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리말(인터넷말) 7] MEMBERS LOGIN

 처음 인터넷을 배우는 어린이나 어르신도 이제는 ‘LOGIN’이나 ‘login’을 알아보겠지. 그런데 ‘로그인’이란 무엇을 말할까. 한자말로는 ‘접속(接續)하기’로 옮기는 ‘로그인’을 우리 말로 하자면 ‘들어가기’가 되지 않을까. 그렇지만 오늘 이 나라에서는 ‘들어가기’라는 낱말을 써 달라고 바라기 몹시 힘들다. 우리가 날마다 쓰지만, 바로 이렇게 날마다 쓰는 말글을 아끼거나 사랑해 달라고 바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들어가기’까지는 못 바라더라도, 굳이 알파벳으로는 적지 말고 한글로나마 적어 주기만을 바라야지 싶다. 한글조차 안 쓰거나 못 쓰거나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아주 많기 때문에, 옳거나 바른 말은 거의 꿈을 꾸지 못한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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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 

외할머니댁에서 뒹굴며 놀기. 발이 예쁘다. 

 

아빠 흉내 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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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9. 

일산에서 살아가는 외할버지 생일잔치에서 할아버지 할머니 사이에 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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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밥을 먹는 마음


 일곱 살부터 열대여섯 살 아이들이 빙 둘러앉은 자리에서 “이오덕 선생님이 아이들과 어른들한테 들려주던 ‘말을 살리는 글쓰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저는 이오덕 선생님 제자가 아니요, 이오덕 선생님이 만들어서 꾸린 한국글쓰기교육연구회(글쓰기회) 회원도 아닙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돌아가신 다음 당신 글을 갈무리한 사람일 뿐입니다. 어쩌면 이오덕 선생님보다 이오덕 선생님 글을 훨씬 많이 꼼꼼히 읽어야 한 사람일는지 모릅니다. 게다가 이오덕 선생님이 손으로 원고지나 공책이나 수첩에 꾹꾹 눌러쓴 글을 하나하나 새겨 읽으며 타자로 옮겨야 한 사람입니다.

 이오덕 선생님이 살았을 때 당신이 손수 적바림한 걸그림을 바라봅니다. 이렇게 정갈하게 글씨를 쓸 수 있다니 놀라우며 아름답습니다. ‘선생님 손글씨’는 어느 분 언제 글씨라 할지라도 이렇게 흔들리거나 치우치거나 날리지 않아야 한다고 새삼 느낍니다. 차분하면서 따스할 수 있어야 비로소 선생 노릇을 하겠다고 깨닫습니다.

 나이가 열 살씩 벌어진 아이들을 한 자리에 앉히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란 어렵습니다. 더구나 인터넷게임이나 막놀이나 막밥에 익숙한 아이들한테 삶과 말과 꿈과 일과 땀과 흙과 밥과 책이 살가이 얼크러진 글쓰기를 이야기하기란 참 까마득합니다.

 아이들과 나눌 이야기를 생각해야 하는데, 이른아침부터 낮까지 집일로 쉴 틈이 없습니다. 쌀을 씻어 불리고, 쌀을 냄비에 담아 불을 넣고, 반찬을 마련하고, 밥상을 차리고, 아이한테 밥을 먹이고, 먹은 밥그릇 치우고, 이불을 걷어 털고, 비질을 하고, 걸레질을 하고, 제자리에 놓고, 아이 쉬를 누이고, 아이하고 복닥이고 하다 보니 빨래할 겨를마저 없습니다. 아침에 아이가 깨어나서 저녁에 아이가 잠들 때까지 집일 하는 사람은 책 한 권 한 줄이나마 훑을 말미를 얻지 못합니다.

