 뜨개질을 하고, 누구나 뜨개질을 즐기는 삶이기에, 이 그림책에도 살포시 ‘뜨개질 살림살이’가 묻어납니다. 뜨개질 살림살이가 묻어나지 않는 나날이라면, 아마 이 그림책 펼침새는 ‘플럼스터 아줌마’가 저잣거리 마실을 하면서 깃털옷을 돈 주고 사 입히는 흐름으로 되었겠지요. 그나저나 13쪽에서도 세 군데를 손질해야 합니다. 먼저, “깃털을 짜기 시작(始作)했습니다.”는 “깃털을 짭니다.”로 손질하고, ‘물론(勿論)’은 ‘다만’으로 손질하며, “회색(灰色) 털옷”은 “잿빛 털옷”으로 손질합니다.

 이제 기러기 보르카는 어머니한테서 깃털옷을 받습니다. 보르카도 헤엄치기를 익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보르카네 언니 오빠는 보르카를 놀립니다. 깃털 없이 옷을 입었다면서 놀립니다. 가만히 누워 그림책을 함께 보는 아이한테 말합니다. ‘너한테 동생이 태어났을 때 이렇게 놀리지 않겠지? 동생이 뭘 잘못해도 함부로 놀리면 안 돼요. 엄마 아빠가 너를 사랑해 주듯이 너도 동생을 사랑해 주어야 해요. 엄마 아빠가 너한테 밥을 먹여 주듯이, 너도 동생한테 밥을 먹여 주어야 해요. 엄마 아빠가 너를 업어 주듯이, 너도 동생을 업어 주어야 해요.’

 아프거나 힘들거나 힘이 여린 동무나 동생이라면 마땅히 감싸거나 돌보거나 더욱 사랑해야 할 텐데, 보르카네 언니 오빠는 참 못되었습니다. 게다가, 보르카네 엄마랑 아빠랑 너무 바쁜 탓에 보르카를 제대로 건사하지 못할 뿐더러, 보르카네 언니 오빠가 보르카를 따돌리는 줄 깨닫지 못하는군요. 외로운 아이를 달래지 못하고, 마음이 좁은 아이들을 다스리지 못할 만큼 무슨 일에 그리도 바빠야 할까요. 15쪽에서도 몇 군데 글월을 손질해야 합니다. “이제 어린 기러기들은 날기와 헤엄치기를 배우게 되었습니다.”는 “이제 어린 기러기들은 날기와 헤엄치기를 배웁니다.”나 “이제 어린 기러기들은 날기와 헤엄치기를 배울 때가 되었습니다.”로 손질하고, “상당(相當)히 뒤처졌지요.”는 “몹시 뒤처졌지요.”로 손질합니다. 15쪽 한켠에는 ‘상당히’라 나오다가 곧바로 ‘몹시’라고도 나옵니다. 알맞게 잘 쓴 대목이 있으나, 제대로 못 쓴 대목이 나란히 있군요. 16쪽에서는 “날은 점점(漸漸) 추워지고”라 나오는데 “날은 차츰 추워지고”나 “날은 자꾸 추워지고”로 손질합니다. “먹이 구(求)하기가”는 “먹이 얻기가”로 손질해 줍니다. 아이한테 그림책을 읽힐 때에는 이래저래 얄궂다 싶은 글월은 모조리 손질해서 읽습니다. 책에 적힌 그대로 읽힌다 해도 나쁘지 않을 테지만, 아이가 어릴 적부터 얄궂은 글월을 익숙하게 듣도록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림책을 읽으며 볼펜으로 죽죽 줄을 긋고는 새 낱말이나 글월을 적어 넣습니다. 아직은 아이가 어려 아빠가 읽어 주지만, 나중에 아이가 스스로 읽을 나이가 되면, 옳고 바른 글월을 스스로 소리내어 읽도록 이끌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옛말에도 있듯이, 세 살 버릇이 여든을 가잖아요. 세 살 적 듣는 말이 여든까지 갑니다. 바로 우리 아이가 옛말에 일컫는 세 살입니다. 세 살 아이가 좋은 그림책 하나를 아빠랑 함께 읽으면서 좋은 글월과 좋은 목소리와 좋은 잠자리에서 좋게좋게 맞아들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좋은 마음을 가꾼다고 느낍니다.