 아이들 앞에 서서 말문을 엽니다. 한 시간 동안 말문이 닫히지 않습니다. 문득, ‘아줌마들 수다’가 떠오릅니다. 아줌마들치고 할 말 없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할 말이 없을 수 있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할 말이 잔뜩 있을 아줌마들한테서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사람은 퍽 드뭅니다. 말뜻을 살피면 “쓸데없이 말수가 많음”을 ‘수다’라 합니다. 아줌마들이 쓸데없이 말수가 많나 하고 갸우뚱갸우뚱하는데, 아줌마들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하지 않는 아저씨들이 엉뚱하게 이런 말을 짓지 않았을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수다는 수다입니다. 쓸데없이 늘어놓는 말이란 수다입니다. 그러니까, 아줌마들이 터뜨리는 말물결이란 ‘이야기꽃’이라 이름을 붙여야 옳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줌마들은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제대로 들어 주고 제대로 말해 주는 이야기동무를 사귀고 싶습니다. 어찌해야 밥을 한껏 맛나게 차리고, 어찌해야 집 일손을 조금 줄이며, 어찌해야 말썽쟁이 아이들이 착하고 참다이 크도록 돌보면서 어버이로서 더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말꽃을 피우고 싶습니다.

 아버지란 자리에 선 사람치고 집일에 마음쓰거나 몸쓰는 이는 아주 드뭅니다. 그야말로 아주아주아주아주 드뭅니다. 집에서 날마다 아침저녁으로 밥을 차리는 아버지는 몇 사람이나 될까요. 온 식구 먹을거리를 홀로 맡으며 날마다 차리는 가운데 도시락을 싸고 주전부리를 마련할 줄 아는 아버지란 몇이나 될는지요.

 밥 하나를 놓고도 아버지가 집일을 제대로 하는 모습을 볼 수 없습니다. 빨래는 어떨까요. 청소는 어떻지요? 아이키우기는 어떠한가요?

 아픈 옆지기가 깊은 밤에 혼자 보던 영국연속극 하나를 함께 봅니다. 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 얘기입니다. 아이 어머니는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경찰차가 들이받아 그만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둡니다. 아이 아버지는 바깥일(사진찍기)에만 마음을 썼을 뿐, 네 아이들이 어떤 동무하고 사귀고 무엇을 좋아하며 어떻게 지내는지를 거의 알아채거나 헤아리지 못해 왔습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보다 큰 날벼락이 없겠지요. 아이들한테 밥을 먹인다든지 집안을 쓸고닦는다든지 옷을 빨아 입힌다든지 하는 일거리 가운데 무엇 하나 제대로 하는 일이란 없어요.

 날마다 밥을 차리고 치우며 먹이면서 생각합니다. 아니,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 옆지기가 몸이 안 아픈 사람이라면 내 삶은 어떠했을까 끔찍합니다. 이럭저럭 집일을 거든다고 깝죽거리지 않았나 싶고, 이냥저냥 집일을 거들기는 할 테지만 ‘내 좁은 속알머리’에서 허덕이는 주제에 잘난 척을 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아니, 깝죽거림이나 잘난 척은 아닐 테지요. 내 깜냥껏 참말 힘을 쓸 텐데, 막상 ‘아이 어머니’들이 얼마나 고되거나 벅차거나 힘들거나 힘겹거나 슬프거나 아픈지를 하나도 살갗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으리라 생각합니다. 아니, 받아들이기는커녕 느끼지조차 못하겠지요.

 반찬 한 가지 수월하게 금세 뚝딱뚝딱 마련하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들여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아주 드뭅니다. 아이 기저귀를 눈 감고 척척 후다닥 새로 갈아 주기까지 얼마나 숱한 손길이 가야 하는지 아는 아버지는 몹시 드뭅니다. 걸레 한 장으로 몇 평을 말끔히 훔칠 수 있는지 아는 아버지는 매우 드뭅니다. 한두 시간이 아닌 스물네 시간을 한 해 내내 아이랑 복닥이면서 아이랑 어떻게 놀고 아이랑 어떻게 어울리며 아이랑 무슨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좋을는지를 아는 아버지는 너무 드뭅니다. 너무 적고 너무 없으며 너무 모자랍니다.

 글쓰는 아버지 가운데 어머니 마음을 헤아리는 분은 몇이나 될는지요. 방송사에서 일하거나 신문사에서 일하는 남자들 가운데 여자들 넋을 살피는 이는 몇이나 있을는지요.