 다음 쪽을 넘깁니다. 그림책을 읽는 아빠는 생각했습니다. 틀림없이 이 언니랑 오빠들, 또 엄마랑 아빠는 보르카를 내버려 두고 저희끼리만 날아가겠다고.

 참말 모두들 보르카만 두고 날아갑니다. 보르카는 외롭고 슬퍼 홀로 웁니다. 그러다가 마음씨 좋은 개하고 뱃사람을 만납니다. 다시금 마음씨 따뜻한 사람을 만나고 마음씨 너그러운 동무를 처음으로 만납니다.

 보르카를 낳고 기른 어버이 또한 마음씨가 나쁜 기러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더욱 따뜻하고 너그러이 품에 안지 못했습니다. 제 아이한테 하나하나 이름을 지어 주었으면서, 어찌 제 아이를 잊고는 따뜻한 곳을 찾아 날아갈 수 있나요. 고작 깃털옷 한 벌 뜨개질해서 마련한 다음 싹 잊을 수 있나요.

 보르카는 외로운 가운데 홀로 꿋꿋하게 살아갑니다. 혼자서 씩씩하게 살아가며 드디어 마음과 뜻이 맞는 사랑스러운 벗을 만납니다. 물보다 짙은 피라지만, 물만큼 짙지 못한 피가 되었어요. 앞으로 보르카가 좋은 짝꿍을 만나 새 보금자리를 튼다면, 그때에 보르카는 어떠한 삶을 꾸리려나요. 보르카가 어린 날 맞이했듯이 살아가려나요. 보르카가 어린 날 모질게 겪은 만큼 한결 따사로우며 너그러운 매무새로 살아가려나요. 보르카를 잊어버린 어버이랑 언니 오빠는 앞으로 어떠한 삶을 일구려나요. 혼자서 춥고 외로워 벌벌 떨다가 죽을지 모르는데, 이렇게 한식구를 쉬 잊어버리는 기러기들이 꾸릴 삶은 어떤 모습이려나요.

 이제 그림책을 덮습니다. 그림책을 보는 내내 아이는 ‘해’하고 ‘달’ 모습만 찾습니다. 아이는 다른 그림책을 볼 때에도 해랑 달을 몹시 사랑합니다. 동글동글한 그림을 좋아하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반토막 달을 보거나 날씬한 달을 보면서도 ‘달’인 줄 압니다. 시골집에서 살아가며 밤마다 달을 보니까 그림책에 나오는 달을 또렷이 깨닫는다 할 텐데, 아이 둘레에서 쉬 마주하는 사람과 삶과 자연과 물건을 그림책에서 마주할 때에 한결 살가우며 가까이 받아들인다 할 만한가 싶습니다.

 그러니까 그림책에서 제아무리 따사롭고 넉넉한 사랑을 다룬달지라도, 나 스스로 살아가는 보금자리에 사랑이 없다면 그림책은 덧없습니다. 아이와 함께 즐거운 나날이 아니라 한다면, 제아무리 즐거운 나날 가득한 그림책을 읽힌들 부질없습니다. 그림책이든 동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인문책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책으로만 즐거울 수 없고, 책으로만 아름다울 수 없으며, 책으로만 훌륭할 수 없어요. 내 삶부터 즐겁고 아름다우며 훌륭해야 합니다. 나부터 내 보금자리에서 따사롭고 너그러우며 맑게 빛나야 합니다. 그림책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는 여러 이야기와 알맹이를 조곤조곤 들려주는데, 이런 얘기 저런 삶을 낱낱이 헤아리거나 곱씹으며 고운 사랑과 너른 믿음을 익히도록 이끄는 일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이런 사랑이든 저런 믿음이든 가르치거나 이야기하기 앞서, 부디 내 삶자리에서 내 살붙이랑 이웃이랑 동무하고 오순도순 어깨동무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몇 가지 낱말을 더 손질해 봅니다. 18쪽에서 “비가 내리게 되었습니다.”는 “비가 내립니다.”로 손질하고, “떠날 때가 온 거예요.”는 “떠날 때가 왔어요.”로 손질하며, “침침(沈沈)한 하늘”은 “어두운 하늘”이나 “어슴프레한 하늘”이나 “어두컴컴한 하늘”로 손질합니다. 20쪽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始作)했거든요.”는 “비가 내렸거든요.”로 손질하고, 22쪽에서 “기러기라는 걸 알고는, 개는 짖는 걸 멈추고”는 “기러기인 줄 알고는, 개는 더 짖지 않고”로 손질하며, 23쪽에서 “어찌나 피곤(疲困)한지”는 “어찌나 고단한지”나 “어찌나 지쳤는지”로 손질합니다. 24쪽에서 “매칼리스터 선장의 배였습니다.”는 “매칼리스터 선장이 모는 배였습니다.”로 손질하고, “항구를 떠나기로 결정(決定)했습니다.”는 “항구를 떠나기로 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26쪽에서 “파울러는 물론(勿論)이고”는 “파울러를 비롯해서”로 손질하고, “곧 친(親)해졌어요.”는 “곧 가까워졌어요.”로 손질하며, “대신(代身)에 맛난 음식을”은 “그리고 맛난 음식을”로 손질합니다. 28쪽에 ‘궁리(窮理)했습니다’는 ‘생각했습니다’로 손질하고, 29쪽에 “선장은 보르카를 울타리 위에 내려놓았습니다.”는 “선장은 보르카를 울타리 안쪽에 내려놓았습니다.”로 손질합니다. 29쪽 그림을 보아도 선장은 팔을 뻗어 보르카를 울타리 ‘안쪽에’ 내려놓는 모습인데, 번역 글월은 ‘위에’로 되었으니 잘못입니다. 31쪽에 “전(全)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는 “하나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로 손질하고, “특(特)히, 퍼디넌드라는 기러기가 친절(親切)했습니다.”는 “누구보다 퍼디넌드라는 기러기가 따뜻했습니다.”로 손질하며, 32쪽에 “기러기를 보게 될 겁니다.”는 “기러기를 볼 수 있습니다.”로 손질합니다. 31쪽을 보면, “큐 가든(garden)에는 온갖 이상(異常)야릇한 새들이 다 있었거든요.”라는 대목이 있으나, ‘이상야릇한’이라는 낱말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서는 “온갖 새들이”나 “온갖 빛깔 새들이”나 “온갖 모양 새들이”라 적어야 알맞다고 느낍니다. ‘큐 가든’이라는 이름 또한 ‘큐 공원’쯤으로 고쳐야겠지요.

 투박한 듯하면서 투박하지 않고, 어두운 듯하면서 어둡지 않으며, 슬픈 듯하면서 슬프지 않은 그림책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라고 느낍니다. 사랑스레 즐길 만한 그림책을 더할 나위 없이 사랑스레 즐길 수 있도록 1996년에 처음 나온 그림책 번역을 앞으로 언제가 되든 아무쪼록 차근차근 따사롭게 어루만져 다시 내놓을 수 있기를 빕니다. 아이도, 이웃도, 자연도, 마을도, 살림살이도, 책도 외롭지 않도록 보살펴 주셔요. (4343.11.21.해.ㅎㄲㅅㄱ)


― 깃털 없는 기러기 보르카 (존 버닝햄 글·그림,엄혜숙 옮김,비룡소 펴냄,1996.2.1./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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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랑 고양이 -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녹스 사진, 사라 닐리 글, 한희선 옮김 / 예담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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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드디어 리뷰쓰기가 되네... 이틀 만이다 ㅠ.ㅜ 

 


 찬찬히 다가서면 누구나 찍는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9] 녹스·사라 닐리,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예담,2007)



 글을 쓰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글을 씁니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그림을 그립니다. 춤을 추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춤을 추고, 노래를 하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노래를 부릅니다. 잘 써야만 쓸 글이 아니고, 잘 그려야만 그리는 그림이 아닙니다. 잘 추어야만 출 춤이 아니며, 잘 불러야만 부를 노래가 아닙니다. 누구나 글이든 그림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즐깁니다. 제 깜냥껏 즐기고 제 마음껏 누립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습니다. 사진찍기로 돈벌이를 하려는 사람이라면 스스로 좋아하는 사진을 찍기도 할 테지만, 스스로 좋아하지 않더라도 돈을 치를 테니 찍어 달라 하는 사진을 자주 찍어야 합니다.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모습에다가 스스로 좋아하지 않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담아내며 돈을 버는 삶이라지만, 뜻이 있으면 ‘나 스스로 바라지 않는 사진찍기’를 하면서 얼마든지 ‘한결 나은 사진길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늘 새롭게 거듭나는 사진찍기를 선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벌이 사진을 하면서 언제나 새롭게 태어나거나 빛나는 사진을 내놓는 사람은 무척 드뭅니다.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돈도 벌어야 먹고산다 할 만하지만, 사진은 돈이 아니요, 돈이 있다 해서 사진을 즐길 수 있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라 할 텐데, 돈벌이에 굳이 마음을 쓰지 않아도 될 살림살이라 하더라도 사진을 한껏 즐기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돈벌이에서는 홀가분하지만, 사진찍기에서는 홀가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스스로 좋아하는 길을 꿋꿋하거나 씩씩하게 걷는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야말로 신나게 사진을 찍기는 하더라도 열매를 싱그러이 맺는 사진찍기로 이어가지 못해요.