 선거권이 있다 해서 남녀평등인가요. 여자도 대학생이 되고 여자도 중장비 운전을 할 수 있으니 여남평등인가요. 아빠랑 엄마 성씨를 나란히 쓰면 여성해방이 되나요. 여자도 대통령이 되어야 여성해방이 이루어지나요. 여성할당제란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가요. 《할아버지의 부엌》 같은 책이 아름다우면서 기쁘고 즐거운 이야기가 가득하기란 일본이든 영국이든 미국이든 프랑스이든 한국이든 꿈 같은 일입니다. 그렇다고 “할머니 부엌” 이야기를 귀기울인다든지 눈여겨본다든지 얼싸안는다든지 하면서 담아낼 일꾼 또한 없습니다. “할머니 부엌”은 그저 마땅할 뿐이니까 아예 책으로 낼 생각조차 안 합니다. 책으로 낸다 한들 읽을 사람이나 있을까 모릅니다. ‘임금님 밥상’이 아닌 ‘우리 아이 밥상’을 차리는 “할머니 부엌” 이야기책을 엮도록 마음을 들이고 사랑을 쏟을 책마을 남자 편집자는 있기나 하나요. 아니, 여자 편집자 가운데에도 있기나 하나요.

 집살림 도맡으며 첫딸을 서른두 달째 보살피는 나날을 보내며 두 손바닥은 거칠다 못해 뭐에 찔려도 아픔을 못 느낄 만큼 딱딱해집니다. 아이는 아빠가 손바닥으로 제 손을 비비거나 얼굴을 쓰다듬으면 ‘아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빠는 아이한테 “벼리를 먹여살리고 키우느라 아빠도 손이 아파.” 하고 말합니다. 이때 아이는 눈알을 빛내며 “아빠 손 아야 해?” 하면서 앙증맞은 손으로 아빠 손을 쥐고는 자그마한 입을 모아 호호 붑니다. 날마다 아이랑 밥을 먹으면서 자꾸 딴짓을 한다고 골을 부리는 아버지입니다만, 날마다 새롭게 기쁜 마음으로 밥을 차립니다. 애 엄마가 아픈 사람이라 애 아빠가 삶을 비로소 배우며 더없이 고맙다고 느낀다고 말할 때에 내 둘레에서 이 얘기를 알아듣는 사람은 아직 세 사람만 보았습니다. 그나마 세 사람은 모두 할머니입니다. (4344.1.1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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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생 할아버지처럼 아파하자


 경상도 안동땅에서 오늘 하루도 두 끼니 밥만 먹으면서 조용하게 살아가는 권정생 할아버지는 우리들한테 이야기한다. “동화 몇 편 썼다고, 그거 대단하다고 보면 안 돼요.” 하고. 이 말을 제대로 곰삭여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는지 모르겠다. 또 하나.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이른바 ‘(학교) 선생님’이나 ‘(큰 신문사) 기자’나 ‘(글깨나 쓴다는) 작가’들한테도 한 마디 한다. “나보고 건강하게 오래 살라고 하는 건, 죽으라는 이야기보다 더 나쁜 이야기기예요. 나 대신 아파 주면 좋겠어요.” 하고. 이 말 또한 얼마나 알아들을까? 아마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리라. 그저 ‘늙은이가 이제 노망까지 들었나? 주책이야, 원!’ 하고 생각할 테지. 아니면 ‘권 선생님이 너무 아프니, 이런 말까지 다하시는구나’. 하고 생각하거나.