 나 스스로 참다이 글쓰기를 즐기고 사진찍기를 즐기자면 얽매여서는 안 됩니다. 내 글감은 나 스스로 내 좋은 삶에서 찾고, 내 사진감은 내가 손수 땀흘리는 내 삶에서 얻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이야기를 글로 쓴다 할 때에, 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사랑편지를 쓴다 할 때에, 나 스스로 내 마음을 들이면서 써야 가장 아름답습니다. 누군가한테 써 달라 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 더 멋들어지게 이야기를 붙이고 멋진 글씨로 적바림해 줄 수 있어요. 그러나, 삐뚤빼뚤한 글씨로 앞뒤가 잘 안 맞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나 스스로 내 사랑이한테 편지를 적바림해서 보낼 때만큼 애틋하거나 아름답지는 못하다고 느낍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모습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도 그래요. ‘사람 사진 대단히 잘 찍는다’는 이한테 내 사랑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달라 맡길 수 있겠지요. 참 예뻐 보이도록 사진 한 장 얻을 수 있어요. 그러면, 이렇게 해서 얻는 사진 한 장이 나한테 가장 기쁘거나 고맙거나 반갑거나 살가운 사진으로 자리매길 수 있을는지요. 무언가 이래저래 잘 안 맞는 사진을 어설프거나 어수룩하게 찍으면 내가 아낄 만한 사진이 안 될는지요.


..  우리 주변에는 존재감조차 알아차릴 수 없는 방랑 고양이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일부러 그들을 무시하기 때문이 아니라, 좀처럼 그들과 마주칠 일이 없기 때문이에요 ..  (머리말)


 사진책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를 읽습니다. 도시에서도 가장 번들거린다 할 만한 미국땅, 여기에서도 뉴욕에서 살아가는 골목고양이 삶을 좇아 사진으로 하나둘 담아내어 엮은 사진책입니다.

 저는 미국은 밟아 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밟을 일이 없다고 느끼는데, 이 가운데 뉴욕 같은 데는 더더욱 밟을 일이 없다고 느낍니다만, 이곳에도 골목고양이가 살아가는구나 하고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를 읽으며 깨닫습니다. 하기는, 미국에도 거지가 있고 뉴욕에도 거지가 있지 않겠습니까. 미국에도 나무가 자라고, 뉴욕에도 나무가 자랄 테지요. 버려지는 밥쓰레기가 넘칠 테고, 이 밥쓰레기를 뒤지며 배를 채울 골목고양이는 어김없이 있겠지요.

 골목고양이는 뉴욕뿐 아니라 서울에도 있습니다. 큰도시에도 있고 작은도시에도 있으며 시골에도 있습니다. 고양이는 어디에서든 살아갑니다. 개도 어디에서든 살아갑니다. 까치도 까마귀도 비둘기도 매한가지예요. 사람들이 아무 데나 멋모르고 풀어 놓는 바람에 씨가 자꾸 퍼지기도 한다지만, 살 터전인 자연이 차츰 사라지거나 밀리기 때문에, 이제는 뭇 짐승들조차 도시로 몰려들어 보금자리와 먹이를 찾을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으레 도시에서 이런 짐승들이 어찌 살아가나 생각하지만, 짐승들은 먹을거리와 잠자리를 찾아 사람과 마찬가지로 도시로 몰려듭니다. 사람들은 일자리와 잠자리와 짝꿍을 찾으러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웃이나 동무를 거의 아랑곳하지 않는데, 사람들 스스로 사람을 살피지 않듯이 사람들은 으레 이웃 짐승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골목고양이가 있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골목비둘기가 있든 말든 마음쓰지 않습니다. 골목개가 떠돌든 말든 쳐다보지 않아요. 아니, 쳐다보거나 알아볼 수 없습니다. 거의 언제나 자가용으로 움직이니까요. 자가용이 아니더라도 길거리를 거닐 일이 드뭅니다. 버스나 지하철을 타면서 골목고양이를 마주할 틈이 없습니다. 불빛 밝은 길을 거닐면서 달을 올려다보지 못할 뿐더러 별조차 헤아리지 못하는 판에, 길바닥 골목고양이 한 마리를 바라보지 못할 수밖에 없는데, 어쩌다 마주치더라도 몇 분 동안 느긋이 마주보지 않아요.