 뒤엣말을 먼저 생각하겠다. “나 대신 아파 달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가? 이는 바로 “아픈 사람 마음이 되라.”는 소리이다. “아픈 사람처럼 작은 목숨, 작은 일도 고맙고 소중히 여기며 낮은 목소리로 조촐하고 조용하게 살자는 이야기”이다.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도 모르는 말이 없는 큰 깨달음이 있는데, “어린이 마음이 되어야 하늘나라에 가고, 어린이처럼 깨끗한 사람이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렇지만, 이런 이야기를 머리로는 알아도 ‘어린이처럼 온몸 바치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주 드물다. 지식만으로 살아가는 일이 대단히 걱정스러울 수 있는 줄 뻔히 아는 사람들조차 ‘지식이 아닌 삶’과 ‘지식이 아닌 사랑과 꿈’을 보배처럼 여기지 않는다. 가난하고 힘겹게 사는 사람들하고 ‘한마음 한몸’이 되지 않고서는 내 이웃을 돕는 손길을 내밀 수 없다. 그저 불쌍해서 동전 몇 닢 던져 주는 사람은 잘난 멋에 불쌍히 여길 뿐이지, 참말로 돕는 손길이 아니다. 한결같이 몸과 마음 모두 아늑하고 폭신한 자리에 있으면서 입과 말로만 시끄럽게 ‘가난한 이를 돕자(서민 복지 대책)’는 이야기만 떠들면 무엇하겠는가? 환경을 지키자는 이야기를 입으로만 떠들거나 외치지 말자. 좋은 환경책을 읽자고 추천하지 말자. 이런 목소리 저런 책 하나 내세우지 말고, 나부터 내 돈벌이와 돈씀씀이를 줄이면 된다. 더 많이 벌 생각을 말고, 더 많이 쓸 생각을 버려야 한다.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다니며, 전기 먹는 기계를 덜 쓰거나 안 쓰면 된다. 자동차를 타야 한다고 해도 한 번 적게 타면 되고, 두 번 적게 타거나 한 주에 하루나 이틀쯤은 타지 않으며, 대중교통을 즐겨 타거나 자전거를 타야 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서 “공기가 나빠져 걱정이야”라든지 “지구온난화가 근심이야”라든지 “길에 차가 너무 많아”라든지 “공장이 너무 많이 생겨” 따위 헛지랄만 늘어놓으면 무엇하는가? 나 스스로 몸으로 살아내지 않고서 말로만 시끄럽게 늘어놓는 사람들한테, 권정생 할아버지는 곱디곱고 낮디낮은 목소리로 외친다. “여보게 사람들아, 한 달에 50만 원만 가지고도 넉넉히 하고픈 일 다하며 살 수 있는데, 도무지 얼마나 더 욕심을 부려서 많이 벌고 많이 쓰면서 이 땅을 더럽히고, 우리 마음과 몸까지 더럽히려고 하나?” 하고 말이다.

 첫째 이야기로 가자. “동화 몇 편 썼다고 대단히 보지 말라.”는 이야기는 덧없는 이름값에 놀아나지 말라는 소리이다. 부질없는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어, ‘이름도 감투도 없는 낮고 여린 사람 목소리와 삶’을 놓치거나 쉬 지나치거나 얕보거나 깔보는 못된 버릇을 버리라는 소리이다. 온누리 가장 아름다우면서 훌륭한 이야기는 바로 ‘쓸데없는 이름과 감투에 눈이 멀거나 머리가 빈 사람’들이 가장 깔보고 짓밟으며 비웃는 ‘못 배우고 더러운 일을 하는 사람’들이 일구는 삶에서 비롯한다. 이는 바로 권정생 할아버지가 쓴 수많은 글에 나타난다. 돈있고 이름있으며 힘있는 사람들 이야기 가운데 아름답거나 훌륭하거나 거룩하거나 참다운 이야기는 한 가지라도 있을까? 착하게 돈을 쓰는 부자도 틀림없이 있지만, 착한 부자란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는다. 착하게 지식을 나누는 사람도 어김없이 있으나, 착한 지식인이란 처음부터 앞뒤가 어긋난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떠한가? ‘권정생’이라고 하는 사람 하나만 볼 뿐, ‘권정생이라는 사람이 글로 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은 도무지 볼 줄 모른다. 그러니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늘 똑같은 소리를 되풀이할밖에 없다. “여보게 사람들아, 훌륭한 스승은 먼 데 있지도 않고 하늘나라에 있지도 않으며 바로 당신들 가까이에, 옆에 있는데, 왜 못 보고들 있는가? 왜 이렇게 죽은 이름에 매달려서 떠돌아다니고 싸돌아다니면서 자네들 덧없는 이름만 애써 쌓으려 하는가?” 하고 아파하면서 이야기한다. (4338.6.7.불.처음 씀/4344.1.17.달.말투 손질.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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