.. 아무리 뒷골목에 숨어 지낸다 해도 동물들(말 나온 김에 사람들까지 포함해서 누구도)은 사람이 모는 자동차로부터 결코 안전하지 않다 ..  (맺음말)


 사진책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는 사진쟁이 녹스 님이 골목고양이를 무척 가까이에서 마주하며 사진을 한 장 두 장 담아내었기에 일구었습니다. 멀거니 떨어진 채로는 일굴 수 없는 사진책입니다. 골목고양이하고 이웃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저절로 찍고 저절로 엮는 사진책입니다.

 사진쟁이 녹스 님이 골목고양이가 아닌 연예인을 이웃이나 동무로 삼는다면, 가까운 연예인 삶을 살뜰히 사진책 하나로 내놓겠지요. 당신 어머님이나 아버님하고 가까이 지낸다면 당신 어머님이나 아버님 삶을 사진책 하나로 곱게 영글어 놓을 테고요. 꽃을 사랑한다면 꽃 이야기를 사진책으로 엮습니다. 빌딩을 사랑한다면 뉴욕땅 우람한 빌딩숲을 멋들어지게 담을 테지요.

 그러니까, 사진이란, 누구나 찬찬히 다가서면 얼마든지 찍어서 이루는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찬찬히 다가서지 못할 때에는 아무도 이루지 못하는 문화이거나 예술입니다. 찬찬히 다가서는 넋이기에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이야기 하나 알알이 예쁘게 엮어서 선보입니다. 찬찬히 다가서면서 어깨동무를 하거나 손을 맞잡는데,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사진을 찍든 사랑스러울밖에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꾸만 잊어버리는데, 무슨 일을 하든 무엇보다 살며시 손을 내밀어 함께 어우러지려고 마음을 기울여야 합니다. 부동산 일을 하든 편의점 알바를 하든 함께 어우러지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 때에는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교사 노릇을 할 생각이든 공무원 구실을 할 생각이든, 내 마음을 바르게 써야 하고 곧게 가다듬어야 합니다. 문화재를 사진으로 찍을 때에만 다소곳한 매무새여야 하겠습니까. 인간문화재를 사진으로 담을 때에만 얌전한 몸가짐이어야 할까요. 골목개 앞에서든 골목고양이 앞에서든 똑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내 사진감 앞에서 언제나 다소곳하거나 얌전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좋아해야 합니다. 내 사진감을 믿어야 합니다.

 노래쟁이는 노래를 믿고 춤쟁이는 춤을 믿습니다. 글쟁이는 글을 믿고 그림쟁이는 그림을 믿습니다. 사진쟁이는 사진을 믿습니다. 서로서로 믿으면서 한동아리가 됩니다. 문화를 하든 예술을 하든 바뀔 수 없는 밑바탕이고, 살림을 꾸리는 자리에서도 흔들릴 수 없는 밑틀입니다. 내 사랑을 바쳐 내 고운 님하고 한몸 한마음으로 어우러지는 자리에서 빛나는 열매 하나 달콤하게 맛보며 나눕니다. 한국땅에도 골목고양이나 집고양이를 사진으로 담는 사람이 무척 많은데, 아직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처럼 살갑거나 사랑스레 사진이야기 꽃피우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4343.11.21.해.ㅎㄲㅅㄱ)


― 도시를 누비는 작은 사냥꾼, 방랑 고양이 (녹스 사진,사라 닐리 글,한희선 옮김,예담 펴냄,2007.7.27./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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